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113)

<36>

솔직히 말해서 불안하긴 했다. 새로운 인물이 눈앞에 나타났고, 심지어 그 인물은 내가 보던 동화 속 주인공이었다. 물론 확실한 건 아니지만 높은 확률로 맞는 것 같았다.

내심 렌이 내게 말해 준 것들 때문에 더 불안했다.

내가 공주가 아니라는 것을 주인공에게 들키면 어떡하지? 연금술로 만들어진 몸이라고 했는데, 딱 봐도 불길한 징조인 것 같았다. 마녀사냥 당하기 딱 좋잖아?

심지어 내 몸에 손을 대려 했던 렌의 팔이 너덜너덜하게 괴사 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연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렌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공주님 이제 안 무서워?”

“사람이 셋이니 좀 낫구나.”

“공주님 그 이상한 말투 집어치우라니까?”

렌의 말에 옆에 있던 카일이 인상을 찌푸렸다.

“공주님께 예를 갖추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법사.”

그 말에 렌이 섬뜩하리만치 무표정한 얼굴로 카일을 빤히 쳐다보았다.

괜히 사이에 낀 나만 불편해졌다.

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렌의 입장에서는 용사랍시고 여기까지 찾아온 카일이 굉장한 불청객이겠지.

그런데 어떡해. 여기 버려두고 갈 수는 없잖아?

나는 쓸데없이 렌에게 시비를 거는 카일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따지고 보면 그게 맞긴 하지.

난 공주고 얘는 마법사니까. 그런데 그 전에 생명의 은인인데…….

“예의?”

렌이 카일을 대놓고 비웃으며 냅다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공주님 그 이상한 말투 집어치워.”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용사 따라 한 거야?

“렌, 일어나. 위험하게 길 가다 뭐 하는 짓이야?”

“어때, 공주님. 이 정도면 완전 예의 바르지?”

나는 렌을 일으켜 세우며 이를 악물고 속삭였다.

“렌, 진짜 장난 그만 쳐. 응?”

렌은 내 속삭임이 무용지물이 될 만큼 큰 목소리로 대놓고 대답했다.

“왜? 장난치다가 어떻게 될 것 같아? 걱정돼? 왜? 아까는 저 평민 나부랭이 신경 쓰느라 정신이 없더니. 이제야 내가 눈에 들어와?”

나는 그냥 렌의 뺨을 꼬집어 주었다.

“그렇게 크게 말하면 어떡해!”

“아야.”

“안 아프게 꼬집었어.”

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팔을 쓱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카일에게 말했다.

“주제 파악,”

그리고 나는 렌의 입을 냅다 막았다. 아니, 얘가 왜 이렇게 날이 서 있어?

“렌, 우리 말을 좀 예쁘게 해 보는 건 어떨까?”

“…….”

나는 여전히 렌의 입을 막은 채로 어색하게 웃으며 카일에게 말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성품은 선한 분이니 너무 괘념치 말게.”

내 말에 렌이 뭔가 반항하듯 몸을 꿈틀거렸지만 나를 뿌리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카일은 그런 렌과 나를 묘한 얼굴로 바라보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공주님.”

나는 렌의 등을 토닥이며 입을 막은 손을 뗐고, 렌은 허리를 낮춰 내 어깨에 턱을 기댄 뒤 맹렬하게 카일을 노려보았다.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아니, 왜?

나는 렌을 달래듯 말했다.

“렌, 너도 그렇게 경계하지 마. 그래도 더 안전하게 여길 빠져나가려면 무력은 있어야 하잖아. 카일 경이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는 건 어느 정도 힘이 있다는 소리고, 너도 날 데리고 혼자 버티는 건 힘들 거고.”

내가 어르고 달래도 렌의 시선은 집요하게 카일을 좇았다.

“응? 렌.”

내가 렌의 손을 붙잡고 그를 올려 보자, 렌은 그제야 살벌한 눈빛을 거두고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이런 말 렌에게 하긴 미안했지만 뒤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굉장히 안심이 됐다. 적어도 누군가 내 뒤에서 다리를 잡고 끌고 가는 상상은 더 이상 안 하게 됐다.

다행인 일이지 뭐.

나는 렌과 카일의 사이에 끼어서 조용한 적막이 감도는 황궁 복도를 걸어갔다.

한숨이라도 내쉬고 싶었다. 제삼의 인물인 ‘카일’을 맞닥뜨리고 보니 진짜 ‘이제 어떡하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렌 덕분에 기억상실 치트키는 이제 못 쓴다.

그런데 잠깐, 카일은 어떻게 렌이 원했던 ‘그림자 망토’를 가지고 있는 걸까? 그냥 우연히 발견한 건가?

그러고 보니 샛길이 있다면 굳이 여기를 들를 이유가 없었을 텐데?

왜냐면 그 문제의 유적 헌터 백골의 기억에는 이곳 지리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

렌이야, 아무 준비 없이 나와 함께 구 마탑에 떨어졌다 해도 카일은 그게 아닐 텐데. 바보가 아닌 이상 나를 구하면 부마 자리를 준다고 했을 때, 적어도 지도 정도는 가지고 들어오지 않았을까?

