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누가 가짜 신부인가?(2)
“…….”
로엘린은 이를 악물고는 두 팔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에리타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뭘 하는 거죠? 왜 언니가 이곳에 온 건가요?”
저를 대역으로 삼아 세로이프로 보내 놓은 장본인이 대체 무슨 배짱으로 이곳에 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로엘린은 한쪽 뺨이 벌겋게 부풀어 오른 채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자 에리타가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고 있다가 서늘한 눈으로 로엘린을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비틀었다.
“남의 자리를 탐내더니 얼굴이 아주 좋아졌구나?”
“……대체 무슨.”
“정말이지 부끄러움이란 걸 모르는구나? 남의 것을 탐하고 빼앗았으면 염치라도 있어야지.”
에리타는 로엘린의 말을 끊은 뒤, 그녀를 비난했다. 그렇지만 로엘린은 제 쌍둥이 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에리타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너 말이야. 자매의 남자를 빼앗은, 음탕한 너.”
“뭐, 뭐라고요?”
로엘린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경악을 금하지 못하고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지금 그, 그 말…….”
“왜? 내가 틀린 말 했니? 맞잖아. 나한테 온 청혼을 가로채고, 우리가 쌍둥이인 걸 이용해서 어마마마와 오라버니까지 전부 속이고 나인 척 행세해서 이렇게 결혼까지 한 거. 설마 아니라고 할 셈이야?”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로엘린은 기가 막혀서 입술을 달싹이다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하지만 에리타는 그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재차 입을 열었다.
“바로잡아야겠어. 내 자리, 이제 내놔.”
“내놓으라니요?”
“지금 네 자리. 세로이프 제국의 황후 자리. 감히 너한테 어울린다고 생각해? 주제도 모르고.”
“……그 자리에 대신 가라고 했던 건, 바로 언니와 국왕 전하셨죠.”
로엘린은 잇새로 뱉어 내듯 천천히 말했다. 에리타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기울인 뒤, 물었다.
“그래서 싫어? 내 말을 거역하려고?”
“……그래요. 싫어요.”
로엘린은 제 스스로 대답해 놓고도 깜짝 놀라 입 안쪽 살을 깨물었다. 자신의 입에서 싫다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제 쌍둥이 언니의 말을 면전에서 거절할 거라고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머리로 생각하기 이전에, 몸이 먼저 에리타의 말을 거부했다. 로엘린은 부들부들 몸을 떨면서도 재차 말했다.
“싫어요. 이건…… 내가 선택한 내 삶이에요. 이제 와서 다른 누구의 말에 따라 내 삶을 버릴 수는 없어요.”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대역 신부가 되어야 한다는 건 비참한 일이었다. 그러나 로엘린은 감옥 같았던 라카인 왕궁을 벗어나고자 그 명령을 따랐다. 비참했어도 자신이 택한 또 다른 삶이었다.
아니, 처음으로 ‘선택’한 제 삶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껍데기라 조롱받고, 쌍둥이 언니의 그림자가 되어 죽은 듯이 살아야 했던 삶 속에 제 생각이나 의지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비록 에리타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건 자신이었다.
그걸 이제 와서 버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시녀를 부르기 위해 종을 흔들려는 순간, 에리타의 입이 열렸다.
“그래? 그럼 내가 만약 이 사실을 밝히게 되면, 황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
“본인을 속이고 가짜가 진짜인 척, 그의 신부인 척 행세한 걸 알면 말이야. 배신감이 상당할 것 같지 않니?”
에리타의 말은 흡사 비수처럼 로엘린의 가슴속에 파고들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죄책감을 건드렸다고 해야 할 터였다. 평소에도 그녀는 케르겔을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에 짓눌려 있던 상태이니 말이다.
에리타는 로엘린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보고는 의기양양해져서 말을 이었다.
“옷 벗어.”
“……!”
“아, 백작 때문에 옷을 벗기가 곤란하겠구나. 잠시 뒤돌아 있을래요?”
맥그리 백작은 그때까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왕녀님. 설마 지금 이 자리에서 ‘바꿔치기’를 하시겠다는 것인지요?”
“당연하죠. 그게 가장 간단한 방법 아닌가요? 나는 황후로서의 내 자리를 찾고. 저 계집애는 당신을 따라 들어왔던 수행원이 되어 다시 라카인으로 돌아가고.”
에리타는 태연한 어조로 백작의 물음에 대답했다. 백작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입만 벙긋거리다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제야 왕녀가 왜 이곳에 온 것인지, 그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기가 막히고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어차피 왕녀가 결심을 했다면 그걸 막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자신이 할 일은 왕녀를 무사히 ‘바꿔치기’한 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귀국하는 게 전부이리라.
……이 껍데기 왕녀를 데리고.
완벽하게 비밀을 감추기 위해서 껍데기 왕녀는 이곳에서 사라져야 한다. 백작은 로엘린을 힐끗 보며 눈을 가늘게 좁혔다.
“뭐 해? 어서 옷을 벗으라니까? 백작, 뒤돌아서 있어요. 얘가 부끄러워서 말을 안 듣잖아.”
“아, 예…….”
“싫어요.”
백작이 에리타의 말에 대답하려는 순간, 로엘린의 차분한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에리타는 맥그리 백작을 쳐다보다가 로엘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로엘린이 핏기 없이 새하얀 얼굴로 에리타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했다.
“떠나지 않을 거예요.”
“뭐? 너 지금 내 말을 거역하겠단 거야? 황제가 이 비밀을 알아도 상관없다, 그거니?”
“그를 속인 건 내 죄예요. 하지만 그의 곁에서 평생 속죄하면서 살 거예요.”
그래. 그럴 거다. 로엘린은 에리타에게 말하면서 제 진심을 마주하게 되었다.
케르겔에게 느끼는 죄책감과 별개로, 그녀는 그의 곁에서 평생 살아가고 싶었다.
그건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간절하고 한편으로는 탐욕스러운 감정이었다.
사랑.
그런 감정을 사랑이라 이름 붙이지 않는다면, 다른 무엇으로 부를 수 있을까.
그녀는 눈물이 고이는 걸 느꼈다. 하지만 눈물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적어도 지금 이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사랑해요.’
로엘린은 지금 이 자리에 없는 남자를 향해 그 말을 하고 싶었다. 그를 속인 제 죄를 생각하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걸 잘 알지만, 그래도 단 한 번이라도 그에게 이 마음을 고백하고 싶었다.
‘그래서 더 못 떠나.’
고백조차 하지 못한 채 그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제 비밀을 들키고 자신이 저지른 죄가 세상에 알려진다 해도, 그래서 모두가 돌을 던진다 해도, 그의 발 앞에 엎드려 빌고 용서를 구하는 한이 있더라도…….
“떠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세요.”
로엘린은 입술을 앙다물고 재차 종을 들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에리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새빨간 입술을 짓씹다가 크게 소리를 치려 했다.
“감히 너 따위가!”
“왕녀님! 밖에 있는 자들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맥그리 백작이 황급히 에리타를 막았다. 그러자 에리타가 신경질적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떻게 해! 저것이 감히 제 주제도 모르고 내 말을 거역하겠다 하는데!”
“제게 맡겨 주십시오.”
백작이 왕녀를 붙잡았던 손을 떼며 비릿한 웃음과 함께 목소리를 낮췄다. 에리타가 그의 눈빛이 음산하게 가라앉는 걸 보고 미간을 좁히며 눈을 빛냈다.
“약을 즐겨 사용하는 건 아니지만…….”
백작의 목소리가 한없이 가라앉았다. 그는 자신의 품에서 작은 병을 꺼냈다. 평소 여색을 밝히던 백작이 종종 사용하던 마취 약이었다. 저항을 심하게 하는 여인을 제압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는 곧바로 돌아서서 로엘린을 향해 다가갔다. 로엘린은 갑작스럽게 다가온 백작을 뿌리칠 새도 없이 그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지금 뭘 하는…….”
로엘린은 저를 붙든 백작에게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그가 작은 병을 열어 그녀의 코 밑에 대자마자 몸이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어…….”
그리고 그녀의 혀도 굳어 버렸다. 로엘린은 뻣뻣해진 상태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저 그와 에리타를 쳐다보기만 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예요, 백작?”
