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3. 그대가 살아갈 세상 (16/18)

Chapter 13. 그대가 살아갈 세상

세로이프 제국에서는 공식적으로 라카인 왕국에 항의했다.

황후를 살해하고자 꾀하였다는 것.

그것이 그들이 항의한 내용이었다.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혹은 어떤 이권을 두고 다투는 복잡한 건은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중대한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이 수면 위로 올라오자마자 제국은 물론이고 크세안 대륙 전체가 한바탕 뒤집히고 난리가 났다.

실질적으로 대륙의 지배자나 다를 바 없는 세로이프 황제의 반려가 살해당할 뻔한 것이니 말이다.

분개한 제국민들은 누구나 당장 라카인과의 전쟁을 선포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고, 실제로 지금 바로 싸울 수 있다면서 생업을 내팽개치고 입대를 자원하는 이들이 늘어 가기도 했다.

금방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었다.

세로이프와 군신 관계에 있는 프졸란과 카이제넨, 두 공국이 숨을 한껏 죽인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다.

그런 위기 상황 속에서 라카인이 보인 태도는 어쩌면 지극히 예상 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귀국의 황후가 본국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불의의 사고를 당한 점은 유감이지만, 그렇다 해서 억울한 죄를 뒤집어쓸 수는 없다. 오히려 이로 인하여 본국의 명예가 훼손되었으니 그 점에 대하여 귀국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는 바이다.>

라카인의 태도는 단호하고 강경했다. 애매하게 사과를 표명한다거나 하는 식의 대처가 되레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내린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라카인의 태도는 세로이프 사람들의 분노에 더욱 불을 붙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장 쳐들어가야 합니다! 감히 황후마마를 해하고자 하였으니, 그 수백 배, 아니, 수천 배로 되갚아 줘야지요!”

“그렇습니다, 폐하! 명령만 내려 주신다면 제가 직접 가서 라카인 왕실의 그 돼지들 목을 똑똑 따 버리겠…….”

“보두아 백작, 조금 자제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폐하께서 주재하시는 회의인데 언사가 너무 지나치군요.”

하이네스는 보두아 백작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호전적인 성정으로는 그 적수를 찾기 힘들다고 할 정도로 괄괄한 성격의 보두아 백작이니, 그 이상 무슨 말이 더 나올지 염려가 된 탓이었다.

그러다 보면 비슷한 성격의 다른 이들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회의가 ‘개판’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테니 말이다.

이미 여러 번, 그렇게 ‘개판’이 된 회의를 겪어 본 탓에 하이네스는 이번에는 빠르게 분위기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아니, 진정시켰다고 믿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석상은 또다시 시끄러워지고 말았다. 서로 의견을 굽힐 생각이 없는 양쪽의 대립이 점점 더 격화된 탓이었다.

“그러니까 전쟁을 해야 한다, 이 말입니다! 황후마마께서 크게 위해를 당하실 뻔했는데 고작 사과를 받는 걸로 이게 해결이 될 일입니까!”

보두아 백작이 또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그의 주변에 있던 다른 신하들 역시 옳은 얘기라며 동의했다.

“라카인의 국왕에게 직접 사과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를 짓는 게 최선입니다. 자존심 강한 라카인 왕실에서 보자면, 그보다 더 치욕스러운 일은 없을 터.”

하이네스가 지끈거리는 옆머리를 손으로 누르며 차분히 제 의견을 말했다. 그러자 보두아 백작이 콧방귀를 뀌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사과 따위 몇 번을 받는 게 무슨 소용이랍니까. 라카인, 그 족속들은 앞에서는 고상한 척하면서도 뒤에서는 온갖 추잡한 짓은 다 하지 않습니까.”

그는 목이 마른지 앞에 놓인 물컵을 들었다. 그러고는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말을 이어 나갔다.

“황후마마께 사과를 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번 기회에 라카인에 전쟁을 선포해서…….”

“전쟁이 어린애들 놀이인 줄 아십니까!”

하이네스가 언성을 높였다. 그러고는 미간을 찡그린 채 회의에 참석한 이들을 둘러보며 타박하듯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부터 전쟁이다, 하고 외치기만 하면 다 해결되는 것이라 생각합니까? 보두아 백작이 말한 것처럼 왕족들의 목만 따 가지고 돌아오면 되는 일인 줄 아십니까? 이게 무슨 과일 따기 축제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

하이네스는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다들 눈을 굴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간단히 생각한 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빠드득.

그 순간, 단단한 뭔가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모였다.

케르겔이 앉아 있는 자리가 그 소리의 근원지였다. 그가 팔걸이를 꽉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또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팔걸이가 그의 손아귀 힘으로 인해 조각조각 부서진 채 바닥으로 떨어지는 광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말 잘못하면 내 머리통이 저렇게 부서지겠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동시에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들은 서로 합의를 한 것도 아닌데도 한꺼번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일단 바쉘 경의 말대로 하는 편이 나을 것 같군.”

케르겔은 다시 한 번 팔걸이를 꽉 움켜쥐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금빛 시선이 회의를 위해 모인 신하들을 한 번 훑었다.

“전쟁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애꿎은 목숨들이 희생되는 걸 막기 위해서 말이야. 이성적으로 대처해야지.”

그의 말과는 달리 그의 눈빛은 전혀 이성적이지 않았다. 아니,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 누구든 찢어 죽일 듯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모습을 보던 사람들은 선득한 느낌이 들어 괜히 자신의 목덜미를 문질러야 했다. 자신들을 향한 살기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본능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그만큼 라카인에 대한 황제의 분노가 깊은 것일 터.

“……정말 그렇게 하셔도 괜찮겠습니까.”

하이네스는 케르겔이 제 의견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케르겔이 그를 쳐다보더니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아도 그렇게 해야지. 어찌 되었든 황후의…… 모국이고, 그녀의 핏줄이니.”

케르겔은 다시 한 번 팔걸이를 꽉 움켜잡았다. 그 바람에 남아 있던 부분마저 가루가 되어 바닥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로엘린은 겉으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듯 아예 라카인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요 며칠 라카인과 관련된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녀의 낯빛이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라카인과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일 터.

황궁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니 그녀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 없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라카인을 아예 대륙의 지도 위에서 지워 버리고 싶지만…….”

케르겔이 잇새로 뱉어 내듯 말을 중얼거리며 하이네스를 쳐다보았다. 하이네스가 그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는 듯 덤덤히 그 시선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황후의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니까.”

케르겔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하이네스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러니 라카인에 제대로, 한 번 더 사과를 요구하도록 해. 뭐, 라카인에서 이번 기회마저 헛소리로 날려 버린다면 나로서는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겠지만 말이야.”

그럼 나름대로의 명분도 갖췄겠다, 제 뜻대로 해도 문제 될 일이 없으리라.

케르겔은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애써 분노를 눌렀다.

* * *

“라카인에 다시 사과를 요구했다고?”

로엘린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통증을 참다가 방금 실로아가 꺼낸 이야기에 관심을 보였다.

실로아는 궁의가 로엘린의 상처를 치료하는 걸 보며 어깨를 움찔거리다가 그녀의 물음에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황후마마. 조금 전에 라카인에 사과를 요구하는 공식 문서를 보냈다고 합니다.”

“사과라……. 글쎄. 과연 라카인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일을 인정하고 사과하려 할까?”

로엘린은 회의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젓다가 아, 하고 소리를 내며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실로아가 로엘린의 발을 치료하던 궁의를 향해 예민한 어조로 쏘아붙였다.

“조심하세요! 황후마마께서 아파하시잖아요!”

“관통상을 입었으니 통증이 있는 게 당연하지 않나. 물론 최대한 조심하고 있기는 하지만…….”

궁의가 발끈하여 실로아에게 대꾸를 하다가 로엘린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로엘린이 손사래를 치며 온화한 투로 입을 열었다.

“나는 괜찮네. 그리고 궁의의 말대로 아픈 게 당연하지. 실로아, 나를 위하는 마음은 잘 알지만, 그렇다 해서 지금 궁의에 대한 네 행동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야. 정중히 사과하는 게 좋겠어.”

“……죄송합니다, 궁의님.”

실로아는 로엘린의 말에 목을 쏙 집어넣더니 순순히 궁의에게 사과했다.

“아니, 뭐, 사과를 받을 것까지는 아니지만…….”

궁의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로엘린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따스한 햇살이 커튼이 열린 틈을 타서 창틀 부근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너무나 평화롭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불과 얼마 전에 자신에게 벌어졌던 일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치료가 모두 끝났습니다, 황후마마.”

궁의가 치료를 마친 뒤, 로엘린의 발을 다시금 붕대로 꼼꼼하게 감싸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로엘린은 창밖을 보던 시선을 돌려 그를 보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항상 수고가 많네. 덕분에 상처가 빨리 아물고 있는 것 같아.”

“황후마마께서 치료에 함께 전념해 주시니 회복이 빠른 게 아닌가 합니다.”

궁의는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면서도 얼굴에 기쁜 기색이 깃드는 걸 숨기지는 못했다. 본인의 일을 인정받고 치하의 말까지 들었으니 당연했다.

로엘린은 궁의가 물러간 뒤,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자 실로아가 냉큼 쿠션을 잔뜩 가져와 로엘린이 편히 기대어 앉을 수 있도록 받쳐 주었다.

“고마워, 실로아.”

“아니에요, 황후마마. 참! 다과를 가져올까요? 주방장이 이번에 수확한 사과로 황후마마를 위해 새로운 디저트를 개발했다고 하던데요.”

“그래? 그럼 부탁할게.”

로엘린은 실로아의 말에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아가 바로 준비하겠다며 물러갔다.

“…….”

그 뒷모습을 잠시 쳐다보던 로엘린의 입에서 작게 한숨이 나왔다. 그때까지 묵묵히 곁을 지키고 있던 루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라카인의 일이 걱정되시는지요?”

“응? 아아……. 그냥 조금. 그래도 일단 전쟁으로 치닫지 않은 건 다행이야. 수많은 목숨들이 죄 없이 희생되는 일만큼은 없어야지.”

저를 죽이고자 한 어미와 오라비, 그들에게는 죄를 물을 수 있다. 하지만 라카인의 국민들에게까지 그 죄를 묻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그곳에서 태어나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들의 터전은 쑥대밭이 될 터였다.

로엘린은 전쟁이 일어날 경우, 세로이프가 승리하리라는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안도하는 것이기도 했다.

“더구나 나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건 바라지 않아.”

그저 바라는 건, 그냥 이대로 두 번 다시 그들과 보지 않고 각자 살아가는 것뿐.

그녀는 라카인에 대한 미련을 전부 끊어 냈다. 자신은 더 이상 라카인 왕실의 일원도 아니고, 그들의 가족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가족은 케르겔, 그 남자 하나뿐이니 말이다.

‘……그러니까 이건 그저, 그들과 다시는 얽히기 싫은 마음에서 비롯된 건지도 모르지.’

전쟁이든, 뭐든, 라카인과는 다시 얽히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니 제발 그냥 그렇게 마무리가 됐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로엘린이 제 바람을 담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 *

“어서 오십시오, 공왕.”

“라카인의 국왕을 뵙습니다.”

프졸란의 공왕이 레노프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레노프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자 먼저 와 있던 카이제넨의 공왕이 프졸란의 공왕을 향해 악수를 청했다.

레노프는 두 늙은 공왕이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걸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도 제 눈치를 힐끔 살피는 모양새가 우스웠다.

‘왜 부른 것인지 궁금한 거겠지. 아무도 모르게 비밀 회동이라는 이름으로.’

세로이프만 제외한, 나머지 두 나라의 왕을 불러 회동을 갖자고 했으니 말이다.

“……흐음. 굳이 말 돌릴 것 없이 바로 얘기하시지요. 우리에게 알려 줘야 한다는 말이 대체 무엇입니까?”

둘 중 성격이 급한 카이제넨의 공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기야 그 급한 성격 탓에 회동 자리에도 먼저 나와 있었지만.

레노프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삼킨 뒤,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러자 가면을 쓴 사용인들이 다가와 서둘러 테이블 위에 다과를 차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런 걸 먹겠다고 온 게 아니…….”

“지킬 것은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노프는 카이제넨의 공왕이 조급해하며 꺼내려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사용인들 중 한 사람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러자 그의 손짓을 받은 자가 조심스럽게 레노프의 곁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짐승이 아닌…… 사람이니 말입니다.”

레노프의 손이 사용인의 가면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의 손은 마치 악기라도 연주하듯 우아하게 가면을 벗겨 냈다.

“……헉!”

“……!”

사용인의 얼굴을 본 두 사람이 경악하여 숨을 들이쉬었다.

얼굴 전체가 문드러져 금방이라도 피부가 흘러내릴 것만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 이런 괴물이…….”

“아아, 괴물이라니요. 듣는 ‘사람’이 불쾌하겠습니다. 정작 괴물은 따로 있는데 말입니다.”

레노프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방금 자신으로 인해 가면이 벗겨진 사용인을 향해 질문을 건넸다.

“그렇지 않은가, 하이엔 테고르트?”

“……하, 하이엔 테고르트?”

프졸란의 공왕이 자신의 귀에 들린 이름에 미간을 좁혔다. 하이엔 테고르트. 그는 프졸란의 자랑이라 할 수 있는 석학이었다. 하지만 오래전 실종되어 그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던 자인데…….

“설마, 그, 하이엔 테고르트란 말인가?”

공왕은 사용인, 하이엔을 돌아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하이엔이 프졸란의 공왕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공왕 전하를 뵙습니다.”

“……진짜 하이엔 테고르트라고?”

공왕은 하이엔의 얼굴에서 제 기억 속의 얼굴을 찾아보고자 했다. 하지만 문드러진 얼굴에서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는 혼란스러워하다가 다시 레노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대체 뭘 하자는 겁니까? 무슨 의도로 테고르트를, 설마 당시 그를 납치라도 했던…….”

“라카인이 그런 추악한 짓을 할 리 있겠습니까. 그는 본인 스스로 원하여 라카인으로 넘어와 정착했던 것뿐입니다. 사실,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레노프의 푸른 눈에 웃음이 스쳤다. 그에 불쾌감을 느낀 프졸란의 공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지금 나를 우롱하고자 하는 겁니까. 그러려고 부른 것이라면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겠군요!”

“어찌 그리 급하십니까. 카이제넨의 공왕만 성격이 급하신 줄 알았더니 프졸란의 공왕께서도 꽤나 급한 성격이시군요.”

