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플로린스 왕국에서 여성은 왕이 될 수 없습니다. 공주님.”
카일이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부터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다른 나라들은 여성의 왕위 계승이 가능한 걸로 알고 있는데. 플로린스라고 못할 특별한 이유가 있나?”
렌에게 묻자 렌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없지. 전혀 없는걸?”
카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렌은 그러거나 말거나 내 손을 잡고 카일처럼 내 손등에 제 입술을 꾹 찍어 눌렀다.
그러고는 매혹적인 얼굴로 속삭이듯 말했다.
“공주님은 무려 마법사의 맹약을 얻어낸 왕족이잖아? 그 점에서 아무것도 없는 왕자보다는 유리하지.”
사실 잘 모르겠는데, 뭐 맹약같이 거창한 단어가 붙은 걸 보니 렌이 내게 해 준 계약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내용은 딱히 별거 없었지만.
“……하나, 원칙적으로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흠.”
카일의 단호한 대답에 나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플로린스 왕국의 인식이 ‘여자는 절대 정치 못 해!’ 이따위면 카일의 말이 전적으로 맞다.
아무리 기적이 일어난들 사회적 통념이 손바닥 뒤집듯 바뀔 수는 없으니까.
“마법사의 맹약은 원칙 외라는 것도 알려 줘야지.”
렌이 자신 있게 제 턱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봤지? 공주님? 경계 안에는 이런 인간들밖에 없어. 전부 본인 유리한 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도주 중인 마법사의 맹약이 무슨 소용입니까.”
카일의 말에 렌의 표정이 굳었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렌이 좀 수상하게 굴긴 했지?
“마법사가 도주 중이면 답은 하나입니다. 마탑과 적대 관계. 제가 틀렸습니까? 마법사.”
“…….”
렌이 드물게 말이 없어졌다. 꼭 정곡을 찔렸다는 듯 말이다.
“왕실에서 마탑과 척을 질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공주님께서 아무리 당신과 약조를 하였다 하더라도 애초에 당신이 공주님의 부군이 될 가능성은 매우 낮습니다. 장기적으로도 공주님께 피해가 됨은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림자 왕의 망토를 제게서 앗아 갈 때부터 알 수 있었던 사실입니다.”
난 그런 렌의 반응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렌이 무의식적으로 줄줄 흘리던 정보와 그가 도주 중이라는 사실을 조합해 보면 대충 감은 왔으니까.
“또 시작이군.”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피곤하다는 듯 마차에 등을 기대고 카일을 쳐다보았다.
“렌이 마탑의 추적을 받든 안 받든 마법사의 도움은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인데. 사실 경계 밖으로 납치되기 전에 내가 살해 위협을 받아서 말이야.”
“……누구한테 말입니까.”
“그걸 꼭 말로 해야 알겠나? 궁 내에서 날 제거 하고 싶은 사람은 뻔하지.”
카일이 뭔가 불편한 듯 내 시선을 살짝 피했다. 아무래도 내가 대놓고 렌의 편을 드는 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그럼 어떡해 해. 렌의 아픈 과거 쿡쿡 찌르는 놈 얘기 계속 듣고 있어 줄 수는 없잖아?
“유감스럽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법사를 배제시킬 수는 없네. 결국 그 순간에 나를 구해 준 자가 마법사이니 말이야. 내가 은인은 챙기자 주의라.”
물론 순 거짓말이었지만 일단 설정상 그렇다는데 이쯤 했으면 대충 넘어갈 것 같았다.
사실 카일의 경우, 내가 패로 쓰기에는 좀 위험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기 때문이다.
제국과의 전쟁으로 빼앗긴 나라의 고위 귀족. 목숨을 걸고 날 구해 권력을 얻으려는 목표를 가질 정도면 더 큰 목표가 있기 마련이다.
가령,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온다든가, 아니면 빼앗은 나라에 복수라도 하든가.
플로린스가 제국 다음으로 권위가 큰 나라라고 했으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마차까지 매수할 정도의 자금이 있는 걸 보면 따로 자금처가 있는 것도 같았다.
이미 플랜은 다 짜 놨다 이거지.
“공주님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 모르겠습니다.”
“걱정 마. 나도 자네들이 날 가지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감도 안 오니까 말이야.”
나는 한숨을 폭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플로린스까지 가면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
렌은 심기가 굉장히 불편해진 참이었다. 카일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마치 그가 ‘이터니티’라는 걸 알고 있다는 양, 그가 기억을 훔치지 못하게 제 소지품을 단속할뿐더러 끊임없이 그를 경계했다.
