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다 지나간 옛날이야기입니다.”
카일은 정말 옛날얘기 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이제 왕국에 의탁해 살아가는 평민일 뿐이니까요. 항상 저를 받아 준 플로린스 국왕 전하께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괜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까 카일은 원래는 귀족이었지만 제국의 무리한 침략 전쟁으로 나라가 정복되자 한순간에 모든 걸 잃어버렸다는 거잖아.
“……그렇다면 그대의 망명을 전하께서 직접 받아 주신 건가?”
“전하를 직접 뵐 기회는 없었습니다. 워낙 별 볼 일 없는 작위라…….”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카일의 얘기를 들으니 혈혈단신으로 경계 밖까지 찾아와 나를 구하러 온 이유를 대충 알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저것도 거짓말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지만.
하지만 그때였다.
“별 볼 일?”
렌이 고개를 들어 특유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서슬 퍼런 눈빛으로 카일을 보며 한마디를 툭 뱉었다.
“…….”
카일의 시선이 렌에게 닿았다. 렌은 어깨를 으쓱이며 우아한 손길로 고기를 썰며 제 입에 넣었다.
“이렇게 하는 거 맞지, 공주님?”
그러고는 자기는 아무 말도 안 했다는 듯 능청을 떨었다.
“…….”
카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걸 보니 대강 감이 왔다.
내가 이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서 멍청해 보일지 몰라도, 실제론 그렇게 바보가 아니니까.
살짝 언짢아지려 했다.
지금 나 빼고 둘이 뭐 하는 거야?
기 싸움? 이해할 수 있다. 둘은 목적이 똑같으니까.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게 날 기만하고 저 둘이 뭔가 비밀을 숨기면서 속닥속닥할 이유가 되지는 않지.
나는 그냥 미미하게 웃으며 식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내 너덜거리는 드레스를 보았다.
‘엿 같다.’
긴장이 풀려서일까? 조금 나태한 기분이 들었다. 경계 밖에서는 둘이 싸우거나 말거나 일단 그곳을 탈출하는 게 우선이었고, 명목상 그곳에서는 내가 제일 약자라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러니 짜증이라는 사치스러운 감정이 울컥울컥 올라오는 거다.
배가 어느 정도 차니 여기 음식은 내가 자주 먹던 것보다 퍽퍽하고 맛없었고, 내 꼴은 형편없었으며, 또…….
나는 황급히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 나약해지면 안 돼!
그래서 애써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혼자서 조금 쉬고 싶은데.”
내 말에 렌과 카일이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안 돼. 공주님. 나랑 있어야지.”
“……전부터 거슬렸는데, 당신이 도대체 뭔데 공주님께 명령입니까?”
렌의 태도에 카일이 진짜 화내는 것처럼 따지듯 물었다. 다시 시작되는 신경전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넌 뭔데?”
“예의를 차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법사.”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앞머리를 쓱 쓸어 넘겼다.
그리고 렌에게 손을 내밀었다.
“렌. 돈.”
“……갑자기?”
렌은 당황한 듯 머뭇거리다가 곧 제 주머니에서 금화 세 개를 꺼내 주었다.
나는 성큼성큼 여관 주인에게로 다가가 금화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방 세 개 있나요?”
“…….”
여관 주인은 꾀죄죄한 내 꼴을 위아래로 쓱 훑어보더니 대놓고 인상을 찌푸렸다.
“…….”
내 옷차림이 굉장히 괴상하긴 했다. 치마는 다 뜯어진 채로 렌의 낡은 마법사 전용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몰골은 꾀죄죄 그 자체였으니까.
여관 주인이 말없이 나만 빤히 쳐다보고 있자 앉아 있던 카일이 못 보겠다는 듯 성큼성큼 다가와 여관 주인에게 말했다.
“레이디를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건 실례되는 행동입니다만.”
카일의 말에 여관 주인이 언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냐는 듯 화들짝 놀라더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카일에게 말했다.
“아, 기사분의 일행이시군요.”
“방 세 개. 가까이 붙어 있는 방으로.”
뭔가 어이가 없었다. 내가 말할 때는 ‘이 정신 나간 여자는 뭐지?’라는 듯한 얼굴로 쳐다보더니 카일이 말하니까 바로 키를 건네줬다.
“여기 있습니다. 기사님.”
심지어 카일의 말투가 꽤 건방졌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카일이 키도 있고 무섭게 생기긴 했다.
덤으로 자리에 앉은 채 살벌하게 여관 주인을 쳐다보고 있는 렌을 보자니…… 음. 갑자기 친절해진 이유를 대강 알 것 같기도 하다.
“……공주님, 외람된 말씀이지만 방 세 개는 조금 많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카일이 조심스럽게 말하며 나를 자리로 이끌었다. 그에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카일과 렌을 바라보았다.
“그럼, 둘이 방을 같이 쓸 생각인가?”
내 말에 카일과 렌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렌이 항의하듯 뻔뻔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주님이랑 나랑 같이 써야지.”