피식 웃던 레노프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러자 프졸란의 공왕이 움찔하며 카이제넨의 공왕과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고는 헛기침과 함께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제야말로 이 회동의 목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 같단 예감이 들어서였다.

“……하이엔 테고르트, 이 사람이 왜 라카인에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이런 모습이 된 것인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레노프의 물음에 두 사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레노프가 할 말을 기대하며 번들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레노프의 입꼬리가 길게 휘어졌다.

“이 사람은 늑대족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고, 그에 대해 더 깊이 연구를 하고자 이곳에 왔답니다. 두 분께서도 아시다시피 라카인만큼 온갖 학문이 발달한 곳은 없으니 말입니다.”

“늑대족이라니요?”

“갑자기 그게 무슨 허황된 말씀이십니까?”

두 공왕이 저마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레노프는 싱글거리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

“……허황된 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 늑대족이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지요.”

“예?”

“그게 무슨…….”

프졸란의 공왕이 레노프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옮겨 하이엔을 보았다. 그러자 하이엔이 마치 웃으려는 것처럼 문드러진 얼굴을 실룩이더니 쉰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세로이프의 황실에 늑대족의 피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뭐라고?”

“세로이프의 건국 시조가 바로 늑대족이었지요. 오래된 이야기라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혔지만 말입니다.”

하이엔의 눈이 축 늘어진 눈꺼풀 속에서 번들거렸다. 평생 늑대족을 연구하고, 그 과정 속에서 끔찍한 일까지 겪었던 노학자의 탐욕과 희열이 그 눈빛 속에서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하이엔의 말에 더욱 집중했다. 하다못해 레노프조차도 말이다.

세로이프 제국을 건국한 카인베르트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가 봉인시킨 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모든 이들의 눈이 한순간 이채를 띠며 번득였다.

바로 이것이 오늘 회동의 목적이로구나.

두 공왕은 누가 가르쳐 준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러고는 동시에 레노프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레노프가 두 사람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이는 것을 확인한 뒤, 천천히 손을 들어 하이엔의 말을 중단시키고는 입을 열었다.

“짐승의 핏줄이 대륙의 주인 행세를 하는 걸 이대로 계속 놔두시겠습니까?”

“…….”

“그저 우스갯소리로 ‘괴물’이라 불렀던 세로이프의 황제가 진짜 괴물, 아니, 미천한 짐승의 핏줄인데, 우리가 언제까지 그의 아래에서 고개를 조아리며 살아야 합니까?”

레노프의 푸른 눈이 차가운 유리알처럼 번들거렸다. 그러자 그 시선에 카이제넨의 공왕이 저도 모르게 흠칫거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달리 방도가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세로이프가 워낙 막강한 힘을 갖고 있으니…….”

오랫동안 세로이프와 군신 관계를 맺은 채 공국으로 존재해 온 탓에 카이제넨의 공왕은 이런 이야기 자체에 불편함을 넘어서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는 듯했다.

물론 그와 별개로 조금 전 들었던 이야기에 대한 관심을 아예 싹 지우지는 못한 것 같지만 말이다.

레노프는 그 비겁한 모습을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비틀더니 다시 몸을 슬쩍 앞으로 기울이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힘을 가져올 수 있다면 상황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겠지요.”

“……그, 그게 무슨 뜻입니까?”

카이제넨의 공왕이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프졸란의 공왕 역시 눈을 크게 뜨고 레노프를 쳐다보았다. 레노프는 마치 그 시선을 즐기듯 느슨하게 미소를 짓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늑대족이 갖고 있었다는, 그 봉인된 힘을 가져올 방법이 있습니다.”

“……!”

“그게, 방금 그 말씀이 진실입니까?”

카이제넨의 공왕은 놀라서 말조차 잇지 못하고 눈만 휘둥그렇게 떴다. 그리고 프졸란의 공왕은 금방이라도 레노프의 멱살을 잡을 듯 몸까지 그를 향해 기울이고는 급히 물었다.

“하이엔.”

레노프가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다시금 하이엔을 불렀다. 그러자 잠시 존재감을 지운 채 침묵하고 있던 하이엔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레노프를 쳐다보고 있던 두 공왕의 시선이 하이엔에게로 옮겨 갔다. 하이엔은 그들의 시선을 마주한 채 문드러진 입꼬리를 올렸다.

“그 힘을 빼앗는 술법이 있습니다. 바로 제가 오랫동안 연구한 끝에 알아냈지요.”

“……!”

그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하이엔은 그 놀란 표정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제 삶을 보상받는 것만 같았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그 큰 고통을 견뎠던 것이다.

그는 손으로 제 얼굴을 더듬더듬 만져 보았다. 자연의 섭리를 어기고 추악한 술법을 탄생시킨 대가로 자신이 받아야 했던 벌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제 얼굴이 그 증거였다. 그 바람에 얼마나 절망하고 좌절했던가.

‘하지만 이제는 달라. 내 연구 성과를 드디어 확인할 수 있게 될 테니까.’

하이엔은 자신의 연구 결과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설명을 들은 두 공왕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아니, 가능하다고 해도 그렇게나 많은 목숨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건 좀…….”

“모름지기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작은 희생이 필요한 법이지요.”

레노프가 카이제넨의 공왕이 꺼낸 말을 중간에 자른 뒤, 입을 열었다. 두 공왕과 달리 그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하이엔에게서 늑대족의 힘을 빼앗는 술법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설령 지금 처음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반응은 달라지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게다가 비천한 목숨을 의미 있는 일에 써 주겠다는데, 외려 감사 인사를 받아도 모자라지 않겠습니까. 왕과 나라를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충성을 바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셈이니 말입니다.”

레노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하이엔이 설명한 술법 속에서 수천 명의 목숨이 희생되리라는 걸 듣고도 일말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 듯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꺼낸 말과 그의 당당한 태도에 두 공왕이 설득된 것인지 그들의 얼굴에서도 떨떠름해하던 기색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대신 남은 건 탐욕이었다.

“험험, 그러니까 자네 말대로라면…… 그 술법을 통해 정말 늑대족의 힘을 탈취할 수 있다는 건가?”

“물론입니다. 봉인을 깨뜨려서 그저 취하기만 하시면 됩니다. 물론 그 매개체로서 늑대족의 ‘반려’가 술법의 마지막 과정에 꼭 필요하기는 합니다만…….”

“바로 그 점이 문제 아닙니까? 무슨 수로 세로이프의 황후를 술법을 펼친 곳까지 유인해 올 수 있겠는지요. 세로이프 쪽에서는 가뜩이나 지난번에 불상사를 겪어서 외부에 대한 경계가 심해졌을 텐데…….”

프졸란의 공왕이 레노프를 힐끔 쳐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세로이프의 황후에 대한 암살 시도가 라카인에서 저질렀던 일임을 모르지 않는다는 걸 은근히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레노프는 표정의 변화 없이 태연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물론 공왕의 말씀에 일리가 있기는 합니다. 실제로 세로이프의 경계가 심해지기는 했지요. 아니, 심하다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지나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황후가 엄연히 라카인의 핏줄이라는 것조차 무시한 채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묻고자 하고 있으니…….”

억울하다는 듯 말하는 레노프를 본 두 공왕이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바로 표정을 고쳤다.

어차피 서로의 속사정 따위를 아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레노프 또한 그 일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싶지 않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말인데…… 프졸란의 공왕께 도움을 청해야겠습니다.”

“……도움이라니요?”

프졸란의 공왕이 그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레노프가 입꼬리를 올리고는 말을 이었다.

“공왕의 60주년 탄신일이 곧 다가온다고 들었습니다.”

“예. 그렇습니다만…….”

갑자기 왜 자신의 생일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가 싶어 공왕은 더욱 의아한 기색을 드러냈다. 레노프가 그 해답을 주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뜻깊은 날이니 마땅히 대륙의 모든 이들에게서 축하를 받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아.”

공왕이 레노프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리고는 입을 벌렸다. 레노프가 그를 마주한 채 미소를 짓고는 덧붙여 말했다.

“초대해 주신다면 기꺼이 방문하도록 하지요.”

* * *

“그대의 생일은 챙겨 주지도 못했는데, 남의 생일을 축하해 주러 가야 한다니. 대체 그 늙은이는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케르겔, 그러지 말아요. 평범한 생일도 아니고, 60주년이 되는 날이니까 많은 이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은 거겠죠. 게다가 프졸란은 우리와 무관한 나라도 아닌데.”

로엘린은 계속 투덜대는 케르겔을 달래며 그의 옷깃을 만져 주었다. 그녀의 발이 다 낫지 않은 상태라 앉은 자세에서 그에게 손을 내밀다 보니 케르겔이 그녀에게 맞추어 허리를 구부려야 했다. 하지만 케르겔은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도 불만이 없는지 허리를 구부린 자세를 고수하며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게다가 방금 전까지 미간을 꿈틀거리며 투덜대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손길에 금세 온순해지기까지 했으니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몸단장을 돕는 루시를 비롯해 여러 시녀들 모두 덤덤하기만 했다. 그나마 표정의 변화라 부른다면, 그들의 입가에 살짝 번진 미소라고 해야 할까.

황제와 황후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 까닭이었다. 거의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보는 일이니 익숙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녀들의 시중이 이어지던 중에 케르겔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그런데 로엘린, 정말 괜찮겠어?”

그는 언제 투덜댔던가 싶게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질문을 건넸다. 로엘린 역시 미소를 거둔 뒤, 진지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라카인에서도 축하를 하기 위해 사절단이 올 거야. 아마…… 왕족들 중 누군가가 오겠지. 어쩌면 우리처럼 국왕이 올 수도 있고.”

“……그렇겠죠. 프졸란에서 우리를 초대한 것처럼, 라카인에도 초대장을 보냈을 테니까.”

로엘린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프졸란 공국에서 초대장을 보내왔다. 공왕의 60주년 생일을 기념하여 꼭 방문해 주기를 청한다는 초대장이었다.

그래서 오늘, 그들은 프졸란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케르겔. 설령 그를, 혹은 그들을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흔들릴 일 없으니까. 내 가족은 당신뿐이고 내 나라는 이곳, 세로이프예요. 더 이상 그쪽에는 아무 미련도 없어요.”

그녀는 케르겔을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덩달아 미소를 짓더니 로엘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만 나갈까?”

“그래요.”

로엘린이 웃으며 그의 손을 살짝 잡은 뒤, 루시를 돌아보았다. 궁 밖에 준비된 마차를 타기 위해서는 일단 밖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루시가 로엘린과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그녀가 앉아 있는 이동식 의자를 조심스럽게 밀려는 순간, 케르겔이 루시를 향해 멈추라는 뜻으로 손을 들어 보였다.

“……?”

루시는 갑작스러운 케르겔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하지만 그녀는 곧 케르겔이 뭘 할 것인지 알아차리고 입을 벌렸다.

“폐, 폐하!”

“앗! 케르겔!”

그와 동시에 로엘린이 깜짝 놀라 그를 불렀다. 하지만 케르겔은 그녀를 안아 들고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매번 이렇게 놀랄 일은 아니지 않아? 내가 그대를 한두 번 안은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래도 내려 줘요! 수행원들이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텐데.”

시녀들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프졸란으로 떠나기 위해 준비된 행렬이니 수행원들도 평소보다 훨씬 많을 테니 말이다.

아마도 케르겔과 자신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는 이들도 있을 텐데…….

“케르겔!”

로엘린은 다시 한 번 그를 불렀다. 하지만 케르겔은 본인의 뜻을 굽힐 생각이 없다는 듯 그녀를 안아 든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입꼬리가 장난스럽게 올라간 게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당황해하는 걸 일부러 즐기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로엘린이 그런 케르겔을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작게 내쉰 뒤,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기댔다. 그러자 케르겔이 목구멍을 울리며 나직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얄미워서 로엘린은 그의 가슴팍을 살짝 때리며 타박조로 말했다.

“웃지 말아요. 어린애도 아니면서 짓궂게 장난치고.”

“하하!”

하지만 케르겔은 그녀의 타박에 더욱 크게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뒤를 따르던 시종들과 시녀들이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폐하. ……황후마마.”

황후궁을 나서자마자 차분한 목소리가 그들을 맞이했다. 로엘린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바로 깨닫고 민망함에 몸을 바르작거렸다.

하이네스 역시 황제의 품에 안겨 있는 황후를 마주하는 일이 겸연쩍은 듯 헛기침을 하고는 케르겔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케르겔에게 뭐라고 한 마디 했겠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그저 꾹 참을 뿐이었다. 어쨌든 다른 이들 앞에서 황제의 위신을 떨어뜨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준비는 다 된 건가?”

케르겔이 그런 하이네스의 속내를 눈치채고는 웃음을 삼킨 뒤, 태연한 투로 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이네스가 울컥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대답했다.

“예, 폐하.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궁의는 어디에 있지?”

케르겔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건넸다.

“궁의는 폐하와 황후마마께서 타실 마차를 저와 함께 뒤따를 것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이네스 역시 차분해진 얼굴로 그의 물음에 대꾸했다. 무엇보다도 케르겔이 반려의 몸 상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출발하도록 하지.”

케르겔은 고개를 돌려 프졸란으로 함께 갈 기사단과 수행원들을 둘러보았다. 황제와 황후의 모습을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눈만 깜빡이고 있던 이들이 황제와 눈이 마주치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문으로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나도 저번에 황후궁에서 일하는 사촌을 통해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안 믿었지.

수군대는 목소리들이 제법 컸다. 본인들이야 작게 속삭이는 것이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 바람에 로엘린의 뺨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케르겔은 그런 그녀를 사랑스럽다는 듯 보다가 마차에 올랐다.

“민망해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봐요!”

로엘린은 마차에 타자마자 그를 타박했다. 케르겔이 그녀를 앉히고는 그녀의 등 뒤에 쿠션을 받쳐 주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대체 뭐가 민망하다는 거야? 우리가 부적절한 관계도 아닌데.”

“그래도 창피하잖아요.”

로엘린은 달아오른 뺨의 열기를 식히려고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케르겔이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그녀의 얼굴 위로 제 손을 살랑살랑 움직였다.

검이나 활 같은 무기를 드는 게 딱 어울리는 손에 ‘살랑살랑’이라는 말은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손이 크니까 바람도 더 잘 부네요.”

그녀는 얼굴에 닿는 바람에 열기가 한결 가시는 걸 느끼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러자 케르겔이 씩 웃더니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는 대꾸했다.

