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는 렌의 손목을 잡고 보기만 해도 소름 끼치는 계단을 한 칸씩 밟으며 말했다.
“상황상 너는 나를 도와주고 있고, 염치를 아는 인간이라면 걱정하는 게 당연하지.”
사실 이 질문으로 인해 렌이 보통 인간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참이었다. 상식적으로 누가 저런 질문을 하냐고.
“설마 세계관 설정상 마법사는 인간이 아니고 막, 이런 건……, 아니지?”
내 물음에 렌이 방긋 웃으며 또 의미심장한 대답을 내놓았다.
“마법사는 인간이지만, 나는 글쎄?”
“…….”
할 말을 잃었다.
“혹시 불사신이세요?”
“아닌데?”
“혹 연세가…….”
“안 세어 봐서 확실히 몰라.”
나는 렌의 경악스러운 대답에 양 뺨을 붙잡고 열심히 기억 속 빅 데이터를 뒤져 보기 시작했다. 그래, 보통 만화나 소설 속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백 세 이상인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았다.
그러니 안 세어 봤다는 말은 너무 오래 살아 세길 포기했다는 거 아닐까?
나 이 대사 굉장히 자주 봤었던 것 같다.
그래, 마법사인데 액면가로 나이를 판단하면 안 되지!
“반말해서 죄송합니다.”
“공주님 갑자기 왜 결론이 그렇게 나는 거야?”
“나이를 셀 수 없다면 적어도 백 세 이상이시지 않을까요. 제가 예의 없게 군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 실례가 많았습니다. 어르신.”
내 말에 렌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만난 지 열아홉 시간 만에 처음으로 지어 보였다.
“아니야.”
“넵. 그럼 그에 준하시는,”
“아니라고.”
아니, 그렇다고 정색할 것까지야 있나. 렌은 역으로 내 손을 턱 잡고 쿵쿵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시계도 없고, 달력도 없었는데 내가 몇 살인지 어떻게 알아?”
“…….”
할 말을 잃었다.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불쑥 들었다. 본의 아니었다지만 렌의 어두운 과거를 들쑤신 것 같은데.
상상도 안 갔다. 도대체 시계와 달력이 없어서 몇 살인지 모른다는 게 무슨 소리야?
“미안.”
“공주님이 왜 미안하냐니까?”
렌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대화를 끊었다. 그리고 단단히 화가 났는지 앞만 보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눈치껏 입을 꾹 다물었다. 슬슬 ‘렌’이라는 사람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이로써 그에게 뭔가 말 못 할 과거가 있는 건 거의 확실해졌다. 차마 내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과거 말이다.
이 빌어먹을 동화책 작가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심성이 아주 사악한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도대체 마법사에게 서사를 어떻게 준 거야?
지금 이 어마어마한 과거를 무려 아동용 동화에 숨겨 놓는 걸로 모자라 겨우 한 줄짜리 악역으로 써먹었다고?
“이상해.”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진짜 이상해.”
렌이 계단 위에서 휙, 뒤를 돌아보았다.
렌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진지하게 의문을 담은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날 왜 걱정해? 왜 괜찮냐고 물어봐? 공주님이랑 나는 오늘 처음 봤는데? 공주님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렌의 목소리가 기계처럼 딱딱한 어조로 흘러나왔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갑자기 그런 철학적인 질문을 하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공주님, 내가 누군지 알고 있어?”
목소리가 섬뜩하게 텅 빈 공간을 울렸다. 나는 렌이 꼭 잡고 있는 내 손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남은 한 손으로 렌의 손을 턱! 덮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오늘 처음 만났는데.”
내 대답에 렌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럼 넌 내가 누군지 알아? 이름이나 생김새 말고. 내가 어디서 뭐 하던 사람인지 알고 있냐고.”
“…….”
나는 렌을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렌의 어깨를 내 어깨로 툭 치며 웃었다. 해골 계단을 올라가고 있는 이 상황에 맞지 않는 웃음이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않은가?
“내가 말하기 전까지는 마법사인 너도 모르던 걸 나라고 어떻게 알겠어? 천천히 알아 가는 거지.”
내 말에 렌의 표정이 멍해졌다. 나는 그런 렌의 손을 두드려 주며 말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야. 너도 내가 넘어지거나 쓰러지면 걱정하지 않겠어? 물론 걱정 안 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런 사람들은 우리는 소시오패스라고 불러. 다행히 나는 아니고.”
이번엔 내가 렌보다 한 발자국 앞장서 계단을 올라갔다.
“이제 이해했어?”
렌이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죄지은 어린애처럼 나를 흘끗 쳐다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부지런히 움직이자. 으, 이 찜찜한 공간에서 빨리 탈출하고 싶어.”
내 말에 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손을 잡은 제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응, 빨리 나가자. 공주님.”
***
나는 생각하기를 깔끔하게 포기했다.
동화 빙의? 뭔 놈의 동화 전개가 이딴 식이냐. 나는 아무래도 그냥 꿈도 희망도 없는 디스토피아 판타지 세계에 빙의한 것이 틀림이 없다.
