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그 뒤의 이야기
“어이쿠, 추워라! 오늘도 손님이거의 없나 보네?”
마르코는 마을의 하나뿐인 주점 겸 여관인 작은 가게 안으로 들어서며 주위를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자 가게 주인인 뵈폰이 탁자 위에 거의 몸을 붙이고 있다가 느릿느릿 일어나더니 안쪽으로 들어가며 투덜거렸다.
“벌써 일주일째 눈이 내리고 있으니 손님이 올 턱이 없지.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날씨에 어느 여행객이 지나가겠어?”
벌컥.
그 순간, 문이 열렸다. 조금 전 마르코가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바깥바람이 잠잠했는데 그새 날씨가 변덕을 부린 것인지 거센 눈보라가 열린 문 안으로 밀려들었다.
“어이쿠, 이거 웬 바람이 이렇게 불어? 바람에 문이 열렸나 보네.”
마르코가 안쪽에 들어간 뵈폰을 대신해 문을 닫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곧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눈만 껌뻑였다.
“어라? ……손님이네?”
그것도 두 사람이나 말이다. 마르코가 멀뚱거리며 방금 눈보라와 함께 들어온 두 명의 여행객을 쳐다보고 있자 그들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주인인가?”
“……예? 아아, 아! 잠깐만요. 제가 여기 주인이 아니라서. 뵈폰, 손님 왔어!”
마르코는 여행객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가게 안쪽을 향해 외쳤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렸다가 곧바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바로 그들의 외모 때문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 전 제게 말을 건넨 자 말고 다른 여행객의 외모 때문이라 해야겠지만 말이다.
“우와…… 저렇게 예쁜 여자라니.”
마르코는 넋을 놓고 여행객을 쳐다보았다. 그가 지금껏 살면서 본 적 없던 미인이었다.
새하얀 피부에 꿀을 바른 듯한 금발, 그리고 파란 하늘을 고스란히 담은 듯한 눈.
마르코가 그 여인의 아름다움에 정신이 나가 입을 벌리고 있는 사이에, 그녀, 로엘린은 케르겔과 함께 벽난로 근처의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많이 춥지? 잠깐만.”
케르겔은 그녀가 앉을 수 있도록 의자를 빼 준 뒤, 로엘린이 자리에 앉자마자 냉큼 몸을 돌려 벽난로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벽난로 옆에 쌓여 있던 장작을 집어 불길 속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조금씩 수그러드는 듯싶던 불길이 다시금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주변의 공기가 조금 더 훈훈해지는 것을 확인한 뒤, 자리로 돌아왔다.
“옷이 많이 젖었네. 감기 걸리겠어.”
“많이 안 젖었어요. 지난번 마을에서 산 로브에 방수 기능이 있다고 하더니, 완전히 사기는 아니었나 봐요.”
로엘린은 로브를 벗어 옆 의자에 걸쳐 놓은 뒤,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손가락으로 빗어 리본으로 묶으려 했다.
“내가 해 줄게.”
케르겔이 그 모습을 보고는 냉큼 다시 일어나 그녀의 자리로 다가갔다. 로엘린은 리본을 들고 있다가 가볍게 웃은 뒤, 그에게 머리를 맡겼다.
그녀의 머리를 느슨하게 땋아 내려 리본으로 묶는 손길이 능숙했다. 로엘린은 케르겔이 묶어 준 머리를 손으로 만져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점점 더 능숙해지네요? 나보다도 더 잘하는 것 같아요.”
“황궁으로 돌아가도 그대의 머리는 내가 전담할게.”
“그럼 실로아가 서운해할 텐데요.”
“그래도 어쩌겠어? 내가 황제인데.”
“여행을 떠나더니 폭군이 되어 돌아왔다고 하겠어요.”
로엘린은 케르겔의 대답을 듣고 웃었다. 케르겔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다는 듯 미소를 짓더니 방금 자신이 땋아 내린 머리 끝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커흠! 신혼부부인 것 같은데 그래도 적당히 합시다. 저기, 시작도 못 한 짝사랑을 곧바로 접어야 할 처지가 된 놈을 봐서라도 말이오.”
그 순간, 투박한 투의 목소리가 들렸다. 케르겔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물주전자와 컵을 가지고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쪽으로 조금 전 자신들을 맞이했던 사내가 눈을 끔뻑이고 있는 게 보였다.
‘방금 짝사랑 어쩌고 한 게 저놈 얘기였나.’
케르겔이 무심코 사내가 했던 말을 되새겨 보려는 순간, 로엘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뭘 그렇게 생각해요?”
“응? 아니야. 그냥 쓸데없는 생각.”
케르겔은 방금 자신이 하던 생각을 싹 털어 낸 뒤, 로엘린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오직 그녀뿐인데 다른 생각을 하느라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뭘 먹을래요? 일단 간단히 요기할 만한 건 주문했는데 당신은 그걸로 부족할 것 같아서.”
