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13)

<31>

Chapter. 5

렌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누가 봐도 음산한 기운이 풀풀 풍기는 거대한 성을 향해 가는 사람치고는 지나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공주님 살 것 같지?”

“……유감스럽지만 좀 그래.”

나는 흘끗 내 발을 쳐다보았다. 렌의 등에 업혀 오는 동안 떨어져 나갈 것 같던 다리의 피로도 어느 정도 풀렸다.

“렌, 고마워.”

렌은 나를 무사히 내려 주더니 내 앞에 떡하니 서서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그러더니 가만히 서 있는 게 아니겠는가?

“…….”

뭐지?

내가 뭐 잘못했나? 왜 저렇게 쳐다봐?

“렌?”

내 물음에 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얘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지?

렌은 허리를 숙인 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눈만 깜빡였다.

뭔가를 바라고 하는 행동 같은데.

“고맙다며.”

“어, 고마운데?”

렌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째려보았다. 뭐, 왜, 뭔데 이거?

내가 도통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렌을 쳐다보자 그가 답답하다는 듯이 내 손을 제 머리 위에 턱! 얹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이, 이게 뭐……지?

쓰다듬으라는 거야? 자기가 개야?

어이없어진 내가 입만 쩍 벌리고 렌을 쳐다보자, 그는 뭐 하냐는 듯 턱을 위로 한 번 치켜들었다.

나는 얼떨결에 렌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을 수밖에 없었다.

렌은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한 얼굴로 얌전히 내 손길을 받다 곧 벌떡 허리를 세우고 눈앞의 음산한 성을 노려보았다.

사실 성 수준이 아니었다.

거대한 성곽이 내성을 완전히 둘러싸고 있어 그 안을 전혀 가늠할 수 없었다.

“……저거 지을 때 얼마 들었을까?”

웅장함에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쓸데없는 질문을 렌에게 했다.

“공주님은 별걸 다 궁금해하네? 공주님 돈 좋아해?”

“……돈 좋아해서 미안하다.”

“미안할 건 없지. 공주님은 돈이 좋구나? 그렇게 안 생겼는데, 속물이네?”

나는 헛소리하는 렌의 등짝을 때려 주었다.

“아야.”

“너 자꾸 나 놀릴래?”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렌이 푸시시 웃었다. 그리고 내 손을 덥석 잡아채며 당부하듯 말했다.

여기선 거리감 없는 이런 스킨십이 문화인지, 아니면 그냥 얘가 이상한 건지.

나는 렌의 행동에 크게 의미 부여하지 않으려 필사적인 노력을 했다.

“공주님 비명 지르면 안 돼.”

“……노력해 볼게.”

난 렌의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 젠장, 얘 입에서 비명 지르지 말라는 소리는 처음 나왔다.

도대체 얼마나 위험하길래?

“렌 혹시 그 아공간 주머니 같은 거에 천 없어?”

“……그건 왜 찾아?”

“물고 있게. 나 솔직히 자신 없어…….”

울고 싶었다. 나는 렌의 소맷자락을 꽉 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 들어갈 거지? 바로 갈 거지?”

마음의 준비를 위해 가슴을 움켜잡고 심호흡을 했다. 아무것도 못 하면 제발 민폐라도 끼치지 말자. 음소거, 음소거!

“공주님, 그렇게 잡아도 옷 안 찢어져.”

그때였다. 렌이 내가 잡고 있던 옷자락을 제 쪽으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리고 혀를 찼다.

“공주님은 몬스터고 뭐고 같은 인간한테도 바로 죽겠다.”

“나 약하다는 거지?”

“내가 본 인간 중에 손에 꼽을 만큼?”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빌어먹을! 연금술로 몸뚱이 이전시켜 놨으면 체력도 레벨 업 좀 시켜 놓지! 어떻게 된 게 현대인 개똥 체력 그대로니?

“나도 알아……. 이럴 줄 알았으면 PT라도 했지.”

한없이 슬퍼졌다. 덕분에 렌의 입으로 나는 도움이 하나도 안 된다고 확인 사살당해 버렸다.

물론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은 당사자는 아무 생각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PT?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그러니까 공주님은 나한테서 떨어지면 안 돼.”

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리고 아주 비장하게 그의 팔뚝을 부여잡았다.

“나, 마음의 준비 됐어.”

렌이 내게 잡힌 제 팔뚝을 쳐다보더니 바보처럼 웃어 보였다.

뭔가, 묘하게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은데. 내 착각……이 아닌 것 같다.

렌은 제 팔을 잡아당기며 신나게 성곽 주변을 쓱 훑고 다녔다. 개구멍이라도 찾는 것 같았다.

“공주님 나 길 꽤 잘 찾지?”

“……꽤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한 번도 헤매지 않았잖아.”

“맞아.”

내가 칭찬하듯 사실을 말하자 렌이 홱 돌아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는 은근히 뭔가를 바라는 듯한 눈으로 나를 계속 쳐다보았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눈빛은 확실히 강아지의 그것이 맞았다.

렌이 뭘 바라는 건지도 대충 감이 왔다. 문제는 그거지.

왜?

왜 저러는 건데? 고민이 됐다. 렌이 바라는 대로 할 건지 말 건지. 그리고 내가 파악한 바가 정말 렌이 원하는 게 맞는지.

나는 눈을 한 번 도르륵 굴렸다. 으음, 어떡하지.

