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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그렇게 그들은…… (17/18)

에필로그. 그렇게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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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드립니다, 황후마마.”

“정말…… 내가 잉태한 것이 맞는가?”

로엘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궁의에게 물었다. 그러자 궁의가 싱글벙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가님께서 아주 튼튼하게, 무럭무럭 자라고 계십니다.”

“……그렇겠지. 내 힘까지 거의 다 빼앗아 갔을 정도로 먹보인 걸 보면.”

“케르겔.”

로엘린은 궁의와의 대화 중에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케르겔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콧등을 찡그렸다.

“뭐,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아. 태어나기도 전에, 게다가 아직 그대의 배가 부르기도 전이니 콩알만큼 작은 녀석일 텐데 그 거대한 힘을 모조리 먹어 치울 정도로 먹성이 좋으니.”

“자꾸 그러지 말아요. 아기가 서운해하겠어요.”

로엘린은 케르겔을 타박하며 자신의 배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우리 두 사람을 구한 게 바로 이 아이인데 말이에요.”

“그뿐인가요? 세상도 구했죠. 우리 아기님은 분명 최고의 영웅이 되실 거예요!”

실로아가 혼자 소리를 죽인 채 웃고 있다가 못 참겠다는 듯 끼어들어 재잘거렸다.

“크흠.”

케르겔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로엘린이 그 모습을 보다가 그를 향해 손짓을 했다.

“이리 와 봐요, 케르겔. 진료도 다 끝났는데.”

“으음. 그럴까?”

그는 어색하게 턱을 만지며 침대로 다가갔다. 그러자 루시가 궁의와 실로아에게 눈짓을 보냈다.

두 사람만 놔두고 나가자는 눈짓이었다.

그들이 무언의 합의를 하고 침실 밖으로 나간 뒤, 잠시 침묵이 흘렀다.

“…….”

케르겔은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채 어색한 표정으로 괜히 턱만 만졌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배 쪽을 힐끔거리느라 바빴다.

“왜 그렇게 봐요? 그냥 봐도 되는데.”

로엘린은 케르겔의 그런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니. 그냥, 좀…… 믿기지 않아서.”

“그래서 먹보라는 둥 먹성이 좋다는 둥, 그런 거예요? 믿기지 않아서?”

로엘린이 생글생글 웃으며 다시 말을 걸었다. 케르겔은 헛기침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배를 어루만졌다.

“정말…… 우리 아이가 태어날 거라는 거지?”

“그렇다고 하잖아요. 게다가 벌써부터 효도도 크게 한 번 했고요.”

케르겔은 로엘린의 우스갯소리에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효도 한번 제대로 했지.”

그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자신의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더 이상 케르겔의 가슴팍에는 봉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힘의 대부분을 아이가 가져간 덕분이다. 지금은 그저 자신이 충분히 제어할 수 있을 만큼의 힘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아직도 어색해.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갖고 있었던 힘인데.”

늑대족의 핏줄은 태어나는 순간, 부모에게서 그 힘을 물려받는다. 그래서 언젠가 자신도 제 자식에게 힘을 넘겨주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그 시기가 이렇듯 더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하기야 내 탓이기는 하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가 늑대족의 힘을 갖게 된 이유는 전적으로 자신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게 왜 당신 탓이에요. 따지고 보면 내 탓이기도 하죠.”

로엘린은 케르겔의 손을 잡으며 대꾸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두 번에 걸쳐 아이가 내 힘에 자극을 받는 바람에 각성을 일찌감치 하게 되었으니 말이야.”

“……괜찮겠죠?”

로엘린은 웃음기를 지운 뒤, 조금은 불안한 표정으로 작게 물었다. 큰 소리로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럽다는 듯한 태도였다.

“물론 괜찮지. 궁의가 그랬잖아. 아주 튼튼하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고.”

솔직히 콩알만 한 게 자라 봤자 얼마나 자랐을까 싶지만. 그는 굳이 뒷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게다가 아기가 튼튼하게 자라고 있다고 믿고 싶은 건 케르겔 역시 같은 마음이기도 했다.

“……어떻게 그 힘을 다 가져갈 수 있었던 건지.”

케르겔은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그날, 죽음을 각오했던 그들에게 기적이 찾아왔다.

케르겔이 억누르고 있던 힘이 밖으로 터져 나오려던 순간, 로엘린의 몸속에서 예상치 못한 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 지금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려 하면 그저 끌어안고 있던 온기만이 생각나니 말이다.

사랑하는 이의 체온.

