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113)

<16>

“…….”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분명히 봤다. 머리가 세 개인 여자가 분명히 날 쳐다보고 있었는데…….

없어졌다.

“뭐야 저건.”

그때였다. 옆에서 조용히 웃고 있을 줄 알았던 렌이 대놓고 기분 나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렌은 대뜸 여자가 있던 자리로 향했다. 말릴 틈도 없었다.

“…….”

렌은 꽤 살벌해 보이는 표정으로 여자가 있던 자리에 있는 물건을 발로 걷어찼다. 나는 입을 막고는 렌이 하는 행동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공포 영화에서 저렇게 나대는 애들이 제일 먼저 죽던데 쟤 지금 뭐 하는 거야!

“렌, 렌!”

나는 허겁지겁 렌에게로 달려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에 렌이 서늘한 표정으로 뒤를 휙,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나를 보자마자 평소와 같이 히죽 웃어 보였다.

“렌, 뭐 해?”

내 말에 렌이 눈을 데구루루 굴리며 고민하는 듯 가만히 침묵을 지키다 곧 입을 열었다.

“짜증 나게 침대 있는 데서 버티고 있잖아.”

“…….”

렌이 제가 무너트린 물건 잔해들을 주워 들어 낡아서 다 부서진 창문 밖으로 던져 버렸다.

나는 멍하니 방 안을 정리하고 있는 렌을 쳐다보았다. 쟤는 지금 머리 세 개 달린 귀신이 문제가 아니고 여기를 우리가 잘 곳으로 정했는데 누군가 있다는 사실이 거슬리는 건가?

일단 사고방식이 나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건 알겠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렌의 등을 쓸어 주었다. 이해는 못 하겠다만, 덕분에 덜 무서워지긴 했다. 렌의 그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 덕에 개미 눈물만큼이나마 귀신이라는 존재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왜?”

“아니, 여러모로 그냥 고마워서.”

“뭐가?”

렌은 무슨 개소리냐는 듯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면 안 될까?”

내 말에 렌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허리를 숙여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흥미가 식었는지 뒤를 홱, 돌아 방 안에 있는 잔해들을 발로 툭툭 치웠다. 그러곤 다 끝났다 싶은지 내게 말했다.

“공주님 움직이면 안 돼.”

순간 렌이 팔을 쫙 뻗었다. 나는 렌이 시킨 대로 가만히 서서 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기 온 지 겨우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나흘째인가?

아무튼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짧은 기간 동안 인생에서 절대 경험하지 못할 온갖 경험을 다 해 보는 것 같았다.

렌의 발밑에서 황금빛 마법진이 그려졌고, 마법진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하자 내 주변도 렌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리저리 부서진 잔해들이 서로 엉겨 붙기 시작했고, 꼭 사람 말을 역재생한 듯한 소리도 스쳐 지나갔다.

형체를 알 수 없던 가구들이 점차 본래의 모양을 찾아갔고, 나는 그제야 침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래서 침대 타령을 한 거구나.

나는 그냥 멍하니 서서 렌이 하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

뭔가 공포스럽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했다. 렌이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낡고 오래된 것들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촛대의 불씨가 살아나고, 먼지만 가득하던 공간에 깨끗한 바람이 불었다.

물론 분위기는 여전히 사이비 종교 건물 같긴 했다. 예를 들어 의미 모를 사슴 두개골 박제가 다시 살아났다거나, 다 찢어져서 바스라진 그림이 원 형태를 찾았다거나.

나는 소름 돋은 양팔을 문지르며 렌에게 아까 따 온 과일을 내밀었다.

그리고 문제의 오브젝트들이 걸려 있는 벽을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렌, 괜찮은 거 맞아?”

“안 괜찮을 게 뭐가 있어?”

렌은 태연하게 내가 내민 과일을 먹으며 가리켜진 곳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튕기자 냅다 벽에 걸려 있는 온갖 불길한 것들에 불길이 솟구쳤다.

나는 간결하고 쿨하다 못해 시린 렌의 행동에 입만 쩍 벌리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되게 이상한 거 무서워하네. 저거 무서워서 신경 쓰고 있던 거 맞지? 공주님.”

“이상하니까 무서운 건데…….”

“난 안 무서운데?”

“난 무서워!”

나는 자꾸 딴지를 거는 렌의 어깨를 때리며 째려봤다. 지금 저거 즐기고 있는 거다. 봐라, 지금도 뭐가 웃긴지 웃고 있다.

“나 진짜 무섭거든?”

“응, 알았어.”

그때였다. 렌이 갑자기 내 겨드랑이 밑으로 제 손을 쑥 넣더니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통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렌을 쳐다보았다. 발이 허공에 부웅 떠올랐다. 렌은 당황한 나를 침대에 냉큼 앉혔다. 그리고 본인도 털썩 앉으며 내게 물었다.

“공주님 안 먹어?”

“어? 어, 먹어야지.”

렌의 말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열매를 입에 가져다 댔다. 과육을 베어 물며 가만히 내 옆에 앉은 렌의 무릎을 보고 생각했다.

이 상황에 무슨 쓸데없는 고민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오늘 밤 나는 렌과 함께 보내야 했다. 무조건적으로 말이다.

