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113)

<14>

Chapter. 3

“공주님 쫄보야?”

“조용히 해 줄래? 그리고 나 진지하거든, 지금?”

나는 우선 침을 꿀꺽 삼켰다.

“흠, 이래서 나갈 수 있겠어?”

렌이 내 다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에 나도 고개를 숙여 내 다리를 쳐다보았다. 눈치채지 못했는데 다리가 와들와들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잠까지 못 자 머리가 굉장히 아팠다. 몇 시간 동안 긴장으로 인한 각성 상태가 이어져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나는 대충 이마를 부여잡고 렌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이제 여기서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면 된다고?”

내 말에 렌이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북쪽으로 쭉 가다 보면 경계를 정리하는 제국군이 나올 거야. 운이 좋으면 더 깊숙이 들어온 순찰대라도 만날 수 있겠지. 그런데 우리는 걔들이랑 마주치면 안 돼.”

렌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 안 된다는 거지?

“겨우 경계 밖에서 탈출했는데 지하 감옥에 투옥될 수는 없잖아? 경계 밖에 몰래 숨어들어 사는 사람들은 이단자들 아니면 유적 헌터밖에 없거든. 공주님이랑 나는 누가 봐도 유적 헌터 같아 보이지는 않잖아?”

“……뭐가 또 있는 거야?”

나는 생각보다 복잡한 세계관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런 내 표정을 렌이 뚱하니 쳐다보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응. 그러니까 우리는 바로 플로린스 왕국까지 가야 해. 뭐, 그래도 플로린스로 가려면 제국을 통과해야 하긴 하지만.”

렌이 흘끗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뭔가 고민하듯이 가만히 서 있더니 내게 말했다.

“공주님, 마을로 가면 한숨 잘 수 있어. 경계 밖이라고 해서, 원래 있던 건물까지 무너진 건 아니니까.”

나는 방긋 웃는 렌의 얼굴을 보며 침만 꼴깍꼴깍 삼켰다.

“일단 저…… 숲을 지나가야 하는 건 맞지?”

“당연한 거 아니야, 공주님?”

***

“흐어어어!”

“아야. 공주님 아파, 살살 잡아.”

“뒤, 뒤에서 소리, 바, 박쥐!”

“박쥐가 아니라 블러드메리암이야.”

그게 뭔데! 나는 거의 울먹이며 렌의 팔을 이리저리 잡아당겼다. 과장 조금 보태서 금방이라도 혼절할 것 같았다!

“정말, 정말 미안한데, 렌. 얼마나 남았어?”

“여기 들어온 지 십 분밖에 안 지났어, 공주님.”

울고 싶었다. 그래도 탑 안에서는 나름 버틸 만했다. 벽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이렇게 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빼곡하게 자라난 거대한 나무들이 시야를 가린 가운데 밀폐되지 않은 사방에서 괴물들이 언제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세계에는 유령도 있다. 그것도 살상력 있는 유령 말이다.

“공주님 이래서 나갈 수 있겠어?”

렌은 뭐가 웃긴지 대놓고 나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제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살짝살짝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너무 무서워하는 거 아니야?”

“나 진짜 무섭거든? 장난 아니야. 나 진짜 무서워. 여긴 왜 이렇게 주변이 시뻘게? 응?”

내가 덜덜덜 떨면서 묻자 렌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마나장이 뒤틀려서. 이미 이 땅에 있는 마나 코어는 없어진 지 오래고, 그로 인해 대기 중에 머무는 마나랑 땅 자체에 녹아들어 있는 마나랑 균형이 안 맞아서 하늘에 있는 마나장이 붉은색으로 나타나는 거야.”

굉장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대답에 나는 와들와들 떨던 걸 멈추고 렌을 빤히 쳐다보았다.

참, 정서적으로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은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단 말이지.

“물론 불길한 증조는 맞아.”

“…….”

나도 모르게 렌의 팔을 때릴 수밖에 없었다.

“아야.”

“그게 위로야? 응?”

“나는 위로해 준 적 없는데.”

나는 생각보다 굉장히 얄미운 렌을 째려보며 다시 그의 팔을 낚아챘다.

“빨리, 빨리 나가자. 여기 더 있다가 정신병 올 것 같아.”

내 말에 렌이 뭔가 고민하는 듯 작은 신음을 흘리더니 곧 눈썹을 쓱 들어 올리며 뭔가 거슬린다는 시선을 전방에 던졌다.

그리고 내게 말했다.

“공주님, 저기 앞에 오두막이 하나 보이는데.”

“…….”

렌이 손을 뻗어 앞을 가리켰다. 그러나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당최 뭐가 보여야지 반응을 하지.

눈앞에 있는 건 여전히 빽빽이 들어찬 나무들과 군데군데 나무 줄기에 자라난 기괴한 형태의 버섯들, 그리고 붉은 배경뿐이었다.

“들렀다 가자.”

“……그래도 되는 거야?”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렌에게 물었다. 불길했기 때문이다. 붉은 숲에 뜬금없이 오두막이 있다고?

