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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0. 음모 (13/18)

Chapter 10. 음모

“괜찮으신지요.”

선왕비가 머무르고 있는 내궁으로 향하던 길에 루시가 조심스럽게 로엘린에게 물었다. 로엘린은 그녀를 돌아보고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야, 루시. 괜찮아.”

“그럼 다행입니다만…….”

루시는 말끝을 흐렸다. 레노프와 단둘이 만난 것에 신경을 쓰는 듯했다. 로엘린은 고개를 저은 뒤, 루시가 묻지 못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정한 오라버니 흉내를 내려고 하기에, 그런 연극은 그만두라 했어.”

“……예?”

루시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뵌트 공작 역시 의외였는지 노인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로엘린은 그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러자 루시가 입을 벙긋거리다가 이내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께서 폐하를 닮아 가시나 봅니다. 이걸 기쁜 일이라 해야 할지…….”

루시가 뒤에 덧붙인 말은 장난이었다. 로엘린도 그것을 알기에 그저 웃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웃음기를 지우고 앞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내궁에 다다른 것이다.

“…….”

로엘린은 천천히 내궁의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내궁의 시녀들이 양 옆으로 줄지어 서 있다가 그녀가 다가가자 허리를 숙였다.

왕녀였던 시절, 단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예우였다.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선왕비, 카롤리나를 모시는 시녀장이 로엘린에게 다가와 공손히 예를 갖췄다. 로엘린은 그 인사를 받은 뒤,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마마마께서는?”

“……침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녀장은 로엘린을 깍듯하게 대하는 제 모습 자체가 어색한 듯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로엘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 시녀장에게 명했다.

“안내하게.”

그녀의 말에 시녀장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로엘린의 모습이 낯선 까닭이었다. 하지만 시녀장은 곧 눈을 내리깔고 로엘린을 안내했다.

로엘린이 시녀장의 안내를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처음 온 거로구나.’

그녀는 문득 깨달은 사실에 실소했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곳인데.’

모친이 있는 곳. 어린 로엘린이 늘 가고 싶어 했던 곳.

얼마나 부러웠던가.

에리타는 다양한 방식으로 로엘린을 괴롭히고는 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모친의 궁에 가서 얼마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지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꿈 같은 이야기였다.

저를 끔찍하다는 듯 보며 쫓아냈던 모친이 제 쌍둥이 언니에게는 그렇듯 다정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고는 했다.

제게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 모친의 궁이 에리타에게는 늘 열려 있다는 사실에 더욱 외로움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 바로 그곳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몸이 아파서, 마음이 변한 것일까.’

로엘린의 얼굴이 다소 창백해졌다. 모친이 위독하다던 말이 이제야 조금 실감난 것이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비틀거렸다. 그러자 로엘린의 뒤를 따르던 루시가 황급히 그녀를 부축했다.

“황후마마, 어디 편찮으신지요?”

“아니, 괜찮네. 그냥 잠시 어지러웠어.”

로엘린은 애써 미소를 지은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안내를 위해 앞서 걷던 내궁의 시녀장이 그 모습을 보고 다시금 발걸음을 재촉했다.

로엘린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손이 차갑게 식어 가는 게 느껴졌다.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라카인을 방문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정대로 이곳에 오기까지 했으면서도 정작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머리로는 인식했으나 그것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해야 할까.

‘……케르겔.’

지금 그가 제 곁에 있다면 자신의 손을 꽉 잡아 주었을 것이다. 로엘린은 괜히 죄 없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가 놓았다.

“황후마마만 들어가시지요. 세로이프에서 오신 두 분은 일단 숙소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침실 앞에 도착한 시녀장이 로엘린을 향해 입을 열더니 그녀의 뒤편에 있던 루시와 뵌트 공작에게 말을 건넸다.

“아, 그렇게 하는 편이 좋겠네. 뵌트 공작, 이만 가서 쉬도록 해요. 루시도 긴 여정에 힘들었을 텐데.”

로엘린은 시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루시와 뵌트 공작에게 말했다. 그러자 루시가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잠시 머뭇거렸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수긍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뵌트 공작이 루시를 대신하여 입을 열었다. 로엘린은 재차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녀장을 쳐다보았다.

“안에 고하게.”

“예, 황후마마.”

시녀장은 로엘린의 자연스러운 명에 또다시 어색한 표정을 짓고는 침실 안에 대고 로엘린의 방문을 알렸다.

“들어가시지요.”

침실 안에서 허락의 말이 들리자 시녀장이 문을 열고 한쪽으로 비켜섰다. 로엘린은 침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조금 전, 레노프의 집무실에 들어갔던 것처럼.

하지만 모친의 침실에 발을 들여놓는 건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레노프의 집무실은 처음이 아니었지만, 모친의 침실에 들어온 건 처음이기 때문일까.

침실 안에 들어간 로엘린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

로엘린을 제일 먼저 맞이한 건 짙은 향기였다. 모친에게서 나던 향수 냄새였다.

그러나 병자가 있는 침실에서 날 법한 향기는 아니었다. 로엘린은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한 걸음 더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녀는 그다음 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멈춰 서고 말았다.

텅 빈 침대 때문이었다.

……그리고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모친, 카롤리나의 모습 때문이었다.

“이게…… 어떤 상황인 거죠?”

로엘린의 목소리가 굳은 채 흘러나왔다. 그러자 소파에 앉아 있던 카롤리나가 느릿하면서도 우아하게 자리에서 일어서서 그녀를 돌아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어떤 상황이기는……. 어미가 딸을 보고 싶어 부른 것이지. 그래서 온 것 아니니?”

“…….”

로엘린은 굳은 표정으로 모친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침실을 나가려는 순간, 카롤리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는 어미가 위독하다는데, 괜찮은지 묻지도 않는 거니? 서운하구나.”

“글쎄요.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어마마마께서는 지금 너무나 건강해 보이시는걸요.”

로엘린이 다시 멈춰 서서 카롤리나를 돌아보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모친의 모습은 너무나 좋아 보였다. 혈색도 좋고 생기도 넘쳤다. 그런 모친이 위독하다니,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

“도대체 왜 이런 거짓말로 저를 불러들이신 건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어쨌든 건강하신 모습을 뵙게 되어 다행이에요. 그럼 저는 이만…….”

“로엘린.”

바로 그때, 카롤리나의 입에서 로엘린의 이름이 나왔다. 로엘린은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하며 떨었다. 제 의지와 무관하게 몸이 반응한 것이다.

처음으로 어미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 때문에.

그 반응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카롤리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카롤리나는 로엘린에게 다가와 그녀를 다정히 잡아끌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급히 가야 하는 건 아니잖니? 오랜만에 봤는데 이리 와서 차도 한 잔 마시고, 대화도 나누고 그러자. 어미가 오죽했으면 위독하단 거짓말까지 해서 너를 불러들였겠어?”

로엘린은 저를 잡아끄는 카롤리나의 손을 보았다. 곱게 정돈된 손톱, 그리고 손가락마다 끼워져 있는 큼직한 반지들. 분명 아름답게 꾸민 손인데, 어쩐지 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친의 손에 대고 할 비유로는 적합하지 않을 테지만.’

그녀는 카롤리나의 손길을 피해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카롤리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카롤리나가 테이블 위에 있던 종을 흔들었다.

카롤리나의 종소리에 맞추어 시녀들이 곧바로 들어와 차와 디저트를 준비했다. 로엘린이 테이블 위에 차려진 것들을 무심한 눈으로 보고 있는데, 카롤리나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그나저나 네 얼굴이 참 많이 좋아졌구나. 여기에 있을 때는 비쩍 말라서 늘 아픈 병자 같더니. 세로이프가 너한테는 잘 맞는가 보구나? 음식이든 사내든, 뭐든지 말이야.”

“…….”

카롤리나의 말에 로엘린이 시선을 들었다. 모친의 녹색 눈이 흥미를 담은 채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는 운이 참 좋아.”

“…….”

“불길한 쌍둥이로 태어났으니 본래대로라면 태어나자마자 버려져 그대로 숨이 끊겼어야 할 텐데. 너는 고귀한 핏줄 덕분에 살아남았지 않니? 그것만 봐도 운이 좋지.”

카롤리나는 찻잔을 들며 로엘린에게도 차를 마시라는 눈짓을 했다. 로엘린은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찻잎을 우려내기 때문에 보통 녹색 빛을 띠기 마련인데, 시녀가 따라 준 차는 불그스름한 빛을 띠고 있어 그 색깔이 특이했다.

