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티 파티와 레르슈첼
“정체불명의 짐승 떼?”
케르겔이 두툼한 보고서를 읽다가 미간을 좁히고는 고개를 들었다. 하이네스가 케르겔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폐하. 짐승의 흔적인 것은 확실하나 구체적으로 그 종을 판단하는 건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어떤 짐승인지 특정할 수 있는 흔적은 나오지 않은 터라.”
“하지만 분명한 건 그 흔적이 맹수의 것이란 점이지.”
“그렇습니다.”
하이네스는 케르겔의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재차 주억거렸다. 케르겔은 보고서 속 내용을 다시 한 번 훑어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사말타 산맥 인근의 변경(邊境)을 담당하고 있는 책임자가 보낸 보고서였다. 두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보내고 있지만, 사실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일은 지금껏 없었다.
사말타 산맥이 워낙 험준하기로 악명 높은 터라 외부의 침입을 걱정할 바도 아니었고,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변경의 부대만으로도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세로이프는 결코 나약한 국가가 아니다.
“흐음…….”
그런데 어째서일까. 케르겔은 좀처럼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단순히 짐승 떼가 나타난 흔적을 발견했다는 보고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의 신경을 긁었다.
변경의 책임자조차 대수롭지 않은 투로 보고서의 끝부분에 덧붙인 내용에 불과한 것인데…….
케르겔이 책상 위를 손으로 두드리며 거듭 미간을 좁혔다. 시종장이 그의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르다 말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이네스 역시 케르겔의 표정을 보고는 시종장과 비슷한 표정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뭔가 신경이 쓰이시는지요.”
“글쎄. 딱히 그럴 만한 부분이 보이는 건 아니지만. 아, 고맙네.”
케르겔은 하이네스의 말에 대꾸하다 말고 시종장에게 인사를 한 뒤, 찻잔을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보고서를 들었다. 그의 금빛 시선이 보고서를 뚫기라도 할 것처럼 예리해졌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하이네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 주군이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니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란 생각이 든 것이다.
“하이네스, 자네까지 그럴 필요 없어. 표정 풀어.”
케르겔은 제 충직한 신하이자 벗인 하이네스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 피식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보고서를 내려놓고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뭔가를 생각하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이네스와 시종장, 두 사람 모두 케르겔의 침묵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그저 묵묵히 기다렸다.
자신들의 주군이 생각을 정리하여 다시금 입을 열 때까지.
그렇게 시간이 잠시 흐르고, 케르겔은 다시 차를 마시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시간이 꽤 흐른 것인지 차가 다 식어 버린 터였다.
그것을 눈치챈 시종장이 다시 차를 준비하려 했다. 하지만 케르겔은 손짓으로 시종장을 만류한 뒤,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피해 상황이 보고된 건 없는 건가.”
“그렇습니다, 폐하.”
“그저 흔적만 남았다는 건데…….”
케르겔이 책상을 두드리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괜히 과민하게 반응을 한 듯싶었다.
“됐어. 나 때문에 자네까지 덩달아 신경을 쓰게 했군. 어차피 누구 하나 피해를 입은 일도 없는데 말이야. 자네도 고민은 그쯤 해 두도록 해.”
케르겔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하이네스를 향해 말했다. 그러나 하이네스는 쉽게 표정을 풀지 않았다.
“하지만 폐하의 느낌이 틀린 적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하이네스의 반박은 충분히 새겨들을 만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종장 역시 그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늑대족의 피를 물려받아서인지, 케르겔은 다른 이들보다 위험 요소 같은 걸 본능적으로 예리하게 파악하고는 했다.
그 외에 ‘덫’이라든가 ‘함정’ 같은 것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리고는 했고.
덕분에 이런저런 사건이나 사고 같은 것을 미리 눈치채서 막은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이 사소한 일도 결코 가볍게 넘길 수가 없는 것이다. 케르겔은 하이네스의 마음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일단 지켜보라고 하게. 그런 흔적이 또 나타나는지도 살피고. 아주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어떤 변화가 생기면 곧바로 보고하라고 지시하도록 하고.”
“예, 폐하.”
“우선 그 정도로만 하면 되겠지.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진 건 아니니까.”
케르겔이 하이네스에게 간단히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검토할 다른 보고서를 집어 들려는 순간, 집무실 문이 열렸다. 버트가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를 품에 가득 안고 들어온 것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검토할 서류가 많군.”
케르겔은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불평 섞인 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버트가 그의 책상에 서류 더미를 내려놓은 뒤, 땀을 닦는 시늉을 하다가 씩 웃었다.
“글쎄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은데요?”
“아니야. 확실히 많아.”
“흐음…… 아닌데. 혹시 엉덩이가 막 들썩거려서 그렇게 느끼시는 건 아닙니까?”
버트가 케르겔의 말에 다시금 대꾸를 하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하이네스가 버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는 입꼬리를 실룩였다. 시종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케르겔은 그들의 모습에 무안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고는 ‘우연히’ ‘그냥 갑자기’ ‘문득’ 생각났다는 듯 시종장을 향해 물었다.
“참, 티 파티는 어떻게 잘되어 가고 있다던가?”
“예, 폐하. 별다른 일 없이 원만하게 잘 진행되고 있는 줄로 압니다.”
시종장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은 뒤,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확실히 그들의 황제는 ‘오늘따라 유난히’ 집무를 봄에 있어서 쉽게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방금 그의 입에서 나온 ‘티 파티’라는 걸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그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티 파티’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도 한 적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니 웃음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케르겔은 시종장이 웃음을 참는 걸 보며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황후의 데뷔 자리에 참석도 하지 않은 것들이 뭐 예쁘다고, 티 파티를 열어 초대까지 한 건지…….”
“그래도 그런 이들까지 다독여 너그럽게 품에 안고자 하시니 참 대단하시지 않은지요.”
시종장이 불평하는 케르겔을 쳐다보다가 가만히 웃으며 대답했다. 민망해하는 주군을 위한 늙은 신하의 배려였다. 케르겔은 그런 시종장을 힐끗 쳐다보고는 다시금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혀를 찼다.
“시종장은 아주 흐뭇한 모양이로군.”
“당연히 흐뭇하지요. 현명하기 이를 데 없는 황후마마를 모시고 있으니, 신하 된 입장에서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솔직히 시종장의 말은 단순히 입에 발린 것이 아니었다. 무안해하는 황제를 위해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여 맞장구를 친 건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말에는 진심이 짙게 묻어나고 있었다. 시종장은 진심으로 기뻐하고 또한 안도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건 하이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황후마마께서 섬세하게 파악하고 신경을 쓰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하이네스가 케르겔에게 건넸던 보고서를 정리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종장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그러자 버트가 그 대화 속에 끼어들었다.
“하여간 사냥 대회 때 불참한다며 늘어놓은 핑계들도 다양했는데 말이죠. 와병 중이라든가…….”
버트는 입을 실룩이다가 이내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을 이었다.
“그냥 핑계 대지 말고 솔직히 말했으면 좋겠어요. 여인의 몸으로 사냥이라니, 그런 무식한 행사에 참여할 수 없다! 그렇게 말입니다. 사냥 대회나 무투회만 열었다 하면 공국 출신 여인들만 매번 그렇게 똑같은 핑계를 대는 걸 누가 믿겠느냐고요.”
“본인들도 뻔한 거짓말을 하느라 번번이 피곤하겠지.”
케르겔이 피식거리며 조롱조로 대꾸했다. 그러자 버트가 인상을 쓰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든 마음에 안 듭니다. 그렇게 세로이프의 풍습이 맞지 않고 싫었으면, 애당초 이곳의 사내와 혼인을 하지 말았어야죠. 아니면 나름대로 적응하기 위한 노력이라도 해 보든가.”
케르겔은 버트의 비난에 어느 정도 공감했다.
로엘린이 사교계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던 사냥 대회에 불참한 이들은 대다수가 공국 출신의 여인들이었다.
그들은 세로이프의 사내와 혼인하여 제국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국에서의 생활 방식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냥 대회나 무투회 같은 행사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여인이 사냥을 하고 검을 휘두르는 일 같은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제가 황후마마의 입장이었다면 티 파티는 고사하고, 그때 참석하지 않았던 여인들을 두고두고 기억했다가 나중에라도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텐데요. 오히려 그들을 위해 티 파티까지 여시다니.”
평소 뒤끝이 있기로 소문이 자자한 버트다운 말이었다. 하이네스가 잠자코 그 말을 듣고 있다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린 뒤, 입을 열었다.
“그러니 황후마마께서 대단하신 것이지요. 폐하의 말씀대로 황후마마께서 사교계에 처음 데뷔하는 자리에 불참한 이들인데, 그들에게 너그럽게 자비를 베풀어 직접 티 파티에 초대까지 하셨으니 말입니다. 덕분에 다소 어수선했던 황실의 분위기도 잡을 수 있게 되었고요. 정말 현명한 결정이셨습니다.”
“……흐음.”
하이네스의 말을 듣던 케르겔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로엘린의 실제 정체가 드러난 뒤, 황실의 분위기가 어수선했던 건 사실이다.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던 라카인의 왕녀가 아닌, 또 다른 쌍둥이 왕녀라는 존재 자체에 이런저런 말이 나온 걸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특히 프졸란이나 카이제넨 공국 출신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다. 물론 대놓고 황후에 대한 말을 할 만큼 용감한 자는 없었지만 말이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싹 다 털어 버렸을 텐데.’
하이네스나 다른 신하들이 들었더라면 기겁하여 만류했을 법한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던 케르겔의 귓가에 버트의 목소리가 재차 들렸다.
“맞습니다. 분위기를 쇄신한다는 명목으로 말 안 듣는 신하들을 죄다 연무장으로 불러 굴려 대고 두들겨 패시던 무식한 폐하와 현명하고 자비로우신 황후마마는 하늘과 땅 차이라니까요.”
“…….”
케르겔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하이네스와 시종장이 웃음을 참기 위해 표정을 관리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하이네스가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고자 했다.
“버트, 아무리 그래도 폐하께…….”
“그래. 그건 버트, 자네의 말이 맞아. 황후가 나와는 달리 참 현명하고 자비롭기는 하지.”
케르겔이 하이네스의 말을 끊고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이 저 멀리 황후궁의 정원이라는 걸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 한창 티 파티가 열리고 있을, 그 정원 말이다.
솔직히 지금도 못마땅한 건 변함이 없다. 아무리 제 신하들이 로엘린을 현명하다며 찬양해도, 그리고 그게 사실이기는 하더라도,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뒤틀려 있는 건 풀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뭐 대단한 이들이라고.
케르겔은 또다시 속에서 울컥, 화가 치미는 걸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제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소중한 이인데, 그런 이의 데뷔 자리에도 참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그녀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을 많이 했던 자들이니, 공국 출신 여인들에 대한 케르겔의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로엘린이 주최한 티 파티에 가서 심술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는 불만과 심술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다가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하긴…… 꼭 심술을 부릴 필요는 없잖아? 오히려 응원을 해 주러 가도 되지.”
케르겔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시종장과 하이네스, 버트의 시선이 한꺼번에 그에게 집중되었다.
케르겔은 그 시선들을 받으며 악동처럼 웃더니 입을 열었다.
“황후가 여는 첫 티 파티인데, 내가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렇지 않은가?”
“아니, 뭘 하시려고요? 그냥 가만히 계시는 편이 나을…….”
버트가 무심코 그의 말에 대꾸를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하이네스와 시종장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한 것인지, 굳이 버트의 말을 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야. 그래도 그건 아니지. 아무래도 내가 한번 가 보는 편이 낫겠어.”
그 와중에 신이 난 건 케르겔, 그 하나뿐이었다. 언제 불평을 늘어놓고 잔뜩 인상을 썼던가 싶을 만큼.
* * *
“사냥 대회 때는 부득이하게 불참할 수밖에 없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황후마마. 갑작스럽게 고열이 나는 바람에…….”
“저도 그때,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하여…….”
여인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다들 비슷한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누가 들어도 ‘변명’이라 생각할 법한, 너무나 식상하기 그지없는 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티 파티에 참석한 몇 명의 노부인들이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특히 하이네스의 모친인 폴린 바쉘은 그 성격이 다혈질인 터라 화를 참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타박하는 말을 할 것처럼 입을 실룩였다.
그러나 폴린을 비롯한 노부인들은 끄응, 하며 불편한 기색을 슬쩍 드러내기만 했을 뿐, 먼저 나서서 여인들을 탓하지 않았다.
로엘린이 차분한 표정으로 그들의 변명을 듣고 있기 때문이었다.
황후가 주최한 티 파티였다. 누구보다 가장 화가 날 사람이 그녀일 텐데도 저렇듯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는데, 어느 누가 감히 나서서 티 파티의 분위기를 망칠 수 있겠는가.
폴린이 두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잡은 뒤, 심호흡을 했다. 이럴 때는 제 아들처럼 침착하고 차분한 성정이 부럽다. 자신은 결코 갖지 못하는 성정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폴린과 다른 노부인들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애써 달래려는데, 로엘린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요. 사정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할 수도 있죠. 그래도 이렇게 다들 보게 되니 반갑네요.”
로엘린은 그들의 변명을 듣고 있다가 적당한 시점에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저마다 변명을 늘어놓느라 바쁘던 여인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로엘린을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흡사 희귀한 뭔가를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하기야 ‘라카인의 숨겨진 왕녀’ 혹은 ‘불길한 쌍둥이 왕녀’였던 이가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고 하니, 그에 따라 흥미가 생기기는 했을 터.
그것이 비록 저열하기 짝이 없는 흥미라 할지라도 말이다.
로엘린의 입가에 번지던 미소가 이내 쓴웃음으로 변질되었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그녀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찻잔을 들어 제 입가를 가렸다.
‘하기야 이곳이라 해서 완벽한 건 아닐 테니까.’
세로이프에 온 이후, 저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을 겪지 못한 터라 자신도 모르게 착각했던 모양이다. 고작 이런 시선에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걸 보면 말이다.
그녀는 숨을 들이쉬고는 시선을 들었다. 공국 출신의 여인들이 여전히 저를 힐끔대며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프졸란과 카이제넨은 세로이프에 속해 있는 공국이기는 하지만, 사회문화적인 면에 있어서는 외려 라카인 왕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무래도 세로이프 제국과의 사이에는 사말타 산맥이 가로지르고 있는 탓에 교류가 많지 않았던 게 그 이유일 것이다.
반면에 라카인 왕국과는 수월하게 교류를 할 수 있는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그래서일까.
공국 출신 여인들이 저를 힐끔대는 시선 속에서 ‘불길한 존재’에 대한 편견 같은 것이 묻어났다.
아마도 자신이 황후가 아니었더라면, 라카인에서와 비슷한 취급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그들 중 한 여인이 말을 꺼냈다.
“참, 그런데 황후마마의 팔찌가 정말 아름다워요. 처음 보는 보석으로 만든 것인 듯한데, 혹시 그 보석의 이름을 여쭈어봐도 될까요?”
“……이걸 말하는 건가요?”
로엘린은 여인의 물음에 당황하여 눈을 깜빡이다가 제 팔의 팔찌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다른 여인이 냉큼 끼어들며 관심을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저 역시 황후마마께 여쭈어 볼 기회만 찾고 있었어요. 제가 웬만한 보석 감정사보다 보석을 보는 눈 하나는 좋다고 자부하는데요. 황후마마의 팔찌에 있는 보석은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원석에 가까운 것 같기는 한데, 그게 어떤 원석인지는…….”
