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113)

<21>

렌이 흥분한 게 보였다.

“공주님 이제 집에 못 가겠다. 어떡하지? 공주님이 제일 쉽게 집에 돌아가는 방법은 코어를 사용하는 것뿐인데, 코어는 그놈들이 지키고 있잖아?”

“렌, 렌, 정신 차려.”

나는 손바닥으로 렌의 뺨을 약하게 톡톡 쳤고, 그는 그제야 말하던 걸 멈추고 몸에 잔뜩 들어간 힘을 쭉 뺐다.

“눈…… 그거 괜찮은 거야? 말을 끊으려던 게 아니라, 또 색이 변해 있어서 그래.”

내가 렌의 변한 눈을 가리키며 묻자 그는 커다란 손으로 황급히 제 눈을 가렸다. 그리고 아주 작게 몸을 떨었다.

당황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렌, 괜찮아. 나 봐 봐.”

내 말에 렌은 손가락을 살짝 벌려 그 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

“괜찮아? 무작정 괜찮다고만 하지 말고. 그래도 계속 같이 다닐 사람이잖아. 왜 그러는지 말해 줄 수 있어?”

내 말에 렌이 제 손을 아주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러고는 미묘한 표정으로 내게 대답했다.

“공주님은 아무렇지도 않나 봐.”

“무슨 소리야? 봐 봐.”

나는 손을 뻗어 렌의 눈을 살폈다. 눈동자는 서서히 푸른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빛에 따라서 눈 색이 바뀌는 사람도 있는 걸로 알거든? 그런데 널 보니까 꼭 그게 이유는 아닌 것 같아서.”

내 말에 렌이 날 흘끔 쳐다보다가 아주 조용하게 속삭였다.

“공주님 들으면 나 무서워질 텐데.”

“응?”

렌은 길게 뻗은 손가락을 내 어깨에 올린 후 귓가에 속삭였다.

“나, 통제가 안 돼.”

“……어?”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뭐……? 뭐가 안 돼? 나는 내 앞에서 폭탄을 던져 놓고 실실대는 렌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내 두 귀를 의심했다.

통제가 안 되긴 뭘 안 돼!

로맨스 소설 단골 대사에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다른 사람이 말했으면 음~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저 얼굴로 저렇게 목소리를 낮게 깔고 저런 대사 뱉는 건 반칙이지!

“그, 그러니까 뭐가 안 되는데?”

“공주님 안 무서워?”

질문의 포인트를 당최 이해 못 하겠다.

“무섭기보다는 좀 남사스러운데. 오해할 것 같으니 정확히 말해 주면 안 될까.”

나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물었고, 렌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마나가 통제가 안 돼.”

“그거 위험한 거야?”

내 물음에 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보통 마법사들이 쓸 수 있는 마나의 한계치보다 높게 방출할 수 있는 대신 통제가 안 돼.”

“……무슨 통제?”

“내가 뭔 짓을 하든 막을 수 없어.”

나는 렌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니까 얘 말은, 자기가 마나를 통제하지 못해서 남들보다 세다는 뜻인가? 그래서 아무도 자길 막을 수 없다?

“좋은 거 아니야? 네가 남들보다 세다는 얘기잖아.”

“…….”

그리고 난 그제야 납득했다.

“아, 그래서 아까 몬스터들도 한 방에 보낼 수 있었구나? 여기는 사람이 들어오면 금방 죽는다며.”

그럴듯했다. 렌은 누가 봐도 먼치킨 같았으니까.

“설마 같은 마법사들끼리도 견제하고 그래? 하긴, 원래 동종업계 사람들일수록 안 그런 척하면서 더 질투하고 그러지. 신경 쓰지 마, 지들이 못난 탓이지 네가 뭔 상관이야. 참 나, 어이없어.”

내가 렌의 능력에 대해 감탄하고 있자 그는 당황한 듯 입을 뻥긋거렸다.

“……아니야?”

내 물음에 렌이 내게서 몸을 홱 돌리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쭈그려 앉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뭐야, 얘 왜 저래.

“렌?”

내가 조심스레 다가가 그의 등에 손을 올리자 렌이 화들짝 놀라며 숙인 고개를 퍼뜩 들었다.

렌의 얼굴을 본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렌의 눈이 새빨개졌다. 꼭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말이다.

“공주님, 나, 나 이상해.”

“어?”

렌이 손을 파들파들 떨며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숨까지 헐떡대며 말이다.

“나, 여기가 이상해.”

렌의 손이 그의 명치를 향했다. 그리고 나는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렌이 숨이 넘어갈 것처럼 굴었으니까.

“렌!”

과호흡이라도 왔는지 숨이 거칠었다. 갑자기 이상해진 렌의 상태에 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렌, 렌. 정신 차려, 얘 왜 이래!”