“어서 들어 보렴. 차향도 독특하고 맛도 괜찮은 편이야.”

로엘린이 차를 마시지 않고 그저 보고만 있자 카롤리나가 재촉하듯 권했다. 로엘린은 모친의 권유에 어쩔 수 없이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녀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향이 너무 강해 제 취향은 아니었다.

딱 모친의 취향이라고 해야 할까.

“게다가 괴물이라 소문이 났던 황제는 훤칠하게 잘생겼다니. 정말이지, 운이 이렇게까지 좋을 수 있는 건가 싶더구나. 너도 알다시피 황제의 청혼을 받은 건 에리타였잖니?”

정확히 말하자면 제 존재가 외부로 드러나지 않았기에, 세로이프에서는 에리타에게 청혼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로엘린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찻잔을 쥔 채 침묵했다. 그러자 카롤리나가 로엘린을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저번 일은 네가 이해하도록 하렴. 에리타로서는 억울했을 거야. 제 남편이 될 사내를 너에게 빼앗긴 셈이니까.”

하여간 본인들 편할 대로 생각하는 건 에리타나 모친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괴물 황제’와의 결혼을 하기 싫어서 제게 떠넘겼던 것이면서 말이다.

“참, 그런데 생일은 어떻게 보낼 예정이니? 황제가 선물은 어떤 걸 준다고 미리 언질을 줬어? 제국의 황후가 되어 맞이하는 첫 생일인데 그에 어울리는 선물을 받아야 하지 않겠어?”

“……?”

카롤리나가 새롭게 꺼낸 화제에 로엘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카롤리나가 어머, 하고 짧게 소리를 내더니 말을 이었다.

“설마 네 생일을 잊고 있었니? 이틀 뒤가 생일이잖니. 에리타와 네 생일 말이야.”

“……아아.”

로엘린의 입에서 무의미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생일이라…….

제게도 생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단 한 번도 생일을 기념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그 느낌이 낯설고 생소했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만 되면 부쩍 소란스러웠지.’

에리타의 생일을 준비한답시고 왕궁 전체가 떠들썩해지고는 했던 게 기억났다. 하다못해 별궁까지도 그 분위기가 전달되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생일을 전후로 대대적으로 불꽃놀이가 벌어지기도 하고, 온갖 선물들의 행렬이 왕궁을 누비고 다니기도 했었다.

‘……응? 그런데 이틀 뒤가 생일인데 왜 이렇게 왕궁의 분위기가 조용한 거지?’

에리타의 생일 때는 아무리 짧아도 대략 한 달 전부터 왕궁이 들썩였는데…….

로엘린이 의문을 품은 것과 동시에 카롤리나가 한탄하듯 입을 열었다.

“네가 생일을 잊고 있었던 걸 보면 세로이프에서 딱히 뭔가 생일을 준비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럼 대체 상인들이 어디로 다들 가 버린 건지…….”

“……?”

로엘린은 카롤리나의 말을 듣다가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카롤리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시금 말했다.

“에리타의 선물 때문에 상인들을 전부 불러들였는데, 단 한 명도 오지 않더구나. 아니, 아예 어디로 갔는지 싹 자취를 감췄지 뭐니.”

“상인들이 자취를 감췄다고요?”

“그래. 라카인의 상인들뿐만 아니라 프졸란, 카이제넨에서 활동하는 상인들까지 전부. 세로이프 쪽은 워낙 교류가 잦지 않았던 터라 연락을 취하지 못했지만 거기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더구나. 대체 어디로 다 사라진 건지……. 게다가 연락이 닿은 상인들 또한 지금 당장 취급하는 귀한 물품이 없다고 하니, 에리타의 선물을 준비할 수가 있어야지.”

카롤리나가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그 일 때문에 골치가 아픈 건지 그녀가 관자놀이 부근을 손으로 누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로엘린은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다시 찻잔을 들었다. 입맛에 맞는 건 아니지만, 딱히 나누고 싶은 대화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차라도 마셔야겠단 생각에서였다.

로엘린이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찻잔을 내려놓으려는데, 카롤리나가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눈을 빛냈다.

하지만 로엘린은 찻잔을 내려놓느라 모친의 그런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시선을 들었을 때, 카롤리나가 다시 한 번 종을 흔들어 시녀장을 불렀다.

“이 아이에게 주려고 준비한 것 있지? 그걸 가지고 오도록 하게.”

“예, 선왕비마마.”

시녀장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사각 함을 들고 다가왔다.

“네 생일도 다가오고, 그래서 너를 위해 준비했단다. 더 좋은 것을 해 주고 싶었지만 방금 얘기했다시피 상인들을 부르는 게 쉽지 않아서 말이야. 한번 열어보렴.”

“……저를 위해 준비했다고요?”

로엘린은 시녀장이 제 앞에 내려놓은 사각 함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들어 카롤리나를 응시했다. 그러자 카롤리나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 어미가 딸을 위해 선물을 준비한 게 뭐, 그렇게 놀랄 일이니?”

놀랄 일이다. 적어도 자신과 모친 사이에 있어서는, 크게 놀랄 만한 일이었다.

모친이 저를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고 혐오해 왔는지 잘 알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태도를 바꾸니 황당할 따름이었다.

레노프도 그렇고…….

‘다들 무슨 꿍꿍이인 건지.’

아무 이유 없이 저를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독하다는 거짓말까지 하며 저를 부른 이유가 분명 있을 텐데.

로엘린은 답답함을 느꼈다. 도무지 저들의 속내를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카롤리나가 어서 함을 열어 보라며 거듭 재촉했다.

그녀는 답답한 속을 풀 새도 없이 눈앞에 놓인 사각 함을 열었다.

“어떠니? 네 눈동자를 닮은 푸른색 보석이 박힌 목걸이인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보자마자 거부감이 일었다.

푸른색 보석을 본 순간, 조금 전 독대했던 레노프의 푸른 눈동자가 그 위에 겹쳐졌다.

차디찬 눈동자.

그 속을 알 수 없는 푸른 시선.

목걸이에 박혀 있는 보석 역시 그랬다. 차갑고 투명하지만 그 속이 어쩐지 보이지 않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어때? 마음에 들어?”

“……글쎄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빈말이라 해도 마음에 든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카롤리나가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히더니 다시금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선물을 받았으면 그 자리에서 착용을 해 보는 게 예의가 아니겠니? 한번 걸어 보려무나. 응?”

로엘린은 모친의 또 다른 재촉에 한숨이 나오려는 걸 삼켰다. 도대체 마음에도 없는 짓을 왜 하고 있는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런다고 해서 자신과 모친의 사이가 갑자기 정상적인 모녀 사이로 회복될 리 없다는 걸 잘 알 텐데 말이다.

그녀는 거짓으로 꾸며진 지금 이 자리가 피곤했다. 그래서 적당히 카롤리나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자리를 뜨기로 마음먹었다.

로엘린은 사각 함 안에서 목걸이를 꺼내 목에 걸었다. 차가운 목걸이 체인과 그보다 더 차가운 펜던트가 살갗에 닿자 소름이 돋았다.

“어머, 역시 네 눈과 비슷한 색이라 그런지 잘 어울리는구나. 계속 하고 있는 게 좋겠다. 그래 주겠니?”

“……그러죠.”

라카인 안에서는 당신의 뜻에 맞춰 드릴게요. 대체 뭘 위해 이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로엘린은 뒷말을 삼킨 뒤, 손을 들어 제 목 언저리를 쓸어내렸다. 목걸이가 특별히 무겁거나 조이지 않는데, 왜 그런지 목이 꽉 졸리는 기분이 들었다.

* * *

“어마마마!”

에리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응접실 안으로 쳐들어왔다. 카롤리나가 레노프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에리타, 대체 이게 무슨 경박한 행동이니? 더구나 네 오라비, 이 나라의 국왕께서 보는 앞이거늘!”

“어마마마께서 그 계집애한테 선물을 주셨다는 게 사실이에요? 아주 의기양양하게 목걸이를 걸고 나갔다던데, 그 말이 진짜예요?”

에리타는 모친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분을 참지 못해 씩씩거리며 따지듯이 물었다.

그제야 제 딸이 왜 이렇게 급히 쳐들어왔는지 알게 된 카롤리나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다가 피식 웃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리타가 부들부들 떨며 크게 외쳤다.

“어마마마!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제 생일 선물은 지금 준비도 안 되었으면서…….”

에리타는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울먹였다.

“로엘린, 그 계집애가 뭐 대단하다고. 대체 걔는 왜 부르신 건데요!”