여인들의 말을 듣던 로엘린의 표정이 다소 묘하게 변했다. 그들이 물어본 팔찌는 케르겔과 함께 황궁 밖으로 나갔던 날, 시장에서 산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궁금해하는 팔찌의 보석은, 그저 평범한 돌일 뿐이다.
“뭔가 착각을 하신 모양이네요. 이건 보석이 아니라 그냥 돌이거든요.”
로엘린은 제 팔찌를 만지작거리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보석 보는 눈이 좋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던 여인이 로엘린의 말에 정색을 하며 대꾸했다.
“어머! 돌이라니요? 황후마마, 지금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제가 보석과 돌을 구분도 못 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여인의 얼굴이 심한 모욕을 받은 사람처럼 새빨개졌다. 로엘린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저은 뒤, 다시금 말을 이었다.
“놀리려는 의도가 아니에요. 나는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랍니다.”
로엘린은 여인이 프졸란 공국 출신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던 걸 떠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가문이 소유하고 있는 상단에서는 보석이나 값비싼 물건들을 취급한다고 했지.’
물론 여인이 직접 본인의 입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아마도 여인은 로엘린이 자신의 친가에 대하여 이렇듯 알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로엘린이 여인 하나에 대해서만 이렇듯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지금 이 티 파티에 초대된 이들에 대해서는 이와 비슷한 정도로 파악하고 있다 해도 될 터였다.
그 과정에 시녀장, 루시의 도움이 컸다. 상대방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한 채 처음 마주하는 것보다 기본적인 정보를 알고 만나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루시의 조언을 로엘린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오늘, 이 티 파티가 아무런 목적 없이 열린 것이 아니기에.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밀이 드러난 뒤, 황실 안팎의 분위기가 혼란스러워진 것을 수습하기 위한 수단으로 티 파티를 택한 것이니 말이다.
‘버려진 왕녀’, ‘불길한 쌍둥이’ 등등의 말이 공국 출신들의 입을 통해 특히 많이 퍼져 나가는 상황이었기에, 일단 그들을 불러 분위기를 쇄신할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그들 중 대부분이 지난번 사냥 대회 때 불참하였으니 티 파티를 위한 구실 또한 적절했다.
‘그러니까 티 파티를 무사히, 잘 끝내야 해.’
로엘린은 시선을 들어 제 옆에서 시중을 들던 루시를 쳐다보았다. 루시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잘하고 계십니다, 황후마마.’
루시가 눈빛으로 전한 응원 덕분일까. 로엘린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느끼며 입꼬리를 올린 뒤, 다시금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내가 왜 부인에게 그런 저급한 행동을 할 거라고 생각한 거죠?”
“아, 그, 그건…….”
로엘린의 질문에 여인의 얼굴이 빨개졌다. 여인은 당황하여 입을 열려고 했지만,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을 쳐다보던 로엘린의 푸른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대의 눈에, 내가 꽤 우스워 보였나 보군요.”
“아, 아닙니다! 황후마마! 우, 우스워 보이다니요!”
여인은 로엘린의 차가운 목소리에 기겁하여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로엘린은 쉽게 표정을 풀지 않고 여인을 쳐다보았다.
대놓고 화를 낸 게 아니었다. 날카롭게 쏘아붙이지도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여인의 말에 응대했을 뿐.
그러나 여인을 비롯해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은 로엘린을 결코 쉽게 보지 못했다.
그저 가련하고 여리다고 생각했던 황후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보았다고 해야 할까.
폴린과 다른 노부인들이 로엘린의 그런 모습을 보다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의외로 강단 있어 보이는 황후의 모습에 흡족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로엘린은 노부인들의 반응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다시금 여인을 향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대의 눈을 탓해야겠군요. 아니, 돌을 보석이라 여기고도 본인의 눈을 정확하다고 여겼으니, 그대의 그런 고집을 탓해야 할까요.”
“그…… 그건 너무 심한 말씀이세요! 어떻게 저를, 그렇게 모욕할 수 있으신지.”
여인이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채 항의조로 말을 하다가 이내 독기를 품고는 덧붙여 말했다.
“애당초 황후마마께서 한낱 돌조각 따위로 만든 팔찌를 차고 계실 거라고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어요! 아무리 라카인에 계실 때, 제대로 왕녀 대접을 받지 못하셨다고 하지만…….”
여인은 흥분하여 말을 잇다가 제 말실수를 깨달았는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그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가 그녀의 말을 들은 뒤였다.
“쯧.”
노부인들이 모여 앉아 있던 곳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여인이 몸을 움찔거리고는 슬며시 로엘린의 눈치를 살폈다.
“저, 황후마마, 제가 실수를…….”
“보석과 돌의 가치가 그렇게 다르다고 생각하나요?”
로엘린은 평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방금 말실수를 한 이에게 한정하여 던진 질문이 아니라는 듯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이다.
하지만 아무도 로엘린의 물음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보석과 돌의 가치가 다르다는 건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 같은 사람들과 비천한 평민들이 결코 같은 선상에 놓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요.”
로엘린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한 이는 카이제넨 공국 출신이라 본인을 소개했던, 프렌티스라는 이름의 여인이었다. 또한 그녀의 외가가 라카인 왕국의 백작 가문이라 했다.
로엘린은 루시를 통해서 접했던 프렌티스에 대한 정보를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사람을 단순히 몇 가지의 정보로 판단하는 건 성급한 일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을 터였다.
작은 정보라 하더라도 어찌 되었든 그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일 테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프렌티스는 신분이나 계급에 대한 의식이 상당히 보수적일 가능성이 컸다. 아무래도 어릴 적부터 외가, 그리고 모친에게서 받는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프렌티스가 방금 꺼낸 말은 그런 사고방식의 일환이라 여기면 될 터.
‘……게다가 그런 사람이라면, 나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닐 테고.’
라카인에서 제게 가졌던 편견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불확실한 상황 앞에서는 일단 최악의 경우로 상정하는 편이 나으리라.
“글쎄요. 그대가 말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과 평민들이 다를 게 있을까요? 더구나 폐하의 신하 된 사람으로서 할 말은 아니라고 보는데요.”
로엘린의 푸른 눈이 프렌티스에게 향했다. 프렌티스는 유약하게만 봤던 황후가 다소 엄격한 어조로 말을 꺼내자 흠칫하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당연히 다르지요. 드높은 이상과 신념 따위는 알지도 못한 채 짐승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저들과 우리가 설마 동등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리고 제가 무슨, 제국에 반하는 말씀이라도 드린 것처럼 비난하시는데…….”
“세로이프는 신분 제도가 고착화되어 있지 않죠.”
로엘린은 프렌티스의 말을 끊은 뒤,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누구나 본인의 노력에 따라 신분이 올라갈 기회를 얻는다고 들었어요. 그렇지 않나요, 폴린 부인?”
그녀는 폴린을 향해 고개를 돌려 질문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폴린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답니다, 황후마마. 라카인이나 프졸란, 카이제넨과는 다른 점이지요. 얼마든지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바라는 일을 할 수도 있어요. 물론 그에 합당한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게 선결 조건이지만요.”
폴린의 얼굴에 자부심이 깃들었다. 다른 노부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허리를 더욱 꼿꼿하게 세우고 뿌듯한 기색을 드러냈다.
반면, 세로이프 태생이 아닌 부인들은 불쾌감을 내비치며 표정을 굳혔다. 프렌티스는 제 주위를 둘러보고는 그에 용기를 얻었는지 다시금 반박했다.
“그렇다 하여 그게 옳다고는 볼 수 없지 않은가요? 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벌레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매를 동등하게 볼 수 없듯 말이에요.”
프렌티스는 자신이 말하고도 스스로 제가 꺼낸 비유가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조금 보석과 관련하여 말을 꺼냈던 여인이 슬그머니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해요. 황후마마께서도 라카인의 고귀한 혈통이시니, 당연히 저희와 같은 생각이실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버려진 쪽은 그렇지 않은 걸까요. 여인이 말끝을 흐리며 직접 입에 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런 말을 덧붙이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그건 그쪽의 사정일 뿐.
그것을 자신이 내버려 둬야 한다는 건 아닐 터.
로엘린은 여인과 프렌티스, 그리고 그 외에도 그들에게 동조하는 공국 출신 여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고귀한 혈통이 아니에요.”
로엘린의 목소리는 맑았다. 또한 흔들림 없이 단호했다. 스스로를 고귀한 혈통이 아니라 말하면서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되레 당황해하고 동요한 건 다른 여인들이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
“그리고 그대들 역시 특별히 고귀한 혈통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황후마마! 그런 모욕적인 말씀을 하시다니요!”
누군가가 로엘린의 이어진 말에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감히 그녀의 앞에서 언성을 높이다니.’
케르겔은 당장에라도 티 파티가 열리고 있는 정원으로 난입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은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신이 관여해도 되는 순간이 아니라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저 지금은, 그녀를 믿고 지켜봐야 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케르겔은 정원 입구 근처의 나무에 몸을 숨긴 채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속까지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달래며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그 순간, 정원 입구 쪽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지더니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어, 폐…….”
쉿.
케르겔은 눈이 휘둥그렇게 커진 채 무엄하게도 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시녀를 보고는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가져갔다. 그러자 시녀가 황급히 본인의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눈치는 빠르군.’
로엘린을 모시는 시녀였다. 이름이 실로아였던가. 덤벙거리고 가벼운 것 같기는 하지만, 제 주인인 로엘린을 모시는 데에 있어서는 진심을 다하고 있어서 시녀장이 가끔 칭찬을 하는 걸 들을 수 있었다.
……뭐, 그보다는 야단을 더 많이 맞는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케르겔은 시녀의 뒤에 빠르게 다가와 그녀를 조용히 야단치는 시녀장, 루시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표정을 굳힌 채 로엘린의 말을 들었다.
“내가 그대를 모욕했다고 생각하나요? 오히려 그대는 그대 스스로 자신을 모욕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나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저를 모욕하고 있다니요?”
여자가 어이없다는 듯 로엘린의 말에 반문했다. 불경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로엘린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타인을 천하다고 말하는 그대의 편견이 스스로를 모욕하고 있는 게 아닌지, 말하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그런 궤변이 어디 있어요! 편견이라고요? 그건 엄연히 수백, 수천 년을 내려온 진실이에요. 사람이 어떻게 동등할 수 있나요? 태생부터가 다른데, 핏줄부터가 다른데요. 라카인의 고귀한 혈통이신 황후마마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정말…….”
“다시 말하지만, 나는 고귀한 혈통이 아니에요. 그리고 나와 같은 피가 흐르는 라카인의 왕족 역시 고귀한 존재가 아니에요.”
케르겔은 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로엘린을 바라보았다. 거리가 멀다 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여인들의 사이에서 곧은 시선으로 그렇듯 당당히 말하고 있었다.
“사람을 귀하다 말할 수 있는 건 그 사람이 그저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인정받을 수 있는 건 그 사람이 그만큼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고, 그만한 인품을 지니고 있어서일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세로이프에서는 인재를 등용함에 있어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을 보는 것이죠.”
“바로 그 제도가 문제라는 생각은 안 하시는 건가요?”
“그대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죠.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요. ……그대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버려진’ 왕녀였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말이에요.”
로엘린의 말에 여기저기서 황급히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케르겔 또한 그녀의 말을 엿듣다 말고 눈을 크게 떴다.
본인의 입으로, 본인의 태생에 해한 이야기를 꺼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모든 상황이 마무리되었다고 해도, 그 상처마저 아문 것은 아닐 것이기에 그조차도 다시금 입에 담는 게 어려웠던 이야기를 말이다.
“이곳에 처음 오고, 그 점이 가장 놀라웠어요. 태어날 때의 신분이 죽을 때까지 평생 고착되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
로엘린의 푸른 눈은 조금도 주눅 들어 있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이 엿보이지도 않았다. 푸른 시선은, 그저 청명한 하늘을 닮아 있었다.
누구에게나 환한 햇살을 전하는 태양을 온전히 품고 있는 하늘처럼.
“그래서 생각했어요. 나도 이곳에서 태어났더라면 다르게 살 수 있었을까 하고. 세로이프에서 태어났더라면 라카인의 별궁에 갇혀 무의미하게 하루하루 살아야 했던 껍데기 왕녀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
“화, 황후마마…….”
케르겔의 뒤에서 입을 틀어막고 있던 시녀의 귀에도 로엘린의 말이 들린 것인지, 시녀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로엘린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는 평온한 표정으로 다른 여인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세로이프의 제도가 옳다고 봐요.”
로엘린의 말이 끝난 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공국 출신의 여인들은 불편한 기색으로 차만 마셨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간신히 화제를 돌렸다.
그 뒤로는 그저 식상한 이야기의 나열이었다.
노부인들 역시 그 대화에 적당히 어울리며 분위기를 맞춰 주었을 뿐, 딱히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이제 가 보도록 해.”
“예, 폐하.”
케르겔은 나무에 기대어 서서 루시와 시녀를 향해 말했다. 루시는 시녀와 함께 예를 표한 뒤,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여리지만, 한편으로는 강단 있는 여자였다.
“아무렴. 누구의 반려인데.”
그는 로엘린을 슬쩍 바라보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 * *
“수고가 많았어, 루시. 다들 고생했고.”
“아닙니다, 황후마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걸요. 오히려 저희가 서툰 점이 많아서 제대로 시중을 들어 드리지 못한 것 같아 송구합니다.”
“아니. 아주 좋았어. 물론 나도 티 파티는 처음이라, 잘 모르지만 말이야.”
로엘린은 루시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농담조로 말을 건넸다. 그러고는 어깨의 힘을 풀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온몸이 노곤했다.
“잘 끝낸 게 맞지?”
그 와중에도 내심 마음이 쓰였다. 자신이 제대로 티 파티를 이끌어 나갔던 것인지, 마무리까지 완벽하게 잘 해낸 것인지, 그런 것들이 말이다.
로엘린은 그에 대한 확답을 듣고 싶어 루시를 향해 물었다. 루시가 실로아를 비롯한 시녀들을 통솔하며 티 파티가 열렸던 자리를 정리하다가 그 물음에 웃으며 대답하려 했다.
“물론…….”
“당연히 잘 끝냈지. 그 누구도 이보다 더 완벽하게 잘 끝낼 수 없을걸.”
그러나 루시에 앞서 불쑥 사내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바로 케르겔의 목소리였다.
루시와 시녀들이 황급히 케르겔에 대한 예를 갖추며 뒤로 물러섰다. 로엘린 역시 케르겔이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케르겔이 손을 내저으며 다가왔다.
“됐어, 로엘린. 그냥 앉아 있어. 일일이 그렇게 예를 갖출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그대가 내 신하도 아니고.”
“알았어요, 케르겔. 아! 다과 좀 다시 준비해 주겠나, 루시?”
로엘린이 케르겔을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대꾸한 뒤, 곧바로 루시에게 말을 건넸다. 루시는 허리를 숙여 대답을 하고는 다른 시녀들과 함께 자리를 비켜 주었다.
산들산들 불어온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휘감았다가 놓아주었다. 케르겔은 로엘린의 옆에 앉아 그녀의 흐트러진 머리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힘들었지?”
“아니요. 괜찮았어요.”
“괜찮기는……. 대화도 안 통하는 여자들 상대하느라 당연히 힘들었을 텐데.”