저 주인공,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평민이라며, 평민치고는 지나치게 깍듯하고, 이십일 세기 지구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는……. 꽤 품위까지 있어 보였다.

내가 계속 렌만 봐서 그런가?

“쉿.”

렌이 갑자기 다가와 내 입을 한 손으로 살짝 막았다. 그에 카일이 허리춤에 있던 칼을 빼 들었다.

아까까지 피가 철철 났는데 멀쩡해 보이는 걸 보면 렌이 준 약이 효과가 굉장했나 보다.

솔직히 말해서 신기했다. 어떻게 저렇게 멀끔하게 낫지?

아니, 그런데 얘는 왜 이렇게 붙어? 렌은 거의 나를 벽에 가두다시피 누르고서는 숨을 죽였다.

나는 괜히 카일의 눈치가 보여 그쪽을 흘끔거렸다. 그리고 나는 그의 뒤통수에 외눈을 부라리고 있는 붉은색 반투명한 슬라임처럼 생긴 무언가를 발견했다.

“……!”

렌은 내 입을 더 세게 막고는 씩 웃으며 눈썹을 들썩였다.

사아아, 슬라임의 몸체 주변으로 기이한 증기 같은 게 뿜어져 나왔다. 그 때문에 느껴지는 습한 공기에 목 위까지 신음 소리가 타고 올라왔다.

내가 두 눈을 질끈 감고 비명을 참고 있는 사이, 툭.

끈적거리는 액체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카일은 경직된 얼굴로 조심스럽게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가 발걸음을 떼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쩌어억, 소리와 함께 끔찍하게 생긴 입이 벌어졌고, 몬스터는 질척대는 몸체로 카일을 덮쳐 왔다.

“…….”

나도 모르게 렌을 밀치고 튀어 나갈 뻔했다. 하지만 카일은 침착한 얼굴로 칼을 바닥에 쿵, 내려찍었다.

그러자 불투명한 장벽이 훅, 방패처럼 칼 주변으로 펼쳐지더니 그대로 휘이잉!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나아가 끈적이는 괴물을 밀쳐냈다.

렌은 그런 카일을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더니 짜증 난다는 듯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러자 멀리 밀려난 몬스터에게서 보라색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렌은 카일에게서 고개를 틀어 얼굴을 가렸고, 나는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헉헉댔다.

이곳은 내 유약한 정신건강에 너무 유해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하며 목소리를 냈다.

“카일 경, 괜찮나?”

내 말에 반응한 건 카일이 아닌 렌이었다. 마치 ‘쟤한테 그걸 왜 물어?’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공주님.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굉장히 예의가 바른 청년이었다. 음, 주인공 할 만한데? 물론 렌은 내가 읽은 동화책이 다 가짜라고 했지만.

“다만……, 이런 더러운 것들과 공주님께서 계속 대면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혹시나 가녀린 공주님의 마음에 해라도,”

그때였다. 렌이 카일의 말을 싹둑 자르며 끼어들었다.

“공주님이 가녀린지 아닌지 네가 뭘 안다고?”

렌은 무표정하게 고개만 갸웃거리며 물었다.

“너, 귀족이지?”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렌을 보았다. 저건 또 무슨 맥락 없는 대화야?

“……아닙니다.”

“맞는데.”

나는 다시 불이 붙는 묘한 신경전에 한숨을 내쉬었다. 렌이 카일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도 알겠고, 카일이 렌을 견제하는 것도 알겠다.

어쨌든 둘의 목표는 내 남편 자리니까.

이렇게 말하니까 굉장히 기분이 이상한걸?

“지금 신분이 중요한 게 아니니 일단 여기서 벗어나는 게 어떨까?”

두 남자의 시선이 한꺼번에 내게로 꽂혔다.

어라, 왜 저렇게 쳐다보지? 뭔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내가 말을 잘못했나?

잘못 말한 게 어디 있다고? 나는 맞는 말을 했을 뿐이다. 지금 여기서 싸울 때가 아닌 건 맞잖아?

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자, 렌이 방긋 웃으면서 내 손을 홱 잡고 제 쪽으로 끌었다.

그리고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공주님, 그런 말 하면 안 돼.”

렌이 내 귓가에 짧게 속삭였고, 나는 이해하지 못한 채로 질질 끌려만 갔다.

“창문으로 뛰어내릴,”

“젠장, 피하십쇼!”

내 뒷덜미가 카일의 손에 의해 잡혔다. 나는 잡고 있던 렌의 팔을 반사적으로 꽉 잡으며 경악했다.

“보내, 줘.”

왜 방심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보던 동화 속 주인공을 만나게 되니까 신기해서 정신이 팔렸던 건가.

아니면 나도 모르게 렌에게 과도하게 의지하고 있었나.

“꺼내 줘!!!!!”

아까부터 우리를 쫓아오던 몬스터가 몸을 사방으로 기이하게 꺾은 채 천장에서 기어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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