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13)

<7>

Chapter. 2

“자네, 정말로……, 경계 밖으로 나갈 생각인가.”

“예, 촌장님.”

마을을 지나가던 기사가 너무 낡아 버리고 간 듯한 갑옷을 입고, 그 갑옷과 비슷한 수준의 낡은 검 한 자루를 쥐어 든 젊은 남자가 백발의 노인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자네의 사정이 딱한 건 알고 있지만, 공주님을 구한다고 해서 왕께서 정말로 자네에게 공주님을 주실 거라고 생각하나?”

“예. 그렇게 약속하셨으니 그리하게 만들어야죠.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남자는 고개를 들어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님, 살아남으셔야,’

‘긍지를, 의지를……!’

절로 떠오르는 아픈 기억들에 가슴이 지끈거렸다.

“너무 걱정 마세요. 해내서 돌아오겠습니다.”

남자의 말에 노인이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곧 체념한 듯 용사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그런 노인의 주름진 손을 가만히 바라보며 다짐했다.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불확실한 기회를 잡아야 했다. 그것만이, 그의 세상을 다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

결국 그 방문 앞에 다시 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렌에게 물었다.

“그래서, 열쇠도 못 찾았고, 너도 이 방문을 열 방법을 모른다면서 이렇게 노려만 본다고 저절로 열려?”

“글쎄?”

“…….”

내 표정이 차게 식거나 말거나 렌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 다시 문고리를 잡고 거칠게 흔들기 시작했다.

“흠, 여길 왜 잠가 놨을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공주님이 소환된 건 우연은 아닌 것 같아. 물론 나까지 여기 떨어진 건 우연 같고.”

렌이 제 손가락으로 본인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천진난만한 렌의 미소를 보며 대꾸했다.

“저기, 미안한데. 너 혼자 막 생각하지 말아 줄래? 나는 아직도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우리 진도를 조금 천천히 나가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내 말에 렌이 벽에 대뜸 기대 제 긴 다리를 꼬고 여유롭게 내게 설명했다.

“자세히 설명하면 나는 공주님이 소환되고 있던 시기에 우연치 않게 공주님을 납치하려 해서 같이 떨어진 것 같고, 의도적으로 못 들어가게 잠가 둔 이곳에 바로 공주님을 소환한 원흉이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은 것 같아.”

렌과 함께 돌아다닌 지 겨우 하루밖에 안 되었지만 보면 볼수록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무슨 소리야. 뭔 멸망한 구역 어쩌고 하더니 날 소환한 원흉이 여기 왜 있어? 아직 여기에 우리처럼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야? 그리고, 괜히 문 열었다가 이상한 괴물이라도 튀어나오면? 꼭 소환을 사람이 했다는 법도 없잖아.”

“글쎄?”

“……네 가설이 맞을 확률은 몇 퍼센트나 되는데?”

“음, 그것도 글쎄?”

생각이 깊은 건지 대책이 없는 건지도 도통 알 수 없었다. 나는 아파 오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허허 웃었다. 일단 종자보관소니 뭐니를 찾는 건 글러 보였다.

애초에 이곳저곳 박살 난 이곳에 종자보관소가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나저나 애들 동화 주제에 세계관이 왜 이렇게 섬뜩한 거야? 세상이 한 번 멸망했다느니, 소환이니, 등가교환이니.

“나와 봐.”

나는 문 앞에 서 있는 렌을 치우고 멀뚱히 손잡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대뜸 문고리를 잡았다. 어차피 안 열리는 거 알지만 알고 보니 여닫이문이 아니라 미닫이문이었던 걸 수도 있잖아?

그래서 힘차게 문을 옆으로 당겼는데…….

드르륵.

“어라.”

이게 왜 열리는 거야!

“…….”

표정 관리도 안 됐다. 나는 그냥 입만 쩍 벌리고 렌을 쳐다보았다. 렌은 그런 내 시선에 부끄럽지도 않은지 순전히 내가 문을 열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옆으로 미는 거구나. 신기하다. 나 이런 문 처음 봐.”

오늘 처음 봤다고 말하는 놈의 해맑은 얼굴을 보니 주먹이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자애롭고 정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참았다.

나도 몰랐잖아? 처음 열었을 때 옆으로 밀어 볼 생각을 안 한 내 잘못도 있지. 그럼 그럼. 아니, 그런데 분명 봉인되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렌이 그냥 착각했던 건가? 이렇게 쉽게 열리는데?

뭔가 찜찜한 구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일단 문이 열린 게 더 중요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좋게 좋게 렌에게 말했다.

“들어가 볼까?”

“공주님 화났어?”

“……아니? 화 안 났는데.”

내가 이를 악물고 대답하거나 말거나 렌은 싱글벙글 웃으며 커다란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잠겨 있던 방 안으로 들어갔다.

“흠, 열쇠는 결국 따로 있었네.”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렌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아까와 달리 새삼 진지한 얼굴이었다. 나는 금방 렌에게서 시선을 돌려 방 안의 천장을 쳐다보았다.

사방에 빼곡하게 그려져 있는 황금빛으로 이루어진 알 수 없는 문양들. 방 안에는 수백 권의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 중앙에는 선홍색으로 빛나고 있는 사람 머리통만 한 구체가 둥실 떠 올라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불길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렌의 뒤로 숨어 버렸다.