“몸을 굳게 만드는 향입니다. 대략 하루 정도 효과가 지속되지요. 그 시간이라면…… 왕녀님의 뜻대로 모든 걸 이루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백작의 말을 듣던 에리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로엘린의 눈은 절망으로 가라앉으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안 돼! 싫어!’
로엘린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절박한 비명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 * *
“……?”
케르겔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하이네스가 그의 앞에 서서 보고를 하다 말고 질문했다.
“왜 그러십니까, 폐하?”
“뭔가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소리가 들리기는요. 하다못해 새들도 죄다 어디로 가 버렸는지,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요.”
버트가 케르겔의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다 말고 대꾸했다. 하지만 케르겔은 미간을 찌푸리며 뭔가를 생각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아니, 분명히 들렸어.”
황후궁 쪽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들은 건 황후의 목소리였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제 청각이 보통 인간들보다 뛰어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서 다른 궁의 소리까지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그저 환청일 터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케르겔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폐하, 갑자기 어디를 가십니까?”
하이네스와 버트가 당황하여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케르겔은 그들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집무실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황후궁이었다. 하지만 그는 황후궁에 다다르기 전, 아니, 본궁을 나서기도 전에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폐하.”
바로 본궁 안으로 막 들어서는 ‘에리타’ 때문이었다.
“…….”
“폐하, 어디 나가시려던 중인가 봐요? 다행이에요. 자칫 길이 엇갈릴 뻔했네요.”
에리타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생긋 웃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밝고 쾌활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군, 황후.”
“아, 그렇게 보이나요? 라카인에서 귀한 선물들이 들어와서 그런가? 조금 전에 사절단 대표로 온 맥그리 백작이 다녀갔거든요. 오랜만에 모국의 사람을 보니까 반갑기도 하고.”
“…….”
“그래서 기쁜 마음을 폐하와도 나누고 싶어서 무작정 찾아왔는데, 혹시 바쁘신가요? 함께 산책이라도 하고 싶은데.”
에리타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았다. 그러나 그런 그녀와 달리 케르겔의 얼굴에서는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을 뿐.
“……폐하?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부끄럽…….”
“산책이라…… 좋아. 그러지.”
케르겔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에리타를 쳐다보다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린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러고는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황후궁 안의 정원으로 향하는 것인 듯했다.
“폐하! 같이 가요. 왜 이렇게 걸음이 빠르세요. 따라가기가 벅차잖아요.”
에리타가 마치 투정이라도 부리는 듯한 어조로 말을 하며 냉큼 케르겔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케르겔은 그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걷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
루시가 그 뒤를 따르다 말고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황후를 배려하지 않고 먼저 앞서 걷는 황제의 모습이 못마땅해서였다.
“폐하께서 왜 저러시는 걸까요? 평소와 달리 좀…… 차가우신 것 같지 않아요, 시녀장님? 황후마마를 배려하는 기색도 없으시고. 혹시 황후마마께 싫증이라도 느끼신…….”
그 순간, 실로아가 마치 루시의 속에 들어왔다가 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실로아, 황궁 내에서는 입조심을 하라고 한 걸 그새 잊었니?”
루시는 제 속내를 들키기라도 한 것 같은 기분에 괜히 더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실로아를 야단쳤다. 그러자 실로아가 입을 삐죽이더니 이내 어깨를 움츠렸다.
루시가 그 모습을 보고 한숨을 삼킨 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황제와 황후, 두 사람과의 거리가 많이 벌어진 상태였다. 실로아를 야단치느라 잠깐 멈춰 선 사이에 거리가 이렇게나 많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루시는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자 실로아를 비롯해 다른 시녀들 역시 조금 더 걷는 속도를 높였다.
뒤쪽에서 그런 소란이 벌어졌지만, 케르겔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그런 데에 신경을 쓰기에는 그의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분명, 이 여자는 다른 사람이다.’
케르겔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그 점만큼은 확신했다.
다른 사람.
그는 속으로 소리 없이 거듭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겠다. 자신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과 함께 산책을 한답시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도 악착같이 따라붙고 있는 이 여자가 자신의 반려, ‘에리타’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틀림없었다.
그것은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반려를 알아보는 능력이라도 발휘된 걸까.
기록상에 제 반려를 이런 식으로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다는 건 본 적 없다.
그러니 이건 그저, 제 개인적인 느낌일 터였다. 아무런 근거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어찌 보면 황당할 법한, 그런 생각.
“…….”
그 순간, 케르겔이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에리타는 미처 케르겔이 멈춰 선 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급히 따라오다가 드레스 자락이 다리에 감겨 넘어지고 말았다.
“아앗!”
“황후마마!”
케르겔의 눈앞에서 에리타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그는 손조차 뻗지 않고, 그저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시녀장과 시녀들이 서둘러 달려오는 와중에도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
케르겔은 ‘에리타’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루시와 시녀들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키는 걸 그저 가만히 쳐다보았다.
물론 그의 뛰어난 동체 시력이라면 충분히 그것을 미리 감지하고 그녀가 넘어지기 전에 붙잡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케르겔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 반려가 아닌, 반려 행세를 하는 ‘가짜’에게 건넬 친절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일단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봐야겠군.’
마음 내키는 대로,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게 그의 성격에 맞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신중을 기해야 할 때였다.
무엇보다 황제라는, 지금 이 지위가 그로 하여금 신중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자신의 반려 대신 가짜가 반려 행세를 하고 있는 건, 제 마음대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니 말이다.
세로이프의 황후가 황궁 내에서 ‘바꿔치기’를 당한 셈이다. 게다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그는 ‘가짜’의 손이나 다리에 상처가 나지는 않았는지 살피기에 여념이 없어 보이는 시녀장, 루시를 쳐다보았다.
“……기가 막히는군.”
케르겔이 헛웃음을 지으며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수가 있지?
아니, 겉으로 보기에 닮아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의심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모든 면에서 저렇게, ‘에리타’와 다른데…….
“폐하…….”
그때, 에리타가 눈물을 글썽이며 케르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연약한 척 행세한다는 걸 모를 수 없을 정도로 꾸며 낸 목소리와 표정으로 말이다.
“……괜찮나? 다친 데는 없고?”
“다친 데가 없을 리가 있나요? 여기, 이렇게 상처가 생겼는걸요.”
에리타는 제 손바닥을 케르겔의 눈앞에 들이대며 거듭 울먹이는 투로 말했다.
‘누가 들으면 큰 상처라도 입은 줄 알겠군.’
그는 그녀의 손바닥에 생긴 생채기를 보며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핏방울 몇 개가 맺힌 것 정도를 두고 상처라 이름 붙이는 게 우스웠다.
뭐…… 그게 진짜 ‘에리타’였다면 사정은 달라졌을 수 있겠지만.
“궁의를 불러서 치료하라고 하지. 아쉽지만 산책은 이 정도에서 끝내야겠어. 그대가 이렇게 다쳤는데 계속 산책을 하는 건 무리일 테니 말이야.”
“예? 아, 아니, 그…… 그렇지는 않…….”
에리타는 케르겔의 말에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케르겔은 몸을 돌렸다.
“폐하!”
“어머나, 폐하께서 왜…….”
시녀들이 수군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에리타는 입술을 꽉 깨물며 제게서 멀어져 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쏘아보았다.
“황…….”
루시는 황후마마, 하고 부르려다 말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인지 그녀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독해 보인 탓이었다.
‘착각이겠지. 내가 잘못 본 것일 거야.’
그러나 루시는 자신의 착각이라 여기며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사람일 거라는 가정 자체를 해 본 적 없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게 지극히 당연했다.
* * *
“다 되었습니다.”
궁의는 에리타의 손바닥에 난 생채기를 치료한 뒤, 붕대로 꼼꼼히 감싸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자 에리타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혹시 흉터가 생기지는 않겠지?”
“……예? 아아, 물론입니다. 이 정도의 가벼운 생채기는 흔적도 없이 나을…….”
궁의는 ‘흉터’ 에 대한 질문에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가 그녀의 신경질적인 시선을 마주하고는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을 다 듣기도 전에 에리타가 재차 신경질을 내며 입을 열었다.
“가벼운 생채기라니! 황후의 몸에 난 상처를 어찌 궁의 따위가 그렇게 함부로 말을 하는 것이냐!”
“소, 송구합니다, 황후마마. 소신이 드린 말씀은, 그러니까…….”
