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13)

<3>

“왜 겁먹었어, 공주님?”

마법사는 씨익 해맑게 웃으며 내게 자꾸 얼굴을 들이밀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대로라면 조금 있다 심장마비로 뒈지겠다.’

마법사의 말은 섬뜩했고, 외관은…… 그냥 잘생겨서 저 또라이 같은 성격만 아니었으면 홀라당 넘어갔겠구나 싶었다.

대형 폭탄을 던진 것치고는 너무 태연하고 즐거워 보이는 마법사가 말했다.

“공주님, 지금 곤란하지. 나한테 비밀 들켜서.”

“…….”

눈물이 쏙 들어갔다. 놈은 내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헬렐레 웃으며 눈까지 찡긋해 보였다. 와중에 쓸데없이 잘생겨서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내가 비밀로 해 줄게. 그러니까 나랑 결혼하자.”

“……아, 머리야.”

내가 현기증에 휘청거리자 마법사가 울상을 지으며 정말 걱정된다는 얼굴로 내 이마를 짚었다.

“공주님 아파?”

놈의 눈빛은 유명 영화 속 장화 신은 고양이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놈은 눈까지 깜빡이며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걱정 어린 눈길로 나를 올려다보았고, 나는 홀리기 전에 필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어, 나 이거 알아. 원래 눈 감으면 뽀뽀,”

“악!”

나는 기겁하며 마법사에게서 떨어졌다. 잘생기고 나발이고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 틀림이 없다! 그러니까 멀쩡하게 잘 사는 공주 납치나 하지!

“왜? 이거 아니야?”

“아니야!”

대가리가 지끈지끈 아픈 기분이었다. 아니? 아팠다. 나는 일단 현자가 된 기분으로 차분하게 내 상황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집에 가야 했다. 아니면 이 빌어먹을 꿈에서 깨어나거나.

그러니까 결정해야 했다. 보통 죽으면 꿈에서 깨어나니 이곳에서 죽든가, 아니면 자연적으로 일어날 때까지 버티든가.

“그럼 이렇게 하자.”

그때였다. 마법사가 내 두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공주님이 나랑 결혼만 해 주면 내가 소원 들어줄게.”

그리고 푸른 눈을 또 반짝였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답도 없는 동화 속 악역의 얼굴을 밀어냈다.

“조용히 좀 해 줄래. 생각 중이니까.”

“무슨 생각? 나랑 결혼해 줄 생각?”

나는 조용히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빵 조각을 쥐었다. 그러고는 아주 상큼하게 웃으며 마법사의 입 안에 빵을 넣어 주었다.

“웁.”

음, 조용해졌군.

***

“공주님 그런데 뺨은 왜 자꾸 꼬집는 거야? 내가 꼬집어 줄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계속 꿈에서 깨어나려 노력 중이었다. 하지만 지난 삼 일 동안의 결과로 미루어 짐작해 보아 꿈에서 깨어날 방법은 딱히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뺨은 아주 얼얼하게 아팠고, 빌어먹을 창밖은 여전히 붉은색 천지였다.

“내가 너랑 결혼해서 얻는 이득은?”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놈에게 묻자, 마법사는 방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

“…….”

마법사는 자기를 좀 보라는 듯이 한 바퀴를 휘익 돌며 공중에 마법으로 만들어낸 꽃잎을 뿌리기 시작했다.

신기하긴 했지만 믿음은 가지 않았다.

“나와 결혼하고자 하는 목적은?”

“권력이라니까?”

목적 또한 너무 정직해서 신뢰하기 좀 어려웠다.

“네가 말한 내 오빠가 날 죽이려 했다는 건 또 뭔데?”

“공주님 기억 안 나? 공주님이 나한테 소원 빌었잖아. 살려 달라고.”

나는 이마를 짚었다. 소원을 빌긴 뭘 빌어. 안타깝게도 나는 상상력이 풍부한 어른이었기 때문에 마법사가 던진 단순한 단서에도 그림이 대충 그려지기 시작했다.

공주를 죽이려는 오빠, 마법사에게 빌었던 소원. 그리고 동화 속에서 끝까지 나타나지 않던 마법사.

“내가 그랬다고?”

“응. 공주님이 분명히 나더러 데려가 달라고 했어. 물론, 알맹이는 그때랑 좀 다른 사람 같지만?”

동화는 용사 시점으로만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공주에게 진정한 해피엔딩이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요즘 동화 트렌드도 ‘정말 왕자님과의 결혼이 공주님에게 해피엔딩이었을까?’라는 해석이 주된 걸 보면 마법사의 말도 충분히 납득이 가긴 한다.

알고 보니까 잔혹 동화였던 거지. 정치적 상황으로 위협받던 공주와 평민 출신 용사의 이야기 같은 거 흔하잖아? 젠장 이래서 창조 해석가들을 다 몰락시켜 버려야 해! 감히 어린이 동화에서 현실을 찾으니까 이렇게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러니까 당신 말은 암살 위협으로 목숨이 위험해진 내가 왕궁에서 당신한테 납치해 달라고 빌었다고?”

“응. 정확히는 진짜 공주지? 지금 공주님 말고. 원래 공주님.”

“…….”

물론 마법사의 말이 다 진실일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사람은 얼마든지 자기 필요에 의해 거짓말을 할 수 있으니까.

내 상태를 대충 봐도 정상으로 보이지는 않을 테니까.

누가 봐도 기억을 잃은 사람처럼 보이겠지.

“공주님 그러니까 빨리 알겠다고 해.”

“뭘.”

“나랑 결혼하면 공주님 소원 들어준다니까?”

