<60>
카일은 지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그저 멍하니 볼 뿐이었다.
아 물론, 내 어깨를 잡은 렌을 떼어 내는 일도 했다.
“공주님께 함부로 손대지 마십시오. 마법사.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겁니까.”
“……지금 그게 문제야?”
렌이 잠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누가 봐도 열받아 하는 얼굴이었다.
“아무튼 공주님이 나랑 둘만 있고 싶다고 했으니까, 나중에 보자. 영영 안 보면 더 좋고.”
그때였다. 렌이 내 손을 잡아 몸을 돌리더니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내 허리를 가볍게 감싸 안곤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법사!”
“공주님이 시킨 일 잘해!”
렌은 나를 살짝 들어 올린 채로 무슨 축지법이라도 쓰는 사람처럼 빠르게 카일에게서 멀어졌다.
“공주님, 무슨 일 있지?”
카일의 모습이 안 보일 때쯤 렌은 내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렌을 쳐다보았다.
“흠, 사람 없는 곳으로 가면 돼?”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렌이 나를 내려 주고는 내 어깨를 감싸 제 쪽으로 당겼다.
“근데 공주님 지금 급해?”
렌이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모르겠어.”
내 말에 렌이 씩 웃으면서 나를 어떤 건물 안으로 이끌었다.
이때까지 나는 내 머리에 침입한 이상한 시스템, 그러니까 마법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생활 마법서. 최대한 많이. 취직할 거거든.”
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고 앞을 보았다. 렌이 날 끌고 온 곳은 온갖 이상한 물품들로 도배가 된 상점이었다.
수정구슬도 있고, 해골도 있고 책도 있는 걸 보니, 마법 물품을 파는 상점인 것 같았다.
“……아. 팔 골드입니다.”
“자.”
상점 주인은 렌을 무슨 또라이 보듯 쳐다보았고, 렌은 그냥 평소처럼 싱긋 웃으며 상점 주인의 손에 금화를 올려 주며 쓱 얼굴을 그에게 들이밀었다.
렌은 당황한 상점 주인에게 특유의 싸늘한 톤으로 경고하듯 말했다.
“괜한 의심은 안 하는 게 좋을걸?”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쟤가 뭐라는 거야?
렌은 그대로 방긋거리더니 상점 주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럼 또 봐?”
“…….”
상점 주인은 얼굴이 완전 창백해진 채로 뒷걸음쳤고, 렌은 그러거나 말거나 책 제목을 쓱 훑더니 한 권을 남기고 아공간에 죄다 던져 넣었다.
“공주님 가자!”
그리고 세상 활기차게 내 손을 잡고 상점에서 나왔다.
물건 사는 데 꼴랑 이 분 걸렸다. 이건 뭐 편의점에서 물만 사서 나온 것도 아닌데……. 아무튼 렌은 즐거운 얼굴로 나를 골목으로 끌고 갔다.
“공주님 십 초만 기다려.”
렌은 그러더니 책을 촤라락 펼쳐 특정 페이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렌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서우리만치 책에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흠, 됐다. 공주님 이쪽으로.”
렌은 책을 탁 덮고는 내 머리에 제 손을 얹었다.
렌의 손바닥에서 하늘색의 희뿌연 빛이 쏟아져 나왔고, 곧이어 나는 얼떨떨해져 눈을 크게 떴다.
“어때, 공주님 이제 기분이 좀 나아졌어?”
렌이 씩 웃으며 내게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순식간에 개운해진 내 몸을 보았다. 그리고 내 머리칼에 손가락을 넣어 보았다.
막 목욕을 하고 나온 것처럼 개운했다.
“경계 안에 들어오고 계속 공주님 표정 별로였잖아.”
“……렌.”
“응? 내가 잘못 짚었어?”
다리에 힘이 쫙 풀렸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런 식이면 아무 생각 없이 의지하게 되잖아.
“미안해…….”
“…….”
렌은 주저앉아 버린 나를 따라 자기도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특유의 싸늘한 얼굴로 물었다.
“별로였어?”
렌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공주님 울어?”
렌이 내가 이상한 걸 알아차렸는지 제 얼굴을 내 얼굴에 가까이 들이밀고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 아니, 얘는 왜 자꾸 얼굴부터 들이밀어!
나는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 덕에 렌의 불만스러운 표정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렌, 있잖아.”
“응?”
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입술을 깨물며 전할 말을 신중히 골랐다.
지금 내게 벌어진 현상에 대해서 렌에게 털어놓아야 했다. 그런데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감도 안 왔다.
“나, 몸이 이상해.”
“…….”
그때였다. 눈앞에 붉은색의 경고창이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확인되지 않은 존재입니다.]-
-[위험인물로 판단합니다.]-
-[경고!]-
나도 모르게 귀를 막았다. 젠장 이거 뭔데!
“공주님 눈 감아.”
렌이 시키는 대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천천히 설명해 봐. 환각이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렌의 말대로 눈을 감으니 시끄럽던 시스템창이 조용해졌다.