“지금 요리 가능한 게 뭐가 있지?”
케르겔은 로엘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주인을 향해 질문을 건넸다. 그러자 뵈폰이 코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주방에 남은 재료를 떠올린 뒤, 대답했다.
“토끼구이랑 오리찜 정도가 가능하오.”
“겨우 그것밖에 없다고?”
토끼나 오리나 그 조그만 걸 누구 코에 붙이라고. 케르겔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인상을 썼다. 그 반응을 본 뵈폰이 덩달아 인상을 쓰며 재차 대꾸했다.
“폭설이 지속된 지 일주일이 된 터라 재료가 부족한 상황이오. 그나마도 손님들한테 내주고 나면 더 이상 요리하고 싶어도 할 게 없단 말이지.”
“어쩔 수 없지. 그거라도 가져오도록.”
케르겔의 주문을 받던 뵈폰의 한쪽 눈썹이 비틀려 올라갔다. 딱히 ‘진상’이라 할 수 있는 손님은 아닌데, 어째서인지 그가 제게 하대를 하는 것 같단 느낌이 들어서였다.
‘흐음……. 어디 귀족 나리라도 되나? 그런데 귀족치고는 옷차림이 너무 소박하잖아? 뭐, 둘 다 외모만 보면 그렇게 믿을 수도 있겠지만. ……됐어. 귀족이든 아니든, 음식이나 팔면 되지.’
오히려 귀족이면 더 번거로울 뿐이다. 그냥 말투가 원래 이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는 게 상책일 터였다. 뵈폰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는 몸을 돌려 주방으로 가려다가 깜빡 잊었다는 듯 물었다.
“참! 숙박할 거요?”
“물론. 제일 좋은 방으로.”
“그리고 밖에 있는 말들에게도 여물이랑 물 좀 챙겨 주세요.”
케르겔이 그의 물음에 대꾸하는데 로엘린이 끼어들었다. 뵈폰은 상냥한 목소리의 주인공을 힐끔 보더니 갑자기 헛기침을 했다.
“아, 알겠소, 아니, 알겠습니다. 신경 써서 잘 돌보도록 하지요.”
“고마워요.”
로엘린은 상냥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러자 뵈폰이 거듭 헛기침을 하며 주방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의 목덜미가 벌겋게 물든 게 케르겔의 눈에 들어왔다.
“…….”
그리고 케르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는 한숨을 삼킨 뒤,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여행하는 내내 이런 걸 한두 번 봤어야 말이지.
“……예쁜 아내를 둔 죄라고 해야 하나.”
“응? 방금 뭐라고 했어요?”
로엘린은 케르겔의 혼잣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케르겔은 손사래를 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답했다. 굳이 제 옹졸한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타닥타닥.
그리고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도는 동안, 벽난로 안의 장작이 타는 소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로엘린은 조금 전 주인이 가져온 물주전자를 들어 케르겔과 제 컵에 물을 따른 뒤, 그에게 권했다.
“마셔요. 물이 적당히 따뜻하네요.”
“그런 덴 세심한 면이 있군. 생긴 건 산적 같은데.”
추운 겨울, 게다가 눈까지 내린 길을 온 여행객을 위해 따뜻하게 데운 물을 줄 생각을 하다니 말이다.
케르겔은 주인의 그런 점을 인정하며 컵을 들었다. 확실히 따뜻한 물을 마시니 추위에 얼어붙었던 몸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세로이프로 돌아오고 나니까 확실히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안심도 되고.”
로엘린이 컵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입을 열었다. 케르겔은 키득거리며 웃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서도 그러겠지. 우리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지금쯤 접했을 테니까.”
케르겔은 국경을 지키는 수비대장이 저를 보고 혼비백산했던 일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어쨌든 고마워요. 같이 여행 가기로 했던 거, 사실 나는 잊고 있었거든요.”
그때, 로엘린의 차분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케르겔이 시선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뭐, 잊을 만도 했지. 그 뒤로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으니까.”
같이 여행을 가자던 건 괴수를 토벌하러 가기 전에 했던 말이었다. 그 뒤에 벌어졌던 일들을 생각하면 잊은 게 당연할 정도였다.
“그래도 미안해요. 당신은 기억하고 있었는데.”
“하긴 그건 그렇지? 그럼 미안하단 뜻으로 여기에 입 맞춰 주는 건 어때?”
케르겔이 장난스럽게 대꾸하고는 제 입술을 건드렸다. 로엘린이 그 짓궂은 행동에 당황해할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으음…… 좋아요. 이번만이에요.”
“어?”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로엘린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냉큼 일어나 그를 향해 몸을 숙인 것이다.
촉.
입술과 입술이 아주 순간적으로 닿았다가 떨어졌다. 케르겔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로엘린이 조금 민망했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자리에 앉았다.
“로엘…….”
“음식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십시오.”