“그리고 손이 크니까 이렇게 그대의 얼굴이 내 손에 쏙 들어오기도 하지.”

촉.

그는 로엘린의 뺨을 감싼 채 그대로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눈을 동그랗게 뜬 로엘린의 얼굴이 다시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기껏 뺨의 열기를 식힌 게 무색할 정도로.

“출발하겠습니다, 폐하.”

그 순간, 밖에서 케르겔에게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이 늙은이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두 분이 함께 와 주시다니.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입니다. 진심으로 감사…….”

“오라고 초대장까지 보내 놓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케르겔은 공왕이 건넨 인사를 심드렁한 표정으로 받다가 불퉁한 어조로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러자 공왕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로엘린이 케르겔의 손등을 살짝 건드린 뒤,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축하를 드려야지요. 세로이프와 프졸란 공국의 오랜 우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요.”

“하하! 황후마마께서 그 점을 알아주시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프졸란의 공왕이 그녀의 말을 듣고 그제야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그러고는 너털웃음과 함께 뒤쪽을 힐끔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황후마마를 세로이프 출신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라카인의 국왕께서 들으시기에는 서운한 이야기일 테지만 말입니다.”

공왕의 입에서 나온 ‘라카인’이란 말에 로엘린의 표정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케르겔에게서 살벌한 기세가 발산되었다.

“……!”

공왕은 제게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 뒤쪽으로 집중된 살기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자신이 말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그의 표정이 흐려졌다.

“아, 저기, 그러니까 제 말뜻은…….”

“서운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하군요. 소중한 누이동생이 그만큼 세로이프에서 인정을 받고 있구나 싶어서 말이지요.”

그 순간, 나른한 어조의 목소리가 공왕의 뒤편에서 들렸다. 공왕은 숨을 크게 몰아쉬며 그 틈을 타서 옆으로 비켜섰다.

그가 비켜선 자리로 레노프가 천천히 다가왔다. 평소에도 그린 듯한 외모로 여인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남자였지만, 오늘은 더욱 신경을 쓴 것인지 레노프의 모습이 더없이 화려했다.

마치 생일의 주인공이 프졸란의 공왕이 아닌, 자신이기라도 한 것처럼.

사실, 그가 그것을 의도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몸은 좀 어떠하냐. 아직 다 낫지 않은 모양이구나.”

레노프는 그녀가 이동식 의자에 앉아 있는 걸 안타까운 눈으로 보며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

“하필이면 라카인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그런 사고를 겪게 되다니. 나뿐만 아니라 어마마마와 에리타의 걱정도 컸단다. 네 외조모께서도 네 소식을 접하신 뒤, 몸져누우셔서…….”

“그것이 라카인의 뜻이라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로엘린은 레노프의 말을 중간에 끊은 뒤, 서늘한 어조로 질문했다. 그러자 레노프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듯 말한 것과 달리 그의 시선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로엘린의 눈빛 역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레노프를 쳐다보다가 다시 한 번 무심한 투로 물었다.

“방금 한 그 말씀을 우리 측의 사과 요구에 대한 거부라고 받아들여도 되는지 묻는 겁니다.”

“그게, 무슨…….”

레노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가 황급히 다물었다. 저도 모르게 험한 말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은 것이다. 그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금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무슨 그런 말을 하느냐. 나는 그저 네 오라비로서 걱정이 되었던 터라…….”

“개인적으로 만난 자리가 아니니 격식을 갖추어 주시지요.”

그러나 로엘린은 표정의 변화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녀를 마주하고 있던 레노프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주변이 조용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프졸란 공왕이 각 나라에 초대장을 보낸 터라 축하 사절단이 많이 와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모든 이들이 침묵한 채 자신들에게 집중하고 있는 것일 터.

레노프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빈껍데기’를 보며 이를 갈았다.

‘깔끔하게 처리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그는 그녀를 죽이는 데에 실패한 것을 다시금 아쉬워했다. 하지만 과거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자신의 ‘계획’을 성사시키려면 눈앞의 이 계집애가 반드시 필요하니 말이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공식 성명을 통해 우리의 입장을 전달했다.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더구나 피붙이를 해하려 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쓸 수는 없지 않으냐.”

“……그런가요?”

“그래. 물론 라카인을 방문했다가 돌아가는 길에 그런 일을 겪었으니, 그렇듯 의심하는 것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레노프는 로엘린에게서 시선을 돌려 케르겔을 쳐다보았다. 그때까지 조용히 그를 쏘아보고 있던 케르겔의 금안이 번득였다.

그 순간, 레노프는 여유를 가장하던 것조차 잊고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케르겔의 기세에 밀린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레노프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지만 그는 애써 여유로운 척 행세하며 재차 말을 이었다.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닌 건 아니다……. 뭐, 그렇다고 우긴다면 더 할 말은 없겠군.”

케르겔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금방이라도 레노프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듯 그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케르겔.”

그때, 로엘린이 손을 뻗어 그의 손을 건드렸다. 그러자 케르겔이 날카로운 기운을 갈무리하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찌 되었든 축하하러 온 자리인데.”

“……그대가 원한다면.”

케르겔은 로엘린의 말 한마디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인 뒤, 곧바로 그녀와 함께 몸을 돌렸다.

“…….”

형식적인 인사조차 없이 돌아선 케르겔의 행동은 레노프를 명백히 무시한 것이었다. 레노프는 어금니를 악물고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만만치 않은 자인데, 과연 잘될지…….”

프졸란의 공왕이 다시금 케르겔에 대한 두려움이 든 것인지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레노프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쉿. 함부로 꺼낼 이야기가 아닙니다, 공왕.”

“……아, 알고 있습니다.”

공왕은 레노프의 경고에 고개를 끄덕인 뒤,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초조함과 두려움을 버리기 힘든 듯 바싹 마른 입술을 반복해서 계속 축였다.

‘한심한 인간.’

레노프의 싸늘한 시선이 그를 훑고는 다시 어딘가로 향했다. 테라스 쪽으로 나간 것인지 케르겔과 로엘린의 모습은 연회장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죽지 않아서 다행이구나.’

속으로 중얼거린 레노프의 입매가 비틀렸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지난번 암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죽더라도 나를 위해 네 쓸모는 다하고 죽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는 소리 없이 웃었다. 손끝에 잡힐 것만 같은 힘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흥분이 일었다.

‘다 내 것이다. 저 천한 짐승의 핏줄 따위도 지금껏 가졌던 힘인데, 나라고 가지지 못할까.’

레노프의 푸른 눈이 탐욕으로 얼룩져 탁해졌다.

* * *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나?”

“아, 폐하.”

하이네스는 레노프와 프졸란의 공왕이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다가 바로 옆에서 들린 케르겔의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자리를 비운 줄 알았던 케르겔이 어느새 연회장 구석에 있던 하이네스의 곁에 다가와 선 것이다.

아마 연회장에 있는 이들 중 어느 누구도 그의 움직임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리라.

“황후마마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하이네스가 그의 주변을 힐끗 보며 물었다. 그러자 케르겔이 하이네스의 손에 들려 있던 와인 잔을 가져가더니 곧바로 와인을 한 모금 마신 뒤, 대답했다.

“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방에 들어가라고 보냈어. 여독이 쌓여서 그런지 피곤해하는 것 같기도 했고. 게다가 여기에 있어 봤자 기분만 불쾌해질 테니까.”

“……아아. 라카인에서 온 ‘손님’ 때문에 말이지요.”

하이네스의 시선이 연회장 저편으로 향했다. 어느새 라카인의 국왕은 자리를 옮겨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카이제넨의 공왕도 함께하고 있었다.

“라카인의 국왕이 공왕들과 저렇듯 사이가 돈독한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돈독한 것으로 부족한 건지 본인이 초대한 주인인 것처럼 행세하기까지 하는군.”

케르겔이 빈정거리는 투로 대꾸하고는 다시 한 번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그의 앞을 지나쳐 가던 사용인의 트레이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사용인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마도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야 트레이 위에 놓인 잔을 발견하고 ‘이게 언제부터 여기 있었던 거지?’ 하며 의아해할 것이다.

하이네스는 케르겔을 쳐다보다가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꼭 그렇게 도둑처럼 드셔야겠습니까?”

“응.”

케르겔은 어느새 다른 와인 잔을 하나 가져와 홀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 내키는 대로 다 뒤집어 버리고 싶은데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표정으로 말이다.

‘저렇게라도 심술을 부리게 내버려 두는 편이 나으려나.’

하이네스는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확실히 이상하기는 합니다. 라카인과 프졸란, 카이제넨 사이에 어떤 유대 관계가 형성된 것 같은 게…….”

“원래부터 세 나라가 문화적으로나 뭐, 그런 쪽으로 가깝기는 했잖아? 프졸란이나 카이제넨이 우리에게 속한 공국이기는 해도 말이야.”

케르겔이 그게 뭐 이상한 일이냐는 식으로 대꾸했다. 그렇지만 하이네스는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미심쩍은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도 경계를 할 필요는 있어 보입니다. 그저 제 쓸데없는 느낌일 테지만…….”

그 순간, 케르겔이 피식 웃었다. 하이네스가 말을 잇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직감이나 본능보다는 이성적인 판단을 앞세우던 바쉘 경이 이토록 경계를 하다니, 확실히 조심해야 할 모양이야.”

“폐하, 지금 농담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이네스는 케르겔의 웃음기 섞인 말에 눈을 찌푸렸다. 그러자 케르겔이 웃음기를 지우며 서늘한 투로 대답했다.

“알아. 하이네스, 자네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내게 말하고 있는지. ……나 또한 느끼는 것이기도 하니까.”

케르겔은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덧붙여 말했다. 조금 전 하이네스의 말에 반문하듯 대꾸한 것과 너무나 다른 태도였다.

그리고 지금 이 태도가 바로 그의 진심이 담겨 있는 것일 터였다. 하이네스가 자세를 똑바로 하고 그를 보았다. 그러자 케르겔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레노프를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어. 프졸란의 공왕이 본인의 생일을 기념한다며 굳이 우리까지 초대한 것도 그렇고.”

“…….”

하이네스는 제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신했다. 케르겔이 이렇듯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갖는 걸 보면 분명했다.

“저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뭘 궁리했는지 몰라도, 순순히 당해 줄 수야 없지.”

케르겔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바로 그 순간, 레노프가 케르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금빛과 푸른빛의 시선이 마치 예리한 칼날처럼 서로를 헤집었다.

“……재미있군.”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케르겔이 피식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레노프가 있던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괜찮으십니까? 여기, 의원을 어서 불러오너라!”

프졸란의 공왕이 비틀대는 레노프를 부축하며 다급히 의원을 부르는 게 보였다. 하지만 케르겔은 무심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하이네스 역시 레노프 쪽을 쳐다보다가 곧바로 시선을 거둔 뒤, 케르겔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그들이 밖으로 나간 뒤에도 소란은 계속되었다.

“갑자기 왜……. 대체 의원은 언제 오는 것이냐!”

프졸란의 공왕이 사색이 되어 재차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그 순간, 비틀거리던 레노프가 손을 내저으며 몸을 똑바로 세웠다.

“괜찮으신 겁니까? 혹시 모르니 의원에게 진료를 받아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공왕은 혹시 문제가 생길까 싶어 초조한 표정으로 레노프를 향해 말을 건넸다. 하지만 레노프는 공왕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조금 전 케르겔이 나간 쪽을 노려보았다.

으득.

그의 입 안쪽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 바람에 공왕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소란스럽게 굴었지만, 레노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졌다.

레노프는 조금 전, 케르겔과 시선을 교환했던 일을 되새겼다. 그저 시선을 주고받은 것뿐인데 몸속이 전부 진탕하기라도 한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그의 기세가 살벌하고 강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자신이 그 기세에 짓눌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레노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잇새로 뱉어 내듯 말을 꺼냈다.

“계획을 앞당겨야겠습니다.”

“예? 계획을 앞당기다니요?”

프졸란의 공왕이 무심코 레노프의 말을 따라 하다가 그 말뜻을 알아차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카이제넨의 공왕 또한 당황한 듯 눈을 껌뻑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닙니까. 일을 진행함에 있어서 조금 더 신중을 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아니요. 신중을 기한답시고 시간을 끌다가 자칫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자의 눈은…….”

레노프는 고개를 저으며 대꾸하다가 그대로 말끝을 흐렸다.

“그의 눈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실언을 했을 뿐입니다.”

레노프는 공왕의 물음에 거듭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케르겔, 그의 금안이 다시금 생생히 떠오른 것이다. 자신을 보던 그 시선에 담긴 살기와 적개심을 생각하니 온몸의 솜털마저 뻣뻣하게 서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내가 당할 거다.’

레노프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리란 것을.

세로이프에서 요구한 대로 사과를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그에게 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러니 먼저 치는 게 상책일 터였다. 또한 그의 힘을 빼앗는 게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준비해 주십시오, 공왕.”

레노프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걸 느끼며 프졸란의 공왕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의 푸른 눈이 어두운 빛을 머금은 채 침잠하기 시작했다.

* * *

“……푸훗.”

“왜 웃으시는지요?”

루시는 침대를 정돈하다가 로엘린의 웃음소리를 듣고 몸을 돌렸다. 로엘린이 창가에 앉아 있다가 루시와 눈이 마주치자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그냥……. 빨리 돌아가고 싶단 생각이 들어서.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러나 싶어 웃음이 나왔어.”

“하긴 저도 그러네요. 나름대로 프졸란에서 신경을 써 주기는 한 것 같지만, 그래도 ‘집’만큼 편하지는 않으니까요.”

‘집’이라…….

로엘린은 루시의 말을 듣다가 문득 가슴속이 뭉클해지는 걸 느꼈다.

그렇구나.

이제 그곳이 내 ‘집’이라서 빨리 돌아가고 싶은 거구나.

새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라카인에 있을 때는 결코 알지 못했던 감각이다. 머무르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집이라 부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마저도 쉴 수 있는 곳. 그런 곳이 바로 집이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곳. 그런 곳을 일컬어 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러게, 루시. 정말……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네.”

로엘린이 웃으며 다시 한 번 대꾸한 순간,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실로아가 왔나 봅니다.”

루시는 잠시 자리를 비웠던 실로아가 돌아온 것이라 생각하며 문 쪽으로 몸을 틀었다. 한창 연회 중에 빠져나온 터라 다른 일정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었다.

