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13)

<18>

렌은 다재다능했다. 사물의 기억을 읽다니. 사이코메트리야 뭐야.

“그럼 적어도 그 머리 세 개 달린 여자가 다녔던 곳은 알 수 있는 거 아니야?”

렌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공주님 똑똑하네.”

렌이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냉큼 내 쪽으로 다가와 내 어깨를 잡았다.

“엄마야!”

“이제 자도 좋아.”

렌은 냅다 내 어깨를 잡고 눌러 버렸고, 그 덕에 나는 침대에 벌렁 널브러졌다.

이거 하나는 확실히 알겠다. 렌은 나를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부담스러운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순 없다.

나는 눈만 깜빡이며 렌을 쳐다보았고, 렌은 내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제 커다란 손으로 내 눈을 가리며 속삭였다.

“자.”

“아니, 렌 이 상황에 잠이 어떻게,”

렌이 내 눈을 가린 제 손을 치우고는 푸흐흐 웃으며 바짝 다가와 내 귓가에 대고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쉿.”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

나는 쓸데없이 개운한 상태로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가만히 누워서 옆에 있을 렌에게 물었다.

“……렌 나한테 마법 걸었니?”

“응.”

너무 당당한 렌의 태도에 할 말이 없어졌다. 이게, 맞는 건가……? 아니, 도대체 이 동네 마법사들 수준이 어느 정도까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녹초였던 상태로 옆에서 말 한 번 걸어서 사람을 재워?

이거 범죄 아니야? 윤리적으로 맞는 건가……? 어차피 나는 긴장 상태로 잠을 못 자는 상태였고, 결국에는 강제적으로 재워져서 기분이 좋아지기는 했는데, 이게 맞아?

“잘 잤어, 공주님?”

“…….”

저놈의 공주님 호칭! 나는 입술을 깨물며 렌에게 말했다.

“렌, 나는 진짜 공주님도 아닌데 굳이 공주님이라고 불러야 할까?”

그런 내 말에 렌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내 마음인데? 그렇다고 진짜 이름을 부를 수는 없잖아. 다 들켜 버릴 텐데?”

나는 그냥 하하 웃었다. 할 말 없다. 참 대화를 싹둑 자르는 재능이 뛰어나다.

렌은 어제 그 난리를 치고 폐가에서 자고 일어난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멀쩡한 얼굴로 개소리를 늘어놨다.

“공주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표정 이상해지는 거 웃겨.”

“……야.”

얘가 누굴 놀리나. 나는 렌을 째려보며 응징의 의미로 놈의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밀쳤다.

그러니 더욱더 진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바짝 다가와 제 푸른 두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공주님 진짜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자더라? 그러다가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납치당하면 어쩌려고.”

이어지는 말에 나는 계속 놈의 가슴을 손으로 찰싹찰싹 때리며 대답했다.

“네가 마법으로 재웠으면서 뭘 업어 가도 몰라!”

그에 렌이 제 가슴팍을 물끄러미 보고는 내게 물었다.

“공주님이 때리는 건 하나도 안 아파. 왜일까?”

“안 아프게 때렸으니까 당연히 안 아프지. 너 자꾸 나랑 농담 따먹기나 할래?”

내 말에 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도르륵 굴렸다. 그러고는 무섭게 내 뒤를 빤히 쳐다보았다.

진짜 왜 또 이래?

나는 일단 뒤를 돌아보지 않고 렌을 콕콕 찔렀다. 의심쩍은 행동 하지 말고 말을 해라 이 자식아!

“공주님. 슬슬 여기서 나갈 때가 됐어. 충분히 쉬었어?”

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렌이 내 뒤를 노려보던 걸 관두고 아까처럼 방긋 웃고는 어제 주웠던 브로치를 내밀며 말했다.

“공주님이 기절해 있을 때 살펴봤는데, 여기서부터 구 수도 도심지까지는 이동 가능해.”

……날 재운 게 아니라 기절시킨 거였어? 어이가 없어서 인상을 찌푸리고 렌을 쳐다보고 있자 그가 내 표정을 보고 흠칫거렸다.

“공주님, 좌표가 확보되어서 텔레포트로 이동할 수…… 있는데.”

그리고 급속도로 쭈글해지기 시작했다. 뭐가 문제인가 싶어 표정을 푸니까 렌의 표정도 빠르게 원상 복구되었다.

나는 가만히 그런 놈을 보며 생각했다. 얘, 내 눈치 보니?

살짝 어이가 없긴 했다. 눈치를 보면 내가 봐야지 지가 왜 봐……?

“렌, 여기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 세계에선 그렇게 억지로 재우는 거 범죄야. 앞으로는 할 거면 나와 상의는 해 줬으면 좋겠어. 호의로 한 일인데 내가 오해하면 억울하잖아. 안 그래?”

“…….”

내 말에 렌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할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침묵했다.

황당했다. 나, 틀린 말 했니? 설마 삐진 건가? 무슨 삐진 사람 표정이 저렇게 살벌해? 누가 보면 사이코패스인 줄 알겠다.

“렌?”

내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부르자 렌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초점 없이 흔들리던 눈으로 나를 다시 똑바로 쳐다보았다.