로엘린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가 막혔던가. 에리타는 지금 다시 생각해도 모친과 레노프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 영악한 계집애에게 제 남자를 빼앗긴 것만으로도 억울한데, 그 계집애를 왜 이곳에 부르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로도 부족해서 목걸이까지 선물을 하다니.

눈물이 고였던 눈에 독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레노프가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에리타가 시선을 돌려 제 오라비를 쳐다보았다.

“하하하! 에리타, 이 어리석은 녀석아. 지금 뭘 질투하고 샘을 부리는 것이냐.”

“어리석다니요! 제가 뭐, 틀린 말을 했나요?”

에리타는 레노프의 웃음기 섞인 말에 발끈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레노프가 재차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녀를 향해 손짓을 했다. 가까이 다가오라는 의미였다. 에리타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씩씩거리면서도 레노프의 명을 거역하지 못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부러워할 것 없다, 에리타. 그 아이에게 걸어 준 목걸이는, 바로 그 아이의 목숨을 거두어 갈 죽음의 사자나 다르지 않으니 말이야.”

“……예? 죽음의, 사자요?”

에리타가 레노프의 말에 푸른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레노프는 그런 동생이 귀엽다는 듯 그녀의 볼을 손등으로 쓰다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죽음의 사자. ……차를 마신 게 확실하지요, 어마마마?”

“물론입니다. 차를 전부 마신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절반 정도는 마신 것을 내 눈으로 확인했지요.”

카롤리나가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노프는 흡족한 미소를 지은 뒤, 턱을 매만졌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에리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걸이가 죽음의 사자라 했다.

그리고 차를 마신 걸 확인했고.

“설마 그 계집애가 마신 차에 독이라도 들어 있었던 거예요? 그럼 목걸이는 뭔데요? 거기에도 독 같은 게 발라져 있는 거예요?”

에리타는 나름대로 추측해 보고는 잔뜩 흥분하여 질문했다. 카롤리나가 레노프와 눈빛을 주고받은 뒤, 에리타에게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해 주었다.

“네 말은 반만 옳고, 반은 틀렸어.”

“……?”

“그 애가 마신 차에 든 것은 독이 아니거든. 목걸이에 가공 처리 된 성분 역시 독이 아니고. 각각 따로 보면 결코 독이라 할 수 없는, 평범한 물질일 뿐이지.”

카롤리나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번졌다.

“다만 그 두 가지가 합쳐질 경우, 독이 된단다.”

“그, 그럼…… 그 계집애가 죽는 건가요?”

“왕실의 수치를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법이지.”

에리타의 물음에 레노프가 나른한 투로 대꾸했다. 그러자 에리타의 얼굴에 금세 희열의 빛이 번져 나갔다.

하지만 에리타는 곧 뭔가를 떠올리고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런데 그렇게 될 경우에 우리가 곤란해지는 거 아니에요? 여기서 그 계집애가 죽어 버리면 누가 봐도 우리 쪽에서 저지른 짓이라고 생각할 텐데요.”

“용케 그 부분까지 생각을 했구나.”

레노프가 기특하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그 독은 꽤 여러 날이 지나고 나서야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거든. 아마 라카인을 떠나 세로이프로 가는 길에 발작을 일으키게 되겠지.”

총 세 번의 발작이 일어나고 나면, 더 이상 손을 쓸 방법이 없다고 들었다. 아무리 뛰어난 의원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첫 번째 발작이 일어나고 두 번째 발작까지 하루의 시간. 그리고 두 번째 발작에서 세 번째 발작까지 반나절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과연 그 시간 안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계산대로라면 로엘린은 라카인의 국경을 넘어 험준한 사말타 산맥에 접어들 무렵, 첫 번째 발작을 일으킬 테니까.

그렇게 되면 세 번째 발작까지 겨우 하루, 그리고 반나절의 시간이 남을 뿐이다. 채 이틀이 되지 않는 시간인 것이다.

고작 그 시간으로는 산맥을 벗어나지도 못한다. 그러니 그 건방진 계집애에게 남은 건 그저 험준한 산 속에서 피를 토하고 배 속의 내장이 모두 녹아내리는 고통에 몸부림을 치다가 죽는 일뿐이리라.

“그래도 만약 운 좋게 해독을 하면요? 그래서 살아나면 우리가 불리해지는 거 아니에요?”

에리타가 또다시 다른 가정을 세웠다. 평소에는 화려한 옷과 보석 같은 것에만 관심을 두더니, 제 쌍둥이 동생을 처리하는 일에는 비상한 관심을 보이는 게 한편으로는 우스웠다.

레노프는 작게 웃은 뒤, 그녀의 물음에 대한 답을 돌려주었다.

“그래서 완벽을 기하기 위해 살수를 보낼 계획이지.”

“아아…….”

에리타의 입가에 웃음이 실렸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그제야 안심이 됐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달아날 곳도, 피할 곳도 없겠군요.”

독에 중독되어 죽든지, 아니면 살수에 의해 죽든지. 어쨌든 결론은 하나일 뿐이니 말이다.

“진작 그렇게 해야 했어. 괜히 ‘그것’을 살려 두어 왕실의 치부가 되었으니…….”

카롤리나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드디어 제 완벽한 삶 속에 끼어들었던 오물을 제거할 수 있게 됐다.

그녀는 자신이 낳은 딸의 죽음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그 죽음을 자신과 자신의 아들이 꾀하였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카롤리나의 눈에 레노프와 에리타가 들어왔다. 제 아들과 딸이었다. 제 자식은 오로지 이 두 사람이 전부였다.

‘그따위 불길한 존재는 절대 내 자식이 아니야.’

카롤리나는 단 한 번도 로엘린을 자신의 딸로 인정한 적 없었다. 딸은커녕 사람으로도 취급하지 않았다.

섭리에 어긋나는 존재.

하나의 탄생. 하나의 영혼.

그런데 몸이 둘이었으니 이것은 결코 올바른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카롤리나는 바로 그 일이 본인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오만하고 도도한 그녀로서는 그런 결점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없애지 못한 게 얼마나 통탄할 일이었던가.

‘이제야 내 한을 풀게 됐어.’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 애가 살아나서는 안 돼요.”

“염려 마십시오, 어마마마. 설령 황제가 온다 해도 이제는 상황을 되돌릴 수 없을 테니.”

레노프는 카롤리나의 당부에 비릿하게 웃었다. ‘괴물 황제’를 떼어 놓고 만반의 준비를 갖췄으니 실패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그렇게 확신하며 눈을 휘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 * *

“괜히 나 때문에 다들 고생만 했어.”

로엘린이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루시가 그녀의 머리를 매만지다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생이랄 것도 없습니다. 외려 다들 그 덕분에 바깥나들이를 한 셈이지요.”

“바깥나들이라니. 그렇듯 편안한 여정은 아니었잖아.”

제국 내에서 움직인 것도 아니고, 타국까지 온 길이었다. 더구나 험준하기 짝이 없는 사말타 산맥까지 지나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황후를 안전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를 수행해야 했기에 그들이 느꼈을 피로는 꽤 혹독했을 것이다.

로엘린은 잠시 가만히 생각하다가 루시에게 물었다.

“나중에 별도로 감사 표시를 하고 싶은데.”

“감사 표시라니요?”

“그냥 간단하게 선물 같은 걸 줬으면 해서. 훈련을 마치고 먹을 수 있는 간식이라든가…… 뭐, 그런 거.”

그 이상 다른 뭔가를 하는 건 월권이니 그냥 소박하게 선물을 하는 게 나을 것이리라. 로엘린은 그렇게 생각하며 루시의 의향을 물었다.

“괜찮을까? 음, 이왕이면 이번에 케르겔과 함께 토벌을 떠났던 기사단과 병사들에게도 선물을 하고.”

로엘린의 말에 루시가 눈을 크게 뜨더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로엘린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혹시 돈이 부족한 건가? 그럼 앞으로 배정될 예산을 미리 받아서 사용할 수는 없는 건지 한번 물어봤으면 하는데…….”

이번에 피해를 본 마을의 복구 작업과 생존자들의 치료비로 황후궁의 예산을 상당 부분 사용했다. 로엘린은 그 점을 상기하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돈도 없으면서 또 다른 일을 벌이는 저를 보고 황당해서 루시가 아무 말도 못 하는 건가 싶어서였다.

그 순간 루시가 푸훗,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예산을 미리 받으시겠다니요. 황궁의 사용인들 중 일부가 봉급을 미리 가지급받는 경우는 들어 봤어도…….”