궁의가 에리타의 매서운 말에 거듭 고개를 조아렸다. 평소 다정하고 온화하던 황후답지 않은 모습에 당혹감마저 들었다.
게다가 가벼운 생채기에 이렇게까지 예민하게 구는 모습 또한 처음 본 것이기에 궁의가 느낀 당혹감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온몸이 골병이 들어 쇠약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내색 한 번 하지 않던 분이 어찌…….
‘오늘따라 몸이 더 안 좋으신 건가.’
그래서 더 예민해진 건지도 모른다. 궁의는 황후의 낯선 모습을 그런 식으로 납득하고자 했다.
‘하지만…… 좀 이상한데. 몸 상태가 이렇게 확 좋아질 수도 있는 건가?’
궁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 황후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간단히 진료를 했는데, 뜻밖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저번에 진료했을 때와는 달리 건강하기 그지없는 최상의 몸 상태를 확인했으니 말이다.
“됐어. 그만 나가 봐. 그리고 자네 말이야.”
이름이 뭐였더라? 에리타는 말없이 시립해 있는 시녀장을 부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얼핏 들은 기억이 나기는 하는데 금세 잊어버렸다.
시녀든, 시녀장이든, 천한 것들의 이름을 알아서 뭐 하겠는가.
그래서 그녀는 라카인에서도 시녀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했다.
“예, 황후마마.”
루시가 에리타의 부름에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조금 기분이 나아진 듯 에리타가 표정을 풀며 말을 이었다.
“맥그리 백작을 불러오도록 해.”
“……맥그리 백작요?”
“그래. 우리 쪽에서 사절단 대표로 온 맥그리 백작 말이야.”
에리타의 말을 들은 루시뿐만 아니라 실로아, 그리고 궁의마저도 표정을 굳혔다.
‘우리’란 말을, 라카인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한 것이 그들의 신경을 건드린 것이다.
하지만 에리타는 본인이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아니, 설령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성격상 개의치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황후마마.”
“그럼 다들 나가 보도록 해. 혼자 있고 싶으니까. 손을 다쳐서 그런지 머리도 아프고.”
대체 손바닥 조금 긁힌 게 두통이랑 무슨 관련이 있나요?
실로아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던 물음을 황급히 삼킨 뒤, 루시와 궁의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도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에리타를 한 번 돌아보았다.
그러나 에리타는 저를 향한 의문스러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가 문이 닫히고 혼자 남게 되자 곧바로 투덜거렸다.
“도대체 뭐가 정중하다는 거야? 매너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던데. 누가 야만적이고 미개한 나라의 황제 아니랄까 봐. 내가 고작, 그런 말을 믿고…….”
에리타는 자신에게 너무나 무심했던, 아니, 무심한 걸 넘어서 너무나 차갑기만 했던 사내를 떠올렸다. 그러자 짜증이 가득했던 그녀의 얼굴이 살짝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뭐, 그래도 잘생기기는 했더라. 대체 누가 괴물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렸던 거야? 진작 알았으면 애당초 그 계집애를 보내지도 않았을 텐데.”
그녀의 푸른 눈에 탐욕이 가득 차올랐다. 세로이프 제국의 황후. 그 자리를 잠시나마 다른 계집애에게 내주었다는 사실에 괜히 약이 올랐다.
“그래. 비록 매너 없고 차갑기는 하지만, 사내를 내 뜻대로 다루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이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완전히 제 마음대로 움직이게 될 수 있으리라.
에리타는 입꼬리를 올리며 웃은 뒤, 다시 방 안을 둘러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그렇고 황후의 방이 뭐, 이렇게 초라해? 하긴, 그 비천한 계집애가 뭘 볼 줄 아는 눈이 있었겠어? 그러니 방도 꾸밀 줄도 몰랐겠지. 미개한 세로이프 것들 눈이야 볼 것도 없고. 안 되겠어. 시녀장한테 대륙의 거상들을 모조리 부르라고 해야지.”
에리타는 방 안을 다시금 둘러보고는 제 취향으로 싹 바꿀 계획을 세웠다.
앞으로 자신이 누리게 될 것들에 대한 기대로 인해 그녀의 눈에 희열이 가득했다.
* * *
“부르셨습니까, 황후마마.”
맥그리 백작은 루시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오자마자 정중히 예를 갖췄다. 에리타는 그를 향해 고개를 까딱인 뒤, 루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나가 봐도 돼.”
“……차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겠는지요?”
“괜찮아. 어서 가 봐.”
에리타가 거듭 꺼낸 말에 루시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마치 자신이 불청객이라도 되는 듯한 기분을 느껴서였다.
하지만 루시는 내색하지 않고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방 밖으로 막 나가려는데, 에리타가 다시 그녀를 불러 세웠다.
“참! 거상들을 불러 모으도록 해.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예?”
“세로이프 제국의 거상들뿐만 아니라 라카인과 공국들의 거상들도 전부 불러.”
“갑자기 거상들은 왜…….”
“명령을 내리면 순순히 따를 것이지, 그걸 왜 궁금해하는 거야? 방을 싹 바꿀 생각이야. 촌스러워서 더 이상 여기서 못 지내겠어. 참을 수가 없다고.”
에리타는 루시에게 쌀쌀맞게 쏘아붙인 뒤, 무시하는 듯한 시선으로 방을 둘러보며 말을 덧붙였다.
“무식하고 야만적인 나라 아니랄까 봐…….”
“와, 아니, 황후마마!”
맥그리 백작이 에리타의 입에서 마구 튀어나오는 말에 파랗게 질린 채 서둘러 그녀를 막았다. 그러자 에리타가 자신이 뭘 잘못했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의 책망하는 듯한 시선에 어쩔 수 없이 루시에게 재차 입을 열었다.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야. 그냥 이곳이 내 취향이랑 안 맞아서 그래. 알았지? 그러니까 빨리 거상들을 부르도록 해. 솔직히 지금까지 견딘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 안 들어?”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루시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에리타를 보는 그녀의 눈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그 대신 그녀의 눈에 자리한 건 약간의 혼란과 불신, 그리고 배신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은 채 물러났다. 그리고 루시가 방 밖으로 나간 뒤, 에리타가 맥그리 백작에게 급히 물었다.
“그 계집애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외궁에 마련된 숙소 안에 있습니다. 아직 약 기운 때문에 온몸이 굳어 있어서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어쨌든 세로이프 쪽 사람들의 눈에 띄면 곤란해요. 이곳이 세로이프의 황궁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돼요, 맥그리 백작.”
에리타는 그에게 당부하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맥그리 백작이 그녀의 말을 듣다가 입을 실룩이더니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저야말로 왕녀님께서 그 점을 잊지 않으셨기를 당부드리고 싶군요. 좀 전에 시녀장이 보는 앞에서 너무 과하셨습니다. 그러다가 혹시 누가 의심이라도 품으면 어쩌…….”
“맥그리 백작,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에리타가 맥그리 백작의 말을 중간에 끊은 뒤, 팔걸이를 손끝으로 두드리다가 재차 입을 열었다.
“‘왕녀’라니. 그대야말로 잊은 것 아닌가? 내가 지금 여기에 ‘라카인의 왕녀’로서 있다고 생각하나?”
“아, 그, 그건…….”
맥그리 백작은 갑자기 바뀐 그녀의 말투에 당황해하다가 뭔가 변명을 할 필요를 느끼고는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황후마마.”
“…….”
“그렇게 불러야지. 내가 꼬박꼬박 존대를 해 줬더니 그대야말로 착각하고 있나 봐?”
에리타는 코웃음을 치며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맥그리 백작은 그 차가운 눈빛을 마주하고는 침을 꼴깍 삼켰다.
라카인에서도 제멋대로 굴던 왕녀가 제국의 황후가 되었으니,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그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 제 앞에 있는 여자는 라카인의 왕녀가 아닌, 세로이프의 황후인 것이다. 즉, 이곳에서 제 안위를 결정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죄송합니다, 황후마마.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맥그리 백작은 고개를 조아리며 용서를 청했다. 그러면서 변명조로 덧붙여 말했다.
“저는 다만, 라카인에 대한 충심과 황후마마를 염려하는 마음에 혹여 일을 그르치게 되면 어쩌나 하여…….”
