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113)

<37>

넘어지면서 팔이 쓸렸다.

“공주님 숙이십시오!”

카일이 내 머리를 손으로 꾹 눌렀고, 나는 그대로 그와 함께 오른쪽으로 굴렀다.

렌! 렌은 어디 갔지? 방금까지 내가 잡고 있었는데?

“저게 아까부터 뭐라고 나불대는 거야?”

다행히 렌은 평소와 같은 얼굴로 마법을 난사해 대고 있었다. 나는 신음을 흘리며 우리가 있는 곳을 살폈다. 바닥이 무너진 것 같은데, 여기가 어디지.

뭔가 큰 장치 같은 게 하나 있는 공실이었다. 연구실인가?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니 이상하게 문이 없었다.

사방이 철로 된 것 같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나마 있던 설치물들은 천장이 무너지며 쏟아진 자재들에 의해 부서진 것 같았다.

“공주님 멍때리지 마.”

렌이 손을 휙, 휘저으며 마법으로 몬스터를 묶어 놓고 달려와 내 손을 잡고 일으켰다.

생각보다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렌은 급하게 카일을 노려보더니 인상을 쓰며 고개를 한 번 까딱였다.

“…….”

그러자 카일이 고른 숨을 훅, 내쉬며 검을 고쳐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자리에서 튀어 나갔다.

“허억!”

나도 모르게 새된 비명 소리가 나왔다. 마치 그가 튀어 나가는 모습이 괴물의 입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렌은 나를 감싼 상태로 손을 한 번 더 튕겼다.

촤르르륵! 빛으로 된 사슬이 다시 한번 몬스터를 단단하게 잡았고, 카일의 낡은 검이 몬스터의 어깻죽지에 콱! 틀어박혔다.

하지만 그때였다. 투드득, 소리와 함께 렌이 붙잡고 있던 놈의 팔이 빛으로 된 사슬을 순식간에 끊어 버리고는 자신의 등허리에 매달려 있는 카일을 우리 쪽으로 휙, 던졌다.

“안 돼!”

눈앞에서 사람이 다치는 걸 실시간으로 본다는 건 정말 그 어떤 경험보다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단순히 징그러운 괴물을 목도하는 것보다 훨씬.

쾅! 차마 사람이 내팽개쳐졌다고 상상하기 어려운 굉음이 귀를 타고 뇌 속에 내리꽂혔다.

“렌!”

렌이 황급하게 마법으로 몬스터를 공격할 창 같은 걸 만들었지만, 역부족이었는지 놈은 그걸 온몸에 꽂고도 커다란 손으로 렌의 몸을 콱 틀어쥐어 버렸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무슨 용기인지 모르겠으나,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렌에게로 손을 뻗었다.

“뭐 해! 떨어져!”

렌이 소리치지 않았다면 나는 기어코 몬스터를 막고자 손을 댔을 것이다.

그의 경고가 들리기가 무섭게 쾅! 소리와 함께 렌이 날아갔다.

“커헉!”

“레, 렌.”

온몸이 덜덜덜 떨렸다. 겨우 고개를 들어 본 렌은 머리에 피를 주르륵 흘리고 있었고, 진즉에 먼저 날아간 카일은 입에서 피를 토해 냈다.

남은 건 멀쩡한 나와 온몸에서 푸른 피를 흘리며 기괴하게 팔을 이리저리 틀고 있는 몬스터 뿐이었다.

그냥 한가지 생각밖에 안 들었다.

뭐라도 해야 한다.

집채만 한 몬스터는 숨만 겨우 몰아쉴 뿐, 나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물론 섣불리 움직이면 공격당할 것 같긴 했다.

쟤도 아는 거지, 내가 설쳐 봤자 자신에게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숨을 죽인 채 머리를 굴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저 커다란 손이 언제 나를 죽이려 들지 모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생각하는 것밖에 없으니까 진짜 그거라도 해야 했다.

“보……내 줘…….”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까부터 자꾸 보내 달라고 하는데 뭔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있어야지!

일단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아까 본 대로 무슨 이상한 장치 하나가 있는 공실이었다.

몬스터의 커다란 입이 비죽 올라갔다. 그리고 그때였다.

“공주님, 도망가지?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

렌이 하하하 웃으면서 비죽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나는 렌이 몬스터의 주의를 내게서 본인에게로 돌리려는 것을 깨달았다.

저게 미쳤나!

렌은 겨우 눈만 뜨고 있었고, 겨우겨우 팔 한 짝을 들어 올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알 수 없는 주문 같은 걸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몬스터는 렌의 의도대로 눈을 까뒤집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렌의 등 뒤로 황금빛이 실명할 정도로 환하게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그 빛은 넓게 퍼지며 황금색 장막을 만들어 냈고 그 순간 짤깍, 소리가 신호탄처럼 쏘아졌다.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시간이라도 멈춘 것처럼 몬스터의 움직임이 멎었다.

“도망가라고!”

렌이 내게 소리쳤다. 그리고 입에서 피를 주르륵 흘렸다. 반대 방향에 누워 있던 카일은 칼을 쥐고 일어나려고 애를 썼고,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차피 렌이 없으면 난 여기서 빠져나가자마자 사망이다.

