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뛰어! 다리에 힘줘!”
-[후방에서 파이어볼 캐스팅 감지! 상체를 숙이는 걸 추천드립니다.]-
“엎드려!”
아이들의 머리를 꾹 누르자 머리 위로 다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아니, 저건 바보인가.
아까도 숙여서 피했는데 왜 불덩이 궤도를 허공으로 쏴? 나라면 바닥에 쐈다. 아마 날 죽일 의도가 사실은 없는 게 아닐,
-[파이어볼의 사정거리와 각도는 정해져 있습니다! :D]-
제기랄. 희망 회로 좀 돌려 볼랬더니 망했군.
“얘들아. 길, 길! 여관 어떻게 가!”
“모, 몰라요.”
“생각이 안 나아…….”
환장하겠다. 그걸 모르면 어떡하냐고 따져 물을 시간도 없었다.
-[여관까지 안내할까요?]-
그때였다. 눈앞의 시스템창이 물었고, 나는 무작정 고개부터 끄덕였다.
“해! 아무거나 해! 할 수 있는 거 다 해!”
-[안내합니다.]-
시스템창의 말에 전방에 황금색 빛 기둥 하나가 생겼다.
어차피 저 마법사의 목적은 나인 것 같고, 그렇다면 이 괘씸한 애들을 먼저 보내면 상대적으로 시간은 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관까지 직진, 우회전. 알겠어? 죽을힘을 다해서 달려. 그리고 카일이라는 검사 아저씨 불러와. 마법사 아저씨는 도망가라고 전해. 그럼 너희가 나 납치한 거 용서해 줄 테니까! 가!”
아이들의 등을 떠밀고 그대로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다행히 저 마법사의 목표는 내가 맞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나타나서 나는 왜 죽이려고 하는 건데!
-[현재 플로린스의 공주는 마탑의 제거 대상 삼 순위입니다!]-
“아니, 왜!”
-[첫째. 현 마탑은 대륙의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둘째. 제국과 마탑은 보이지 않는 대립 상황입니다.
셋째. 마탑이 제국을 치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합니다.
넷째. 구원자님은 그들의 목적에 방해됩니다.
원인: 플로린스 왕국은 대륙 제이의 패권 국가입니다.]-
설명을 할 거면 좀 잘하든가, 두리뭉실해서 뭔 소리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정리하자면 마탑과 제국은 물밑 대립 중이다. 플로린스는 두 세력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지만, 판도를 뒤엎을 힘을 가지고 있다. 만만히 두고 볼 수 없는 중립국 비슷한 건가.
그리고 여기 수준은 중세나 근대 그 언저리니까, 제일 좋은 정치적 동맹 수단은 결혼일 거고.
플로린스 왕자께서는 이미 결혼을 했으니, 결국은 문제의 싹인 나를 쳐 버리겠다 뭐 이건가?
잠깐, 플로린스 왕자님이 결혼한 걸 내가 어떻게 아는 거지?
-[삼 개월의 로딩 기간 동안 정보를 수집하여 호문쿨루스에 업로드하였습니다! 현재 가상 인물 ‘리나 플로린스’의 기억은 구원자님께 완전히 전이된 상태입니다. :D]-
-[전방에 아이스에로우 주의!]-
“악, 미친!”
나는 바로 옆으로 굴렀다. 아오! 목욕한 지 지금 몇 분 지났니? 응? 하얀 드레스가 흙으로 범벅이 되었다.
콰가가각! 땅에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꽂혔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경계 밖에서 몬스터들이 달려들 때랑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불이야! 불!”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하필 이 마을은 변두리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라 집도 다 이곳저곳 떨어져 있고,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밤이라 한 치 앞도 안 보인다. 미쳐 버리겠다.
“불 켜는 기능 없어? 아무것도 안 보여!”
-[타깃을 조정할까요?]-
“아무거나 해, 아무거나!”
내 말에 바로 빨간색 대형 화살표가 어둠 속에 뿅 하고 나타났다.
문제의 날 죽이려고 하는 마법사가 저기 있나 보다.
제기랄.
화살표가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나는 냅다 뛰었다. 빌어먹을 몸뚱이. 겁나 나약해! 벌써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고 목에서는 피 맛이 올라왔다.
심지어 허리도 아프다.
돌이라도 보이면 좋겠는데. 돌팔매질이라도 하게.
그때였다. 바닥에 작은 돌멩이 같은 게 빛나기 시작했다.
“…….”
약간 화가 나려고 했다. 내가 돌멩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지 정말 돌멩이를 달라고 한 게 아닌데……. 그래도 뭐 어쩌겠어.
뭐라도 해야지.
나는 냅다 돌을 화살표 쪽으로 집어 던졌다.
이게 마법사한테 통할 리가 없지만. 렌만 봐도 금방 돌멩이를 태워 버리든가 가루로 만들어 버릴…….
“악!”
“……뭐지?”
분명 돌에 대가리 맞는 소리였다.
-[칠 클래스 마법사의 평균 캐스팅 속도는 오 초입니다.]-
뭔지는 모르겠고, 이때다 싶어 돌을 마구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 말은 주문 외우는 데만 오 초 걸린다는 거 아니야?
-[지팡이나 오브가 없는 마법사가 마법을 시전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은 주문, 혹은 수인입니다.]-
홀로그램의 말이 사실이라면 마법사의 입과 손만 어떻게 하면 충분히 살아 나갈 수 있다는 소리였다.
나는 있는 힘껏 돌을 집어 던졌다.
