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로엘린은 마차의 작은 창을 통해 밖을 쳐다보았다. 케르겔의 모습을 보고자 했지만, 그가 앞서가고 있는 것인지 창을 통해서는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휴우…….”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던 그녀의 입술을 비집고 한숨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루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디 불편하신지요, 황후마마. 궁의를 부를까요?”
“아니, 괜찮아. 그냥…….”
로엘린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푸른 눈이 흐려지는 걸 본 루시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그녀가 왜 이러는 건지 대강 짐작이 된 탓이다.
‘아마도 폐하 때문이겠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케르겔이 비밀로 하고 있던 ‘늑대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리라.
루시는 그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동이 트고 루시가 천막 안으로 세숫물을 준비하여 들어갔을 때, 그 안의 풍경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로엘린은 간이침대 위에서, 그리고 케르겔은 멀찍이 떨어진 천막 구석에 있었으니 말이다.
밤을 꼬박 지새우며 그렇게 있었던 건지, 두 사람 모두 잔뜩 피곤해 보였다. 게다가 로엘린의 표정 위로 드러난 혼란은 간단히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듯 짙게 깔려 있었다.
‘하기야 쉽게 받아들이시기는 힘드실 터.’
평범한 인간이 아닌, 고대 수인족의 피를 물려받았다는 사실에 어찌 당혹스럽지 않겠는가.
더구나 어제 그, ‘변한 모습’까지도 보았으니…….
‘두 분을 믿고 단둘이 계시게 하였는데,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건 아닌지 모르겠네.’
루시는 로엘린의 안색을 살피며 거듭 소리 없이 혀를 찼다.
히이잉.
그 순간,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춰 서더니 밖에서 기사의 목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황후마마. 이곳에서 잠시 쉬어 가겠다는 폐하의 전언입니다.”
“……알겠네.”
로엘린이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잡은 채 입술을 앙다물었다. 뭔가를 고민하고 망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루시가 조심스럽게 로엘린을 불렀다.
“황후마…….”
“마차에서 잠시 내리는 편이 좋겠어, 루시. 계속 앉아 있었더니 불편하기도 하고.”
루시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로엘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건네는 로엘린의 모습에, 루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장단을 맞췄다.
“그게 좋겠네요, 황후마마. 저도 계속 마차 안에만 있었더니 몸이 다 굳어 버린 것 같지 뭐예요.”
루시는 일부러 더 가벼운 투로 농담을 덧붙였다. 그러자 로엘린이 희미하게 미소를 짓더니 다시 창으로 시선을 던졌다.
말에게 물을 먹이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기사들 역시 저마다 잠깐의 휴식 시간을 이용하여 무기를 손질했다.
하지만 케르겔의 모습은 여전히 찾을 길이 없었다.
‘……나를 피하고 있는 걸까.’
로엘린이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가정을 떠올린 순간, 마차 밖에서 다시금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후마마, 마차 문을 열어도 되겠습니까.”
“그리하게.”
로엘린은 머릿속을 뒤엉키게 만드는 상념을 접은 뒤, 입을 열었다. 그러자 마차 문이 열리고 기사가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댄 채 예를 표하더니 이내 에스코트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
하지만 로엘린은 기사의 손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본래대로라면 지금 제게 손을 내밀었을 사람은 케르겔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어쩐지 화가 날 것만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루시가 냉큼 로엘린의 드레스 자락을 정돈했다.
로엘린은 기사의 손 위에 제 손끝을 가볍게 얹은 뒤,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황후마마.”
마차에서 내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건 이동식 의자였다. 발의 상처가 심한 터라 걷기 힘든 그녀를 위해 부랴부랴 마련된 것이었다.
로엘린은 루시의 부축을 받으며 이동식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느릿느릿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숲을 빠져나간 게 아닌 터라 사방이 전부 나무들로 빽빽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그나마 평지가 보였다. 아마도 그래서 잠시 이곳에서 쉬어 가기로 결정을 내린 듯했다.
“어느 쪽으로 가시겠습니까, 황후마마?”
루시가 곁으로 다가와 그녀에게 물었다. 로엘린은 루시의 물음에 힐끗 그녀를 돌아보고는 다시 주위를 살폈다.
아니, 주위를 살폈다고 하기보다는 한 남자를 찾으려 했다고 해야겠지만.
“…….”
그러던 로엘린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고정되었다. 루시는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루시는 저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내뱉고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로엘린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가 서 있는 곳.
“폐하께 가시겠는지요.”
“……아니, 나는…….”
로엘린은 루시의 물음에 그제야 그를 향했던 시선을 거둔 뒤, 당황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젓던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케르겔이 마치 제 시선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돌려 저를 응시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그 사이의 거리가 제법 먼데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로엘린은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그 순간 케르겔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듯싶더니 곧바로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자 루시가 예를 갖추어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로엘린과 케르겔, 단둘이 대화를 나누게 하려는 나름대로의 배려였다.
“로엘린.”
“……피곤할 텐데 편하게 쉬지 그래요.”
그녀는 제게 다가온 케르겔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어색한 투로 입을 열었다.
“그대야말로 피곤해 보여. 다친 데가 많이 아픈 건가? 아, 당연히 아프겠지. 내가 멍청한 질문을 했군.”
케르겔은 두서없이 말을 꺼냈다가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오는 길 내내 계속 그런 분위기가 지속된 터였다. 서로를 피하고, 마주치면 어색한 침묵만이 흐르고.
‘그렇다고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
로엘린은 속으로 제 자신을 다그쳤다. 자신이 먼저 케르겔을 피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을 위해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을 모르지 않는다.
이런 제 행동에 화를 내기는커녕, 되레 배려를 해 주는 이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나 때문에 많이 상처받았을 텐데.’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를 쳐다보았다. 케르겔의 모습은 원래대로 제법 돌아온 상태였다.
그 덕분일까.
그가 낯설고 어색했는데, 그 느낌이 이제는 조금 사라졌다. 로엘린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이제, 모습이 어느 정도 돌아왔네요?”
“아…… 으응.”
