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13)

<35>

렌이 내 머리에 입 맞추며 말을 이었다.

“안 그래, 공주님?”

“……읍?”

나는 순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서 물끄러미 렌을 바라보았다. 그에 렌은 한숨을 푹 내쉬며 내게 말했다.

“왜 또 순진한 척해. 공주님이 계획한 거잖아.”

렌의 손이 내 입에서 떨어져 나갔고,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그에게 맞장구를 치기로 했다.

“……어, 하하! 그, 그래. 내, 내가 계획한 거였나, 그게?”

“그럼.”

렌이 부드럽게 내 머릿결을 쓸어내리며 등 뒤에 찰싹 붙었다.

하필이면 렌이 내 뒤에 선 바람에 그의 표정을 확인하지 못한 게 불안했다.

그리고 내 기억상실 치트키가 날아갔다는 사실에 굉장히…… 마음이 아팠다.

그럼 이제부터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아무리 내 옆에 렌이 있다고 해도 나는 이 세계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다고!

렌은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내 머리에 제 턱을 얹으며 카일에게 말했다.

“우리 공주님이 미친 게 아닌 이상 납치범이랑 이러고 있지는 않겠지.”

용사의 미간이 보기 좋게 구겨졌다.

“무례하군.”

“대책 없이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 목숨이나 구걸하는 평민 주제에 무슨 무례 타령이야? 웃기다, 공주님. 그렇지?”

나는 황급히 팔꿈치로 뒤에 있는 렌을 찔렀다. 아니, 얘가 말을 왜 이렇게 심하게 해? 심지어 이번엔 노골적인 비아냥거림이 목소리에 뚝뚝 묻어났다.

원래 안 저랬는데?

“으응……. 아쉽게 됐어. 용사님. 그쪽이 구해야 할 공주님을 어떻게, 내가 구해 버렸네?”

렌이 뒤에서 나를 안아 왔다. 나는 갑작스러운 접촉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렌을 쳐다보았다. 렌은 그러거나 말거나 꼭 자랑하는 것처럼 배시시 웃으며 카일에게 말했다.

“원래라면 이런 구차한 설명 따위 필요 없지만 우리 심성 고운 공주님이 널 굳이 살려서 경계 안으로 들여보내고 싶어 하니까 말해 줄게.”

아니 뭘 말하려고! 렌이 어디로 튈지 몰라 섣불리 말할 수가 없었다.

용사 및 주인공이라 추정되는 인물 카일은 이제 견디기 힘든 듯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꽤 무미건조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렌에게로 시선을 흘끔 돌렸다.

특유의 무표정 때문에 다시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공주님을 납치한 존재는 따로 있어. 나는 괜히 플로린스까지 갔다가 휘말린 선량한 마법사고. 음, 숨겨 둔 정부라고 생각해도 말리지는 않아. 오히려 그 편이 낫나? 공주님이 납치당해서 정인인 내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아온 거지. 어때?”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렌을 쳐다보았다. 쟤가 그걸 믿겠냐……?

“…….”

카일의 시선이 렌에게서 떠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놈은 그 푸른 눈으로 렌을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이내 뭔가 결심했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내게 예를 갖추는 듯한 태도였다.

“공주님을 구하러 여기까지 온 건 제 독단적인 결정이자 행동입니다. 공주님께서 제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지 않으셔도 탓하지 않겠습니다.”

“호오, 내 말은 씹겠다?”

카일이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 손을 쥐었다. 그리고 무슨 진짜 공주와 용사님처럼 내 손등에 입 맞추는 게 아닌가?

당황한 내가 얼어만 있자, 카일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하나, 마법사분께서 찾는 물건은 제게 있는 것 같군요.”

카일의 품에서 찢어진 넝마 조각 하나가 나왔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바닥만 한 넝마 조각을 쳐다보았다.

뭐야, 저건?

“…….”

