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13)

<4>

“그럼 공주님은 지금 아무것도 모르는 거지?”

렌이 문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흠, 내가 알려 주면 되지 뭐.”

렌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손을 붙잡고 당부하듯 말했다.

“나 버리고 도망가면 안 돼. 알았지?”

“…….”

뭔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미쳤다고 도망을 가냐. 혼자 이런 데 버려지면 뼈도 못 추리고 뒈질 게 뻔한데.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렌의 커다란 손이 내 뺨을 감쌌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      ,     ,    ,     .         .]”

그러자 꼭 민트를 먹었을 때처럼 화한 느낌이 전신을 감쌌다. 나는 이게 뭔가 싶어 물끄러미 렌을 쳐다보았고, 그는 웃는 얼굴로 내게 조용히 하라는 듯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멀뚱히 있자니 렌이 굳게 닫힌 문을 다시 활짝 열었다.

나도 모르게 입을 꾹 막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바로 눈이 스무 개쯤 달린 기괴한 거미 괴물이 입을 쩍 벌리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뇌가 공포로 찌릿했다. 무슨 애기들 동화책이 이래!

비명이 나올 것 같았지만 너무 무서워서 비명도 안 나왔다. 렌은 그러거나 말거나 룰루랄라 나를 거의 껴안다시피 하며 거미에게서 벗어나 앞으로 쭉 걸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까 렌이 뭔 짓을 했는지는 몰라도 저 괴물이 우리를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까 한 정체 모를 말이 투명 마법 주문, 뭐 이런 거였나?

나는 거의 꼭두각시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그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내가 갇혀 있는 이곳은 반은 무너져 가는 낡고 먼지 냄새 가득한 건물이었다.

중세풍 판타지 영화에나 나오는 돌벽으로 둘러싸인 과거 화려했을 게 분명해 보이는 복도에는 수많은 사람 뼈와 동물 뼈가 서로 뒤엉켜 뒹굴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쳐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타는 냄새와 꿉꿉한 냄새가 동시에 났는데 굉장히, 낯설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었을까. 드디어 렌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음, 이제 여기를 빠져나가면 되는데. 어떻게 나가지.”

나는 멍하니 렌이 바라보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무슨 피막같이 커다란 보라색 막이 있었고, 그 막에서 검은 액체가 꿀렁꿀렁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마치 구석구석에 거미줄처럼 널려 있는 모양새가 상당히 섬뜩했다.

“경계 밖이라 그래. 아직 정리가 덜 됐거든.”

렌은 그 모습을 보면서도 태연하게 어깨만 으쓱였다.

“일단 산책이나 할래, 공주님?”

지금 산책 소리가 입에서 나와……? 진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나는 소리 없이 렌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공주님 이거 뽀뽀 신호야?”

“……아니야! 도대체 뭘 본 거야?”

나는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에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건지 못 하는 건지 렌이 내 허리를 확 잡아당기며 능글맞게 말했다.

“보기에는 이래도 별로 안 위험,”

드득, 드드드득. 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땅바닥에서 진동이 울리며 우리 바로 앞의 길이 와르르! 무너졌다.

정신이 아득해져 왔다.

여기서 죽으면 집에 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하하하, 그래도 몬스터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

“꾸웨에에에에에엙!”

렌의 태평한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피막에서 사람 모양을 한 무언가가 우리 쪽으로 확! 튀어나왔고 렌은 내 허리를 바짝 끌어안고 내달렸다.

“게이트에서 튀어나오는 건 반칙인데?”

피부가 거의 녹아 밑으로 처져 안구가 밖으로 튀어나온 기괴한 시체 형상의 괴물이었다. 진짜 머리털 나고 저런 괴물은, 실제로 볼 일도 없었지만, 아무튼 그동안 내가 봤던 괴물 중에 제일 무섭게 생겼다!

나는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렌의 목을 막 끌어안았다.

아니, 와중에 얘는 마법사라며 힘이 왜 이렇게 센 거야? 놈은 거의 나를 둘러업고 막 달렸다.

“공주님 뜨거워도 참아!”

렌이 뒤를 흘끗 보며 허공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막 그리기 시작했다. 빛의 잔상이 남는 걸 보아하니 마법진 같았다.

놈은 순식간에 마법진 몇 개를 그리더니 곧 손가락을 탁! 튕겼다.

그러자 허공에서 불타는 돌덩이 몇 개가 떨어지는데,

“우왁!”

“느학!”

이 미친 마법사가 저 커다란 돌덩이를 떨구면 안 그래도 약한 바닥까지 박살 난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었다.

놈의 불타는 돌덩이는 효과적으로 몬스터를 부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밟고 있던 바닥마저 부숴 버렸다.

“공주님 꽉 잡아!”

놈은 그렇게 말하며 떨어지는 나를 확 놓아 버렸다. 아니 뭘 잡으라는 거야!

내가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놈의 손이 내 배를 탁! 건드렸다. 그러자 몸이 둥실 떠오르는 듯한 느낌……이 아니라 정말 부유하는 게 아닌가?

“아니, 공주님! 나 잡으라고! 나!”

“꺅!”

나는 비명을 지르며 렌이 시키는 대로 놈이 뻗은 긴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렌이 공중에 떠 있는 나를 확 잡아당기며 거의 코알라처럼 나를 안았다.

상당히 민망한 자세지만 살았다 싶었다.