케르겔은 투덜대며 계속 로엘린의 머리를 만졌다.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에 로엘린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사소한 것이지만, 이럴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그의 손끝에 묻어나는 애정에도 가슴이 제멋대로 두근거리며 뛰기도 하고.
특히 이렇듯 단둘이 있을 때는 더욱…….
로엘린은 얼굴이 살짝 달아오르는 걸 느끼고는 제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리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어떻게 이렇게 시간을 잘 맞춰서 온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티 파티가 좀 전에 막 끝난 참인데.”
“……그러게 말이야. 이쯤 되면 끝났겠다 싶어서 왔더니, 마침 딱 끝났더군.”
케르겔은 순간적으로 흠칫했다가 이내 태연한 투로 대꾸했다. 티 파티에 급습하고자 했던 제 시도를 천연덕스럽게 ‘없었던’ 일로 묻어 버린 것이다.
사실, 집무실에서 나올 때만 하더라도 제 마음은 확고했다.
공국 출신 여인들이 가득한 티 파티에서 홀로 곤경에 처해 있을 로엘린이 연상되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술까지는 부리지 않더라도 옆에서 응원 비슷한 것을 할 생각이었는데…….
“왜 그렇게 쳐다봐요?”
로엘린은 바로 옆에 앉아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케르겔의 시선에 괜히 민망해져서 웃으며 물었다.
“그냥, 그대가 내 생각보다도 훨씬 더 대단해서. 은근히 싸움닭 기질도 있는 것 같고.”
케르겔은 로엘린의 물음에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바를 입 밖으로 고스란히 꺼냈다. 그러자 로엘린이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케르겔은 그저 씩 웃기만 할 뿐,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로엘린은 동그래진 눈을 깜빡이다가 뒤늦게 뭔가를 생각했는지 질문을 건넸다.
“설마…… 다 본 거예요?”
“전부 다 본 건 아니고. 아마 중간 정도부터 본 게 아닐까 싶은데.”
케르겔은 로엘린의 말에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로엘린이 그 말에 입을 벙긋거리다가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손바닥에 달아오른 뺨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가 티 파티에서 있었던 일을 봤다고 생각하니 민망했다. 그녀는 쉽게 식지 않는 뺨의 열기를 식히려고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케르겔이 그 모습에 개구쟁이처럼 키득거리며 웃다가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민망해할 것 없어, 로엘린. 정말 멋졌으니까.”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더 민망해요.”
로엘린은 그에게 반쯤 안긴 몸을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케르겔은 그녀를 단단히 안고 있다가 로엘린의 턱을 잡아 저를 마주 보게 하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정말 멋졌어. 강단 있는 모습, 아주 보기 좋았어. 사실, 그래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기도 해. 그대가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내가 불쑥 끼어들면 좀 그렇잖아?”
“…….”
로엘린이 케르겔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뒤, 아주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고마워요. 배려해 줘서.”
“그게 고맙단 인사를 들을 일은 아닌데.”
케르겔이 멋쩍은 투로 대꾸하고는 로엘린의 어깨를 안은 손을 쫙 폈다가 다시 슬쩍 구부렸다.
‘……미치겠군.’
케르겔은 마치 어린아이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듯 손을 움직이다가 한숨을 삼켰다.
따끈따끈하고 말랑말랑한 먹이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그걸 꾹 참고 있어야 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나를 너무 믿고 있는 거 아니야? 아니, 나를 남자로 조금이라도 의식한다면, 이럴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케르겔은 너무나 편안하게 제게 안겨 있는 로엘린의 작은 머리통을 내려다보다가 거듭 한숨을 삼켰다.
‘확 잡아먹어 버릴까 보다.’
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런 케르겔의 속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로엘린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참! ‘레르슈첼의 밤’이라는 게 뭔지 혹시 알아요? 저번에 도서관에서 풍속사와 관련된 책을 읽었는데, 자세한 설명은 없이 오래된 사장된 풍습 중 하나라고만 되어 있어서.”
“응? 레르슈첼의 밤?”
케르겔은 로엘린의 물음에 되레 질문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자 로엘린이 조금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몰라요? 아아, 하긴 책에서도 그냥 예전에 그런 풍습이 있었다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었으니까.”
로엘린은 제 스스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케르겔은 그 상태로 놔두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뭐든지 다 알고, 다 잘하는, 그런 모습을 뽐내고 싶은 게 사내의 마음이니 말이다.
“아아, 레르슈첼의 밤…… 말이지. 그게…… 그러니까, 그게 뭐였더라.”
그게 뭘까. 대체 뭐지? 케르겔은 제 머릿속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그녀가 말한 것에 대해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도 ‘레르슈첼의 밤’인지 뭔지 하는 건 기억나는 게 전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즉, 제 기억 속에 애당초 그것이 저장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이래 봬도 그는 단 한 번 스치듯 접한 것이라 할지라도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기억 안 나는 걸 억지로 떠올리려고 하지 않아도 돼요. 나중에 다른 사람한테 물어보면 되는걸요. 루시라든가, 아니면…… 아! 바쉘 경에게 물어봐도 되겠네요. 그라면 알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가 끙끙대며 기억하려고 애쓰는 걸 보던 로엘린이 케르겔을 만류했다. 그러나 바로 그 말이 케르겔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하이네스에게 물어보겠다고?”
케르겔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질문했다. 그러나 그의 한쪽 눈썹은 이미 제멋대로 올라간 뒤였다.
“예, 바쉘 경은 다방면에 걸쳐 해박한 학식을 갖고 있으니까요. 그렇지 않아도 이따가 바쉘 경의 수업이 있으니 그때 물어보면 되겠네요.”
로엘린은 눈치 없이 케르겔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녀로서는 그저 별생각 없이 사실을 말한 것뿐이었다. 듣는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던 게 문제라 할 수 있겠지만.
“아……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
케르겔이 부글부글 끓는 속을 꾹 참으며 태연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하이네스가 그대에게 오늘 수업은 못 할 것 같다고 전해 달라고 했는데, 내가 깜빡 있고 있었지 뭐야.”
“수업을 못 할 것 같다고요?”
로엘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지난번 수업 때도 그런 말은 전혀 없었고, 외려 오늘 수업에서 배우게 될 의전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나누기까지 한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 수업을 못 할 것 같다니?
“저번 수업 때만 해도 그런 말은 없었는데…….”
로엘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케르겔이 자신도 모르게 움찔거렸다.
당연했다.
로엘린이 하이네스에게 받고 있는 수업은 방금, 자신의 입을 통해 취소되었으니 말이다. 정작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은 둘 다 수업이 취소된 줄도 모르는데…….
그야말로 권력 남용의 현장인 셈이다.
‘뭐, 어쩔 수 없지. 황제로서 한번 권력을 휘두른다고 누가 뭐라 하겠어?’
이번 기회에 폭군이나 되어 볼까. 케르겔은 제 유치한 거짓말에 괜히 스스로 민망해져서 싱거운 소리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어쩔 수 없겠네요. 다음에 물어보든지…….”
“내가!”
로엘린이 체념한 듯 입을 열자마자 케르겔이 급히 말을 꺼냈다. 그 바람에 그의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는지 로엘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턱을 쓸어내리며 헛기침을 한 뒤, 다시금 차분한 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알아봐 주지.”
“괜찮아요, 케르겔. 중요한 건 아닌걸요. 그냥 책을 읽다가 본 거였을 뿐이라, 당장 알아내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게다가 바쉘 경이 그렇게 바쁘다면, 당신은 더 바쁠 거잖아요.”
“……응?”
케르겔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며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곧 표정을 고치고는 어색하게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물론 바쁘…… 흠, 바쁘기는 하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 최우선 순위는 항상 그대야. 무슨 일이 닥쳐도 언제나 그대가 나한테는 제일 중요하다고.”
케르겔의 뒷말은 진심이었다. 로엘린이 그 마음을 알아차린 듯 얼굴을 붉게 물들인 뒤, 고개를 끄덕였다.
* * *
하이네스는 서류를 훑어보다가 시선도 돌리지 않고 손을 뻗어 찻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입가에 대고 차를 마시려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다 마신 건가.”
그는 빈 잔을 보고 책상 위에 놓인 찻주전자 역시 비어 있는 걸 확인하더니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는 몸의 힘을 쭉 뺐다.
그나마 차를 마시면서 힘을 냈는데, 차가 다 떨어진 걸 보니 의욕마저도 사라진 것이다.
“휴우……. 그래도 이것만 해 놓고 나면 황후마마를 뵈러 갈 수 있으니.”
그는 다시금 힘을 내며 펜을 들었다. 요즘 하이네스에게 한 가지 즐거움이 있다면, 바로 황후와의 교육 시간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한 적은 없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이런 말을 듣는다면 오해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자칫 엉뚱한 치정 사건으로 번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름다운 황후. 그리고 제 입으로 말하기는 겸연쩍기는 하지만, 제법 잘생긴 편에 속하는 자신.
딱 치정극에 어울릴 법한 관계가 아니겠는가.
하이네스는 제 머리로 생각하고도 민망해져서 피식 웃고 말았다.
어쨌든 그가 황후와의 수업을 즐겁다고 느끼는 건 순수한 의미에서였다.
말 그대로 ‘수업’에서 느끼는 즐거움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실한 제자’를 둔 데에서 비롯된 즐거움이라고 해야 할 터였다.
“황후마마께서 그렇게나 열심히 하시는데, 내가 대충 할 수는 없지.”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서류를 검토하는 속도를 높였다. 이 일을 빨리 끝내 놓은 뒤, 황후궁으로 가기 전에 수업 준비를 다시 한 번 해야겠단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곧바로 깨지고 말았다. 제 집무실에 노크도 없이 무작정 들어온 침입자 때문이었다.
쾅!
문이 열리는 소리에 하이네스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집중이 순간적으로 흐트러지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짜증이 난 탓이었다.
“대체 누가 이렇게 무례하게…… 폐하?”
하이네스는 차가운 눈으로 따지려다가 문을 열고 들어온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한 뒤,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왜 오신 겁니까? 티 파티에 가서 한창 난동을 부리고 계실 줄 알았더니. 아, 혹시 그 바람에 황후마마께 쫓겨나기라도 하셨습니까?”
갑자기 일을 방해받은 탓에 하이네스의 뒷말이 살짝 뾰족해졌다. 그러나 케르겔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이네스를 노려보기만 했다. 누가 보면 철천지원수를 만나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폐하,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설마 지금 엉뚱한 사람한테 화풀이라도 하려고 오신 건 아니시겠죠? 가뜩이나 바쁜데……. 황후마마를 뵈러 가기 전에 이걸 전부 처리해야 한단 말입니다.”
하이네스가 한숨과 함께 한탄 섞인 말을 늘어놓았다.
평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걸 싫어하는 케르겔이 일의 상당 부분을 제게 떠넘긴 탓에 항상 온갖 서류에 짓눌려 살다시피 하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원망이 슬쩍 깃든 투였다.
하지만 케르겔은 이번에도 역시 아랑곳하지 않고 하이네스를 노려보다가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왜! 로엘린이 자네를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거야!”
“……예?”
하이네스의 보라색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더니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일도 못 하게 방해하시더니, 고작 그런 헛소리를 하려고 오신 겁니까?”
하이네스가 차갑게 식은 얼굴로 타박하듯이 받아쳤다. 조금 전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랐던 그 엉뚱한 ‘치정극’이 떠오른 터라 민망함이 앞서서 더 날카로워졌다.
그러자 케르겔이 그의 책상을 두 손으로 내리치더니 항의조로 말을 이었다.
“왜 그렇게 똑똑한 건데! 응? 조금만 멍청해졌어도 좋지 않나!”
“……그러게 말입니다. 그랬다면 제가 이 고생을 하며 살고 있지는 않겠죠.”
하이네스는 엉뚱한 헛소리만 내뱉는 주군을 보다가 한숨을 내쉰 뒤, 심호흡을 했다. 자신이라도 냉정을 되찾아야 한다는 뒤늦은 자각 때문이었다.
제멋대로 행동하는 황제 때문에 속이 터졌던 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무엇 때문에 이러시는 겁니까, 폐하?”
하이네스가 간신히 평정을 되찾고 차분하게 묻자 케르겔 역시 눈썹을 실룩이더니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레르슈첼의 밤’이 뭔지, 혹시 알아?”
“……레르슈첼의 밤, 말씀이십니까?”
케르겔의 물음에 하이네스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묘하게 변했다. 케르겔은 그런 친우의 변화를 재빨리 알아차리고는 재차 물었다.
“알고 있는 건가? 대체 그게 뭐지?”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다. 로엘린의 말대로 하이네스가 알고 있는 게 맞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존심을 내세우며 돌아설 수는 없었다. 그는 거듭 재촉하며 하이네스의 설명을 기다렸다.
그러나 하이네스는 어째서인지 쉽게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그런 것도 모르느냐며 타박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묘하게, 그렇게 쳐다보기만 할 뿐.
“레르슈첼의 밤이란 게 뭔데, 그렇게 쳐다보는 건가!”
“그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아니, 그보다…… 그건 왜 물어보시는 겁니까?”
하이네스가 말을 고르는 것처럼 느릿느릿 물었다. 케르겔은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닌 다른 질문이 되돌아오자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아쉬운 건 자신이니 말이다.
“로엘린이 책을 읽다가 그것에 대해 간단히 언급되어 있는 걸 봤다더군. 그래서 그게 뭔지 아냐고 나한테 물어보더라고.”
“아아……. 별로 기록상으로 남아 있지 않을 텐데, 어떻게 발견하셨나 보군요.”
하이네스는 그제야 케르겔의 뜬금없는 행동을 납득하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케르겔이 조급한 투로 재차 물었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나. 도대체 레르슈첼의 밤이 뭐냐니까?”
“…….”
케르겔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하이네스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답지 않게 난감해하는 기색마저 엿보이자 케르겔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하이네스는 그런 케르겔의 모습을 보고 한숨을 내쉰 뒤,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밤을 청하던 풍습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지 오래되기는 했지만.”
“밤을 청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하이네스의 대답에 되레 혼란스러워졌다. 그가 이렇게 설명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러나 싶어 의아한 마음도 함께 들었다.
케르겔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금 묻자 하이네스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조금 더 풀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레르슈첼은 세로이프 전통 과자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거의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것을 만드는 법을 알고 있다고 하지요. 레르슈첼을 만드는 법이 워낙 까다로운 편이라 말입니다.”
“그런데?”
그게 이렇게 망설이며 대답할 일인가 싶어 케르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하이네스가 거듭 헛기침을 하더니 조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과자를 직접 만들어 밤을 함께 보내기를 원하는 연인에게 선물하던 풍습이 바로 ‘레르슈첼의 밤’입니다.”
“……밤을 함께 보내기를 원하는 연인에게?”
하이네스의 말을 듣던 케르겔의 눈이 흔들렸다. 하이네스는 제 주군의 금색 눈동자가 흔들리는 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케르겔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과자를 만들어서 선물하는 건데? ‘밤’과 ‘과자’가 무슨 관계가 있다고.”
“레르슈첼의 모양이, 흠, 민망한 얘기이기는 하지만, 교합한 남녀를 닮았다고 하더군요.”
“뭐?”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폐하. 아마 그 기록이 있는 책이 저기 어디에 있을 겁니다.”
