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113)

<30>

온갖 죄책감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왜냐면 렌이 오르막길을 아주 열심히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나를 업고.

“저기, 렌, 나 정말 걸을 수 있다니까?”

“어쩌라고 공주님.”

“…….”

렌의 화법은 정말 적응하려고 해도 적응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기분 나빠 해야 하는지 고마워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러다가 몬스터라도 튀어나오면,”

“내가 그 정도도 생각 못 하고 이 길로 왔을 것 같아?”

렌이 보란 듯, 고개를 돌려 왼편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으적, 소리와 함께 뭔가 으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염력 쓴 거니?’

나는 얌전히 입을 닫았다. 그래, 네 힘 세다.

아주 먼치킨이네. 다행스럽게 말이야.

“와아. 대단하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떨궜다. 그래, 이 오르막길을 렌에게 업혀 가니 객관적으로 너무 편했다.

사실 계속되는 긴장 상황에 다리가 막 후들거려 주저앉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렌의 넓은 등에 탁, 업히니까 노곤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대로 눈이라도 감고 싶을 만큼 말이다.

“렌, 너는 안 아파?”

나는 최대한 렌에게서 떨어져 말하려고 꼼지락댔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효과는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렌의 귓가에 대고 말하는 꼴이 되어서 굉장히 기분이 불편했다.

뭔가, 종합적 불편함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공주님인 줄 알아?”

렌이 뭔 그런 해괴망측한 소리를 하냐는 듯 불만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상하게 기분 나빠 하는 기색이었다.

아니, 내 말에 도대체 기분 나빠 할 포인트가 어디 있는데?

“안 힘들어?”

“참을 수 있어. 나 강해.”

“……응, 그래. 멋지다.”

나는 밀려오는 머쓱함에 괜히 렌의 어깨를 주물러 주었다. 이거라도 안 하면 진짜 불편해서 돌아가시겠다.

아무리 이곳이 내 세계가 아니고, 나는 언젠간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상식적으로 렌 정도의 미남이 옆에서 알짱거리는데 설레지 않는다면 나는 돌부처다.

환장하겠다. 갑자기 업긴 왜 업어.

별생각도 없어 보이면서.

“……공주님 지금 공격하는 거야?”

그때였다. 렌이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꺾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공격하면 토끼도 못 죽이는데.”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렌의 머리를 감싸 앞을 보게끔 원래대로 친히 돌려 주며 말했다.

“가만히 있기 미안해서 어깨라도 주물러 주는 건데. 싫었어?”

“간지러워.”

“…….”

나는 머쓱하게 손을 뗐다. 그에 다시 렌이 고개를 꺾어 나를 쳐다보았다. 그냥 뒤돌아보면 될 거 꼭 그렇게 봐야 하나?

“렌, 그냥 앞 보고 말해도 돼. 목 아프잖아.”

“안 아픈데? 계속해.”

“간지럽다며.”

내가 다시 렌의 머리통을 잡고 원래대로 돌려 주니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뭐, 어깨 주물러 주는 거야 어렵지 않으니까.

***

렌은 제 등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여자를 업고 계속 걸었다.

평소였다면 인간을 업는다는 귀찮은 짓 따위 절대 하지 않았겠지만 뭔가 달랐다.

이계의 존재라 그런가? 분명 여자는 명백한 짐임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가 그에게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접촉이 나쁘지 않았다.

절대 잠들지 않을 거라고 버티고 버티다가 축 늘어져 버린 팔을 렌은 조심스럽게 제 목에 감았다.

‘따뜻해.’

렌은 가만히 자리에 멈춰서 온기를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굳이 이곳에서 나가야 할까?’

렌은 천천히 자신의 목표를 되짚어 보았다. 머릿속에 불길이 일고, 욕설이 퍼부어진다. 그리고 끝없는 고통의 반복.

감시자가 말하길, 그가 겪고 있는 감정의 이름은 원망, 그리고 복수심이라고 했다.

공주를 이용해 마탑을 부수고, 마탑주를 죽인다.

사실 최종 목표는 생존이지만.

생존 자체는 이곳에서도……. 렌은 자리에 다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제가 했지만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경계 밖에 숨는다고 해서 마탑이 그를 가만히 둘 리가 없는데.

왜 이런 안일한 생각을 한 거지? 굳이 갈 필요 없는 황궁을 향해 가는 것도 마탑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가는 게 아니었던가?

렌은 검붉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생각해 보니까 굳이 그의 등에 업혀 있는 여자에게 황궁으로 가는 이유를 숨길 필요도 없었다.

마탑은 그를 추적 중이다. 더 쉽게 플로린스까지 가려면 기척을 완전히 지우는 아티팩트가 필요했다. 그림자 왕의 망토. 유적 헌터의 물건을 얻지 못했다면 황궁에 그런 아이템이 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왜 숨긴 거지?’

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나 안 자…….”

그때였다. 멈춰 선 것 때문인지 뒤에 업혀 있는 여자가 비몽사몽 상태로 그의 목에 뺨을 아주 살짝, 비볐다.