케르겔이 그녀를 부르려는 순간, 뵈폰이 쟁반을 들고 다가왔다. 그러더니 로엘린 쪽에 대부분의 음식을 차려놓았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로엘린이 뵈폰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그가 멋쩍어하며 다른 작은 접시 하나를 그녀의 앞에 추가로 놓았다. 산딸기 조각 케이크였다.
“이건 주문하지 않았는데요?”
애당초 이런 작은 마을의 여관에서 디저트를 먹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주문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로엘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뵈폰이 재차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이거는, 흐흠, 손님께 그냥 공짜로 드리는 특별 디저트입니다.”
“어머? 고마워요.”
얼씨구. 저놈 봐라? 케르겔은 팔짱을 낀 채 얼굴을 구기고는 뵈폰을 쳐다보았다.
얼굴이 벌겋게 익은 상태로도 뭐가 그렇게 수줍고 좋은 건지 주인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려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나 참…….”
방부터 먼저 잡아 놓고 식사를 방으로 가져오라고 했어야 했나. 케르겔은 뒤늦은 후회를 하며 혀를 찼다.
가뜩이나 조금 전 로엘린의 갑작스러운 입맞춤 때문에 아랫배 쪽에 열기가 뭉쳐서 곤란한 상황인데 말이다.
“스프가 따뜻하고 고소하네요. 빵도 약간 질기기는 하지만, 스프에 찍어 먹으니까 맛있고요. 어서 먹어요, 케르겔.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는 모르지만. 아, 해 봐요.”
로엘린이 그런 케르겔을 보며 작게 웃더니 빵을 한 입 크기로 찢어 스프에 살짝 적신 후 그에게 내밀었다.
생글생글 눈웃음을 짓는 걸 보니 지금 그의 상황을 알고 있는 건가 싶었다.
“은근히 여우가 다 됐단 말이야.”
케르겔은 그녀를 쳐다보다가 피식 웃은 뒤, 입을 벌려 로엘린의 손에 들린 빵을 받아먹었다. 그러면서 일부러 그녀의 손가락 끝을 깨물었다.
“아얏! 뭐예요? 개도 아니고.”
“개는 아니지만, 엄밀히 따지면 늑대지.”
케르겔이 로엘린의 말을 능청스럽게 받아쳤다. 로엘린은 그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하여간 못 말린다니까. 우리 아기는 아빠의 이런 점을 닮으면 안 되는데.”
로엘린은 스프를 저으며 투덜거리다가 이내 작은 소리로 웃었다. 그러고는 그를 향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우리 아기가 정말 효심이 깊은 것 같기는 해요.”
“왜?”
“다른 임신부들은 아기 가졌을 때 입덧으로 고생을 한다는데, 나는 전혀 안 그렇잖아요. 덕분에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면서도 음식 때문에 고생하지는 않았고.”
“음…… 그건 그러네.”
“참, 말 나온 김에 우리 아기요. 이름은 뭐라고 지을까요?”
“벌써 이름을 고민하는 거야? 태어난 다음에 고민해도 되지 않아?”
“태어난 다음이면 너무 늦죠.”
로엘린은 케르겔이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그것을 타박했다. 그러자 그가 통째로 쪄서 나온 오리의 배를 가르다 말고 미간을 좁혔다.
“……뭐가 좋을까.”
케르겔은 나이프와 포크까지 전부 내려놓은 뒤,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로엘린이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고 고민해요. 다 식겠어요.”
“음…… 아! 그런데 일단 여자아이인지 아니면 남자아이인지, 그 성별을 알아야 이름을 지을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래서 루시의 말로는 대개 아이 이름을 두 가지로 지어 놓는다고 하더라고요. 여자아이 이름, 그리고 남자아이 이름.”
로엘린은 루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재차 미간을 좁히더니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름을 하나 짓기도 버거운데 둘이나 지으라고?”
그렇게 투덜대며 불평하면서도 그는 식사를 하는 내내 아이의 이름을 고민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펴고, 혼자 입속으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리고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올라간 뒤에도 그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 * *
“케르겔, 간지러워요.”
로엘린은 제 얼굴을 핥는 듯한 움직임에 작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자다가 그가 종종 짓궂은 장난을 친 적이 있기에 당연히 케르겔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바로 제 뺨에 닿은 복슬복슬한 털 때문이었다.
……털?
‘설마 모습이 다시 변하기라도 한 거야?’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어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제 배 속의 아이와 힘을 나눠 가진 덕분에 봉인이 없는 상태에서도 힘이 안정적이라 했었는데, 혹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싶어서였다.
“케르…… 어?”
하지만 로엘린은 벌떡 일어나 앉자마자 제 눈앞에 보인 광경에 멍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캉! 캉!
키잉, 키잉…….
“……웬 강아지들이야?”
그녀의 눈앞에 있는 건 앙증맞은 두 마리의 강아지였다.