“황후마마, 공왕비가 황후마마를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하지만 루시의 예상은 절반만 맞고 절반은 틀렸다. 실로아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미간을 좁힌 채 로엘린에게 공왕비의 방문 소식을 전한 것이다.

“공왕비가?”

로엘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루시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공왕비와의 정식 만남은 내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여독도 풀리지 않으셔서 휴식을 취하셔야 하니, 내일 만나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루시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미리 이쪽의 의사를 물어본 것도 아니고 느닷없이 찾아와 만나기를 원한다고 하니, 그녀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더구나 신하 된 입장이라 할 수 있는 공왕비가 할 처신은 결코 아니라 할 수 있었다.

“공왕비가 이곳에 와 있는 거니?”

하지만 로엘린은 덤덤한 표정으로 실로아에게 질문했다. 실로아가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일 오라고 할까요?”

실로아가 눈치를 살피며 로엘린을 향해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내일 오라고 했으면 좋겠단 생각이 고스란히 읽혔다. 루시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로엘린을 보았다.

하지만 로엘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은 뒤, 입을 열었다.

“응접실로 안내하도록 하렴. 여기까지 찾아온 이를 거절해서야 되겠니. 게다가 따지고 보면 우리가 손님의 입장이고, 그쪽이 주인인데.”

“하지만 신하 된 자가 주군에게 제멋대로 만나자고 찾아오다니, 그런 무례가 어디 있어요?”

실로아는 로엘린의 말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로엘린은 그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실로아가 입을 삐죽이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황후마마께서는 너무 너그러우세요.”

“그러니 지금 네 행동도 가만히 봐주시는 거겠지, 실로아.”

그때, 루시가 끼어들어 실로아에게 경고조로 말했다. 그제야 실로아는 어깨를 움츠리고는 로엘린의 말을 전하기 위해 다시금 밖으로 나갔다. 루시가 그 뒷모습을 보다가 한숨을 내쉰 뒤, 로엘린에게 말을 건넸다.

“죄송합니다, 황후마마. 아무리 야단을 치고 주의를 줘도 그때만 잠시 조심할 뿐, 다시 저렇게 실수를 저지르네요.”

“괜찮아, 루시. 오히려 저렇게 솔직히 말해 주니까 나로서는 좋은걸. ……내가 하지 못하는 말을 대신 해 주니, 솔직히 후련한 기분이 들 때도 있고. 지금처럼.”

로엘린이 웃으며 덧붙인 말에 루시가 웃음을 터뜨렸다.

“황후마마의 말씀을 부정하기가 힘들기는 하네요. 저도 속이 후련해서.”

루시가 다시 한 번 웃으며 로엘린에게 다가갔다. 로엘린은 루시가 드레스를 매만져 주는 걸 가만히 쳐다보다가 거울에 비친 제 자신을 똑바로 응시했다.

문득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라카인에 있을 때는 거울 속 자신을 이렇듯 똑바로 마주하지도 못했었는데 말이다. 아니, 마주하지 못했다기보다는 그러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려나.

‘나를 보는 게 싫었으니까.’

모두에게 버림받고 멸시당하는 자신을 마주하는 게 싫었다.

애써 마음을 추스르고 자존감을 세우다가도 쌍둥이 언니가 다녀가는 날이면 그 마음이 무너졌다.

그리고 무너진 마음을 간신히 다잡았다가 모친의 싸늘한 시선을 대하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한 번 더 무너져 내리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다.

부모와 형제를 원망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결국 원망이 향한 곳은 바로 제 자신이었다.

왜 쌍둥이로 태어났느냐고 원망하고, 제 자신을 탓했다. 외면하는 어미의 행동이 그릇되었다는 걸 인정하는 게 더 마음을 아프게 했기에, 쉬운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는데…… 언제 이렇게 바뀐 걸까.’

거울 속 제 모습을 마주하는 게 아무렇지 않게 된 것은.

그리고 스스로가 그다지 밉지 않아 보이는 것은.

오히려…….

“이렇게 보니까 조금 예뻐 보이는 것 같기도…….”

맙소사.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야?

로엘린은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제풀에 놀라 뺨을 만지던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루시를 슬쩍 돌아보았다. 루시가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아니. 방금 내가 한 말은…….”

“조금이 아니라 정말 많이 예쁘십니다, 황후마마.”

로엘린이 머뭇거리며 말을 꺼내려는데 루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로엘린은 더욱 민망해져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됐어, 루시. 내가 실언을 했는데 거기에 그렇게 맞장구까지 칠 필요는 없어.”

“저는 사실만을 말씀드린 건데요?”

루시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너스레를 떨었다. 로엘린은 손사래를 치며 멋쩍은 표정을 지은 뒤, 다시 한 번 거울을 보았다.

피곤한 탓인지 얼굴이 조금 창백했는데, 지금은 새빨간 토마토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이 상태로 공왕비를 볼 수는 없는데…….”

로엘린은 달아오른 열기를 식히기 위해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부채질을 해 주었던 일이 떠올랐다.

“……폐하께서는 아직 연회장에 계시는 걸까?”

“아마 그럴 겁니다. 연회가 끝나려면 밤늦은 시간이 되어야 할 듯해요.”

“피곤할 텐데.”

로엘린이 언제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던가 싶게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으로 케르겔을 걱정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를 말이다.

루시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으며 웃음을 삼켰다. 그 순간, 로엘린이 루시의 표정을 보고는 겸연쩍은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공왕비가 많이 기다리겠네. 그만 가 봐야겠어.”

“예, 황후마마.”

루시는 거듭 웃음을 삼킨 뒤, 로엘린이 앉아 있는 이동식 의자를 조심스럽게 밀었다.

* * *

“무례한 청을 드렸는데 이렇듯 너그럽게 받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로엘린이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공왕비가 냉큼 일어서더니 그녀에게로 다가와 공손히 예의를 갖추었다.

“앉도록 하죠.”

로엘린은 고개를 숙인 공왕비의 화려한 머리 장식이 가늘게 떨리는 걸 보다가 무심한 투로 입을 열었다.

괜찮다거나 하는 인사는 하지 않았다. 공왕비가 무례를 범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아마 자신에게만 무례를 저지른 것이었다면 대충 넘어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세로이프의 황후로서 이곳에 와 있는 것이기에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무시를 당하는 건, 즉 케르겔도 무시를 당하는 것이기에.

그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으로 떠받들어 주는데, 그런 자신이 그를 우스운 남자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로엘린은 세로이프의 황궁에서 평소 보이던 태도 대신, 조금은 까다롭고 엄격한 태도를 취했다.

그것이 예상 밖이었던 것일까.

눈을 내리깔고 있던 공왕비의 얇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자식보다도 어린 여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런 대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자존심을 많이 상하게 한 듯했다.

하지만 공왕비는 나이를 허투루 먹은 것이 아니라는 듯 이내 표정을 고치고는 공손한 자세로 테이블이 놓인 자리를 향해 다가갔다.

로엘린 역시 루시의 도움을 받아 테이블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공왕비가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를 기회조차 주지 않고 곧바로 질문을 건넸다.

“나를 보고자 청한 이유가 뭔가요?”

공왕비가 급히 저와의 만남을 청하였으니 로엘린 또한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질문을 받은 공왕비에게서 뜻밖의 반응이 돌아왔다.

그녀의 표정이 굳으면서 순간적으로 뺨이 움찔, 경련을 일으킨 것이다.

물론 워낙 순간적이었던 변화인 탓에 웬만한 사람은 미처 그것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로엘린과 그 뒤에 시립해 있던 루시는 그 찰나의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지난번 라카인에서의 일 때문에 경계심이 커진 덕분이었다.

로엘린이 루시와 시선을 교환하는데, 공왕비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저, 그게…… 황후마마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결례를 무릅쓰고 뵙기를 청하였습니다.”

“어차피 내일 티타임을 함께 갖기로 하지 않았던가요? 그런데 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었던 건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워낙 중요한 이야기인 터라…….”

공왕비는 제 얘기에 덤덤히 대응하는 로엘린을 보고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로엘린의 관심을 최대한 끌어 보겠다는 듯한 어조였다.

하지만 로엘린은 그녀가 하려는 말에 대해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공왕비가 입술을 깨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가 드리려는 말씀이 좀…… 그래서, 다른 이들을 잠시 내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프졸란과 관련한 기밀이라도 되는 건가요?”

로엘린이 공왕비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차분히 물었다. 공왕비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아니요. 그건 아니고, 오히려 황후마마와 관련된 이야기라서…….”

“그럼 상관없겠군요. 이들은 모두 내 사람이고, 나와 관련된 이야기라면 이들에게 굳이 숨길 이유가 없으니까.”

로엘린은 루시와 실로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루시와 실로아가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다가 이내 감격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들에게서 기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자신들에 대한 신뢰를 보여 주는 주인의 말을 들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하지만 루시와 실로아는 금세 기쁜 기색을 지우고 주변에 대한 경계를 강화했다.

황후와 관련된 이야기.

공왕비가 꺼낸 뜬금없는 이야기가 그들로 하여금 더욱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 한 것이다.

그 탓에 응접실 안의 분위기가 조금 더 무겁고, 조금 더 날카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비록 눈으로 보이는 건 아니지만 본능적으로 몸이 느낄 정도로 말이다.

공왕비 또한 예외는 아니었기에 저도 모르게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인 뒤, 로엘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의 부군, 그러니까…… 세로이프의 황제의 몸속에 짐승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아시는지요?”

“……!”

로엘린의 푸른 눈이 한 차례 일렁였다. 처음 듣는 이야기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늑대족에 대한 이야기를 전부 들었으니 딱히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와 관련한 이야기를 타국의 사람에게서 듣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팔걸이를 꽉 움켜잡았다. 그러자 공왕비가 로엘린의 반응을 달리 생각했는지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내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역시 모르실 줄 알았습니다. 진작 알고 계셨더라면 어찌 인간이 아닌 짐승과 살을 맞대고 부부로 사실 수 있었겠습니까.”

“…….”

로엘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왕비를 쳐다보았다. 루시와 실로아 역시 숨조차 크게 쉬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루시는 둘째 치고 평소 산만하기 그지없던 실로아마저 침착함을 잃지 않은 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정말 끔찍한 일이지요. 저는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손이 벌벌 떨리고, 황후마마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그 얘기를 누구에게서 들었나요?”

로엘린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공왕비가 말을 계속 이어 가려다가 흠칫하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로엘린은 공왕비의 침묵을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듯 추궁하는 투로 재차 질문했다.

“누가 그 얘기를 했는지 물었습니다, 공왕비.”

“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황후마마. 황후마마가 부군이라 믿고 계신 자가 짐승, 아니, 인간 행세를 하는 괴물인데…….”

“내 남편을 더 이상 모욕하지 마세요!”

로엘린은 공왕비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화, 황후마마!”

발의 상처가 다 낫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로엘린의 행동에 그때까지 조용히 있던 루시와 실로아가 기겁하여 그녀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로엘린은 그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왕비를 향해 다가갔다.

발의 아픔 따위는 느끼지 못했다. 느낄 수도 없었다. 아니, 아픔을 느꼈다고 해도 그건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보다 아픈 건 마음이었다. 케르겔이 남들의 입에 이렇듯 오르내리는 것에 대한 분노가 그 모든 걸 잊게 했다.

“황후마마…….”

공왕비는 로엘린의 분노가 당혹스러운 듯 입을 벙긋거렸다. 그저 조용하고 얌전하다고 생각한 이가 이렇게까지 감정을 드러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로엘린은 푸른 불꽃을 담고 있는 듯한 눈으로 공왕비를 쳐다보았다.

“내 남편을, 세로이프의 황제를 감히 모욕할 생각을 하다니, 그대의 분별없는 행동에 감탄마저 나오는군요.”

그녀는 마치 조롱하듯 그렇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공왕비가 당혹감을 애써 털어 내고 항의했다.

“분별없는 행동이라니요! 아무리 저희가 세로이프의 공국이라 해도 이런 모욕을 참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나와 내 남편은 그대가 한 모욕을 참아야 합니까? 방금 그대가 한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건가요?”

“그, 그건 제 충정에서 비롯된…….”

“경고하죠, 공왕비. 다시 한 번 그를 모욕하는 말을 한다면, 나는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말을 용납하지도 않을 것이고요.”

로엘린은 공왕비의 말을 가로챈 뒤,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늑대족으로 변했던 케르겔을 보고 그를 피했던 제 자신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제게 화를 내기는커녕 외려 자신의 눈치를 살피기만 했던 그의 모습도 생생히 기억났다.

그랬던 남자를, 그를 괴물이라 매도하다니.

“괴물이라 했나요? 남에게 상처가 될 말을 함부로 내뱉는 그대가 더 괴물 같군요.”

“황후마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으십니까!”

공왕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로엘린의 앞이기에 간신히 노여움을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로엘린은 저를 쏘아보는 공왕비의 시선 속 적개심을 마주한 채 덤덤히 되물었다.

“그러는 그대는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묻고 싶군요.”

“그건…….”

“충정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을 또 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도록 해요. 그런 입에 발린 말에 넘어갈 정도로 내가 어수룩해 보이나요? 라카인의 빈껍데기 왕녀였다고, 내가 세상 물정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아는 건가요?”

로엘린의 표정이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녀는 공왕비의 대답을 들을 마음이 없다는 듯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루시와 실로아가 당황해하다가 곧바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지만 그녀가 응접실을 나서려는 순간, 밖에서 누군가가 들어왔다.

시종복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왕궁의 시종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허락 없이 이곳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적어도 이곳은, 로엘린이 머무르는 공간이니 말이다. 아무리 프졸란의 왕궁 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아무리 시종이라 해도 그렇지, 어찌 함부로 이곳에 들어온 겁니까!”

루시가 나서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방금 들어온 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몸을 더 숙일 뿐이었다.

“이봐요. 우리 시녀장님의 말씀 못 들었어요? 허락도 없이 들어오…… 꺄악!”

실로아가 대답 없는 사내를 향해 날카롭게 말을 건네다 말고 비명을 질렀다.

그가 허리를 숙이고 있다가 몸을 바로 세우면서 그의 얼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목구비를 구분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문드러진 얼굴.

너무나 기형적인 외모였다. 물론 외모만으로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최소한 왕궁에서 근무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가 풍기고 있는 기이한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다.

“…….”

로엘린은 본능적으로 그에 대한 경계심이 커지는 것을 느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루시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실로아 역시 언제 비명을 질렀던가 싶게 재빨리 로엘린의 앞에 섰다.