“그거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이네, 맥그리 백작. 라카인의 왕녀가 쌍둥이라는 사실 자체를 이곳의 어느 누가 알고 있나? 제국의 황제라는 사내조차도 모르고 있는데. 그러니 누가 날 의심하겠어? 내가 뭘 해도, 그 계집애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해도, 아무도 의심 못 할걸? 그냥 성격이 갑자기 변한 줄 알겠지.”
에리타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고는 다시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제게 정중하게 행동하면서도 은근히 저를 가르치려 들던 맥그리 백작이 자신의 앞에서 저렇듯 고개를 조아리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았다.
‘라카인의 왕녀와 세로이프의 황후 사이에 그만큼 격차가 있다는 것이겠지.’
그러니 자신이 갑자기 하대를 하기 시작했는데도 백작이 아무 항의도 하지 못하는 것일 테고.
‘이건 정말 별것 아니야. 진짜 내가 갖게 될 건 이보다 훨씬 대단한 것들일 거라고.’
에리타는 탐욕스럽게 눈을 빛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불편한 마음으로 기회만 엿보던 맥그리 백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숙소에 숨겨 둔 ‘왕녀’에게 문제는 없는지 살피기도 해야 하고…….”
“아, 그렇게 하게. 당연히 그래야지. 이곳에서 데리고 나갈 때까지 절대 남들에게 들켜서는 안 되니까.”
에리타는 로엘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냉큼 그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맥그리 백작이 안도의 숨을 쉬며 예를 표했다.
이 제멋대로인 왕녀를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황후마마? 아! 일어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오만한 왕녀가 웬일로 저를 배웅까지 하려는 건가 싶었다. 백작은 일어서서 출입문까지 따라 나오려는 에리타를 보고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같이 나가도록 하지.”
“……예?”
“폐하께 가 볼 생각이거든. 아까 산책을 함께 하려다가 손을 다치는 바람에 못 해서.”
에리타는 마치 오랫동안 부부였던 것처럼 친근한 투로 황제에 대해 이야기하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맥그리 백작이 순간적으로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바로 표정을 바꿨다.
* * *
톡. 톡. 톡.
케르겔이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일정하게 나는 소리에 신경이 예민한 사람은 뭐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예민하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하이네스가 없는 터라 아무도 그에 대해 뭐라 하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하든 그저 웃음기 띤 얼굴로 바라보고만 있는 시종장만이 집무실을 지키고 있으니 당연했다.
“뭔가 마음 쓰이시는 게 있는지요.”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예외인 듯했다. 시종장은 케르겔이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 속에 담긴 초조함과 걱정을 읽어 내고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뭔가 중요한 것, 아니, 중요한 사람을 숨겨야 한다면 시종장은 어디에 숨기겠나?”
케르겔이 책상 어딘가를 보고 있다가 시선을 들어 시종장을 향해 뜬금없이 물었다. 시종장은 의아한 표정을 잠시 지었지만 이내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글쎄요. 아무래도 제 손이 닿는 곳, 혹은 남들이 간섭할 수 없는, 제 힘이 절대적으로 닿는 곳에 숨기겠지요.”
“만약 그곳이 절대적일 수 없는 곳이라면? 이를테면 타국이라든가…….”
“……라카인에서 온 사절단이 혹시 무슨 짓이라도 저지른 겁니까?”
시종장의 온화했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황궁 안팎의 사정에 대해 다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그가 놓친 부분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정확한 건 아닐세. ……사절단이 묵고 있는 숙소가 외궁이지?”
“그렇습니다, 폐하.”
“입이 무겁고 관찰력이 뛰어난 자들을 보내서 그곳을 주의 깊게 살피라고 하게. 특히 사절단 대표로 온 자의 숙소 근처에서, 다른 누군가의 흔적이 보이지는 않았는지 말이야. ……몸집이 작고 가냘픈 여인의 흔적.”
“……?”
시종장이 더욱 굳은 표정으로 케르겔을 쳐다보았다. ‘여인’의 흔적을 찾으라는 제 말을 듣고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았다.
케르겔은 손사래를 치며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지금 내가 하려는 말을 믿지 못할 걸세.”
“무슨 말씀이신지…….”
“황후가 사라졌네.”
케르겔이 시종장의 물음에 간단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 간단한 대답이 시종장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던 듯했다.
“황후마마께서 사라지시다니요? 지금 황후궁에서 라카인의 사절단 대표와 독대를 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시종장은 케르겔의 말을 도무지 믿기 힘들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케르겔이 피식 웃더니 다시금 말했다.
“사절단 대표와 독대를 하고 있다는, 그 여자는 황후가 아니야.”
“……예?”
시종장이 침착함을 잃어버린 채 눈을 크게 떴다. 케르겔은 그의 얼굴 위로 스친 불신의 빛을 알아차리고는 실소했다.
“그것 보게. 내가 말하지 않았나. 믿지 못할 거라고.”
“설마 황후마마와 닮은 사람이 지금, 황후마마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겁니까? 라카인의 사절단이 바로 그 목적으로 갑작스럽게 온……. 아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황후마마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시녀장과 시녀들이 모를 리 없지 않습니까.”
시종장은 믿기 힘들다는 듯 재차 물었다. 케르겔이 그 말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분명히 그 여자는 황후가 아니야. 어쨌든 내가 지시한 대로 사절단 숙소를 살피도록 하게. 그리고 뭔가 흔적을 찾는 대로 내게 보고하고.”
어차피 시종장이 제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루시나 다른 시녀들은 그 ‘가짜’를 직접 마주하고도 알아보지 못했으니, 눈으로 보지 못한 채 얘기로만 들은 시종장이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그를 납득시키기 위해 더 무슨 설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지금 당장 자신도 뭘 하려는 건 아니니까.
“그쪽의 어느 누구도 알아채서는 안 되네. 일단 그들이 무슨 꿍꿍이로 이따위 짓을 저지른 건지 알아봐야 하니까.”
그저 지금 자신이 해야 할 건, ‘에리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짜가 뭘 하려는 건지 신중하게 알아보는 것이 그 다음 문제일 터였다.
“말이 나온 김에, 다시 황후궁에 가 봐야겠군. ……손에 난 그 상처 같지도 않은 상처는 어떠냐고 물어볼 겸 말이야. 방문할 핑계도 그럴듯하지 않나?”
케르겔의 입술 끝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 여자가 어디를 다치든 말든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당분간 적당히 어울려 주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황후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지만.’
케르겔은 차가운 금안을 번득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시종장이 여전히 당혹감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가 그의 명을 수행하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 * *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시녀장님? 황후마마가 마치 다른 사람 같아요.”
“…….”
루시는 실로아가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른 때였더라면 또 가볍게 입을 놀린다며 호되게 야단을 쳤을 테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
실로아의 말에 그녀 역시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였기에 그랬다. 물론 그럴 리 없으니, 이런 제 생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잘 알지만.
“대체 무슨 일이죠? 황후마마가 설마, 지금껏 우리를 속였던 걸까요? 그럼 정말 속상할 것 같은데…….”
실로아는 울먹이며 말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루시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야단을 치지도, 반대로 다독이지도 않았다.
그저 앞서 걷고 있는 황후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을 뿐.
‘확실히 내가 모시던 황후마마가 아니야. 하지만 아무리 봐도 황후마마가 맞는데.’
루시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늘 남을 먼저 배려하고 세심히 살피던 황후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 실로아를 비롯해 다른 시녀들이 배신감을 느끼고 속상해하는 게 당연했다.
자신도 그런 심정이니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기에…….’
라카인 사절단의 방문. 그것이 계기였을 것이다. 루시는 사절단 대표가 무작정 찾아왔던 날 이후 돌변한 황후를 떠올렸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사절단 대표를 따라 들어갔던 수행원이 기쁜 마음에 울다가 탈진해서, 부축을 받으며 나온 일 외에는 딱히 기억나는 것도 없었고…….
“앗! 이게 뭐야!”
그 순간, 앞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에리타가 걸음을 멈춘 게 보였다. 루시는 상념을 접고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
“황후마마, 무슨 일…….”
“수풀에 스쳐서 드레스가 더러워졌잖아. 대체 정원사는 뭘 하고 있기에, 이런 걸 그냥 놔둔 거야! 당장 이곳을 담당하는 정원사를 불러와!”
키가 작은 꽃들이 심어져 있는 화단이었다. 수북하게 자라는 잎이 그 특징인 터라 지나갈 때마다 그 잎이 종종 옷자락에 스치고는 했다.
