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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머리카락 사이로는 애벌레가……. 잠시만, 뭐?
“으아아아아아악!”
“공주님!”
“악! 벌레! 악! 아아악!”
내가 비명을 지르자 렌이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 내 머리에 붙어 있는 벌레를 떼 마차 밖으로 집어 던졌다.
미친,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겠다고 지푸라기를 깔고 잔 게 원흉이었다.
“몸, 몸에 들어가진 않았겠지?”
내가 거의 울 것처럼 말하자 렌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몸에 정말 애벌레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려는 양손을 올렸고, 그걸 카일이 탁 잡아챘다.
“미쳤습니까?”
“공주님 깨니까 다시 멋있는 척하는 건가? 예의 바른 척? 교양 있는 척?”
렌이 카일을 또 살살 긁으며 자유로운 왼쪽 손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그러자 푸른색 마법진이 내 몸을 감싸더니 밖으로 조그만 벌레 한 마리가 튀어나왔,
“…….”
비명 소리도 안 나와 입만 벙긋거렸다.
“공주님 돌고래야?”
진짜 미안하지만 이곳이 너무 싫었다. 우리 집에서는 바퀴 한 마리 본 적이 없단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바퀴를 학교에서 처음 봤다.
나는 쭈그려 앉아서 얼굴을 가렸다.
하, 진짜 싫다. 차마 애들 눈치 보여서 말은 안 했지만 경계 밖에서는 차라리 괜찮았다.
사람도 안 살고, 시설이 낙후되어 있는 게 너무나 당연했으니까.
하지만 여기는 냉정하게 말해서 사람 사는 곳이었다.
심지어 제국.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그나마 제일 발전된 국가일 텐데 이 모양 이 꼴이라고?
진짜 너무 더럽고, 음식도 맛없고, 잠자리도 끔찍했다.
내가 교과서로 배운 중세 시대? 피부로 느끼는 거 하고 교육으로 배우는 거하고 같을 리가 있나!
왕궁? 전혀 기대되지 않았다. 왕궁이라고 해 봤자 똑같겠지.
암살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다.
“……잠시 이성을 잃었네.”
“잠자리를 더 살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카일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됐네, 지푸라기 속 벌레를 자네가 무슨 수로 살피나. 호들갑 떨어서 미안하네.”
내 말에 렌이 입을 삐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그러게 내 위에서 자라니까.”
“미쳤습니까, 마법사?”
“제정신인데?”
나는 하하 웃으며 로브를 푹 뒤집어쓴 채 마차 밖을 쳐다보았다.
드라마 보면 길 가다가 갑자기 기사들이 쳐들어와서 수색 좀 하자고 행패 부리던데 다행히 여긴 그런 건 없었다.
아무래도 날 죽이려는 게 극비이기도 하고, 나라도 넓고 길도 제멋대로 나 있으니 단속이 안 되겠지.
여기 CCTV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경찰 같은 행정 체제가 제대로 갖춰져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나도 모르게 비웃음이 비릿하게 나왔다.
아, 깔보지 말아야 하는데.
나는 괜히 현지인인 렌과 카일에게 죄책감이 들어 머쓱하게 웃었다.
“그래서 다음 목적지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카일의 말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내가 몇 시간 잤나?”
“열 시간 주무셨습니다.”
“…….”
할 말이 없었다.
“그대들은…….”
“제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공주님을 지키는 것의 제 의무니까요.”
전직 왕자치고는 말을 참 잘한다. 내가 왕자였으면 자존심 엄청 상할 텐데.
뒤에서 노려보고 있는 렌만 아니었다면 측은하게 카일을 봤을 거다.
아주 저러다가 한 대 칠 기세다.
“꼴값 떠는 거야?”
“…….”
“흐음, 계속해 봐. 어디까지 하나 내가 봐 줄게.”
렌이 내 옷을 탁탁 털어 주며 생글 웃었다.
“공주님 조금만 기다려. 생활 마법서는 제일 흔한 거니까 금방 배워. 보통 마법에 재능 없는 일 클래스 마법사들이 귀족들 수발들 때 쓰는 마법이니까. 정말 한 시간만 주면 돼.”
그리고 대놓고 카일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때, 유능하지?”
마치 돈도 내가 벌어 오고, 마법도 내가 쓰는데 카일은 입만 털었다는 걸 강조하듯이 말이다.
사실 맞는 말 같아서 할 말이 없었다.
조금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어차피 한 게 없는 건 나도 똑같으니까 말이다.
“하하, 응. 그래. 네가 짱이야.”
내 말에 렌이 뿌듯하게 웃어 보였고, 카일은 그 뒤에서 정색을 때렸다.
조금 불만을 담은 얼굴로 날 쳐다보는 것 같으나, 어쩔 수 없었다.
“유능한 건 맞지 않은가. 그런 얼굴로 쳐다보지 말게. 원래 발전하기 위해서는 유능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최고의 방법이라네.”