-[명중!]-
그리고 무작정 화살표 쪽으로 달려가며 가슴께에 달려 있는 리본을 풀었다.
어차피 시간 끌면 불리해지는 건 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라도 하자.
나는 냅다 마법사의 뒤로 달려가 놈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이 미친년이!”
“어디서 공주한테 년이래? 아가리 닥치지?”
그리고 손가락으로 놈의 입을 찾았다. 윽, 축축한 게 여기가 입인가 보다.
“지금 뭐 하는,”
“아가리 닥치래도?”
나는 냅다 쥐고 있던 돌을 놈의 입에 넣고 리본으로 열지 못하도록 둘둘 말아 묶었다.
영화에서 납치범들이 하듯이 말이다.
“무슨 배짱인진 모르겠지만 일단 넌 뒈졌다.”
놈의 손이 황급하게 움직였다. 나는 냅다 놈의 오른손을 물어 버렸다.
“흐으으으윽!”
그리고 마법사의 등허리를 있는 힘껏 발로 찼다.
“악! 미친 내 허리!”
그 덕에 허리가 진짜로 뚝 끊길 뻔했으나 마법사는 그대로 바닥으로 엎어졌다. 나는 놈의 한쪽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두 발로 꼭 밟아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은 친절하게 두 손으로 깍지를 껴 반대로 젖혀 주었다.
“흐아아아아악!”
가로로 꺾인 제 관절에 고통스러웠는지 참 크게도 비명을 질러 주었다.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허약하지? 목소리를 봐서는 성인 남자인데 나한테 제압이 된다고?
-[마법사는 심장에 마나를 쌓는 특유의 수련법 때문에 대체적으로 체력이 약한 편입니다.]-
“보통 플로린스의 법규에 따르면 왕족 시해죄는 즉결 처분이야. 알아?”
어이가 없었다. 저 시스템이 하는 말이 정말이긴 한지 머릿속에는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주 속속들이 입력이 되어 있었다.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배운 적이 없는데, 떠오르는 남의 생생한 기억이란. 물론 조작된 기억이지만.
“하씨, 뭔데 진짜. 사람 짜증 나게.”
“읍! 읍읍!”
“뭐래. 말 안 시켰어. 아니다. 비명 좀 질러라. 사람들 좀 부르게.”
내 말에 아래 깔려 있던 마법사가 입을 꾹 닫았다.
어쭈? 이놈 봐라?
나는 상큼하게 한쪽 발로 놈의 허리를 밟아 주었다.
“흐으아아아아아악!”
손 못 움직이게 하려고 굳니 두 발까지 쓸 필요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그래. 더 질러. 나 지금 힘이 없어서 소리를 못 지르겠거든?”
그나저나 도대체 이 시스템창은……. 아 벌써 머리 아프다.
피곤해 미칠 것 같았다.
“도대체 이 동네 장르가 뭐야? 동화야 판타지야. 하나만 하라고 진짜!”
내 말에 시스템창이 반응했다.
-[현 도우미 프로그램은 구원자님께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구현되었습니다. 구원자님의 상식과 결합되어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구현되었으니 앞으로의 여정을 보다 편리하게 보내실 수 있습니다. :)
정보: 명령은 음성이 아닌 전언으로도 가능합니다.]-
저 빌어먹을 이모티콘은 왜 쓰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저 이모티콘을 내가 자주 쓰긴 했는데……. 그래서 더 기분 나쁘다!
어쨌든 갑자기 죽을 위기에서 이 이상한 능력이 발동된 건 다행인데 문제는 ‘왜?’란 거지.
-[오백 년 동안 프로그램 가동이 중지된 상태였기에 호문쿨루스 조작 마법에 대한 정보 수집이 필요하여 호문쿨루스 정상 작동이 지연되었습니다. 구원자님. T^T]-
아, 그래.
그럼 이 시스템의 정체가 날 소환한 그 망할 마법사 집단의 개수작 중 하나라 이거지.
기분이 더 나빠졌다.
***
“…….”
정확히 칠 분 걸렸다. 나는 칠 분이 이렇게 긴 시간인 줄은 처음 알았다. 정말.
“왜 이제 오나……?”
“죄송합니다. 공주님.”
아이가 제대로 전달했는지 다행히 카일만 왔다. 냅다 도망간 게 아니라 어쨌든 사람을 불러왔으니 이걸 기특하다고 해야 할지, 염치는 안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다행히, 카일은 역시 경계 밖까지 나온 짬바가 있는지 마법사를 쉽게 제압했다.
“안 돼, 안 돼!”
카일이 손을 마법사의 가슴으로 뻗었고, 그러자 빠각!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마법사가 축, 늘어졌다.
“마나 서클을 잠시 멈춘 겁니다. 공주님. 살아는 있습니다.”
“그래. 잘했네. 인질로 잡아서 도대체 날 왜 습격한 건지 알아는 내야 하니까 말이야. 대충 알 것 같긴 하지만.”
마법사가 기절하자 나도 기절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뻥 안치고 더 이상 못 걷겠다. 허리는 아프고, 정신은 없고, 피곤했다.
“그, 미안한데 나까지 업을 수 있겠나? 내가 도저히 걸을 힘이 안 나서.”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면목이 없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숨 좀 돌리고 하지. 진짜,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니까.”
나는 그대로 바닥에 대자로 누웠다. 아, 이제 한계다.
진짜 한계 오브 한계. 더 이상 못 버텨!
“공주님!”
“때 되면 깨우게. 더 이상…….”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