그도 그럴 게 문제의 중앙에 있는 선홍색 구체 아래로 지름 이 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마법진이 새빨갛게 빛나고 있었다.

그 덕에 방 안에 퍼져 있는 황금색 빛들이 비교적 강렬한 색인 붉은색에 먹혀 완전히 시뻘겋게 빛나고 있었다.

게다가 저기 구석에 나동그라져 있는 해골은 또 뭔데? 나는 주춤거리며 렌에게 물었다.

“이거 함부로 들어가도 되는 거 맞아……?”

렌은 겁대가리가 없는 게 분명했다. 말도 안 되는 무책임함이 아닐 수 없었다. 렌은 내 물음에 어깨만 으쓱거리고 대뜸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해골의 옆으로 돌진했다.

“야, 어디 가아!”

“공주님 여기 뭐가 있어.”

렌이 해골의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러자 뭔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해골의 팔이 뚝 끊겼다.

“…….”

“편지도 있네?”

그리고 내 이성의 끈도 뚝 끊겼다. 쟤는 저게 뭔 줄 알고 막 만지는 거야!

“그거 당장 안 내려놔?”

나는 걷잡을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렌의 팔을 잡았고, 렌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가 입수한 종이의 내용을 읽었다.

“세계를 등지고 도망간 비열한 자들은 어둠 아래 배신자의 이름으로 영원히 남으리라.”

그리고 그 종이를 내 눈앞에서 팔락거리며 천진난만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공주님. 오백 년 전 편지야. 나 이런 거 처음 본다? 단어가 되게 거창한 편이네.”

“야, 내려놓으라고. 딱 봐도 불길해 보이잖아, 저거!”

렌은 그런 내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손을 쫙 펼치고는 편지를 오른손으로 쓱 훑었다.

그러자 낡아 빠진 종이가 서서히 새 종이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래되어서 부분부분 흐려진 잉크 때문에 보이지 않는 글자도 더 자세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흐음. 공주님도 볼래?”

렌은 한참 동안 종이를 노려보더니 대뜸 내게 내밀었다. 나는 순간 당황해서 얼떨결에 렌이 내민 종이를 받아 버렸다.

여전히 석연찮은 느낌은 가시지 않았지만 방금 렌에게서 들은 어지간히 의미심장한 문장 때문인지 종이에 쓰여 있는 내용이 궁금하긴 했다.

그래서 대충 쓱 훑어보려 종이를 쳐다보았다.

영 꼬부랑거리는 이상한 글자는 처음 보는 글자였지만, 이내 글자들이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익숙한 모양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뭐야, 한글이잖아?’

당황스러웠지만 어차피 내 옆에 마법사도 있고, 책 읽다가 공주님한테 빙의도 한 마당에 이깟 게 뭐 대수라고.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먹고 내용을 살펴보았다.

‘대현자의 말대로 세계는 무너지고 있노라.

아니, 이미 무너졌노라.

배신자들은 땅끝으로 도망쳤고, 우리들은 남았노라.

우리들의 피와 뼈를 제물 삼아 버티어 마지막 경계선을 지켰노라.

비록 우리는 재가 되어 사라지지만 세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나 두 눈으로 우리가 지켜낸 세상을 볼 수 없음에 원통하기 그지없노라.

세계를 등지고 도망간 비열한 자들은 어둠 아래 배신자의 이름으로 영원히 남으리라.

그러나, 절망할 필요 없노라.

새로운 영혼이 우리의 의지를 잇고, 정의를 되찾으리.’

나는 입을 쩍 벌렸다. 뭐? 새로운 영혼?

“…….”

저거 나 말하는 건가? 설마 나야?

침착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도, 망상 풀 가동해 보아도 누가 봐도 저 마지막 구절이 뜻하는 사람은 나 같다.

애초에 이 탑에 사람이라고는 고작 렌하고 나밖에 없었고, 렌은 또라이처럼 보이긴 해도 이곳 사람이지만 나는 전혀 아니었다.

“이, 이게 뭐야.”

어이가 없어서 손을 부들부들 떨며 렌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자리에 있어야 할 렌은 안 보이고 휑하니 빈자리만 보여 고개를 돌리니, 렌이 뭐에 홀린 사람처럼 마법진을 관찰하고 있었다.

눈은 또 보라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공주님 이거 소환 마법 맞는 것 같아. 오래됐긴 했지만 현 마탑에서 발견하지 못한 시간 역행 마법하고 공간 이동 마법진 역술도 있고 또,”

그리고 그때였다.

쿠궁! 방 안이 진동하기 시작했고, 나는 치렁치렁한 치마를 들고 본능적으로 렌에게로 달려갔다.

뭔 일이 벌어지는지 파악도 안 됐지만 머릿속에 이 사실 하나는 확실했다.

이 미쳐 돌아가는 동화 속 세상에서 내가 잡아야 할 구명줄은 먼치킨 힘법사밖에 없다!

나는 우악스럽게 멍때리고 있는 렌의 뒷덜미를 잡았고, 그 순간 방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쿠르릉, 거리는 소리와 부스스 돌 떨어지는 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고, 이제 슬슬 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뭐야, 무서워!’

헌티드 맨션도 아니고 뭔 동화 속 탑 주제에 바람 잘 순간이 없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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