“나…… 나는, 여기까지 내 할 일을 다 하였네.”

그 순간, 뒤쪽에서 공왕비가 말을 더듬으며 일어서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로엘린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또한 공왕비의 말을 되새겨 보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제 앞에 있는 이 정체불명의 사내였다.

그리고 그 역시 공왕비에게는 용건이 없다는 듯 그녀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로엘린을 쳐다보았다.

분명, 그녀를 쳐다보았다.

루시와 실로아가 가로막고 있는 상태인데도 어째서인지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음습하고 악의적인 시선이었다. 로엘린은 누군가가 제 심장을 꽉 움켜쥐는 것만 같은 느낌에 숨을 크게 들이쉰 뒤, 입을 열었다.

“그대는 누구지? 보아하니 이곳에서 근무하는 시종은 아닌 것 같은데.”

그녀는 조금 전 공왕비가 했던 말을 뒤늦게 떠올렸다. 자신의 할 일을 다 했다던 그 말은, 왕비가 시종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명령에 따라 행하였음을 보고하는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제 소개를 드려 봤자 황후마마께서는 모르실 겁니다. 그저, 늑대족의 핏줄에 지극히 큰 관심을 가져 왔던 늙은이라 여겨 주시지요.”

“……!”

로엘린의 푸른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정확히 ‘늑대족’까지 언급한 탓이었다.

그는 뒤틀린 입술 끝을 끌어 올리며 미소를 꾸며 냈다. 하지만 그 모습은 흉측함만을 더할 뿐이었다.

“……나가야겠어. 폐하를 뵈어야 해.”

로엘린은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세게 깨문 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시와 실로아를 향한 말이었다.

그들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자 치마 속에서 단검과 손도끼를 꺼냈다.

“미안해. 두 사람이 그걸 사용하지 않았으면 했는데.”

“아닙니다, 황후마마. 황후마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것도 휘두를 수 있는걸요.”

루시가 짐짓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여러 개의 단검을 고쳐 잡았다. 언제라도 암기처럼 사용할 수 있는 자세였다.

지난번의 암살 시도 이후, 로엘린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꼈던 루시는 평소에도 언제든 그녀를 지킬 수 있도록 간단히 무장을 갖추었다.

그리고 실로아 역시 그런 루시를 보고 무장을 갖춘 상태였다. 더구나 세로이프를 떠나 타국으로 향한 길이었으니 더욱 그럴 필요가 있다고 느낀 것이다.

“그럼 길을 열겠습니다, 황후마마.”

루시가 매서운 눈으로 눈앞의 사내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실로아와 시선을 교환한 뒤, 몸을 날렸다.

* * *

“갑자기 회의를 하자고?”

케르겔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하이네스가 고민 섞인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분명 뭔가 의도가 있을 겁니다. 그것을 파악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니, 회의에 참석하는 걸 조금 늦추는 것이 어떠신지…….”

“됐네, 하이네스. 뭘 계획하고 꾸민 건지 몰라도, 미리 겁먹고 꼬리 내리는 건 질색이거든.”

케르겔이 신중한 표정의 하이네스를 향해 손을 내저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하이네스가 덩달아 일어나 그를 향해 재차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굳이 저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예정에도 없던 회의 운운하는 것부터가 수상한 일인데 말입니다.”

“그래. 충분히 수상하지. 애당초 60주년 생일이니 뭐니 하면서, 늙은이가 나를 부른 것부터가 수상했어.”

케르겔은 하이네스의 말에 대꾸하며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그러고는 테라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연회장의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테라스로 나가서 난간에 팔을 걸쳤다. 하이네스가 그 뒤를 따라 나왔다.

“저 소리만 들으면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지. 누가 상상이나 하겠나. 저 음악 소리, 웃음소리 밑에 깔려 있는 악의와 악취를.”

“…….”

“하기야 저들에게는 익숙한 일일 수도 있겠군. 화려함 그 너머에서 썩은 냄새가 풀풀 풍기는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닐 테니. ……라카인이 그러했듯이.”

케르겔은 자신과 로엘린을 마주하고도 태연히 ‘오라비’ 운운했던 레노프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동적으로 그의 이가 맞물리면서 뿌드득, 소리가 났다.

“그러다 치아가 전부 상하겠습니다.”

하이네스가 상황과 다소 어울리지 않는 말을 건넸다. 케르겔은 난간에 기댄 채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웃음기를 지우고 그를 돌아보았다.

“황후는 쉬고 있다 하던가?”

“예. 침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계시다는 소식을……. 아,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하이네스는 방 밖에서 들려온 심복의 목소리에 케르겔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웠다.

케르겔은 다시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금빛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프졸란 공왕의 말을 전하기 위해 시종이 다녀간 것이 조금 전의 일이다.

예정에 없던 회의를 하자는 것.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더구나 회의의 구실로 삼은 안건이 그렇듯 서둘러야 할 것도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젠장. 연회인지 뭔지 때문에 귀찮게 굴더니, 이제는 회의로 발목을 잡네.”

로엘린이 피곤해하는 것 같아서 먼저 보내 놓은 뒤, 그녀를 따라 숙소로 돌아갈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제 성격대로 한다면 벌써 자리를 박차고 나와야 했을 테지만, 그렇게 하고 로엘린에게 가 봤자 야단을 맞을 것 같아서 억지로 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간신히 연회장에서 빠져나와 휴게실로 왔고,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 하던 중인데…….

케르겔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미간을 긁적이는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하이네스의 발소리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조급해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케르겔은 표정을 굳히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폐하.”

하이네스가 급히 다가오자마자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께서 공왕비와 면담을 나누고 계시다는군요.”

“……공왕비와 면담을?”

케르겔의 표정 역시 굳어졌다.

“오늘 황후의 일정은 딱히 없었지 않은가?”

“예. 공왕비가 일방적으로 찾아와 면담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황후마마께서 그 요청을 받아 주셨고요.”

하이네스는 조금 전 심복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케르겔에게 전했다.

케르겔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다가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자네가 황후에게 가 보는 게 좋겠어.”

“그럼 폐하께서는…….”

“저들이 초대를 했으니, 그에 응해 줘야지.”

케르겔이 비틀린 미소와 함께 대꾸했다. 그러고는 다시 하이네스를 향해 당부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 같군. 느낌이 좋지 않아.”

“폐하.”

“황후를 부탁하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만큼은 안전하게 지켜 줘야 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이네스가 그의 말에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케르겔은 제 친우의 말을 믿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날카로운 시선을 밖으로 던졌다.

붉게 노을이 졌던 하늘이 어느새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구름이 잔뜩 낀 탓에 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 * *

“어서 오시지요. 갑작스러운 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케르겔이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프졸란의 공왕이 그를 반겼다. 하지만 그는 공왕의 인사를 무시한 채 시선을 돌려 홀 안을 둘러보았다.

“…….”

그의 시선이 홀 안쪽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케르겔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그에 대응하듯 홀 안쪽에 있던 자가 한 걸음 다가오더니 싱긋 미소를 지었다.

화사한 미소의 주인은 바로 금발의 미남자, 레노프였다.

“몸이 이제 괜찮아졌나 보군. 아니면, 뭐…… 괜찮은 척하는 건가? 속이 꽤나 진탕했을 텐데 말이야.”

케르겔은 여유롭게 그 미소를 받아친 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상석에 비스듬한 자세로 앉으며 말했다. 그러자 미소를 짓던 레노프의 뺨이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는 곧 감정을 수습했는지 다시 미소를 지으며 케르겔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테이블 위에 올리고 느긋한 투로 입을 열었다.

“덕분에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역시 가족이 좋기는 좋군요.”

“……가족?”

케르겔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러자 레노프가 눈을 휘며 웃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여동생의혼인으로 엮인 관계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족이라 여겼는데. 아, 설마 저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요? 그렇다면 조금 서운…….”

쾅!

그 순간, 직사각형 모양의 긴 테이블에 금이 가더니 그대로 내려앉고 말았다. 황급히 몸을 뒤로 물리지 않았더라면 테이블의 육중한 무게에 짓눌려 크게 다칠 수도 있을 뻔한 일이었다.

“……!”

레노프는 대리석이 부서지면서 그 먼지가 올라오는 바람에 눈앞이 흐려진 것을 깨닫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가 이런 헛소리를 듣겠다고 온 건 아닌데 말이지.”

뿌옇게 흐려진 먼지 속에서 케르겔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으면서 번득이는 금안이 레노프를 비롯해 두 공왕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세 사람 모두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의지와 상관없는 반응이었다. 몸이 먼저 느끼는 경계심이었고, 공포라 할 수 있었다.

“웃기지도 않은 얘기는 집어치우고, 나를 여기까지 불러낸 얘기나 하도록 해.”

케르겔은 레노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계속 말했다. 이 자리를 주선한 건 프졸란의 공왕이지만, 그 뒤에서 모든 일을 계획하고 조종한 건 레노프라는 걸 잘 안다는 듯한 태도였다.

“……푸훗.”

레노프가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케르겔을 바라보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짐승 따위가 인간 행세를 하더니, 그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군.”

“…….”

케르겔의 한쪽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다. 프졸란의 공왕과 카이제넨의 공왕이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케르겔이 보인 이런 모습은 그들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더 동요한 모습을 생각했는데…….

레노프는 두 공왕이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것을 봤지만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들의 쓸모는 이쯤에서 다한 것이니 말이다.

“놀라지 않나? 내가 그쪽의 정체를 알고 있는데.”

“별로. 대놓고 힘을 드러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그거야말로 멍청한 거지.”

케르겔은 어깨를 으쓱이며 레노프의 말에 대꾸했다. 그의 말투가 공대에서 하대로 바뀌었다는 사실조차도 의미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굉장히 여유를 부리는데…… 그래도 되나 모르겠어.”

레노프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좁히고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말을 덧붙였다.

“그대의 아내, 아니, 짐승에게 속아서 혼인한 내 여동생, 그 어리석고 가련한 아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 걱정이 되지 않는가 봐?”

콰당!

레노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번에는 주변에 있던 가구들이 한꺼번에 쓰러지고 부서졌다.

“으아악!”

그리고 그 충격에 밀려난 두 공왕이 의자 아래로 굴러떨어져 볼썽사납게 나뒹굴었다. 레노프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나뒹굴 뻔했지만 가까스로 버틴 덕분에 그것만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저 면했다는 것뿐, 그가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크윽…….”

레노프의 입가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아직 온전히 회복된 게 아니었던 속이 다시금 진탕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억지로 버티고 서서 케르겔을 노려보았다.

거대한 힘을 발산하고 있는 그를.

인간의 힘이라 보기 힘든, 그 거대한 힘의 주인인 그를.

레노프의 푸른 눈에 탐욕이 드리웠다. 제 눈으로 케르겔이 지닌 힘을 확인하니, 더욱 욕심이 났다.

‘하이엔, 그자는 뭘 하고 있는 거야?’

레노프는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인상을 쓰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강대한 힘의 소용돌이가 느껴졌다.

“이게 무슨…….”

설마, 로엘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케르겔은 알 수 없는 힘을 느끼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조금 전 레노프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눈을 크게 떴다.

그 힘의 정체를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살갗을 파고드는 느낌이 음습하기 그지없었다.

수많은 시체가 버려진 학살의 현장에서 느낄 법한, 그런 감각이었다.

케르겔은 어금니를 악물고 창밖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레노프의 수상한 말과 행동에 대해 알아보는 것보다 로엘린의 안위를 확인하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크흐윽!”

하지만 그는 마치 거미줄에 칭칭 감긴 곤충처럼 그대로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대체 이건…….”

케르겔의 눈이 충혈되고 그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뭔가에 묶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조차 제 뜻대로 까딱이는 게 불가능할 정도였다.

“……으윽.”

그의 이마에 선 핏대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더욱 불룩해졌다. 그 순간, 레노프가 그에게 다가오더니 피식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주 보기 좋은데.”

“도대체, 무슨 짓이냐?”

“아아, 별것 아니야. 술법으로 네 육신을 묶어 두고 네가 갖고 있는 그 힘을 억누른 것뿐.”

레노프는 웃음기 섞인 투로 그의 물음에 대꾸했다. 그 말을 듣던 케르겔이 다시 한 번 움직이기 위해 몸에 힘을 주었다.

“소용없는 짓이야. 아무리 거대한 힘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수천 명의 원혼을 당해 낼 수는 없을 테니까.”

“……뭐?”

케르겔은 신음을 삼키며 몸을 재차 움직이려다가 레노프의 말에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방금 그가 한 말 속에 그냥 무시해서는 안 될 내용이 담겨 있어서였다.

“그게 무슨 뜻이지? 수천 명의…… 원혼이라니?”

“늑대족의 후예를 묶어 두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희생이 필요했거든. 뭐, 그 정도면 값싸게 대가를 치른 셈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그들도 영광으로 알아야지. 그 비루한 목숨들을 이렇듯 고귀한 일에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굳이 더 이상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레노프가 방금 한 말을 통해 상황을 전부 파악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르겔은 분노 섞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천 명을 희생시켰다니.

자신의 힘을 노리고, 아무 죄도 없는 이들을 그렇게나 많이 희생시켰다는 것인가.

분노가 한계에 다다른 탓일까.

혹은 희생된 목숨들에 대해 대신 분노하고 있는 그의 마음을 원혼들이 알아주기라도 한 것일까.

그를 옥죄고 있던 힘이 순간적으로 풀어졌다. 케르겔은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크허어엉.

케르겔이 몸을 일으킨 것과 동시에 왕궁 밖에서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져 갔다.

“아, 이, 이게…….”

“흐어……. 어서 의식을 진행하십시오! 이러다가 짐승들이 왕궁으로 쳐들어오겠습니다!”

프졸란의 공왕이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에 카이제넨의 공왕이 레노프를 재촉했다. 그러자 레노프가 얼굴을 찡그리며 밖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자가 제대로 처리했겠지?’

제 누이동생을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비운 하이엔을 떠올렸다. 시간상 촉박한 느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는 없으리란 판단을 내렸다.

제 눈앞의 ‘괴물’을 보고도 느긋하게 일을 진행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레노프는 어느새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인 뒤, 케르겔을 쳐다보았다. 온몸에 털이 난 채 제게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는 그의 변신한 모습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절대자의 모습이 바로 저렇지 않을까.

레노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고는 두 손을 꽉 움켜잡았다.