케르겔은 그녀가 제게 말을 걸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듯 잠시 당황해하더니 제 턱 언저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대답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힘을 제어할 수 있게 된 터라 어느 정도 본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케르겔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 계속 로엘린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는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그는 조금 자신감이 생기는 걸 느끼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본래 모습을 찾으면 무슨 소용이야. 어차피 괴물처럼 변했던 내 모습을 다 봤는데.’
케르겔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아주 잠깐이나마 자신감을 느꼈던 제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 순간, 로엘린이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나랑 대화를 이어 나갈 마음이 생겼어요?”
“…….”
케르겔이 자조하다 말고 그녀의 말에 시선을 들었다. 로엘린의 푸른 눈이 잔뜩 긴장한 채 그를 담고 있었다. 그녀는 그와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려다가 다시금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나는, 이제 당신과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됐어요.”
“…….”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제 막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요.”
로엘린은 제 비겁한 모습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를 외면하고, 그를 피하기만 하려던 제 모습을 굳이 거짓으로 꾸미고 싶지는 않았다.
그 마음을 알아차린 것일까.
그녀를 응시하던 그의 금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더니 케르겔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뜬 뒤, 숲 깊숙한 곳을 가리켰다.
“그럼 저쪽에 가서 얘기 좀 나눌까? 다른 사람들이 듣는 건 곤란해서.”
“……그렇게 해요.”
로엘린이 잠시 주저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케르겔이 그녀가 앉아 있는 이동식 의자 쪽으로 다가오더니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럼 실례 좀 할게.”
케르겔은 그 말과 함께 로엘린이 앉은 이동식 의자의 등받이를 두 손으로 잡았다. 그러고는 숲 안쪽으로 난 길을 향해 조심스럽게 의자를 밀었다.
덜컹덜컹.
의자에 달린 바퀴가 울퉁불퉁한 바위에 부딪치면서 조금씩 흔들렸다. 그러자 의자를 밀던 그의 손길이 더욱 느려지고,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
로엘린은 그 변화를 느끼고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손을 오므려 쥐었다.
바보 같은 남자.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느 누구도 그를 당해 낼 수 없을 만큼 강한 사람이면서,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이면서, 그런 사람이 제 앞에서는 이렇듯 눈치를 살피고 행동을 조심히 하는 걸 보니 가슴속이 먹먹해졌다.
이렇게 그가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러워하는 건 전적으로 제 탓이리라.
로엘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때마침 대화를 나누기에 적당한 장소에 다다랐는지, 그가 의자를 밀다 말고 멈추었다. 그녀는 숨을 들이쉰 뒤, 시선을 들었다.
작은 호수가 눈앞에 보였다. 뻑뻑하게 들어찬 나무들 때문에 햇빛을 받지 못해서인지 호수 가장자리에 이끼가 잔뜩 끼어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물비린내, 그리고 젖은 흙냄새가 진동했다. 오래된 침묵에 냄새가 존재한다면 바로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뜬금없이 들었다.
“이미 말했듯이 나는 고대 늑대족의 후예야.”
그 순간, 침묵을 깨고 케르겔이 입을 열었다. 로엘린이 호수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흠칫하고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앉아 있는 터라 그와 눈높이가 맞지 않았다. 케르겔이 그 점을 이제야 알아차렸다는 듯 근처에서 커다란 돌을 가져다가 그녀의 옆에 놓더니 그것을 의자 삼아 앉았다.
그러고는 다시 물끄러미 로엘린을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을 피하고 거리를 두던 모습이 아니었다.
이제 대화를 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녀 역시 심호흡을 한 뒤, 그의 말을 경청할 준비를 하며 손끝을 말아 쥐었다.
“나를 두고 괴물이라 하지. 라카인을 비롯해 크세안 대륙의 다른 나라들에서는 말이야.”
케르겔은 쓴웃음을 지으며 저에 대한 타인의 평가를 입에 담았다. 그러자 로엘린의 푸른 눈이 일렁였다.
“그건…….”
그녀가 뭐라 대꾸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케르겔이 먼저 말을 이었다.
“그 말이 아예 틀렸다고는 할 수 없어.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한 말이겠지만, 실제로 내 몸속에는 늑대족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완벽한 인간이라 할 수는 없지. 이 금안이 그 증거라 할 테고.”
그는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로엘린이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는 듯 혼란스러운 투로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그, 금안은 세로이프 황족의 특성이라 들었…….”
그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로엘린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황실 도서관에서 접했던 책들이 기억났다. 제국의 초창기 역사에 등장하는 늑대와 관련된 언급. 그리고 카인베르트의 신화 속에 등장하던 늑대의 이야기. 고대 그림 속에서도 숱하게 볼 수 있었던 늑대들.
……그리고 지난번, 함께 황궁 밖으로 나갔다가 겪었던 일도.
그녀는 폭우가 갑작스럽게 쏟아졌던 날, 마치 늑대를 부리는 것처럼 행동했던 그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때 느꼈던 그것이 제 착각이 아니라…….
“카인베르트는 늑대족이었어.”
케르겔은 로엘린의 푸른 눈이 몇 번이나 흔들리는 걸 보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늑대족은 인간과 똑같이 생겼지만, 그들에게는 인간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힘이 있었지. 세상 그 무엇도 늑대족에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이었어.”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바람결에 흩날리듯이 호수 위로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녀와 그,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곳이기에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만이 지금 이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다.
로엘린은 새삼 그 사실을 깨닫고는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는 그녀가 동요하는 걸 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더 이상 숨길 수 없으니, 이제는 온전히 털어놓아야 할 때였다.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그녀가 자신을 외면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케르겔은 가슴이 지끈거리는 걸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세상을 송두리째 멸망시킬 수도 있을 만큼, 그렇게 무시무시한 힘이었어.”
“…….”
“하지만 늑대족은 욕심이 없었어. 다른 생명체와 공존하기를 바랐기에 그 힘을 굳이 사용하려고 하지도 않았지. 그런데…… 그 상황이 바뀌어 버린 게 바로 카인베르트 때문이었어. 그가 인간 여자를 사랑하게 됐거든.”