하이네스는 말로 설명을 이어 나가느니 책으로 직접 보여 주는 편이 낫겠단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책장 가득 꽂혀 있던 책들 속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내 들고 돌아왔다.
“바로 이것이 레르슈첼입니다.”
“그래 봤자 과자 따위가 무슨, 그런 걸 닮았다고…….”
케르겔은 시큰둥한 투로 고개를 쭉 빼고 하이네스가 펼친 책을 보다가 그대로 말끝을 흐렸다. 뒤이어 그의 얼굴과 목덜미가 시뻘겋게 변하기 시작했다.
하이네스의 말은 정확했다. 그는 책에 나와 있는 레르슈첼의 모양을 보며 입을 벌렸다. 하이네스가 케르겔의 반응을 확인한 뒤, 멋쩍은 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닮았다고요.”
“선조들은 무슨 이런 모양의 과자를 만든 거지? 이런 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는 거야?”
케르겔이 뒤늦게 제 목덜미를 문지르다가 투덜거렸다. 그러면서도 책에 그려진 레르슈첼에서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했다.
확실히 그 과자의 모양은 남녀의 교합하는 모습과 비슷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얘기를 들어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자신과 로엘린의 모습을 대입시키려다가 부르르 몸을 떨고는 고개를 흔들며 말을 돌렸다.
“그럼 이걸 선물하면서 밤을 청한다는 의미가…….”
“예, 폐하. ‘그런’ 밤을 청하는 것이지요. 직접 입에 담는 게 쑥스럽고 민망하니, 그런 식으로 대신 자신의 마음을 전했던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옛 선조들도 참, 뭐라고 해야 하나…….”
케르겔은 콧등을 긁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고는 별 풍습이 다 있었단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저으려던 순간, 그의 머릿속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잠깐……. 그러고 보니 이걸 기회로 삼을 수도 있잖아?’
케르겔이 눈을 빛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와 동시에 하이네스가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가는 걸 보고 불길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언제나 뭔가 일이 벌어지고는 했던 게 떠오른 탓이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럼, 그 구체적인 레시피가 기록되어 있는 책도 있나?”
“지금 여기에는 없지만, 아마 황궁 도서관 내의 고서 보관소에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건지요?”
하이네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케르겔에게 순순히 대답한 뒤, 질문을 건넸다. 그러자 케르겔이 별일 아니라며 손을 내젓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네 일하는데 내가 너무 시간을 많이 빼앗았군. 그럼 수고하도록 해.”
“……폐하?”
케르겔이 서둘러 일어나는 모습에 하이네스는 더욱 의아해졌다. 그러나 더 뭔가를 물어볼 새도 없이 케르겔은 부리나케 하이네스의 집무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뭔가 불안한데.”
하이네스는 미간을 좁히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 *
“……그, 예에?”
황궁의 수석 주방장, 베론은 무심코 대답하려다 말고 고개를 퍼뜩 들었다. 방금 자신이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싶었다.
아마도 제 귀가 잘못된 것이리라, 생각하며 그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제 앞의 황제, 케르겔에게 되물었다.
“폐하, 방금 하신 말씀이…… 그러니까…… 설마 이 과자를 직접…….”
그러나 막상 베론은 쉽게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만큼 케르겔이 저를 불러 내린 명령이 너무나 어이없었던 것이리라.
그것을 재확인시키기라도 하듯 케르겔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베론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직접 이것을 만들 수 있도록 성심껏, 잘 가르치도록 하라. 이달 안에, 최대한 빨리.”
“이, 이달 안이라니요? 그래 봤자 고작 닷새 정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베론은 잠시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입만 벙긋거리며 케르겔의 말을 듣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뒤, 항의조로 말했다.
이달 안에, 라고 그가 정한 기한에 위기감이 든 탓이었다. 하지만 베론의 앞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케르겔은 한쪽 눈썹을 올리더니 태연한 투로 입을 열었다.
“닷새면 충분하지. 설마 황궁의 수석 주방장이 그 정도도 못한다고, 징징거리기라도 할 셈인가?”
“징징거리다니요! 제가 지금 어린애들이나 할 법한 투정을 부린 게 아니지 않습니까! 어떻게 폐하께 과자 만드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닷새 안에…….”
“고작 이 과자 레시피 하나를 가르치는 거잖아. 내가 무슨 대단한 요리를 가르치라 한 것도 아니고. 나 같은 인재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닌가? 이까짓 과자 만드는 법 정도야 하루, 아니, 몇 시간이면 충분히 터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케르겔은 베론의 우는 소리를 중간에 끊어 버린 뒤,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말이 수석 주방장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일까.
베론이 미간을 꿈틀거리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래전 격투사로 잠시 이름을 날렸던 그의 모습이 언뜻 보이는 듯싶었다.
“허허, 폐하. 겉으로 볼 때는 간단한 요리일 수 있어도 그 과정까지 간단하지는 않답니다. 재료 손질부터 시작해서 이런저런 단계를 거쳐야 하는 법이지요. 그렇지 않은가, 베론?”
그 순간,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시종장이 끼어들었다. 당장이라도 베론이 하극상, 아니, 반역을 꾀할 것만 같은 모양새로 씩씩대고 있어서 그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저를 제외하고 보는 눈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황제와 황궁 수석 주방장이 서로 주먹다짐을 하게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케르겔이 시종장을 힐끗 쳐다보더니 그 속내를 짐작한 듯 콧등을 긁적이며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다시 베론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는 내가 말실수를 했군. 미안하네, 베론.”
“아, 아닙니다. 폐하.”
베론은 케르겔을 향해 날릴 뻔했던 주먹을 편 뒤, 당황하여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제 앞에 놓인 책을 보더니 이내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오래전에 사라진 요리법들이 참 많았군요. 이런 기록이 남아 있는 줄 알았다면 진작 이것저것 시도를 해 봤을 텐데 말입니다.”
베론이 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손을 움찔거렸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이 책을 들고 그대로 달아나고 싶단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레르슈첼을 완벽히 만들 수 있도록 돕는다면, 그 책을 빌려주도록 하지.”
케르겔은 그런 베론에게 미끼를 던지듯 말했다. 그러자 베론이 냉큼 그 미끼를 삼키고는 고개를 들었다.
“비, 빌려주신다고요? 이, 이 책을 말입니까.”
“물론이네.”
케르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베론의 눈이 크게 뜨이더니 좌우로 바쁘게 움직였다. 뒤이어 그의 목젖이 움직이면서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케르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베론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열과 성을 다하겠습니다, 폐하! 지금 당장 교육을, 아니, 실습을 시작할까요?”
베론의 눈이 과한 의욕으로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 * *
“……오늘도 바쁘시다고?”
로엘린은 루시가 난처해하며 꺼낸 말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행세하려 했지만, 시무룩해지는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실로아가 그 모습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입을 열었다.
“저, 황후마마, 제가 다시 한 번 시종장님께 말씀을 드려 볼까요?”
“아니야, 됐어. 바쁜 사람을 방해할 수는 없지.”
“그래도요! 함께 식사할 시간조차 없이 바쁘시다는 건 말도 안 되잖아요! 솔직히 지금까지 재상님께서 일은 더 많이 하셨는걸요. 폐하께서 언제부터 그렇게 바쁘셨다고…….”
실로아는 마치 자신이 거절이라도 당한 것처럼 속상해하며 투덜거리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제 말 때문에 로엘린이 더 마음을 상할까 염려해서였다.
그러나 로엘린은 괜찮다는 듯 가만히 웃었다. 물론 그 속까지 괜찮은 건 아니지만 말이다.
요 며칠,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벌써 사흘째, 그녀는 케르겔을 보지 못했다. 하다못해 밤에도 침실에 들어오지 않고 있는 터라 그를 전혀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루시나 시종장을 통해 물어보면, 그저 같은 대답만이 돌아올 뿐이었다.
바빠서, 할 일이 있어서, 그래서 같이 식사를 할 수 없다고 했고, 먼저 자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저 많이 바쁜가 보구나, 그렇게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 그리고 이제 사흘째 접어드니 괜한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었다.
혹시…… 그가 제게 싫증이라도 난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물론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건 잘 알고 있다. 케르겔, 그 사람의 마음이 이렇듯 쉽게 변했을 리도 없을 뿐만 아니라, 만약 마음이 변했다면 제게 직접 말해 주었을 테니까.
“어쩔 수 없지, 뭐.”
로엘린은 애써 마음을 다잡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자 실로아가 조금 마음을 놓은 듯 입을 열었다.
“그럼 식사를 준비할까요?”
“그렇게 해 줘, 실로아.”
로엘린은 실로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실로아가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방 밖으로 나갔다. 로엘린이 그쪽을 잠시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화사하게 피어 있는 꽃을 물끄러미 보다 말고 불쑥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는 지금 집무실에 계시는 걸까?”
“……예? 아, 아마 그렇겠지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루시가 당황하여 그녀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로엘린이 그 반응에 눈을 가늘게 뜨고 루시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루시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했다.
“혹시 나한테 뭐, 숨기는 게 있는 건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루시는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어색하기만 했다.
“정말 뭘 숨기고 있는 건가? 폐하께서…… 내게 뭘 숨기라고 하셨어?”
로엘린의 표정이 굳었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목소리도 떨려 나왔다. 루시는 이러다가 큰일이 나겠단 생각에 서둘러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황후마마. 지금 뭔가를 오해하고 계시는 듯하지만, 결코 그런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이 아니라니, 그럼 대체 무슨 일이지?”
“그…… 그게…….”
루시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모든 걸 털어놓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절대! 절대 황후에게는 말해서는 안 되네, 루시!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단 말이야.>
황제의 신신당부만 없었더라면, 벌써 전부 다 털어놓았을 것이었다. 루시는 밀가루를 얼굴 여기저기에 묻힌 채 몇 번이나 당부하던 황제, 케르겔을 떠올리며 한숨을 삼켰다.
‘과자를 직접 구워서 선물을 하시겠다니.’
그런 엉뚱한 발상을 하다니.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케르겔의 꿍꿍이를 모르는 루시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 * *
꾸울꺽.
누군가가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그 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워낙 조용했던 터라 침을 삼키는 소리마저도 크게 들린 탓이었다.
그중에서도 수석 주방장, 베론의 시선이 가장 날카로웠다. 그는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주방 보조를 다시 한 번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려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폐하.”
“아직 아니야. 조금만 더.”
제발 배운 대로 좀 하십시오! 베론은 케르겔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이 가르치는 주방 보조였더라면 벌써 머리를 몇 번이나 쥐어박고 정강이를 걷어찼을 것이다. 하라면 하라는 대로 말이라도 들으면 좋을 텐데, 꼭 저렇게 고집을 부리다니 말이다.
첫날만 하더라도 순순히 배우는 것 같더니…….
<이건 뭔가 잘못됐어. 베론, 자네가 하라는 대로 했는데 이 덜 익은 반죽은 뭐지?>
첫날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이런 결과를 가져올 줄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론은 황제를 가르친다는 부담감과 고대의 요리법이 적혀 있는 고서를 볼 수 있다는 흥분에 저도 모르게 정신을 놓아 버렸던 제 자신을 뒤늦게 탓했다.
그때 자신이 실수하지만 않았어도 황제가 저렇듯 제멋대로 고집을 부리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벌써 교육을 끝내고, 지금쯤 책과 함께 황홀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됐어. 이제 꺼내도록 하지.”
케르겔은 눈을 빛내며 오븐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모두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아, 이번에도 망했구나, 라고.
“…….”
케르겔은 숯덩이를 내려다보며 침묵했다. 베론은 그 모습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폐하, 어, 으음, 다 잘하셨는데, 시간을 조금…….”
“오븐에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해.”
케르겔은 베론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러자 베론이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실룩이더니 그대로 침묵했다.
본인이 잘못해 놓고 죄 없는 오븐을 탓하는데,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
베론이 황제에 대한 불손한 불평을 속으로 늘어놓는 와중에 다시금 케르겔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과는 달리 살짝 주눅이 든 투의 목소리였다.
“……시간을, 조금 줄여 볼까?”
“예?”
“오븐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그…… 으음, 시간도 조금 줄여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이지. 베론, 자네 말대로.”
케르겔의 목덜미가 벌겋게 달아오른 게 베론의 눈에 들어왔다. 베론은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끌어 내리느라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한 번 더 해 보지.”
케르겔은 주방장이 웃음을 억지로 참는 걸 눈치챘지만 애써 모르는 척 외면하고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다시 레르슈첼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후우……. 차라리 용이라도 한 마리 때려잡는 편이 낫겠어.”
신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용을 잡는 게 이보다는 쉽지 않을까, 케르겔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삼키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 * *
“……흐음.”
로엘린은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일어나 앉았다. 창밖에서 들어오던 달빛이 그녀를 반기는 것처럼 일렁였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창문을 통해 쏟아지는 달빛을 잡아 보려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잠을 안 자고 뭘 하는 건가, 스스로 유치하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로엘린의 입가에 번졌던 웃음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뭔가를 고민하듯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돌려 제 옆을 돌아보았다.
그 주인이 아예 온 적 없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침대 위에는 구겨진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손을 뻗어 침대 시트를 만지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나를 피하는 건지 알려 주면 좋잖아.”
로엘린이 꾹꾹 참고 있던 불만을 그제야 입 밖으로 꺼내 놓았다. 루시나 실로아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참느라 가슴속이 답답했던 터였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쉰 뒤, 입을 삐죽이고는 제 옆의 빈자리를 주먹으로 때렸다. 그래 봤자 시트의 먼지조차 털어 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약한 손길이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주먹으로 한 번 침대 시트를 때려 화풀이를 하고 나니, 조금은 속이 후련해진 것도 같았다.
“휴우…….”
로엘린은 크게 들이쉬었던 숨을 그대로 내쉬고 잠시 눈을 굴리다가 침대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뭔가를 다짐하듯 입술을 앙다물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좋아. 혼자 고민하지 말고 직접 가서 물어보자.”
그가 오지 않는다고, 그냥 막연히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거듭 고개를 주억거렸다.
달라지겠다고, 변화하겠다고, 그렇게 결심했는데 저도 모르게 라카인의 별궁에 갇혀 살던 시절의 모습을 답습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가 오지 않으면 속으로 끙끙거리며 고민할 게 아니라, 그에게 찾아가서 물어보면 될 일인데 말이다.
로엘린은 숄을 어깨에 두른 뒤,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침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가 황급히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황후마마, 늦은 시간인데 어찌 나오셨는지요.”
“폐하를 뵈러 가야겠어. 일이 많다 하셨으니, 집무실에 계시겠지?”
“예? 앗! 황후마마!”
로엘린이 곧바로 걸음을 옮기자 시녀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바람이 차갑습니다, 황후마마. 마차를 곧 준비시킬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시녀는 곧바로 황후궁 밖으로 나가려는 로엘린을 보고 안절부절못하며 입을 열었다. 로엘린은 그런 시녀를 돌아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숄을 걸쳤으니 괜찮아.”
“하지만…….”
시녀는 로엘린의 얇은 드레스를 힐끔거리며 발을 동동 굴렀다. 밤늦은 시간이라 저 혼자 있었던 탓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로엘린은 그런 시녀의 마음을 눈치채고는 거듭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단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저 폐하를 뵈러 가려는 것뿐이야.”
“그렇지만 황후마마.”
“바쁘다 하시니, 내가 직접 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니? 아! 그래, 밤참이 될 만한 걸 챙겨서 가는 게 좋겠어.”