카일의 말이 맞나 싶어 렌을 쳐다보니 맞는 것 같았다. 렌의 얼굴이 또 살벌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쟤는 우리가 뭘 찾고 있던 건지 어떻게 알고 있지?

“공주님, 제가 비록 미천한 평민이나, 공주님께 한 가지 간청드릴 게 있습니다.”

“…….”

다른 의미로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뭐, 적어도 방금 전처럼 목숨의 위협을 받는 상황보다야 지금이 덜 곤란하긴 한데,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미친 듯이 곤란했다.

경계 안으로 들어가면 얼마나 더 곤란해지려나.

겨우 한두 달 정도 고립되었다고 그나마 있던 사회성이 다 증발한 건가?

“…….”

음, 생각해 보니까 사회성이 증발할 만도 하다.

“공주님을 구하지 못한 용사가 돼도 상관없으니, 플로린스로 갈 때까지만이라도 공주님을 호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 대충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이 파악되었다.

그래서, 저 말의 의도는 일단 어떻게든 내 줄이라도 잡아 보겠다는 이야기인가?

하기야, 평민이면 왕족이랑 가까이 지낼 기회가 어디 있겠어.

“렌. 일단 저 남자 치료해부터 해 줘.”

“뭐?”

당연히 렌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고,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카일에게 말했다.

“좋아. 카일 경이라고 부르겠소. 그래도 나를 구하려 여기까지 온 노력이 가상하니 말이야.”

“……영광입니다, 공주님.”

대충 상황 파악 끝났다.

뭐, 내 처지에 어쩌겠어. 여기까지 굴러들어 온 걸 보면 상당히 무력은 있는 것 같고, 평민인데도 묘하게 예의 바른 거 보면 교육을 어디서 받은 것 같은데……. 그리고 나름의 목적의식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 찾으러 왔지.

물론 전부 다 짐작이었지만.

“한데.”

“…….”

“그대는 나를 이용해 먹겠다는 말을 아주 고상하게 하는 재주가 있군. 미안하지만 내가 그 정도 눈치는 있어서 말이야. 내 그대의 제안 흔쾌히 받아들이지. 이상적인 권력 쟁취의 형태는 취하지 못했으나, 내 줄이라도 잡고 싶다는 이야기 아닌가? 대신.”

내 말에 카일이 흠칫하며 눈을 크게 떴다. 금방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그대가 가진 것과 바꾸었으면 하는군. 거래에는 충분한 대가가 필요하지 않은가.”

내 말에 카일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공주님, 거래라니, 가당치도 않습니다. 이는 모두 공주님에 대한 충성심,”

“오……. 날, 언제 봤다고?”

나는 드라마에 나오는 쿨한 주인공처럼 방긋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쥐고 있는 넝마를 내게 내놓게.”

***

내가 너무 코리안 드라마 정치물에 찌든 걸까? 남자 둘이 나를 보며 얼빠진 채로 말을 잃었다.

뭐야, 정치인들 다 이렇게 세게 나가는 거 아니었어?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용사가 목적 없이 뭐,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니, 그냥 공주님이니 목숨까지 바쳐 충성하겠다느니 할 리가 없잖아.

“음, 내가 너무 말을 심하게 한 것 같군. 그대의 왕실에 대한 충성심은 내가 잘 봤네. 내가 너무 의심만 한 것 같군. 그대도 알다시피 왕실 내에서 의심은 기본적인,”

“……공주님 뻥치지 마.”

“씁. 시킨 거나 해.”

나는 한껏 건방진 태도를 보이는 렌의 팔뚝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래도 낯선 사람이 나타났으니 공주인 척은 해야 할 거 아니야.

렌은 눈썹만 마구 꿈틀대며 아공간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진짜 이 자식한테 써?”

“렌, 내가 무려 여섯 번이나 말하지 않았어. 이러다 카일 경이 죽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나는 웬만하면 산송장은 보기 싫구나.”