뭐, 마탑의 추적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들켰으리라고는 짐작했다.
이미 그림자 왕의 망토를 노렸다는 걸 들킨 순간부터 명확히 밝혀진 사실이니까.
‘이대로 마탑에 달려가 내가 도망갔다고 말하면 끝장인데. 가만히 있는 걸 보면 생각보다 뒤가 더 구린데?’
렌은 속 편하게 제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공주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리고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공주는 왜 제 편을 드는 거지?
누가 봐도 마탑에서 쫓겨난 그보다는 차라리 플로린스로 망명한 귀족이 살아남기에는 더 좋은 패였다.
물론 공주는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에게 이렇게 잘해 주는 거겠지? 아마 진실을 안다면 공포에 떨며 도망갈지도 몰랐다.
렌은 작게 혀를 찼다.
그래, 공주는 뭘 몰라도 너무 몰랐다.
뭔가 정보를 모아다 주긴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주술이 걸려 있다 하더라도 의심받을 게 뻔하니까.
렌은 공주에게 가까이 다가가 제 어깨를 내어 주었다.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인간의 매서운 눈빛이 느껴졌지만 렌은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타입이었다.
공주의 머리가 제 쪽으로 기울어지며 결 좋은 머리카락이 나부끼듯 휙 쓰러졌다.
“공주님 많이 피곤해?”
“으응…….”
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은 아니지만 푹 쉬지는 못했는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똑바로 앉으려고 노력하던 공주는 금방 고개를 아래로 떨구었다.
렌은 그런 공주를 보며 곰곰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오백 년 전 경계 밖 마법사들이 공주를 소환하는데 굉장한 심혈을 기울인 것 같았다.
공주님의 주장에 따르면 본체와 똑같은 외형의 육신이었고, 피로감도 쉽게 느끼는 걸 보면 현재 기술로도 구현하기 힘든 마법임은 확실했다.
그러니 렌도 자연히 의심했다.
과연, 공주가 지금에서야 소환된 건 단순한 마법적 결함이었을까?
다른 숨겨진 의도가 있는 것 아니고?
사실 렌에게 공주의 상태 따위는 전혀 궁굼해할 필요도,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무슨 속셈입니까.”
렌은 그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자꾸 흘러내리는 공주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렌은 이 상황 속 불청객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추적자가 붙은 것 같더군요.”
“…….”
렌은 조용하게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전부 마법사인 걸로 보아 제 쪽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닥치고 있는 게 좋을 거야. 여기서 목이 날아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렌이 가볍게 방긋 웃었다. 역시, 불청객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말 몰래 죽여야 할까? 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경계 밖에서야 어쩔 수 없이 동행했지만 지금은 명백하게 방해만 된다.
공주는 저 남자가 그녀에게 협조하길 원하니 더더욱 방해가 되는 셈이었다.
“꽤 가까이 있는 것 같은데. 힘을 쓴다면 목숨이 날아가는 건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남자가 품위 있게 경고하듯 말했다. 렌은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에 더없이 불쾌해지고 말았다.
저렇게 얌전 떠는 인간들은 딱 질색이었다.
“음, 협박?”
“협조라고 생각합니다만.”
남자의 엄지가 조용하게 폼멜 부분을 빙그르르 맴돌았다. 렌은 가만히 그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당신께 공주님을 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금 물러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남자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와 엮인 순간부터 공주는 마탑을 적으로 돌린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아마 높은 확률로 왕자가 이 사실을 아는 순간 마탑과 손을 잡고 공주를 죽여 버릴 것이다.
렌의 정체가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 마탑이 쌓아 온 위상이 땅에 떨어지고, 그간 차일피일 미뤄 왔던 제국과의 전쟁이 일어나는 건 시간 문제니까.
“다른 국가도 아닌 플로린스의 공주님과 계약한 마탑 소속이 아닌 마법사. 소문이 퍼지는 순간 곧바로 들킬 겁니다.”
남자가 짐짓 오만해 보이는 얼굴로 렌을 내려 보듯 바라보았다.
“그러니, 내가 아닌 당신이 물러나는 게 좋을 겁니다.”
렌은 잠자코 남자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았다. 그리고 보란 듯이 공주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마법사들이 먼저일까, 아니면 제국군이 먼저일까?”
“…….”
“대답해 봐. 왕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