로엘린은 시녀에게 말하다 말고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을 빛냈다. 그러고는 황제의 집무실이 있는 궁이 아닌, 주방이 위치한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요 며칠 얼굴을 보지 못하기도 했고 불쑥 밤늦게 찾아가는 게 내심 어색하니, 야식을 챙겨 왔다는 핑계를 대는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충동적이기는 하지만 꽤 괜찮은 생각이란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주방이 위치한 소궁 가까이 다다랐을 무렵,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게 보였다. 로엘린은 낯익은 이의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사이에 로엘린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시녀장, 루시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화, 후우, 황후마마…….”
“숨부터 고르게, 루시. 그렇게 예를 갖추지 않아도 되니까.”
로엘린은 루시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루시가 빠르게 숨을 두어 번 내쉰 뒤, 재차 말을 이었다.
“송구합니다, 황후마마. 뒤늦게 연락을 받은 터라…….”
아마도 자신이 이곳으로 향하던 도중에 마주쳤던 시종이나 시녀들 중 누군가가 루시에게 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 모양이었다.
아니, 루시뿐만 아니라 실로아에게도.
로엘린은 루시의 뒤편에서 역시 헐레벌떡 달려오는 실로아를 보고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 때문에 다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나왔나 보네.”
그저 조용히 케르겔을 보러 가고 싶었던 것뿐인데. 로엘린은 자신의 경솔함을 탓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아닙니다, 황후마마. 언제 어느 때든 황후마마를 보필하는 것이 저희의 소임입니다.”
루시가 로엘린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는 그녀를 편하게 해 주기 위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로엘린은 그 배려가 고마워서 루시를 잠시 쳐다보다가 가볍게 미소를 지은 뒤, 말을 이었다.
“그럼 도움을 좀, 청해도 되겠지?”
“도움이라니요. 그저 명령을 내려주시면 됩니다.”
루시는 거듭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로엘린이 그 모습에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건넸다.
“폐하께 밤참을 챙겨 드리고 싶어서 주방에 가려던 길인데, 내가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서.”
“……주방에 가신다고요?”
“아, 그럼 주방장을 비롯해 여러 사람을 깨우는 일이 될까? 그냥 남은 음식이 있다면 그냥 그걸 챙겨 갔으면 하는데…….”
안 되려나. 하기야 황제에게 가져간다면서 남은 음식을 챙겨 가는 게 이상하기는 하지만. 로엘린은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경솔했던 것인지 재차 깨닫고는 민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됐어. 내가 여러 사람을 귀찮게 했네. 다들 미안해.”
로엘린은 황후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리려 했다. 케르겔을 직접 보러 가고 싶은 욕심에 다른 이들이 번거로워지는 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어깨가 축 늘어지는 걸 느끼며 몸을 돌렸다. 그 순간, 루시가 고민 가득한 표정으로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실은…… 지금 폐하께서 주방에 계십니다.”
“……뭐? 주방?”
로엘린이 루시를 돌아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루시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저도 자세한 건 알지 못합니다. 다만 폐하께서 직접 과자를 구워 황후마마께 선물해 드리고 싶다 하시면서 비밀로 하라고 명하셨던 터라…….>
그래서 말씀을 드릴 수 없었다고, 루시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여 말했다.
로엘린은 루시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다들 밖에 있으라고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자박자박, 그녀의 발소리만이 고요한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로엘린의 발걸음이 주방 문 앞에서 멈췄다.
바로 이 문 너머에 그가 있다고 한다.
이 늦은 시간에.
더구나 주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남자가.
할 일이 있다며 저와 함께 식사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래서였다. 늦은 밤까지 침실에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 역시 그랬다.
제게 과자를 직접 구워서 선물하기 위해서.
그래서 요 며칠, 황궁의 수석 주방장을 붙들고 과자 만드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고 한다.
업무 외의 시간을 온전히 그것에 할애했으니 많이 바빴을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괜한 오해를 하기도 하고, 엉뚱한 생각도 했으니…….
로엘린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걸 느끼며 손을 꼭 오므려 쥐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문이 열리고 로엘린의 눈에 한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굳이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케르겔이 이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이미 듣고 왔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눈으로 직접 그를 보니, 뭐라고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을 가득 채웠다.
이런 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먹먹하고 눈물이 날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올 것도 같고, 가슴이 제멋대로 두근거리며 뛰기도 하는, 이런 감정을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로엘린은 걸치고 있던 숄을 꽉 여미며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케르겔은 그녀의 기척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자신이 하던 일만 계속 이어 가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제 작은 기척조차도 놓치는 일이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만큼 집중하고 있는 것이란 의미였다. 하다못해 집무실에서 일을 할 때도 이렇지는 않았는데…….
로엘린의 시선이 케르겔에게서 그 앞의 탁자 위로 옮겨 갔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건 밀가루 반죽이었다.
그는 그것을 끊임없이 치대고 있는 중이었다. 로엘린은 케르겔의 볼에 밀가루가 묻은 걸 보다가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제국 최고의 권력자가 밤늦은 시간에 홀로 과자를 만들겠다며 이렇듯 밀가루투성이가 되어 있는 모습을 어느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검을 드는 게 더 어울릴 법한 커다란 손으로 저렇듯 앙증맞은 과자의 모양을 만들어 내고 있는 건 또 어떻고.
“자, 이제 면포를 덮어서 잠시 숙성을 시키고……. 그런데 면포를 어디에 두었더라?”
케르겔은 넓게 펼친 밀가루 반죽을 일정한 크기로 떼어 낸 뒤, 그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접어 과자를 빚으며 한 손으로 탁자 위를 더듬거렸다.
잠깐의 시간조차 헛되게 버릴 수 없다는 듯 그의 다른 손은 여전히 과자의 모양을 빚느라 바빴다. 로엘린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탁자 끄트머리에 놓여 있던 면포를 집어 그에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여기요.”
“아, 고마…… 헉! 로, 로엘린? 그대가 여기는 어떻게…….”
케르겔이 무심코 면포를 받아 들다 말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로엘린을 쳐다보았다.
로엘린은 그의 동그래진 금안과 마주하자마자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가 황급히 탁자 위를 제 몸으로 가리며 어색하게 미소를 돌려주었다.
“아…… 저기,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
“콧등에도 밀가루가 묻었네요. 볼에만 묻은 줄 알았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손수건을 가져올 걸 그랬다. 로엘린은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며 케르겔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앞에 서서 까치발을 하고 옷소매로 케르겔의 얼굴 여기저기에 묻은 밀가루를 닦아 주었다.
“로엘린, 저, 아니, 그대의 옷이 더러워질 텐데.”
당황한 케르겔이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한 채 더듬거리다가 뒤늦게 그녀의 옷이 더러워질까 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로엘린은 케르겔의 얼굴을 닦아 주다 말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
케르겔이 그 시선을 피해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그녀는 제 눈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계속 좌우로 눈을 굴리는 그를 바라보다가 툭 던지듯 질문을 했다.
“이것 때문에 요즘 얼굴 보기 힘들었던 거예요?”
“응? 어어……. 미안해, 로엘린. 내가 어떻게든 시간을 냈어야 했는데 말이야.”
케르겔은 로엘린이 건넨 물음에 허둥지둥 대꾸하며 사과했다. 그러나 로엘린은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다가 또다시 다른 말을 건넸다.
“나한테 선물하려고 했다면서요.”
“아. 그, 그건…….”
케르겔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는 붉어진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내리려다가 제 손에 밀가루가 묻어 있는 걸 보고는 그대로 아래로 내린 뒤, 피식거리며 입을 열었다.
“루시가 다 말했나 보군. 비밀로 해 달라고 했더니.”
“나중에라도 루시한테 뭐라고 하지 말아요, 케르겔. 내가 침울해하니까 루시가 어쩔 수 없이 얘기해 준 거예요.”
로엘린은 혹시 저로 인해 루시가 곤란해질까 싶어 황급히 그녀를 대신해 변명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미간을 좁히더니 불쑥 다른 말을 꺼냈다.
“침울해했다고? 왜?”
“그냥…….”
그녀는 그의 물음에 대답을 하려다가 말끝을 흐렸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케르겔을 마주하고 있으니, 지금껏 자신이 뭘 고민하고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과하게 예민한 반응을 보였던 것일까.
아니면 이 남자가 과하게 둔한 것일까.
로엘린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은 뒤, 겸연쩍은 표정과 함께 말을 이었다.
“쓸데없는 오해를 했었거든요.”
“오해라니?”
케르겔은 더욱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조금 전과 달리 이번에 시선을 피한 사람은 로엘린이었다. 그녀는 그의 눈을 외면한 채 머쓱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당신 마음이 변한 건가 하기도 했고. 혹시 나한테 싫증이라도 난 건가 하는 생각도…….”
“뭐?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왜 그런 생각을 해?”
케르겔이 그녀의 말을 다 듣지도 못하고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로엘린이 황급히 입을 닫았다. 그는 혹시 그녀가 저 때문에 놀랐을까 싶어 서둘러 말을 이었다.
“화를 낸 건 아니야, 로엘린. 나는 그저…… 기가 막혀서.”
“기가 막힐 것까지는 아니잖아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라 해도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어요.”
로엘린은 케르겔의 말에 다소 불퉁한 어조로 반박했다. 엉뚱한 착각을 한 건 맞지만, 그래도 그에게서 기가 막히다는 말을 들으니 요 며칠 사이에 자신이 마음고생을 했던 일이 생각나서 기분이 상한 탓이었다.
케르겔이 그녀의 기분이 가라앉은 걸 깨닫고는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어쨌든 미안해. 그대가 그런 오해를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하루라도 빨리 이걸 제대로 직접 만들어서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
“대체 무슨 과자이기에 그랬던 거예요?”
로엘린은 케르겔의 말을 듣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과자 선물’에 집착하는 걸 보니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뒤이은 그의 반응에 그 의문은 더욱 커지고 말았다.
“응? 아, 아니. 그게, 뭐, 그냥…….”
케르겔은 대답을 하는 대신, 당황해하며 말을 더듬었다. 뭔가를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혹은 들킬 위기에 처한 사람처럼 허둥대는 모습이었다.
“케르겔?”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불렀다. 그러자 케르겔이 로엘린을 힐끗 돌아보더니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레르슈첼을, 선물하려고 했어.”
“……?”
로엘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케르겔은 그 눈을 마주하고는 혀를 차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잡아먹을 궁리를 했다고 해야겠지만.”
“……무슨 말이에요?”
로엘린은 케르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 그러자 케르겔이 민망한 얼굴로 작게 헛기침을 내뱉더니 그녀의 시선을 슬그머니 피한 채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나한테 ‘레르슈첼의 밤’에 대해 물어본 적 있었지? 기억나?”
“당연히…….”
로엘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의 이야기가 지금 이 순간, 뜬금없이 다시 나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가 ‘레르슈첼의 밤’에 대해 알아봐 주겠다고 했지만,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이미 사장된 지 오래되어 책에도 자세한 설명이 없던 풍습이니 그것에 대해 알아내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왜 지금……?’
로엘린은 의문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케르겔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레르슈첼이란 과자를 만들어 선물하는 걸 ‘레르슈첼의 밤’이라 불렀다고 하더라고.”
“……?”
“……연인 사이에, 밤을 청하는 의미로.”
“밤…….”
로엘린은 무심코 케르겔이 한 말 속에서 한 음절의 단어를 따라 하다가 이내 얼굴을 붉혔다.
맙소사.
그녀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리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밤을 청한다’는 말 뒤에 숨어 있는 내밀한 의미를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무슨 과자가 그런 의미를 갖고 있는 거야!’
로엘린은 케르겔에게 ‘레르슈첼의 밤’에 대해 물어봤던 저를 돌아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일부러 알면서 그에게 물어본 건 결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얼굴이 화끈거리며 달아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얼마나 황당했을까.
그녀는 케르겔이 ‘레르슈첼의 밤’이 무엇인지 알아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하다가 제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 어어, 그, 그랬군요.”
손으로 입을 막은 탓에 로엘린의 목소리는 웅얼대는 투로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제 상태를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얼굴만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을 뿐.
“로엘린.”
케르겔이 로엘린의 그런 모습을 보다가 뭔가를 각오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대에게 밤을, 청해도 될까?”
“……!”
로엘린의 푸른 눈이 크게 뜨였다. 그러나 케르겔은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내 입으로 내가 했던 말을 번복하는 것 같아서 민망하기는 한데…… 그, ‘당분간’이라 했던 거 말이야. 그 기간이 이제 끝났거든. 아니, 벌써 예전에 끝났어.”
기억하고 있다. ‘당분간’은 그냥 잠만 자자고 했던 말. 결혼식을 치르고 반려 의식까지 마무리를 지었던 날, 처음으로 한 침대를 쓰게 되었던 그날, 그는 제게 그렇게 말했다.
<오늘은 그냥 자도록 하지. 아니, 오늘만이 아니라 당분간은 그렇게 했으면 좋겠는데. 그대 생각은 어때?>
그날만 하더라도 이런 사이가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부부가 되었다고 해서 그의 애정을 기대한 적은 없었으니까.
저 또한 그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고.
따지고 보면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누군가의 진심이 제게 닿은 것도, 제 진심이 누군가에게 닿은 것도.
로엘린은 저를 바라보는 금빛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가 살짝 눈을 돌렸다. 밀가루로 범벅이 된 탁자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편에 놓여 있는 다른 탁자를 본 순간, 로엘린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아, 저건…… 망친 건데.”
그녀의 시선이 어디로 향한 것인지 알아차린 케르겔이 언제 진지했던가 싶게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오븐에 문제가 있는 건지, 저게 덜 익어 나오거나 아니면 까맣게 타서 나오더라고.”
그의 변명처럼 탁자 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는 과자는 하나같이 덜 익었거나 까맣게 탄 상태였다.
그가 홀로 이 주방에서 레르슈첼을 만든답시고 얼마나 오랫동안 시간을 보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밤을 청하기 위해서.
로엘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남자가 이렇게 미련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전 만들어 본 적도 없는 과자를 만들겠다고 홀로 끙끙거릴 게 아니라, 그냥 직접 말을 하면 되었을 텐데 말이다.
이미 부부가 된 사이였다. 그러니 그가 저와 잠자리를 함께하겠다고 말한다 해서 그를 막을 명분은 없었다.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곳, 세로이프의 황제가 원한다는데.
아니, 그걸 다 떠나서도 이미 서로의 마음까지 확인했으니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남자는 그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해서 이렇듯 괜한 고생을 했다.
그 마음이 미련스러우면서도 고맙고, 한편으로는 애틋했다.
“……해도, 돼요.”
그래서 로엘린은 고개를 숙인 채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케르겔이 멈칫하더니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서, 그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는지 한 번만 더 말해 줄 수 있어?”
“……밤, 청해도 된다고요.”
그는 평범한 사람보다 신체적인 능력이나 감각이 월등한 것 같았다. 실제로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말하고는 했고, 제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여러 번이었다.
가끔은 기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놀라운 능력까지 보여 주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자신이 아무리 작게 중얼거렸다고 하더라도 그는 또렷하게 제 말을 알아들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다시금 말해 달라 한 것은…….
그 순간, 케르겔이 로엘린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로엘린이 갑작스럽게 닿은 타인의 입술에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로엘린이 물러서기도 전에 그가 먼저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더니 자신의 두 팔 안에 그녀를 가두었다.