“제정신이 아니군요.”
“공주님이랑 나는 이미 여러 번 같이 잤는걸?”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나는 그냥 싱긋 웃으며 카일에 손에 들려 있는 키를 가져왔다.
“둘이서 알아서 하고 용건 있으면 내 방으로 찾아오게.”
그리고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나도 나 혼자만의 시간이 아주 절실하게 필요했다.
***
살 것 같았다. 물론 뻔질나게 싸우던 두 사람 덕인 면도 있었다. 이곳은 아무리 사람 사는 곳이라고 해도 내가 아는 호텔이나 독채 숙소보다 시설이 훨씬, 훨씬! 구렸다.
둘 다 내가 화를 내고 쏙 내뺀 거라고 생각했는지 굉장히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으로 와 각자 할 일을 하고 갔다.
카일은 어디서 났는지 꽤 질 좋은 새 옷을 사 와 내밀었고, 렌은 그런 카일에게 자극을 받았는지 마법으로 여관 안에 있는 온갖 물품을 고급품으로 만들어 놓고 내쫓겼다.
목욕물까지 데워 놓고 안 나가려고 하길래 내가 내쫓았다.
자기가 스물네 시간 붙어 있어야 한다느니 뭐라느니.
표정을 보니 빤히 구라인 게 티 나서 거짓말 치지 말라고 하니까 풀 죽어서 돌아가더라.
나는 렌의 시무룩한 표정을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진짜, 웃겨.”
그리고 침대에 벌렁 누워 옆에 있는 거울에 시선을 두었다.
“…….”
나와 똑같은 얼굴, 다른 피부색과 눈 그리고 머리카락.
나는 내 뺨을 쓱 쓸어 보았다. 원래보다 한 십 킬로는 빠진 것 같았다. 뜻하지 않은, 아무 쓸모도 없는 다이어트에 허탈해 웃음이 흘러나왔다.
“……다 때려치우고 싶어.”
나는 손등으로 내 두 눈을 가렸다. 그러자 사위가 캄캄해졌다.
눈을 꼭 감았다.
렌에게 너무 의존하면 안 된다. 어쨌든 렌도 남이다. 렌이 내게 비치는 호의는 일단 렌과 내 목적이 일맥상통하기에 존재하는 거였고.
카일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용감히 구한 공주와 결국 결혼해 왕이 되는 이야기.
너무 유명하지 않은가. 그곳에는 예쁘게 포장된 가짜만 있고 진짜는 없다.
물론 나도 진짜를 바라는 철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서 아무한테나 정 줘 봤자 괴로운 건 그 누구도 아닌 ‘나’니까.
의지하는 건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게 들었다.
‘세상을 너 혼자 살아갈 수는 없어. 도움이 필요할 때는 당당하게 도움을 요청해. 네 삶을 결정하는 건 너야.’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래, 어차피 다 내가 결정하는 거다. 내가 계속 백지상태로 있으면 저 둘한테 휘둘리기 딱 좋은 먹잇감이 되는 거다.
나는 여관방 책상에 있는 메모지를 아무거나 집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가 해야 할 것들을 정리해 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내 제일 중요한 목적.
집에 돌아간다.
그러기 위해서 해야 할 것.
두 번째. 내 존재에 대해 완벽히 파악한다. 그리고 국제 정세, 역사, 세력 분포도를 확실히 알아본다.
세 번째. 내가 손안에 무슨 패를 쥐었는지 확실하게 파악한다.
물론 내 손에 쥔 패는 렌과 카일이었다.
과거를 알 수 없는 마법사와, 신분이 의심되는 용사.
형편상 무조건적으로 내가 그들에게 좋은 패가 될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되면 안 된다.
걔들이 사실은 착하고 말고를 떠나서 칼자루는 내가 쥐어야지.
안 그래?
***
“좋아.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지? 바로 플로린스로 향하나?”
내 말에 자연스럽게 카일이 대답했다.
“……예. 이대로 바로 왕성으로 향할 겁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포탈을 통한 이동이 불가능합니다. 공주님.”
그리고 냅다 내 시선을 피해 버렸다. 이게 ‘뭐지?’ 싶어서 렌을 보았더니 렌도 영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국경을 넘으려면 허가된 좌표 내에서만 텔레포트가 가능해.”
여기도 불법체류자 단속을 하긴 하나 보다. 생활상은 중세 시대로 보이는데 그래도 기본적인 법체계는 돌아가고 있는 건가?
“그래서?”
렌은 냉큼 내 뒤쪽으로 달려와 내 어깨에 제 턱을 탁, 얹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물론 카일의 표정은 걷잡을 수 없이 구겨졌다.
“렌. 여긴 경계 밖이 아니잖아.”
“그게 왜?”
렌이 내 허리를 껴안으며 내 귓가에 속삭이듯 대놓고 말했다.
“어차피 공주님은 나랑 결혼하기로 했잖아.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