그러니까 죽더라도 여기서 뭐라도 하고 죽어야지. 게다가 여기서 죽으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확률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잖아? 밑져야 본전이다.

나는 눈을 굴려서 뭔가 무기가 될 만한 걸 찾았다. 매우 징그러운 몬스터였지만 저 굽히고 있는 등을 타고 올라가 목을 찔러 버리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나는 거의 기어가듯 허겁지겁 벽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건물 잔해 사이에 숨겨져 있던 뾰족한 무언가가 보였다.

몰라, 이판사판이야.

나는 무작정 정체 모를 물건을 손에 쥐었다.

무슨 크리스털같이 생긴 손바닥만 한 보석이었다.

제기랄, 이런 걸로 저 거대한 몬스터를 죽일 수 있을 리가…….

“…….”

어라? 나는 멍하니 손에 쥔 크리스털을 쳐다보았다. 푸른색 크리스털이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을 무렵 가까운 벽 쪽에서도 황금빛으로 빛나는 홈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세상에.

그래, 명색이 연구실같이 보이는데 탈출구가 없을 리가 없지! 저기가 탈출구인 거다.

이게 열쇠고! 역시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다는 게 지어낸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내 생존 본능에 무한한 칭찬을 하며 무작정 달렸다. 그리고 근처에 널브러져 있는 카일의 뒷덜미를 잡고 말했다.

“이 악물고 버텨! 일어나!”

“컥, 공주, 님?”

“렌! 렌! 정신 잃으면 안 돼!”

카일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무작정 카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거의 흰자를 드러내며 피거품을 물고 있는 렌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고 일으켰다.

더럽게 무거웠지만 있는 힘을 다했다.

“렌, 다리에 힘줘! 제발!”

내 말에 카일이 뭔가 눈치를 챘는지, 제 이를 악물며 렌을 안아 들었다.

나는 허겁지겁 빛나는 벽을 손으로 짚었다.

“끄, 끄으으윽.”

쩌적, 소리와 함께 황금빛 장막 같은 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몬스터의 손가락이 꿈틀댔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내가 곧장 벽에 크리스털 열쇠를 박아 넣기 무섭게 벽이 휙! 돌아가며 나와 렌, 그리고 카일을 후려쳤다.

“꺄악!”

우당탕탕! 소리와 함께 남자 둘이 바닥에 대자로 뻗었고,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아간 두꺼운 벽을 쳐다보았다.

벽에 등을 제대로 치인 덕에 등판에 멍이 든 것 같지만 일단 살았다. 산 거지, 지금? 설마 이 벽을 뚫고 쫓아오지는 않겠지?

벽 쪽으로 거의 기어가서 바깥의 소리를 들어 보려고 한 순간, 벽에 박아 둔 크리스털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리고 황금빛을 뿜어대며 크기를 줄이더니 내게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으나, 나는 태생이 느림보였기 때문에 그 문제의 빛 덩이를 피할 수 없었다.

“아.”

나는 멍하니 내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크리스털이 어느새 반지로 변해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멍했다. 이건 또 뭐지?

아니지, 내가 지금 이거 신경 쓸 때가 아니잖아?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애쓰며 내가 들어온 곳을 확인했다.

그리고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여긴…….

또 다른 밀실이었다.

“…….”

절로 욕이 나왔다. 진짜 주저앉아서 울고 싶었지만 지금 울 때가 아니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렌, 그만해. 렌!”

나는 정신이 나간 것 같은 렌을 흔들었다.

“렌! 정신 차려. 응?”

내가 렌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자, 그가 내 품에서 축 늘어졌다.

“……숨은 붙어 있습니다. 과도하게 마나를 사용해 내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만.”

카일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눈가를 소매로 쓱 닦았다.

그리고 카일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칼 좀 빌려주게.”

“……공주님?”

“어서.”

카일은 망설이는 듯한 얼굴로 나를 한참을 쳐다보더니 조심스럽게 내게 칼을 넘겼다.

둘 다 외상이 심했다.

그래도 안쪽 천은 깨끗하니까 이걸로 지혈이라도 하면 그나마 괜찮을 거다.

“공주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럼, 이대로 피 철철 나게 내버려 두나? 아니면 그대의 옷을 찢을까?”

나는 치렁치렁한 내 치마를 단숨에 잘라 버렸다.

어차피 길어서 안 그래도 짜증 났었다.

공주 치마라 그런지 겹겹이 아주 잘도 쌓여 있다. 덕분에 깨끗한 부분이 아주 많았다.

찌이익, 천이 뜯어져 나가고, 미니 원피스 정도 길이가 되었다.

다리가 조금 휑하긴 했지만 괜찮았다. 매번 옷 들고 뛰는 것도 지쳤다. 물론 이렇게 되면 애써 렌이 꼬까옷 찾아 입힌 이유가 없어지지만.

일단 옷은 경계 안으로 들어가서 구하면 된다. 설마 공주가 미니 원피스 입었다고 잡혀가겠어.

나는 이를 악물고 렌의 옷을 벗기려 했다.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공주님.”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더듬대는 카일을 쓱 훑었다. 환장하겠다. 지금 일어나 있는 것도 기적 같은데 하긴 뭘 해?

“가만히 있게. 안 그래도 벌어진 상처 더 벌어지기 전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