“그 말…… 방금 한 그 말, 무를 수 없다는 거 알지?”
케르겔은 그녀에게서 입술을 뗀 뒤, 로엘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로엘린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은 금방이라도 그녀를 삼킬 것처럼 강렬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집요한 시선에 로엘린은 문득 갈증을 느끼고는 침을 삼켰다. 그저 그뿐이었다. 목이 말라 무심코 나온 행동.
그런데 케르겔에게는 그녀의 그런 행동이 하나의 신호였던 듯싶었다.
“……!”
그가 재차 입을 맞췄다. 그리고 조금 전과 달리 케르겔의 입맞춤은 더 깊고, 오랫동안 이어졌다. 로엘린은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꽉 움켜잡았다.
뜨거운 숨결만큼이나 그의 손길 역시 뜨겁기 그지없었다. 로엘린은 제 어깨를 감싸고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서 사내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하아…… 케르겔.”
로엘린은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살갗이 저릿저릿한 것을 느끼다가 케르겔이 입술을 떼었을 때 간신히 그를 불렀다. 그러자 케르겔이 다시금 그녀를 품에 당겨 안았다.
“안 돼. 무를 수 없다고 했잖아.”
그는 로엘린의 말을 듣기도 전에 거부의 뜻부터 드러내며 그녀의 목덜미에 제 입술을 묻었다. 어떻게 참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조급해하는 모습이었다. 로엘린은 케르겔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저은 뒤, 그의 팔을 잡았다.
“침실로…… 가자는 말을 하려는 거였어요.”
그녀는 그를 달래듯 그의 팔을 쓰다듬으며 재차 말을 이었다.
“여기는, 누가 올지도 모르잖아요.”
케르겔의 금빛 눈동자가 열기에 휩싸여 있다가 조금 이성을 되찾은 듯 맑아졌다. 물론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라는 걸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작은 손톱 끝이 바르르 떨리는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지금 제 반려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그 작은 떨림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아.’
케르겔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굴었다는 걸 자각했다. 참고 있던 욕구가 제멋대로 치솟는 바람에 잠시 이성을 잃었다.
초야조차 치르지 않았던 터라 모든 게 두렵고 낯설 텐데, 그런 이를 이런 주방에서 탐하고자 했으니.
‘미쳤군. 제정신이 아니었어.’
그녀가 놀라서 달아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그는 재차 배 아래쪽에서 올라오려는 열기를 억지로 누른 뒤, 숨을 두어 번 고르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로엘린이 케르겔을 쳐다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케르겔은 그녀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는 걸 보다가 그대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꺄악! 케, 케르겔! 뭘 하는 거예요?”
느닷없이 그에게 안겨 두 다리가 허공에 뜬 상태가 된 로엘린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뭘 하기는……. 침실로 가자면서.”
케르겔은 제 목을 끌어안은 로엘린이 귀엽다는 듯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녀의 심장이 콩닥거리며 뛰는 게 그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그는 로엘린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만졌다. 그러자 로엘린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눈을 깜빡였다.
‘침실…….’
로엘린의 얼굴이 다시금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열이 오른 얼굴을 그에게 기대어 숨긴 채 그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무언의 허락이었다.
그리고 수줍은 대답이기도 했다.
로엘린을 안아 든 케르겔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 * *
“어머나! 폐, 폐하!”
궁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 중 누군가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제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숙였다.
로엘린은 그 목소리가 제 전속 시녀인 실로아의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고개를 들어 그 얼굴을 확인하면 정확히 알게 될 일이지만, 그녀는 케르겔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그저 생각만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시녀장 루시를 비롯해 여러 시녀들이 밖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 당연했다.
‘차라리 다들 숙소로 돌아가라 할 걸 그랬나 봐.’
로엘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실제로는 가능성이 없는 얘기였다. 아무리 자신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시녀들이 저 하나만을 남겨 둔 채 숙소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니까.
그저 지금 제게 닿는 시선들이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저도 모르게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뿐이었다.
“다들 물러가라. 황후는 내가 침실로 데려갈 것이니.”
“하, 하지만 폐하…….”
당황해하는 루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후마마께서 혹시 어디 불편하기라도 하신 건지요.”
루시의 이어진 말에 로엘린이 몸을 움찔거렸다. 아마도 충직한 시녀장은 자신이 멀쩡하게 걸어 들어갔다가 나올 때는 케르겔의 품에 안긴 상태로 나오니 염려가 된 모양이었다.
“그런 건 아닐세.”
“그런데 왜…….”
“내가 내 아내를 안지도 못하나?”
케르겔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살짝 묻어났다. 침실로 직행하려던 발이 묶인 셈이 되었으니 마음이 더 조급해진 듯했다. 그 마음을 눈치챈 루시와 다른 시녀들의 입이 동시에 다물어졌다.
“날이 밝더라도 내가 부르기 전까지는 침실 안에 아무도 들어오지 말도록.”
“……예?”
그러나 침묵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다름 아닌, 케르겔의 명령 때문이었다. 로엘린은 귓바퀴에 뜨끈뜨끈 열이 오르는 걸 느끼며 그의 가슴팍에 더욱 깊숙이 고개를 묻었다.
나중에 루시와 실로아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하나,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를 막고 싶지는 않으니…….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야. 알겠나, 루시?”
케르겔이 짜증을 억누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숨을 급히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다들 눈치를 챈 것 같았다.
“흠흠…… 예. 알겠습니다, 폐하.”
루시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고는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로엘린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에게 기댄 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귀뿐만 아니라 얼굴도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잘했지?”
케르겔이 로엘린을 안은 채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입을 열어 물었다. 로엘린은 달아오른 뺨의 열기를 식히지도 못한 채 케르겔의 가슴팍에 이마를 대고 있다가 고개를 젖혀 그를 올려다보았다.
“……?”
“나 말이야. 잘하지 않았어? 아무도 우리 방해하지 못하게 미리 말해 뒀잖아.”
“아…….”
로엘린이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케르겔의 가슴팍을 가볍게 때렸다.
“왜 그런 말을 한 거예요! 민망해서 이제 저들을 어떻게 봐요.”
“어떻게 보긴……. 그냥 평소대로 보면 되지. 민망할 건 또 뭔데? 우리가 지금 뭐, 나쁜 짓이라도 하러 가는 거야?”
케르겔은 그녀의 칭찬을 기대하고 있다가 예상치 못한 타박을 받자 불퉁한 투로 대꾸했다.
“그, 그건 아니지만…….”
로엘린은 케르겔의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역력한 걸 보고는 말끝을 흐렸다. 그 와중에도 케르겔의 걸음에 맞추어 몸이 조금씩 흔들렸다.
저를 안고 있는 남자의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분명 제게 서운했을 텐데도 말이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제 행동에 대해 후회가 되었다. 자신이 너무 과하게, 그를 타박한 것만 같아서.
‘오늘이 우리 진짜 첫날밤이 될 텐데.’
그걸 자신이 망쳐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그냥 민망하고 부끄러웠을 뿐인데 말이다.
“혹시 화났어?”
그 순간, 케르겔이 걸음을 멈추더니 그녀를 향해 물었다. 로엘린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케르겔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게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화가 난 건 아닌지, 그것은 오히려 자신이 묻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로엘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미련한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다. 제게는 너무나 무른 이 남자를.
로엘린은 케르겔의 목을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며 그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순순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촉.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순간적으로 케르겔의 표정이 멍해졌다. 로엘린은 그 표정을 보며 미소를 지은 뒤, 다시 한 번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갔다.
입 밖으로 꺼내는 말로 제 마음을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자신이 낼 수 있는 용기를 한껏 내 보았다.
그렇게라도 지금 제 마음을 그에게 전하고 싶어서였다.
“……!”
그 마음이 고스란히 케르겔에게 전달된 것일까. 갑자기 케르겔이 로엘린을 힘주어 끌어안더니 더 깊숙이 입을 맞췄다.
그녀의 숨결조차도 빼앗길 수 없다는 듯, 그녀의 모든 걸 전부 삼킬 것만 같은 키스였다.
로엘린은 제 어깨와 등을 꽉 끌어안은 그의 품 안에서 가늘게 몸을 떨었다.
깊은 밤 달빛이 그들의 머리 위로 부드럽게 쏟아져 내렸다.
* * *
“…….”
로엘린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제 주변을 돌아보았다.
익숙한 침실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하기야 조금 전까지 이 침대 위에서 잠을 청했으니, 그사이에 뭐가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낯선 방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색하고 생소한 느낌이 드는 것은 말이다.
로엘린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다가 제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 시선의 주인은 다름 아닌, 케르겔이었다. 그는 침실 안까지 그녀를 안고 들어와 침대 위에 앉히고 난 뒤, 지금껏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로엘린의 앞에 서서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
“……흐흠.”
로엘린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고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죄 없는 침대 시트를 꽉 움켜쥐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구김 하나 없던 시트에 그녀가 남긴 흔적이 늘어 가던 중에 케르겔이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로엘린의 앞에 앉았다. 로엘린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하여 고개를 들었다.
저를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다시금 침을 삼키며 시트를 꽉 움켜잡았다. 저를 내려다보고 있던 남자의 시선이 이제는 저와 비슷한, 아니, 저보다 아래에서 저를 응시한 탓이다.
그저 눈높이가 바뀌었을 뿐인데 그게 또 다른 어색함을 가져왔다.
“왜, 그러고 앉아 있어요. 얼른 일어나…….”
“로엘린.”
로엘린이 어색한 마음에 애써 웃음 지으며 말을 건 순간, 케르겔이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긴장하고 있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평소였다면 아마 그는 그런 그녀를 향해 농담을 건네거나 가벼운 장난을 쳐서 긴장감을 없애 주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
로엘린은 저를 응시하는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케르겔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에게 잡힌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저 체온과 체온이 맞닿았을 뿐인데, 뜨거운 열기가 전해졌다.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열기인지 모르지 않았다.
“……로엘린.”
케르겔은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로엘린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머뭇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금빛 시선과 마주쳤다. 그녀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자 케르겔이 로엘린의 손을 잡고 있던 손에 조금 더 힘을 주더니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
로엘린은 제 손등에 닿는 입술의 감촉에 화들짝 놀라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케르겔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손등뿐만 아니라 손가락마다 그 끝에 입을 맞추기까지 했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너무나 사랑스럽기 그지없다는 듯.
작은 손톱 하나조차도 너무나 소중하다는 듯.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소유하고 싶다는 듯.
다정하면서도 깊은 소유욕이 느껴지는 그의 집요한 입맞춤에 그녀는 손끝에서부터 저릿한 느낌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그렇게 손끝부터 시작된 키스는 조금씩 위쪽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손등을 지나 손목 위에 내려앉았고, 그 다음에는 팔꿈치의 안쪽, 오목한 부분에 닿았다.
로엘린의 몸이 의식할 새도 없이 뒤로 뉘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케르겔이 어느새 몸을 일으켜 침대 위로 올라와 그녀에게 체중을 실었다.
갑작스럽게 타인의 묵직한 체중이 몸 위로 실리자 로엘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 해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하지 못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아…….”
긴장감과 설렘, 그리고 서서히 올라오는 열기로 달뜬 숨결이 그녀에게서 작게 새어 나왔다.
그러자 케르겔이 로엘린의 머리칼을 가만히 손으로 만지다가 그 위에 입을 맞추더니 느릿하게 그녀의 뺨을 감쌌다.
“로엘린.”
“…….”
그는 벌써 세 번째, 제 이름을 불렀다. 마치 다른 말은 전부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하기야 자신도 별반 다르지는 않다고 해야겠지만.
……입이 들러붙기라도 한 듯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으니.
로엘린은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자신을 애틋하게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 깊숙한 곳에서 타오르는 열기를 보았다.
또한 제 뺨을 어루만지는 남자의 온기 속에 감춰진 정염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에게는 너무나 과분할 정도의 마음이었다.
“케르겔.”
로엘린은 그의 이름을 부르며 팔을 뻗었다. 케르겔이 왜 제 이름만을 그렇듯 반복하여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제 입에서 왜 아무 말도 나오지 못하는 건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기에.
고작 몇 마디의 말로 전하기에는 너무 깊은 마음이라서.
그녀는 케르겔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자 케르겔이 그에 호응하듯 로엘린의 뒷머리와 등을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그리고 뜨거운 숨결과 체온을 나누기 시작했다.
달빛이 침대 위의 두 사람에게 살포시 내려앉았다.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밤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 * *
“으응…….”
로엘린은 자다가 눈이 부셔서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는 대신, 손을 뻗어 이불을 더듬거렸다. 곧바로 푹신한 이불이 그녀의 손에 잡혔다. 그녀는 그대로 이불을 끌어당겨 제 얼굴을 감췄다.
햇살이 이불에 차단되며 한결 눈이 편안해졌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잠을 청하고자 했다.
“……!”
하지만 로엘린은 갑자기 뭔가를 떠올리고는 황급히 이불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환한 햇살이 그녀를 반기듯 로엘린의 얼굴 위로 가득 쏟아져 내렸다.
“……아침이야?”
그녀는 눈이 부셔서 한 손으로 그늘을 만들고는 창문 쪽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실 아침이라고 하기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로엘린은 햇살이 든 방향을 바탕으로 대략 시간을 가늠해 보다가 눈을 크게 떴다.
맙소사.
해가 중천에 뜨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미쳤어. 왜 아무도 안 깨웠…… 아흑!”
로엘린은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아래쪽에서 느껴진 아릿한 통증에 그대로 몸을 숙이고 말았다.
“아…….”
앓는 소리를 내며 인상을 쓰던 로엘린의 얼굴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잠에서 온전히 깨어나 제 상태를 깨달은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 통증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로엘린! 왜 벌써 일어났어?”
그 순간, 케르겔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다급히 다가오는 발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로엘린은 그 발소리에 반쯤 숙였던 몸을 다시 일으켰다.
씻고 온 것인지 케르겔이 가운 하나만을 걸친 채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가운의 벌어진 틈으로 드러난 그의 탄탄한 가슴팍을 보고는 얼굴을 붉혔다.
미쳤나 봐.
로엘린이 그런 제 자신을 탓하며 애써 시선을 거두려는데, 케르겔이 그녀를 향해 몸을 약간 구부리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
“몸이 안 좋은 거야? 어디 아파? 아아…… 혹시 아픈 데가…….”
“어, 어딜 보려는 거예요!”
로엘린은 케르겔이 이불을 들추려는 걸 황급히 막으며 두 손으로 이불을 단단히 여며 쥐었다. 그러자 케르겔이 머쓱한 표정으로 자신의 턱을 만지며 해명했다.
“아니, 내가 밤새 조금…… 과했잖아. 그래서 나 때문에 많이 아픈 건가 해서.”
“……그런 얘기는 그만해요.”
환한 대낮에 나눌 법한 대화 주제는 아니었다. 적어도 로엘린에게는 말이다. 물론 밤에도 그녀에게는 낯 뜨거운 주제였지만.
로엘린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식히기 위해 손으로 두어 번 부채질을 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냉큼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더니 로엘린을 향해 손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더워? 시원한 음료라도 가져오라고 할까?”
“아니요. 됐어요. 그런데 케르겔,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거예요?”
“응. 괜찮아. 오늘 하루는 휴가거든.”
“휴가요?”
로엘린은 여전히 부채질을 하던 케르겔의 손을 잡아 내린 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케르겔이 로엘린에게 잡힌 손을 빼더니 반대로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는 조물조물 만지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로엘린, 그대와 함께 있고 싶어서.”
