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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렌이 내 손을 덥석 잡고 아무 데나 들어갔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우리 쪽으로 확, 뛰어왔지만 렌의 손짓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반사적으로 쾅!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으나 렌의 부름에 의해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거. 꽤 비싸니까.”
렌이 거의 바스라질 것 같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책 하나를 내게 건넸다.
“유적 헌터들. 목숨 아까운지도 모르나 봐. 놈들 실력이면 곧 뜯어 먹히거나 아사할 텐데.”
렌이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뭐야, 그럼 여기로 사람이 오긴 온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이렇게 깊숙이까지 들어오는 놈들은 잘 없을 거야, 공주님. 쓸데없는 기대하지 마.”
렌이 섬뜩하게 웃었다. 뭐, 얘가 말 뭐같이 하는 게 한두 번인가. 나쁜 의도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닌 걸 알기 때문에 대충 넘기기로 했다.
“아니, 렌. 저번에 분명히 이단자들도 숨어든다고 했잖아. 그럼, 우리가 있던 장소는 뭐야? 거기도 이교도인가 뭔가라고 했잖아. 둘이 달라?”
내 말에 렌이 정말 이상한 걸 묻는다는 듯 대꾸했다.
“이 세상에 이교도가 어디 한둘이야? 우리가 머물렀던 오두막은 오백 년 전에 있던 이교도고. 안타깝게도 그 종교는 멸망 직후에 사라졌어.”
하긴. 당장 우리나라에도 사이비가 널렸는데 여기라고 다르겠냐. 묘하게 현실적이어서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이교도들은 이렇게 깊은 곳까지 못 와.”
렌은 내게 확실히 설명해 주려는지 다 으스러진 창문으로 의자를 던졌다.
미약한 짤그락 소리와 함께 바깥에 숨어 있던 몬스터가 창문 안으로 훅, 대가리를 찔러 넣었고, 렌은 도대체 뭐가 즐거운 건지 하하하 웃으며 몬스터의 안면에 불덩이를 갈겨 버렸다.
뭔가, 전보다 쌩쌩해진 느낌인데, 내 착각인가?
“봤지? 걔들은 이거 감당 못 해.”
렌이 방긋방긋 웃으며 책상에 걸터앉았다. 나는 렌이 던져 준 책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여기는 가끔 유적 헌터들이 오고, 경계 밖은 제국군들이 순찰한다고? 그럼 제국군들은 이교도만 잡는 거야?”
렌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경계 밖 몬스터들이 재건 구역까지 넘어오지 않게 하려면 토벌이 필요하니 경계에 항상 주둔해 있는 거고. 뭐, 이교도들은 신전의 압박 때문에 세력 확장 전에 억지로 잡는 거고. 유적 헌터들이 가져온 물품은 고가에 거래되니 제국에서는 딱히 그들을 단속할 필요는 없지. 걔들이 경계 밖에서 죽든 말든 알 바 아니니까. 가끔 그들이 마법 아티팩트라도 들고 오면 다들 개처럼 달려들거든.”
마법 이야기가 나오자 렌의 표정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적어도 마법은 오백 년 전이 더 성행했으니까. 비싸게 팔리는 건 당연해.”
렌은 더 이상 얘기하기 싫다는 듯 내 손을 잡고 밖으로 잡아끌며 말을 돌렸다.
“공주님, 이제 갈까? 여기는 볼 게 없네.”
나는 렌에게 종이인형처럼 끌려갔다. 끌려가는 와중 물끄러미 렌이 준 책을 쳐다보았다.
“렌, 이거 안 읽어 봐도 돼?”
내가 렌에게 책을 보여 주며 말하자 그는 정말 관심 없다는 듯 대답했다.
“읽어서 뭐 하게? 그리고 고대 제국어는 소실되어서 이제 못 읽어.”
렌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식물도감은 어떻게 읽었는데?
렌은 내 표정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렸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알아서 술술 대답했다.
“마탑은 고대 룬어를 쓰니까. 그건 어렸을 때부터 배웠어.”
제국이랑 마탑이랑 쓰는 언어가 달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책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당황했다.
“……렌, 큰일 났어.”
“응?”
마탑에서도 그랬듯, 내가 펼쳐 든 책의 글씨가 마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익숙한 한글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나, 이거 읽혀.”
***
“아니, 빙의를 했으면 무슨 시스템이라든가 먼치킨적 능력이나 주지, 언어 버프가 말이 돼? 말이 되냐고!”
나는 아무 죄 없는 렌을 흔들며 하소연했다.
“음, 공주님이 하는 소리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억울해!”
나는 울적한 마음으로 책을 다시 쥐었다. 꽤 두꺼운 책은 전부 수기로 작성된 일기장이었다.
제일 앞면에는 ‘렌드로프’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고, 첫 장을 보니 무슨 연구원인 것 같았다.
“공주님 쓸데없는 건 왜 자꾸 보고 있어?”
“아니, 그냥 지나치기에는 내용이 엄청 심오하잖아. 이것 봐.”
나는 일기장을 후루룩 넘겨서 렌에게 특정 구간을 보여 줬다.
“나는 고대 제국어는 모른다니까? 왜 보여 주는 거야?”