마법사가 방긋방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러고는 선서하듯 손바닥을 보이며 또 찡긋거렸다.

“내가 원하는 게 뭔 줄 알고?”

“집에 가고 싶다며? 그러면 나만 한 사람 못 찾을 텐데. 나는 바로 알아봤잖아. 공주님이 본래 공주님이 아닌 거. 다른 사람은 이거 못해.”

놈이 내 팔을 잡고 자기 쪽으로 확 당겼다. 그리고 속삭였다.

“내가 보내 줄게. 그러니까 나랑 협력하자.”

순식간에 허리가 잡힌 나는 당황한 얼굴로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정말, 뭘 알고 있긴 한 건가? 마법사니까 내가 진짜 공주가 아니라는 걸 아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내 반응 때문에 때려 맞힌 건가?

“그리고 공주님, 이거 정말로 꿈 아니야.”

마법사가 휙, 내 몸을 한 바퀴 돌려 주고는 내 손을 꼭 잡고 웃으며 말했다.

“어때? 나랑 여기서 나갈래?”

나는 멍하니 마법사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마 더 이상 이런 곳에서 용사나 기다리기에는 너무 지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하릴없이 빵만 먹으면서 용사가 올 때까지 망연히 버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으니까.

“좋아. 공주님.”

마법사가 호기롭게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밖으로 나가자!”

말이 끝나자마자 마법사는 문을 끼이이익! 열었고, 그 앞에는…….

“키에에에에에엑!”

쾅! 문이 도로 닫혔고, 마법사가 머쓱하게 웃었다.

“음, 아까보다 세 마리나 늘었는걸?”

“…….”

젠장.

“나가긴 뭘 나가……?”

내가 조용히 묻자 마법사가 하하 웃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음, 잘하면 왕국군 같은 사람들이 공주님 구하러 올 수도 있어.”

“그럼 그동안 네가 주는 빵만 먹으면서 또 갇혀 있으라고?”

내 물음에 마법사는 울상을 지어 보이더니 곧 다시 의기양양해져 내게 말했다.

“하지만 이번엔 함께잖아!”

“…….”

한 대 때릴까.

“공주님,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조금 큰일 난 것 같아.”

마법사가 세상 고상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저 아름다운 얼굴로 맹하니 말하는 걸 보면 오싹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일대일 근접전에는 상대적으로 조금 약해서.”

마법사가 내 옷자락을 잡고 시무룩한 표정을 하며 물었다.

“어떡하지?”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내가 조금 짜증 난다는 말투로 되물으니 마법사가 당황한 듯 내게 대답했다.

“공주님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공주님 여기로 데려오려고 안 했어. 엄선한 최고급 안식처에 모시려고 했다고.”

마법사가 고개를 푹 숙이고 탑 하나 짓는 데 금마차 네 개는 썼다고 중얼거리며 슬퍼했다.

“심지어 텔레포트 좌표를 설정하기도 전에 공주님이랑 여기 떨어진 거라고.”

“……그럼 나를 납치한 사람이 따로 있다는 거야?”

“응.”

마법사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누군데?”

“여기가 경계 밖이니까, 경계 밖의 어떤 존재?”

“……그게 뭔데.”

내 물음에 마법사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더니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공주님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얼굴 좀 그만 들이밀어 줄래.”

“공주님이 좋아하는 것 같아서. 맞지?”

마법사가 싱긋 웃었고, 나는 애써 마법사를 밀쳐 냈다.

“왜, 맞잖아. 그렇지? 미묘하게 귀가 빨개지는 건 좋은 신호랬어.”

“누가.”

“책에서.”

책이고 나발이고, 이 인간…… 감당이 안 된다! 나는 정신 사나운 마법사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마법사가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왜 놀라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래, 네 생각대로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게 좋겠어. 만약 네가 내 목적을 이뤄 준다면 너와 결혼? 그거 해 줄게.”

“정말?”

“대신 날 집에 무사히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해. 너, 내가 공주가 아닌 건 알고 있는 거지?”

내 말에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가 없는 인간은 없는데, 공주님은 아무것도 안 느껴지니까.”

그리고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말을 덧붙였다.

“게다가 공주님은 그렇게 매정하게 말 안 해. 책에서 봤어.”

“……그래서 불만이야?”

“아니.”

나는 문고리를 잡으며 마법사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이제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줄래? 아무것도 모르겠으니까?”

내 물음에 마법사가 심각하게 대답했다.

“정말……. 공주님, 나 사실 반은 때려 맞힌 건데. 진짜 다른 세계 사람 같잖아?”

난 할 말을 잃었다. 뭐야. 진짜 때려 맞힌 거였어?

“……진짜야?”

“…….”

놈은 이 심각한 상황에 내가 외계인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한 것처럼 나를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뭐야, 결국 마나는 축적이 아니라 영혼에 깃들어 있는 게 맞았네? 실제로 보니까 신기하다. 공주님. 어디서 왔어? 공주님 누구야?”

정신 사나웠다. 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긴, 진짜 공주님보다는 차라리 이편이 나을지도 몰라.”

“저기, 마법사 씨, 이러고 있을 때가,”

“마법사 아니고 렌.”

마법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진지해졌다. 표정이 사라진 마법사는 딱, 생긴 대로 차갑고, 싸늘한 분위기를 풍겨 나도 모르게 긴장으로 몸이 굳어 버렸다.

“렌이라고 불러, 공주님.”

“……그으래. 렌. 지금 우리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

“공주님은 이름이 뭐야?”

마법사, 아니 렌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놈을 올려다보았다.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입을 연다면,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시아. 최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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