“…….”
로엘린의 얼굴이 다시금 빨개졌다. 그러고 보니 지난밤에 그가 루시와 시녀들에게 했던 명령이 생각났다. 자신이 부르기 전까지는 아무도 침실 안으로 들어오지 말라던 명령 말이다.
지금껏 저를 깨우지 않은 걸 보면, 아마도 시녀장과 시녀들이 그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모양이었다.
‘다들 뭐라 생각할까.’
로엘린이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손으로 양쪽 뺨을 감쌌다. 그러자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이불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앗!”
그녀는 벌거벗은 몸이 고스란히 드러나자 깜짝 놀라 다시 이불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케르겔이 로엘린을 쳐다보다가 씩 웃더니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가려? 이미 샅샅이 다 봤는데.”
“장난치지 말아요!”
로엘린은 케르겔의 짓궂은 농담에 새침하게 그를 쳐다보고는 그의 가슴팍을 때렸다. 그래 봤자 케르겔에게는 간질거리는 느낌만 주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케르겔은 일부러 과장된 몸짓을 하며 아픈 시늉을 했다. 그 바람에 가운이 더 벌어지면서 그의 왼쪽 가슴에 박혀 있는 붉은색 문신이라 생각되는 게 그녀의 눈앞에 드러났다.
이미 본 적이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느낌이 묘해졌다. 로엘린은 그 문신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케르겔이 장난을 치다 말고 그녀가 제 봉인을 보는 걸 알아차리고는 흠칫하며 어색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왜? 뭘…… 보는 건데?”
“그거, 문신 맞죠?”
“응? 아아…… 응. 그래, 문신. 맞아. 문신이야. 그런데 그건 왜?”
케르겔은 로엘린의 물음에 당황하여 말을 더듬다가 간신히 그녀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로엘린은 당황한 그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신기한 눈빛으로 그의 ‘문신’을 보다가 말을 이었다.
“전에 처음 봤을 때 당신이랑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오늘 이렇게 보니까 어쩐지 느낌이 묘해져서요.”
“……느낌이 묘해졌다고?”
“뭐라고 해야 할지, 설명하기는 힘든데요. 그냥 시선을 떼기가 힘드네요.”
그렇게 말한 뒤에도 로엘린은 쉽게 그의 가슴팍 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
케르겔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건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반려이기 때문에 자신이 품고 있는 힘에 감응이라도 하는 것일까.
‘……이러다가 그녀가 나에 대해 알아차리기라도 하면.’
그는 문득 두려움이 일어 저도 모르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로엘린이 더 이상 봉인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앗, 자, 잠깐만요. 옷을 안 입었는데…….”
그리고 케르겔의 바람대로 로엘린은 봉인에 대한 관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이불이 흘러내려 알몸이 된 상태로 갑작스럽게 케르겔의 품에 안기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당황하여 몸을 바르작거렸다. 하지만 케르겔은 로엘린을 안은 팔에 힘을 주어 두 팔에 가두다시피 하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이제야 겨우 마음이 놓였다.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쉰 뒤, 다시금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짙지 않은 체향이 그의 코끝을 자극했다. 그녀를 닮아 연하면서도 다정한 느낌이 드는, 그런 체향이었다.
그 체향에 취해 밤새도록 로엘린을 안았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아니, 몸이 먼저 기억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케르겔은 배 아래쪽에서 열기가 도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로엘린 역시 느낀 것인지 몸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낑낑거리며 그를 떠밀었다.
“아, 안 돼요. 이렇게 환한 대낮에……. 더구나 다들 뭐라고 할지도 모르고.”
“누가 감히 황제와 황후에게 뭐라 하겠어?”
케르겔은 로엘린을 지금 이 자리에서 안을 생각은 없었다. 물론 제 욕심대로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녀를 눕히고 싶지만 말이다.
밤새 제게 시달린 그녀의 체력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에 꾹 참고자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그녀가 저를 떠밀자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케르겔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로엘린의 목을 깨물었다.
“아얏!”
로엘린이 화들짝 놀라 몸을 떨며 소리를 냈다. 교성이라 하기 힘든 소리였다. 하기야 지난밤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케르겔은 그녀의 어깨에 제 이마를 대고 키득거렸다.
“이 순진한 아가씨를 어떡하나.”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빨갛게 물든 로엘린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사내를 유혹하기 위해 교성을 내는 법조차 모르는 여자였다.
그런데 그런 로엘린의 모습에 이성을 잃고 밤새 달려들었다.
‘그러고도 모자라 지금도 또…….’
케르겔은 그녀를 안고 싶어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하지만 간신히 그런 제 자신을 억누른 뒤, 로엘린의 어깨에서부터 등줄기를 따라 손을 내려 그녀를 쓰다듬었다.
성적인 의미를 배제한, 그저 다정하기 그지없는 손길이었다.
그것을 느낀 걸까. 로엘린이 몸을 바르작거리며 바짝 긴장해 있더니 조금씩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 몸을 기댄 채 힘을 뺐다.
가슴속이 간질간질했다. 누군가가, 아니,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온전히 저를 믿고 의지한다는 것이.
“이래서야 확 잡아먹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잖아.”
케르겔이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하고는 다시 그녀를 보았다.
“고마워, 로엘린.”
“……뭐가요?”
로엘린은 의문 가득한 눈으로 그를 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는 대답 대신 다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속으로 조용히 대꾸했다.
나를 평범한 남자로 존재할 수 있게 해 줘서.
남들과 다른 존재였다. 늑대족의 피를 물려받았기에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은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게 당연했다.
게다가 세로이프의 황제가 될 것이었기에 어릴 적부터 그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제 유모였던 루시에게도, 그리고 자신의 벗이기도 한 하이네스나 버트조차도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제 품에 안겨 있는 이 여자는 자신을 그저 한 남자로 봐 준다.
그것이 그의 기분을 더욱 들뜨게 했다.
‘반려’이기 때문일까.
아니, 그런 이유가 전부는 아닐 것이다. 겨우 그게 이유였더라면 지금 제 가슴속이 이렇듯 그녀를 향한 감정으로 가득 차오르지 않았을 테니까.
“그냥 이것저것.”
케르겔은 로엘린을 안은 채 입을 열었다.
“……?”
로엘린은 그의 뜬금없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그 말이 조금 전 자신이 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걸 깨닫고는 살포시 웃고 말았다.
그는 그런 그녀의 정수리 위에 제 입술을 묻으며 작게 속삭였다.
“그리고…… 사랑해.”
가만히 웃던 로엘린의 얼굴이 붉게 물든 건 그 직후였다.
“어…….”
로엘린이 새빨갛게 변한 채 입을 벙긋거리며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 모습이 또한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고백에 이렇듯 귀여운 반응을 보이는 그녀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도…… 나도 사랑해요, 케르겔.”
그녀는 그의 가슴팍에 뺨을 대고는 제 얼굴을 감춘 채 마치 작은 새가 지저귀듯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케르겔이 다시금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지금과 같은 행복이, 계속 이어질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그는 가슴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두려움을 슬쩍 외면했다.
자신이 늑대족의 후예라는 사실을, 그녀와 달리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할 수만 있다면 평생 그녀에게는 비밀로 하고 싶을 뿐이었다.
* * *
“이것도 좀 먹어 봐.”
케르겔은 로엘린의 접시에 음식을 담아 주며 말했다. 그녀가 후아, 하고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배불러서 이제 더 이상 못 먹겠어요.”
“배가 부르다고? 겨우 새 모이만큼 먹어 놓고?”
케르겔은 해괴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구기고는 그녀를 쳐다보다가 시선을 슬쩍 내려 그녀의 배 쪽을 보았다.
물론 테이블 위에 놓인 요리에 가려진 터라 배가 잘 보이지는 않을 테지만, 로엘린은 케르겔의 시선에 어쩐지 민망해져서 무릎을 덮고 있던 테이블 냅킨을 배 쪽으로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황급히 말을 돌렸다.
“케르겔도 어서 먹어요. 나 챙기느라고 식사도 아직 제대로 못 했잖아요.”
“나야말로 배가 불러서.”
케르겔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녀의 말에 대꾸했다. 그러자 로엘린의 시선이 그의 앞에 놓인 요리들로 향했다가 다시 그의 얼굴로 움직였다.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요리들이 가득했다. 그나마 손을 댄 건 전부 로엘린에게 권하고 그녀의 접시에 덜어 준 것뿐이었다.
그녀가 불신의 눈빛으로 말없이 그를 쳐다보자 케르겔이 해명하듯 두 손을 들어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정말이야. 배불러.”
“그 말을 누가 믿는다고…….”
로엘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으려는 순간, 케르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 말 있잖아.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는 말. 솔직히 그 말을 들었을 때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제는 그게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 그대가 먹는 것만 봐도 내 배가 부른 것 같으니 말이야.”
“그게 뭐예요. 부모가 자식 먹는 걸 보면 배부르단 얘기는 들어 봤지만…….”
로엘린은 멋쩍은 마음에 괜히 불퉁한 투로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사실, 자신에게는 전혀 해당될 일 없다고 생각한 말이었다.
부모의 애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받아 본 적 없던 그녀에게 그 말만큼 허황된 것은 없었으니 말이다.
정말 그런 걸까.
다른 사람들은, 다른 부모들은 제 자식이 먹는 것만 봐도 진짜 배가 부를까.
애정을 받아 보지 못한 그녀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다. 또한 애정을 건넨 적 없던 그녀에게는 생소한 감정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나도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상대가 저보다 더 좋은 것을 누리고, 더 많은 것을 기뻐하며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상대가 더 많은 행복을 누리며 한없이 웃으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
제 자신보다는 눈앞의 이 남자가 더 염려되고, 항상 걱정되는 마음.
바로 그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일 터였다.
“이거 맛있던데, 한번 먹어 봐요.”
로엘린은 뭉클해진 속내를 감추며 제 앞에 있던 요리 중 한 가지를 덜어 케르겔의 접시에 놓았다. 그러자 케르겔이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미소를 짓더니 입을 벌렸다.
“아아.”
“……?”
“이왕이면 먹여 줘.”
“뭐라고요?”
로엘린은 케르겔의 말에 황당해져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케르겔은 천연덕스럽게 입을 벌린 채 재촉하듯 눈짓을 했다.
“케르…….”
“푸훗!”
로엘린이 기가 막혀서 그를 만류하려는데, 식사 시중을 들던 실로아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로엘린은 더욱 민망해져서 케르겔을 새침하게 흘겨보았다. 하지만 케르겔은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녀가 먹여 주지 않으면 계속 이러고 있을 거라는 듯이.
“휴우…….”
그녀는 어쩔 수 없단 생각에 방금 자신이 권했던 요리를 먹기 좋게 한입 크기로 그에게 건넸다.
타르타르소스를 곁들인 연어 스테이크였다.
“맛있군. 그대가 직접 먹여 줘서 그런가.”
케르겔이 냉큼 받아먹더니 눈웃음을 지었다. 바로 그때, 소곤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시녀장님, 원래 폐하께서 타르타르소스를 싫어하시지 않았나요? 새콤한 걸 좋아하시는 편이 아니라…….”
“흠, 흐흠!”
그런데 그 소곤대는 목소리가 꽤 컸던 터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전부 듣고 말았다. 루시는 실로아의 말에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달은 실로아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타르타르소스를 싫어해요? 그럼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로엘린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의 그런 반응에 당황한 케르겔이 손까지 내젓고는 변명했다.
“아니야. 싫어하기는, 누가 싫어한다고! 시녀가 내 입맛을 착각한 모양인데. 그렇지 않나, 루시?”
“예? 아아…… 예에.”
느닷없이 질문을 받은 루시가 머뭇거리다가 케르겔이 눈을 부릅뜨며 대답을 종용하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누가 봐도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게다가 실로아 역시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고.
로엘린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잠시 그들을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평소 싫어하던 음식마저 자신이 권하니까 맛있다며 먹는 걸 뭐라 할 수 있을까.
그의 그런 행동과 거짓말이 전부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는 케르겔의 말을 믿는 척 하기로 했다.
“다행이네요. 그럼 이거, 전부 다 먹어요.”
“으, 으응?”
“맛있다면서요.”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어야 몸에 좋은 법이다. 로엘린은 뒷말을 삼킨 채 배시시 웃었다.
* * *
“푸훗…….”
로엘린은 가만히 책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러자 루시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 아무것도 아닐세. 책이…… 재미있어서.”
“……예? 그 책 말씀이십니까?”
루시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러고는 로엘린이 읽고 있던 두꺼운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고지식하고 매사 엄격하기로 유명했던 석학의 책이었다. 또한 책을 전부 읽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지루하다고 악명이 자자하기도 한 책이기도 했다.
그런 책을 읽다가 재미있다고 웃다니.
루시의 표정이 묘해지는 걸 보고서야 제 실수를 깨달은 로엘린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흠, 흠흠. 산책을 좀 다녀와야겠어. 조금 덥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황후마마.”
루시는 로엘린이 화제를 돌리느라 산책 얘기를 꺼냈다는 걸 눈치챘지만 애써 웃음을 참으며 허리를 숙였다.
로엘린은 루시와 다른 시녀들이 산책 준비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쉰 뒤, 양쪽 뺨을 손으로 두드렸다.
민망한 마음에 달아오른 뺨의 열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미쳤나 봐.”
그녀는 중얼거리다가 제풀에 놀라 몸을 흠칫거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없다는 걸 다시 확인하고 나서야 한 번 더 숨을 내쉬며 몸에서 힘을 쭉 뺐다.
“……푸훗.”
로엘린은 재차 웃었다. 사실, 책이 재미있어서 웃은 건 아니었다.
그녀가 웃었던 건 케르겔 때문이었다. 점심 때 좋아하지도 않는 요리를 열심히 먹어치운 그 남자 때문에.
“속은 괜찮으려나.”
먹기 싫은 걸 억지로 먹었다가 속이 불편해지지는 않았을까, 문득 걱정이 되었다. 이런 걱정을 해 봤자 다들 쓸데없는 걸 걱정한다고 하겠지만 말이다.
누구보다도 강한 남자이기 때문에.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아무래도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루시가 돌아오는 대로 소화에 좋은 차라도 준비해서 케르겔의 집무실에 들러 보는 편이 좋을 듯싶었다. 산책을 가겠다던 본인의 말을 금세 잊은 태도였다.
그만큼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케르겔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 휴가라던 말이 무색하게도, 그는 제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아마도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집무실에 간 것 같았다.
……한창 일하고 있는데 찾아가면 방해가 될까?
그래도 그냥 잠깐 차만 전해 주고 오면 괜찮겠지?
그렇게 그녀가 케르겔에 대한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
무슨 일인가 싶어 로엘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루시가 준비를 마치고 온 건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조금 시끄러운 것 같은데.
자신이 잘못 들은 건지 몰라도 “꺅꺅!”거리는 소리도 들린 것 같기도 하고…….
바로 그때, 문이 열리더니 예상치 못한 사람이 들어왔다. 지금껏 그녀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 이곳에 올 리 없는 남자였다.
“로엘린, 산책 나갈 거라면서? 하마터면 길이 어긋날 뻔했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케르겔이었다. 로엘린은 반가운 마음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려다가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웬 바구니예요?”
케르겔이 한 손에 들고 있는 건 작은 바구니였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들기에는 너무 앙증맞고 귀여운, 그런 바구니 말이다.