그들, 두 연인을 사람들은 결코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주변의 탐욕스러운 자들은 늑대족이 갖고 있는 강대한 힘을 욕망하고, 그것을 통해 더 많은 것을 갖기를 원했다.
그 과정 속에서 수많은 늑대족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카인베르트는 결국 자신의 힘을 봉인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그의 피를 물려받은 이들은 전부 늑대족의 힘이 봉인된 상태로 태어났다. 단지 그들에게 남은 것은 늑대를 부릴 수 있는 힘, 그게 전부였다.
“그러니까 그대가 책을 통해서 본 건국 신화는 다 거짓말이란 거야.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감춰져 있으니.”
케르겔이 말을 끝내며 농담조로 덧붙였다. 하지만 로엘린은 미소조차 짓지 못했다.
자신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큰 비밀이었기에, 그걸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만으로도 벅찬 탓이었다.
늑대족의 후예라니.
이 남자가 늑대족의 후예라고?
반려 의식 때 들렸던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새삼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는 손을 몇 번이나 오므렸다가 펴기를 반복한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당신도 힘을 봉인하고 있었던 건가요? 그, 변했던 모습은…….”
“그대를 찾기 위해서 힘을 일부 개방시켰어. 봉인이 깨지지 않을 정도로. 뭐, 아슬아슬하기는 했지만.”
케르겔은 그녀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자신의 윗옷을 젖혔다. 로엘린이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깜짝 놀라 시선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이게 바로 봉인이야.”
그저 문신 비슷한 것이라 짐작했던 것인데, 그가 그걸 가리키며 봉인이라 말했다. 로엘린은 케르겔의 왼쪽 가슴 위에 박혀 있는 것을 떨리는 눈으로 응시했다. 그건 마치 붉은색 보석 같았다.
위험한 느낌이 드는 핏빛 보석이라 해야 할까.
“늑대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짐승이라면 무엇이든지 다스릴 수 있는 힘. 하늘을 뒤엎고 땅을 가를 수 있는 힘. 그런 힘이 이 봉인 안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어.”
“…….”
로엘린이 케르겔의 설명을 들으며 봉인을 한참 동안 쳐다보다가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러자 케르겔이 그녀가 하려는 말을 알아차렸다는 듯 재차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는 않아도 돼. 이 봉인이 쉽게 깨질 일은 없으니까.”
물론 이번에는 아슬아슬했었다. 로엘린을 찾기 위해 힘을 한계까지 썼으니 말이다. 거기서 조금만 더 힘을 사용했더라면 자칫 봉인이 깨졌을 것이다.
그러나 케르겔은 굳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로엘린에게 모든 걸 털어놓겠다고 결심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이런 것까지 알게 되어 염려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만약 깨진다 해도 대처할 방법이 있거든.”
“대처할 방법이라니요?”
“지금 여기에 가지고 온 건 아니지만, 늑대족의 힘을 방어할 수 있는 고대의 마도구도 있고…….”
케르겔이 말끝을 흐리며 로엘린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를 집중하여 쳐다보고 있다가 그가 말을 다 끝내지 않자 의문 섞인 시선을 던졌다. 그는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마도구를 사용하는 건 완벽한 방법이 되지는 못해. 그저 일시적으로 힘을 누를 수 있는 것뿐이니까. 완벽하게 늑대족의 힘을 막으려면…… ‘반려’의 힘이 필요하지.”
“……반려의 힘요?”
로엘린은 그의 말을 가만히 듣다 말고 그의 말 속에서 들린 ‘반려’란 단어에 미간을 좁혔다.
반려.
익숙하다면 익숙한 단어였다. 그가 저를 칭할 때 종종 사용하는 말이니까.
게다가 결혼식을 했던 날, 반려 의식이란 이름의 예식을 별도로 치르기도 했었고…….
‘그때 들었던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늑대족. 반려.
그 모든 게 하나로 합쳐지는 것 같았다. 로엘린의 푸른 눈이 커지는 걸 쳐다보던 케르겔이 남은 이야기를 털어놓기 위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오로지 반려만이 봉인이 깨졌을 때, 그 파국을 막을 수 있어. 바로 로엘린, 그대만이.”
“……그, 그게 무슨.”
로엘린은 혼란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서서히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럼…… 라카인으로 청혼서를 보냈던 이유가…….”
“응.”
케르겔은 로엘린이 미처 끝내지 못한 질문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러고는 한 가지를 덧붙였다.
“그리고 늑대족의 후예는 오직 반려를 통해서만 후사를 볼 수 있어.”
“……!”
“끔찍해? 인간이 아닌 자와 혼인했다는 사실이?”
케르겔은 로엘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가슴이 후벼 파는 것처럼 아픈 걸 애써 억누른 채 덤덤히 물었다.
이제 모든 걸 털어놓았다.
그토록 숨기고 싶어 했던 사실을 그녀의 앞에 모조리 공개한 것이다.
이제 남은 건, 그녀의 선택이다. 그는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걸 느꼈지만 태연한 척 행세하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정작 로엘린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반려.
봉인이 깨졌을 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리고 이 남자에게…… 자식을 낳아 줄 수 있는 유일한 여인.
그 사실이 갑자기 무겁게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로엘린은 떨리는 입술을 한 번 깨문 뒤, 천천히 그를 향해 물었다.
“……내가, 그 ‘반려’가 아니면 어떻게 해요?”
그녀는 카인베르트의 무덤에 다시 갔던 날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반려는 자신이 선택한다고 했다. 그러니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말에 기대어 외면하고 있었다. 카인베르트의 무덤 속 석벽에 그려진 그림의 인물이 어쩌면 자신이 아닌, 제 쌍둥이 언니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그가 저를 선택했다는 사실에 의지하여 그렇게 잊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 문제가 다시금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상상도 하지 못한 큰 무게를 지닌 채.
자신이 ‘반려’가 아니라면 제국의 안녕은 물론, 이 남자에게서 자식을 볼 기회조차 빼앗게 되는 셈이라는 진실과 함께.
“내가 아닌, 내 언니가 ‘반려’라면…….”
“말했잖아. 이미 반려 의식을 통해 확인했다고.”
“하지만…….”