하지만 평소의 황후는 그에 대해 아무 불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꽃을 쳐 내려는 정원사를 만류했을 정도였다.
<괜찮네. 자연의 섭리에 따라 피어난 것을, 고작 옷자락에 스친다는 이유로 솎아 내서야 되겠는가?>
그리 말했던 게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녀는 마치 자신이 했던 말을 새까맣게 잊은 듯 정원사를 불러오라고 난리를 쳤다.
실로아를 비롯한 시녀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본 루시가 에리타를 향해 입을 열려는 순간, 멀리서 정원사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황후마마를 뵙습니…… 억!”
인사조차 끝내지 못한 정원사의 볼에 붉은 손자국이 생겼다. 바로 황후가 직접 따귀를 때려서 생긴 자국이었다.
“……!”
시녀들이 저마다 숨을 들이쉬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루시마저도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황궁의 정원 관리를 이렇게 하고도, 감히 내 앞에서 태연히 인사를 하려 들어? 지금 이것 때문에 내 드레스가 엉망이 됐는데?”
에리타의 말은 과장이 심했다. 드레스 하단에 잎이 스쳤다 해서 풀물이 든 것도 아니고, 심하게 더러워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에리타는 큰 죄라도 저질렀다는 듯 정원사를 나무랐다.
이미 은퇴하고도 남았을 나이에, 그보다 더 뛰어난 정원사가 없다는 이유로 황제가 붙잡았을 만큼 그는 황궁 내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황후가 온갖 모욕적인 말을 퍼붓고 있는 것이었다.
“화, 황후마마.”
루시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말리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에리타가 재차 정원사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아니, 휘두르고자 했지만 누군가가 그 사이에 끼어드는 바람에 그녀의 행동은 가로막히고 말았다.
“누구, 폐, 폐하?”
에리타는 제 손목을 잡아챈 손길에 화가 나서 눈을 부릅떴다가 케르겔이 그 장본인이라는 걸 깨닫고 입을 달싹였다.
“어머나, 폐하. 그렇지 않아도 폐하를 찾아뵙고자 본궁으로 가던 길이었는데…….”
에리타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사르르 눈웃음을 치며 손을 내리려 했다. 그러나 케르겔은 그녀의 손목을 붙든 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 세게 움켜쥔 탓에 그녀가 통증을 느끼며 얼굴을 일그러뜨릴 정도였다.
“폐하, 이 손 좀 놓아주세요. 손이 아파요. 상처도 난 터라…….”
“글쎄. 방금 보니 붕대를 감고도 잘 휘두르던데.”
케르겔이 차갑게 조소하며 그녀의 손을 감싼 붕대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자 에리타가 당황하여 말을 더듬으며 간신히 변명했다.
“그, 그건! 너무 화가 나서 그런 거예요.”
“화가 났다고? 그게 정원사를 모욕하고 때릴 수 있는 합당한 이유라고 생각하나?”
“하, 하지만…… 폐하를 뵈러 가는 길이었어요. 그런데 저 수풀 때문에 드레스가 더러워지니까 저도 모르게 화가 났어요. 여인으로서 사랑하는 남자에게 가장 예뻐 보이고 싶은 건 너무나 당연한 거잖아요. 그래서…….”
“사랑, 사랑이라…….”
에리타의 변명을 듣던 케르겔의 목소리가 점차 가라앉았다. 루시는 그의 목소리가 차가워지는 걸 느끼고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디서 함부로 그따위 말을 입에 담는 건가! 지금 나를 농락하는 것이냐!”
“아악!”
변명을 늘어놓던 에리타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루시와 실로아, 그리고 그들 주변에 있던 호위 기사와 시종,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 케르겔을 만류했다.
“폐하! 폐하, 어찌 이러십니까!”
루시가 황망한 얼굴로 케르겔을 붙들었다. 황제의 몸에 직접 손을 대는 게 불경한 행동이라는 걸 모르지 않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의 황제, 케르겔이 황후의 목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상황이기에.
“폐, 폐…….”
에리타에게서 컥, 컥, 하며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케르겔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의 목을 조르며 가만히 말을 이었다.
“내가 언제까지 네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거라 생각했지? 감히 나를 속일 수 있을 거라 자신했나?”
“케엑, 켁! 소, 속이다니요.”
에리타는 제 목을 조르는 케르겔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손으로 그의 손을 풀려고 했다. 하지만 그 시도가 우습다는 듯 케르겔은 그녀의 목을 더욱 조르며 재차 입을 열었다.
“넌 누구야. 그녀는 어디에 있지? 어디서 감히 그녀의 흉내를 내는 거야!”
“커헉, 컥! 그게, 무슨…….”
에리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초점이 점차 사라지는 게 보였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정신을 잃을 수도 있었다.
“폐하! 황후마마이십니다! 대체 어찌 이러시는지요!”
그 순간, 루시가 케르겔을 다시금 붙잡았다. 그러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기사와 시종들 역시 그를 붙들고 매달리기 시작했다.
“놔라! 이것 놔!”
그 바람에 케르겔은 에리타의 목을 조르던 손을 풀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들 모두를 내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제 사람들을 다치게 할지도 모를 힘을 사용하는 걸 자제했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그는 살기를 드러내며 다시 에리타를 노려보았다.
“흐윽, 으아악!”
에리타는 그 살기를 견디지 못하고 제 머리를 감싼 채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황후마마!”
“황후마마, 괜찮으신지요!”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 그녀의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케르겔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재차 그녀에게 다가갔다.
“폐, 폐하!”
에리타는 제게 다가오는 케르겔을 알아차리고는 처연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동정심을 느낄 법했다. 방금 전까지 그에게 졸렸던 목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 있었고, 그녀의 새하얀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폐하, 대체 왜 제게 이러시는 건가요? 제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했다고요. 정원사에게 손찌검을 한 건 잘못했지만, 그것 역시 폐하를 향한 제 마음에서 비롯된 실수였는데 그런 제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으시고…….”
에리타의 푸른 눈 가득 눈물이 고였다. 그 모습을 본 이들이 폐하께서 미치신 게 아니냐는, 불경한 말들마저 수군거릴 지경이었다.
하다못해 황후에 대해 혼란과 배신감을 느끼던 루시와 시녀들 역시 그랬다.
어찌 되었든 황후는 이미 라카인의 오만한 왕녀가 아니라, 그들의 사랑스러운 주인이니 말이다.
그런데 정작 그녀의 반려인 황제는 냉랭한 시선으로 일관하고 있으니 믿기 힘든 노릇이었다.
“다시 묻는다. ……그녀는 어디에 있지? 에리타, 그녀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어.”
케르겔의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그 말을 듣던 에리타의 입가가 실룩였다. 워낙 순간적이었던 터라 케르겔을 제외한, 그 누구도 보지 못한 표정 변화였다.
“제가 에리타예요. 아시잖아요. 당신의 아내, 에리타라고요. 이 나라의 황후, 에리타가 바로 저예요.”
에리타는 진심을 다해 호소했다. 결코 거짓이라고는 믿기 힘든, 그런 목소리였다.
“폐하, 무슨 일입니까.”
그 순간, 뒤쪽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케르겔은 에리타를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집무실에 있어야 할 하이네스와 버트가 서둘러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도 누군가가 그들에게 소식을 전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이 소란이 집무실까지 전해진 것인지도 모르고.
어쨌든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케르겔은 다시 시선을 돌리며 하이네스에게 말했다.
“그녀를 찾아야 해, 하이네스.”
“……예?”
“황후를 찾아야 한다고. 시종장, 아까 내가 내렸던 명령은 거두도록 하겠네. 당장 기사와 병사들을 보내 사절단이 머무는 숙소를 에워싸라고 하게. 어느 누구도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도록. 수상한 행동을 하는 자는 설령 그가 사절단의 대표로 온 자라 하더라도 즉참해도 좋네.”
“폐하!”
케르겔의 말을 듣던 하이네스의 표정이 흐트러졌다. 시종장을 향해 내린 명령 때문이었다. 타국의 사절단 대표를 즉참해도 좋다니. 평소 침착하던 그로서도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던 것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폐하. 더구나 황후마마의 모국에서 온 사절단에 위해를 가하고자 하시다니요!”
“황후를 납치한 놈들에게 자비를 베풀 마음 따위는 없어!”