새까만 털에 좌르르 윤이 흐르는 금색 눈의 강아지와 노란 빛깔의 털이 복슬복슬한 파란 눈의 강아지.
……응?
로엘린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다시 강아지들을 보았다. 그러자 두 마리의 강아지가 그녀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향했다는 걸 알았는지 꼬리를 바쁘게 흔들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어어……. 그래, 응. 귀엽네. 그런데 너희 어디서 온 거니? 어떻게 들어온 거야?”
로엘린은 강아지들과 놀아 주며 말을 건넸다. 딱히 대답을 들으려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애당초 사람과 짐승 사이에 대화가 가능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끄으응?
그런데 그녀의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 마리가 동시에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이더니 다시 반대편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캉! 캉!
그러더니 새까만 강아지가 뒷발로 일어서서 다시금 짖어 댔다. 뭔가를 말하고 싶다는 듯 그녀의 손등 위에 제 앞발까지 올린 채.
“미안해. 네 말을 못 알아듣겠어.”
로엘린은 계속 저를 향해 짖는 강아지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자 강아지가 마치 그 말도 알아들은 것처럼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강아지도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건가?’
그녀는 강아지를 키워 본 적이 없어서 모든 게 생소하고 낯설기만 했다.
끼이잉.
그때, 다른 쪽 손가락 끝에 보드랍고 촉촉한 뭔가가 느껴졌다. 로엘린이 고개를 돌려 제 손끝을 보았다.
노란 털의 강아지가 조심조심 분홍색 혀를 내밀어 그녀의 손가락을 핥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파랗고 동그란 눈은 너무나 맑았다. 마치 하늘을 고스란히 비추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케르겔이랑 내 눈 색깔이랑 똑같잖아?”
눈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머리색과 이 강아지들의 털색도 똑같았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거지?’
로엘린은 알 듯 말 듯 한 뭔가를 고민했다. 하지만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아니, 답은 이미 나왔는데 그게 제 이성과 논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라고 해야 할까.
“얘들아, 이리 와.”
그러면서도 그녀는 강아지들을 품에 안았다. 따끈따끈하고 보들보들한 감촉에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그건 그렇고 여긴 대체 어디지?”
로엘린은 강아지들을 쓰다듬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야 주변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 것이다.
“분명히 여관방에서 잠들었는데……. 게다가 계절 자체도 맞지 않잖아.”
그녀가 있는 곳은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는 들판이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들판을 가득 채운 꽃과 풀들이 마치 파도가 치듯 일렁이는 모습이 장관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결코 지금 그녀의 눈에 보여서는 안 되는 풍경이었다.
눈 내리던 겨울의 여관방이 봄날의 들판으로 바뀌다니 말이다.
“……설마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로엘린은 거듭 고개를 돌려 주위를 보다가 한 가지 가정을 세웠다.
꿈.
바로 꿈을 꾸고 있는 중이라는 것.
그것이라면 지금 제 상황이 어느 정도 납득되기는 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황당한 일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생생한 꿈도 있어? 더구나 꿈속에서 꿈을 자각하기도 해?”
로엘린은 손바닥 아래로 느껴지는 강아지들의 따끈한 체온과 보들보들한 털의 감촉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캉!
그녀의 손길을 즐기듯 얌전히 안겨 있던 검은색 강아지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짖은 것은.
그리고 로엘린의 품 안에 있던 강아지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건 거의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 얘, 얘들아?”
로엘린이 당황하여 제 빈손을 내리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있었던 강아지들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꿈인가? 그런데 나는 왜 계속 여기 있는 거야? 잠에서 깨야 나갈 수 있는 건가?”
드넓은 들판 위에 홀로 서 있는데도 어째서인지 불안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케르겔이 곁에 있지 않은데도 두렵지 않았다.
만약 제게 위험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가 와 주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었다.
“배짱 두둑해졌네.”
로엘린은 피식 웃으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일단 어디로든 가 보자 싶어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엄마!”
느닷없이 제 다리를 끌어안은 아이들만 아니었더라면 말이다.
“앗!”
그녀는 갑자기 제게 매달린 아이들에게 떠밀려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러자 로엘린의 다리를 끌어안은 아이들 역시 그녀와 함께 넘어졌다.
“괘, 괜찮니? 다치지 않았어?”
로엘린은 이 아이들이 대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건지 생각할 새도 없이 화들짝 놀라 아이들의 상태부터 살폈다.
“히힛. 엄마가 우리 걱정해 준다!”
“헤헷.”
다행히 아이들은 다치지 않은 듯했다. 오히려 생글생글 웃기까지 했다.
로엘린은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새까만 머리에 금색 눈을 가진 여자아이.
그리고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남자아이.
아이들은 조금 전 사라진 강아지들과 놀랍도록 그 느낌이 닮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나 케르겔과도…….
“엄마가 좋아!”
……엄, 엄마?