“……제 표정이 불손했다면 죄송합니다. 공주님.”
“아니네, 이해하네.”
***
나는 마차에서 내려 로브를 푹 눌러쓰고 주변을 살폈다.
“이대로 플로린스까지 삼 개월이면 간다?”
“일반인의 속도로는 그렇습니다.”
카일의 말에 반사적으로 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 렌의 등 뒤에 타면 금방 갈 것 같긴 했다. 아직도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며 앞으로 쏘아 나가던 그 충격적인 속도를 잊을 수가 없다…….
“공주님, 수틀리면 업고 달,”
“그 생활 마법서, 라는 것부터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네.”
내 말에 렌이 내게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말 왜 끊었냐고 핀잔주는 것 같았다.
나는 빙글 몸을 돌려 카일의 뒤로 숨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고개를 쭉 빼고 도시를 구경했다.
사실 이곳에 떨어지고, 나는 그냥 일반적인 로맨스 판타지나 서양 판타지 웹툰에 나올 법한 세계이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 세계는 너무…….
현실성이 넘쳤다.
마법과 검술은 존재했으나 문화 수준은 중세에 머물러 있는지 도시에서 좀 냄새가 났고, 내가 생각하는 남부 프랑스나 산토리니처럼 아기자기한 건물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이끼 낀 회색 벽돌이나 나무로 지은 건물들이 즐비해 있었고, 거리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행색은 남루했다.
뭐, 이 지역만 그럴 수도 있다.
여긴 수도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이 차림이 눈에 더 띄는군.”
내 말에 카일이 대답했다.
“안전한 곳으로 모신 후, 옷을 구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공주님. 미리 준비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매번 죄송할 것 없네. 예의상 하는 말인 건 알지만 자네가 그러면 오히려 내가 더 부담스러워져.”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착잡한 마음으로 카일을 쳐다보았다.
쟤가 저렇게 깍듯하게 나올수록 대하기가 더 곤란해졌다. 지금은 망국이라지만 한때 일국의 왕자였던 이가 다른 나라의 공주에게 저렇게 저자세로 구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만약 내가 조선 시대 때 왕자로 태어나 중국 황실의 막, 삼 황녀 이런 사람들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면 굉장히 자존심 상했을 것 같은데.
그나저나, 빌어먹을 호문쿨루스 시스템이 카일더러 ‘엄선해서 고른 제물’이라고 했는데 무슨 뜻일까?
뭔가 뒤가 구린 건 확실하다.
-[저희는 구원자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위험한 존재가 아닙니다. 〒▽〒]-
어쭈? 여태까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시스템창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그걸 내가 믿겠냐?
그런데 잠깐만.
나는 반사적으로 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머리를 붙잡았다. 분명히 저 시스템창이 처음 등장했을 때 내가 익숙한 형태로 진화한다고 했었다.
그렇다면 저 마법이 내 모든 생각을 읽고 있다는 뜻인가? 이 동네에 시스템창 같은 게 존재할 리가 없잖아?
-[안타깝게도 도우미는 일방적 내장 시스템입니다.]-
“공주님? 도망갈 땐 언제고 왜? 원하는 거 있어?”
렌이 굳어 있는 나를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왔다. 안 되겠다. 당장 렌한테 이걸 말을,
-[해당 생명체는 알 수 없는 생명체입니다. 위험하니 거리를 두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삐삐-. 내 생각을 정말 읽기라도 한 듯 눈앞이 새빨간 창으로 도배가 되었다.
“경, 미안하지만 내가 급하게 마법사와 할 이야기가 있어서. 내 옷을 좀 구해 주게. 그리고 삼십 분 후에 여기서 만났으면 좋겠어.”
“……공주님?”
카일이 당황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고, 그건 렌도 마찬가지였다.
“공주님, 귀신 봤어?”
나도 모르게 렌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와, 이건 다른 의미로 공포스러웠다. 귓가에 이명처럼 삐삐거리는 소리가 반복해서 울려 퍼졌다.
-[해당 생명체는 계획에 안배되지 않은 생명체입니다. 거리를 두는 걸 추천드립니다.]-
-[※퀘스트※
카일 펜디엄은 펜디엄 왕국의 유일한 왕족입니다.
그를 도와 제국의 극악무도한 황제 세드릭 로안을 해치우고 마탑의 코어를 탈환하세요!
보상: 귀환권]-
“…….”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놓았다. 툭 내게 잡혀 있던 렌의 팔이 떨어졌다.
렌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혼란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미친, 이게 뭐야.
뭐 어쩌라는 건데.
“공주님?”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공주님. 정신 차려.”
그때였다. 렌의 손이 내 양어깨를 콱! 쥐었다. 나는 멍한 얼굴로 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카일을 쳐다보았다.
-[카일 펜디엄을 도와 대륙을 제패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