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8화 (58/113)

<58>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내 행동에 얼어 있었다.

꼭 그렇게 경기를 일으킬 필요는 없지 않았나……?

뭔가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내가 남자한테 겁먹고 도망치다니!

물론 내가 뭐라도 되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나는 순식간에 차가워진 분위기를 어떻게든 무마해 보려 일단 웃었다.

“그래! 감히 칠 클래스 주제에 말이 많다! 이제 대충 내 사정에 대해 알았으니 됐네.”

내 말에 렌이 심각한 표정으로 날 보며 말했다.

“……공주님 진짜 이 새끼가 머리 때렸어?”

“마법사 도대체 언행을 조심하라 몇 번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공주님께서도 충분히 주의를 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카일이 대놓고 불쾌하다는 얼굴을 하고 렌을 노려보았지만 렌은 전혀 신경도 안 쓰고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갑자기 내가 혐오스러워진 건 아닌 것 같은데.”

렌은 또 엉뚱한 소리를 하더니 곧 한숨을 푹 내쉬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암살자 두 명의 뒷덜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의기양양하게 카일에게 내밀며 말했다.

“처리는 네가 해. 난 공주님이 싫어하는 일은 안 하고 싶어서.”

“…….”

“공주님의 검을 자처한 건 너잖아? 사람 죽이는 게 한두 번도 아닐 텐데 뭘 그렇게 하기 싫은 척해?”

나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덮었다. 쟤는 무슨 그런 소리를 태평하게 하고 앉아 있는 거야.

나도 저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은 은연중에 잘 알고 있었다. 일부러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굳이 짚어 준 까닭에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공주님, 못 들을 거 들은 얼굴 하지 마. 공주님이 죽이는 거 아니잖아? 앞으로 계속 이래야 할 텐데. 왕성에서는 공주님이 죽일 만한 인재가 없었던 모양이야? 다행이네.”

나는 멍하니 렌을 쳐다보았다. 표정에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채 내게 다시 한번 죽음을 입에 담아 상기시켰다.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렌은 내가 이 세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심지어 구 마탑에서부터 경계 안까지 함께했다.

내가 타인의 죽음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굳이 내게 저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겠어?

‘피할 수 없으니 익숙해져라.’

이거겠지.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 세계가 아니다. 이미 카일이 다른 암살자들을 처리하는 걸 묵과하지 않았나?

“아무나 좋으니 일단 처리하고, 최대한 빨리 플로린스로 넘어간다.”

“예, 공주님.”

***

렌은 주먹을 꽉 쥐었다. 분명 결계는 완벽하게 쳤다. 하지만 일반인, 그것도 핏덩이들을 고려하지 못한 건 그의 실수였다.

어떤 정신 나간 애새끼들이 감히 창을 넘어 공주를 훔쳐 갈 생각을 할지 그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지만 렌은 알고 있었다. 그 말도 안 되는 걸 예상하는 것조차 그의 능력이었다.

제국과 마탑에서 뜬금없이 공주를 노릴 거라는 걸 계산하는 것도 그의 능력이었다.

이로써 렌은 완벽히 자신이 능력 미달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제국은 그렇다 치더라도 마탑이 공주를 노리는 이유는 명확했다.

오로지 그 때문이다.

‘……그런데 마탑에서 공주의 존재는 어떻게 알았지?’

렌은 잠시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공주는 만들어진 존재다. 렌은 이미 공주를 소환한 주문 자체가 그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주문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세계를 대상으로 세뇌를 거는 마법이란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것만큼 말도 안 되는 마법이었으니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공주와 만난 건 불과 몇 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공주를 납치해 플로린스 왕국을 삼키려던 계획 자체가 세뇌 마법에 의한 결과였다.

등골이 쭈뼛 섰다.

왜 여태까지 눈치채지 못했지? 렌은 그의 공주님이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밝힌 덕에 공주에게 걸린 골치 아픈 마법이 뭔지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태까지 왜, 공주가 나타나기 전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인가.

쩌적.

뇌리에 깊게 박힌 무언가 깨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공주가 나타나기 전에는 마법이 시전되지 않았다. 하지만 렌은 이미 도망친 상태였고, 마탑은 당연하게 렌을 쫓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소 뜬금없이 공주를 죽이려 하고 있다.

이유는 뻔했다. 렌이 마탑에서 완전히 벗어날 돌파구로 공주를 찾을 게 뻔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구 마탑의 마법이 발현된 이후에 설계된 계획이었다.

그러면 그 전에는?

마법은 확실히 공주가 마탑에 소환되기 직전 발동했다.

‘……나는 분명히 공주님을 만나기 일 년 전에 마탑을 나왔다.’

렌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생각 없이 나왔을 리가 없었다. 아니, 생각 없이 나왔더라도 이후 계획을 그가 세우지 않았을 리가 없다.

공주는 그 전에 존재하지 않았으니 분명 그에게는 마탑에서 벗어날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왜, 왜 플로린스에 갔던 거지?