저 힘이 자신의 것이 되는 거다.

그의 푸른 눈에 광기 어린 희열이 엿보였다. 그리고 케르겔이 그 모습에 미간을 좁히는 순간, 레노프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세로이프의 황제여, 그걸 아는가? 지금 이 모든 게 무엇을 위한 것인지?”

레노프가 품속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러고는 제 손목을 그으며 말을 덧붙였다.

“바로 그 힘을 내게로 가져오기 위한 것이지. 짐승 따위가 가지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힘이 아닌가?”

주르륵.

레노프의 손목에서 피가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 괴이한 문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크윽!”

케르겔은 제 왼쪽 가슴을 움켜쥐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봉인이 위태롭게 진동하는 게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이 힘을 탐낸 것이로군.”

“물론! 짐승이 대륙의 주인 행세를 하는 것도 더 이상은 봐 줄 수가 없고.”

레노프는 단검을 쥔 채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리고 고개를 젖힌 채 승리감에 도취한 표정으로 크게 외쳤다.

“세로이프가 아닌, 라카인이 대륙의 유일한 제국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라카인의 초대 황제가 될 것이다!”

레노프의 선언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의 문양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두 공왕은 그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지켜보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술법을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레노프가 들고 있는 단검으로 상처를 내서 술법으로 만든 진 위에 피를 흘리면 되었다.

그리고 원래 약속대로라면 세 사람이 함께 피를 흘렸어야 했다. 그런데 그가 홀로 피를 흘림으로써 술법을 발동시킨 셈이니, 그들로서는 마음이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이건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분명 힘을 공유하기로 했으면서!”

“그렇습니다! 어서 그 단검을 이리……. 커헉!”

조급한 마음에 손을 뻗던 카이제넨의 공왕이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뒤이어 그의 목이 갈라지고 그 갈라진 틈새에서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흐, 허억, 헉!”

카이제넨의 공왕은 피를 뒤집어쓴 채 눈을 크게 뜨고 제 손으로 목을 틀어막으려 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약속을, 우리의 약속을 어길 셈이오!”

프졸란의 공왕은 그제야 레노프의 속내를 알아차리고는 그를 대하던 예의 따위를 집어치우고 거칠게 항의했다.

하지만 모든 건 이미 늦은 뒤였다.

하이엔이 고안해 낸 술법은 이미 레노프의 피를 받아 발동되었으니 말이다.

“힘을 탐해서, 고작 내 힘을 탐하여 이런 일을 꾀했다는 건가.”

케르겔의 날카로운 송곳니 사이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고는 곧바로 분노한 상태로 레노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로엘린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아아…… 별일 아니야. 그저 그 힘을 가져오려면 그 계집애가 필요해서 말이지. 아마 지금쯤 그쪽에서도 의식을 완성할 준비가 되었겠지.”

“정확히 말해! 로엘린에게 무슨 짓을 한 건지!”

케르겔의 금안이 짐승의 것처럼 번득였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레노프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강렬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케르겔은 그 이상의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지금 이렇게 버티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굉장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수많은 이들의 죽음 속에서 탄생한 술법은 그만큼 악독하고 사악한 것이었기에.

그것을 눈치챈 레노프가 더욱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프졸란의 공왕이 슬그머니 그의 뒤로 다가가더니 급습을 시도했다.

“이 배신자…… 끄허억!”

하지만 공왕의 시도는 허사로 돌아갔다. 레노프의 단검이 공왕의 가슴팍에 꽂힌 것이다.

“내가 겨우 당신 같은 늙은이에게 당할 것 같았나?”

레노프는 단검이 박힌 채 눈을 부릅뜬 공왕을 조롱하다가 그대로 그를 걷어찼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공왕의 노구가 뒤로 넘어갔다.

“……야, 약속을 어기다니.”

공왕의 눈이 붉어졌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손을 갈고리처럼 오므렸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의 숨이 끊어진 것이다.

“약속을 지킬 거라 믿은 게 한심한 거지. 순진한 어린애도 아니고.”

레노프는 공왕을 비웃으며 중얼거린 뒤, 다시 케르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케르겔이 어금니를 악문 채 간신히 버티고 서서 그를 노려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로엘린은…….”

“그 계집애 이름이 로엘린이었나 보군. 이제야 알았어.”

레노프는 케르겔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피식거리며 말했다. 케르겔은 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아서 입 안쪽 살을 씹었다.

날카로운 이에 찢기면서 상처가 난 것인지 금세 입 안에 피가 고이기 시작했다.

두근.

그 순간, 봉인이 다시 한 번 크게 진동했다.

봉인이 깨지기 직전임을 알리는 징조였다.

* * *

“헉, 허억…….”

실로아가 숨을 헐떡이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루시 역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을 열려던 그들의 시도는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한 상태였다.

생각해 보면 의아한 일이었다. 아무리 여인의 몸이라고는 하지만, 웬만한 사내들과 다를 바 없는 능력을 갖고 있는 그들이 겨우 사내 하나를 감당하지 못해 이러고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맞닥뜨린 건 시종을 가장해 들어온 사내 한 명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건 보이지 않는 장애물이라 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 기분 나쁜 안개는 뭔지…….”

실로아는 또다시 몸을 옥죄려는 잿빛 안개에 진저리를 치며 단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안개가 곧바로 흩어져 버렸다. 하지만 몇 걸음 더 나아가기도 전에 또다시 똘똘 뭉쳐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차라리 또렷한 형체가 있는 적을 상대하는 편이 훨씬 낫겠어요.”

실로아가 한 번 더 안개를 향해 손도끼를 내리치며 투덜거리고는 눈을 깜빡였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이 시야를 가린 탓에 나온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루시가 그 모습을 힐끗 봤지만, 실로아의 땀을 닦아 주지는 못했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었다.

계속 달려드는 안개를 흐트러뜨리기 위해서 쉴 새 없이 팔을 휘둘러야 하니 말이다.

루시.

실로아.

로엘린은 그들의 뒤에 서서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이 집중하고 있는 순간을 방해할까 싶어 소리 내어 이름조차 부를 수가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심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이렇듯 그들의 보호에 기대어 있는 제 모습이 너무나 한심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무턱대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제 한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사람들만도 못한 제 약한 몸으로는 외려 저들에게 방해가 될 뿐,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어.’

이런 식으로 길을 열려고 해 봤자 시간만 지연될 것이다. 어쩌면 자신들이 지쳐 나가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저렇듯 느긋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일 터.

로엘린은 밀려드는 절망감과 자괴감에 한없이 추락하려는 자신을 억지로 붙든 뒤, 마음을 다잡고 앞을 쳐다보았다.

안개 너머로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다시 봐도 흉측한 외모의 사내였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거부감이 드는 건 그의 눈빛이었다.

비뚤어진 광기가 느껴지는.

사내는 루시와 실로아가 안개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광경을 마치 즐기는 듯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 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듯 조롱 섞인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이다.

‘이대로는 안 돼.’

그 모습을 보고 다시금 확신한 로엘린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에 공왕비가 보였다. 분명 저 사내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듯한데, 지금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인지 공왕비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짙게 번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공왕비, 대체 무슨 일을 꾸민 건가요? 저 사특한 자는 누구죠?”

“……무, 무슨 일이라니요. 저는 아, 아무것도.”

공왕비가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로엘린의 질문에 몸을 떨더니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로엘린은 그녀의 눈이 불안한 듯 빠르게 깜빡이는 것을 놓치지 않고 바로 추궁조로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꾀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려는 건가요? 내가 그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해요? 더구나 저렇듯 사악한 뭔가를 동원하기까지 했으면서. 이 일이 세로이프와 프졸란, 양국 간에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예상이 안 되나요?”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이에요. 그, 그저 황후마마를 모시고 있으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에요. 정말입니다. 저, 저자가 올 때까지만 그러고 있으면 된다고……. 그 뒤에는 모든 게 다 잘 풀릴 테니 안심하라고 했어요. 의식만 무사히 치, 치르고 나면, 그, 그 힘만 넘겨받으면…….”

공왕비는 로엘린의 말을 듣다가 사색이 되어 대꾸했다. 세로이프와 프졸란, 그 말이 주는 압박감은 그만큼 큰 것이었다.

“……의식? 힘?”

로엘린은 공왕비가 횡설수설 꺼낸 말 속에서 뭔가 단서가 될 법한 단어를 잡아냈다.

의식.

그리고 힘.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어떻게든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을.

“루시! 실로아!”

로엘린이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을 불렀다. 그러자 루시와 실로아가 굳이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고도 그녀의 의지를 알아차린 듯 더욱 맹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덕분일까.

자꾸만 그들의 발목을 잡던 안개가 순간적으로 흐트러졌다. 그리고 여유롭게 웃던 사내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어서 나가자. 폐하께 가야 해!”

로엘린은 다급히 루시와 실로아에게 말했다. 그들은 대답할 새도 없이 길을 열기 위해 손에 들려 있는 무기를 계속 휘둘렀다.

“아, 안 돼!”

응접실 출입문 근처까지 다다르자 사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들을 막았다. 바로 그 순간, 루시의 단검이 허공을 갈랐다.

“아악!”

사내의 얼굴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그는 얼굴을 손으로 부여잡으며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루시가 단검에 묻은 피를 털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짧은 거리를 고생하며 오게 만든 네놈의 그 얼굴을 그어 주고 싶었, 흐흠.”

그러나 루시는 중얼거리다 말고 로엘린을 슬쩍 돌아보더니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입을 다물었다.

오랜만에 무기를 들고 마음껏 휘두르다 보니 묻어 두었던 본래 성격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다.

“푸훗!”

그것을 알아차린 실로아가 입술을 실룩이다가 이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루시는 그녀의 웃음소리에 매섭게 시선을 던졌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몸을 돌려 로엘린에게 보고했다.

“가시지요, 황후마마.”

“고마워. 두 사람 모두 수고했어.”

로엘린은 제 얼굴을 부여잡은 채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는 사내를 보다가 급히 걸음을 옮기려 했다.

안개도 거의 걷힌 상황이고 길도 열렸다. 그러니 케르겔에게 가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불안감이 좀처럼 사라지려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가슴속에 차오른 불안감은 그 크기를 더욱 키워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불안감에 질식할 수도 있을 만큼.

그녀가 불안감을 애써 억누르며 발을 다시 내디디려는 순간, 날카로운 고통이 찾아왔다.

“……!”

“황후마마!”

“황후마, 아악!”

갑자기 로엘린이 앞으로 고꾸라지자 그에 놀란 루시와 실로아가 황급히 달려왔다. 하지만 그들이 로엘린의 곁에 다가가기 직전, 갑자기 바닥이 마구 흔들렸다.

아니, 바닥뿐만 아니라 그들이 머무르고 있던 별궁 자체가 요동치고 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터였다.

“화, 황후마마!”

루시와 실로아는 갑작스러운 진동에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가 간신히 몸을 가눈 뒤, 본인들의 안위를 살필 생각도 하지 않고 서둘러 로엘린에게 다가갔다.

“황후마마!”

그들의 눈앞에서 로엘린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루시가 다급히 로엘린의 몸을 부축하고는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황후마마, 괜찮으신지요?”

“……루시.”

로엘린이 루시의 손길을 느꼈는지 힘겹게 눈을 떴다. 그러자 실로아 역시 그녀의 곁에 다가와 울먹였다.

“어디가 아프신 거예요? 설마 독 같은 것에 또…….”

“이제야 저쪽에서 술법이 발동한 모양이로군요.”

본인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있던 사내가 킬킬거리며 웃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뜩이나 흉측한 얼굴이었는데 조금 전 루시가 그를 향해 단검을 휘두른 터라 그의 얼굴을 가로질러 긴 상처까지 생기니 더욱 끔찍해 보였다.

더구나 그의 광기 어린 눈빛이 더해지니 사내에 대한 거부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내의 얼굴이 평범했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외모와 별개로 그가 풍기는 사악한 분위기 자체가 그에 대한 거부감을 증폭시켰으니 말이다.

사내는 제 얼굴의 상처를 손으로 더듬다가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짜 늑대족의 ‘반려’였다니. 하하! 모든 게 진실이었어! 내 연구가 결코 무의미했던 게 아니라고!”

희열에 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더니 사내가 로엘린을 향해 성큼 다가왔다. 실로아가 냉큼 로엘린과 그녀를 안고 있는 루시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순간, 로엘린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실로아에게 말을 건넸다.

“괜찮아, 실로아. 저자에게서 들어야 할…… 얘기가 있어.”

“하, 하지만 황후마마!”

로엘린은 실로아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에 실로아가 입술을 꽉 깨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옆으로 비켜섰다. 루시 역시 로엘린이 몸을 지탱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운 뒤,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언제든 사내를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걸 잊지 않았다.

“……그대가 말한 ‘진실’이 무엇이지? 그리고 술법이 발동됐다는 건 뭘 의미하는 건가? 조금 전 느껴졌던 힘이 무엇이기에.”

“한 번에 하나씩만 물어보시죠. 이 늙은이가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내는 킬킬거리며 조롱하듯 대꾸했다. 하지만 로엘린은 그의 말에 노여워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을 뿐. 그러다가 그녀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

“의식을 치른다고 했지. 힘을 넘겨받는다고도 했고.”

로엘린은 공왕비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공왕비가 멍하니 그들을 쳐다보고 있다가 조금 전 제 말실수를 깨닫고 황급히 입을 열려고 했다.

“나, 나는 비밀을 발설하려던 게 아니라…….”

“뭐, 이제는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다 끝났으니까.”

사내는 공왕비의 변명을 굳이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그녀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그러고는 다시 로엘린을 향해 허리를 숙이고는 정중히 예를 갖추는 척 행세하며 말을 이었다.

“늦었지만 제 소개를 드리지요, 황후마마. 저는 하이엔 테고르트라 합니다. ……그리고 ‘늑대족’에 대해 굉장히, 관심이 많은 사람이지요. 이 늙은이의 평생을 다 바쳤을 만큼 말입니다.”

로엘린을 보는 사내, 하이엔의 눈이 탐욕으로 혼탁해진 채 번들거렸다. 그녀는 또다시 목구멍 아래에서 피가 올라오는 걸 느끼고는 억지로 참으며 그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쳤다.

“힘드실 텐데 잘 참으시는군요.”

그러자 하이엔이 그녀의 상태를 잘 알고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쫙 펴더니 엄지를 접으며 가벼운 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일단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 대답해 드릴까요? 아니, 그건 이미 황후마마께서도 아시는 것 같으니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는 게 좋겠군요.”

