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뭔가 손이 이렇게 된 게 나 때문인 것 같아서 기분이 착잡해졌다.
렌은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그래 생각보다 더 아프단 얘기지 지금?
설상가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
“여기는 포션 같은 거 없어?”
“썩은 포션 병은 있을걸?”
“…….”
안 되겠다. 빨리빨리 그 문제의 플로린스 왕국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팔, 계속 그렇진 않겠지?”
내 물음에 렌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글쎄?”
“…….”
글쎄라니. 그럼 평생 저럴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니야!
“공주님 표정이 왜 그래? 공주님 팔도 아닌데 뭔 상관이야?”
“렌, 인간은 공감 능력이라는 게 있어. 알아?”
“아니?”
“그래.”
할 말이 없었다.
“포션 같은 거 먹으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야?”
내 물음에 렌이 명쾌하게 대답했다.
“아니. 이건 흑마법류라 포션으로 어떻게 못 해.”
“……마법에 걸렸어?”
내가 황당함을 가득 담아서 득달같이 물어보자 렌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거 되게 기분 이상한 말인 거 알아?”
“왜?”
“마법은 동화 속 공주님들이나 걸리는 거잖아.”
할 말이 없었다. 여기도 그런 동화가 있긴 해?
“정확히 말하면 걸린 게 아니라 당한 거지. 오백 년 전 마법사들한테. 괜히 공주님 몸에 새겨진 술식 해제해 보려다가, 보기 좋게.”
렌이 피식 웃으며 제 팔을 내 눈앞에 들이밀고 말했다.
“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 동네 사이비 신이랑도 관련된 주술 같아. 오로지 마나의 활용만으로는 이딴 더러운 주문 못 만들거든.”
그러고는 그 너덜너덜한 손으로 내게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말했다.
“두 시간 남았어, 공주님.”
“…….”
“빨리 찾아야겠는데?”
***
“이번에는 길 잘 찾을게. 브로치 주인이 워낙 제정신이 아니라 잠깐 헷갈린 것뿐이야.”
렌은 물어보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렇다고 안 물어봤다고 직접적으로 말하긴 너무 정 없어 보여서 참았다.
“길을 정확히…… 아는 거지? 그런데 저기도 해골 있는데.”
내가 또 다른 구석을 가리키며 말하자 렌의 눈썹이 높게 올라갔다 내려왔다.
“소문났나 본데?”
“누구한테?”
“유적 헌터지 뭐야.”
렌의 말에 머리가 느리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코빼기도 안 보이던 시체가 여기서만 벌써 세 구나 발견된다고?
그럼 이미 렌이 찾는 문제의 성서인지 나발인지는 털린 거 아니야?
내가 이런 불안한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렌은 룰루랄라 시체를……, 왜 뒤져!
내가 경악해서 입만 쩍 벌리고 렌을 쳐다보자 그가 시체의 주머니에서 이것저것 꺼내 아공간으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쉽게 찾겠다.”
그리고 방긋 웃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됐거든. 한 사십 년?”
……그게 얼마 안 된 거라고? 장난해?
렌은 빠르게 다가와 친절하게 내 벌려진 입을 닫아 주며 말을 이었다.
“얘가 알고 있는 길이 붕괴만 안 됐다면 지금보다 훨씬 쉽게 갈 수 있어.”
“……알겠으니까 그거 좀 치워 줄래?”
내 말에 렌이 시체에서 찾은 주머니를 들이밀며 물었다.
“이거?”
“렌……. 치워 달라니까 들이밀면 어떡해!”
“아, 맞네?”
렌은 들고 있는 주머니를 허공으로 휙, 던졌고, 봐도 봐도 적응 안 되는 작은 공간에 주머니가 덥석 먹혀 버리듯 사라졌다.
“그, 있잖아. 렌. 여기 시체가 있다는 건 또 함정이 있다는 소리 아닐까? 아무 의미 없이 여기서 죽었을 리는 없잖아.”
내가 조심스럽게 해골을 가리키며 묻자 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 똑똑하다.”
“…….”
그리고 활기차게 말했다.
“그럼 여기 있겠네?”
“……뭐가?”
“뭐긴 뭐야. 성서.”
렌이 아무것도 없는 벽을 가리키며 제 새빨간 혀로 입술을 핥았다. 꼭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 같았다.
물론 입은 안 열었을 때.
“흐음, 자칫하면 더 헤맬 뻔했는데. 아무리 봐도 수상하지?”
“그렇지. 해골이 저렇게 죽어 있,”
“그거 말고.”
렌이 제 손 다친 걸 또 망각했는지 내 손을 확, 휘어잡고 앞뒤로 열심히 휘저으며 룰루랄라 아무것도 없는 벽으로 다가갔다.
“여기. 워낙 티가 안 나서 지나칠 뻔했어. 공주님이 말 안 했으면 말이야.”
그리고 내 손을 잡고 있는 손으로 벽을 짚었다.
“느껴져?”
“……축축한데. 이끼가 좀 있어서. 만지기 굉장히 불쾌하고?”
“그걸 물은 게 아닌데.”
그거 말고 도대체 뭐가 느껴져야 하는데……? 내가 어이없음과 의문을 가득 담은 눈길로 렌을 쳐다보니 입맛을 쩝, 다시며 머쓱하다는 눈치로 대답했다.
“봐, 이렇게 느껴 보면 술식이…….”
그때였다. 나는 하늘을 보며 나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왜냐고?
하늘에서 뭔 작살 백 개가 나를 향해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 렌!”