“아니, 나는 그냥 돈을 다 써서 없는 건 아닌가 싶어서.”

로엘린이 루시의 웃음에 더욱 민망해져서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러자 루시가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황후궁에 배정된 예산의 삼분의 일도 쓰지 않았습니다.”

“……응?”

“아직 절반도 훨씬 넘게 남았답니다, 황후마마.”

루시는 귀여운 어린아이를 보듯 눈을 휘며 재차 웃었다.

“그러니 안심하고 쓰셔도 됩니다. 게다가 해가 바뀌면 다시 예산이 배정될 텐데, 아마도 내년에는 이보다 더 많이 배정되지 않을까요?”

로엘린에게 푹 빠져 있는 케르겔을 보아하니 그럴 가능성이 상당히 컸다. 루시는 제 말에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리는 로엘린을 보며 웃었다.

하여간 사랑스러운 분이다. 본인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니, 설령 그것을 안다고 해도 지금 이 모습이 변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참으로 다행이지. 폐하의 반려가 그 왕녀가 아니라서.’

루시는 로엘린과 쌍둥이인 라카인의 왕녀를 떠올렸다. 만약 그 왕녀가 황후가 되었더라면, 모두가 속아서 그녀를 황후로 모시게 되었더라면…….

‘어휴, 상상하기도 끔찍하네.’

루시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흔들며 로엘린의 머리 단장을 끝냈다. 곱게 빗어 내린 머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내렸다.

사치를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 때문에 보석 같은 것으로 꾸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리본과 꽃으로 단장한 로엘린의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그러고 보니 황후마마의 성격에 그 많은 선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려나.’

제국 내에서 활동하는 거상들뿐만 아니라 대륙의 웬만한 상인들은 싹 다 불러모았다. 그리고 귀하다는 것들은 모조리 쓸어 담다시피 했다.

그때만 해도 저 역시 덩달아 신나서 케르겔에게 동조했었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걱정이 되었다.

‘아니. 지금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지. 생일을 황궁이 아닌, 밖에서 보내실 상황인데. 어쩌면 사말타 산맥 안에서 보내실 수도 있고.’

루시는 하루 앞으로 다가온 로엘린의 생일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로엘린이 라카인에 간다고 결정했을 때, 실로아가 루시를 붙들고 속상해했던 게 이해됐다. 당시 실로아를 다독이느라 내색하지 않았지만, 루시도 속상했던 건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세로이프에 오셔서 처음으로 맞이하시는 생신인데.’

더 정확하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생일이 될 뻔했다고 해야 할 터였다.

루시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로엘린의 드레스를 매만졌다. 길을 떠나기 위해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터라 매만질 부분이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루시의 손길은 더없이 꼼꼼했다.

“고마워, 루시.”

로엘린은 루시에게 고맙단 인사를 한 뒤, 방을 나섰다. 그들이 머물렀던 외궁 밖에 이미 뵌트 공작을 위시하여 그녀를 수행한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후마마.”

로엘린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뵌트 공작이 한 걸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로엘린은 백발의 노귀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출발할 준비는 모두 마친 건가요?”

“그렇습니다. 마차에 오르시기만 하면 됩니다.”

“고마워요, 공작. 덕분에 무사히 다녀갈 수 있게 됐네요.”

“아닙니다, 황후마마. 오히려 황후마마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뵌트 공작의 입가에 자애로운 미소가 번졌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실, 황후는 손녀와 비슷한 또래였다.

하지만 고집불통에 하루에도 몇 번씩 사고를 치고 다니는 말괄량이 소녀와 달리, 황후는 ‘모신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얌전하고 차분했다.

세로이프에서 라카인까지 오는 길이 여인의 약한 체력으로는 무리였을 텐데도 불구하고 힘들다는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되레 그녀를 수행하기 위해 온 기사들과 사용인들이 힘들지는 않은지 세심히 살피기까지 했다.

‘하기야 그러니 폐하의 반려가 되신 거겠지.’

뵌트 공작은 로엘린을 에스코트하여 마차까지 정중히 안내했다. 그리고 로엘린이 마차에 탄 뒤, 그는 출발을 명했다.

라카인 왕실 쪽에서 배웅을 나온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마치 모든 볼일을 다 마쳤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어쨌든 라카인을 떠나는 마당이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터였다.

“……으음.”

로엘린은 마차가 움직인 지 얼마 되지 않아 목 아래쪽을 손으로 문지르며 작게 소리를 냈다. 그러자 루시가 곧바로 그녀의 이상을 알아차리고 황급히 물었다.

“왜 그러시는지요, 황후마마? 어디 편찮으신가요?”

“그냥 조금 속이 쓰린 것 같았는데…… 별것 아니야. 이제 다시 괜찮아졌어.”

로엘린은 손사래를 치며 루시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루시는 표정을 풀지 못했다. 그녀는 그런 루시를 거듭 달랜 끝에 간신히 진정시킨 뒤, 마차 밖을 내다보며 다시금 목 아래쪽을 매만졌다.

‘지금은 괜찮은데. 조금 전에는 왜 그렇게 뜨거웠던 걸까.’

루시에게는 쓰린 것 같았다고만 표현했지만, 실제로 로엘린이 느낀 감각은 뜨거움이라 할 수 있었다. 마치 목구멍 안쪽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말이다.

아마도 착각이었을 터.

그녀는 곧바로 사라진 감각을 되새겨 보려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속이 쓰린 것을 그렇듯 다른 통증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살짝 체하기라도 했던 건가 보지.’

로엘린은 그렇게 제 상태를 납득한 뒤, 재차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라카인의 풍경이 휙휙 스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에리타를 대신해 케르겔의 신부가 되기 위하여 라카인을 떠났던 날처럼.

‘두 번 다시 돌아올 일 없으리라 생각하며 떠났었는데.’

이렇게 다시 오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햇빛이 들어오네요. 커튼을 칠까요, 황후마마?”

“그렇게 해 줘, 루시.”

로엘린은 마차 밖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둔 뒤, 루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러자 루시가 팔을 뻗어 커튼을 쳤다.

작은 창이 커튼으로 가려지면서 햇빛이 차단됐다. 로엘린은 푹신한 등받이에 기댄 채 무심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다시 올 일 없겠지.”

아니,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그때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오게 되었는데.

그녀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정말이지,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은 게 그녀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

바로 그때, 로엘린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짧게 소리를 냈다. 루시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로엘린은 루시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

“그 목걸이…….”

“이제 더 이상 걸고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녀는 모친이 제게 선물한 목걸이를 풀어 옆에 내려놓았다.

‘이 목걸이 때문이었나?’

어쩐지 목걸이를 풀고 나니 몸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로엘린은 조금 전에 느꼈던 통증이 목걸이 때문이었나, 하고 생각하다가 그런 제 생각이 너무 엉뚱해서 실소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목걸이랑 몸 상태가 무슨 관련이 있다고…….

바로 그 순간, 로엘린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녀가 황급히 몸을 앞으로 숙였다.

“우욱!”

“화, 황후마마! 이, 이게 무슨……. 어서 마차를 세우시게! 어서! 황후마마께서 토혈을 하셨네!”

루시가 새파랗게 질려 마차 벽을 두드리며 외쳤다. 그녀의 손이 방금 로엘린이 토한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헉, 헉, 폐, 폐하…….”

“따라오기 힘들면 그쯤에서 포기하게.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헉헉거리면서 뭘 그렇게 따라오는 건가?”

케르겔은 말의 고삐를 잡아당겨 멈춰 세운 뒤, 길로프를 타박했다. 그러자 길로프가 악착같이 그를 따라오다가 멈춰 서더니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폐하께서, 후우, 수행원 하나 없이 라카인으로 가시게, 헉, 헉, 내버려 둘 수는 없습…… 흐어.”

저러다가 숨 끊어지겠네. 케르겔은 못마땅한 눈으로 길로프를 쳐다보다가 제 말의 목덜미를 문질러 주었다. 계속 달리고 또 달렸던 탓에 말의 체온이 한껏 올라가서 손바닥에 뜨끈뜨끈할 정도였다.

‘하긴 이 녀석들도 잠시 쉬기는 해야겠군. 특히 저 녀석은 더 그렇고.’

케르겔이 말의 목덜미를 문지르다가 툭툭 두드린 뒤, 시선을 돌려 길로프가 탄 말을 쳐다보았다. 주인을 닮아서인지, 길로프의 말도 거의 거품을 물며 실신할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명마에 속한 놈이니 적당히 휴식을 취하면 금세 회복하기는 할 테지만.