“모르겠어. 마법 같은 건데, 그때, 마법사한테 공격당해서 죽을 뻔할 때 갑자기 나타났어.”
“갑자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에 대한 정보 같은 게 막, 머릿속으로 들어오고, 또 알 수 없는 글씨들이 눈앞에 나타나고, 내 생각을 읽는 것 같아. 나도 잘 모르겠어. 너더러 알 수 없는 생명체라고 하질 않나. 그리고 여태까지 조용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무슨 정보 수집 때문이라는데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어.”
렌이 조용해졌다. 내 이마를 훑고 있는 손이 아니었다면 사라진 줄 알았을 만큼.
“……공주님 나한테 손 줘 봐.”
렌의 말에 나는 눈을 꼭 감은 채로 양손을 올렸다. 그에 렌이 내 오른손을 잡곤 검지를 매만졌다.
그때 그 의문의 크리스털 반지가 끼워진 손이었다.
“공주님. 경계 밖에서 이상하다고 생각한 거 없었어?”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굳었다.
“우연히 발견한 연구원의 일기장이라든가, 지금 공주님 손에 끼워져 있는 비밀 통로의 열쇠라든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상상도 못 할 납치 경로를 다른 사람도 아닌 카일 펜디엄이 자세히 알고 공주님을 찾으러 왔다는 것도.”
그때였다. 치이익 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공주님, 아무것도 아니니까 눈 뜨지 마.”
렌의 다른 손이 내 이마를 짚었다.
“흠, 사실 우연치고는 너무 누가 일부러 밀어 넣은 것 같긴 했어.”
렌이 웃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꼭, 누가 판을 짜놓은 것 같단 말이지.”
치이이익. 계속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움찔거릴 수밖에 없었다.
“공주님, 눈 뜨지 말라고 나는 경고했어.”
렌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나도 본 게 있었기 때문이다.
“너, 또 팔 다 태워 먹는 거 아니지?”
“나는 공주님이 그 망할 왕자보다 나를 먼저 찾아서 기분이 아주 좋아. 사실 계속 더러웠거든.”
내 물음에 렌이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공주님은 그냥 집에 가고 싶은 거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렌의 억눌린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음.”
나도 모르게 눈을 번쩍 뜬 뒤 눈앞의 광경에 경악했다.
렌의 몸이 온통 검붉은색으로 변해 있었고, 멀쩡한 건 얼굴뿐이었다.
게다가 눈앞에 떠 있던 붉은색 창은 고장 난 것처럼 픽셀이 나가 있었다.
“공주님, 내가, 눈 뜨지…… 말랬잖아.”
렌의 커다란 손이 내 눈을 덮었다.
“너 미쳤어?”
“공주님, 나 집중 중이니까, 쉿.”
그리고 내 입까지 덮어 버렸다. 렌은 순식간에 나를 벽으로 밀쳤고, 내 몸 위에 그의 커다란 몸이 눌러 오듯 닿았다.
“내가 착각했어. 오백 년 전 술식이 실패한 게 아니야. 공주님을 소환한 다른 집단이 있어. 세뇌 마법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공주님한테 역으로 정보를 주입하는 건 오롯이 오백 년 전 술식으로는 불가능해.”
“웁! 웁웁!”
나는 있는 힘껏 렌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아야.”
나는 밀어내는 충격조차 고통스러운지 나직한 신음을 터뜨리는 렌을 어쩌지 못하고 가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공주님이 나 걱정하는 거 되게 기분 좋다. 막 간질거려.”
렌이 미친 사람처럼 푸흐흐 웃었다. 그런 렌의 웃음소리를 듣고 있자니 속이 바짝바짝 탔다.
도대체 얜 뭔데 나한테 이렇게 희생적으로 굴지?
아무리 내가 필요하다고 해도 본인 몸이 저렇게 망가지면서까지…….
“음, 그런데 있잖아, 공주님.”
“…….”
렌의 손이 드디어 내 입에서 떨어졌다. 렌은 천천히 내 뽀송뽀송해진 머릿결을 제 손가락 사이로 쓸어내렸다.
“이 술식 해제하고 나면 쫓아올 것 같은데.”
“……누가?”
“글쎄? 그거야 나도 모르지? 이 마법을 시전 한 사람? 음, 추측해 보면 아마 구 마탑의 잔당이지 않을까?”
렌이 마침내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눈앞에는 이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땀으로 범벅이 된, 심각한 상태의 렌만 바보처럼 생글생글 웃으며 우뚝 서 있었을 뿐.
“공주님 이제 아무것도 안 보이지?”
“……렌.”
“내가 공주님 몸에 걸려 있는 술식을 좀 바꿔 놨어. 잘했지? 응?”
화도 나지 않았다. 나는 그냥 가만히 렌을 쳐다만 보았다.
“……공주님 화났어?”
그리고 손가락으로 아주 살살 렌의 팔을 더듬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나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진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