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7화 (57/113)

<57>

“제국과 마탑에서는 날 죽여서 플로린스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한 게 확실한가? 다른 의도는 없고?”

내 말에 두 남자가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를 악물었다.

“감히 공주님 앞에서 눈을 부라려? 건방지게.”

렌이 주먹으로 두 놈의 머리를 콩콩 내려치지 않았다면 대답 듣기는 요원했을 것 같았다.

놈들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 나 잘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에 옆에 있던 카일이 짜게 식은 눈으로 렌을 쳐다보았다.

렌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카일을 마주 보았다. 꼭 약 올리는 것만 같아서 나는 금방 렌에게서 손을 거뒀다.

“둘이 사이가 안 좋은 걸 봐서 암암리에 마탑과 제국이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는 말이 사실이겠군?”

내 말에 두 놈의 표정이 싸하게 굳었다. 그리고 나는 등골이 쭈뼛 선다는 느낌이 뭔지 이때 처음 알았다.

평소에 내가 살기에 노출될 일이 뭐가 있겠나?

해 봤자 엄마가 빨래 아무 데나 놨다고 밥주걱 들고 쫓아올 때나 느껴 봤다.

아, 엄마 생각 하니까 보고 싶네.

아무튼.

“……살기? 지금 살기 흘린 거야?”

그때였다. 렌의 눈이 보라색으로 빛나며 그의 등 뒤로 푸른색 불길이 치솟았다.

나는 이제 저게 ‘마나’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괴, 괴물!”

제국 쪽 첩자가 렌을 보며 경기를 일으켰다. 아니, 저는 뭔데 사람 보고 괴물이래?

“자네는 가정 교육을 독학으로 하셨나? 예의를 좀 지켜 줬으면 좋겠다만. 내가 이래 봬도 플로린스의 공주라 말이야. 그건 자네가 제일 잘 알지 않나?”

나는 최대한 고상하게 웃어 주었다.

그에 방 안에 있는 남자들의 시선이 전부 내게로 쏠렸다. 와중에 렌의 눈에서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음, 좀 비주얼적으로 무섭긴 하네. 어떻게 눈에서 빛이 나지……?

“묻는 말에나 대답하도록. 벌써 오 분이나 잡아먹었네. 내가 뭐 어려운 질문 했나?”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저놈들 반응으로도 답은 명확해졌다.

“그렇다면 더 쉬운 질문을 하지. 지금 마탑과 제국은 플로린스와 다른 국가의 동맹을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있군.”

“……죽는 한이 있더라도 말할 수 없다! 황제 폐하께 충성을!”

제국 쪽 암살자가 소리쳤다. 나는 반사적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 보는 분노한 얼굴로 검을 당장 뽑을 것처럼 꽉 쥐었다.

하지만 입을 연 건 카일이 아니었다.

“그럼 죽어야지? 공주님 죽여도 돼?”

“……렌. 참아 줄래?”

“쳇.”

렌이 안광을 빛내며 주먹을 위로 치켜든 채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아무리 봐도 저 폼은 마법사한테서 나올 수 있는 폼이 아니다.

저게 깡패지 마법사야? 카일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한 건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제 미간을 짚었다. 생각이 많아지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대들이 굳이 나를 경계하면서까지 찾아와 죽이려는 걸 보니 내 혼처가 이미 정해졌나 봐? 그게 아닌 이상 굳이 날 죽이는 게 실패로 돌아갔을 때 생길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이 타이밍에 왜 죽이려 들었겠어? 안 그런가?”

말하면서도 굉장히 그럴 법한 추론인 것 같아 스스로 감탄했다.

그렇지. 얘네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저걸 뻔히 알고도 날 죽이려고 했다는 건데.

“어디지?”

내 말에 두 암살자의 입이 한일자로 다물렸다. 아니, 그런데 이것들이. 대답하라니까. 내가 질문을 세 개나 했는데 하나도 대답 안 했다.

“보자. 플로린스 근처에 있는 미혼의 왕자가 있는 강대국이……, 라크란, 헤르만. 폐셰는 아무래도 종교가 달라 안 되겠고. 플로린스가 생각보다 꽤 보수적이지 않은가?”

내 말에 렌의 눈이 커졌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냐는 듯한 눈치였다.

나한테 벌어진 일은 조금 있다 셋만 있을 때 설명해 줘야겠다.

나도 이 현상에 대해 전문가인 렌한테 물어볼 필요성이 있으니까 말이다.

“흠, 그런데 아직 제국에게 먹히지 않은 나라들은 굳이 혼인으로 동맹을 엮을 필요도 없이 플로린스에서 손만 뻗으면 잡을 텐데? 어라, 그나저나 왜 플로린스는 가만히 있지? 이렇게 제국이 몸뚱이를 불리고 있는데 당장이라도 다른 나라들하고 더 공격적으로 동맹 맺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내 혼잣말에 대답한 건 다름 아닌 카일이었다.

“아직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지만 이미 물밑 작업은 들어갔을 겁니다. 공주님.”

나는 곰곰이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니, 그럼 뭐지?

“경. 혹시 제국 상황에 대해서도 빠삭하나?”

“…….”

카일이 어색하게 내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었다. 명색이 제국을 칠 야망을 품고 있는데 안 빠삭할 리가 있겠어?