순식간에 근육이 수축하는 기분이었다. 공격당하는 것도 아닌데. 왜?

“아.”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입버릇처럼 그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저게 미안한 얼굴인 것 같다. 굉장히 미안한 것 같은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렌! 진짜 미안해. 나 이제 내려 줘도 돼. 미쳤나 봐.”

“싫은데.”

“…….”

여자의 표정이 뾰로통하게 굳었다. 그리고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머리를 때린다거나, 걷어차지는 않는다. 이상하게.

“진짜 다리 안 아파? 괜찮다고만 하지 말고.”

여자는 언제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냐는 듯 늘 짓는, 그로서는 익숙하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너, 벌써 다섯 시간이나 걸었어. 괜찮을 리가 없잖아. 심지어 오르막길이라고.”

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이상한 여자다. 괜찮다면 괜찮은 거지 왜 말이 많지?

그는 그냥 여자를 얌전히 내려 주었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갔다. 여자의 눈동자가 늘 그렇듯 당황으로 커지는 게 보였다.

이상하게 얼굴만 들이밀면 저렇게 흠칫거린다.

또 묘하게 싫어하는 건 아닌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살짝 귀 끝이 붉어지는 것도 보이는데 나쁘지 않고.

렌은 싱긋 웃으며 여자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내가 왜 괜찮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데?”

렌은 손가락으로 흐트러진 여자의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여자의 눈길이 그의 손에 닿았다.

“웃기다.”

여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은 왜 감지? 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들끼리 하는 입맞춤 신호가 아니라고 여자가 말했던 게 기억이 났다. 그럼 뭐지? 여자는 황급히 그에게서 멀어져 호다닥 그의 등 뒤로 이동했다.

아직 발이 좀 아픈 건지 인상을 찌푸렸다.

“왜 객기를 부려?”

렌은 여자의 조그마한 발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답답하긴 했지만 여자는 납득이 안 되는 모양이다. 사실 도대체 뭐가 납득이 안 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공주님보다 훨씬 무거운 구속구를 차고 절벽을 올라도 안 힘들어.”

“…….”

여자는 눈치라도 보는 듯 그를 흘끔거렸다. 그리고 하얗고 작은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제 이마에 가져다 댔다.

렌은 그 순간 숨 쉬는 것을 멈추었다. 또다.

“땀, 나는데?”

여자의 손가락이 제 앞머리를 가르고 지나간다.

땀방울이 여자의 손에 닿았고, 렌은 그대로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대로 여자의 허리를 낚아채, 번쩍 들어 올렸다.

“엄마야!”

그리고 한 손으로 제 이마를 훅, 깠다.

“다시 해. 안 나.”

여자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당황한 티를 여실히 드러내며 발을 아주 약하게 바동거렸다.

그냥 걷어차면 되는데. 이럴 거면 이 미적거리는 저항은 왜 하는 걸까?

“렌, 렌, 알았어. 내려 줘!”

여자의 손이 렌의 어깨를 콩콩 때렸다.

“야, 내려 달라니까?”

렌은 여자의 손에 시선을 두었다. 하나도 안 아프다. 웃기다.

“지금 나 공격하는 거야?”

“자꾸 딴소리할래?”

“딴소리 아닌데.”

여자가 내려오려는 듯 몸에 반동을 주었다. 저항할 거면 제대로 하든가. 저래 봤자 안 놓아주면 그만이었다.

“공주님 진짜 내려오고 싶으면 더 세게 때려.”

“너, 지금 재밌지. 응? 재밌지!”

여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추궁이라도 하듯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렌은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진심으로 한 말인데.

결국 여자를 땅바닥에 내려놓았다. 또 혼자 걷게 하면 무섭다며 벌벌 떨 거면서.

사실 제일 무서워해야 할 게 누군지도 모르고 저러는 꼴이 좀 웃겼다.

“업혀.”

“……난 몰라.”

여자는 눈을 질끈 감고 성서를 꼭 안은 채로 그의 등에 다시 업혔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대고 중얼거렸다.

“렌, 혹시 나한테 뭐 원하는 거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거.”

렌은 발걸음을 옮기며 저 멀리 시야에 잡히는 황성을 보았다. 지금은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몬스터들 때문에 신경이 분산되어 있다.

왜인지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공주님이 할 수 있는 게 있어?”

“그러게. 그래서 너한테 물어보는 거야. 계속 도움만 받기는 미안하잖아.”

여자가 다시 그의 어깨를 문질렀다. 제 딴에는 힘을 주는 것 같은데 아무 느낌도 나지 않았다.

렌은 고개를 꺾어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한숨을 푹 내쉬며 도로 렌의 머리를 원상태로 돌려놓았다.

“목 관절 나가.”

“안 나가는데.”

“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여자가 작은 손으로 렌의 머리칼을 쓱, 쓰다듬듯이 쓸었다.

그 순간, 렌은 정말 강렬하게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아무래도 빨리 아티팩트를 손에 넣어야 할 것 같았다.

비교적 안전한 마을로, 먼저 가면 조용히 있을 수 있겠지?

“응. 그런 줄 알게, 공주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