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13)

<26>

“제발, 예고! 예고 좀!”

“비밀 문이라고 얘기했잖아.”

내가 원망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말하자 렌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게 무슨 문이야, 구덩이지!”

나는 렌의 어깨에 매달려 심장이 멎을 뻔한 사실에만 집중하다가 불현듯 내 꼬라지를 보았다.

그리고 헛숨을 들이켤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떨어진 곳은 그래도 꽤 높이가 되었고, 렌은 이상한 데서 매너를 챙겨, 내가 엉덩방아를 찧지 않게 붙잡아 주었다.

문제는 뭔 쌀 포대처럼 둘러업었다는 건데…….

“렌, 팔! 팔!”

나는 황급하게 렌의 어깨에서 밑으로 내려왔다. 렌이 키가 꽤 있어서 뛰어내리자마자 관절에 충격이 그대로 전해졌다.

렌은 내가 심각한 얼굴로 제 얼굴을 쳐다보자 그제야 뭐가 문제인지 깨달은 얼굴로 멍청하게 말했다.

“아. 맞다.”

“…….”

나는 진심을 다해 렌에게 말했다.

“맞긴 뭘 맞아! 조심해야지, 나를 어깨로 받으면 어떡해!”

“발로 받을 수는 없잖아?”

할 말이 없었다.

“……고오맙다, 아주.”

“별로 안 고마워 보이는데. 맞지?”

나는 렌을 무시하기로 했다. 더 대답해 주다가는 평생 농담 따먹기만 할 것 같았다.

“공주님, 내 말 씹어?”

렌이 내 뒤에서 등허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기 시작했다.

“……자, 우리 쓸데없는 거에 집중하지 말고, 네 계획 좀 말해 줄래?”

애써 웃으며 렌에게 묻자 그는 뭔가 불만스럽다는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말했잖아. 성서가 여기 있다고.”

“……성서가 무슨 아이템 같은 걸까?”

“아이템이 뭔데?”

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성서에 무슨 숨겨진 힘이라도 있어?”

“응.”

렌은 내게 팔짱을 끼며 무작정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는 내 팔에 얹어져 있는 렌의 손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괜히 알려 준 것 같다. 저 얼굴로 아무 때나 덥석덥석 붙어 오면 얘가 아무리 사차원이라고 해도 기분이 좀,

“슬슬 마나가 고갈돼서.”

“…….”

나는 입만 쩍 벌리고 렌을 쳐다보았다.

“음, 세 시간 후면 죽을지도?”

입이 더 벌어졌다.

“공주님 입 크다고 자랑하는 거야? 별로 안 큰데.”

나는 입을 얌전히 닫고 렌에게 물었다.

“렌, 무슨 세 시간 뒤에 비 올 것 같아도 아니고 죽을 것 같다는 얘기를 그렇게 해?”

“공주님 여기 비 내리면 큰일 나.”

“…….”

렌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진짜 큰일 난다는 듯이 말이다. 그래, 비 오면 큰일 나는 건 확실한가 보다.

그런데 지금 대화의 핵심이 그건 아니잖아?

나는 애써 웃으며 현실을 부정했다. 뭔가 쟤가 저런 식으로 말하면 대부분 사실이지만 장난일 수도 있잖아?

“장난이지?”

“아니? 진짠데?”

“…….”

렌은 내 팔을 질질 끌며 힘차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니까 세 시간 안에 찾아야 해. 어디 있는지는 알아. 뭐, 여자가 죽은 뒤에 성서가 옮겨졌다면 망한 거고.”

***

렌은 룰루랄라 카타콤같이 생긴 지하 미로를 누비고 다녔다.

“구 마탑에서 어지간히 신도들을 빼돌렸나 봐. 흔한 기생종 하나가 없네?”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구석에서 나뒹구는 해골을 가리키며 렌에게 말했다.

“……저건 뭔데?”

“죽은 지 십 년 된 백골이지 뭐야?”

“그러니까 저게 여기 왜 있어?”

내 말에 렌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정신 나간 유적 헌터가 털려고 왔다가 뒤졌나 봐. 열쇠는 어디서 난 거지?”

그 말은 우리도 저 꼴 날 수 있다는 얘기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렌은 강하니까, 우리는 상황이 다를 수도 있,

“어라.”

기는 개뿔. 나는 온 사방을 울려대는 쿠르릉 소리에 정신을 잠깐 놓을 뻔했다.

이게…… 무슨 소리지,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소리의 주인공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뭔 집채만 한 돌이 굴러오고 있었다.

“우와, 함정이다.”

렌은 해맑게 전방을 보며 감탄했고, 나는 경악에 차 비명조차 잊고 입만 벙긋거렸다.

와중에 렌은 또 한마디를 툭 뱉었다.

“이 길이 아닌가 봐?”

“아니긴 뭘 아니야, 뛰어!”

나는 거의 렌의 멱살을 움켜쥐고 뛰었다. 팔을 잡을 순 없지 않은가. 안 그래도 환자,

“엄마야아아아아!”

“그렇게 뛰면 깔려 죽을 걸, 공주님.”

렌이 나를 훌쩍 둘러업었다. 아니, 마법사인데 스텟을 힘에 다 올인했나, 왜 이렇게 세!

“이런 건 마법으로,”

렌의 말에 나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아니, 마나 세 시간 후면 고갈된다며 뭔 마법이야!”