“……마법사, 지금 뭐 하는 겁니까?”

그때였다. 검집이 툭 그의 등 허리를 찔렀고, 렌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을 뻔했다.

“공주님을 깨울 작정입니까?”

카일이 마차에 기댄 채 진중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렌은 그제야 마나가 새어 나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공주님은 별 느낌도 없을 테지만. 원래 마나가 없는 몸이 아닌가?

또한 인간이 아니기도 하지.

“…….”

괜히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잠시 의문에 빠진 사이에 깨달아 버린 것이다.

마법은 잘못 발동된 게 아닐 확률이 높았다.

애초에 구 마탑의 마법사들이 죽기 전에 공주님, 아니. ‘시아’를 소환해 봤자 무슨 의미가 있었겠나.

지금 그녀의 능력을 봐서는 소환되는 동시에 멸망의 화마에 휩싸여 죽어 버렸을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단순한 ‘복수.’

최고의 복수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최고로 행복할 때 나락으로 끌어내리는 거겠지.

주문은 완벽했다.

“왕자님.”

“……정신이 나간 건가, 마법사?”

카일의 표정이 굳었다.

“공주님이 경계 밖에 있다는 건 왕자님만 알아?”

“그걸 내가 그대에게 답할 이유는 없다.”

“흠, 말이 다시 짧아졌네.”

렌의 눈이 반짝 빛났다. 시아가 봤다는 매개체는 카일을 주인공으로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매개체에는 시전자의 소망이 담겨 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카일 펜디엄’은 미리 그들의 주문 속에 안배되어 있던 인물이다.

그렇다면…… 오백 년 전 사람들이 카일 펜디엄의 존재를 어떻게 알았지?

시간을 멈추거나 과거로 돌리는 것은 충분한 마나만 있다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가 그렇게 만들어졌으니, 시간에 대한 마법은 렌이 제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미래는 필멸자, 아니. 절대자들조차 알 수 없다.

알았다면 멍청하게 세력 다툼이나 하고 있지 않겠지.

간혹, 몇 신전에서 내리는 예언 또한 충분히 바뀔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오백 년 전 태어나지도 않은 카일의 존재를 구 마탑에서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구 마탑의 잔재가 남아 있어……?’

렌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남아서 마법을 발동시켰을 가능성이 높았다.

카일 펜디엄은 현재 대륙의 중추라고 할 수 있는 제국을 무너뜨릴 명분이 충분하다.

가장 마지막으로 함락된 동쪽 국가이자 그나마 제일 강세하던 나라의 왕족이었으니까.

공주가 경계 밖에 있다는 정보도 시전자가, 아니. 이 정도 마법이라면 시전자들일 거다.

구 마탑의 잔재.

현 흑마법사라고 칭해지는 존재들.

‘그러니까, 렌. 내가 읽은 동화에서는 흑마법사가 나를 납치했고 용사가 구하러 와서 결혼하고 끝이었다니까? 괴물 나온다는 내용은 없었다고!’

기분이 나빠졌다.

렌은 저도 모르게 카일을 노려봤다.

“그저 그대에게 예를 갖추어야 할 가치를 느끼지 못해서이다. 공주님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얘기를 나눌 가치조차 없었겠지.”

“아, 그러시겠지. 대단한 몰락 귀족도 아니고 왕족께서 감히 평민 취급까지 당했는데 내가 곱게 보일 리가 있어?”

렌은 마차 밖을 살피며 방긋 웃었다. 아직 추격은 붙지 않은 모양이다.

암살자들을 죽이고, 대충 제국 중심부로 가는 상인에게 돈을 몇 푼 찔러주고 마차를 얻어 탔다.

이럴 줄 알고 경계 밖에서 돈 될 만한 걸 쓸어온 게 다행이었다.

“봐서 알겠지만 날 마탑에 팔아넘기려는 수작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왜 마탑에서 도망친 뒤 경계 밖에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마탑에서 도망친 건 맞군.”

렌은 지푸라기 사이에서 잘만 자는 시아를 흘끗 쳐다보았다.

도시에 도착만 하면 바로 생활 마법서를 구해 봐야겠다.

안 그래도 경계 안으로 들어서고 사람들의 생활 양식을 보고 짜증이 많이 난 모양인데,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줘야겠다고 마음먹은 참이었으니까.

경계 밖에서도 크게 짜증 내지 않았는데 제국에 들어와서 못 씻었다고 성질을 낸 거면 말 다 했다.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드는 거겠지.

“내가 도망쳐서 어떻게 살아남았게?”

렌은 짜증 나는 왕자를 앞에 두고 씨익 웃었다.

왕자의 수작은 뻔했다. 어떻게든 시아에게 렌의 흠을 보여 주어 정이 떨어지게끔 할 거다.

그의 정체를 낱낱이 밝혀 그녀에게 알린다든가.

“다 죽였지.”

“…….”

“정예 추적대. 삼백 명, 전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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