……문제는 말보다 사람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케르겔은 여전히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길로프를 쳐다보다가 혀를 찼다.

“기사단장이라는 사람이 고작 이 정도에 힘들어하다니 실망이야.”

“고작 이 정도라니요! 보통 일주일 정도 걸리는 거리를 이틀 만에 왔는데, 그래도 저 정도 되니까 폐하를 따라올 수 있었던 겁니다. 다른 녀석들이라면 애당초 쫓아오지도 못했죠.”

길로프가 간신히 호흡을 고르고는 케르겔의 말에 발끈해서 반박했다. 하지만 케르겔은 코웃음을 치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다, 이건가? 어쨌든 말하는 걸 보니 아직 살 만한가 본데, 그럼 다시 출발하도록 하지.”

케르겔은 길로프의 말을 듣다가 피식 웃은 뒤, 다시 출발할 준비를 했다. 그러자 길로프가 언제 발끈했던가 싶게 사색이 되어 그를 향해 말했다.

“대체 이렇게 급히 가셔야 할 이유가 있는 겁니까? 폐하께서 굳이 가지 않으셔도 황후마마께서는 무사히 돌아오실 텐데요. 홀로 가신 것도 아니고…….”

“알아. 더구나 뵌트 공작이 함께 갔다고 하니 무사히 돌아오겠지.”

이제는 나이 들어 모든 직책을 그만두고 은퇴하기는 했지만, 뵌트 공작은 여전히 그 용맹스러움으로 제국 내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자였다.

게다가 깐깐하다 싶을 만큼 올곧고 충직한 성품마저 갖추고 있으니 그를 믿고 마음을 놓아도 될 터였다.

“하지만 내가 직접 황후의 곁에 있어 줘야 마음이 놓인다는 말이지.”

케르겔은 조금 멋쩍은 웃음과 함께 제 속내를 털어놓았다. 자신을 따라와 준 기사단장에게 이 정도 얘기는 해 줘야 할 것 같아서였다. 물론 그 말을 하고 나서 바로 민망함에 후회가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길로프는 제 주군의 목이 붉게 물들어 있는 걸 쳐다보다가 씩 웃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서 가시죠. 죽어라 힘을 내서라도 따라붙을 테니 저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흐음, 내가 작정하고 가면 자네는 죽어라 힘을 내도 힘들 텐데?”

케르겔이 멋쩍은 마음을 감출 겸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아무리 그래도 제가 황실 기사단장인데……. 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는 하군요.”

길로프는 케르겔의 농담에 반박하려다가 이내 끄응, 소리를 내며 시무룩한 투로 중얼거렸다.

케르겔은 그런 길로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뒤, 말의 옆구리를 가볍게 찼다. 그러자 말이 히이잉, 하고 울더니 다시금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길로프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금세 두 사람의 거리는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뭐, 알아서 따라오겠지. 명색이 세로이프 황실의 기사단장인데.’

케르겔은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 속도를 올렸다. 그의 말 역시 지친 기색 없이 주인의 뜻에 따라 더욱 빠르게 달려 나갔다.

험준한 산길이었다. 말을 타고 이동하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좁기도 하고 곳곳에 가파른 낭떠러지도 있어서 자칫 위태로운 지경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케르겔은 조금 전을 제외하고는 단 한 순간도 속도를 늦추거나 멈춰 선 적이 없었다.

길로프의 말대로 급히 가야 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로엘린.’

지금껏 홀로 너무나 외롭게 살아온 그 여자를 더 이상 혼자 놔두고 싶지 않다.

더구나 좋은 기억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라카인에 그녀가 갔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그래서 마음이 자꾸만 조급해지는 걸까.

바로 그때였다.

“……!”

케르겔이 순간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그와 동시에 고삐를 쥐고 있던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꽉 움켜잡았다.

가슴 왼편, 심장 근처에 자리한 봉인이 크게 진동했다. 그리고 마치 누군가 봉인을 부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극심한 통증이 그 뒤를 따랐다.

“폐하!”

고삐를 놓친 케르겔의 몸이 균형을 잃고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뒤에서 따라오던 길로프가 경악하여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으윽…….”

케르겔은 어깨의 통증을 무시하며 몸을 일으켰다. 길로프가 급히 말에서 내려 달려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그는 길로프가 부축하려는 걸 거절한 뒤,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다시 자신의 가슴 왼편을 손으로 눌렀다. 그 모습을 본 길로프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봉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입니까?”

“글쎄.”

케르겔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자신의 옷을 잡아 찢었다. 일일이 단추를 풀고 옷을 벗을 만큼 여유롭지 않아서였다.

그는 찢어진 상의 사이로 드러난 가슴팍의 봉인을 확인했다. 붉은색을 띤 봉인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봉인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군.”

“그런데 왜 그러신 겁니까? 방금 전에…….”

길로프 역시 자신의 눈으로 별문제가 없음을 확인했기에 한결 편해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케르겔은 그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을 향해 다가갔다. 케르겔의 말이 그가 다가오자 냉큼 제 머리를 들이밀었다. 뜻하지 않게 주인을 떨어뜨린 점에 대한 사죄를 하는 것인지 애교를 부린 것이다.

“됐다. 내가 떨어진 거지, 네가 떨어뜨렸느냐. 애교도 부린 적 없던 녀석이 이러니까 소름 돋는다.”

케르겔은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곧 굳었다.

길로프에게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말했지만,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물론 근거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입 밖으로 경솔하게 내뱉지도 않은 것이다.

‘……로엘린.’

어째서일까. 조금 전 느꼈던 통증이 그녀와 관련되어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봉인이 깨질 경우, 그로 인한 파국을 막을 수 있는 이는 오로지 ‘반려’뿐.

그런데…… 만약 그 ‘반려’에게 뭔가 일이 생겼다면?

“다시 출발하겠다.”

케르겔은 어금니를 악물고 다시 말에 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말을 몰았다.

땅에 떨어지면서 어깨를 심하게 부딪친 것인지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일었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로엘린, 제 반려가 무사한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그는 한 손으로 고삐를 쥔 채 다른 손으로 한 번 더 가슴 위의 봉인을 꽉 눌렀다.

* * *

“황후마마께서는 어떠신가? 갑자기 왜 피를 토하신 것인가?”

뵌트 공작은 로엘린의 상태를 살피고는 마차에서 내린 궁의를 붙들고 다급히 물었다. 그러자 궁의가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내쉰 뒤,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독……. 독에 중독되신 듯합니다.”

“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뵌트 공작은 궁의의 말을 듣자마자 경악하여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궁의가 식은땀으로 젖은 이마를 눌러 닦은 뒤,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분명히 중독 증세입니다. 정확히 어떤 독에 중독되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렇듯 입술이 파래지고 몸 곳곳에 청색 반점이 나타난 것, 그리고 토혈을 하신 것 모두 극독에 중독되셨음을 알리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궁의의 목소리는 떨려 나왔다. 본인 스스로도 이런 말을 하는 게 고통스럽고 참담하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언제……. 라카인 왕궁을 떠나오실 때까지도 괜찮으시지 않았나!”

뵌트 공작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다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재차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난 뒤, 작용하는 독이 아니었나…… 앗! 황후마마!”

궁의가 뵌트 공작의 말에 대답을 하다 말고 다급히 마차로 되돌아갔다. 마차 안에 누워 있던 로엘린이 루시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키는 걸 봤기 때문이다.

“정신이 드시는지요.”

“……독에 중독되었다고 했나?”

로엘린은 궁의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방금 자신이 흐릿한 정신으로 들은 바를 확인하기 위해 되물었다. 그러자 궁의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소신이 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그대가 그렇게 판단했다면 그게 맞겠지.”

로엘린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본인의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의연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뵌트 공작도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다시 궁의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해독제는 준비되어 있는가?”

“일반적인 독에 대한 해독제는 당연히 가지고 왔습니다만……. 지금 황후마마께서 중독되신 독의 정체를 정확히 모르는 상황이라 그 효과가 얼마나 있을지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일단 그것이라도 사용해 보도록 하지. 그리고…… 세로이프로 돌아가는 걸 좀 더 서두르도록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공작.”

로엘린은 궁의의 비관적인 말에도 흐트러짐 없이 대꾸한 뒤, 곧바로 공작에게로 시선을 돌려 말을 건넸다.

“여기서 시간을 지체했다가 더 큰 문제가 생길까 걱정이 되는군요. 아직 우리는 세로이프 안에 들어가지 못한 상황이니.”