나는 필사적으로 렌을 불렀고, 렌은 내게 처음 보여 주는 표정을 지었다.
‘X 됐다.’
라고 말하는 듯했다.
“공주님 눈 감아.”
나는 렌의 말대로 착실하게 눈을 감았다. 귓가에서 렌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팔에 힘을 주려니 아픈 모양이었다.
렌이 내 허리를 꽉 부여잡은 순간 가해진 강한 힘에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렌이 시키는 대로 눈을 꼭 감고 입도 꼭 다물었다.
입 다물라고는 안 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
“흐, 흐아악!”
내 다짐은 어떻게 일 초도 안 가는 것인가. 그대로 내 몸은 아래로 추락했고, 내 귓가에 렌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죽이는데?”
“죽이긴 뭘 죽여. 날 죽여?”
나는 황당한 말에 밑으로 떨어지면서도 렌에게 한마디를 했고, 그는 대답까지 해 주는 센스를 선보였다.
“내가 공주님을 왜 죽여? 눈이나 계속 감고 있어. 공주님.”
렌의 손이 내 머리를 쓸어 넘기는 게 느껴졌다. 지금 뭐 하자는 행동이지 이거?
쾅! 쾅쾅! 뭔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몸은 계속 아래로 낙하했고, 나는 얼굴을 렌의 가슴팍에 처박았다.
진짜, 간 떨어져서 돌아가실 것 같았다.
“공주님 이제 눈 떠도 돼.”
렌의 말에 나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러자 좁은 방 같은 공간이 나왔다. 나는 하늘 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괴물이 천장을 우그러뜨린 것처럼 천장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고, 나름 웅장해 보이는 방 안은 잔해투성이였다.
렌은 내가 넋이 나가건 말건 별로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룰루랄라 어디로 뛰어가더니 강아지처럼 뭔갈 물어 왔다.
“쯘.”
진짜 물어 왔다. 농담 아니고. 그 덕에 짠, 발음이 뭉개졌고, 나는 렌이 물고 있는 오 센티가량의 두꺼운 책을 보고 헛웃음을 뱉었다.
이빨 안 휘어? 그리고 저걸 애초에 왜 물고 있는 건데!
“슨으르 즙으면 흠증이 블등디기 대이꺼등. 이증 흠증이르.”
“……뭐라는 거야.”
렌은 턱을 위로 튕겨 물고 있는 전공 서적만 한 책을 허공으로 휙 던졌다. 촤르르륵! 책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렌이 손바닥을 쫙 펼치고 떨어지고 있는 책을 금세 허공에 띄웠다.
염력이야 뭐야.
주제에 모션은 엄청나게 화려해서 신기하긴 했다.
객관적으로 말이다.
“……됐다.”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렌이 씨익 웃었다. 그러자 렌의 너덜너덜한 팔이 순식간에 뽀얗게 돌아오는 게 아닌가? 당황스러웠다. 아니, 팔이 치유된 건 좋은 일이긴 한데…….
“……뭐야?”
내 물음에 렌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성서라고. 원래 마법사랑 신은 상극인데 또 이론상으로는 완전히 그렇진 않거든.”
“상극?”
내 물음에 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응. 신전이 행하는 기적을 마법사들이 흉내 낸다고 싫어하거든. 마법사들은 신전을 꼴값 떤다고 싫어하고.”
살짝 맥이 빠졌다.
“마법사랑 신이 상극인 게 아니잖아 그러면.”
“아니? 신들도 싫어하는데.”
“……신이랑 의사소통이 돼?”
“응.”
나는 이마를 짚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물어보면 물어볼수록 미궁으로 빠지는 느낌이었다. 일단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나는 한숨을 폭 쉬며 본론을 꺼냈다.
“……찾으면 네 팔 낫는 거 알고 있었어?”
“당연하지?”
딱히 화낼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묘하게 열이 받았다.
아니, 그걸 왜 말을 안 해? 나 여태까지 걱정했잖아?
“이 정도 마나면 팔이 잘려도 상관없어.”
렌은 내가 찝찝해하거나 말거나 성서를 득템했다는 사실이 좋은지 계속 실실거렸다.
“알아서 회복될 테니까.”
렌의 눈이 보라색으로 빛났다. 그리고 허공에 알 수 없는 수식 같은 문자가 와르르 떠올랐다.
전부 붉어 위험해 보이기 짝이 없는 글자들이었는데, 렌은 그 글자를 유심히 살피더니 손을 움직여 글자 몇 개를 빼내기 시작했다.
영화 보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냥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집중하는 렌을 쳐다보았다.
직감적으로 좀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에휴.”
나는 내 처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어차피 렌한테 도움만 받는 입장인데 화내서 뭐 할 거야.
‘아니지? 이건 배려 문제 아닌가?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
맞아. 내가 나쁜 마음을 먹은 것도 아니고, 단순히 걱정하는 사람한테 곧 자기 팔이 나을 수 있다는 것쯤은 알려 줄 수 있는 거 아니야?
내가 렌에게 마음이 슬슬 상해 갈 무렵, 그가 개운한 얼굴로 책을 손으로 탁, 잡았다.
“공주님 왜 그런 얼굴이야? 처음 보는데.”
렌이 내게 성큼성큼 다가와 내 턱을 탁! 잡았다. 그리고 한껏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 저 표정은 내가 지어야 하는데 말이지.
“왜 말 안 했어?”
“뭐를?”
렌이 내 턱을 놓아주지 않은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속에 담은 건 빨리빨리 털어야 한다는 주의이기 때문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봤다.
“네 팔 바로 낫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