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나는 이마를 짚었다.
그래서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살펴보자면.
우리는 무사히 경계 안으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막 돌아다니고, 생전 처음 보는 건물 양식에 감격스러워서 울 뻔했다.
나랑 다니는 두 남자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이쪽으로.”
“쉿.”
이 인간들이 누굴 바보로 아나. 카일과 렌은 눈에 띄게 주변을 살피고 다녔고, 나는 자연히 이들이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 애초에 괴물 득실거리는 곳까지 달려와서 힘도 없는 가짜 공주 구출해 신분 상승하겠다는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일 리가 없지.
아무렴.
“용사. 넌 이만 꺼지지?”
“그 반대여야 하지 않습니까? 처음엔 당신을 배려해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말해야 할 것 같군요. 플로린스 왕실에서 마법사를 반길 리가 없습니다.”
“왕실에서 마법사를 반기지 않을 이유가 있어? 무슨 근거로 하는 말이야?”
둘 다 의심스러운 주제에 누가 누굴 쫓아낸다는 얘긴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으니 둘 다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냥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피곤하니 머물 곳부터 찾았으면 하는데. 잡담은 나중에 하고.”
“……죄송합니다. 공주님. 추태를 부렸습니다.”
“음, 알긴 아는구나?”
“렌, 조용히 해.”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생각이라는 걸 했다. 내 기막힌 추리력으로 저놈 둘은 쫓기고 있다.
아, 이걸 물어보면 더 확실해지겠다.
“그대들이 찾았던 그림자 왕의 망토가 도대체 뭐 하는 물건이지?”
“…….”
“…….”
인적 없는 골목에 침묵이 감돌았다. 도대체 얘들은 나한테 뭘 숨기고 싶은 거야, 아닌 거야?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둘 다 티가 많이 나네.”
“……!”
“……!”
나는 앞으로 한 발짝 나간 후 둘을 휙휙 번갈아 살펴보았다.
“그런데 여관에 들어갈 수는 있는 건가? 이렇게 눈치를 많이 봐서야. 도대체 뭐에 쫓기고 있는 거지?”
내 말에 카일이 고개를 푹 숙였다. 렌은 잠깐 당황한 듯 보였는데 곧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괜찮아, 공주님.”
“……그림자 왕의 망토 때문이지 않습니까.”
“그러게 누가 누워 있다가 멍청하게 뺏기래?”
나는 렌의 입을 살포시 막고 하하 웃었다. 렌은 억울한지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꼭 다문 채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그런 그의 시선을 가뿐히 피해 주었다.
“죄송합니다. 공주님.”
“뭐, 죄송할 것까지야. 예측 못 한 내 탓이지. 어차피 그대는 첫 만남 때부터 수상했으니 괜찮네.”
나는 렌의 입에서 손을 떼고 팔짱을 꼈다.
“대신, 나와 계속 함께하고 싶으면 적어도 왜 쫓기고 있는지는 설명해야 할 거야. 그리고 비단 제국에서만 그대를 쫓는 인물이 있는 건지, 아니면 플로린스 내부에서도 문제가 있는 건지.”
“…….”
카일이 조금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 당연히 예상 못 한 모양이다.
“그리고 렌.”
“왜 공주님?”
“그대는 말을 좀 예쁘게 하도록.”
“…….”
***
카일이 가만히 렌을 쳐다보았다.
“공주님! 이거 봐라?”
렌은 아공간에서 몬스터에게서 채취했던 체액이 담긴 병을 꺼내 들더니 냅다 약병이 그려져 있는 가게로 달려가 주인과 뭐라 뭐라 말을 하더니 양손 가득 황금 주머니를 들고 내게 달려왔다.
“한 푼도 없는 평민 용사랑 다르게 칠천 골드나 가져왔어.”
렌이 노골적으로 카일을 보며 말했다. 카일은 뭔가 억울한 모양인지 고개를 푹 숙이고 내게 사과했다.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공주님.”
“알면 좀 꺼지지? 이제 경계 안이니까 너 필요 없어.”
“렌.”
내가 렌을 부르자 렌이 진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따지듯 말했다.
“공주님 자꾸 쟤 편들 거야? 공주님의 마법사는 나라고. 쟤는 그냥 지나가다 마주친 수상한 인간이라니까?”
그러고는 덥석 내 손을 잡았다. 물론 옆에 있던 카일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사람이라면 렌이 한 말에 대해 분명 기분이 나빴을 테니까.
“공주님께 예를 갖추십시오. 마법사.”
카일이 내 손을 잡은 렌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네가 뭔데?”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 자진해서 경계 밖으로 나간 용사입니다.”
카일의 팔에 힘줄이 돋았고, 렌의 미간은 완전히 찌푸려졌다.