“하, 으, 이상, 해.”

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무작정 렌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내게 기대게끔 했다.

“렌, 침착하고 내가 신호하는 대로 숨 쉬는 거야. 알겠지?”

나는 굉장히 무거운 렌을 껴안고 그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이러면 진정이 되겠지? 내가 말한 것 중에 뭔가 트라우마를 건드릴 만한 게 있었나?

괜한 죄책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천천히, 응. 숨 쉬고, 내쉬고.”

렌이 몸을 내게 더 바짝 기대 왔다. 그렇게 한 일 분쯤 토닥여 주자 다행히 렌의 호흡이 정상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문제는,

“렌?”

“조금만 더.”

이놈이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렌은 어느새 제 팔로 내 허리를 휘감고 있었고, 나는 역으로 렌에게 안겨 있는 모양새로 그의 등만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었다.

“공주님 이거 기분 좋다.”

“……렌, 말을 되게 이상하게 한다. 괜찮아진 거 맞아?”

내 물음에 렌이 슬쩍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뭔가 고민하듯이 입을 앙다물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응?”

그러고는 비 맞은 똥강아지 같은 얼굴로 날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음, 나 생각이 조금 바뀐 것 같아.”

렌이 손가락으로 내 머리칼을 툭, 건드렸다. 그리고 꼭 꿈꾸는 듯한 얼굴로 웅얼거리듯 내게 말했다.

“공주님이 원하는 거 다 해 줄래.”

나는 렌의 말에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를 흘끗 올려다보며 말했다.

“……렌, 멘트가 되게 이상한 거 알지?”

“뭐가 이상한데?”

렌이 진짜 모르겠다는 얼굴로 내게 묻더니 곧 알 수 없는 말을 뱉었다.

“내가 공주님한테 쓸모 있는 이상 계속 걱정해 주는 거지?”

나는 부담스러워져 렌에게서 한 걸음 떨어지며 대답했다.

“아니, 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거 잘못하면 되게 기분 나쁜 질문인 거 알지?”

렌이 눈을 깜빡였다. 모르겠다는 소리인 것 같다.

“렌. 네가 나한테 쓸모없어도, 위험에 처하거나 안 좋은 상황이 왔을 때 서로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라니까? 네가 내 철천지원수가 아닌 이상?”

내 말에 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러던데.”

“아니, 어떤 사람들을 만난 거야 대체? 그 사람들이 비정상이야.”

“정말?”

“그렇다니까. 사람 숨이 할딱거리며 넘어가게 생겼는데 방관하고 그냥 지나치는 사람은 사이코패스라고. 일면식 없는 사람도 아까 네 상태면 신경 쓰는 게 당연한 거야.”

나는 혼란스러워 보이는 렌의 등을 토닥여 주며 말을 이었다.

“의문이 풀렸어?”

그에 렌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다, 정말.

“공주님 말은 이해했어. 그러니까 공주님이 정상이라고 믿고 싶은 거지?”

“아니, 말을 왜 그렇게 해? 내가 정상이라니까?”

“응, 알았어. 그렇게 믿을게.”

나는 다시 방긋 웃는 렌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오, 답답해.

“아야, 왜 때려.”

“그렇게 믿을게, 가 뭐야. 그렇게 믿을게, 가! 너 다른 사람한테 그런 식으로 대답하면 욕먹어.”

내가 렌의 어깨를 팍팍 때리자 렌은 뭐가 좋은지 하하 웃으며 장난치듯 내게 물었다.

“그럼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공주님이 알려 줘. 가르쳐 준 대로 할게.”

그리고 아주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뭐,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건 상관은 없지만.”

그에 나는 할 말을 또 잃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얘가 하는 말도 맞다. 그렇지,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건 무슨 상관이야.

“……아니야. 그게 맞긴 하지. 남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네 사고방식을 존중해. 렌.”

“응?”

렌이 뭔 소리 하냐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뭐가 웃긴 건지 비웃듯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공주님 되게 재밌어. 알아?”

“어, 나. 그런 소리 종종 들어.”

“…….”

렌이 웃음기를 지우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왜? 나 뭐 잘못 말했나? 나 웃기다는 소리 많이 들어 봤는데?

“설마 얼굴이 웃기다는 소리 아니지?”

나는 순간 든 싸늘한 생각에 경악하며 렌에게 물었다. 안 그래도 지금 이 공주라는 사람 얼굴이 나랑 똑같이 생겨서 착잡한데 정말 저 뜻이라면 용서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물론 내가 용서하지 않고 자시고가 의미가 있나 싶지만.

“나는 재밌다고 했지 웃기다는 소리는 안 했는데.”

“그게 그거잖아. 당장 말해. 내 얼굴이 웃겨?”

“…….”

렌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 그럼 다행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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