그녀는 케르겔과 바구니가 주는 괴리감에 당황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정작 그는 아무렇지 않게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바구니를 힐끗 보더니 씩 웃었다.
뭔가 흡족한 듯한 미소였다.
그 바람에 더욱 의아해진 로엘린이 눈을 동그랗게 뜬 순간, 케르겔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녀에게 바구니를 내밀었다.
“……!”
“그대에게 주는 선물이야. 드디어 성공했거든. 덜 익지도 않고, 시커멓게 타지도 않고.”
케르겔이 내민 바구니 안에는 과자가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단 한 번도 먹어 본 적 없는, 낯선 모양의 과자였다.
하지만 그것을 본 로엘린은 그게 바로 ‘레르슈첼’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이 크게 뜨이는 걸 본 케르겔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레르슈첼이야. ……뭐, 선후 관계가 바뀌기는 했지만. 그래도 받아 주겠어?”
로엘린은 그가 말한 선후 관계가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아차리고는 얼굴을 붉혔다.
밤을 청하는 의미로 선물하는 레르슈첼을 이미 함께 밤을 보낸 뒤에 선물하게 되었으니 그의 말대로 선후 관계가 바뀐 게 맞기는 했다.
“……고마워요.”
하지만 그녀는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과자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그렇다 해서 홍조가 깃든 뺨을 감추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직접 만든 거예요?”
“물론이야. 처음 반죽을 할 때부터 오븐에서 꺼내 바구니 안에 담을 때까지 전부, 내 손으로 직접 했는걸.”
케르겔은 로엘린의 붉게 물든 뺨을 보며 사랑스럽다는 듯 눈웃음을 짓다가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눈짓으로 바구니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한번 먹어 봐, 로엘린. 그대의 입에 맞을지 궁금해.”
“당연히 맛있겠죠. 냄새부터 좋은데요?”
달콤하고, 고소하고. 로엘린은 웃으며 대꾸하면서도 그의 말에 순순히 몸을 돌려 테이블로 향했다. 그러자 케르겔도 그녀를 따라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와아, 아직 따뜻하네요.”
로엘린이 테이블 위에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은 뒤, 과자를 하나 집고는 감탄했다. 케르겔은 우쭐해지려는 표정을 애써 수습하며 대답했다.
“곧바로 왔으니까.”
“참, 그런데 아까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한다고 했던 게 설마 이것 때문이었어요? 업무 때문에 집무실에 간 게 아니라?”
“당연하지. 내가 뭐 하러 집무실에 가겠어? 오늘 하루는 그대와 함께 보내기 위해 휴가라고 했잖아.”
케르겔은 일방적으로 오늘 하루 휴가라고 선언하는 바람에 난리가 난 신하들의 모습을 애써 떨쳐 내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그렇다고 주방까지 쳐들어오다니.’
하마터면 주방에 난입한 신하들 때문에 오늘도 레르슈첼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실패할 뻔했다.
그나마 하이네스가 눈치 빠르게 신하들을 모두 데리고 나가 준 덕분에 레르슈첼을 태워 먹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나중에 휴가 하루씩 쓰라고 하지, 뭐.’
그는 속으로 중얼거린 뒤, 로엘린의 손에 들린 레르슈첼을 보다가 문득 뭔가를 떠올리고는 짓궂은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런데 레르슈첼 모양이 조금 야하지?”
“예? 야하다고요?”
“먹기에는 좀 낯 뜨겁잖아. 그 모양이.”
케르겔이 눈짓으로 그녀의 손에 있는 레르슈첼을 가리켰다. 로엘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제 손에 들린 과자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자 모양이 야하다고?
‘야하다는 말에 내가 모르는 다른 뜻이 있는 걸까?’
그녀는 그의 말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그 모습을 보던 케르겔이 피식 웃더니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미안해. 내가 순진한 그대한테 무슨 농담을 한 건지 모르겠어.”
“……?”
하지만 케르겔의 말에도 불구하고 로엘린은 좀처럼 의문을 풀지 못했다.
지금 여기서 왜 갑자기 ‘순진’ 운운하는 말이 나오는 건지.
“과자 모양이 어떻기에…….”
“됐어. 과자가 그냥 과자일 뿐이지. 어서 먹기나 해.”
괜히 순진한 사람 타락시켰다는 말을 듣게 생겼다. 케르겔은 서둘러 로엘린의 말을 끊은 뒤, 그녀가 들고 있던 레르슈첼을 그대로 그녀의 입 안에 쏙 넣어 주었다.
“어때? 맛있어?”
“……으음.”
로엘린은 얼떨결에 레르슈첼을 입에 넣고는 우물거리다가 그를 슬쩍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짓궂은 표정으로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하던 사람답지 않게 케르겔은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아마도 지금 제 입 안에 있는 레르슈첼의 맛에 대한 평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맛있어요.”
“정말? 아아, 다행이야.”
케르겔은 로엘린의 말을 듣고 나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편해진 표정을 지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로엘린은 그런 그를 쳐다보다가 속으로 가만히 웃은 뒤, 바구니 안에서 과자를 하나 더 집어 먹었다. 그러자 슬쩍 그녀를 본 케르겔의 얼굴이 더욱 환해졌다.
‘이런 말, 어떨지 모르지만…… 귀여워.’
그녀는 제 사소한 반응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쓰고 기뻐하는 그를 보며 가슴이 설레는 걸 느꼈다.
솔직히 아주 맛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맛있기는 했다. 자신이 라카인에서 살 때 만약 이것을 먹었더라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과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그녀의 식사는 늘 딱딱한 빵과 묽은 수프 정도가 전부였으니 말이다. 가끔 말라비틀어진 과일 조각이 나오는 게 디저트의 전부였고.
그러니 이런 건 꿈도 꿀 수 없는 고급 디저트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황실의 주방장이 매 식사 때마다 정성 가득한 요리를 준비하고 있으니 말이다. 식사를 끝내고 먹는 디저트 역시 먹는 게 아깝단 생각이 들 정도로 작품 그 자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더 맛있게 느껴진단 말이야.’
로엘린은 레르슈첼을 오물오물 먹으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객관적으로는 분명 주방장의 디저트보다 부족한 점이 많은 맛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는 이게 정말 맛있게 느껴졌다.
주관적으로, 제 입맛에 한해서.
아마도 그건 케르겔, 이 남자의 정성이 들어갔기 때문이리라.
“레르슈첼을 선물 받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더 정확히 말하면, 지난밤 이후 아예 ‘레르슈첼’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밤을 청하는 의미로 선물을 한다고 했지만, 이미 자신과 그는 지난밤을 함께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 와중에도 잊지 않고 과자를 구워 이렇듯 선물까지 해 주었다.
그 마음이 그녀의 가슴을 들뜨게 하고, 설레게 만들었다.
“고마워요, 케르겔.”
로엘린은 그를 향해 제 진심을 담아 인사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겸연쩍은 표정을 짓더니 어깨를 으쓱인 뒤, 입을 열었다.
“참! 내가 갑자기 찾아오는 바람에 그대의 산책을 방해한 셈이 됐군.”
“아…… 산책요? 괜찮아요. 사실은 마음이 바뀌어서 당신 보러 가려고 했었거든요.”
“나를 보러 오려 했다고?”
“예. 주방에 있는 줄 몰라서 집무실로 찾아갈 뻔했지만.”
로엘린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지? 잠깐이라도 나를 못 보니까 안 되겠다 싶었어?”
케르겔의 기분이 한껏 좋아진 듯 그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묻어났다. 로엘린은 그의 농담에 함께 웃은 뒤,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당신 속은 괜찮은가 걱정이 돼서요.”
“……?”
케르겔의 표정이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지금 뭐가 괜찮으냐고 물어본 건가 싶었다. 속이라니. 내 속이 괜찮으냐고?
“아까 점심에 안 좋아하는 건데 나 때문에 먹었잖아요. 연어 스테이크 말이에요.”
“설마 그것 때문에 내 속이 불편할 거라고 생각…….”
케르겔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으며 대꾸하다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배를 슬쩍 문지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소화가 조금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소화에 도움 되는 차라도 준비해서 당신한테 가려던 참이었는데.”
로엘린은 케르겔의 말을 진담으로 듣고 황급히 밖에 있는 시녀를 부르고자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케르겔이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차보다는 그대의 손이 약이 될 것 같은데 말이지.”
“내 손이 무슨 약이 돼요.”
로엘린이 케르겔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배를 문질러 주면 금방 괜찮아질 것 같아서.”
“아, 그건 좀…….”
로엘린은 그의 복부 위에 댄 손을 오므렸다. 옷 위로 탄탄한 근육이 생생히 느껴졌다.
그녀가 부끄러운 마음에 머뭇거리다가 손을 거두려는 순간, 케르겔이 인상을 쓰며 앓는 소리를 냈다.
“배가 살살 아프네.”
“정말요? 얼른 이리 앉아요.”
로엘린은 케르겔의 손을 잡아끌어 제 옆의 자리에 앉게 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기다렸다는 듯 냉큼 앉더니 그녀에게 몸을 기댔다.
“많이 아파요? 배 문질러 줄까요?”
“해 주면 고맙지만, 그대가 불편하면 안 해도 돼.”
케르겔은 로엘린에게 기댄 채 일부러 아픈 사람처럼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대꾸했다. 그 목소리를 들은 로엘린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의 배에 손을 올렸다.
배를 살살 문지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솔직히 이런 손길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내장이 쑥 밀려나올 정도로 세게 문지르는 정도는 되어야 그나마 배 속이 시원하단 말이 나올 테니 말이다. 적어도 세로이프 내에서는.
하지만 위장에 아무런 문제도 없는 케르겔에게는 그녀의 손길이 다른 의미로 자극이 되었다.
“흐윽…….”
“아! 미안해요. 내가 너무 세게 문질렀어요?”
케르겔이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자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로엘린이 재빨리 사과하며 손을 거두었다. 그는 그녀의 손을 재차 잡아끌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딱 좋아. 속이 시원해지는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신음이 나온 거야.”
“그런 거예요?”
로엘린은 케르겔의 해명에 안도한 듯 환해진 얼굴로 다시금 그의 배를 문지르는 데에 집중했다.
“…….”
그리고 케르겔은 그런 로엘린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다가 입꼬리를 실룩였다.
정말이지, 이렇게 순진해서 어떻게 살아왔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모든 이들이 떠받드는 가운데, 편하게 살아온 것도 아닌데. 오히려 학대받고 마음고생하며 외롭게 살아왔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사람을 잘 믿으니 말이다.
또한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염려하는 것도 그렇고…….
‘이 황궁 안에 그대보다 더 약한 사람은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세로이프 사람은 선천적으로도 타국의 사람보다 강인한 육체를 갖고 태어난다. 거기에 더해 황궁의 사람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에 비하면 로엘린은 라카인의 평범한 사람들보다도 훨씬 약한 몸을 갖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방치되어 자란 탓이리라.
지금은 주방장이 신경 써서 몸에 좋은 요리들을 많이 올리고 있지만, 이미 곯을 대로 곯은 몸이 완벽하게 회복될 수는 없을 터였다.
‘그것만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케르겔은 웃음기를 지운 뒤, 애틋한 시선으로 로엘린을 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칼을 한 줌 잡아 제 입술에 댔다. 그러자 로엘린이 그의 배를 문지르다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 푸른 눈을 마주하고 있던 케르겔이 씩 웃더니 그녀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우고는 그대로 들어 올려 제 무릎 위에 앉혔다.
“꺄악! 케르겔!”
로엘린이 케르겔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화들짝 놀라 그의 가슴팍을 손으로 짚었다. 케르겔이 키득거리더니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잠깐만 이러고 있을게.”
“케르겔, 무거울 텐데…….”
로엘린은 당황하여 그의 무릎 위에 앉은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러자 케르겔이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주고는 입을 열었다.
“하나도 안 무거워. 솜털만큼 가벼운걸.”
“……믿지 말라고 하는 말 같네요.”
솜털만큼 가볍다니.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솜털만큼 가벼울까. 로엘린이 입을 삐죽이다가 케르겔의 가슴팍을 짚었던 손을 움직여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두근두근.
가슴이 제멋대로 뛰었다. 그와 동시에 지난밤, 저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던 그의 체온과 격정적이었던 몸짓이 기억났다.
‘미쳤어!’
그녀는 볼이 빨갛게 물든 채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늦은 오후였다. 그런 시간에 이렇듯 민망한 생각을 하다니. 그런 제 자신의 모습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왜 그렇게 고개를 흔들어?”
케르겔이 로엘린의 양쪽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더니 질문을 건넸다. 그제야 로엘린은 고개를 흔들다가 멈췄다. 하지만 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귀까지 따끈따끈해진 건데?”
케르겔은 짓궂은 투로 말을 이으며 그녀의 머리를 감쌌던 손을 슬쩍 내려 동그란 귓바퀴를 꼭 감싸 쥐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그는 로엘린의 말을 흉내 내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귓바퀴를 감쌌던 손으로 귓불을 만지작거리다가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로엘린, 내가 사람 속마음을 읽어 내는 재주는 없지만 말이야.”
흠칫.
로엘린은 제 귓가에 닿은 케르겔의 숨결에 몸을 움찔거렸다. 그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케르겔이 목을 울리며 웃더니 다시금 덧붙여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것 같단 말이야.”
“케, 케르겔.”
로엘린은 제 목덜미를 느릿하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당황하여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걱정하지 마. 지금은 안 해. 가뜩이나 지난밤에 나한테 시달려서 피곤할 텐데.”
케르겔은 입꼬리를 올려 웃은 뒤, 마침 생각났다는 듯 질문을 덧붙였다.
“참! 그나저나 몸은 어때? 아프지는 않아?”
“예?”
“그…… 간밤에, 살살 한다고 신경을 쓰기는 했는데…… 그래도 내가 가끔 이성을 잃어서.”
“……쿨럭. 괘, 괜찮아요.”
로엘린은 케르겔의 말을 듣다가 기침을 하고는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민망한 생각을 애써 떨쳐 내려던 게 그의 말 때문에 무색하게 되었다. 그녀는 머릿속에 펼쳐진 간밤의 일을 다시금 잊기 위해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아! 과자 모양이 왜 야하다는 거예요?”
로엘린의 시선이 바구니 속의 레르슈첼에 닿았다. 그래서 그녀는 생각나는 대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케르겔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으음…… 글쎄, 그건 나중에 그대가 직접 책으로 보는 편이 낫겠어.”
“……책요? 책에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로엘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케르겔이 입꼬리를 실룩이더니 이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하이네스가 가지고 있더라고. 레르슈첼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걸. 그 책을 빌려주도록 하지.”
“그럼 고맙기는 한데요…….”
독서를 즐기는 터라 굳이 책을 빌려준다는 걸 사양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의 짓궂은 장난에 걸려든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로엘린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케르겔이 그녀의 뺨과 입술에 거듭 입을 맞추기 시작한 바람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 * *
……로엘린이 레르슈첼의 모양에 대해 알게 된 건 그 이튿날이었다.
케르겔이 곧바로 하이네스에게서 책을 빌려다가 전해 준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날, 로엘린의 곁에 있었던 담당 시녀 실로아는 잠시 자리를 비웠던 시녀장 루시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정말, 황후마마 대신 새빨갛게 잘 익은 토마토가 앉아 있는 줄 알았다니까요!”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