케르겔은 하이네스의 말에 버럭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하이네스가 더욱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납치라니……. 황후마마께서는 지금 여기, 폐하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이 여자는 황후가 아니야! 에리타가 아니라고!”
케르겔은 하이네스마저 제 말을 믿으려 하지 않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다들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이 여자가 황후라니? 자네들 눈에는 이 여자가 황후로 보여? 루시, 그대의 눈에도 그런가? 에리타를 곁에서 보필하는 게 그대의 소임이잖나! 그런데 그대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분간이 안 되는 건가!”
케르겔의 노여움이 사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루시 역시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쳐다봤지만, 그의 말에 동의할 수는 없다는 듯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의 신하이자 오랜 벗인 하이네스나 버트조차도 말이다. 되레 그를 미친 사람처럼 보며 참담한 표정을 지었을 뿐.
“내가 내 여자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아둔한 자인 줄 아는가?”
케르겔은 기가 막혀서 그렇게 묻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혐오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에리타를 쳐다보다가 그대로 돌아섰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대답을 들을 수 없다면, 스스로 찾아내면 될 터였다.
조금 더 지켜보기 위해 참고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 말이다.
이 여자가 에리타의 행세를 하며 그녀의 이름을 더럽히는 걸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그 단호한 태도 때문일까. 에리타가 순간적으로 화를 참지 못하고 날카롭게 외쳤다.
“대체 그 계집애가 뭐라고!”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주위가 싸늘해졌다. 케르겔 또한 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맥그리 백작 역시 소란이 벌어졌다는 걸 어디선가 주워듣고는 근처에서 기웃거리다가 그 상황을 알아차리고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와, 왕녀님!”
“내 껍데기였던 계집애야! 태어날 때부터 불길했던 그 존재를, 그래도 왕실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거두어 주었거늘. 그 은혜도 모르고 내 자리를 빼앗았는데!”
에리타는 억울하다는 듯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맥그리 백작의 만류도 뿌리치고 케르겔을 향해 다가갔다.
“그래요, 폐하. 당신의 아내는, 세로이프의 황후는 ‘에리타’ 바로 나예요. 당신이 찾는 그 가짜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케르겔의 금색 동공이 작아졌다. 에리타는 그 시선에 흠칫 몸을 떨다가 그런 제 모습이 자존심 상했는지 턱을 쳐들고 일부러 더욱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폐하와 혼인하기로 한 건 저였어요. 라카인 왕국의 왕녀, 에리타. 그런데 감히 자격도 없는 천한 년이 제국의 황후 자리를 탐하여 제 흉내를 냈던 것입니다.”
“…….”
“불길한 쌍둥이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가련히 여겨 거두어 준 국왕 전하와 왕실의 은혜도 모르고. 모두가 불길하다 말하는 것을, 그래도 한배에서 나온 자매라 여겼던 제 등에 비수를 꽂고 저를 대신해 이곳에 온 게 바로 폐하께서 찾으시는 그 계집애란 말이지요.”
에리타의 말이 이어질수록 모든 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당시 저는 그 계집애의 간악한 흉계에 빠져 세로이프로 향하는 길을 나설 수 없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제 오라버니, 국왕 전하께서는 그 계집애를 저로 착각하여 세로이프로 보내신 거고요.”
“…….”
“그러니 마땅히 모든 걸 본래대로 바르게 돌려놓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것을 바로잡고자 온 것이랍니다, 폐하. 다만 죄를 지었다고는 해도 저와 한배에서 나왔으니 조용히 저희끼리 해결하고자 한 것이고요. 그런 제 바람과 달리 이렇게 다 공개되고 말았지만요.”
에리타는 마치 본인이 피해자라도 되는 양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에리타와 맥그리 백작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그녀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다들 황당해하고 또한 분노했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미신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그때, 누군가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말에 동의하는 듯 다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다스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왕실에서는 쌍둥이가 태어난 적 없다는 이유로.
하나의 영혼에 육신이 둘로 태어나니 불길하다는 이유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들어 짓밟힌 삶이 애처로웠다.
“미친……. 라카인 놈들, 그렇게 똑똑한 척, 잘난 척을 하고 우리더러 야만적이라는 둥 지껄이더니.”
또다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일부러 들으라는 듯 큰 목소리였다. 에리타가 그것을 눈치채고 날카롭게 그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표정을 고친 뒤, 케르겔을 돌아보았다.
“……그랬군. 그러니까 나와 내 나라, 세로이프를 조롱했던 왕녀가 바로 그녀가 아닌, 그쪽이었다는 건가?”
“그, 그건!”
에리타는 케르겔의 말에 낭패감을 드러내며 변명조로 말을 덧붙였다.
“그건 실수였어요. 당시 제가 세로이프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던 탓에…….”
“그리고 ‘에리타’란 이름도 그녀의 이름이 아니었다는 거지.”
케르겔은 에리타의 변명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다른 말을 꺼냈다.
문득 기억이 났다. 자신이 그녀를 에리타, 라고 불렀을 때 그녀의 표정이 굳었던 것이.
당시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고 제 기분 내킬 때마다 그녀를 그 이름으로 부르고는 했다.
‘……남의 이름으로 불릴 때마다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케르겔은 이를 악물며 인상을 썼다. 무심코 흘려버렸던 과거의 기억이 이제야 의미를 가지고 다시금 떠올랐다.
그리고 또 다른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로, 로엘린요!>
비밀 통로를 통해 황궁 밖으로 나갔던 날, 정체를 감출 겸 다른 이름을 사용했다. 그때 이왕이면 그녀가 원하는 이름이 낫겠다 싶어 그녀의 의향을 물어보았다.
로엘린.
‘어쩌면 그게 그대의 이름이었을까.’
케르겔은 그 이름으로 불리자 환하게 웃었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러자 가슴속이 저릿해졌다.
얼마나 홀로 외롭고, 또한 두려웠을까.
가족에게 내쳐진 그 심정은 또 오죽했을까.
대역으로서 낯선 나라에 와서 모든 게 무서웠을 텐데.
게다가 ‘라카인의 왕녀’에 대한 반감이 컸던 터라 다들 그녀를 다정히 대해 주지도 않았었는데.
그 모든 게 후회가 되어 돌아왔다.
로엘린.
“폐하, 어디를 가십니까!”
“폐하!”
그 이름이 그대의 이름일까. 케르겔은 저를 부르는 소리를 뒤로한 채 외궁이 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그녀를 찾아야 했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찾아야 했다. 더 이상 그녀가 홀로 외로워하지 않게, 곁에 있어 주어야 할 터였다.
왜?
어째서?
케르겔의 가슴속에서 누군가가 질문했다. 그 자신이 던진 물음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랑하니까!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로엘린!”
케르겔은 크게 소리쳐 그녀를 불렀다. 자신이 아는 이름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그게 실제로 그녀의 이름인지 아닌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예감은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라 말하고 있었다.
“로엘린!”
케르겔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그리고 그의 금빛 동공이 가늘게 수축하면서 강력한 기세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벌어진 옷깃 사이로 붉은 봉인이 언뜻 보였다. 그것에 흐릿하게 금이 가려는 찰나, 케르겔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기운이 순식간에 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는 뭔가를 감지한 듯 고개를 돌렸다. 라카인 사절단이 머무는 외궁 쪽 숙소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숙소 중에서도 한 지점에 그의 금빛 시선이 뚫어질 듯 박혔다.
“어엇, 폐, 폐하!”
외궁 쪽에서 나오던 시종이 그를 보고는 황급히 예를 갖추었다. 그러나 케르겔은 그에 화답도 하지 못하고 곧바로 숙소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확신하고 있는 듯 그의 걸음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 * *
쾅! 콰쾅!
어디선가 굉음이 들렸다. 그리고 사람들의 고함과 비명이 이어졌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걸까.
로엘린은 가만히 침대에 누운 채 생각했다. 자신이 갇혀 있는 이곳은 아마도 라카인 사절단에게 배정된 숙소인 듯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이렇게 소란이 일다니, 뭔가 일이 벌어진 건 틀림없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딱히 두렵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몸이 굳어 움직여지지 않는 게 마음에도 영향을 미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아니, 어쩌면 절망에 짓눌려 모든 걸 체념해서인지도 모른다.
‘아니야.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어.’
그녀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이 이어지려는 걸 억지로 끊어 낸 뒤,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는 팔과 다리를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포기하지 마. 이대로 다시 라카인으로 돌아갈 거야? 그 감옥 같은 곳으로 돌아가서, 또 그 삶을 반복하고 싶어?’
