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13)

<13>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렌은 내 말을 순순히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러고 보면 신기하긴 했다. 사실상 렌은 나보다 압도적으로 강하다. 심지어 내 비밀까지 알고 있다.

그냥 힘으로 눌러 버리고 살려 줄 테니까 제 말에 따르라고 하면 나라고 해도 별수 없는데. 내 말을 일일이 들어주는 것을 보면 애가 착하긴 했다.

좀 심각하게 사차원이라 그렇지.

“렌. 위험하잖아.”

“공주님이 식물도감 필요하다고 했잖아.”

“그래, 너 능력 좋은 건 알겠는데 이렇게 많이는 좀 아니지 않아……?”

“…….”

렌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인지 모르겠으나 저렇게 풀 죽어 있으니 괜히 미안해지려 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나도 싫은 소리 하고 싶지 않아. 내가 뭐라고 너한테 설교하겠어. 그런데 이건 아니지.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 어떻게 다 가져가려고 그래?”

내 말에 순식간에 렌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고는 뭔가를 꾸미는 악동 같은 얼굴로 씨익 웃었다.

“짠!”

렌이 두 손을 마주하고 양옆으로 쫙 벌리자 검은색 블랙홀 같은 것이 나왔다.

그 순간 나는 이해를 포기했다.

“아공간이야.”

렌은 신난 듯 제가 불러들인 책들을 전부 쑤셔 넣기 시작했다.

그런데 잠깐, 아공간이라고?

“렌, 혹시 저 안에 쓸 만한 거 있어?”

내 말에 렌이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오늘 처음 써 보는 거야.”

“…….”

그런 편리한 게 있는데 여태까지 안 쓰고 뭐 했냐고 따질 뻔했지만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래, 쟤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 어쨌든 납치도 공주 본체가 해 달라고 해서 한 거라며.

물론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내가 알 길은 없지만.

“그으래.”

아니, 그러고 보니까 아직도 내 외관에 대한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도대체 왜 눈 색과 머리 색만 바뀌었을까?

설마…… 도플갱어 뭐 이런 건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소환된 거야?

상당히 그럴 법한 추론이었다.

“괜찮아, 공주님. 죽지는 않을 거야. 죽으면 어쩔 수 없고.”

“……그래, 참 위로가 되는 말이야. 렌.”

“정말?”

나는 눈치 없는 렌을 보며 가만히 미소 지어 주며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은 이미 벌어졌고, 쓸데없이 절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지.

“사람들 사는 데 가면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

“모르지?”

렌이 참 해맑게 내 물음에 답했다.

“그런데 여기 더 있다가는 죽을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 봐도 그럴 것 같았다.

“가자.”

렌이 쭈그려 앉은 채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에 나는 렌의 손을 잡아 자리에서 일으켰다.

벌떡 일어난 렌은 새삼스레 키가 굉장히 컸다. 한 백팔십대 후반은 되는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동화 속 흑막 하기는 아까운 비주얼이란 말이지.

여기가 동화가 맞나 싶긴 하지만.

“그래, 공주님.”

렌이 씨익 웃으며 냅다 내 허리를 제 팔로 감쌌다. 이 정도의 접촉은 여전히 부담스럽지만……, 그래도 포기하기로 했다. 여기 문화는 이런가 보지 뭐.

“그런데 어떻게 나가……,”

그때였다. 순간 발이 허공으로 들렸고, 나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나를 덜렁 안아 든 렌이 들입다 창문으로 내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꺄악!”

“이렇게 나가면 되지!”

그리고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낙하감에 기절할 뻔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정도 충격에는 더 이상 기절하지 않는 몸이 되어 버렸나 보다.

“으아아악!”

“공주님 시원하지!”

점점 가까워지는 지면을 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상식적으로 그게 될 리가 있겠어?

지금 나는 별다른 안전장치도 없이 렌의 팔에 매달려서 그냥 밑으로 계속 추락 중이었다.

렌의 헛소리에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냥 렌의 멱살을 꽉 틀어잡고 눈을 꼭 감았다. 정신이 핑핑 돈다.

“공주님? 안 시원해?”

정정하겠다. 렌은 또라이임이 틀림이 없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아니지, 렌은 마법사니까 죽지는 않을 거다.

아니, 근데 안 죽으면 다야? 아니, 사실 안 죽으면 다이긴 한데, 그래도!

그렇게 몇 초나 지났을까.

갑자기 몸이 공중에 뚝, 서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느껴지는 미약한 충격.

“공주님, 설마 자?”

나는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여전히 쓸데없이 잘생긴 렌의 얼굴이 보였다.

“예고, 이런 거 할 거면 예고를…….”

마음 같아서는 렌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너 미쳤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머리가 마치 카페인 음료 다섯 개를 기도에 직격타로 때려 부은 것처럼 어지럽게 돌아서, 나는 그대로 렌의 가슴팍에 이마를 박을 수밖에 없었다.

