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113)

<23>

머리에 찬물이라도 들이부은 것 같았다.

이게 현실이라는 점은 충분히 인식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다. 아직도 혼란스럽다.

그러니까, 적응이 안 된다.

“공주는 원래 없던 존재고, 결국 지금 공주님은 가짜야. 결론적으로 나는 대규모 술식에 홀려서 여기까지 잘못 흘러들어 온 거고.”

렌이 방긋 웃었다.

“대륙 전체를 대상으로 마법을 시전했으니 당연히 발동 시간이 느리지. 공주님이 이곳에 끌려온 이유는 하나야. 애초에 호문쿨루스에 지금 이 세계의 영혼을 집어넣는 건 규율 위반이거든. 그런데 다른 세계라면 말이 달라지지.”

렌이 내게 바짝 다가와서 표정을 풀고 물었다.

“이런 걸, 불쌍하다고 하는 거야, 공주님?”

“…….”

나는 물끄러미 렌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럼, 나는 어떡해?”

렌이 내 시선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나도 안다. 렌에게 나를 책임져야 할 의무가 없다는 걸.

렌이 날 필요로 하는 이유는 단순히 내 육체가 공주이기 때문에.

렌은 정확히는 알 수 없는 모종의 이유로 공주의 남편 자리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렌의 말대로 내 존재가 만들어진, 꾸며진 존재라면 그가 기를 쓰고 나를 멀쩡한 제국까지 데려갈 의무가 없다.

“글쎄? 공주님을 내가 소환한 게 아니잖아?”

렌이 내 손목을 확 잡아챘다. 나를 질질 끌어 침대에 털썩 주저앉히고는 그 옆에 자기도 주저앉으며 방금 보여 줬던 살벌한 표정을 금방 지우고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평온한 낯으로 말을 이었다.

“술식에는 허점이 있어. 일반인이라면 평생 모르겠지만, 적어도 난 알아차렸잖아.”

그러고는 새카맣게 멍이 든 제 팔을 쳐다보았다.

“물론 공주님이 바보처럼 자기 입으로 정체를 나불대서 안 거지만.”

렌이 고개를 홱, 돌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누군가 작정하고 공주님 정체를 캐내면 공주님은 바로 화형대로 갈 거야. 영혼에 관련된 술식은 금기시되거든. 이교도 놈들은 좋아하겠지?”

렌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방금까지는 싸늘하게 말하더니 지금은 또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신나 있지 않은가.

나는 조금 겁먹은 상태로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렌은 섬뜩한 말을 잘도 내뱉기 시작했다.

“술식이 지나치게 치밀해서 공주님을 경쟁 상대로 인식한 왕자는 공주님을 죽여서라도 권력 구도에서 쫓아내려고 할 거야. 그 과정에서 공주님 정체가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고. 아무리 치밀하게 숨겨도 작정하고 파고들면 안 들키기 어렵잖아?”

렌이 짧게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 와중에 나는 공주님이랑 약속을 해 버렸고.”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왜인지 모르게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딱히 렌이 내게 눈치를 주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공주님이 말해 봐. 이제 어떡할래?”

렌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당연히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무슨 대답을 해.

나는 고개만 푹 숙였고, 처음 겪어 보는 난관에 손을 덜덜 떨었다.

눈앞이 까마득했다. 렌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나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나마 손에 잡히는 방법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한다.

와중에 내가 처한 상황은 난처하기 그지없다.

“……뭐 어떡해. 네 계획대로 해야지.”

나도 알고 있다. 내 눈앞에 놓인 문제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면,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위치로 올라가면 되는 거다.

간단한 방법이지만 더럽게 막연하고 어려운 해답.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곳은 혈통 중심 신분제 사회고, 내가 가장하고 있는 신분은 공주다.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

“이론상?”

“왕자가 내 정체를 알아채기 전에 권력을 잡아야지.”

나는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현실감이고 나발이고 그냥 내 눈앞에 주어진 현실을 감당하기로 결심했다.

“네 목적도 정치적 힘을 얻는 거잖아? 네가 코어는 마탑에 있고, 그걸 사용하려 들면 그놈들이 가만히 안 둔다 어쩐다 하는 걸 보니 적어도 마탑과 협상이라도 해 볼 수 있는 세력을 만들어야 할 것 같은데.”

“…….”

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틀렸어?”

“불가능해.”

갑자기 튀어나온 부정적인 단어에 되려 내가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왜, 내 상식선에서는 이딴 식으로 날 소환하는 게 더 불가능해 보이는데? 책 빙의보다는 권력 장악이 더 현실성 있지 않아? 일단 난 그래.”

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팍 들었다. 그리고 렌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그래서, 넌 계속 날 도와줄 생각이고?”

내 물음에 렌이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눈을 도르륵 굴렸다.

“글쎄?”