“제국 상황이 대충 어떻지? 설마 제국 내에도 내분이 좀 있나?”

내 말에 카일이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북부의 대공이 최근 현 황제와 불화가 있다는 이야기는 있습니다.”

“그 북부 대공은 결혼은 했나?”

내 말에 카일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미혼입니다.”

북부라면, 대충 어디지? 수도와는 멀고, 제국의 경계이니, 플로린스와는 대략 마차로 일주일 정도의 거리다.

슬슬 납득이 가기 시작했다.

“아하? 그 북부 대공이랑 나랑 혼담이 오갔구나? 그럼 나를 구해 오는 용사랑 결혼시켜 주겠다는 건 개뻥이네?”

내 말에 렌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조용하게 말했다.

“공주님 말투.”

“아. 미안. 살짝 열받아서. 하하.”

카일이 당황한 눈치로 내 말에 부연 설명을 얹어 주었다.

“혼담은 공주님께서 납치되기 전에 오갔을 겁니다. 그런데 공주님이 갑자기 그렇게 납치를 당하셨고, 아마 대공 측에서도 공주님을 구한 용사를 죽이고 본인이 그 역을 자처할 가능성이 큽니다.”

나도 모르게 카일을 쳐다보았다. 그럼 그걸 이미 다 알고 날 구하러 왔다는 얘기잖아?

북부 대공이라는 놈이 자기 죽일 거 뻔히 알면서?

참, 얘도 렌한테 밀려서 그렇지 못지않은 또라이 기질이 있는 것 같았다.

분명 내 입장에서는 카일이 양날의 검이라는 건 알겠는데, 뭐라고 해야 하지.

자기 나라를 위해 목숨 거는 애를 내가 어떻게 외면하겠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이다, 아주.

지금도 제국의 암살자를 보는 저 착잡한 표정을 보아라.

“잠깐만, 그러면 마탑은 날 왜 죽이려고 하는데? 북부 대공이랑 나랑 결혼해서 제국 북부가 떨어져 나가면 걔네 입장에서는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 말에 렌이 대답했다.

“아니지 공주님. 마탑의 목적은 제국을 삼키는 건데 북부가 떨어져 나가면 손해잖아? 그리고 북부가 떨어져 나갈 때 멍청하게 자기 구역만 냉큼 떨어져 나가겠어? 적어도 일을 저지른 이상 수도까지 먹으려고 하겠지.”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그런데 마탑 입장에서는 일단 제국의 세력이 약해져야 황실을 치든 말든 하는 거 아니야? 걔들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인가? 적의 적은 친구라는 소리도 있잖아.”

“……그런 말이 어디 있는데?”

내 말에 렌이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차 싶었다.

아, 이제 속담 같은 거 쓰지 말아야겠다.

“감히…… 가아암히!”

그때였다. 땅바닥에 누워 있던 마법사가 눈을 까뒤집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았다. 하긴, 마탑 입장에서는 열받을 만한 발언이긴 했지?

“흠, 이래서 마탑의 개들은 안 된다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잖아. 네, 아니오, 라고 대답하라고 공주님께서 분명히 말했을 텐데 제국어를 못하는 모양이야?”

렌이 표정을 굳히고 특유의 간 떨어지는 얼굴로 속삭이듯 다정하게 말했다.

“실패작 주제에 어디서 감히 마탑의 고매한 마법사에게 명령이냐!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고 마탑주께 네놈을 넘기고,”

그때였다. 렌이 손가락 두 개를 뻗어 마법사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마법사의 입이 꾹 다물렸다.

“내가 지금 누구 옆에 있는지 아직도 파악이 안 되나 봐?”

렌은 뿌듯한 얼굴로 날 한 번 쳐다보더니 하하하 웃기 시작했다.

뭐야, 무섭게 왜 저래? 렌이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뒤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고는 내 허리를 확, 낚아채는 게 아닌가?

“마법사!”

렌의 행동에 카일이 소리를 높였지만, 렌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내 어깨에 제 턱을 얹고 말했다.

“이게 바로 동정심인 거지, 공주님? 불쌍해서 어쩌나. 마탑에서 막으려던 상황은 이미 벌어진 것 같은데.”

그리고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와중에 나는 뻣뻣하게 굳을 수밖에 없었다.

얘가 미쳤나. 어디서 허리를 막 잡고, 엉? 부담스럽다고!

“네가, 감히, 감히이이!”

“겨우 칠 클래스 주제에 뭘 감히, 야? 누가 보면 관리자인 줄 알겠어?”

렌이 푸흐흐 웃으며 내게 더 바짝 붙어 왔다. 나는 숨을 조용히 삼켰다.

렌이 조금만 더 못생겼다면…… 아니지, 여기서 더 못생겨진다고 해 봤자 아이돌 센터급이다.

아무튼 렌이 그냥 훈남 정도만 되었어도 어렵지 않게 장단 맞춰 줄 수 있었을 거다.

내가 볼 때 렌은 나와의 친밀감을 과시하며 저 마법사를 찍어 누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남자한테 이런 식으로 좀 진득하니 안겨 보는 건 처음이고, 심지어 현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미남이 내 뒤에서 이러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공주님?”

“으, 으아아악!”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공주님 어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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