하이엔의 말을 듣던 로엘린의 눈이 흔들렸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늑대족에 대해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것을.

“술법이 무엇인지, 그걸 궁금해하셨지요?”

“…….”

“늑대족의 힘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평범한 인간이 그 힘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술법이지요. 바로 제가 그토록 놀라운 술법을 고안해 냈답니다.”

하이엔은 마치 어린 손녀에게 동화라도 읽어 주는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그 내용마저 동화 같지는 않았다.

“수천 명의 목숨을 이미 희생시켰지요. 황후마마께서도 아시겠지만, 그 힘이 보통 강대해야 말이죠.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도 부족하더란 말입니다. 뭐가 부족했을까요?”

하이엔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루시와 실로아가 움찔거리며 그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하이엔은 그저 검지 하나만을 들어 보인 채 로엘린을 가리켰다.

“매개체가 필요했습니다. 늑대족의 ‘반려’ 말입니다.”

“……!”

로엘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와 동시에 참고 있던 핏물이 입술을 비집고 다시 한 번 흘러내렸다.

“늑대족이 아닌 사람이지만, 늑대족의 ‘반려’인 존재. 바로 그 존재를 매개체로 삼아서 힘을 넘겨받으면 된다는 게 제가 세운 가설이랍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그 가설대로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군요.”

하이엔이 창밖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로엘린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루시와 실로아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루시와 실로아가 동시에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으아악! 뭐, 뭐야!”

하이엔은 느닷없는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제압당했다. 실로아는 엎드린 하이엔의 등 위에 올라탄 채 그의 두 팔을 잡아 꺾은 뒤, 로엘린을 쳐다보았다.

“루시, 나 좀 도와줘.”

“예, 황후마마.”

루시는 로엘린의 말에 냉큼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로엘린은 루시의 도움을 받아 그를 향해 다가갔다. 실로아에게 짓눌린 채 옴짝달싹하지 못하던 그의 번득이는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이런다고 의식이 중단될 거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스스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거대한 힘이 황후마마의 몸을 통과하면서 속을 잔뜩 휘저었을 텐데…….”

하이엔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그녀의 입가를 타고 흘러내린 핏줄기가 그 증거였다. 자신이 펼친 술법, 그리고 의식이 원활하게 진행되었다는 증거 말이다.

“그렇다 해서 의식이 완성된 건 아니겠지. 그대의 말대로 아직까지 내 속이 엉망이거든.”

로엘린은 피가 또다시 올라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그러자 하이엔이 재차 뭐라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녀가 그를 누르고 있는 실로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부탁하고 가도 될까, 실로아? 방금 들었으니 대충 짐작하겠지만…… 저자가 꾸민 일을 막아야 해. 그러려면 내가 가야 할 것 같아.”

뭘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지 못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 일을 막을 수 있는 건지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직감은 케르겔에게 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여기서 꼼짝도 하지 않고 이 노인네를 붙들어 두고 있을 테니.”

실로아는 로엘린의 염려 섞인 시선을 눈치채고는 더욱 호기롭게 대꾸했다. 그러자 로엘린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몸을 돌려 공왕비를 쳐다보았다.

급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실로아의 안전이 걸려 있는 일이니 확실히 해 두고 나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공왕비.”

“……!”

공왕비가 로엘린의 차분한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자 로엘린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더 이상 일을 크게 만들지 말아요.”

“저, 저는…….”

“나는 이번 일과 관련하여 반드시 그대와 프졸란에 책임을 물을 겁니다. 거기에 문제를 더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고 믿고 싶군요.”

로엘린은 공왕비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다시금 실로아를 보았다.

“또한 내 사람을 조금이라도 건드린다면 용서를 구할 기회조차 사라진다는 걸 명심하도록 해요.”

“아, 알겠습니다! 그리할 테니, 부디 자비를 베풀어…….”

공왕비가 용서를 구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나 로엘린은 그 모습을 보다가 바로 시선을 거두고 몸을 돌렸다.

이제 케르겔을 찾으러 가야 할 터였다.

“제가 먼저 밖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황후마마. 숙소에 배치된 우리 쪽 호위 기사들이 있을 텐데, 지금 이 소란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걸 보면 뭔가 밖에도 문제가 벌어진 듯합니다.”

그때, 루시가 로엘린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이야기했다. 로엘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흐려졌다.

“하지만 혼자 나가는 건 위험해, 루시.”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루시를 만류했다.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케르겔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래도 루시를 홀로 위험에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로엘린이 초조한 마음에 미간을 좁힌 순간,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로엘린과 루시의 시선이 서로 교차했다.

“황후마마, 잠시 이쪽으로.”

루시는 황급히 로엘린을 보호하며 낯선 상황에 대처할 자세를 갖췄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일지, 혹은 불리한 상황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황후마마, 괜찮으십니까?”

그리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하이네스였다. 그는 밖에서 격투라도 벌인 것인지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이네스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로엘린은 안도하며 비틀거렸다. 극도로 긴장하고 있다가 안도하면서 몸의 힘이 풀린 탓이었다.

“황후마마!”

“……괜찮아.”

그녀는 저를 부축하는 루시를 안심시킨 뒤, 하이네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폐하는 지금 어디 계시죠? 의식을 막아야 해요.”

“……예?”

의식이라니. 하이네스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그답지 않게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이네스의 그런 반응에도 불구하고 루시의 도움을 받아 걸음을 옮기며 재차 입을 열었다.

“일단 폐하께 가요. 가는 길에 설명할 테니까.”

* * *

“미쳤군요. 봉인을 깨뜨려서 힘을 취하고자 하다니.”

분명 라카인의 국왕이 꾀한 일일 것이리라. 하이네스는 로엘린의 설명을 듣고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가 꾸민 일이겠죠. 레노프, 그 사람 말이에요.”

그 순간, 로엘린이 하이네스의 마음을 짐작하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하이네스는 표정을 굳히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몸 상태를 물어보는 거라면 차마 괜찮다는 말은 못 하겠네요.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해서라면 괜찮아요. 다만, 그가 저지른 일에는 화가 나네요.”

같은 핏줄이라는 건 더 이상 로엘린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건 케르겔의 안위였다.

그래서 로엘린은 몸속을 갈기갈기 찢어 헤집는 듯한 통증을 참으며 계속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옆에서 자신을 부축하며 루시가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는 걸 느끼지 못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

하지만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일까. 로엘린은 더 심해진 통증에 저도 모르게 멈춰 서서 그대로 몸을 숙이고 말았다.

“황후마마!”

“우욱!”

로엘린은 황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황후마마!”

하이네스 역시 그 모습에 경악하여 그녀를 불렀다. 어느새 그녀에게서 나온 피가 발 아래에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가야 해요.”

로엘린은 울컥, 피를 토하고는 다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의식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케르겔이 갖고 있던 힘을 전부 빼앗기게 된다는 사실도.

‘그가 위험해!’

힘을 갖게 된 제 오라비, 아니, 레노프가 케르겔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로엘린은 재차 피를 토하면서도 한 걸음, 한 걸음,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루시와 하이네스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복도에는 그들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복도뿐만 아니라 궁 안에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실제로 이곳에 들어오고자 할 때도 어느 누구 하나 그들을 막지 않았다. 아예 궁을 호위하는 병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흡사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다는 듯.

궁 밖의 저편에서 들리는 연회장의 음악 소리가 되레 이곳의 적막과 비교되면서 그 괴리감에 소름이 돋았다.

“바로 저곳입니다. 폐하께서 계실 것으로 추측되는 회의실이.”

하이네스의 말이 아니어도 로엘린은 눈앞에 보이는 문을 보고 케르겔이 그 너머에 있다는 걸 느꼈다.

거대한 힘이 전해졌다.

지금 제 몸속을 헤집고 있는 이 힘의 근원이 저 문 너머에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케르겔.”

로엘린이 발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문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녀가 문을 막 열려는 순간, 안쪽에서 거대한 힘의 소용돌이가 터져 나왔다.

“위험합니다, 황후마마!”

하이네스가 재빨리 몸을 날려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그들의 몸 위로 부서진 문의 파편들이 후두둑, 후두둑, 떨어졌다.

“황후마마, 괜찮으신지요?”

루시가 뿌옇게 내려앉은 먼지를 털지도 못한 채 급히 다가왔다. 하이네스가 몸을 일으킨 뒤, 로엘린을 안았던 팔을 풀며 입을 열었다.

“워낙 급한 상황이라 무례를 범했습니다.”

“아니요. 구해 줘서 고마워요. 그보다 케르겔은…….”

로엘린은 제멋대로 떨리는 몸을 억지로 추스르고 문이 있었던 지점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치광이가 웃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크하하! 바로 이것이로군. 이거였어. 이토록 놀라운 힘이라니.”

웃음소리의 주인은 한낱 미치광이가 아니었다. 로엘린은 레노프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몸속을 헤집던 고통이 조금 가라앉은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기뻐할 일이 아니었다.

하이엔이라는 그 사내가 말한 의식이 성공했다는 뜻이니 말이다. 레노프의 웃음소리가 그것을 다시 확인시킨 셈이었다.

“……케르겔.”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케르겔, 그 남자만이 무사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세로이프 제국의 황후로서 할 법한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로엘린이 바라는 건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

“겨우 일부분을 가져온 것인데도 이 정도라니.”

레노프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금세 그녀에게 향했다.

“아! 내 누이동생이 왔군. 어서 오너라. 네 역할이 아주 컸어.”

레노프가 로엘린을 발견하고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건넸다. 그러나 로엘린은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케르겔을 찾았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 케르겔이 있었다. 한쪽 구석에 처박힌 채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그가 말이다.

그는 봉인이 깨진 충격에 이를 악물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로엘린을 보았다. 케르겔의 시선이 곧바로 흔들렸다.

“……로엘린, 그대가 왜 여기에, 위험해. 지금 당장 나가도록. 크흑.”

“케르겔!”

“오지 마! 하이네스! 황후를 여기에 데려오면 어떻게 하나?”

케르겔은 뒤따라 들어온 하이네스를 향해 외쳤다.

“죄송합니다, 폐하. 하지만 지금 이 의식을 막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니…….”

“막아도 내가 막아! 어서 황후를 데리고, 으윽.”

케르겔의 이마 위로 핏대가 섰다. 온몸의 혈관이 지렁이처럼 구불구불 올라오기 시작했다. 또다시 그의 힘을 먹어 치우려는 술법이 시작된 것이다.

“……흐윽!”

그리고 그건 로엘린에게도 마찬가지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잠시 누그러들었던 통증이 다시 심해지자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로, 로엘린.”

그 모습을 본 케르겔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안간힘을 써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당신이야말로, 괜찮, 흐윽, 괜찮아요?

로엘린은 제게 다가온 남자를 붙잡으며 힘겹게 물었다. 변신을 했던 것인지 그의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길게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의 팔도 털이 뒤덮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모든 변화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레노프에게 힘을 빼앗기고 있기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의식을…… 의식을 어떻게든 중단해야…….”

“나 때문이라면 그러지 않아도 돼. 차라리 그대까지 고통스럽게 만드는 힘이라면, 전부 줘 버려도 되니까.”

“케르겔!”

로엘린은 불안감을 느끼며 그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하지만 케르겔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제 가슴팍의 봉인을 움켜잡았다.

금이 쩍쩍 간 상태인 봉인은 곧 사라질 터였다. 그러면 남아 있던 힘이 전부 레노프에게 넘어갈 터.

그녀에게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더 이상 겪게 할 수는 없었다.

“이 힘이 그렇게 탐났나?”

케르겔은 그대로 몸을 일으켜 레노프를 바라보며 외쳤다. 그의 금빛 눈동자 속에 불꽃이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레노프는 자신이 갈취한 힘을 만끽하다가 그 시선에 저도 모르게 흠칫 물러섰다. 그러고는 그런 제 자신의 모습에 자존심이 상해 더욱 거칠게 입을 열었다.

“한낱 짐승 따위가 갖기에는 너무나 강대하고 매혹적인 힘이지.”

“그럼 가져가라. ……하이네스, 마도구를 챙겨 왔겠지?”

케르겔은 입꼬리를 비틀며 대꾸한 뒤, 하이네스를 향해 물었다.

“폐, 폐하!”

하이네스는 눈을 크게 뜨고 케르겔을 불렀다. 그가 무엇을 계획하는 것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매개체 역할이 되었던 황후.

그녀를 대신할 것을 찾은 것이다.

“봉인이 깨질 경우 ‘반려’를 대신하여 늑대족의 힘을 방어할 수 있다 하니, 지금도 그녀를 대신할 수 있겠지.”

“하지만 마도구의 용도는 그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결코 완벽하지 않은…….”

“그래서 나더러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더 두고 보라는 건가?”

“…….”

하이네스는 케르겔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침묵하다가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품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금색으로 빛나는 그것은, 고대의 유물이자 늑대족의 힘을 막을 수 있는 마도구였다.

“이걸 정말 쓰게 될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하이네스가 복잡한 시선으로 마도구를 보다가 케르겔에게 건넸다. 그러자 케르겔이 그것을 받아 들고는 그대로 제 봉인 위로 내리꽂았다.

“케르겔!”

로엘린이 그 광경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검의 형태를 하고 있는 마도구가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마도구는 케르겔의 가슴을 관통한 게 아니었다. 그저 봉인만을 깨뜨렸을 뿐.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봉인이 사라지면서 거대한 힘이 다시 한 번 소용돌이쳤다.

“케, 케르겔!”

로엘린은 케르겔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힘을 보며 절박하게 그를 불렀다. 거대한 힘을 잃어버린 케르겔의 몸이 허공에 떴다가 그대로 추락했다.

“케르겔, 괜찮아요? 당신 괜찮아요?”

로엘린은 허둥지둥 달려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다 찢겨 나간 옷가지 사이로 그의 가슴팍이 드러났다. 봉인이 있었던 자리에 희미하게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마치 가벼운 화상을 입고 나은 것처럼.

“케르겔, 당신…….”

“……난 괜찮아. 그대는?”

“나도 괜찮아요.”

그녀는 눈물로 범벅이 된 채 그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그 힘이 뭐라고.

그런 힘을 가져서 뭘 하겠다고.

로엘린은 케르겔을 꽉 끌어안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레노프를 쏘아보았다.

“……!”

