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8/113)

<48>

하루 만에 피로가 마법처럼 뾰로롱 풀리지는 않았다.

여관에서 충분히 잤음에도 불구하고 삭신이 쑤시고 피로감은 여전했다.

커피라도 딱 한 잔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조금이나마 마차를 타고 이동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비록 궁둥이가 굉장히 아프고 멀미도 날 것 같지만 경계 밖에서처럼 발이 터져라 걸을 일은 없으니 다행이었다.

생각보다 평화로운 여정에 고개가 자꾸 밑으로 떨어졌고, 결과적으로 나는 보기 좋게 곯아떨어졌다.

아마 마차가 덜컹거리지만 않았다면, 계속 별생각 없이 평화롭게 잠이나 자고 있었겠지.

“대답 해 봐. 왕자님.”

나는 내 두 귀를 의심했다. 갑자기 왕자님이 왜 나와?

“제국이 근래 왕국 네 개를 삼켰어. 그중, 세 개의 왕국에 남아 있는 왕족들과 귀족은 전부 몰살시켜 효수시켰지.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이 똑똑히 볼 수 있게 말이야. 제국에 반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 입 다물어.”

“뭐, 제국인들 입장에서도 가혹한 희생은 꽤 자극적이었나 봐? 부정적인 여론이 나오자 비교적 최근에 친 왕국은 꽤 자비롭게 주요 귀족들만은 노예로 신분을 강등하는 데에서 끝났지.”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눈 뜨면 망할 것 같은 느낌이 물씬 들었기 때문이다. 얘네는 무슨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마차에서 하니!

나 다 들린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왕족이라니. 나보다 네가 더 위험한 거 아니야?”

‘염병, 누가 더 위험하고 나발이고 너네 둘 다 위험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면 지금 제국이랑 마탑 쪽에서 렌과 카일을 쫓고 있다는 소리인가?

나 지금 줄 잘못 탄 거 맞지?

그나저나 왕자라니. 뭔가 범상치 않을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생각보다 더 범상치 않다.

절로 실소가 삐져나왔다. 물론 참았지만.

아무튼 이미 여기 소환된 것부터가 망했지만 더 망한 것 같다.

나 집에 갈 수 있을까?

“닥쳐, 마법사.”

“왜? 공주님 깨어 있을 때도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안 그래도 네 말투 낯간지러워서 못 견딜 지경이던 참이었는데.”

이미 깼다. 인마.

여러모로 착잡해졌다. 안 그래도 큰일 난 상황 혹이 둘이나 붙어서 더 큰일 나게 생겼다.

어떡하지……? 나 진짜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약점 잡았으니 골수 뽑아야지.’

나는 차분하게 계획을 세워 보았다. 우선, 렌의 말뿐이긴 한 방법이지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대량의 마나가 필요하다.

지금 상황에서 그만큼의 마나를 얻으려면 ‘코어’라는 게 필요했다.

그리고 문제의 코어는 추측상 이곳의 남단 부분이 멸망해 버린 원인이나 다름이 없다.

절대 반지 같은 거지.

다 그 힘에 취해서 쓸데없는 짓을 벌이다가 스스로 자멸한 거다.

물론 평범한 소시민인 나는 절대 이해가 안 가는 행동들이었다.

아니, 세계 정복이 왜 필요한데? 그냥 살면 되는 거 아니야? 왜 정복 전쟁 때문에 인체 실험까지 자행해서 멸망 직전까지 만드냐고.

어차피 내 세계 일이 아니라 그렇게까지 막 분노에 휩싸인다든가 인류애가 상실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이없고 충격적인 건 매한가지였다.

“그럼에도 내가 그대보다 유리한 입장은 사실이다.”

“변명도 안 하네? 아직까지 신분에 대한 자긍심, 뭐 이런 게 남았나 봐?”

“…….”

렌이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렌의 어깨까지 들썩인다.

진짜 열받겠다 싶었다.

“상당히 엿같아. 생각 이상으로.”

렌의 손길이 내 머리카락 사이로 흘러들었다.

“떨어져라, 마법사.”

“응, 우리 공주님은 내가 이렇게 해도 안 싫어해.”

순간 움찔할 뻔했다. 뭐, 싫지는 않은데…… 부담스럽다고!

‘너도 너같이 생긴 미녀가 들이대면 안 부담스럽냐!’라고 물어보고 싶은데 쟤는 딱히 별생각 안 할 것 같아서 뭔가 억울해졌다.

“다시 말하지만 네 공주님이 아니다.”

“아니지. 내 공주님이지. 내가 계약에 관한 패까지 까 보였잖아? 마법사는 계약을 함부로 해 주는 게 아니라고. 알면서 왜 자꾸 물어?”

“어디까지나 일방적 계약이겠지.”

렌의 손이 내 머리칼에서 떨어졌다. 나는 카일의 말에 동의했다. 일방적이긴 했지? 아직도 제 손목을 베어서 피로 계약이니 뭐니 시도하던 걸 생각하면 막 뒷골이 당겼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얘들을 데리고 도대체 어떻게 왕좌를 차지해!