죽는 순간 마지막으로 가져갈 기억이 그것이라 다행이란 생각을 했던 것.

기억하는 건 그것뿐이었다. 나중에 모든 일이 다 끝나고 난 뒤, 눈앞의 이가 살아 있음을 깨닫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것이 로엘린의 배 속에 잉태된 작은 생명이 벌인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로엘린이 라카인에서 돌아오다가 맞닥뜨렸던 위기 앞에서 한 차례 봉인이 깨질 뻔했다. 그때 배 속의 아이가 부친의 힘에 자극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또한 이번에 다시 한 번 자극을 받게 되면서 각성을 하게 된 것이고…….

그렇게 각성한 아이는 케르겔이 제어하지 못한 힘의 일부, 아니, 대부분을 가져갔다.

“그래 놓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얌전히 잠들어 있으니.”

케르겔은 피식거리며 로엘린의 배에 손을 댔다. 그러자 마치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의 배 속에서 우우웅, 하며 진동이 전해졌다.

‘안 자고 있거든요!’

아이가 그렇게 제 의사를 표현한 것만 같아 로엘린과 케르겔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고마워, 로엘린.”

케르겔은 한참 웃은 뒤, 그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로엘린이 그 손을 감싸 잡으며 대답했다.

“나도 고마워요, 케르겔.”

고마운 이유는 너무나 많았다. 하나하나 입 밖으로 내놓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굳이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았다.

제 마음을 들여다보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읏차.”

케르겔은 침대 위로 아예 올라가더니 로엘린의 옆에 드러누웠다. 그러고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그녀를 제 옆에 눕게 했다.

“뭐 하는 거예요? 아직 환한 대낮인데!”

로엘린이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케르겔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그대는 임신부야. 충분히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어.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무슨 잠을 벌써부터 자요? 아침에 일어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게다가 프졸란에 다녀오느라고 쌓인 여독도 다 풀리지 않았을 텐데.”

“충분히 쉬었어요. 어제 하루 종일 침대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다고요.”

로엘린은 다시금 버둥대며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역시 이번에도 그녀의 시도는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난 여독이 덜 풀렸나 봐. 그대가 나를 좀 재워 줘야겠는데.”

“뭐라고요? 재워 주기는 뭘……. 당신이 어린애예요?”

로엘린은 일어나는 걸 포기한 뒤, 그의 가슴팍을 가볍게 때리며 타박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한쪽 눈썹을 올리더니 심통 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린애만 재워 주란 법 있어? 설마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내 자리 빼앗기는 거 아니야? 매일 애 재워야 한다고 나는 뒷전으로. 가뜩이나 그 녀석한테 힘도 다 빼앗겼는데.”

“못 말려, 정말.”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질투하는 남자라니. 로엘린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

“알았어요. 재워 줄게요. 그럼 됐죠?”

로엘린은 케르겔의 등을 토닥이다가 그의 목덜미를 보았다. 희미하게 남아 있는 상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본래 모습을 회복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상처가 깨끗하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만큼 그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기야 죽음까지 각오했었으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지만.

<……그대가 살아갈 세상을 지키고 싶었어.>

그가 했던 말이 새삼 귓가에 울렸다.

홀로 죽음을 감당하고자 했던 그 마음에 다시금 가슴이 먹먹해졌다. 로엘린은 케르겔의 등을 토닥이다가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자 케르겔이 그녀를 힘주어 안더니 웃음기 섞인 투로 말했다.

“이러면 내가 잠을 어떻게 자?”

“왜 못 자요? 그냥 자면 되지.”

“그대는 아직도 나를 모르는군. 아…… 참, 궁의한테 물어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네.”

“……뭘 물어보지 못했는데요?”

로엘린은 그를 안고 있다가 고개만 살짝 들어 질문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을 나눠도 되는지 말이야.”

“……뭐, 뭐라고요?”

로엘린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케르겔은 그녀의 그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말을 이었다.

“내가 알아보니까 의견이 둘로 갈라지더라고. 적당히 행복한 잠자리를 갖는 게 아기한테 좋다는 쪽과 무리를 하면 안 된다는…….”

“그런 걸 왜 알아봐요!”

미쳤어. 대체 누구를 통해 알아본 걸까. 그녀는 케르겔의 가슴팍을 재차 때리고는 씩씩대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입술이 웃음을 간신히 참느라 실룩이는 게 보였다.

제게 장난을 치느라 일부러 꺼낸 말이란 걸 그제야 깨달았다.

“정말 짓궂어.”