하지만 원망 가득했던 그녀의 푸른 눈은 오래 지나지 않아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하하하! 이제 세상은 다 내 것이다! 대륙의 지배자는 바로 나, 레노프야! 모두 다 지워 버리겠어. 라카인의 이름만이 남을 수 있도록 세로이프든 어디든 모조리 없애 버리…… 커, 커헉!”

레노프는 본인이 그토록 경멸하던 ‘짐승’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오히려 케르겔이 변신했을 때보다도 더 큰 변화였다.

레노프가 자랑스럽게 여기던 금발이 모조리 빠지고 그 자리에 뻣뻣한 짐승의 털이 자라 올라오기 시작했다. 얼굴마저도 털로 뒤덮일 정도였다.

그리고 그의 몸도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부풀었다’. 마치 발효된 빵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레노프의 몸은 한계를 모르고 계속 부풀었다.

“이, 이게 뭐야? 내, 내가 왜 이래!”

레노프는 그런 자신의 변화를 그제야 자각하고는 경악하여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변화는 좀처럼 그칠 줄 몰랐다.

“으아악! 이건 아니야! 이게 아니라고!”

사람의 육체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자연스럽게 체구가 커지는 거라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커지는 건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크아악! 사, 살려 줘!”

레노프의 살갗 위로 거미줄처럼 실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새로 피가 흘러나왔다.

단순히 어느 한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게 아니라, 몸 전체가 다 그랬다.

마치 석고상 같은 게 금이 가서 산산이 부서지기 직전의 모습 같다고 해야 할까.

“힘을 담기에는 나약한 육신…….”

“……예?”

로엘린은 문득 들려온 케르겔의 말에 시선을 돌려 그를 보았다. 그가 그녀에게 안겨 있다가 고개를 슬쩍 들어 레노프를 보고 있었다.

“혹은 너무 작은 그릇이라 해야 할까.”

“…….”

그가 덧붙인 말을 듣고서야 무슨 뜻인지, 그리고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힘을 담기에는 레노프가 너무나 나약한 인간인 게 문제였을 터.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글쎄. 아무래도…….”

케르겔은 로엘린의 물음에 대답하려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차마 그녀의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담을 수 있는 양을 훨씬 뛰어넘는 양을 억지로 쑤셔 넣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을 담은 그릇이 깨지는 수밖에 없으리라.

“허, 허윽, 으아악!”

레노프의 몸 곳곳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처음에는 실금으로 보였던 부분들이 벌어지면서 나오는 피의 양도 몇 배는 더 많아진 것이다.

힘을 가졌다는 기쁨을 느낀 건, 그저 순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고작 그 기쁨을 누리고자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케르겔은 이미 숨이 끊어진 두 공왕의 시신을 보다가 다시 레노프를 보았다.

더 이상 그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가 그토록 경멸하고 조롱하던 짐승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핏덩어리.

그저 그렇게 보일 뿐이었다.

“……결과가 참혹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다행입니다. 결국 힘은 다시 돌아오게 될 테니.”

그때, 하이네스가 안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케르겔은 그를 힐끗 쳐다보고는 로엘린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게 대꾸했다.

“다행이라 말하기는 아직 이르네.”

“이르다니요?”

“나도 확신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케르겔은 어깨를 으쓱이며 제 가슴팍에 남은 봉인의 흔적을 손으로 쓸었다. 고통이 지나가고 난 뒤인데도 불구하고 몸은 여전히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강제로 탈취당한 힘이 아주 조금, 불안정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다.

“불안정한 힘을 다시 봉인시킬 수 있을지…….”

케르겔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말끝을 흐렸다. 레노프의 몸에서 더 많은 피가 분수처럼 솟아오른 걸 본 탓이었다.

그는 황급히 로엘린을 제 품에 당겨 안았다. 그와 동시에 레노프의 몸이 터져 나갔다.

사람의 육신이었던 부분들이 형체조차 잃어버린 채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하이네스와 루시 또한 그것을 피해 몸을 숙였다.

“케르겔. 그 사람은…….”

로엘린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 나왔다.

허무한 죽음이었다. 또한 상상도 해 본 적 없던 참혹한 죽음이었다.

레노프 본인도 이런 식으로 본인이 죽게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언조차 남기지 못한 채,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한 채.

로엘린은 케르겔의 가슴팍에 이마를 대고 있다가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분명 슬픈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쩐지 가슴속이 무거웠다.

“……으윽.”

“케르겔?”

그러나 그녀는 그런 감정에 오랫동안 잠겨 있을 수 없었다. 저를 끌어안고 있던 케르겔에게서 신음이 들린 탓이었다.

“케르겔, 왜 그래요? 무슨 일……. 앗!”

로엘린은 다급히 그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만 케르겔의 상태를 확인할 새도 없이 그녀는 그에게 밀쳐지고 말았다.

“케르겔, 괜찮…….”

로엘린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재차 그를 살피기 위해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케르겔이 그녀를 막으며 소리쳤다.

“오지 마, 로엘린!”

“……케, 케르겔?”

로엘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뿐만 아니라 몸을 피했던 하이네스와 루시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케르겔, 왜 그러는…….”

“오지 마. 제발.”

케르겔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하지만 손으로 가렸다고 해서 그의 변한 얼굴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조금 전 레노프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얼굴 또한 뻣뻣한 털로 뒤덮여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지난번 변신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폐하, 어째서…….”

하이네스가 경악하여 입을 열었다가 뭔가를 떠올렸다.

조금 전 케르겔이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다행이라 말하기는 아직 이르네.>

<불안정한 힘을 다시 봉인시킬 수 있을지…….>

그 말들이 빠르게 머릿속에서 정리됐다. 하이네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참담한 표정으로 다시금 물었다.

“설마 봉인 자체가 불가능한 겁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바쉘 경?”

로엘린이 하이네스의 말에 놀라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케르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아니죠, 케르겔? 그런 거 아니죠?”

그녀는 침묵하는 케르겔을 보며 힘겹게 질문했다. 케르겔이 그녀의 푸른 눈 가득 고인 눈물을 보다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송곳니가 툭 튀어나온 모습으로 웃는 것이었기에.

그것을 스스로 깨달은 케르겔이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린 뒤, 웃음기를 지우고 입을 열었다.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야. 힘을 내 안에 잠시 가둬 놓기는 했지만, 봉인은 불가능해.”

“그게, 무슨……. 왜 불가능한 건데요?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래요! 내가 있잖아요. ‘반려’가 봉인이 깨졌을 경우, 그 파국을 막는다면서요. 내가 당신의 ‘반려’잖아요!”

로엘린이 그를 향해 재차 다가가고자 했다. 하지만 케르겔은 손을 들어 그녀를 또 한 번 막은 뒤, 고개를 저었다.

“소용없어, 로엘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왜 해 보지도 않고 소용없다고 그래요! 내가 ‘반려’인데 왜요!”

“다른 자에게 한 번 힘이 넘어가면서 불안정해졌어. 나를 제 주인으로 인식하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야. 오히려 먹잇감으로 여기고 있지. 라카인의 국왕을 먹어 치운 것처럼.”

피와 살점으로 흩뿌려진 레노프의 흔적이 케르겔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탐욕마저 먹어 치운 것일까. 케르겔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저를 갈기갈기 찢고 나오려는 힘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케르겔이 심호흡을 한 뒤,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저를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을 마주했다.

그 눈에 비친 제 모습은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괴물’이 아닌, 그저 케르겔 자신을 말이다.

“하이네스, 황후를 데리고 나가게. 루시도 함께 나가고.”

케르겔은 로엘린에게서 시선을 돌려 하이네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로엘린이 다시금 반발하며 외쳤다.

“안 나가요! 당신이랑 같이 나 갈 거예요!”

“아니. 그대는 나가야 돼.”

그는 주먹을 꽉 쥔 채 그녀에게 말했다. 터져 나올 것 같은 힘을 억지로 누르고 있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그 한계를 넘으면, 모든 게 끝나 버린다.

이 힘은 세상의 모든 걸 없애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테니까.

그러니 자신이 선택할 길은 그저…… 죽음뿐. 힘이 자신을 먹어 치우기 전에, 자신이 힘과 함께 죽는 것이다.

“폐하.”

그것을 알아차린 하이네스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불렀다. 하지만 케르겔은 더 이상 말을 잇는 걸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흐흑, 폐하.”

그때까지 침묵하던 루시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흐느꼈다. 케르겔이 직접 얘기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충분히 짐작한 것이다.

로엘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간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 아니죠? 그런 거, 그런 무서운 일,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죠?”

로엘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케르겔은 그녀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하이네스에게 그녀를 데리고 나가라고 눈짓을 한 게 전부였다.

……나는, 그대와 아주 오랫동안 함께하기를 원했어.

그대가 살아왔던 지난 시간, 그 외로웠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행복한 기억들로 채워 가고 싶었어.

하지만…… 지금 이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적어도 그대가 살아가는,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지키는 것이니까.

케르겔은 몸을 돌리며 피식 웃고 말았다. 세상을 지키겠다니. 자신을 잘 아는 사람들이 봤더라면 못 믿겠다며 몇 번이고 눈을 비볐으리라.

그런 거창한 목적 따위를 가져 본 적 없다. 거대한 힘을 봉인한 채 살아가고 있다 해서 그에 대해 어떤 책임감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이제 달라졌다.

이 세상에 그녀가 살아가고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지금 자신이 취하려는 행동의 이유는 충분했다.

“싫어요! 바쉘 경, 이거 놔요! 루시, 이거 놔!”

로엘린의 울부짖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하지만 케르겔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그들에게 끌려 나가다시피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케르겔은 로엘린을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주먹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로엘린.

……내 반려. 내 아내.

그대가 부디 행복할 수 있…….

“……!”

바로 그 순간, 하이네스와 루시에게서 급하게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달려오는 작은 발소리가 이어졌다.

와락.

케르겔은 제 등 뒤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미동조차 하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몇 번이나 달싹였지만, 정작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당신이랑 같이 있을 거예요.”

“……로엘린.”

“내 삶은 내가 선택해요. 당신과의 결혼도 내가 선택했던 것처럼. 그러니까 나가라고 하지 말아요.”

로엘린의 목소리에서 물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그의 등에 더욱 간절히 매달렸다.

“로엘린, 왜 그런 멍청한 결정을.”

케르겔은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털로 뒤덮인 손에 잡힌 그녀의 손목은 힘만 조금 가해도 부러질 것처럼 약해 보였다.

이렇게 약한 여자가…….

“같이 있을래요. 마지막까지.”

로엘린은 그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케르겔의 뺨을 어루만졌다. 얼굴을 뒤덮은 털조차 사랑스럽다는 듯 어루만지는 손길에 케르겔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대가 살아갈 세상을 지키고 싶었어.”

“내 세상은 당신이 없으면 안 돼요.”

“그럼 이 모든 게 내 헛짓이라고?”

케르겔은 제 뺨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을 감싸 쥔 채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로엘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요. 우리의 행복한 기억이 남아 있는 세상을 지키는 거니까,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 않겠어요?”

로엘린은 눈물을 글썽이면서도 그를 보며 웃었다. 케르겔 역시 그녀를 보다가 피식 웃고는 하이네스와 루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뭐, 이렇게 됐군.”

“폐하! 황후마마!”

하이네스가 침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루시가 울음을 터뜨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으려 했다.

참담한 결과를 보게 되리란 건 너무나 명백했다. 그렇다고 그것을 회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루시를 데리고 어서 나가게. 이제 얼마 못 참을 것 같아.”

케르겔의 입가를 타고 검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 순간, 루시가 주저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더니 입을 열었다.

“저도 두 분 곁에 남겠습니다.”

“루시!”

“제 임무는 황후마마를 모시는 겁니다. 끝까지 모시겠습니다.”

루시의 표정은 단호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인상을 쓰며 하이네스를 향해 말했다.

“어서 루시를 데리고…….”

“저 또한 이곳에 남겠습니다.”

하이네스는 케르겔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케르겔은 그의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서 나가게. 이제 정말…….”

한계에 다다랐다는 듯 케르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로엘린은 말조차 끝내지 못하고 몸을 구부리는 케르겔을 안으며 하이네스와 루시를 보았다.

“가세요, 바쉘 경. 루시도.”

“하지만 황후마마.”

“황후로서 내리는 명령입니다. 가세요.”

로엘린은 단호하게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두 사람의 얼굴이 비통함으로 일그러졌다.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느릿느릿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억지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로엘린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케르겔!”

맙소사.

시간을 너무 지체한 탓에 힘이 그를 삼켜 버린 것인가.

하이네스가 사색이 되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가 본 광경은 예상 밖의 것이었다.

“……!”

“화, 황후마마?”

하이네스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 사이에 루시가 황망한 투로 입을 열었다.

케르겔에게서 뿜어져 나온 힘이 금빛 안개의 형태로 천천히 로엘린에게 흡수되고 있었다.

“어, 어떻게 저런 일이……. 힘이 진정되고 있는 것이지요?”

루시는 제 눈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하이네스에게 물었다. 하이네스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습니다. 게다가 폐하의 모습 또한 되돌아오고 있으니.”

그의 말대로 케르겔의 모습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입술 밖으로 나왔던 송곳니가 들어가고 온몸을 뒤덮었던 털이 사라졌다. 길게 뻗었던 손톱 역시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아는, 너무나 익숙한 케르겔의 모습이 된 것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하이네스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적과도 같은 일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때, 루시가 뭔가를 떠올리고는 외쳤다.

“설마 황후마마의 배 속에…….”

“……예?”

하이네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루시를 보았다. 루시는 케르겔과 로엘린을 보다가 울음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황후마마께서 회임하신 게 틀림없어요. 분명히 그게 맞아요.”

“아…….”

그제야 하이네스는 지금 이 상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제멋대로 날뛰던 힘이 갑자기 가라앉은 것.

그것은 단 하나로 설명할 수 있었다.

늑대족의 후예가 그 힘을 승계했다는 것. 혹은 그 힘의 일부를 먼저 나눠 받게 되었다는 것.

“어떻게 이런…….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모르죠. 배 속에서부터 저렇듯 힘을 승계한 건 본 적이 없으니. 아마도…… 굉장히 효심 깊은 아가님이 태어나실 모양이네요.”

루시는 눈물을 닦으며 훌쩍였다.

그들이 그렇듯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도 케르겔과 로엘린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거대한 힘 안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 힘이 로엘린의 몸속으로 전부 흡수되어 사라지기 전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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