“역시 렌이야. 너만 믿고 있다니까?”

에라 모르겠다. 나는 띠부띠부씰 레어 나왔다며 자랑하던 동생 머리 쓰다듬듯이 허허 웃으며 대충 그의 머리를 쓸었다. 물론 렌이 동생은 아니지만.

하기야, 동생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크지.

렌은 대놓고 좋아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역시, 얼굴이 밥 먹여 준다더니! 아주 덩치가 산만 한데 굉장히…… 귀여운걸?

어우, 내가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나는 정신을 차리려 머리를 두어 번 흔들었다.

정신 차리자! 얼굴 감상할 때가 아니지. 그럼 그럼.

“흠, 정문으로 가는 건 나도 미친 짓이란 거 알아. 공주님.”

“왜? 정문에 뭐가 있어? 아직 우리 정문 근처에 가지도 않았잖아.”

내 물음에 렌이 뭐 그런 걸 가지고 놀라냐는 듯 눈썹을 들썩이더니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음, 느껴지는 기운을 봐서는 적어도 S종 넷은 되는 것 같은데? 그리고 내가 그 정도도 못 느꼈으면 이미 둘 다 죽었어. 공주님.”

“……높은 거지?”

“당연하지?”

렌은 무시무시한 대답을 내놓은 것 치고는 늘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손가락으로 왼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찾았다.”

렌이 가리킨 곳에는 알맞게 무너져 내려 다른 곳보다는 훨씬 낮아 보이는 성벽이 있었다.

물론 나는 렌이 가리킨 곳을 넘을 수 있을 거라고 감히 생각도 못 했다.

층계 형태로 굴러떨어져 있는 돌조각 높이가 족히 개당 이 미터는 되어 보이는데 일반인이 저걸 어떻게 타고 올라가냐고.

문제는 내 옆에 있는 인간이 일반인이 아니라는 사실이지만.

***

렌이 말한 것과 달리 황성 안은 생각보다 고요했다.

문제는 당시 생존자들의 마지막까지 살고자 했던 흔적이 너무 적나라하게 남아 있다는 거지.

“음, 석화 능력을 가진 몬스터가 있나 봐?”

거의 무뎌져서 이게 사람이라는 것과, 그 사람이 죽기 전 뭘 하려 했던 건지만 어렴풋하게 알 수 있는 돌들이 황궁 안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아직도 살아 있을까?”

“당연하지.”

“…….”

몹시 희망적인 답변이었다. 무척이나.

렌은 내가 굳어 있거나 말거나 한 손에 성서를 쥐고 뭔가 거슬린다는 표정으로 전방을 살폈다.

나는 그런 렌의 곁에 꼭 달라붙어 이동하며 계속 세뇌하듯이 생각했다.

비명 지르면 안 된다. 비명 지르면 안 된다!

“생각보다 침식 농도가 짙은데. 이 지역을 관리하는 몬스터라도 있나? 아니면 언데드?”

렌이 한 걸음 나아가자, 그의 발밑에서 황금색 마법진 같은 게 퍼져 나갔다. 동그란 원은 우리를 주변으로 점차 커지기 시작하더니 그와 동시에 순식간에 끝부분이 검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악, 황금색 빛을 잡아먹듯이 확장되었다.

이게 뭔지 의아해 렌에게 물었다.

“방금 뭐 한 거야?”

내 말에 렌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탐색?”

그리고 렌은 혀를 차며 발을 뗐다.

“공주님 지금부터 달릴 거야.”

렌의 손이 내 손을 낚아챘다. 엄습하는 불안감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리 와.”

나는 달리기 위해 자세를 잡았고, 렌은 그런 나를 계속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달리는 거 아니야?”

내가 가만히 자리에 선 채로 나를 끌기만 하는 렌을 보고 이상하다는 듯 묻자 그가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했다.

“공주님이 직접 달리다 둘 다 죽을 일 있어? 이리 와.”

렌은 꾸물거리는 내가 답답했는지 덜렁, 내 허리를 부여잡았다.

“비명, 쉿.”

나는 일단 뭔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전이랑 비슷하게 날 안고 점프라도 할 모양인가 보다.

렌의 왼팔이 내 허리를 단단하게 감쌌고, 나는 부들부들 떨며 이만 악물었다.

그와 동시에 렌의 손에 보라색 구체가 만화 영화에서나 나오는 에너지 볼트처럼 빙빙 돌며 맺히기 시작했다.

그 이상한 에너지 볼트를 추진력 삼아 렌이 발을 구르더니 곧, 그대로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나는 두 손으로 입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숨 쉬기 어려울 정도의 빠른 속도였다.

드르륵, 무거운 철을 끄는 듯한 소리가 들려 겨우 눈을 뜨고 앞을 보니, 이 미터는 되어 보이는 돼지 형태의, 살이 다 흘러내린 무언가가 거대한 도끼를 들고 우리를 향해 내려찍으려 했다.

하나가 아니었다.

못해도 다섯은 되어 보이는 것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왔고, 렌은 드물게 이를 악물었다.

렌이 손을 휘두르자, 그의 손에 맺혀 있던 마나로 이루어진 작은 구가 확, 부채처럼 펼쳐지더니 곧 칼날이 되어 뻗어 나갔다.

“꿰에에에엙!”

역겨운 냄새가 우리가 있던 공간 안에 스멀스멀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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