라카인의 국경을 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서 세로이프의 국경 안으로 들어선 것은 아니다. 자신들은 아직 그 중간에 있는 사말타 산맥의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이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를테면 라카인 쪽의 습격이라도 받는다면 피해가 아예 생기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다.

더구나 독에 당한 자신을 호위하는 이들의 움직임은 더욱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로엘린이 창백한 얼굴로 그 점을 지적하자 뵌트 공작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본인이 독에 당했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듯 두려움을 이기고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는 건 웬만한 사내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연약한 여인의 몸으로 자신의 몸보다도 주변을 먼저 살피고 이끌어 가다니.

뵌트 공작은 위기에 처한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드시 지켜 드려야 한다. 무사히, 황궁으로 모시고 가야 해.’

폐하의 반려로서, 그리고 제국의 안주인으로서 이보다 더 자격을 갖춘 분이 또 있을까.

“황후마마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뵌트 공작은 한 손을 가슴팍에 대고 허리를 정중하게 숙였다. 그러고는 마차 밖으로 나가 여러 지휘관들을 불러 로엘린의 명을 전달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발노장이 본인의 판단하에 명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어린 황후의 명을 전달하는 건 기묘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그가 로엘린을 인정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저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우욱!”

그런 공작의 목소리를 듣던 로엘린이 중얼거리다 말고 다시 한 번 피를 토했다. 검붉은 피였다.

“바로 해독제를 가지고 오겠…….”

궁의가 그 모습에 황급히 몸을 돌려 마차에서 내리려다가 문득 마차 좌석의 어딘가를 보고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루시가 로엘린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다 말고 그런 궁의를 보고는 재촉했다.

“거기서 뭘 하는 겁니까? 어서 해독제를 가져와야지요!”

“이, 이 목걸이, 이건 어디서 난 겁니까? 아니, 이거, 혹시 황후마마께서 이 목걸이를 착용하고 계셨습니까?”

궁의는 루시의 재촉하는 말을 아예 듣지 못한 듯 마차 좌석에 놓여 있던 목걸이를 들고 다급히 물었다. 그러자 루시가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라카인에서 받은 선물이라 국경을 넘을 때까지 계속 걸고 계셨는데…….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는 겁니까?”

“한 가지만 더 확인하고 말씀드리지요. 그럼 혹시 불그스름한 빛이 나는 차를 드신 적 있으십니까, 황후마마? 향이 강한 차입니다. 그 색깔이 다른 차와 달리 불그스름하니 분명 기억에 남으셨을 겁니다.”

“……라카인에서 한 번 마셨네.”

로엘린은 궁의의 말에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궁의가 들고 있는 목걸이를 보았다.

모친이 선물한 목걸이.

그리고 모친이 권한 차.

“……내가 중독된 독이, 혹시 그 두 가지와 관련이 있는 건가? 하지만 차는 나 혼자 마신 게 아니었는데?”

로엘린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조금 전 중독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도 평정을 잃지 않던 그녀였지만, 지금 이 순간까지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차만 마실 경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이 목걸이의 보석을 지니고 있을 경우에 문제가 됩니다. 두 가지가 상호 작용을 일으켜 극독으로 변하니까요.”

“……뭐라고?”

로엘린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손끝을 꽉 오므려 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모친에 대해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 해서 이런 것까지 용납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본인이 낳은 자식인데, 그 자식을 직접 죽이려 하다니…….

로엘린은 가슴속이 얼어붙는 것 같은 고통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황후마마, 입술에 상처가 깊이 났습니다!”

루시는 참담한 상황 앞에 가슴이 미어지는 걸 느끼며 서둘러 로엘린의 입술 사이로 얇은 천을 집어넣었다.

그녀에게 목걸이를 선물한 사람이 누구인지,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었다.

제3자에 불과한 자신도 이렇듯 참담한 마음이 드는데, 본인의 마음은 오죽할까.

루시는 눈물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눌러 참았다. 그 와중에 궁의만이 희망 섞인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제 정확한 독을 알아냈으니 곧바로 해독제를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해독제를 만들 수 있는가?”

“예! 시간이 조금 소요되어 그렇지, 해독제에 들어가는 재료는 전부 구비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나마 다행이로군.”

로엘린이 힘없이 미소를 지은 뒤, 중얼거렸다. 그러자 궁의가 해독제를 만들기 위해 서둘러 마차에서 나가려 했다. 그 순간, 루시가 참담한 마음을 애써 다잡고 그를 불러 세웠다.

“그러면 해독제는 언제쯤 복용할 수 있겠습니까?”

“최대한 서둘러 하루 안에 드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하루 안에, 그게 가능한가?”

약을 만드는 일이 그렇듯 쉬운 것은 아닐 텐데. 로엘린이 궁의의 말을 듣다가 끼어들어 질문을 던졌다.

궁의가 루시를 보며 대답하다 말고 로엘린을 돌아보더니 살짝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로엘린이 그 표정을 포착하고는 질문했다.

“……왜 그러나? 또 뭔가 말해야 할 것이 있는 건가?”

“그 독은 총 세 번의 발작을 일으킵니다. 조금 전의 발작이 그 첫 번째였으니…….”

“두 번 남았군. 그 뒤에는 죽는 것일 테고?”

로엘린은 궁의가 하지 못한 말이 무엇인지 대충 알아차리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자 궁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첫 번째 발작이 일어나고 하루 뒤에 두 번째 발작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반나절 뒤에 세 번째 발작이 일어나지요. 그러고 나면…… 해독제를 써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하루, 그리고 반나절 안에 해독제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로군.”

로엘린은 알겠다며 궁의를 내보냈다. 한시가 급한 터라 궁의 역시 냉큼 마차에서 내려 서둘러 약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마차 안으로 바람이 들어온 것인지 갑자기 으슬으슬 추워졌다. 로엘린이 몸을 떨자 루시가 황급히 마차 문을 닫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전 자신의 명에 따른 뵌트 공작의 지시로 출발한 것이었다.

“황후마마…….”

루시는 로엘린의 몸을 덮은 모포를 더욱 꼼꼼하게 여민 뒤,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렇게 걱정할 것 없어, 루시. 궁의가 해독제를 만든다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첫 번째 발작은 이제 진정된 것 같으니, 하루 동안은 피를 토할 일은 없을 테고.”

로엘린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루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마차 벽을 가만히 응시했다.

원망도, 분노도, 그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허탈한 마음뿐.

죽이고 싶을 정도로 자신이 그들에게는 끔찍한 존재였던가, 싶어 헛웃음만이 나왔다.

‘내가 뭘 했다고. 그저 죽은 듯이 살아왔던 것도 죄였을까.’

로엘린은 피식 웃은 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를 죽이려고, 그 난리를 쳤던 건가 봐. 아프지도 않으면서 위독하다는 거짓말까지 서슴없이 하고.”

“…….”

“이상했어. 내 오라비였던 사람도, 모친이었던 이도, 다들 그럴 사람들이 아닌데 왜 갑자기 돌변하여 다정한 형제인 척, 어머니인 척 그리 행세하나 싶어 의아했는데. 이제야 그 답을 알게 됐네. 잘된 일이라고 해야 할까?”

로엘린의 말에 루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로엘린은 침묵하는 루시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괜찮아, 루시. 난 아무렇지도 않아.”

“화, 황후마마…….”

“그들은 나한테 아무런 의미도 되지 못하는 존재들인걸. 나한테 소중한 사람들은 전부 여기에 있잖아. 루시도 그중 한 사람이고.”

“……어, 어찌 그런 말씀을.”

루시가 먹먹한 표정으로 로엘린의 말을 듣다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로엘린은 진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정말이야. 늘 모질고 차갑기만 했던 모친보다 나한테는 루시가 더 어머니 같아. 지금도 봐. 이렇게 나를 걱정하고 염려하고 있는 그대의 모습을.”

루시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로엘린을 꼭 끌어안았다.

“황후마마. 우리 황후마마…….”

그 바람에 되레 당황한 건 로엘린이었다. 로엘린은 루시가 이렇게까지 감격해 평소 안 하던 행동까지 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곧 당황스러움을 접고 조심스럽게 루시를 마주 끌어안았다.

“꼭 무사하실 겁니다, 황후마마.”

“응, 그래야지.”

“그럼요. 저희가 황후마마께 해 드리고 싶은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거 다 받으시려면 앞으로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은 더 사셔야 할걸요.”