그리고, 여긴 침대가 하나뿐이다. 물론 나는 절대 렌과 떨어져 있을 생각이 없다.

유교걸인 내 입장에서, 합리적이며 최선인 방법은 같은 공간에 있되, 내가 바닥에 내려가서 자는 거였지만 저 뻥 뚫려 있는 침대 밑이 도무지 감당이 안 됐다.

당장 뭐가 튀어나와도 안 이상하단 말이지?

그렇다고 렌 보고 바닥에서 자라고 하면 그건 진짜 염치없는 짓이었다.

누가 봐도 렌 혼자 쌩고생하면서 탑 밖으로 탈출했는데 바닥에서 재운다? 말도 안 되지.

결론은 한 침대에서 같이 자는 게 제일 맞는 선택지이긴 한데…….

나는 슬쩍 시선을 올려 과일을 먹는 렌을 쳐다보았다.

역시 렌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러니까 꼭 나만 김칫국부터 마시고 설레발치는 사람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래, 상식적으로 이 긴박한 상황에서 그런 거 생각하는 게 이상하긴 하지.

하지만 렌은…… 너무 잘생겼는걸!

절로 한숨이 나왔다. 진짜 지금 내가 뭐 하고 있는 건지 심각하게 회의감이 느껴졌다.

“공주님 맛없어?”

“어, 아니.”

렌이 갑자기 제 얼굴을 내게 대뜸 들이밀었다. 그리고 뭔가 석연치 않은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갑자기 왜 그래?”

렌이 내게 성큼 다가오며 물었다. 나는 내게 가까이 붙은 렌의 시선을 피해 눈을 돌렸다. 방금까지 이상한 생각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렇게 가까이 다가오면 상당히 쪽팔린단 말이야!

“무슨 소리야, 렌. 하하하, 이거 생각보다 맛있다.”

“맛없는데.”

“배고파서 그런지 다 맛있는 것 같아. 그렇지?”

렌이 인상을 찌푸리곤 억지로 내 시선을 맞추며 대답했다.

“공주님 왜 나 피해?”

당황스러웠다. 내가 뭐…… 했다고?

“공주님 내 시선 왜 피해?”

나는 겨우 렌의 두 눈을 쳐다보았다. 파란색 눈이 아주 살짝 보랏빛으로 물들려고 하는 게 보였다.

도대체 저 눈 색 변하는 기준이 뭐야? 여기는 빛도 없는데.

괜히 정곡을 찔린 느낌이 들어서 나는 손가락으로 렌의 어깨를 꾹 눌러 밀어냈다.

“아, 하하하, 내가 언제 피했다고 그래.”

“지금도 피하잖아.”

내가 렌의 시선을 피하면 피할수록 그는 더 끈덕지게 제 부담스러운 얼굴을 내게 들이밀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

“기분 나빠.”

렌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른 곳으로 돌렸던 시선을 슬그머니 움직여 살피자 굳은 렌의 얼굴이 보였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너랑 한 침대에서 잘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심란해졌어, 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내가, 만지는 게 싫어?”

“…….”

나는 결국 입을 쩍 벌리고 렌을 바라봤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질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그런데 공주님은 나 만졌잖아. 난 안 돼?”

“…….”

언뜻 들으면 굉장히 흥미로울 질문이었다.

“렌, 질문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리고 내가 널 언제 피했어? 지금 우리 정확히 오 센티 떨어져 있거든?”

“나 알아. 내 시선 피했잖아. 공주님.”

렌에게는 상황을 되게 어색하게 꼬다가도 맥 빠져 버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뭔가, 빙빙 돌려서 논리적으로 대답하면 이해 못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굳이 굳이 진실을 실토하게 하는 렌의 집요한 눈길 탓에 얼굴이 금방 붉게 달아올랐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열심히 손에 쥔 과일을 와작와작 씹었다.

하 씨, 쟨 쪽팔리게 별것도 아닌 걸 자꾸 캐물어!

“공주님도 내가 혐오,”

“뭔 소리야! 외간 남자랑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게 처음이라 긴장돼서 그랬다!”

“…….”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데 또 묘하게 사람 신경 긁는 재주가 있어서 결국은 씩씩대며 렌의 팔을 주먹으로 약하게 때리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걸 도대체 몇 번을 물어보는 거야. 딱 보면 몰라?”

내가 억울함을 잔뜩 담은 얼굴로 렌을 째려보자, 렌은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게 왜?”

“…….”

할 말이 없었다. 그렇지. 이론상으로는 문제 될 거 없지. 그래서 나는 훌륭한 모범 답안을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문화 차이인가 보지. 우리나라에서는 그래.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고, 생물학적으로 너는 남자고, 나는 여자니까 그, 아무래도…….”

내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 렌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왜? 나는 여자랑 많이 잤는데.”

“……응?”

순간 내 두 귀를 의심했다.

“스물여덟 명이었나? 매일 같이 잤는데 아무 일도 없었어. 뭐, 있던 애들은 폐기 처분되긴 했지만.”

그리고 심장이 덜컥,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얘는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여기서 폐기 처분이 왜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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