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5/113)

<55>

“똑바로 설명하도록. 왜 당장 나가야 하지?”

젠장, 머리가 복잡해졌다.

“마법사. 내가 직접 묻지. 아이들이 말한 검은 로브의 남자와 너와 연관이 있나?”

“내가 대답할 것 같, 으악!”

렌이 손을 휙 들자 마법사의 허리가 반으로 뚝 꺾였다. 아무리 날 죽이려고 했지만 좀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끄아아아악! 나, 나는 모른다! 단지 마탑주께서 공주를 발견하는 즉시 사살하라고,”

응. 불쌍한 거 취소다.

아니, 그런데 잠깐만. 저게 공식적인 명령이면 마탑이랑 협상해서 코어 사용권 얻는 건 완전 물 건너간 계획 아니야?

‘망했는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카일 경. 빨리 똑바로 말하게. 왜 여기서 당장 나가야 하는 거지?”

내 말에 카일의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여유로운 표정으로 돌아와 태연하게 대답했다.

“마법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최소 두 집단이 공주님을 노리고 있을 겁니다. 한 명은 잡았지만 아이들이 말한 다른 자는 아직 잡히지 않았죠. 공주님을 죽일 작정이었으면 아마 아이들이 데려간 장소에 공주님이 없는 것을 보고 추적을 붙였을 겁니다.”

그에 렌이 말했다.

“음, 어느 정도는 맞아. 벌써 여관 밖에 다섯 명이나 와 있거든.”

그러더니 해맑게 웃는다. 다섯 명이 와 있든 말든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양.

“그런데 전부 소드 익스퍼트 하급 유저밖에 없어. 경계 밖에 출입하려면 최소 소드마스터급이어야 할 텐데. 소드마스터급 용사한테 익스퍼트 유저? 쟤들은 공주님이 경계 밖에 있었던 걸 모르는 모양인데? 결정적으로 공주님 옆에 내가 있는지도 모르고.”

렌의 시선이 카일에게 닿았다. 그리고 히죽 웃으며 물었다.

“넌 우리 공주님이 경계 밖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지?”

렌의 말에 대답한 건 다름 아닌 시스템창이었다. 정확히는 빌어먹을 호문쿨루스 부가 서비스지만.

-[시스템이 고의로 카일 펜디엄의 조력자에게 공주님의 위치 정보를 흘렸습니다. 카일 펜디엄은 구원자님의 훌륭한 수단 중 하나입니다. :)]-

렌의 말에 카일이 인상을 빡 찌푸리며 되물었다.

“우리…… 공주님?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공주님께,”

“지금 그게 중요해?”

카일은 평소처럼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 저는 그저 남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공주님을 찾았을 뿐입니다. 마법사.”

그럼 일단 생각해 보자. 마탑은 내가 경계 밖에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경계 밖에 나오려면 적어도 소드마스터급은 되어야 한다는 소리지?

그럼 쟤들은 날 구한 용사가 소드마스터급 이하라고 생각한 거고?

아, 벌써 머리가 아프다.

아무튼 쟤들이 노린 건 렌도, 카일도 아닌 나라는 건 확실했다.

“됐어. 대충 알 것 같으니까.”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내가 여기서 도망가야 한다는 사실은 아주 잘 알겠다.

그리고 날 죽이려는 적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도 알겠다.

머릿속에 강제로 주입된 정보로 봐서는 나는 완전히 고래 싸움에 낀 새우 그 자체였으니까.

내가 이곳에서 무사히 살아남으려면 변방의 소국 왕자와 정략결혼을 올리는 수밖에 없으나, 이미 결혼에 관해서는 렌이랑 약속을 해 버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도망이나 가지.”

“마법사와 함께 빠져나가신다면 제가 가서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카일이 대답했다.

“그거 되게 좋은 생각이야!”

그에 렌이 환히 웃으며 손뼉을 짝, 쳤다. 카일의 표정이 급속도로 구겨졌다.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 공주님을 납치해 도망갈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쳇.”

그나저나 이 괘씸한 꼬맹이들은 어쩐담. 평범한 귀족이나 왕족이었다면 날 납치까지한 꼬맹이들 목숨이야 신경도 안 쓰고 제 갈 길 갔겠지만, 일단 나는 평범한 귀족이 아니었다.

신경 쓰였다. 그것도, 매우.

“얘들아. 너네 할 줄 아는 거 뭐 있어.”

내 질문에 답한 건 아이들이 아니라 렌과 카일이었다.

“공주님?”

“공주님 이 새끼가 공주님 머리 때렸어?”

렌의 말에 마법사가 비명을 질렀다. 렌이 마법사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후려쳤기 때문이다.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 아이들만 버려두고 간다면 죽을 게 뻔한데 그냥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 말에 둘의 입이 쩍 벌어졌다. 뭔 개소리를 하고 앉아 있냐는 얼굴이었다.

나도 안다. 여기 세계 기준으로는 개소리라는 거.

내 말에 렌이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며 쥐고 있던 마법사의 머리채를 쿵! 놓아 버렸다.