루시는 눈물이 묻어나는 눈을 휘며 웃었다. 로엘린의 파리한 얼굴은 여전히 중독 상태라는 걸 드러내고 있었지만, 루시는 씩씩하게 마음을 다잡았다.

‘나를 어머니 같다고 하시는 황후마마를 위해 무엇인들 하지 못할까.’

“저더러 어미 같다고 하셨죠? 저는요. 예전부터 꿈이 있었어요. 바로 예쁘고 고운 딸 하나 갖는 게 소원이었지요. 비록 그 소원은 이루지 못하고, 시커먼 사내 녀석 하나만 두었지만 말이에요.”

루시는 농담처럼 말하며 로엘린을 안았던 팔을 풀었다. 그러고는 다시 로엘린의 몸을 덮은 모포를 매만지다가 그녀를 가만히 보고는 웃었다.

“그 소원이 이제야 이루어졌네요. 그런데 어쩌죠? 소원을 이루고 나니까 한 가지 소원이 더 생겼는데 들어주실 건가요?”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당연히 해 주실 수 있어요. 제 소원은 황후마마를 닮은 왕자님이나 공주님을 제 손으로 키우는 거랍니다. 참! 아시죠? 제가 폐하도 직접 키웠어요.”

“알아. 루시가 폐하의 유모였다는 거.”

로엘린은 말갛게 웃었다. 루시가 그 웃는 얼굴을 쳐다보다가 과장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릴 적의 폐하가 얼마나 사고뭉치에 말썽꾸러기였는지 상상도 못 하실 거예요. 어떤 일이 있었느냐면 말이지요…….”

루시는 평소 그녀답지 않게, 마치 실로아가 이 자리에 있는 것처럼 재잘재잘 이야기를 많이 했다. 주로 케르겔의 어린 시절 이야기였다.

로엘린은 그녀가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까르르 웃기도 하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 덕분에 통증마저 잊을 정도였다.

아마도 루시는 그것을 노리고 일부러 더 이야기를 이어 간 것이리라.

로엘린은 루시의 그런 마음을 눈치챘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계속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날이 저물 때까지.

그리고 예상보다 빨리 두 번째 발작이 일어날 때까지.

* * *

“우욱!”

로엘린의 입에서 걷잡을 수 없이 많은 양의 피가 쏟아졌다. 루시는 새하얗게 질린 채 로엘린의 몸을 받치고는 궁의를 향해 물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하루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두 번째 발작까지는 하루가 걸린다고.”

“아, 아무래도 황후마마의 몸이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약한 것이 그 이유인 듯합니다.”

궁의 역시 사색이 되어 로엘린의 상태를 살피다가 대꾸했다.

밤이 되어 숲 깊숙한 곳에 잠자리를 마련하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바람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로엘린에게 집중되었다.

직접 다가올 수 없어 그저 걱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뿐.

그들을 대표해 뵌트 공작이 다가왔다. 그는 곧바로 궁의에게 다가와 물었다.

“해독제는 아직 준비가 덜 된 건가?”

“최선을 다해 만들고 있기는 합니다만, 아직…….”

궁의는 무력감을 느끼는 것인지 두 주먹을 꽉 쥔 채 말끝을 흐렸다. 뵌트 공작은 그런 궁의에게 뭐라고 말을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궁의로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몇 시간 사이에 눈 밑이 시커멓게 변하고 안색이 나빠진 것만 봐도 그가 자신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해독제를 제작하는 데에 힘을 쏟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어서 가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해독제를 만들게.”

공작은 궁의에게 손짓을 해서 보냈다. 지금으로서는 궁의가 딱히 뭔가를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였다.

“흐윽, 으으윽…….”

로엘린은 손을 꽉 오므려 쥔 채 덜덜 떨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그녀의 손끝이 새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그만큼 지금 그녀가 느끼는 고통이 크다는 뜻이기도 했다.

“황후마마.”

“……공작.”

로엘린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은 뒤, 루시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여러모로 나 때문에 고생이 많네요.”

“아닙니다. 오히려 황후마마를 지켜 드리지 못하여 제 죄가 큽니다.”

“공작께서 왜 스스로를 탓하시나요. 아무것도 모른 채 차를 마시고, 목걸이를 받은 건 나였는데.”

“모친이 권하는 것을 어찌 거부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건 황후마마의 잘못이 아닙니다.”

“공작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지요.”

로엘린은 힘겨운 와중에도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뵌트 공작은 그녀의 배려에 뭐라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잠자리가 준비되었습니다.”

“고마워요.”

그녀는 루시에게 몸을 의지한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여기저기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이 뭐라도 하고 싶은지 엉거주춤 서서 로엘린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로엘린은 그 시선들까지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극심한 통증에 신음이 나오려는 걸 참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마련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숲속에 임시로 지은 천막이었지만, 그 내부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로엘린은 간이침대에 몸을 뉘고는 고개를 모로 돌렸다. 천막 한쪽에 땅을 파고 그 안에 불을 피운 덕분에 천막 안이 훈훈했다. 그 세심한 배려가 그녀의 마음을 따스하게 했다.

“아직 많이 아프신지요?”

“아니. 그럭저럭 참을 만하네.”

로엘린은 루시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러자 루시가 그녀의 침상 옆에 앉아 로엘린의 손을 잡았다.

“너무 아파서 못 참으시겠다면, 제 손이라도 꽉 붙잡으세요. 아니면 끌어다가 꽉 무셔도 되고요.”

루시는 로엘린이 신음을 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로엘린은 가만히 웃은 뒤,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감았다.

‘……케르겔.’

로엘린은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솔직히 무섭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피를 토할 때마다 겁이 덜컥 났다. 게다가 두 번째 발작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일어나고 나니 그 두려움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가 해독제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세 번째 발작이 일어나면 어쩌나 싶어 아득해지기도 했다.

케르겔이 제 앞에 있었더라면 아마 그를 붙들고 엉엉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무섭다고, 나 좀 안아 달라고, 그렇게 투정도 부렸을 것이다.

‘약해지지 말자. 나는 살아야 돼.’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 오는 루시의 온기에 그나마 두려움이 조금 사라졌다. 그러고 나니 정신이 조금 더 맑아졌다.

‘내가 죽으면…… 케르겔이 많이 아파할 거야.’

자신이 죽는 것보다도 그가 아파할 것이 걱정되었다. 그를 홀로 두고 저 혼자 먼저 떠날 일이 걱정되었다.

어떻게 그런 마음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그와 함께할 미래가 기대됐다. 같이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그래, 그가 그러지 않았던가. 같이 여행을 가자고.

……그러니까 자신은 살아야 한다.

로엘린은 굳게 마음을 다잡고는 다시 눈을 뜨고 루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까 하나 더 생겼다는 소원 말이야.”

“……예?”

루시가 로엘린의 손을 잡고 있다가 문득 들려온 말에 그녀를 쳐다보았다. 로엘린은 그 시선을 마주한 채 약속했다.

“그 소원, 꼭 들어줄게.”

나를 닮은 아이. 케르겔과 내 아이.

아이도 낳고 싶다. 그와 자신의 아이를. 케르겔의 품에 우리 아이를 안겨 주고 싶다. 로엘린은 강한 바람을 품은 채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난 모정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아마 엄마 노릇을 하는 게 많이 서툴 거야. 그러니까…… 아이를 키울 때, 루시가 많이 도와줘야 해.”

“……무, 물론입니다. 맡겨 주세요. 하지만 이것 하나는 정정해야겠네요.”

“뭘?”

“황후마마는 분명, 좋은 어머니가 되실 거니까요. 서투르다 해서 나쁜 어머니인 건 아니거든요. 중요한 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지요.”

로엘린은 루시의 말을 들으며 제 미래를 꿈꿔 보았다. 엄마가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 루시의 말대로 정말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모정을 알지 못하고 자란 내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녀는 세 번째 발작에 대한 두려움과 통증을 애써 잊고 미래에 대한 이런저런 상상에 잠겼다. 그러다가 까무룩 잠이 들려는 순간, 천막 밖에서 들리는 날카로운 쇳소리와 고함 소리에 잠이 깨고 말았다.

“이게 무슨…….”

“침입자들이 있는 모양입니다.”

루시는 침대 앞을 가로막으며 혹시 모를 침입자에 대비했다.

챙. 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이어졌다. 로엘린은 두 팔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켰다.

바로 그 순간, 누군가가 천막을 찢고 안으로 들어섰다. 로엘린은 흠칫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검은 복면의 사내가 검을 들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절대…… 절대 안 돼. 황후마마께 못 가…… 크흑.”