“아, 머리, 아.”

“공주님 피곤해?”

그럼 피곤하지 안 피곤하냐, 인간아!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또 참았다.

누가 봐도 렌이 나보다 개고생했는데 여기서 투정 부리면 뭐가 돼.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염치 있는 인간이다.

“아니야, 그래. 버틸 수 있겠지 뭐. 안 죽어…….”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최대한 희망차게 대답했다.

그에 렌이 뚱한 얼굴로 냅다 제 얼굴을 내게 들이밀었다.

정말, 여기 문화인지 아니면 단순히 렌이 또라이인 건지 모르겠지만 자꾸 얼굴로 공격하면 나는 면역력이 없어서 놀란다고!

나는 심장을 부여잡고 렌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부담스럽다……!

“피곤하지? 공주님 피곤한데.”

렌이 인상을 찌푸리며 거의 닿을 기세로 내게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본심을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으래, 피곤한 것 같아.”

“그렇지? 보통 인간들은 열아홉 시간 정도 깨어 있으면 피곤하다고 책에서 봤어.”

“……그래. 알아줘서 고맙다.”

뭔가 대화를 할수록 더 피곤해지는 느낌이었다.

“고마워?”

내 말이 뭐가 또 마음에 들었는지 렌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물었다.

“응? 공주님 고마워?”

더 이상 렌을 상대하다가는 진짜 머리가 아파서 돌아 버릴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렌의 입술에 내 검지를 가져다 대며 말했다.

“원래 그런 거 두 번 물으면 없어 보여, 렌.”

“…….”

렌이 물끄러미 시선을 내려 내 손가락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으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분위기가 상당히 이상해졌지만 나는 우선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

흘끗 내가 갇혀 있던 탑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탑 자체는 평범했다.

탑의 외관은 그냥 높고, 커다랬으며, 오랫동안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았는지 넝쿨 식물이 꼭대기 층까지 빽빽하게 자라 있었다.

게다가 렌의 말대로 이곳에서는 정말 ‘인간’만 사라졌는지 벽을 타고 올라간 넝쿨 식물에 하얀색 꽃이 소담하게도 피어 있었다. 내부 사정을 몰랐다면 예쁘다며 감탄했을 정도였다.

나는 외관만큼은 아름다운 탑을 뒤로하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장 렌의 소매를 붙잡았다.

탑의 바로 아래에는 푸른색의 커다란 마법진이 미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밖에서 보는 광경은 탑 안에서 볼 때와 완전히 달랐다.

“환영 마법 때문에 그래. 보통 마탑은 좌표로만 이동 가능하거든. 그래서 밖에서도, 안에서도 이 주변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어.”

나는 그냥 입만 반쯤 벌리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렌이 반쯤 가리고 있어서 보지 못했던 풍경은 내게 또 다른 충격을 안겨 주었다.

“다행히 우리는 마법진 효력이 약해졌을 때 와서 여기 주변이 어떻게 생겼는지 다 볼 수 있었지. 문제는 우리가 이제 아래 내려와 있다는 거지만.”

사실 위에서 볼 때는 몰랐다. 그냥 끝없이 숲이 이어져 있구나,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탑 아래서 마주한 숲은 가히 공포스럽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붉은색 하늘. 그리고 탑을 둘러싸고 있는, 십 미터는 족히 넘어 보이는 크기의 나무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숲.

꼭 감옥 같았다.

“그래도 위에서 보던 것보단 숲 자체 면적은 훨씬 작을걸?”

렌이 듣던 중 반가운 소리를 했으나 나는 전혀 안심할 수 없었다. 밤낮을 알 수 없는 시뻘건 배경이 빽빽이 들어찬 나무들 틈새로 깔린 꼴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저기서 미지의 존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차라리 탑 내부가 더 낫다고 생각할 만큼 어두운색의 이파리들이 바람에 나부끼며 으시시한 소음을 만들어 냈다.

“그런데 장담은 못 해. 나도 경계 밖은 처음이라.”

렌은 이 상황에서도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물끄러미 렌을 쳐다보았다.

렌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무서워서 심장마비로 쓰러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도 너라도 있어서 다행인 것 같아, 렌.”

나는 곧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심정으로 쥐고 있는 렌의 소매를 내 쪽으로 끌어당기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의미로 내가 좀 무서워서 그런데 팔 좀 잡아도 될까?”

“…….”

내 물음에 렌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렌의 팔을 끌어안았다.

진짜 이렇게라도 안 하면 주저앉을 것 같았다.

“고마워. 렌. 좀 잡을게.”

“공주님 지금 나한테 작업 거는 거야?”

렌의 낙천적인 대사에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렌이 아니었다면 큰일 날 뻔했다.

상황에 맞지 않는 대사 치기 최우수상급이다. 아주.

“여기서 작업이 왜 나와, 무서워서 그런 거잖아! 무서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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