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말문이 턱 막혔다. 갑자기 결혼 얘기를 꺼낸다고?
그것도 카일 앞에서?
물론 카일이 지금 당장 렌을 죽일 가능성은 낮다.
일단 주변에 보는 눈이 너무 많았으며, 무엇보다 렌은 마나를 전부 회복된 상태니까.
“그래서 어쩌라는 겁니까, 마법사.”
“…….”
“그렇다 하더라고 이곳은 경계 안입니다. 당신은 아직 공주님의 부군이 아니며, 설사 혼인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일국의 공주께 예의 없이 구는 행동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카일은 짜증 난다는 듯 미약하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금 평소의 무감각한 얼굴로 돌아와 내게 다짐하듯 말했다.
“공주님이 다른 자와 혼인하여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공주님의 곁에서 봉사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냅다 내 앞에 무릎을 척 꿇었다. 나는 당황해 눈을 크게 떴고, 내 뒤에 있던 렌의 팔에는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비록 성을 빼앗긴 미천한 평민이지만, 저 카일, 리나 플로린 공주님을 위해 평생을 봉사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고는 힘없이 떨어져 있는 내 손에 입을 맞췄다.
짐짓 애틋함까지 느껴지는 어투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뒤에서 정신 사납게 나를 껴안고 있는 렌만 아니었으면 홀렸을지도 몰랐다.
귀족처럼 생긴 카일이 무릎까지 꿇고 내게 충성한다는데 누가 안 홀리고 넘어가?
그 누가 바로 나지……!
솔직한 감상으로는 정신 사나웠다. 내가 평생 있을까 말까 한 미남들이 나를 사이에 두고 기 싸움 하는 걸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에 충분히 감사하고 있다고 느낀다.
하지만 환상은 환상이고, 이건 현실이니까.
어차피 둘 다 내 떡은 아닌걸?
“경, 일어나게. 그리고 렌. 알았으니 그만 나를 놔주면 안 될까?”
렌의 팔이 천천히 내 허리에서 떨어졌다. 나는 렌의 표정을 용의주도하게 살폈다.
영 긍정적인 표정은 아니었다. 카일은 효과적으로 렌을 도발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말했다.
“공주님. 마차를 구해 놓았습니다.”
말을 마친 카일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고 에스코트하듯 여관 밖으로 향했다.
나는 카일에게 이끌려 나가면서 멍하니 나를 쳐다보며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굳어 있는 렌을 보았다.
쟤는 또 왜 저러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렌의 손을 잡고 어서 오라고 잡아끌었다.
그리고 카일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대는 돈을 도대체 어디서 난거지?”
내 말에 카일이 잠깐 자리에서 멈춰 서더니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자연스럽게 말했다.
“플로린스로 오기 전, 제 몫으로 따로 빼 둔 재산이 있습니다.”
“그대의 사비로 내 옷도 사고 마차도 대여했다고?”
“예.”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카일을 쳐다보았다. 물론 고마운 일이다. 고마운 일이긴 한데…….
아니, 굳이?
진짜, 굳이?
나는 일단 카일의 의도고 나발이고 고마운 일에는 고맙다고 해야 한다는 걸 알아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렌은 내가 입을 떼기 무섭게 내 앞을 가로막고 카일에게 말했다.
“왜, 그러다가 보란 듯이 제국군에 잡히게?”
그에 카일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국경 전까지만 마차로 모실 겁니다.”
“말로 이동할 거면 공주님은 내가 데리고 가.”
그에 카일이 인상을 찌푸리며 렌에게 말했다.
“대부분의 왕실에서 승마 교육은 기본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굳이 당신이 공주님을 모시고 갈 필요는 없을 텐데요.”
아, 젠장. 나는 다시 한번 생각을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카일과 같이 행동하며 내가 공주란 걸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말을 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나 말 한 번도 안 타 봤단 말이야!
아, 하지만 낙타는 타 봤다. 어릴 때 놀이공원에서.
젠장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경험이잖아……?
나는 일단 최대한 싱크빅을 굴려 자연스럽게 말했다.
“카일 경, 자네의 배려는 충분히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나, 나는 마법사와 함께 가도 괜찮네. 말을 세 필이나 구매하는 건 낭비이네. 시선도 많이 끌 것이고.”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렌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공주님 나는 말도 잘 타.”
“하하하.”
“돈도 내가 저 평민보다는 많을걸?”
렌이 평민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카일을 쳐다보았다. 꼭 ‘내가 이김.’이라고 이마에 써 놓은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니까 이쯤에서 저 용사는 버려. 공주님은 나로도 충분하잖아?”