렌은 마법사니까 내가 보지 못하는 걸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한다. 오두막이 있다는 말은 사실일 거다. 렌이 굳이 나한테 거짓말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응, 어차피 여기나 저기나 위험한 건 똑같아.”

“…….”

나는 하하 웃었다. 저게 도대체 무슨 말이냐. 시종일관 태평한 렌 덕분에 아직도 문제의 심각성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여기서 더 걸어갔다가는 공주님 쓰러질걸?”

그때였다. 렌이 갑자기 제 긴 다리를 들어 내 종아리를 쓰윽 밀었고, 그러기가 무섭게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봐.”

고맙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렌은 쓰러지는 나를 잡아 똑바로 일으켜 주었다.

살짝 넋이 나가는 기분이었다. 렌의 말대로 나는 지쳐 있었다. 뱃가죽은 등에 달라붙어 버릴 것만 같았고, 머리는 아까부터 계속 아팠다.

렌은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허공에 제 손을 쑥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여러 번 휘적이더니 아까 탑에서 구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식물도감이었다.

“짠.”

“…….”

순식간에 불안해졌다. 설마 지금 여기서 식물도감 펼쳐 들고 나물이나 캐자는 소리는 하지 않겠,

“제 일 장. 독버섯과 식용버섯.”

나는 하하 웃으며 렌의 팔을 더 꼭 붙들었다. 만약에 이 세계에서 겁대가리 상실 랭킹을 매긴다면 단연코 렌이 일 등이다.

“공주님 이거 안 가져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치?”

“……대단하다. 너.”

“칭찬해 주는 거야?”

렌이 양 뺨을 붉히고 몸을 배배 꼬며 내게 물었다. 그에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렌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래, 겁대가리 상실한 것과는 별개로, 렌이 하는 말 중에 틀린 말은 없었다.

실제로 여기서 몇 시간이고 더 헤맨다면 탈진할 수도 있었다. 여정을 위해서는 안전한 식량도 필요했고.

“렌, 진짜 염치없고 미안한 거 아는데, 혹시 물은 어디서 구해?”

내 말에 바닥을 뒤지던 렌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공주님 목말라?”

“그렇긴 한데, 아직 참을 수는 있어.”

“왜 참아?”

“…….”

렌은 정말 사람 할 말 없게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인재였다.

“입 벌려.”

그때였다. 렌이 대뜸 커다란 손으로 내 양 뺨을 잡더니 우악스레 입을 벌렸다. 만약에 내가 렌의 성향을 몰랐다면 충분히 겁먹고 기겁하기 충분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곧, 내 예상대로 렌의 왼손에서 푸른 빛이 새어 나오더니 허공에 작은 물방울 하나가 맺히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물방울은 점점 커져 내 목을 축이기 충분한 크기가 되었다.

똑,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내 벌린 입 안으로 떨어졌고, 나는 꼴깍 물방울을 삼켰다.

이럴 거면 조금 친절하게 줄 것이지 ‘입 벌려’가 뭐야, ‘입 벌려’가.

나는 렌의 사회성에 대한 걱정을 가득 담아 물었다.

“……이게 뭐야? 또 할 수 있는 거야?”

내 물음에 렌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아니? 삼십 분 기다려야 해. 여기 있는 가시화 가능한 수분은 방금 공주님이 다 먹었어.”

“너는?”

내 물음에 렌은 비웃기라도 하듯 비뚜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난 공주님이랑 달라.”

그러고는 금방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펼친 책을 들여다보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같이 가!”

나는 급히 렌의 팔을 다시 붙잡았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렌한테 의지하는 것 말고는 마땅히 제 역할을 못 해 양심에 상당히 찔리긴 했다. 그런데 진짜 어쩔 수 없는 걸 어떡해.

그러고 보면 원작 속 공주는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간 건지 알 수가 없다.

용사는 렌처럼 허공에서 물을 만들어 내지도, 날아다니지도 못할 텐데.

“공주님 내 팔이 좋아?”

렌이 내게 제 긴 팔을 쭉 뻗으며 물었다. 저건 나를 비꼬자 함인지, 진짜 몰라 묻고자 함인지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나는 그냥 머쓱하게 미소 지으며 렌의 헛소리를 가볍게 무시해 주었다.

그러자 렌은 이 심각한 상황에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입가에 미소를 매단 채로 열심히 제 할 일을 했다.

나는 그런 렌을 조금이라도 도와주기 위해 그가 들고 있는 도감을 흘끗 쳐다보았다.

‘가베란 버섯.

지크란의 숲 내부에 가장 많이 서식하고 있는 종으로, 주로 기력 포션 제조에 사용된다.

날로 섭취 시 일정 시간 조증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 열을 가하여 섭취 시 짐승 고기와 같은 풍미와 식감, 그리고 충분한 포만감을 주지만 일정 시간 동안 지나친 쾌락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특별한 상황에만 섭취하는 것이 좋다.’

나는 렌이 펼쳐 놓은 페이지를 한참을 읽었다. 그리고 아주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설마 이거…… 찾니?”

불길한 예감은 왜 빗나가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응.”

얘가, 미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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