“아, 맞다. 그렇네?”

“거기서 아 맞다가 왜 나와!”

렌은 하하하 웃으며 그대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렌, 너 팔!”

렌이 제 덜렁거리는 팔로 내 다리를 세게 감싸 안으며 말했다.

“잘린 것도 아닌데 왜 호들갑인지 모르겠네.”

그러고는 감히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뭐한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말문이 막혔다.

그래, 사람이라고 하기엔 뭐한 움직임이었다. 꼭, 인외 존재를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숨이 턱, 막히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렌은 나를 쌀 포대처럼 들쳐 업은 채로 그대로 이 미터 정도를 훌쩍 도약해 순식간에 굴러오는 거대한 돌과 멀어졌다.

렌은 맹수처럼 보라색 눈을 휙휙 굴리며 퇴로를 찾았고, 벽에 아주 작은 틈이 보이자 곧장 그쪽으로 뛰어들었다.

곧 있으니 쿠르르르릉!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굴러오던 돌이 내 코앞을 굴러갔고, 나는 숨도 돌리지 못하고 그저 멍한 눈빛으로 렌을 바라보았다.

“왜? 할 말 있어, 공주님?”

렌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빙긋 웃으며 여상하게 물었다.

“……렌, 진짜 할아버지 아니야?”

“공주님, 이제 나 이거 뭔지 알아. 놀리는 거지?”

나는 렌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마법사를 넘어섰다. 그러니까 내가 아는 마법사는 아닌 것 같다 이 말이다.

“적어도 공주님보다는 오래 살았을걸? 흠, 평균적으로 계산해 보면 스물다섯 해?”

“뭐? 나보다 나이가 많다고?”

“거기서는 또 왜 놀라는데?”

내가 경악하자 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등치는 산만 한데 정신 연령은 딱 고딩의 그것이라 나는 당연히 갓 스무 살쯤 되었을 줄 알았다.

“나더러 할아버지냐며.”

“보통 사람들은 백 살 이상 차이 나면 별생각이 안 들어요. 너무 비현실적이라.”

“왜 존댓말 해?”

“그 갑자기 좀 어색해져서?”

렌이 할 말을 잃었다는 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막 눈썹이 들썩들썩, 난리가 났다.

나는 렌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나보다 두 살이나 많다고? 설마 여기 만 나이인가?

“그 스물다섯 해를 사신 거죠? 아예?”

“공주님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맞나 보다. 그럼 지금 스물여섯 살이라는 건가?

“제가 생각보다 나이를 많이 따져서.”

“뭐 하자는 거냐고.”

“예의 있게 구는 중?”

“…….”

렌이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뭔 괴생명체 보듯 나를 머리부터 끝까지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

그러고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헛숨을 뱉었다.

“설마 겁먹었어, 공주님?”

“겁은 계속 먹고 있었는데? 요? 아까 비명 지르던 거 못 봤어? 요?”

렌이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내게 말했다. 아니 본인이 왜 답답해해? 어이가 없었다.

“그 괴상한 말투 집어치우면 안 돼, 공주님?”

“말투는 사실 그쪽이 더 이상한 것 같,”

“집어치워.”

“뭐, 굳이 싫으면 예의 있게 반말하도록 할게. 내가 절대 젊은 꼰대라서 너한테 반말했던 게 아니야. 알았지?”

“…….”

나는 괜히 찔리던 마음을 깔끔하게 갈무리했다. 뭐 여기는 나이 많다고 굳이 존대 안 해도 되나 봐?

내가 쓸데없는 예의범절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을 무렵 렌이 불쑥 보라색이 되어 버린 눈을 부라리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공주님 내가 무서워?”

“봐, 말은 네가 더 이상하게 한다니까?”

“무섭냐고.”

“그, 미안하지만 별로 안 무서워. 미안.”

사실 여태까지 같이 지내면서 좀 만만하게 느꼈다고 말하면 상처받을까 봐 참았다.

“…….”

렌이 그건 또 무슨 말이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방금 나한테 겁먹은 거 아니야?”

렌의 물음에 인상을 찌푸리고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렌 혹시 엠비티아이, 아, 모르겠지.”

“…….”

렌이 쓱 내 눈치를 보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얘기했다.

“아까 도망칠 때 표정 굳었잖아.”

사실 이제 돌도 굴러갔으니 이 비좁은 공간에서 좀 나가서 말하면 안 되냐고 물을 참이었다.

그런데 렌이 너무 심각해 보여서 다른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일반인이라면 누가 날 쌀 포대처럼 들쳐 업고 이 미터를 뛰는데 겁을 안 먹을 수 있을까……? 솔직히 그냥 이 미터 위에서 뛰어내리라고 해도 무서운데? 그리고 결정적으로 뒤에 집채만 한 돌이 굴러오는데 겁을 안 먹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내 말에 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공주님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그건 네가 아니라 내가 물어야 할 말인 것 같은데…….”

나는 한숨을 내쉬며 렌의 팔을 살폈다.

“손, 쥐었다 펴 볼래?”

내 말에 렌이 당황한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안 되는 것 같은데.”

“할 수 있,”

렌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아픈 모양이었다.

“그래서, 안 잘렸으니 된 거야? 이 모양 이 꼴인데? 너 말하는 거 다 들렸어. 잘린 것도 아닌데 호들갑? 장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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