렌이 조각상 같은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하필이면 오늘 날씨가 좋아서 로브 밑으로 떨어지는 옅은 색의 속눈썹에 햇빛이 비쳐 떨어지는데…….
나는 조용히 렌을 밀어냈다.
“일단 어서 가지.”
***
렌은 대놓고 뾰로통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무 열렬히 쳐다봐서 차마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공주님.”
카일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이곳에 떨어지고 처음으로 여기가 동화가 맞긴 맞구나, 라는 감상에 빠졌다.
이게 바로 동화풍 에스코트……는 개뿔.
“엄마야!”
“쓸데없이 높네.”
렌이 내 허리를 번쩍 들어 올려 꽤 높은 마차 안으로 직접 아주 친절하게 넣어 주었다.
“마법사, 도대체!”
“공주님. 싫었어?”
렌이 화사하게 웃으며 마차 안으로 펄쩍 뛰어 들어오며 내 머리칼을 넘겼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얼빠져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 그러니까…….
“응? 싫었어?”
내가 차마 대답하기도 전에 카일이 마차에 올라타더니 렌의 손목을 낚아챘다.
“구제 불능이군요.”
“…….”
카일의 말에 방금 전까지 생글거리던 렌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일부러 그러시는 겁니까?”
카일은 드물게 대놓고 렌을 비웃었다. 그와 동시에 앞에 있던 마부가 출발한다고 소리를 쳤다.
덜컹, 카일이 자연스럽게 마차 문을 닫았고 마차 바퀴가 요란스럽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당신이 공주님의 마법사가 되었으나, 딱 거기까지입니다. 애초에 종속 계약이 마땅히 주어지는 권위를 부정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음, 역시. 무슨 소리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또 시답지 않은 기 싸움이 한 판 더 벌어지려는 모양이었다.
둘은 서로의 존재를 명백히 거슬려 하고 있었다.
“적어도 너보다는 의미 있지?”
사실 카일이 저렇게 논리적이고 고압적으로 나오면 쫄릴 만도 한데 렌은 전혀 타격받지 않은 듯 오히려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넌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는 재주가 아주 탁월하지.
나는 결국 인상을 찌푸리고 짜증스레 말할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사람 불편하게 하는 재주가 탁월해.”
“…….”
내 말에 카일은 놀라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건 렌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네가 나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듯 쳐다보는데, 아니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딱 보면 파악이 안 되나? 내가 왜 굳이 둘씩이나 데리고 왕성으로 가는 것 같나. 응? 어차피 호위나 시종은 왕궁에도 있을 텐데 말이야.”
“잘생겨서?”
나는 렌을 째려봐 주었다. 아니 이 자식이?
“응. 조용히 할게.”
렌의 입을 효과적으로 닫은 후, 나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을 이었다.
“나는 이유가 어찌 되었건,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구하러 온 그대들의 가치를 아주 높게 평가하네. 결국 왕실에서는 날 위해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았나. 그럼 왕실에서 내 입지가 어떤지 대충 파악은 되었을 것이고.”
카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꼭 ‘얘 뭐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럼 내가 그대들을 왕궁으로 데리고 가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나?”
나는 다리를 꼬고 짐짓 거만하게 둘을 쳐다보았다.
“쥐뿔도 없는 나를 위해 그대들의 개인 자산을 터는 걸 보면 적어도 그대들이 내게 잘 보이려 한다는 사실도 충분히 알 수 있네.”
“공주님 나는,”
나는 렌의 입을 막고 카일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대도 들었듯, 전하께서 약조하신 결혼은 자네와 해 줄 수 없네. 이미 나를 경계 밖에서 안으로 데려가 준다는 조건으로 마법사와 계약했으니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공주님. 저는 단순히 그런 목적이 아니라,”
나는 손을 들어 카일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대가 완전히 내 편에 선다면 그대의 지위 복권에 대한 문제는 내가 책임지겠네.”
“…….”
“애초부터 그게 목적이 아니었나? 나라를 빼앗긴 마음이 얼마나 참담하겠나. 그 정도면 불가능한 가능성에 목숨을 걸 이유 또한 나름 충분하고. 내가 틀렸나?”
내가 싱긋 웃으며 말하자 카일이 대놓고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왕위에 올라야겠네.”
“…….”
두 쌍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당황스럽다는 눈치였다.
“내가 생각이라는 걸 해 봤는데 말이야. 내가 권력을 잡지 못하면 죽을 것 같단 말이야. 그렇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