복면을 쓴 사내의 다리에 매달려 있던 병사의 목이 뚫렸다. 방금 전까지 사내가 들고 있던 검에 꿰뚫린 것이다. 병사는 크륵크륵, 소리를 내며 피를 뿜어내다가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사내는 병사의 목에 박아 넣었던 검을 빼낸 뒤, 과장된 몸짓으로 마치 인사를 하듯 허리를 숙이더니 입을 열었다.

“여기 계셨습니까, 황후마마. 고약한 늙은이가 어찌나 방해를 하던지 한참 찾았습니다.”

“뵌트 공작은, 공작은 어디에 있지? 공작을 어떻게 한 건가?”

사내의 말 속에 등장한 ‘고약한 늙은이’라 함은 분명 뵌트 공작을 일컫는 말일 터였다. 로엘린은 제게 닥친 위기에도 불구하고 공작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사내가 킬킬거리며 웃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아마도 지금쯤 고슴도치가 되어 죽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백전노장이라 해도 수십 명의 살수가 달라붙는 걸 다 막을 수는 없을 테니.”

물론 그에 앞서 십여 명의 살수가 뵌트 공작의 손에 죽고 말았지만 말이다. 사내는 혀를 끌끌 찼다.

이번 일로 말미암아 손해를 크게 본 셈이 되었다. 살수 하나를 키우는 데에 들어가는 시간과 돈을 따지면, 이번 의뢰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받을 돈의 액수는 터무니없이 적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젠장. 라카인 왕실에서 의뢰한 일만 아니었어도…….’

아무리 자신들이 비밀리에 움직이는 살수 집단이라 해도, 왕실을 무시하고 활동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피해를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의뢰를 받아들여야 했다.

문제는 그 예상보다도 더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지만.

‘어쨌든 의뢰를 받은 건 성공적으로 마무리를 지어 놓고, 다시 협상을 해 봐야지. 돈으로든, 다른 무엇으로든.’

사내의 눈에 탐욕이 서렸다. 그는 이미 로엘린의 죽음을 전제로 그 이후 상황을 계산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내의 패착이었다.

“그럼 이제 슬슬 죽어 주실……. 제기랄!”

사내가 검을 들고 로엘린에게로 다가오려다 말고 황급히 몸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천막 안으로 거대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말 그대로 바람이었다. 검이 만들어 낸 바람 말이다.

“황후마마! 괜찮으십니까!”

그 바람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 천막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로엘린이 무사한지 물었다. 로엘린은 그를 쳐다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공작!”

“공작님!”

루시 역시 그, 뵌트 공작을 보고는 경악하여 외쳤다. 뵌트 공작의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온몸이 난도질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상처투성이였고, 그 상처마다 피가 흘러내려 발을 내딛는 곳마다 피 웅덩이가 생기고 있었다.

“고, 공작! 상처가…… 어서 상처부터…….”

“이까짓 상처는 그냥 놔둬도 낫습니다. 일단, 저 쥐새끼부터 잡아야지요.”

공작은 일부러 소리 내어 너털웃음을 지은 뒤, 천막의 어딘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모습을 감췄던 살수가 바로 그 자리에 나타나 다시 옆으로 몸을 피했다.

“어디를 도망가려고!”

“이 늙은이, 명줄 한번 길구나!”

사내는 이를 갈며 재차 몸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뵌트 공작에게 암기를 날렸다. 그 바람에 공작의 몸에 또 다른 상처들이 늘어 갔다.

이미 쓰러지고도 남았을 몸 상태로도 공작은 계속 버티며 사내를 향해 공격을 이어 갔다. 그러자 초조해진 건 사내였다. 그는 눈을 굴리며 기습을 할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늙은 공작에게서는 결코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한 번만, 딱 한 번의 빈틈이 있으면 되는데.

예기치 못한, 그런 빈틈이…….

사내가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로엘린이 경련을 일으켰다. 두 번째 발작의 연장선, 혹은 세 번째 발작이었다.

“황후마마!”

루시가 황급히 로엘린을 부축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살수를 노리던 뵌트 공작의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바로 지금이야!’

사내는 뵌트 공작을 향해 가지고 있던 남은 암기를 전부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루시를 옆으로 밀어 버리고 로엘린의 허리를 낚아채 천막 밖으로 달아났다. 그 직후 휘파람 소리가 들리고, 말발굽 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아, 안 돼! 황후마마!”

루시가 비명을 질렀다. 뵌트 공작 역시 암기를 전부 쳐 낸 뒤, 황급히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로엘린은 이미 사내에게 납치되어 사라진 뒤였다.

* * *

“……잠깐.”

케르겔은 말을 멈춰 세우고는 뒤따라온 길로프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길로프가 그의 곁으로 말을 몰아 다가왔다.

“피비린내가 난다.”

“……확실히 그렇군요.”

불어오는 바람에 피비린내가 섞여 있는 게 느껴졌다. 길로프는 굳은 표정으로 케르겔을 돌아보았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지금 이 길 앞에 있을 이들이 황후마마를 비롯해 그 수행단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결코 반갑지 않은 낌새라 할 수 있었다.

“혹시 다른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르니 주변을 잘 살피도록.”

케르겔은 날카롭게 명을 내린 뒤, 천천히 말을 몰았다. 기척을 완벽하게 지우고 주변을 살피면서 말이다. 길로프도 그와 비슷하게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속도를 낼 수밖에 없었다. 피비린내의 현장에 있는 세로이프의 기사들과 병사들을 발견한 것이다.

“로엘린!”

케르겔은 멀찍이에서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 달려갔다. 현장을 수습하던 기사 하나가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에 즉각적으로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가 케르겔을 알아보고는 황급히 예를 표했다.

“폐하를 뵙습…….”

“황후는? 황후는 어디에 있지? 무사한가? 뵌트는? 공작은 어디에 있나?”

케르겔은 기사의 예를 받지 않고 다급히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기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화, 황후마마께서는…….”

“황후가 여기에 없나? 답답하군! 어서 대답해!”

“……황후마마께서 납치되셨습니다.”

그 순간,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케르겔은 그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뵌트 공작의 보좌관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그의 한쪽 팔이 사라진 상태였다. 케르겔은 보좌관의 모습에 미간을 좁혔다. 보좌관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재차 말을 이었다.

“공작님께서 살아남은 기사들을 이끌고 추적에 나섰지만, 아직 아무 소식도 없는 상황입니다. 공작님도 많이 다치신 상태인데 간단히 응급 처치만 하시고…….”

“뭐?”

케르겔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납치라니.

게다가 믿었던 공작도 다쳤다고 하지 않나.

“황후마마를 노렸던 살수들이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황후마마를 납치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의 경우, 인질로 이용하기 위해서.”

“어디, 어느 쪽으로 갔지?”

케르겔은 관자놀이를 손으로 누른 뒤, 들끓는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히며 물었다. 그러고는 보좌관의 대답을 듣고 바로 움직이려는데,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케르겔을 부른 건 시녀장, 루시였다. 루시는 엉망이 된 모습으로 달려오다가 그대로 고꾸라져 넘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다시 일어나 케르겔에게 다가와 매달렸다.

“세 번째 발작이 일어나기 전에 구해 오셔야 합니다, 폐하. 궁의가 해독제를 만들었답니다. 해독제를 만들었으니, 황후마마만 발작이 다시 오기 전에 구해 오시면…… 그러면 살리실 수 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케르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확한 건 모르지만 대충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짐작할 수는 있었다.

해독제.

그 말만으로 충분했다.

“독에, 살수까지 썼단 말인가?”

“라카인의 짓입니다. 국왕과 선왕비가 황후마마를 죽이려고…….”

루시는 눈물로 범벅이 된 채 케르겔을 쳐다보다가 흐느꼈다. 자신이 모시는 이를 지키지 못한 자괴감에 그녀는 10년은 훌쩍 늙어 버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케르겔에게서 거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눈으로도 보일 정도로 그 기운은 넘실거리며 주변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폐하!”

길로프가 사색이 되어 그를 향해 다가가려 했다. 혹시 봉인이 깨지려는 건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케르겔이 말 아래로 내려서더니 그대로 몸을 날렸다.

“폐하!”

길로프는 순식간에 사라진 케르겔의 모습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케르겔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늑대족의 힘을 개방하신 모양이군. ……봉인이 깨져서는 안 되는데.”

길로프는 탄식하며 두 주먹을 움켜잡았다.

반려가 사라진 상황에서 늑대족의 힘을 가두고 있는 봉인이 깨진다면, 남는 건 파국뿐일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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