“설령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내 반려는 내가 선택한 그대뿐이라고 했잖아. 그 말을 벌써 잊은 거야?”
“그건 아니지만…….”
로엘린은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다시금 말을 이었다.
“아니면…… 내가, 이제 끔찍하게 느껴져서?”
“……!”
로엘린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가 케르겔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쓴웃음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아마도 자신이 그가 늑대족의 후예란 사실을 혐오한다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아니, 나는……. 나는 그런 게 아니라…….”
“그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겠지. 더구나…… 변했던 내 모습을 그대의 눈으로 직접 보기도 했으니까.”
케르겔은 당황해하는 로엘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로엘린은 그 말에 무슨 대답이든지 하고 싶었지만, 그런 마음과 별개로 입은 쉽게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기를 원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만 있자 케르겔이 그 침묵을 이해한다는 듯 흐릿하게 미소를 짓더니 몸을 슬쩍 돌렸다.
돌아선 그 뒷모습이 너무 쓸쓸해 보였다. 로엘린은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그대로 허공을 움켜쥐었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제 마음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대답을 해 주기 전까지는 섣불리 그 어떤 행동도 할 수가 없었다.
로엘린은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고 고개를 숙였다.
호수의 아름다운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저귀는 새소리도, 짙은 풀 냄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코끝에 진동하는 꽃향기도…….
……꽃향기?
그녀는 은은한 꽃향기가 코끝에서 느껴지는 것에 정신을 차렸다.
“이게 뭐…….”
“선물이야.”
“……?”
로엘린은 케르겔이 내민 것을 보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겸연쩍은 표정을 짓더니 조금 더 설명을 덧붙였다.
“생일 선물. ……원래는 황궁에서 제대로 생일 파티도 열고 선물도 잔뜩 안겨 줄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어쩌다 보니 생일이 지나가 버렸네.”
“…….”
그녀는 케르겔의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그가 제 앞에 내민 것은 화관이었다. 돌아선 채 있더니 이걸 만들었던 모양이다.
……이 화관을.
“늦은 감이 있지만 생일 축하해, 로엘린. 그대가 태어나 줘서 정말 고마워.”
케르겔이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의 생일을 축하했다.
처음으로 들은 축하 인사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받은 생일 선물이었다. 태어나줘서 고맙단 말도 처음이었다.
모든 게, 그녀에게는 그저 처음일 뿐이었다.
“……나는.”
나는 당신이 나한테 실망해서, 서운해서 내게 등을 보이고 돌아섰다고 생각했는데.
로엘린의 눈이 금세 뿌옇게 흐려졌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제멋대로 나온 탓이었다.
그녀는 그가 내민 화관을 받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름 모를 들꽃을 엮어 만든 화관은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아마도 처음 만든 것이리라.
저 커다란 손으로.
꽃잎 한 장이 상할까 염려하며 조심조심, 그렇게.
“왜…….”
왜 화를 안 내요. 왜 서운하다고 하지 않아요.
당신에게 괜찮다고,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지 상관없다고, 당신의 몸속에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의 피가 흘러도…… 그래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나한테, 비겁하고 겁 많은 나한테 화를 내기는커녕 왜 이런 선물을 주는 건데요.
로엘린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안에 그의 팔이 들어왔다. 본래의 모습으로 거의 돌아왔다고 하지만, 아직 완벽하게 회복된 건 아닌 터라 케르겔의 팔에는 짐승의 털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의 손톱 역시 평소보다 더 날카로웠고.
그런 손으로 작은 화관을 들고 있으니,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바보 같은 사람.’
로엘린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물이 그의 손등 위에 떨어지면서 동그랗게 자국을 남겼다.
“아, 불쾌했다면 미안…….”
그러자 케르겔이 당황해하며 화관을 내밀었던 손을 뒤로 물리려 했다. 그 순간, 로엘린이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로, 로엘린!”
케르겔은 갑작스럽게 제 팔을 잡은 로엘린의 행동에 깜짝 놀라 팔을 뒤로 빼고자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는 듯 양손으로 그를 붙들었다.
“로엘린…….”
“미안해요.”
그녀는 그의 팔을 꽉 붙든 채 입을 열었다. 머릿속으로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생각하고 난 뒤에 꺼낸 게 아니라, 그냥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것이었다.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이.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나온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랑해요, 케르겔.”
로엘린은 사랑한단 말을 입 밖으로 꺼낸 것과 동시에 혼란스러웠던 머릿속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걸 느꼈다.
대체 난 무엇을 고민하고 있었던 걸까.
그녀는 허탈함을 느꼈다. 답은 너무나 간단했다.
이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케르겔,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자신은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런데 그걸 생각하지 못한 채 그의 변한 모습을 보고는 그를 낯설어하고 거리를 두었다. 그래서 케르겔에게 상처를 입히기까지 했다.
원망의 말 한 마디조차 하지 못하는, 이 바보 같은 남자에게.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전부 다 당신일 뿐인데…… 그런데 내가 잠깐 겁을 먹었어요.”
로엘린은 그의 팔을 꽉 움켜쥐고 있던 손을 슬쩍 풀었다. 그러자 케르겔이 팔을 움찔거리며 다시금 그녀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녀가 그의 팔을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뻣뻣한 느낌의 털이 나 있는 팔 위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리자 그가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로엘린, 억지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그대의 마음을 잘 알았으니까, 그러니까…….”
바로 그때, 로엘린이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직 다친 발이 낫지 않은 탓에 금세 그녀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에 놀란 케르겔이 다급히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은 순간, 로엘린이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고는 그에게 입을 맞췄다.
“……!”
케르겔은 제게 겹쳐 온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에 순간적으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의 금안에 로엘린의 가냘픈 모습이 담겼다. 본인의 진심을 모두 담아 입맞춤을 하는 여인의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는 그대로 그녀를 꽉 끌어안은 뒤, 그녀에게 입맞춤을 돌려주었다.
더 깊이.
더 집요하게.
숨결과 숨결이 섞였다. 사랑하는 이의 숨결을 공유한다는 건 지극히 달콤한 일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뺨을 어루만지며 상대방의 온기를 좇았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입맞춤이 끝난 뒤, 케르겔은 로엘린을 품에서 살짝 놓아주다가 그제야 제 손에 들려 있던 화관의 상태를 깨달았다.