로엘린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다시 한 번 방긋 웃더니 매달리는 여자아이를 두 팔로 안으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은 계속 자신을 ‘엄마’라 부르고 있었다. 로엘린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아이를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내가…… 엄마라고?”
“응! 엄마는 엄마야! 그래서 엄마가 제일 좋아!”
그러나 그 조심스러운 질문에 여자아이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대꾸하더니 다시 한 번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통통하고 작은 손이 저를 붙들고 있는 걸 멍하니 보던 로엘린의 푸른 눈이 흔들렸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여자아이의 뒤쪽에서 수줍게 웃으며 서 있던 남자아이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남자아이가 어쩔 줄 몰라 하듯 몸을 배배 꼬더니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 나도 엄마가 제일 좋아.”
“대체 이게 무슨…….”
그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말끝을 흐렸다. 로엘린의 중얼거림을 들은 여자아이가 고개를 퍼뜩 들더니 울먹이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는 우리가 안 좋아?”
“응?”
“엄마는 우리가 안 예뻐?”
아이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남자아이 역시 입을 삐죽이더니 금세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아, 아니야. 그런 거.”
“그럼 예뻐? 우리 좋아?”
“응, 예뻐. 좋아.”
로엘린은 아이들의 눈물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허둥대다가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며 간신히 대답했다. 그러자 두 아이가 다시금 그녀에게 매달렸다.
마치 꼬리라도 있으면 맹렬하게 흔들 것 같은 기세로.
“……설마 아까 그 강아지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는 걸 아는데, 아이들의 모습 위로 조금 전에 저와 함께 있었던 강아지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로엘린이 무심코 중얼거렸다가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고 외쳤다.
“우리는 강아지 아니야!”
“응, 알아. 내가 잘못 말했…….”
로엘린은 어쩐지 민망한 기분이 들어 아이의 항의에 냉큼 제 실수를 인정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가 먼저 말을 이었다.
“우린 강아지가 아니라 늑대야! 그렇지?”
“응!”
여자아이의 물음에 남자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던 로엘린의 표정이 멍해졌다.
“……뭐? 늑대?”
“응. 우린 늑대야. 아까 우리를 보고도 몰라?”
맙소사. 아까 그 강아지들이, 아니, 그 새끼 늑대들이 이 아이들이라고?
로엘린은 저를 바라보는 두 쌍의 눈을 보다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희가…… 늑대라고? 아까 그 늑대?”
“응! 엄마한테 말을 하고 싶은데 할 수가 없잖아. 그래서 변신했어! 힘 조절이 힘들기는 했는데 그래도 성공했어! 우리 잘했지?”
“…….”
로엘린은 제게 칭찬을 바라는 듯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을 보았다.
자신과 케르겔을 닮은 아이들.
그 아이들이 한 말의 내용.
그 모든 건 한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 아빠는 누구인지 알아?”
“알아! 바보 멍청이!”
여자아이가 로엘린의 물음에 냉큼 대꾸했다. 그러자 남자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그 말에 반박했다.
“바보 멍청이는 아니야. 그냥 허약한 것뿐이지.”
“허약한 게 바보 멍청이인 거야.”
하지만 여자아이는 지지 않겠다는 듯 재차 반박했다.
바보 멍청이야.
아니야. 허약한 거야.
그게 바보 멍청이라니까 그러네.
아빠는 그냥 힘없고 허약한 거야.
아이들이 옥신각신 다투는 걸 보고 있으려니까 갑자기 두 아이가 고개를 휙 돌리더니 로엘린에게 질문을 던졌다.
“엄마는 어떻게 생각해? 아빠는 바보 멍청이야? 아니면 허약한 거야?”
“으응?”
“바보 멍청이지?”
“허약한 거지?”
“……아아, 글쎄.”
‘미안해요, 케르겔. 하지만 애들이 저렇게 기대하는 눈으로 보는데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기가 좀 그렇잖아요.’
로엘린은 아이들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얼버무리며 졸지에 바보 멍청이에 허약한 남자가 되어 버린 케르겔에게 속으로나마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입꼬리는 제멋대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황당하고 말도 안 된다는 걸 알지만, 그저 꿈일 뿐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마음이 들뜨고 설레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
그러니까 지금 제 앞에 있는 이 두 아이가 바로 자신과 케르겔의 아이라는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면 이 아이들을 볼 수 없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아이들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흐음. 엄마가 제대로 대답 안 해 줘도 나중에 우리가 직접 보면 돼.”
“응.”
“좋아! 그럼 우리 승부는 그때 가서 결정짓는 거다?”
“그래.”
이끄는 쪽이 여자아이, 그리고 온순하게 따라가는 쪽이 남자아이인 모양이다.
로엘린은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아이들을 보았다. 그때 여자아이가 로엘린을 다시 쳐다보더니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 엄마. 아빠가 바보 멍청이든 허약하든, 엄마랑 아빠는 내가 지켜 줄게.”
