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렌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내 손목을 꽉 잡았다. 아니, 얘가 미쳤나, 환자 주제에 힘을 왜 이렇게 세?
나는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로 렌의 손등을 찰싹 쳐 주었다. 그러자 스르륵 힘이 빠졌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게.”
“……공주님 갑자기 왜 차가워졌어?”
“내가 언제!”
렌이 고개를 살짝 틀어 나를 보더니 씩 웃었다. 표정을 보니 살 만한 것 같다. 진짜 다행이었다.
“공주님, 마법사가 정신을 차렸으니 눈이라도 붙이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카일이 정중하게 말했다. 나는 어깨로 대충 눈을 닦고 고개를 저었다.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여기서 제일 멀쩡한 건 나, 엄마야!”
렌이 내 몸을 확 잡아당겨 나는 순식간에 넘어지듯 그의 무릎에 엎어졌다.
나는 거의 철퍼덕 바닥에 널브러진 채 멍하니 날 넘어뜨린 범인을 올려다보았고, 렌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히죽거리며 내 눈을 손으로 덮어 버렸다.
“내가 입은 건 내상이지 외상이 아니야, 공주님.”
“마법사, 너 제정신,”
“안타깝게도 백치는 안 됐어, 공주님. 빨리 자.”
내 눈을 가린 렌의 손을 치워 보려고 했지만 꿈쩍도 안 했다.
아니 얘는 진짜 스탯을 힘에다가 올인했나, 왜 이렇게 세?
“공주님께 무례하게 무슨 짓입니까, 마법사.”
그때였다. 내 눈에서 렌의 손이 떨어져 나갔고, 나는 굳은 표정으로 렌의 손목을 잡아챈 카일을 볼 수 있었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나는 렌이 사고 치기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입을 냅다 막았다.
렌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충분히 기분 나쁠 수 있으니 말이다.
“됐네. 그럼 일단 그대들을 믿고 한숨 자 보도록 하겠어.”
나는 괜한 갈등을 막기 위해 렌과 멀찍이 떨어져서 벽에 기댔다. 나도 눈치란 게 있어, 카일이 합류한 이후 렌의 신경이 곤두서 있는 걸 느끼고 있었다.
원인은 단순하게 카일의 목적도 렌처럼 나와 결혼하려는 거니까. 렌 입장에서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지.
***
“공주님, 아.”
“……으응?”
나는 비몽사몽간에 입을 아, 벌렸다. 그러자 입술에 차가운 수분이 톡, 하고 떨어졌다.
어라? 안 그래도 목이 말랐는데 물을 도대체 어디서…….
나는 순간 등골을 스치고 지나가는 아찔한 감각에 눈을 번쩍 뜨고 앞을 보았다.
그러자 드물게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카일과 입에서 피를 주르륵 흘리며 손가락으로 물방울을 만들어내 입에 떨어뜨려 주고 있는 렌이 보였다.
깜짝 놀라서 입을 쩍 벌리니 왈칵, 물이 한꺼번에 들어왔다.
“공주님, 잘 잤어?”
꼴깍 소리와 함께 식도를 타고 시원한 물이 내려갔다. 나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내 팔다리를 확인했다.
언제 까졌냐는 듯 상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이상했다. 분명히 여기 있던 약은 전부 렌과 카일에게 들이부었는데?
“미쳤니?”
범인은 안 봐도 뻔했다. 렌이었다. 렌은 제 입가에 묻은 피를 쓱 닦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공주님, 이상한 거 발견했더라?”
그리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리켰다.
“마법 장치야. 저기 널브러져 있는 서류 전체에 마법 효과가 부여되어 있어. 일종의 퍼즐 같은 거지.”
‘지금 그게 중요하니?’라고 묻고 싶었지만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멀쩡,
“아야.”
라고 생각한 순간 렌은 신음을 흘리며 휘청였다. 카일은 여전히 신경질 난 얼굴로 렌을 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부축해 주었다.
물론 렌은 상큼하게 그런 카일을 거부했다. 보는 이가 무안할 정도로 정색하며 뒤로 물러나는데 내가 카일이었으면 상처받았다.
렌은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렇지 않은 듯 하하 웃으며 책상 앞으로 가 말을 이었다.
“이다음부터는 쟤한테 알려 주기 싫은데.”
그에 옆에 있던 카일이 도저히 못 참겠는지 따지듯 물었다.
“저를 탐탁지 않아 하시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왜 그러는 겁니까?”
“왜 내가 그런 것까지 대답하는 친절을 베풀어야 하지? 그 정도는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렌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또 시작이었다. 나라도 나서 중재해야 할 것 같았지만, 또 내가 나서기도 애매했다. 애초에 둘이 저러고 있는 원흉이 나니까.