로엘린은 새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꾹꾹 눌러 식히며 투덜댔다. 그러자 케르겔이 뒤늦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곧바로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촉.

가볍게 닿았다가 떨어진 입술 끝이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입이 재차 열렸다.

“그 녀석이 힘을 가져서 다행이기는 해.”

“……?”

로엘린은 뜬금없는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케르겔이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의 발 아래로 자리를 옮겼다.

“뭘 하는 거예요?”

그녀는 그가 제 발을 살피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일어나 앉았다. 하지만 케르겔은 아랑곳하지 않고 로엘린의 발을 세심히 살핀 뒤, 입을 열었다.

“발의 상처가 정말 깨끗하게 나았어.”

“그걸 보려고 그런 거예요? 궁의가 벌써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요. 발도 그렇고, 몸도 다 나았다고.”

로엘린은 피식 웃으며 케르겔의 말에 대꾸했다.

제 배 속의 아기가 늑대족의 힘을 갖게 되면서 강한 치유력을 발휘했던 것인지 몸이 싹 나았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던 발의 상처가 흉터 하나 남기지 않고 나은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러고 보니 이제 내가 당신보다 더 강하네요?”

로엘린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그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아, 하고 짧게 대꾸하더니 농담처럼 대꾸했다.

“그러게. 그대의 말을 잘 들어야겠어.”

“그래요. 괜히 아까처럼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한테 질투하지 말고요.”

“음……. 그건 확답하지 못하겠는데. 난 지금도 그대의 애정을 이 녀석한테 빼앗길까 봐 걱정이거든.”

“걱정은 무슨…… 꺄악! 케르겔!”

로엘린은 케르겔의 말에 대답하다 말고 소리를 질렀다. 케르겔이 그녀를 안더니 그대로 침대 아래로 내려선 탓이었다.

“놀랐잖아요. 내려 줘요.”

“이러고 잠깐만 있자.”

그는 로엘린을 안은 채 창가로 향했다. 로엘린 역시 고집을 부릴 마음은 없다는 듯 케르겔에게 몸을 기댄 채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곧 가을이 되겠네요.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못 느끼며 살았는데.”

로엘린은 문득 깨달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루하루, 그저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꿈이라면 아주 지독한 악몽이었을 것이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꿈이 반복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꿈이 아닌, 현실이었기에 바뀌었던 것일까.

그녀는 고개를 돌려 저를 안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기억나요?”

“뭐가?”

“우리 처음 만났던 날.”

“으음…….”

“그때 다짜고짜 활부터 쐈었죠?”

로엘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그러자 케르겔이 머쓱한 표정과 함께 변명조로 대꾸했다.

“그대한테 쏜 게 아니었잖아.”

“하지만 화살이 바로 옆을 지나갔거든요. 자칫 방향이 조금만 틀어졌어도 내가 맞았을 거라고요.”

“내가 그런 실수를 할 것 같아?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내가 목표로 정한 건 놓치지 않았다고. ……하긴 그래서 그대도 놓치지 않았나 보네.”

케르겔은 약간의 자부심을 담아 말하다 말고 키득거리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대는 내가 잡은 사냥감 중에 최고야.”

“뭐요? 사냥감?”

로엘린이 미간을 찡그리며 그를 노려보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넉살 좋게 대꾸했다.

“응. 아, 아닌가? 반대로 내가 잡힌 건가? 이렇게 그대의 곁에 달라붙어 있고 싶으니 말이야. 다시 정정해야겠네. 그대는 최고의 사냥감이 아니라, 최고의 사냥꾼이라고.”

케르겔은 우스갯소리를 이어 가며 로엘린의 뺨에 제 입술을 가져갔다. 그러자 못 말린다는 듯 로엘린에게서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간지러워요.”

뺨에 닿은 입술의 감촉에 로엘린이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맑은 웃음소리와 그녀의 따끈따끈한 체온에 마음이 제멋대로 헤실헤실 풀어졌다.

이 사랑스러운 여자를 어쩌면 좋을까.

청혼을 할 때만 하더라도 자신에게 이렇듯 달콤한 삶이 기다리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고마워, 로엘린.”

“……?”

“내 신부가 되어 줘서.”

“……나도 고마워요. 내 남편이 되어 줘서.”

로엘린은 케르겔이 한 말을 고스란히 되돌려 주고는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케르겔이 그녀를 고쳐 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두 사람의 입술이 천천히 포개졌다.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그들은 지금처럼 그렇게, 앞으로도 살아갈 터였다.

그런 그들을 축복하듯 창밖에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평온한 어느 날, 한낮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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