“나도! 나도!”
여자아이의 의기양양한 말에 남자아이가 깡충깡충 뛰며 제 손을 들었다. 그러자 여자아이가 한심하다는 듯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너보다 내가 더 세잖아. 힘도 내가 더 많이 먹었는걸. 그때 배불러 죽는 줄 알았어.”
“나도 많이 먹었어. 아빠 구하려고 엄청 막 먹었는걸.”
“그래. 우리 둘 다 많이 먹기는 했지.”
여자아이가 금세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로엘린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힘을, 먹었어?”
“응. 벌써 잊었어, 엄마? 아빠 힘을 우리가 막 먹었는데.”
“…….”
“그 바람에 우리가 이렇게 쑥쑥 컸잖아. 물론 아직 엄마랑 밖에서 직접 만나지는 못하지만. 아직도 몇 달을 더 기다려야 한다니. 빨리 보고 싶은데!”
“그래서 엄마 꿈속에 몰래 숨어 들어왔어. 이제 곧 나가야 돼.”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말에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꿈…… 꿈이지만, 꿈이 아닌 거야?”
“응? 꿈인데 꿈이 아닌 건 뭐야?”
아이가 눈을 깜빡거렸다. 다른 아이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로엘린은 아이들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였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을 가득 채운 터라 말문이 막혔다.
“근데 엄마, 우리 이름은 언제 지어 줄 거야?”
“……곧. 아빠가 지금 고민하고 계셔.”
“바보 멍청이 아빠가?”
여자아이가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로엘린은 눈물이 고였던 눈을 휘며 웃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빠가 멋진 이름을 지어 주실 거야.”
“헤헷.”
“히힛.”
아이들은 신난다는 듯 서로를 보며 까르르 웃었다. 로엘린도 아이들의 웃음에 전염된 것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바로 그때, 주위 풍경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물감으로 그린 그림을 물에 담가 놓은 것처럼 말이다.
“……!”
로엘린이 깜짝 놀라 아이들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태연하게 씩 웃더니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이들에게서 고소한 우유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엄마, 나중에 봐. 많이 보고 싶을 테지만 꾹 참고 기다릴게.”
“나도.”
“……그래. 나도 기다릴게. 너희가 우리한테 오는 날을.”
로엘린은 두 아이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 * *
“이제 일어났어? 많이 피곤했나 보네. 평소 늦잠을 안 자던 그대가 이 시간까지 자다니.”
“…….”
로엘린은 제 귓가에 들리는 달콤한 목소리에 고개만 옆으로 돌려 그를 보았다. 케르겔이 침대 옆의 작은 테이블에 자리하고 앉아 있다가 그녀를 보고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저 눈매랑 입술 모양 같은 게 많이 닮은 것 같네.’
머리색이나 눈동자 색깔뿐만 닮은 게 아니라…….
“왜 그렇게 쳐다봐?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너무 물끄러미 쳐다본 탓일까. 케르겔이 자신의 턱을 문지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더니 난로 위에 놓여 있던 주전자를 들어 따뜻한 물을 따른 뒤,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기, 물부터.”
“고마워요.”
로엘린은 그에게서 컵을 받아 들며 인사했다. 두 손 가득 전해지는 온기를 만끽하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무슨 좋은 꿈이라도 꾼 거야?”
“……왜요?”
“그대의 얼굴이 평소보다 더 밝게 상기되어 있어서.”
케르겔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대꾸했다. 로엘린은 그의 손을 살짝 밀어내고는 민망한 투로 말했다.
“씻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얼굴에서 이렇게 광채가 나는 거야? 씻고 나면 눈부셔서 쳐다보지도 못하겠는걸.”
케르겔은 농담을 건네고는 그녀에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로엘린이 다시 한 번 그를 살짝 밀어낸 뒤, 말을 돌렸다.
“뭘 하고 있었어요? 참! 아침 식사는요?”
“그대가 깨면 먹으려고 아직 안 먹었어. 그리고…… 우리 아이 이름 좀 짓느라고.”
그는 로엘린의 질문에 대답하고는 조금 전까지 자신이 앉아 있던 테이블로 다가가 그 위에 놓인 종이를 가져왔다.
“이름을 몇 가지 지어 봤어. 그대의 말대로 남자아이 이름이랑 여자아이 이름 둘 다. 나는 남자아이라면 에이던, 여자아이라면 베로니카가 좋을 것 같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때?”
“에이던, 베로니카……. 둘 다 좋네요.”
로엘린은 그가 건넨 종이를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고민을 꽤 오랫동안 한 건지 종이 위에 이름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다른 이름 원하면 그걸로 해도 돼. 그냥 이건 내 생각일 뿐이니까.”
“나도 이 이름들이 좋아요. 에이던. 베로니카.”
그녀는 종이를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실룩이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럼 태어난 아이가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에 따라 최종 결정을 하면 되겠네.”