“공주님, 친절한 거 알겠는데, 여기 나만 있는 거 아니잖아?”

그러고는 매서운 얼굴로 카일을 쳐다보았다.

적당히 하라는 것 같았다.

“공주님…….”

이대로 간다면 저들이 버림받을 걸 알기라도 하는지 아이들이 내 치맛자락을 꽉 붙잡았다.

“그 손 당장 놓아라. 감히 이분이 누군지 알고 그 더러운 손을 함부로 가져다 대지?”

그에 카일이 무섭게 호통을 쳤다. 그가 가져온 우유는 입에도 못 댄 채 식어 가고 있었고, 방 안에는 불편한 분위기만 계속해서 맴돌았다.

“하……. 부모님은 계시니?”

내 물음에 아이들이 고개를 저었다. 없다는 얘기 같다.

“형제는 있다며.”

내 말에 란이 대답했다.

“……전쟁으로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동생들이랑 저만 살아남았어요. 얘도 똑같아요. 저희는 메프란 사람이니까요.”

“…….”

“물론 저 같은 애들은 워낙 많고, 공주님께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살려 주세요. 제발요. 죄송해요…….”

란의 말을 들은 카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이곳은 원래 메프란 왕국의 땅이었습니다. 공주님. 아마 거짓은 아닐 겁니다.”

금방 누그러진 기색의 카일을 보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아무래도 자신과 같은 제국 정복 전쟁의 피해자 같으니까 감정 이입이 된 모양이다.

하긴 나라도 그러겠다.

나는 강제로 주입된 내 기억을 뒤져 보았다. 아무래도 ‘나’ 자체가 진짜가 아니니 생각보다 주문은 허술했다.

그러니까 자세히 말하자면 내게 걸린 마법은 일종의 대규모 세뇌 마법이었다.

마법이 발동된 것은 내가 마탑에 소환되기 바로 직전.

렌은 우연히 그 당시 막 만들어진 내 육신 옆에 있다가 휘말린 모양이고, 그 덕에 내 밑으로는 시종도 뭣도, 아무것도 없다 이 말이지.

“렌. 나 돈 좀 줘.”

“…….”

내 말에 렌이 얼빠진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나도 안다. 나 양아치인 거.

나는 애써 렌의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내가 때마침 믿을 만한 시종이 없던 참이라. 너희들에게는 나를 납치하려던 죄목도 있으니, 평생 날 위해 노동하며 그 죗값을 치르도록. 플로린스에는 연좌제가 살아 있는 것 알지?”

“공주님!”

카일이 소리쳤다. 나는 가볍게 카일의 말을 무시했다.

“돈과 내 증서를 써 줄 테니 용병이라도 고용해 플로린스의 수도까지 가 있도록. 가서 내가 너희들에게 시킬 것이 있다.”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일이 꼬이긴 했지만 차라리 잘됐다. 아이들을 부려 먹는다는 게 심히 양심에 찔리지만 그래도 죽게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낫잖아?

“들고 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플로린스까지 간다면 제국의 암살자는 피할 수 있겠지만 너희들이 제국에 계속 남아 있는다면…… 말하지 않아도 알지? 다른 나라는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증서가 없으니 넘지 못할 것이고. 안 그래?”

내 말에 아이들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 지금 나한테 삥 뜯는 거야?”

렌이 어이없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헛숨을 토해냈다.

그에 카일은 제 뒷목을 부여잡았다.

나도 말도 안 되는 결정인 거 안다. 없는 시종이야 플로린스에 가서 구하면 되고, 얘들을 돕겠다고 여비까지 쥐여 주며 보내는 건 지나친 동정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뭐 어쩔 거야. 내가 공주인데. 까라면 까야지.

“싫어?”

“……공주님 나 째려보는 거야?”

“돈이나 좀 주게. 마법사. 내, 왕궁에 돌아가면 톡톡히 챙겨 줌세.”

“…….”

렌이 입술을 꾹 깨물고 결국 아공간에서 금화 몇 개를 빼냈다.

역시 렌은 심성이 착해. 황금도 막 내주고 말이야.

나는 슬쩍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문제의 암살자들은 언제쯤 쳐들어오려나?”

내 말에 렌이 불만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여기까지 도착하려면 10분 남았어.”

“흠.”

어쨌든 저 암살자들의 목적은 카일이나 렌이 아닌 나였다.

생각을 해 보자. 제국과 마탑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

그리고 나는 패권 이 위 국가인 플로린스의 공주고.

“허, 이거 국왕 전하의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 나겠는걸?”

“……공주님?”

단순히 외교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이런 거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대통령 딸을 중국과 일본에서 암살자를 보내 죽이려고 했다.

그러면 상식적으로 어떻게 되겠나?

“카일 경. 생포할 수 있겠나? 우선 마법사 측은 어느 정도 생포가 될 것 같은데.”

“……예?”

카일이 당황을 가득 담은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쪽 입장도 들어 봐야 하지 않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