그러고는 요사스럽게 제 붉은 입술을 깨물었다. 저건 뭐 하자는 표정이지 대체? 나는 일단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아쉬운 사람은 여기서 나였다.

“도와줘.”

“…….”

“까놓고 말해서 난 네 도움 필요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 같아.”

내 당당함에 렌의 눈동자에 초점이 흐려졌다. 얼이 빠진 것 같았다.

“대답 안 하면 도와주는 걸로 알고 있을게.”

렌이 싫다고 하면 어쩔 거냐고? 어쩌긴 뭘 어째.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져야지.

안 되면 되게 한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배웠다.

“고마워, 렌!”

나는 렌의 손을 덥석 잡고 아래위로 마구 흔들었다. 여전히 렌은 내 물음에 대답을 못 하고 있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뭐, 얘도 싫으면 싫다고 진즉에 말했겠지.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잖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렌의 귓가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만 화난 건 아닌 것 같다.

***

“좋아. 그러니까 왕자가 나를 죽이려 하는 건 설정상 내게도 차기 왕으로 지지하는 세력이 있다는 소리네? 혹시 동복 남매가 아닌가?”

내 물음에 렌이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왕자는 선 왕비 소생이고 공주님은 현 왕비 소생이야.”

“……엄마가 살아 있어?”

“엄마는 아니지. 낳은 적이 없는걸.”

“…….”

나는 이마를 짚었다. 생각보다 일이 굉장히 복잡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전 왕비는 평민 출신이었고, 현 왕비는 아스트리드 백작 가문 출신. 전 왕비는 독살로 죽었고.”

“……설마 암암리에 그 독살을 현 왕비가 했다는 소문이 돌지는 않지?”

“도는데?”

나는 입을 쩍 벌린 채로 렌을 바라보았다.

지금 객관적인 사실만 놓고 보면 완전히 내가 악역이다.

아니, 하필 죽어도 왜 독살이야? 상황만 놓고 유추해 보면 지금 왕비가 평민 출신 왕비 죽여 놓고 자기 딸내미 세력 밀어주니, 위기감을 느낀 왕자가 공주를 죽이려고 하는 거 아니야?

심지어 왕자도 생각해 보면 그냥 흔한 주인공 그 자체 아닌가? 물론 살인은 어떤 방식으로든 합당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왕자에게 있어서 공주는 어머니의 원수의 딸이다. 와, 심지어 왕자는 모르겠지만 자기가 죽이려는 그 공주가 진짜 공주도 아니야.

“설마 내가 악역이니?”

“공주님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여긴 책 속이 아니야. 공주님이 펼친 건 매개체라니까?”

“…….”

눈물이 좍좍 흐르는 기분이었다.

“설마 내가 읽었던 책을 다른 사람이 펼쳤으면 다른 사람이 내 꼴이 되는 거야?”

“응.”

렌의 단호한 대답에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다짐했다.

그래, 우리 집 황금 막둥이가 저 혼자 좋다고 책 펴 들고 읽었으면 어쩔 뻔했어.

걘 반찬 투정도 심하게 하는데. 백 퍼센트 첫날에 나가떨어졌다.

아니면 엄마나 아빠가 펼쳤다가 이 꼴 당하는 것도 완전 사절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그나마 울적한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래, 다행이네.”

“왜?”

렌이 이해 못 하겠다는 듯이 물었고,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가족이랑 같이 살거든. 우리 동생 여덟 살인데 걔가 지금 네 앞에 있다고 생각해 봐. 안 끔찍해? 너 감당 안 될걸?”

렌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무튼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럼 일단 설정상 내 뒷배에 아스트리드라는 가문이 있다는 거지?”

“응.”

“왕자가 가지고 있는 세력은?”

“신흥 부흥 세력들.”

“…….”

나는 내 미간을 잡고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신흥 부흥 세력들을 필두로 한 평민 왕비 소생의 왕자와 귀족 세력을 등에 업은 배다른 공주라니.

이거 완전 빼도 박도 못하게 내가 악역이잖아……!

“그, 우리 평화롭게 해결하는 방법은…….”

“있겠어?”

렌이 활짝 웃으며 상큼하게 대답했다.

“공주님, 현실이라니까?”

그렇지. 소설보다 현실이 더 잔인하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공주님이 평화적으로 왕자한테 접근해 봤자 왕자가 그렇구나, 하고 자기 목 밑에 칼 들이미는 새어머니 세력의 핵심 인물인 공주님을 살려 두겠냐고.”

“항상 예외란 있으니까, 희망적으로 생각해 보면,”

“만약 그렇게 해서 목숨은 부지했다고 하더라도 왕자가 머리가 깨지지 않은 이상, 공주님이 부탁한다고 해서 마탑이랑 척을 지면서까지 코어를 탈환할 리는 절대 없어.”

“…….”

무자비하게 흘러나오는 진실에 마음에 상처를 입고 시무룩해져 있자 렌이 마지막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공주님 순진하다.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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