“아…….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
로엘린이 그의 말을 듣다가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케르겔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웃음을 참으려고 하다가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은 뒤, 케르겔을 향해 재차 대꾸했다.
“에이던, 베로니카. 둘 다 쓸 것 같거든요.”
“응?”
케르겔이 순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와 동시에 로엘린은 꿈속에서 여자아이, 아니, 베로니카가 했던 말이 떠올라 웃고 말았다.
<바보 멍청이!>
“……케르겔, 당신, 앞으로 많이 노력해야 할 것 같아요.”
아이들에게 바보 멍청이 소리나 허약하단 말을 듣지 않으려면. 물론 그렇다 해서 아이들이 그를 무시하거나 구박할 일은 없겠지만.
외려 그런 아빠를 지키겠다고 벌써부터 각오를 다지는 착한 아이들이니 말이다.
“……?”
하지만 케르겔은 로엘린의 말에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로엘린은 그런 그를 보며 다시 한 번 웃은 뒤,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우리 아이가, 아니, 우리 아이들이 쌍둥이인가 봐요.”
“뭐?”
케르겔은 로엘린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 위로 조금 전 꿈속에서 만났던 아이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꽃망울이 터지듯 화사하고 맑은 웃음소리였다.
자신은 불길한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갇혀 살아야 했다. 제 존재조차 부정당한 채 말이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들은 다를 것이다. 로엘린은 자신의 배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아직 태동이 느껴질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데, 어쩐지 아이들이 배 속에서 손을 맞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로 축복을 받게 되었어요, 케르겔.”
로엘린은 다시 시선을 들어 케르겔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로엘린의 말을 이해한 것인지 그의 눈이 그녀의 배 쪽으로 향했다.
“꿈을 꿨어요. 그 꿈속에서 우리 아이들을 만났고요.”
로엘린은 케르겔의 얼굴 위로 기쁨의 빛이 번져 가는 걸 보며 느릿느릿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들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에 대해서.
자신이 꾸었던 꿈, 그 속에서 만난 아이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아이들과 만나게 될 날에 대해서.
그들 네 사람이 함께하게 될 미래에 대해서.
그렇게 그녀의 이야기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여관 주인인 뵈폰과 짝사랑을 시작도 못 하고 바로 실연당하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마르코가 아래층에서 하염없이 위층만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리고 대낮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침실 밖으로 나오지 않는 ‘신혼부부’를 떠올리며 그들이 온갖 엉뚱한 상상과 함께 절망하고 부러워하고 감탄하기를 반복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 * *
케르겔과 로엘린, 그들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하지만 남은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터였다.
베로니카가 크세안 대륙을 처음으로 통일하여 세로이프 제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강력하고 능력 있는 황제라는 경탄을 받은 것도.
또한 그녀의 쌍둥이 형제인 에이던이 대륙을 떠돌며 오래전 사라지고 잊힌 사람과 수인족 간의 우정과 사랑 같은 이야기들을 되살려 내서 ‘신이 내린 음유 시인’이라는 찬탄을 받은 것 역시 아직은 먼 훗날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가올 이야기이기도 했다.
* * *
그리고…….
“……저 남자가 내 반려라고?”
베로니카는 땀조차 닦지 않은 채 석벽에 나타난 그림을 보고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서서 그림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내 취향이 아닌데.”
“딱 폐하와 어울리는 것 같은데요.”
그녀의 뒤에서 구시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버트를 쏙 빼닮은 그의 아들, 보좌관 시테온이 그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베로니카는 고개를 휙 돌려 도끼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시테온이 하하, 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이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다시 보니 폐하랑 안 어울리기는 하네요. 폐하는 저렇게 물렁하게 생긴 남자보다는…….”
“응. 적어도 나보다는 강해야지. 저건 그냥 에이던이잖아. 아니, 에이던보다도 더 순해 보이는데?”
베로니카는 시테온을 노려보다가 그림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그러고는 흠, 소리를 내며 그림 속 남자를 쳐다보았다.
저와 같은 까만 머리는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저 녹색 눈.
착하기만 한 것 같은 저 눈은 확실히 자신의 취향이 아니다.
“마음에 안 들어.”
“선황제 폐하께서도 반려의 계시를 받고 처음에는 그러셨다고 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두 분께서 지금까지도 알콩달콩…….”
“그때는 반려를 착각했던 거잖아! 나는 그냥 저 남자가 내 취향이 아니라니까?”
베로니카는 그림 속 남자를 향해 손가락질까지 하며 방금 말을 꺼낸 늙은 신하, 하이네스에게 변명조로 말했다.
그러나 하이네스는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그러자 베로니카가 제 머리를 긁적이고는 투덜댔다.
“봉인도 다 없어진 마당에 반려의 계시는 왜 내려온 건데? 나는 내 힘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고.”