그 말인즉슨, 나는 망했다 이 소리다.
“우와, 시체다.”
“흡!”
나는 눈앞에 눈을 부릅뜬 채로 꼿꼿이 서 있는 시체를 보고 열심히 웩웩대기 시작했다.
꿈에 나올 것 같다. 먹은 것도 없는데 진짜 토할 것 같아서 고개를 돌리고 계속 욱욱거리자 렌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날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좋아. 저게 뭐…… 그래, 저게 뭐, 욱!”
“공주님은 이것보다 더 징그러운 몬스터 보고도 멀쩡했으면서 왜 그래?”
“몬스터랑 시체랑은 다르잖아……! 냄새까지 나는 것 같아.”
나는 렌의 등에 찰싹 붙어서 눈을 꾹 감았다.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빨리 나가고 싶었다.
렌은 정말 죽은 지 한 달은 되어 보이는 시체를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시체의 머리에 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니 황금빛 문양이 시체의 온몸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렌은 조금 고통스럽다는 듯 이를 꽉 다문 채로 신음 소리를 흘렸다.
“본체야.”
“……무슨 본체?”
“이 탑의 주인. 아까 그 해골. 보존 마법이라도 걸려 있었나 봐. 오백 년이나 지났는데 부패가 이 정도까지밖에 안 된 거 보면.”
렌은 불에 손이라도 덴 것처럼 서둘러 시체의 이마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묘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하필 나일까? 그냥 우연인가?”
“뭐?”
“가설이 맞았어. 공주님은 소환된 거야. 소환자는 오백 년 전에 죽었고. 마법은 지금 발동됐고.”
렌이 제 손을 툭툭 털고 창밖을 쳐다보았다.
“공주님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지?”
렌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했으니까.
그에 렌은 느닷없이 서 있는 시체를 발로 차 버렸다. 나는 경악해서 입을 쩍 벌리고 렌을 쳐다보았고, 렌은 정말 아무렇지 않게 자리에 쭈그려 앉더니 시체가 밟고 있던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시체가 발을 디디고 있던 곳에는 작은 손잡이 하나가 있었다. 불안감이 엄습해 오기 시작했다.
저 손잡이를 당겨야 한다. 그런데 저 손잡이를 당기는 순간 내게 나쁜 일이 일어날 거란 불길함이 엄습했다.
내가 멍하니 손잡이만 바라보고 있자, 렌이 냉큼 손잡이를 잡아당겨 버렸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나는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하고 결과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손잡이 아래에는 낡아 빠진 양피지 하나가 얌전히 말려 있었고, 렌은 나와 상의도 없이 냅다 양피지를 펼쳐 내게 보여 주었다.
양피지 안의 글씨는 마구 흔들리며 한글이 되었고,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글을 읽었을 때는 이게 뭔 개소리인가 싶었다.
두 번 읽었을 때는 내 두 눈을 의심했고, 세 번 읽었을 때는 울 수밖에 없었다.
“……공주님?”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꼴랑 한 페이지짜리 글을 보고 현실감이 밑도 끝도 없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꿈이 아니다, 그대가 이 세상을 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현실을 직시해라. 그대는 이 세계에 의도적으로 소환되었으니.’
‘그대는 우리의 영광을 뒤이을 것이며, 세상을 거머쥘 것이다. 배신자들이 빼앗을 낙원을 되찾고 영광을 누리리.’
처음 든 감정은 당연히 분노였다. 나는 멍하니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쳐다보았다.
기가 찼다.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진짜 소환이라고? 지금 동생에게 책이나 읽어 주던 사람을 소환해 놓고 이게 할 말이야?
내가 무슨 이세계 용사야?
“요즘 이세계 용사도 이딴 식으로 소환 안 해!”
양피지를 찢어 버리고 싶었는데 빌어먹게 질겨서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나는 렌이 옆에 있다는 사실도 잊고, 양피지를 시체의 면상에 던져 버렸다.
“아니야. 꿈이야.”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 당연히 현실이 아니지.
그런데 왜 졸리고, 피곤하고, 배고프냐고!
계속 몰려오는 몬스터들 때문에 강제 각성 상태라 느끼지 못했던 몸 상태가 물밀듯이 갑자기 훅,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피곤하고, 힘들었다. 그리고 이건 불행하게도, 이게 꿈이나 망상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나 어떡해? 여기 돌아가는 방법이 안 쓰여 있어.”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나는 렌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렌은 마법사니까 뭘 알고 있지 않을까?
어차피 울어 봤자 해결되는 건 없어 최대한 눈물만은 참으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됐다.
머리가 멍했다. 어떻게 할 새도 없이 눈물이 수도꼭지 연 것처럼 뺨을 타고 그냥 죽죽 흘러내렸다.
“아니, 내가 왜 지들 복수를 해. 내가 뭔데.”
내 말에 렌이 말없이 서 있다가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제가 집어 든 양피지에 순식간에 불을 붙였다.
“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