“아, 이런…….”
그녀에게 선물하려고 만들었던 화관이 찌그러졌다. 조금 전 로엘린과 키스를 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화관의 존재를 깜빡 잊은 탓이었다.
“미안해. 엉망이 됐네. 다시 만들어줄게.”
“괜찮아요. 씌워 줘요.”
로엘린은 화관을 버리려는 케르겔의 손목을 잡은 뒤,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아니야. 이건 망가져서 안 돼. 다시 만들어 줄게. 아, 아니다. 그냥 황궁으로 돌아가서 그대의 생일 선물로 준비해 놓은 것들을……. 로엘린?”
케르겔은 말을 하다 말고 로엘린이 제 손에서 화관을 가져다가 스스로 머리에 쓰는 걸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화관이 살짝 망가지면서 꽃 몇 송이가 비어져 나와 아래로 흘러내렸지만, 그게 의외로 그녀의 머리와 함께 흘러내리면서 색다른 아름다움을 주었다.
“어때요? 잘 어울려요? 나는 마음에 쏙 드는데.”
로엘린은 두 손을 들어 화관을 조심스럽게 만지며 눈을 휘었다.
“……응. 너무 잘 어울려. 예뻐.”
그대의 이런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을 만큼. 케르겔은 가슴속에서 치솟는 소유욕을 꾹 억누르고는 다시 한 번 그녀를 안았다.
“앗! 화관이…….”
그 바람에 화관이 더 망가져서 당황한 로엘린이 입을 열었지만, 그녀의 말은 곧 끊기고 말았다. 또다시 시작된 입맞춤 때문이었다.
고마워.
사랑해.
그는 그녀에게서 입술을 뗀 뒤,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댔다. 긴 입맞춤에 상기된 것인지 로엘린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사랑해, 로엘린.”
맞닿은 이마가 따끈따끈했다. 아마도 민망함을 느낀 로엘린의 얼굴에 열기가 올라온 모양이었다. 그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삼킨 뒤, 그녀의 무릎 뒤를 받쳐 안았다.
“케르겔? 내려 줘요. 저기, 의자에 앉으면 되는데.”
“그냥 이렇게 돌아가자.”
“하지만 의자는…….”
“사람을 시켜서 가지고 오라고 하면 되지.”
케르겔은 로엘린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로엘린이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어색하게 제 머리 위의 화관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젖혀 그를 올려다보고는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내 생일을 어떻게 알았어요? 난 기억도 못 하고 있었는데.”
“하이네스가 말해 줬어. 라카인의 왕녀 생일이 다가와서 대륙의 상인들 대다수가 바빠지는 시기라고.”
“……아, 그랬군요.”
로엘린은 케르겔의 대답에 납득이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매년 제 생일, 아니, 에리타의 생일이 되면 ‘하나뿐인’ 왕녀의 생일이라 하여 다들 성대하게 축하 파티를 여느라 왕궁이 소란스럽게 들썩였다. 그 소란이 별궁에 갇혀 살다시피 하던 제 귀에까지 들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속에서 아무도 자신의 생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저를 낳아 준 어미도, 오라비도, 하다못해 같은 날 태어난 쌍둥이 언니조차도 로엘린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 역시 스스로 생일을 챙길 생각을 한 적 없었다. 태어났다는 사실에 감사한다거나 스스로 축하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축하라니.
오히려 자신에게는 끔찍한 날이나 다름없었다. 외롭고 혹독한 삶에 내던져진 날을 기념한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 그대 모르게 생일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이런저런 일들이 벌어지는 바람에, 결국 이렇게 지나가 버리고 말았네. 그대의 생일 안에 다 해결하고 귀환할 생각이었는데.”
케르겔이 아쉽다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로엘린은 그의 말을 듣다가 뭔가를 떠올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보름 안에 돌아오겠다고 했던 말이 그런 의미였던 거예요?”
그녀는 케르겔이 괴수를 토벌하러 떠나면서 했던 약속을 상기했다. 당시에는 그 약속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케르겔을 비롯해 황궁 사람들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았던 것 역시.
“……나만 몰랐던 거였군요. 다들, 내 생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로엘린은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걸 느끼며 작게 중얼거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제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그렇듯 몰래 뭔가를 꾸미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케르겔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믿으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
그녀는 다시 손을 위로 올려 제 머리의 화관을 벗었다. 그러고는 그것을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만져 보았다.
“엉망이지? 그새 꽃도 좀 시들었나 보네. 이제 그만 버려.”
케르겔이 로엘린을 안고 걷다가 멋쩍은 투로 말을 걸었다. 로엘린은 화관을 만지작거리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싫어요. 황궁까지 가지고 갈 거예요.”
“뭐? 황궁까지 가지고 가겠다고? 됐어, 로엘린. 시들어 버린 화관이 뭐 대단한 거라고. 그냥 버려.”
“버리기는 왜 버려요? 내 생일 선물인데. 게다가 처음으로 받은 생일 선물이기도 한 걸요.”
로엘린은 혹시 케르겔이 빼앗지는 않을까 싶어 화관을 보호하려고 두 팔로 가렸다. 그러자 케르겔이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더니 다시금 물었다.
“하지만 황궁에 다다르기도 전에 다 시들어 버릴 텐데?”
“으음……. 루시한테 오랫동안 보존할 방법이 있나 물어보면 될 거예요.”
로엘린은 케르겔의 말에 잠시 궁리하다가 대꾸했다. 절대 화관을 포기할 수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 모습을 보던 케르겔의 입술이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실룩였다. 자신이 선물한 것을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데, 어느 누가 기쁘지 않겠는가.
“돌아가면 더 좋은 것들을 선물해 줄게. 그리고 내년에는 제대로, 정말 멋지게 생일 파티를 열고.”
하지만 케르겔은 기뻐하는 내색을 보이는 게 멋쩍어 그렇게 말을 돌렸다. 그러자 로엘린이 그를 슬쩍 보더니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그녀는 숲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있을 황궁이 너무나도 그리웠다.