누구 하나 편들어 주면 돌아올 반응이 너무 뻔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지금 렌은 마력을 잃은 상태이다. 회복된다고는 해도 완전히 회복되려면 한참 걸릴 거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렌과 결혼하기로 거래가 끝난 상태이니 자꾸 날 세우지 말라고 하면?
카일이 과연 가만히 있을까?
내 답은 글쎄였다. 아직 카일과 만난 지 하루 정도밖에 안 되었고,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전혀 모른다.
확실하지도 않은 희망에 목숨 걸고 나를 구하러 올 정도의 각오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 렌을 죽여 버릴 수도 있었다.
지금 렌은 약해져 있으니까.
“렌, 그만해.”
“공주님 아까부터 묘하게 이 자식 편드는 거 나 마음에 안 들어.”
렌은 방금 전까지 찬바람 쌩쌩 불던 표정을 지우고 또 빙글빙글 웃으며 내게 말했다.
“……공주님께서는 아까부터 명백히 당신의 편을 들어주시고 있었습니다만.”
카일 또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원래 이런 갈등이 있을 때는 무시가 답이다.
나는 깔끔하게 그들을 무시하고 내 할 말만 하기로 결심했다.
“렌, 당분간 마법은 안 쓰는 게 좋겠어.”
“공주님, 여기서 그냥 죽게?”
아오, 저게 진짜. 내가 렌을 째려보자 그는 자리에서 빙글 돌며 딴청을 피웠다.
“아무튼, 여기 이 홈 위에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를 올려놓으면 작동하는 방식이야. 마법진을 그린 잉크 자체에 마력이 담겨 있으니까 맞을 거야. 공주님이 자고 있을 때 좀 살펴봤는데 출구는 이게 다였어.”
렌이 말을 끝내며, 다시 한번 거슬려 죽겠다는 시선으로 카일을 쳐다보았다.
“수천 장은 되어 보이는 마법진 종이를 뒤져서 하나씩 대조해 나가는 방법은 족히 백 년은 걸릴 거야.”
렌이 상큼하게 말했다. 그에 앞에 있던 카일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서 제가 뭘 알면 안 된다는 소리입니까.”
“…….”
렌은 싱글벙글 나를 보고 있던 시선을 거두고 다시 섬뜩한 얼굴로 카일을 쳐다보았다. 얘는 중간이 없다, 중간이.
“글쎄.”
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카일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는 인간들을 쉽게 안 믿어.”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널 어떻게 믿냐는 말이야.”
카일은 할 말이 없는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다 설명하지 않았습니까. 제게 다른 목적이 있었다면 공주님이 잠들어 있을 때 당신을 죽였을 겁니다.”
“글쎄? 지금 날 죽이면 공주님이 널 경계할 텐데 날 어떻게 죽여?”
렌에게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고 묻고 싶었다. 뭔가 걸리는 게 있는 건가?
카일을 괜히 끌어들였나 싶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나마 카일 덕에 지금까지 숨이 붙어 있을 수 있었다. 일주일 동안 렌의 마나가 회복 안 된다면 여기서 꼼짝없이 죽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래서 지금 저를 수틀리면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로 매도하실 생각이십니까?”
“죽일지 안 죽일지 내가 어떻게 알아. 용사님.”
렌이 한 걸음 카일에게 다가가며 속삭이듯 말했다.
“같이 살아 나가고 싶으면 여기서 보고 들은 건 전부 비밀로 해.”
그리고 휙 등을 돌려 내게로 다가왔다.
“공주님, 나 잘했지?”
“……응?”
도대체 뭐가?
내가 어리둥절해 있자 렌이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높은 확률로 여기서 얻은 정보는 제국에서 이미 폐기되어 사장된 정보야. 아는 순간 죽음을 면치 못해.”
나는 그제야 렌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가 저 수상하기 짝이 없는 비밀 통로의 해답을 입수했다는 것도 사형감이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음, 네가 제국 쪽 첩자일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나도 국제 정세 정도는 잘 알거든.”
렌이 내 뒤에서 빙긋 웃었다.
“제국이 플로린스도 탐내는 거 모르는 사람 있어?”
“상당히 무례하시군요. 저는 플로린스의 헬레나 지방에서,”
“그러니까 그걸 내가 어떻게 믿는데? 난 너 오늘 처음 봤고, 그 정도 거짓말은 누구라도 할 수 있어. 그렇지, 공주님?”
나는 렌의 말에 그냥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둘이 뭔 소리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읽은 로판 빙의물에서는 여주가 다 알아듣고 주도적으로 해결하고 다니던데.
나는 그냥 주둥이 닫고 눈치 보는 것밖에 못 하겠다.
“신뢰를 얻고 싶으면 내놔. 마나.”
“…….”
“그러면 공유해 줄게. 정보.”
렌이 산뜻하게 허공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카일에게 건넸다. 그에 카일이 기가 찬다는 듯 헛숨을 탁 내뱉었다.
그리고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밀 유지 서약을 하자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