심지어 카일의 경우에는 살짝 감정 이입이 되려고 해서 곤란했다. 그냥 귀족도 아니고 제국에 의해 정복당한 왕국의 왕자라고?

자기 혼자 살아남아서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 유일한 희망인 공주 구하기에 전부를 건 거 아니야. 어떻게든 권력을 잡아서 자기 나라 구하려고!

‘아, 제발 과몰입하지 말자. 과몰입!’

나는 정신을 차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자, 어차피 나는 플로린스로 돌아가고, 쟤들이 척을 진 집단들은 둘 다 제국에 있다.

그러면 보자. 일단 아무리 제국이라고 해도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제이 순위 강국인 플로린스 왕실을 함부로 건드리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명목상 둘은 내 수하니까?

그러니 플로린스에 무사히 도착만 한다면 한시름 놓는 거다.

제국이니 마탑이니, 공주의 수하들을 명분 없이 죽일 수는 없을 테니까.

솔직히 말해서 제삼자인 플로린스에서 제국에 정복당한 패국의 왕자를 공주의 수하로 부리든 말든 뭔 상관인가? 저들이 어쩔 거야? 망명 신청 무사히 받아서 이제 플로린스인인데.

물론 렌은…….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어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눈을 슬쩍 뜨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독립을 돕는 연락망 같은 것도 있나?”

“…….”

“…….”

순식간에 마차 안에 정적이 맴돌았다. 물론 내 질문이 상당히 뜬금없었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궁금한 걸 어떡해?

“마차까지 빌린 걸 보면 아직 자금처가 살아 있는 것 같은데. 정확히 몇이나 있지?”

“……공주님 뭐 해?”

“면접.”

“…….”

처음 봤다. 카일의 놀란 표정. 카일은 말 그대로 입을 쩍 벌리고 나를 쳐다보았고, 옆에 있는 렌은 뭔가 꼬였다는 얼굴로 열을 냈다.

“아니, 공주님. 아니!”

나는 귀가 시끄러워지기 전 렌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계속 무사하고 싶으면 묻는 마법에나 대답하게. 벌써 자네가 내게 한 거짓말만 해도 몇 개째인지 모르겠군.”

“……공주님,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왕자라는 건 단순한 마법사의 모함,”

“정황상 모함은 아닌 것 같은데. 갑자기 튀어나온 자네의 자금이 어디서 왔을지 내가 의심도 안 할 거라 생각했나? 내가 그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네.”

나는 렌에게서 떨어지며 방긋 웃었다.

“아무튼 그와 별개로 내가 그대의 정체를 알았는데도 이렇게 나오는 건 굉장히 파격적인 호의가 아닌가? 그대는 나에게 그대의 비밀을 빠짐없이 고하기만 하면 된다네.”

카일의 입이 다시 한번 벌어졌다. ‘도대체 이 여자 뭐지?’라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렌은 고개를 뒤로 빼며 숨을 토해냈다.

“하! 공주님 내 입은 왜 자꾸 막는 건데?”

“마법사는 말을 좀 가려 하는 편이 좋겠어. 응?”

나는 다리를 꼬고 카일에게 물었다.

“선택지는 딱히 없어 보이고. 사실상 내가 그대의 유일한 희망이 아닌가?”

“…….”

카일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아, 말이 너무 심했나? 좀 오만했지……?

나는 대충 헛기침을 내뱉었다.

“지금 당장 말하는 게 좋을 것이야. 마법사의 말대로 그대가 내게 순순히 협조하지 않는다면 나도 딱히 그대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테니 말이야.”

***

이로써 나는 완벽히 깨달을 수 있었다. 카일은 나를 명백히 얕잡아 보고 있었다!

세상에,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웃기지 않은가?

내가 엿들을 염려조차 안 하고 누가 봐도 수상한 티를 팍팍 내며 렌과 대화하지를 않나, 몬스터 사체를 팔아 돈을 번 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돈을 얻어 와서 내 옷과 마차까지 구하지를 않나.

물론 처음에는 나도 카일의 말에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솔직히 왕족이나 고위 귀족이나.

맥락이 비슷하긴 하잖아? 무게감이 심하게 다를 뿐이지.

“렌. 내가 좀 멍청해 보여?”

내가 조용히 렌에게 물었고 그는 나를 쓱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상큼하게 대답했다.

“공주는 멍청한 경우가 많지. 새장에서 안전하게 길러지며 배우는 거라고는 실용성이라고는 개미 똥만큼 찾아볼 수 있는 없는 것만 배우니까.”

렌의 말에 앞에 있던 카일이 크게 움찔거렸다.

“물론 나는 공주님이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전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렌을 쳐다보았다.

‘너는 내가 공주가 아닌 걸 아니까 그렇지. 아오.’

“내 공주님은 마탑주보다 똑똑하고 황제보다 현명한걸? 내가 본 인간 중에 공주님이 제일,”

나는 오해의 소지가 충분한 발언을 막 뱉는 렌의 입을 또 한 번 막았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마법사.”

그냥 내가 공주님 아니라고 광고를 해라, 광고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