“아니, 잠자코 봐 봐. 내가 읽어 줄게.”
“응.”
나는 렌을 구석으로 끌고 가 몬스터가 없나 주변을 휙휙 둘러본 후, 속삭이듯 책의 내용을 읊어 주기 시작했다.
“여기 보면 백오 일째, 이때부터 멸망이라는 게 가속화됐나 봐. 이 사람은 황실에 불려 가서 실험을 하고 있었대. 능력이 꽤 있었던 것 같아.”
렌은 뚱하니 내가 보여 준 책을 쳐다보았다. 관심이 없어 보였다.
“여기 내가 돌아갈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단서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여기 보면 실험 내용 같은 게 적혀 있어. 무슨 코어 어쩌고 하는데 이게 에너지원 같은 건가 봐? 되게 의미심장하잖아.”
내 말에 렌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뭔가 걸리는 거라도 있는지 인상을 팍, 찌푸리고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코어?”
“응, 코어. 여기 보면 이 사람이 남쪽 땅에 묻혀 있던 코어를 끄집어 올려서 연구하기 시작했대. 그래서 멸망이 가속화되었다는데? 렌, 근데 정확히 멸망이 뭐야?”
내 물음에 렌이 잠시 허공을 빤히 쳐다보다가 물끄러미 낡은 로브에 가려진 제 손목을 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마탑에서 본 검은 문 있지?”
“응. 그 피막같이 생긴 거?”
“그게 게이트야. 동시다발적으로 전 지역에 열린 게이트에서 알 수 없는 것들이 튀어나와 살아 있는 것들을 파괴하고, 죽은 자들의 영혼은 사라지지 않고 이곳을 떠돌지.”
렌의 말에 나는 숨을 삼켰다. 그리고 해탈하기 시작했다. 게이트? 여기서 게이트가 왜 나와……? 나 도대체 뭘 읽고 있었던 건데?
“물론 지금은 옛날만큼 자주 열리지는 않아. 그러니까 경계 안 인간들이 주제도 모르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게 아닐까?”
렌이 싱긋 웃으며 내 손에서 일기장을 앗아 갔다.
“코어라면 이미 경계 안에 있어. 여기 있던 걸 이미 오백 년 전에 훔쳐 갔거든.”
렌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코어가 있어서 멸망을 최후까지 막을 수 있었는데, 그 코어를 훔쳤으니 여긴 망해 버렸고, 경계 안의 생존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지. 그러니까 걔들이 열받아서 공주님까지 소환한 거지. 안 그래?”
그리고 뭔가 고민하는 듯 턱을 쓸던 렌은 갑자기 눈을 반짝이며 내게 제 얼굴을 쑥 들이밀고 말했다.
다 좋은데 갑자기 얼굴 공격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부담스럽다고!
“어쩌면 그 코어가 공주님이 돌아갈 수 있는 실마리가 될지도 몰라. 그 정도 마나면 사람도 살릴 수 있으니까. 공주님의 육신의 시간만 뒤로 돌리면 충분히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렌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순간적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흥분해서 까치발을 들고 렌을 쳐다보았고, 렌은 그런 나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아주 미약하게 고개를 끄떡였다.
“그런데 그건 마탑에 있어. 함부로 못 가져가.”
“마탑이 뭔데? 전에 있던 데는 이미 망한 거 아니야?”
내 물음에 렌이 표정을 완전히 썩히고 대답했다.
“경계 안에도 마법사들은 있어. 마법사들이 기거하는 곳이 마탑이고.”
그리고 그제야 나는 뭔가 질문을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탑에 대해 말하는 렌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공주님 못 돌아갈 수도 있겠다. 공주님이 무슨 수로 마탑을 상대해? 코어라면 아주 애지중지하게 보호하고 계신데.”
렌의 눈 색이 또 변하기 시작했다. 뭐가 문제지? 마탑? 아니면 코어? 도대체 뭐 하는 집단이길래?
“아, 이건 말하면 안 됐었나?”
렌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렌은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더니 뭔가 생각하듯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었고, 나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지금 상황에서 내가 렌과 한배를 탄 건 확실했다.
그러면 같이 행동하는 입장에서 렌의 과거에 대해 물어야 할까? 여전히 그건 선 넘는 행동인 건가?
잘 모르겠다.
나는 조심스럽게 렌의 손을 잡은 뒤 웃으며 말했다.
“렌, 알았어. 우리 그 얘기는 그만하자.”
내 말에 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왜? 공주님 돌아가고 싶으면 코어에 대해서 알아야 할 거 아니야. 황궁으로 가면 연구 기록이 더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너무 막연하잖아. 뭐, 코어에 대해 조금 더 안다고 해서 내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딱, 나오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이미 경계 안에 코어가 있다며. 그럼 대충 사정사정하면 빌려주지 않을까?”
렌은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양 대놓고 나를 비웃었다.
“공주님. 영혼과 관련한 마법은 그만큼 큰 대가가 필요해. 공주님이 그 코어를 써 버리고 나면 코어가 멀쩡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렌의 손이 역으로 내 손을 덮었다. 그의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고, 나는 아주 미약한 공포감을 느꼈다.
“그 새끼들이 그걸 가만히 두고 볼 거라고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