“빨리 우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로엘린이 케르겔의 가슴팍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우리 집. 케르겔은 그녀의 말에 어쩐지 가슴속이 간지러워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발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을 뿐.
그리고 숲을 막 빠져나오자마자 다시 출발할 준비를 마친 기사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황후의 의자가 저 숲 안에 있으니 가지고 오라. 그리고 곧바로 출발할 것이다.”
“예, 폐하!”
기사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발 빠른 병사 하나가 냉큼 숲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 다른 병사가 케르겔의 애마를 끌고 다가왔다. 하지만 케르겔은 고개를 저은 뒤, 입을 열었다.
“황궁까지 마차를 타고 갈 테니까 그렇게 알도록.”
“예?”
마차라니! 마차라고? 그 말을 들은 기사와 병사들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렇게 커졌다.
마차 따위는 답답하다며 창을 부숴 버린다거나 마차의 한쪽 벽을 아예 뚫어 버리는 만행을 서슴지 않던 사람이 바로 그들의 황제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들의 놀람에도 불구하고 케르겔은 태연히 로엘린을 안은 채 마차로 걸음을 옮겼다.
* * *
“실패하다니! 어떻게 실패할 수가 있지? 이중으로 친 덫이었는데!”
레노프는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심복은 그저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이건 결코 실패해서는 안 되는, 실패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 이중으로 친 덫이었다. 독. 그리고 살수. 그런데 그 두 가지 덫을 전부 피한 것이다.
고작 빈껍데기에 불과했던 계집 따위가 말이다.
세로이프로 귀환했을 그 계집이 마치 저를 비웃고 있을 것만 같아, 그는 깊은 모멸감을 느꼈다. 그만큼 그의 분노는 커져 갈 수밖에 없었다.
레노프의 푸른 눈이 차갑게 번득였다. 그의 살기가 고스란히 쏟아지자 심복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가 몸을 움찔거렸다.
“소, 송구합니다, 전하. 하지만 불가항력과도 같은 힘이 개입한 터라…….”
“불가항력? 그따위 핑계를 대서 죄를 면해 볼 작정이냐? 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그곳에까지 제국의 힘이 닿지는 못했다! 그 계집을 호위한답시고 따라온 자들이 전부였단 말이다! 그걸 감안하고 살수들을 보냈던 게 아니냐!”
“노여움을 푸시지요, 전하.”
그때, 말없이 앉아 있던 데프레텐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레노프가 제 외조부를 쏘아보더니 면박을 주었다.
“지금 내가 노여움을 풀게 생겼습니까? 일이 전부 엉망이 되었는데! 우리가 꾸몄던 일에 대해 세로이프의 황제가 전부 알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니, 그걸 떠나서 그 계집을 죽이려 했던 것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을 텐데.”
“증거는 없습니다, 전하. 그저 심증일 뿐이지요. 현재 파악한 바로는 살수들 중 살아남은 자가 없습니다. 즉, 증인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독을 썼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증거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 계집에게 준 목걸이가 증거의 일부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본인이 여기서 마셨던 차에 대해 증언까지 하게 된다면…….”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로서는 그저 ‘불운한 우연’이었노라, 그렇게 우기면 됩니다. 독이 아닌 두 가지가 그저 우연히 중첩되어 불미스러운 일이 된 것이지 않습니까.”
데프레텐 공작은 레노프를 향해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러자 레노프가 분노를 조금 누그러뜨리며 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였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시종장이 굳은 표정으로 들어오더니 곧바로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한 뒤, 입을 열었다.
“전하, 기사단장이 알현을 청하였습니다.”
“기사단장이 돌아온 건가? 어서 들어오라 하게.”
레노프는 시종장의 말에 급히 대꾸했다. 그러자 데프레텐 공작 역시 몸을 슬쩍 출입문 쪽으로 돌리고는 기사단장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현장을 더 자세히 살피고 상황을 파악하고자 왕궁을 떠나 사말타 산맥 쪽에 갔던 기사단장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이리 오게. 그리고 너는 이만 물러가거라.”
레노프는 제게 예를 표하는 기사단장을 서둘러 부르고는 그때까지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심복을 향해 축객령을 내렸다.
심복을 보는 레노프의 푸른 눈이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주어진 임무를 실패했으니 그가 다시 중용될 일은 없을 터였다. 아무리 지금까지 레노프의 명에 따라 온갖 더럽고 추잡한 일을 맡아서 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것을 깨달은 심복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로서는 달리 항변할 길이 없었기에, 심복은 그저 어깨를 늘어뜨린 채 레노프의 마지막 명에 따라 나갈 수밖에 없었다.
심복이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레노프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금 이어졌다.
“저자의 처리는 외조부께서 깔끔하게 해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전하의 신경을 거스르는 일은 없을 겁니다.”
데프레텐 공작이 흰 수염을 쓸어내리며 레노프의 말에 대답했다. 그것으로 한 사람의 삶이 종지부를 찍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세 사람 중 어느 누구도 동요하는 이 없었다.
쓸모가 사라진 물건을 폐기 처분 하는 것에 구태여 어떤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현장은 어땠나? 우리 쪽의 흔적이 남아 있지는 않았겠지?”
“예, 전하. 그럴 만한 뭔가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
레노프가 기사단장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기사단장이 조금 난감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금 말을 이었다.
“워낙 황당한 이야기라 믿지 못하실 수도 있는 터라…….”
“그건 전하께서 판단하실 일이네.”
기사단장이 말을 쉽게 꺼내지 않고 주저하자 데프레텐 공작이 끼어들었다. 기사단장은 공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희가 현장에 가서 살펴보던 중에 묘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묘한 이야기라니?”
“산맥 인근의 촌락에서 사는 자들과 약초꾼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기를, 그날…… 그곳에 짐승의 왕이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짐승의 왕?”
레노프의 한쪽 눈썹이 비틀려 올라갔다. 해괴한 말을 들었다는 듯 그의 표정 역시 살짝 구겨진 상태였다. 기사단장은 그것 보라는 듯 공작을 힐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데프레텐 공작은 계속 이야기를 하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기사단장이 한숨을 한 번 내쉰 뒤,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곳에 데리고 갔던 기사들 중 한 신입 녀석이 이상한 얘기를 꺼냈습니다.”