로엘린은 제 자신을 다그쳤다. 매섭게 다그치고, 또 다그치는 것만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아니. 라카인으로 돌아가는 건 그렇다 쳐도…… 너, 그 남자를 안 보고 살 수 있겠어?’
그녀는 제 자신에게 물었다. 라카인의 왕궁을 벗어난 삶. 그렇게 해서 알게 된 자유. 그 모든 건 분명 소중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소중한 게 따로 있었다.
케르겔.
자신의 남편.
저와 반려 의식을 치른, 제 반쪽.
그게 비록 거짓으로 점철된 것이라 할지라도, 로엘린에게 그는 진심으로 마음에 담은 단 한 사람이었다.
“……으윽.”
그 순간, 로엘린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루 정도 약효가 지속된다던 맥그리 백작의 말이 틀렸던 걸까. 아니면 그 약효를 이겨 낼 정도로 그녀의 정신력이 강한 것일까. 그녀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저 지금 이 기회를 살려서 어떻게든 이곳을 탈출해야 하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녀는 신음을 거듭 내뱉으며 굳어 버린 몸을 움직이기 위해 애를 썼다.
콰앙!
그 순간, 굉음이 조금 더 가까이에서 들렸다. 하지만 로엘린은 그것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손가락이라도 하나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뿐.
“로엘린!”
로엘린의 이마를 타고 땀방울이 흘러내린 것과 동시에 누군가가 다가오더니 그녀를 끌어안았다. 로엘린은 순간적으로 깜짝 놀랐지만, 몸이 굳어 있는 터라 자신을 끌어안은 사람을 밀어내지 못했다.
그저 입술 사이로 가늘게 신음을 내뱉었을 뿐.
“로엘린…….”
그러나 그녀의 귓가에 제 ‘진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파고들면서, 로엘린의 놀란 가슴이 진정되었다. 그러고 나니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었다.
‘……폐하?’
로엘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저를 안고 있는 자의 가슴팍을 통해 심장이 뛰는 소리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괜찮아? 괜찮은 거야?”
“…….”
케르겔이 로엘린을 품에 안고 있다가 팔을 조금 느슨하게 풀고는 그녀를 살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몸이 굳어서 그런 것이지만, 설령 그게 아니었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절망에 짓눌릴 것만 같았던 순간, 저를 구원해 준 남자에게 그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로엘린?”
그의 입에서 다시금 새어 나온 제 이름에 로엘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가득 고였던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설마 몸이…….”
그제야 케르겔은 로엘린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그러고는 곧바로 그녀의 등과 무릎 뒤를 받쳐 안아 들고 몸을 일으켰다.
“누가 침입을…… 헉! 와, 왕녀님?”
케르겔이 로엘린을 안고 방 밖으로 나간 순간, 라카인 사절단 중 누군가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케르겔에게 안겨 있는 로엘린을 알아보고는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왕녀님, 아니, 황후마마께서 어찌 이곳에…….”
그는 아무런 사정도 알지 못하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그녀가 에리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자인 듯했다. 케르겔은 사나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라카인’이란 이름만으로도 살기를 주체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케르겔은 제 품에 안겨서도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로엘린을 더욱 힘주어 안고 외궁을 나섰다.
“폐하!”
그 순간, 때마침 달려온 하이네스와 맞닥뜨렸다. 하이네스의 뒤로 버트와 다른 신하들, 그리고 루시를 비롯한 시녀들의 모습도 보였다.
“폐하, 드릴 말씀이…….”
“궁의는 어디에 있지?”
하이네스가 막 입을 열려는 걸 막은 뒤, 케르겔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자 하이네스의 뒤에 있던 루시가 앞으로 나오더니 곧바로 케르겔의 품에 안겨 있는 로엘린을 보고 새하얗게 질려 다가왔다.
“황후마마!”
“루시, 지금 당장 황후궁으로 궁의를 부르게. 황후를 데리고 가 있을 테니.”
케르겔은 루시를 향해 빠르게 명령을 내리고는 황후궁이 위치한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폐하.”
“나중에 얘기하도록 하지, 하이네스.”
그는 하이네스의 거듭된 부름에 그 말만을 남겨 놓고 다시금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약 기운을 모두 제거하였으니 주무시고 나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궁의는 이마에 맺힌 땀도 닦지 못한 채 케르겔에게 보고했다. 케르겔은 굳은 표정으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로엘린을 보았다.
파리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이 가냘프고 여린 이에게 약을 사용하다니. 그는 분노가 치미는 걸 억제하지 못하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케르겔은 심호흡을 한 뒤, 가까스로 분노를 억눌렀다.
이 가련한 여인의 잠을 방해할 수는 없단 생각에서였다.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푹 자고 일어나. ……두 번 다시 그대가 아플 일 없도록 할 테니까, 로엘린.”
잠든 와중에도 제 이름을 부르는 걸 알아차렸는지, 로엘린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묘한 표정을 짓다가 허리를 숙여 그녀의 눈꺼풀 위에 입을 맞췄다.
너무나도 조심스러운 입맞춤에 그 뒤편에 서 있던 루시와 실로아마저 숨을 멈췄다.
케르겔은 천천히 입술을 떼고 허리를 바로 세운 뒤, 루시와 실로아를 향해 입을 열었다.
“황후를 잘 보살피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폐하.”
루시가 몸을 숙이며 대답했다. 실로아 역시 예를 갖추며 몸을 숙였다. 그는 그들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인 뒤, 침실 밖으로 나갔다.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이네스와 버트가 케르겔이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그에게 다가왔다.
“황후마마께서는 좀 어떠신지요.”
“약 기운을 전부 제거해서 자고 일어나면 이제 괜찮을 거라더군.”
“정말 다행입니다, 폐하. 그런데…….”
하이네스가 안도의 숨을 내쉬더니 이내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케르겔은 손을 내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침실 앞에서 이럴 게 아니라 내 집무실에 가서 얘기하지.”
솔직히 하이네스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대충 짐작은 됐다. 그러니 자신이 그 말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예상되는 바였다.
곤히 잠들어 있는 그녀의 침실 앞에서 소란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하이네스는 케르겔의 속내를 알아차린 듯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그의 뒤를 따랐다. 버트 또한 평소와는 달리 조용히 침묵하며 따라왔다.
“그들은 어디에 있지?”
“……제2 외궁에 있습니다. 폐하께서 그렇게 가시고 난 뒤, 에리타 왕녀가 혼절을 하는 바람에 잠시 소란이 벌어지기도 했고요.”
케르겔이 말한 ‘그들’이 누구인지 굳이 되물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하이네스는 덤덤히 그에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버트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역시 그 왕녀였어요. 재작년에 있었던 일도 그렇고. 아주 난리를 치더라고요. 화를 참지 못하고 붉으락푸르락하다가 그대로 기절해 버리는데, 그것만 봐도 성질이 어떤지 충분히…….”
“흠, 버트.”
하이네스가 버트의 말이 다소 지나치다 싶었는지 헛기침과 함께 그의 말을 끊었다. 케르겔은 집무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고는 정원 쪽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안에 들어가려니 답답한데 저기서 대화하지.”
“예.”
하이네스는 그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들 세 사람은 정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햇살이 따사로운 한낮이었다. 새소리가 정겹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그런 날이었다. 상상도 못 했던 일이 모두를 휩쓸어 버렸다고 하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이제 하고 싶은 말을 해 봐.”
케르겔은 정원 깊숙이 들어오고 나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하이네스가 조금은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계시’ 속의 그분이 누구인지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반려 의식을 통해 황후, 그녀가 내 반려란 걸 확인했을 텐데?”
“물론 당시에 저희 역시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반려 의식 때 늑대들이 떼 지어 그 모습을 드러내 황제의 반려를 반겼던 것을 잊은 건 아니다. 그러나 계시 속의 인물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재확인 절차는 필수적이라는 게 하이네스의 판단이었다.
“내 반려는 그녀야. 라카인의 저 여자가 아니라.”
케르겔은 그런 하이네스의 마음을 알지만,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다. 그러자 하이네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거듭 설득조로 입을 열었다.
“폐하, 그렇게 무조건 감정적으로 결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봉인이 깨질 경우를 대비해서도 그렇고, 후계자를 보기 위해서도 ‘진짜’ 반려를 맞이하셔야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자칫 잘못 선택하였을 경우…….”