“렌, 이럴 땐 그냥 다음부터 안 그런다고 하면 돼. 설마 내가 뭐라고 했다고 삐진 건 아니지?”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친절하게 말하자 렌이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잠깐, 얼굴은 왜 붉히는 건데 도대체!

렌은 조금 들뜬 얼굴로 내게 대답했다.

“이제부터 공주님한테 꼭 물어볼게.”

“그으래, 그런데 아까 좌표 그건 무슨 소리야? 텔레포트?”

내 물음에 렌이 뭔가 깨달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 공주님 텔레포트가 뭔지 모르는구나? 그래서 칭찬 안 한 거야?”

렌의 말에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칭찬? 뭔 소리야?”

“공주님이 잘했다고 할 때 기분 좋거든. 감시관들이 하는 거랑은 느낌이 본질적으로 달라.”

도대체 그 빌어먹을 감시관은 누구야, 대체?

“아무튼 이 숲에서 빠져나갈 수 있어, 공주님. 도시까지 가는 법을 알았으니까 이제 땅바닥에서 자다가 시체 될 걱정은 안 해도 돼.”

렌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시체 될 걱정이라니! 무슨 말을 해도 꼭 저렇게 한담?

“흠, 근데 이 브로치 주인, 생각보다 복잡한 삶을 살았던데.”

렌이 브로치를 허공에 한 번 던졌다가 다시 쥐며 조금 착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굳이 나한테 찾아온 이유가 뭘까?”

“찾아와?”

렌의 의미심장한 대사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뭔가 불만스러운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어젯밤에도 공주님한테 손도 안 댄 거 봤잖아. 이 브로치 주인이 노리는 건 나였어. 뭐, 하는 소리를 들어 봐도 마법사한테 원한이 있었던 것 같고. 브로치에 남긴 기억이나 감정의 찌꺼기 같은 것도 대부분 부정적인 것들이고.”

렌이 보석의 중앙을 엄지로 만지작거리며 잇던 말을 멈췄다.

“…….”

돌연 입을 다문 렌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나는 지금에 와서야 렌의 눈동자 색이 어떤 상황에서 변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눈동자 색의 변화는 렌의 감정의 변화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렌의 눈동자 색이 보라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레이나, 도망가.”

“놀아난 거야, 마탑에 놀아난 거라고.”

“나가고 싶어, 살려 줘!”

렌은 가만히 망령이 떨어트린 브로치를 응시했다.

도대체 하필이면 지금 이 장면을 그에게 보여 주는 이유가 뭘까?

브로치의 사념은 주인의 생을 꽤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렌과, 리나 플로린의 몸을 차지한 여자가 있는 이곳은 일종의 감옥이었다.

오두막을 막아 뒀던 결계는 시간이 오래 흘러 이미 주변 몬스터들에게 파괴된 상태라, 이곳이 그런 곳으로 쓰였을 줄은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이 작은 오두막이 머금고 있는 사념은 피부를 찌를 정도로 강렬했다.

이곳은 마탑의 위치를 가리기 위한 일종의 덫이었고, 마탑은 일부러 이곳에 이교도를 끌어들여 신전과 황궁의 시선을 돌렸다.

이교도들은 이곳으로 이끌려 들어오며 현재의 마탑과 소름 돋게도 똑같은 형태로 여러 가지 실험을 자행했다.

‘대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엿 같은 문구를 또, 들먹이며.

결국 브로치의 주인은 여느 그의 동기와 비슷한 형태로 죽음을 맞이했다.

사실 이제 그의 주변에서 뻔질나게 벌어지는 피비린내 나는 진실에도 무감해져 뭐가 끔찍한지도 잘 느끼지 못했다.

렌은 브로치의 사념을 보며 멍하니 눈만 깜빡거렸다.

“그래도 숲을 빨리 빠져나갈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리고 제멋대로 정한 그의 구원자의 기절한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공주님은 마탑보다 여기가 더 무서운 모양이니까 잘됐어. 그렇지?”

렌은 가는 제 손으로 여자의 콧대를 몰래 훑었다. 전신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만약에 여자가 눈을 번쩍 뜬 채로 그를 바라보면 어떨까?

렌은 여자가 하던 것처럼 그녀의 뺨을 쥐어 보았다. 따뜻했다.

잠든 여자의 얼굴은 언제 벌벌 떨었냐는 듯 평온했다.

“이 브로치의 주인은 멍청했어. 왜 죽었는지 알아? 자기보다 어린 인간 하나 구하자고 빼돌려서 먼저 죽은 거야.”

조금 전에는 정말 죽을 뻔했다. 방심했다. 어쨌든 경계 밖은 위험했고, 여자를 보호하며 거의 이틀이 가까운 시간 동안 숙면도 취하지 못한 채 몬스터들을 피해 은신처까지 찾기 위해서는 상당한 마나를 소비해야만 했는데, 결국 한계에 다다랐던 것이다.

그리고 문제의 구원자께서는 주제도 모르고 그를 구하려 들었다.

어차피 덤벼 봤자 질 거 뻔히 알면서.

다행인 점은 저 망령의 분노는 오로지 마법사만을 향해, 누워 있는 여자에게는 해를 가하지 않았다는 것.

그게 아니었다면 여자는 벌써 죽었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