기사단장은 이걸 말해야 하나, 고민하듯 입술을 달싹이더니 덧붙여 말했다.
“고대 늑대족의 흔적이 아니냐고.”
“뭐라고?”
이번에는 데프레텐 공작마저도 표정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기묘한 이야기를 들은 탓이었다.
* * *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힐켄 데비안이라 합…….”
“그래. 데비안 경, 자기소개는 그쯤 듣기로 하고. 기사단장에게 했다는 얘기를 다시 듣고 싶은데 말이지.”
레노프는 신입 기사의 말을 가로막은 뒤, 입을 열었다. 그러자 신입 기사, 힐켄이 더듬거리며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예, 저기,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말씀을 드려야 하는지.”
“고대 늑대족.”
레노프가 머뭇거리는 힐켄을 향해 건조한 투로 말했다.
“고대 늑대족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면 되겠군. 데비안 경의 가문에 ‘늑대족’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고?”
레노프는 조금 전, 기사단장을 통해 들은 내용을 상기하며 확인할 겸 다시 질문을 건넸다. 그러자 힐켄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예. 선대로부터 내려온 문서에 분명 그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저희 선대 중에 수인족에 대한 관심이 컸던 분이 계셨던 터라…….”
“요점만 간단히.”
레노프는 힐켄의 말이 쓸데없이 길어지려 하자 눈살을 찌푸리며 재차 입을 열었다. 힐켄은 국왕이 건넨 경고조의 말에 몸을 움츠리더니 간략하게 대꾸했다.
“세로이프 황실에 고대 늑대족의 피가 흐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뭐?”
“그래서 세로이프의 황제는 늑대족의 핏줄을 통해 내려온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힘이 발휘될 때, 그의 모습이 늑대족에 가깝게 변화한다고 하는데…….”
“……짐승의 왕이 나타났다, 라고 했지.”
레노프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사단장이 전했던 말을 상기한 것이다.
그저 무지몽매한 자들의 헛소리라 치부한 것인데…….
“그 계집을 구출하여 가는 과정에서 황제가 개입했다고 했던가?”
“예, 전하. 세로이프의 황제가 괴수를 토벌한 직후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세로이프로 귀환하는 길에 황후와 동행했다는 첩보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이 모든 계획을 망가뜨린 게 바로 세로이프의 황제란 의미였다. 늑대족. 짐승의 핏줄을 이어받은…….
“‘괴물’이란 말이 그저 근거 없이 퍼져 나간 헛소문은 아니었군.”
레노프가 헛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공작을 돌아보았다. 공작 역시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정말…… 참,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 고대 늑대족에 관련된 기록을 찾기 힘들었던 거지? 인간도 아닌 자가 저렇게 버젓이 제국의 황제랍시고 위세를 부리며 살아왔는데?”
“오래전 그 힘이 봉인된 탓에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서도 잊힌 게 아닌가 합니다.”
“힘이 봉인됐다고? 그럼 이번 일은 뭐지? 분명 강력한 힘이 발산되어 살수들이 죄다 죽어 버리지 않았나?”
레노프는 힐켄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질문했다.
“그건 봉인된 힘이 아닙니다. 봉인되고도 남아 있던, 힘의 아주 미약한 부분이지요.”
힐켄은 레노프의 물음에 단호하게 확신하는 투로 대답한 뒤, 말을 이었다.
“남아 있는 기록으로 보면, 늑대족의 본래 힘은 세상을 뒤엎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하고 무시무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이 오랫동안 연구를 한 끝에 그 힘을 탈취할 방법을 찾아냈는데, 그 힘이 봉인되는 바람에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포기해야…….”
“잠깐.”
레노프는 힐켄의 말을 듣다 말고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힐켄이 계속 이야기를 이어 나가려다가 황급히 입을 닫았다.
“힘을 탈취할 방법을 찾았다고 했나?”
“예? 예에, 기록에는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저희 가문의 기록에 그 일부 내용이 남아 있기도 하고요.”
“…….”
톡. 톡.
레노프는 말없이 팔걸이를 두드렸다. 그의 푸른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데프레텐 공작은 제 외손자이자 주군인 레노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했다. 그는 기사단장을 향해 힐끗 시선을 던졌다.
그러자 기사단장이 굳은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더니 힐켄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손에 어느새 검집에서 빠져 나온 검이 들려 있었다.
“단장님, 왜 갑자기…….”
힐켄이 의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는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한 채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의 목 아래로 실선이 그어지는 듯싶더니 곧바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기사단장은 제 수하였던 자의 목숨을 단번에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다시 검을 검집에 넣고 레노프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데비안 가문의 모든 것을 샅샅이 뒤져서 늑대족과 관련된 것들을 내 앞에 가져오도록.”
“예, 전하!”
기사단장은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 모습을 보던 레노프가 조금 전까지 살아 있는 사람이었던 힐켄의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데비안 가문의 뒷마무리는 외조부께서 맡아 해 주셔야겠습니다. 깔끔하게, 문제 될 일 없이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전하.”
데프레텐 공작이 냉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대대로 왕실에 충성하던 한 가문이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고 멸문의 길로 접어들게 된 순간이었다.
* * *
“……훌쩍.”
“실로아, 나 정말 괜찮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울어.”
“아니에요, 황후마마. 그래서 우는 게 아니에요. 그냥 감기 기운이 있어서 자꾸 콧물이 나오는 것뿐이에요.”
누가 그 말을 믿을까. 로엘린은 실로아의 빨갛게 변한 눈과 코끝을 보다가 민망한 듯 미소를 지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저를 맞이하자마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던 실로아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니 말이다.
게다가 조금 전, 제 목욕 시중을 들면서도 계속 훌쩍거리기까지 했으니…….
“따뜻한 차 한 잔을 올릴까요?”
“응. 부탁할게.”
로엘린은 실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실로아가 훌쩍거리며 차를 준비하기 위해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실로아가 나간 문 쪽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침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니 변한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그리웠고, 가슴이 뭉클했다.