“카인베르트 님의 뜻을 어찌 저희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됐어! 그대의 말대로 나는 그런 거창한 뜻 같은 건 모르니까 그냥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베로니카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신하들 사이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반려를 맞이하지 않으시겠다는 거냐며 걱정하는 목소리가 대부분이었다.
“재상님께서는 걱정이 안 되시나요?”
시테온이 하이네스의 곁으로 다가가 슬그머니 물었다. 그러자 하이네스가 느긋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어째서요? 아무리 봉인이 사라졌다고 해도, 반려가 필요한 일이 있으니까 저렇게 계시가 내려온 것 아니겠습니까.”
“……폐하의 반려는 폐하께서 선택하실 테니.”
“예?”
시테온이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하이네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하이네스는 가만히 웃은 뒤, 카인베르트의 무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씩씩대며 나가는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연무장에서 기사들과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을 벌이다가 왔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또 연무장으로 가려는 듯했다.
‘기사들이 죽겠다고, 또 아우성을 치겠군.’
하이네스는 소리 없이 중얼거리며 웃었다. 문득 그의 귓가에 선황제, 케르겔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반려는, 내가 선택해.>
<그녀가 카인베르트가 선택한 여인이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선택한 내 반려라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요. 결국은 본인이 선택할 반려가 계시로 나타나는 것이 카인베르트 님께서 바라신 진짜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이네스는 지금 이곳에 없는 케르겔을 향해 말했다. 일찌감치 딸에게 황제의 자리를 양위한 뒤, 대륙 곳곳을 여행하는 선황제 부부를 떠올렸다.
“나도 이제 슬슬 은퇴를 해야 할 텐데.”
그는 벌써 몇 번이나 사직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그때마다 베로니카에게 붙들려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제 신세를 상기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 한숨 끝에는 웃음이 묻어났다.
하기야 자신 같은 일 중독자에게는 은퇴 없는 삶이 더 행복한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바쉘 경!”
그때, 앞서가던 베로니카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그를 불렀다.
“빨리빨리 안 오고 뭘 하고 있는가? 몸이 그렇게 허약해서 어쩌려고 그러나? 나랑 같이 대륙을 통일하려면 미리미리 몸 좀 챙기라고. 궁의에게 말해서 보약을 좀 지으라고 할 테니까 가져다가 꼬박꼬박 챙겨 먹게.”
“……예, 그러겠습니다.”
하이네스는 베로니카의 타박에도 불구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확실히 이렇게 사는 게 더 행복하기는 하지.’
그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늙은 몸에 활기가 솟는 걸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베로니카는 하이네스가 웃으며 조금 더 발걸음을 재촉하는 걸 보고는 자신의 걷는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힐끗 고개를 돌려 카인베르트의 무덤 안에 있는 ‘계시’를 다시금 보았다.
부드럽게 웃던 녹색 눈이 새삼 떠올랐다.
“쳇. 취향 아니라니까.”
그녀는 자꾸만 제 머릿속에 파고드는 남자의 녹색 눈을 털어 내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제 옆의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참, 그나저나 이번에 뽑은 신입들은 어때? 조만간 불러 놓고 그 실력 좀 봐야겠는데.”
“괜찮은,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천재’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천재?”
베로니카가 기사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기사가 그녀의 물음에 재차 대답했다.
“예,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는 못한 터라 뭐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벌써 그 신입에게 패배한 선임 기사의 수가 서른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정신 나간 것들. 신입한테 졌다고? 이것들이 훈련이 부족했군.”
베로니카는 이를 빠드득 갈며 중얼댔다. 그러자 기사가 사색이 되어 손을 내저었다.
“후, 훈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말 그 신입이 천재라고 합니다. 오죽하면 벌써 신입에게 별명까지 붙었겠습니까. 전장의 천사라고 하던가……. 녹색 눈의 사신이라고 하던가…….”
“……뭐? 녹색, 눈의 사신?”
베로니카는 걸음을 옮기다 말고 멈칫했다. 그러자 기사가 왜 그러시냐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자네, 저기 저 그림…….”
“예?”
“아니. 됐어.”
기사는 무덤 안에 들어갈 자격이 되지 않는 터라 그 입구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계시’ 속의 남자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베로니카는 혀를 차며 미간을 긁적였다. 그러고는 고개를 흔들며 피식 웃었다.
‘괜한 생각이지. 녹색 눈이 딱 그놈 하나인 것도 아니고. 게다가 비실비실해 보이던 놈이 천재인지 뭔지 하는 신입이랑 동일인일 수가 없잖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을 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신입을 마주하고 경악할 제 모습을 상상도 하지 못한 채.
그리고 제 부친이 그랬던 것처럼, 반려에게 푹 빠지게 될 자신을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채.
쿵.
베로니카는 굉음과 함께 닫힌 카인베르트의 무덤을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고는 그대로 힘차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그 이야기 중에는 베로니카가 자신의 반려에 대한 계시를 받은 날의 일도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펼쳐지게 될 수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