“나는 공주님과 계약한 마법사인데?”
“…….”
렌의 말에 카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카일의 시선이 단번에 내게 꽂혔다.
“마법사와…… 계약을 하셨습니까?”
계약? 그러니까 계약을 하긴 했는데……. 내가 반사적으로 렌을 쳐다보니 그는 굉장히 뿌듯한지 미소만 짓고 있었다.
마치 ‘봐라! 나는 얘랑 이런 관계다!’라고 자랑하는 눈치였다.
반면에 카일의 표정은 세상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잘못된 건가?”
“아닙니다.”
“마법사와의 계약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까. 그렇지, 공주님?”
그걸 내가 알겠니? 렌은 내가 짜게 식은 눈으로 저를 쳐다보든 말든 산뜻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공주님, 이제 공주님 하고 싶은 거 하자. 내가 돈 만들어 왔잖아. 여관도 갈 수 있고, 밥도 먹을 수 있어.”
“어…… 그래.”
괜히 카일의 눈치가 보였다. 렌이 말한 그 계약이라는 건 내가 렌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날 구해 주는 거였으니까.
“마법사의 말이 맞습니다. 공주님 일단 휴식을 취하시지요.”
카일이 정중하게 말했다. 물론 렌은 잔뜩 썩은 표정으로 한껏 예의 바른 카일을 노려보았다. 저러다가 진짜 일 나는 거 아닌가 몰라.
“좋은 생각이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두 남정네의 손목을 잡고 앞장섰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막막했다.
***
내 인생이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해진 건 일단 둘째로 치고, 나는 드디어 제대로 된 곳에서 씻을 수 있었으며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무한히 감사하기로 했다.
“렌, 천천히 먹어.”
“웅?”
나는 렌의 접시에 고기를 대충 썰어서 올려 주었다. 눈앞에 있는 카일은 굉장히 예의 있게 나이프 질을 하면서 먹는데 렌은 허겁지겁 난리가 났다.
꼭…….
아니다. 안 좋은 생각은 하지 말자. 괜히 렌의 손목에 있는 상처에 눈이 갔지만 나는 빠르게 앞에 놓여 있는 헝겊으로 렌의 손을 닦아 주었다.
“손에 다 묻잖아.”
내 말에 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딱 한 번 끄덕이고는 나이프와 포크를 집었다.
“이렇게?”
“응.”
곧잘 따라 하는 걸 보니 뭔가 기특,
“……공주님.”
“어?”
나는 그제야 나를 매서운 눈으로 보고 있는 카일을 발견했다.
“공주님께서 마법사의 수발을 들어 주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제게 명하시지요.”
맞다. 나 공주지? 나는 헛기침을 하며 카일에게도 똑같이 고기를 덜어 주었다.
“이건 그냥 내 배려이네. 괜찮으니 많이 먹게.”
“공주님, 돈은 내가 냈는데?”
“네 입으로 내 마법사라 하지 않았어.”
나는 니 돈 내 돈이라는 막장 논리를 시전하며 대답을 회피했다.
씁, 예리해.
“그렇지. 나는 공주님 마법사지.”
렌이 헤헤 웃으며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에 나도 뭔가 귀여운 것 같아서 웃으려다가 눈앞의 존재를 깨닫고 정색했다.
아니, 얘는 내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거 뻔히 알면서 왜 자꾸 평소처럼 하는 거람?
나는 렌을 쓱 밀어내고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최대한 품위 있게 말이다.
내가 알고 있는 식사 예절이 왕실 예법과 동일할지는 잘 모르겠고. 카일도 딱히 내 예법에 대해 지적하지는 않았다.
“카일, 이런 말 식사하면서 묻는 게 적절치 않은 듯싶지만, 혹 자네…… 쫓기는 이유가…….”
카일이 먹던 걸 멈추고 고개를 쓱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아버지가 기사 출신이셨다 하더라도 그대가 예법에 그리 신경 쓰는 게 이상해서 그러네.”
내 물음에 카일이 당황하지도 않고 예상했던 질문이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내게 말했다.
“……퇴역 기사이기보다는, 왕실의 검이셨죠.”
뭔가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무거운 얘기에 조금 당황했다. 뭔 왕실, 뭐?
“제국이 정복 전쟁을 벌이며 이제는 그 명성도 사라졌지만, 그래도 제 안에 살아 있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여전합니다. 비록, 제국 내에서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버리긴 했지만…….”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뭐? 정복 전쟁? 나는 뭔 소리냐는 듯 렌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렌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십 년 전부터 제국이 경계 안에서 영토를 무리하게 계속 확장하긴 했지. 플로린스는 너무 멀어서 힘이 안 닿은 거고. 플로린스가 쥐고 있는 연합을 건드려 일부러 골치 아픈 일을 만들 필요도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