왜냐면……. 도대체 여기가 몇 층인지 감도 안 잡힐 정도로 아래층은 까마득했으니까. 그나마 멀쩡했던, 우리가 있던 층의 바닥마저 무너지자 보인 그 아래로는 웬 용암도 끓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돼먹은 건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후, 죽을 뻔했다.”

“……난 울고 싶다.”

“안 돼. 안 돼. 아직 울기에는 일러, 공주님.”

“…….”

놈은 울상이 된 나를 더 세게 끌어안고는 허공에 또 마법진을 그렸다.

그러자 강력한 바람이 불며 몸이 움직였다.

“우와, 가고일이다.”

안심하던 찰나 해맑은 렌의 말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정말로 박쥐 날개에 쥐 머리를 하고 있는 괴상망측한 괴생명체가…….

내 멘탈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키에에에에에에엑!”

“우와, 우리 진짜 큰일 났다. 공주님.”

“…….”

“공주님?”

나는 그대로 까무룩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

“공주님 일어나.”

음. 꿈 한번 다이내믹하게 꿨다. 무슨 삼 일을 골방에 갇혀서 검은 빵만 먹다가 잘생긴 미친 또라이 마법사를 만나서 괴물이랑 데이트도 하고…….

“공주님. 일어나라니까?”

“…….”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직접 증명이라도 해 주는 듯 쓸데없이 잘생긴 마법사 렌이 내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놈은 관찰하는 것처럼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묘하게 진지한 얼굴이라 괜히 섬찟해 보였다.

놈은 그렇게 나를 한참 보다가 곧 다시 방긋 웃으며 말했다.

“공주님 기절한 동안 내가 신기한 거 찾았다? 이거 봐라?”

렌이 가져온 건 다름 아닌 썩어 문드러져서 거의 형체도 남지 않은 고기 뼈였다.

“공주님 업고 좀 돌아다녀 봤는데 이 층에 식당이 있지 뭐야? 대충 조사해 보니까 방치된 지 오백 년 정도 되는 것 같던데. 음, 대충 조리 도구에 새겨진 수식을 보면 구 마탑 같기도 하고.”

“알았으니까 그 끔찍한 것 좀 치워 줄래?”

나는 거의 울 것처럼 렌에게 말했다. 내게 처한 상황이 이루 말할 것 없이 끔찍했기 때문이다.

아니, 차에 치여 죽든가 물에 빠져 죽든가 아예 콱 죽어 버렸으면 억울하지도 않다.

나는 멀쩡히 살아서 이 공주라는 여자 몸에 처박혀 버렸다. 절망스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

“골격 구조로 봐서는 닭이야. 볼래, 공주님?”

렌이 그릇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그릇 주변에 원을 그렸다. 그리고 나를 한 번 쓱 쳐다봤다.

나는 그런 렌을 멀뚱멀뚱 쳐다보았고, 렌은 자기가 하는 걸 보라는 듯 의기양양하게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렌이 그려 놓은 원 주변으로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나타나며 마구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접시가 점점 깨끗해지더니 곧 썩은 냄새와 함께 뼈에서 점점 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갓 구운 치킨 냄새까지 나는데 나는 그냥 멍하니 그 장면을 보고만 있었다.

“짠! 시간 마법은 잘하지? 그치?”

벌써 몇 번째 하는 고민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심각하게 렌에 대해 재고해 보았다.

표정? 아무리 봐도 무슨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적인지 아군인지 판별조차 안 된다.

그리고 무슨 능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내가 마법에 ‘ㅁ’ 자도 모르니 이게 대단한 건지 무슨 마법을 잘하고 못한다는 건지 감도 안 온다.

“공주님, 감탄 안 해? 아직 창조의 영역까지는 완벽하게 다루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시간 부분은 마탑주도 감탄했는데. 생각보다 눈이 높네.”

놈은 갓 구운 듯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 구이를 내게 내밀며 해맑게 웃었다.

“먹어도 돼, 공주님.”

사람한테 이런 말 하기 뭐 했지만, 좀 개, 아니 강아지 같았다.

그래서 나는 왜인지 측은한 마음에 포크를 들고 한 조각을 찢어 놈의 입가에 가져다주며 말했다.

“먼저 먹어. 기절한 나 업고 오느라 고생했을 거 아니야.”

“……어?”

렌이 마치 예상치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안 먹어?”

“공주님 배 안 고파? 왜 나부터 줘?”

“그쪽…… 그러니까, 렌. 나 찾으러 온다고 고생했다며. 먼저 먹어.”

놈이 멍하니 포크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본인이 만들어 놓고 왜 저러는지 이해는 안 갔으나 일단 기다려 주었다.

“공주님이 먹여 주는 거야?”

“포크가 하나밖에 없잖아.”

“……공주님 나 좀 감동이야.”

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실로 부담스러웠다.

“내가 공주님 납치했다며 싫어했잖아.”

렌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납치 실패했고, 여기 데려온 건 너 아니라며.”

“……그게 맞긴 한데. 공주님, 나 싫어하는 거 아니야?”

“이상한 거 그만 물어보고 좀 받아먹어 줄래? 나 팔 아프거든?”

내 말에 렌이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더니 이내 와앙 포크의 음식을 집어 물었다.

그리고 오물오물 씹으면서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놈이 멀쩡히 먹는 걸 보고 나서야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닭에 포크를 꽂았다.

음, 저놈이 멀쩡한 걸 보니 독은 없는 것 같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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