내 말에 렌이 삐진 사람처럼 입술을 삐쭉 내밀고 뭔가를 사부작거리기 시작했다. 허공에 마법진 몇 개가 떠오르고, 렌은 마른 이파리를 부숴 약병에 넣고 흔들기 시작했다.

“약초는 이게 끝인데. 진짜 써?”

“렌…….”

내가 나지막이 렌을 부르자 이제 토 다는 걸 그만두기로 했는지 똥 씹은 표정으로 흔들던 병을 휙, 카일에게 던졌다.

“내가 호의를 베푼 걸 네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해야 할 거야.”

“……예. 마탑의 마법사는 함부로 호의를 건네지 않으니까요.”

“…….”

다시 한번 묘한 긴장감이 방 안에 감돌았다. 그리고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카일을 쳐다보았다.

호의? 뭔 호의? 그냥 함부로 막 던지던데? 내가 받은 건 호의가 아니었나? 그리고 분위기는 또 왜 이런데?

내가 뭔 말이냐는 듯 렌을 쓱 보자, 그는 내가 안중에도 없는지 묘한 분위기를 흘리며 생긋 웃었다. 시선은 카일에게 정확히 고정되어 있었다.

“흠, 그거 공주님한테 내가 마탑의 마법사라는 사실을 굳이 알려 주고 싶어서 말한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인지…….”

나는 최대한 영문 모른다는 표정을 짓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저건 또 뭔 소리야, 대체? 그때였다. 렌이 순식간에 카일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 눈을 똑바로 뜨고 검지로 놈의 목을 꾹 눌렀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섬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목적이 뭐야?”

분위기가 더 이상해졌다. 심지어 둘이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자칫하다간 입이라도 맞출 기세였다. 눈새 짓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렌의 입술 위로 내 손바닥을 올려 가로막았다.

“렌, 왜 그래.”

아니, 그냥 떨어져서 말하면 될 거 사람 불안하게 붙기를 왜 붙어? 습관이야? 나랑 얘기할 때도 맨날 얼굴부터 들이밀더니만.

“여기서 말해, 여기서.”

나 때문에 카일과의 거리가 벌어지든 말든 렌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공주님 말대로 데려가야겠다. 어쩔 수 없네.”

뭐야. 갑자기 긍정적으로 변한 렌의 의견에 나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그렇지? 일단 최종 목표는 왕좌 탈환이니까, 그래도 능력 있는 머릿수가 늘면 손해는 아닐 것 같아서. 저 사람이 배신할 수도 있지만…… 그건 가는 길에 설득해 보자.”

렌이 무슨 개소리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공주님 그냥 잘생겨서 데려가자는 거 아니야?”

“뭔 소리야!”

“플로린스는 첩 제도가 없는데.”

나는 헛소리하는 렌의 등을 열심히 때렸다. 그러다 빤히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그제야 아차 싶어 헛기침을 하며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무엄하도다.”

“공주님 말투 이상해.”

나는 렌의 조동아리를 손바닥으로 때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지금 외부인이 있는데 농담 따 먹기 할 때냐고!

“웃지 말도록.”

“왜? 웃으니까 나도 잘생겼어?”

나는 얼굴을 들이미는 렌을 손바닥으로 밀어내며 카일을 보았다. 무미건조하던 얼굴에 당황이 올라온 것 같다.

그렇지, 명색이 공주인데 이 꼴을 하고 노닥거리는 걸 보면 심히 당황스러울 거야? 맞지?

“어떻게, 약 효과는 도는 것 같나?”

“……공주님의 배려 덕분입니다.”

“내가 아니라 마법사겠지. 렌, 내 부탁을 들어주어 고마워.”

카일의 말을 미루어 보았을 때 마탑의 마법사는 꽤 강한 입지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나도 이 정도로 예를 갖춰 주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지, 공주님. 나는 진짜 쓰기 싫었다고.”

“……하하하. 렌, 우리 십 분만 서로 침묵의 시간을 가져 보는 건 어떨까.”

“내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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