로엘린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과 손등을 가리지 않고 덕지덕지 바른 약 때문에 뭔가를 만질 수도 없는 상태였다.
하기야 발도 붕대로 꽁꽁 묶어 놓은 터라 바닥을 딛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이기는 하지만.
‘게다가 손 하나 까딱하지 말라고도 했고.’
그녀는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하고 난 뒤에야 침실에서 나간 케르겔을 떠올렸다.
“케르겔도 이제 씻고 쉬어야 할 텐데…….”
로엘린은 자신이 목욕을 하고 나와서 궁의에게 치료를 받는 내내 침실 안을 지키고 있었던 그를 생각하다가 미소를 지었다.
세로이프로 귀환하는 길 내내 그는 자신과 함께 마차를 타고 제 시중을 들었다. 자신과 루시가 기겁하여 그를 만류하기도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실로아한테는 미안하지만, 케르겔이 시중을 더 잘 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민망해져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눈에 콩깍지가 씌었어도 그렇지, 이건 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남의 시중을 처음 든 사람과 시녀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저 자신이 느끼기에 그랬다는 것뿐.
로엘린은 뺨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침실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로아가 차를 준비해서 다시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창밖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가지고 온 차는 테이블에 준비해 줘. 창가에서 마시고 싶어.”
“그러지.”
“……!”
로엘린은 예상치 못한 대답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케르겔이 편안한 옷차림으로 문 앞에 서서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실로아가 그 뒤쪽에서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케르겔.”
그녀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그를 쳐다보았다. 케르겔은 민망해하는 로엘린을 보며 나직하게 웃은 뒤, 침대로 다가와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창가 쪽에 있는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에 실로아가 테이블 위에 차를 준비하고, 재빨리 숄을 가져왔다. 로엘린의 어깨에 걸쳐 주기 위해서였다.
“어어…….”
그러나 실로아는 가져온 숄을 그저 두 손으로 쥐고만 있을 뿐, 로엘린에게 선뜻 건네지 못했다.
당연히 마주 보고 앉을 거라 생각했던 황제와 황후가 서로 마주 보고 앉은 게 아니라, 한 의자에 함께 앉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케르겔이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기는 하지만.
“케르겔! 내려 줘요! 어서요!”
로엘린은 케르겔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다가 실로아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케르겔은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고 태연히 입을 열었다.
“가만히 있어, 로엘린. 그러다가 상처라도 덧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러니까 빨리 내려 달라고요. 내 자리로 갈 거니까.”
“여기가 그대의 자리야. 설마 나를 버리고 가겠다고?”
“버리고 가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맞은편 자리에 가겠다고 한 것뿐인데, 그게 버리고 가려 한다는 말까지 들어야 할 일인가. 로엘린이 황당해서 입을 벙긋거렸다. 그 모습을 본 케르겔이 짓궂게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버리고 가는 거지. 내 품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거니까. 숄은 이리 다오.”
그는 능청스럽게 로엘린의 말에 대꾸하고는 한 손으로 그녀를 꼭 붙들어 안은 채 실로아에게 다른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실로아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뒤, 그에게 숄을 건넸다.
그는 곧바로 로엘린의 몸에 숄을 둘러 주었다. 그리고 다시 실로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됐으니 물러가도 좋다.”
“저기, 그렇지만 차는…….”
실로아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금 말을 꺼냈다. 그러자 케르겔이 로엘린의 어깨에 걸친 숄을 더 꼼꼼히 여미며 말을 이었다.
“황후의 차 시중은 내가 들 것이니.”
“……예?”
“뭐라고요?”
그의 말을 들은 실로아와 로엘린에게서 동시에 말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로엘린을 향해 말했다.
“왜 그래? 설마 내 시중이 마음에 안 들었어? 그래도 나름대로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마차 안에서…….”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요!”
이러다가 시녀 앞에서 황제 체면을 다 구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엘린은 다급히 그의 말을 막은 뒤, 실로아에게 나가도 된다는 말을 건넸다.
그러자 실로아가 눈을 굴리며 로엘린과 케르겔을 보더니 혼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러더니 로엘린이 다시 말을 꺼낼 새도 없이 그대로 침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맙소사.”
제 시녀의 머릿속에서 무슨 상상이 어떤 식으로 펼쳐진 것인지 확인하기도 무서웠다. 로엘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이내 입을 삐죽이며 케르겔의 가슴팍을 가볍게 때렸다.
“시녀 앞에서 이게 뭐예요. 황제로서의 위신이 다 떨어지겠어요.”
“내가 지금 황제로서 그대와 있는 게 아니잖아. 그대의 남편으로서 있는 거지.”
“그래도…….”
“게다가 겨우 이런 정도로 내 위신이 떨어지지는 않거든? 내가 그렇게 쉬워 보이나?”
“너무 쉬워 보이거든요.”
그녀는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가슴팍을 다시 한 번 때렸다. 하지만 케르겔은 아랑곳하지 않고 장난꾸러기처럼 키득거리며 웃더니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차를 따랐다.
향긋한 차 냄새가 금세 코끝에 전해졌다. 그는 찻잔을 들어 그녀의 입술 근처에 가져갔다.
“마셔.”
“내가 마실게요.”
로엘린은 찻잔을 받아 들려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케르겔이 냉큼 그녀의 손이 닿지 않을 만큼 찻잔을 멀찍이 들더니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그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로엘린이 허탈하게 웃더니 투덜거렸다.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어린애면 큰일 나지.”
그는 그녀의 입술에 다시금 찻잔을 가져가며 입을 열었다. 로엘린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대가 어린애면 이런 건 꿈도 꿀 수 없을 테니까.”
케르겔은 로엘린의 눈을 마주한 채 눈웃음을 짓더니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로엘린은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순간적으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곧바로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다시금 이어진 키스 때문이었다.
더 깊고, 더 농밀해진.
달그락.
로엘린은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를 들으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케르겔 역시 그녀를 품에 안고 있다가 더욱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들의 입맞춤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 바람에 침실 밖에서 루시조차도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거려야 했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