“그럴 경우, 내 대에서 늑대족은 사라지겠지. 굳이 봉인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하더라도 내 뒤를 이을 자가 없을 테니까.”
케르겔은 덤덤하게 하이네스가 하려던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러고는 그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세로이프가 멸망하는 건 아니지.”
“폐하! 그렇지 않습니다. 당장 멸망하는 건 아니라 하더라도 제국의 기반이었던 늑대족의 혈통이 사라지게 되면 그 정통성에도 흠이 생기는 것이 아니겠는지요.”
하이네스가 케르겔의 말을 듣다가 답답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러나 케르겔은 하이네스를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제국의 기반은 늑대족이 아니야, 하이네스. 정통성 또한 단순히 그런 핏줄로 증명되는 게 아니고.”
“…….”
“세로이프는 늑대족이 홀로 이끌어 온 나라가 아니야. 그렇게 약해 빠진 나라가 아니란 말이야. 오히려 이 나라를 지금껏 이끌어 온 건 자네들, 그리고 용감한 세로이프 제국민들이었어. 늑대족의 피를 물려받은 그 극소수의 몇 명이 아니었다고.”
케르겔이 한 말은 하이네스나 버트를 향한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계시’에 따라 무작정 순응하고 그에 따라 로엘린을 반려로 맞이했던 제 과거를 털어 냈다. 그는 한결 개운해진 표정으로 재차 입을 열었다.
“내 반려는, 내가 선택해.”
“……!”
“그녀가 카인베르트가 선택한 여인이든 아니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내가 선택한 내 반려라는 게 중요하지.”
“…….”
“이런 내게 실망했나?”
케르겔은 하이네스와 버트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하이네스가 잠시 침묵하다가 피식 웃더니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오히려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저를 깨우쳐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도요, 폐하! 다른 어느 때보다도 멋지십니다!”
버트가 엄지를 세워 보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케르겔은 그들을 보며 다시금 웃은 뒤, 황후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더없이 애틋했다. 그리고 그 시선 어디에서도 흔들림을 찾아볼 수 없었다.
* * *
“황후마마를 뵙고 너무 감격한 나머지 울다가 탈진했다며 사절단 대표가 부축까지 하는데, 부축을 받아 나가는 수행원이 황후마마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그저 라카인에서 황후마마를 오랫동안 모셔서 충심이 깊은 사람이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지…….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황후마마께서 그 고초를 겪지 않으셨을 텐데.”
실로아는 훌쩍이며 고개를 조아렸다. 루시 역시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죄를 청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사람 같다고 의아해하면서도, 단 한 번도 의심을 품지 않았던 자신들의 아둔함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진작 알아차렸더라면 황후마마께서 이렇듯 고초를 겪지 않으셨을 텐데.’
루시가 자괴감에 빠져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실로아 역시 더욱 크게 훌쩍였다. 그 모습을 보던 로엘린은 손을 내저었다.
“그대들의 죄가 아니야. 괜찮아.”
“하지만…….”
“그대들이 어찌 알 수 있었겠어? 가발을 뒤집어쓰고 화장까지 해서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을 텐데. 더구나 내가 그대들을 부를 수도 없었던 상황이고.”
로엘린은 그렇게 말을 한 뒤, 침대 아래로 천천히 내려섰다. 그러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루시와 실로아가 동시에 기겁하여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으셨을 텐데…….”
“또한 나도 사과해야 할 일이 있잖아. 지금껏 그대들을 속였으니까.”
“화, 황후마마. 어찌 저희에게 고개를 숙이시는지요.”
루시는 로엘린이 자신과 실로아에게 고개를 숙이자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마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그 모습을 본 로엘린이 루시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고는 실로아에게도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킨 뒤, 두 사람의 손을 각각 잡고 말을 이었다.
“루시, 실로아, 그대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네. 그대들뿐만 아니라 제국의 모든 이들에게도 미안해.”
“……황후마마.”
“나는 제국의 황후 자격이 없는 사람인지도 몰라. 그런 거창한 이유로 이곳에 온 게 아니었거든. 그저 제대로, 사람처럼 살고 싶어서 온 것이었지.”
로엘린은 감춰 두고 있어야 했던 제 속내를 털어놓았다. 루시와 실로아는 그런 로엘린을 마주한 채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가 힘겹게 살아왔을 시간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루시는 제 손을 잡은 로엘린의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 잡았다. 그게 불경한 행동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하고 싶었다. 형식적인 예를 갖추기보다는, 다정하고 따스한 제 주인을 진심으로 위로하고 싶었다.
“충분히 자격이 있으십니다.”
“루시.”
“황후마마께서는 저희가 모시는 단 한 분이십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요.”
루시와 실로아는 고개를 조아리며 로엘린을 향해 충성을 맹세했다. 단순히 그녀가 황후이기에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던 때와 달리, 이제는 진심으로 그들이 그녀를 모시기를 바라기 때문에 하는 맹세였다.
그 진심을 온전히 느낀 로엘린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케르겔의 목소리가 그 분위기를 깼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폐, 폐하!”
갑자기 들린 케르겔의 목소리에 루시와 실로아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로엘린 역시 그의 목소리에 당황하여 눈을 깜빡이며 침실 문 쪽을 보았다.
케르겔이 성큼성큼 침실 안으로 들어와 곧바로 로엘린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당황해서 잠시 어쩔 줄 몰라 하던 로엘린이 그제야 정신을 차린 뒤,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셨는지요.”
“왜 울고 있었던 거지?”
케르겔은 로엘린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미간을 좁힌 채 질문부터 건넸다.
“아, 이건, 그러니까…….”
로엘린은 제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깨닫고 멋쩍은 마음에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녀가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자 케르겔이 그것을 제멋대로 오해하고는 인상을 쓰며 루시를 돌아보았다.
“루시, 자네가 대답해 봐. 왜 황후가 울고 있었던 것인지.”
“예? 그게…….”
루시가 케르겔에게서 갑작스러운 질문을 받고 당황하여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더욱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황후에게 무슨 말을 했기에, 그녀가 우는 건가! 설마 이번 일과 관련해서 황후에게 상처가 되는 말이라도 한…….”
“아, 아니에요! 절대 그런 게 아니에요, 폐하!”
로엘린은 케르겔의 말을 멍하니 듣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흔들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케르겔이 흠칫거리며 제 팔을 붙든 작은 손을 내려다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그가 더 이상 쓸데없는 오해를 하지 않도록 서둘러 말을 꺼냈다.
“오해하신 거예요. 저는 그저, 루시와 실로아에게 고마워서…….”
로엘린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얘기를 할 뿐이었다.
이들의 진심과 자신이 느낀 감정, 그런 것들에 대해서.
“……그래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 것뿐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설명을 마친 뒤, 그를 슬쩍 쳐다보았다. 케르겔이 여전히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정말이에요.”
로엘린은 그가 아직도 오해를 하고 있는 건가 싶어 재차 덧붙여 말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 전부 이해했어. 그러니 괜히 내 눈치를 보지 않아도 돼.”
그의 말에 안도한 그녀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르겔의 표정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대체 왜 그러나 싶어 로엘린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데, 케르겔이 미간을 좁힌 채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얼굴이 많이 상했군. 가뜩이나 요새 몸도 안 좋았는데.”
케르겔이 굳은 표정을 하고 있던 이유가 밝혀진 순간이었다.
그는 로엘린의 파리한 얼굴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애틋한 마음이 묻어나는 손길에 그녀의 얼굴이 저절로 빨갛게 물들었다. 아니, 그녀뿐만 아니라 그 광경을 본 루시와 실로아도 얼굴을 붉힐 지경이었다.
루시는 얼굴을 붉히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는 재빨리 실로아를 데리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단둘이 남은 뒤, 케르겔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아?”
“……예.”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걸. 침대로 다시 가는 편이 좋겠어.”
“저, 저기, 폐하!”
로엘린은 저를 안아 든 케르겔 때문에 당황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안은 채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푹신한 시트 위에 그녀를 내려놓은 뒤, 그 옆에 앉았다.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였다. 케르겔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에게도 사과를 해야 한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아니, 누구보다도 그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로엘린의 빨개졌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문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폐하.”
“…….”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계실 테니, 제가 무슨 변명을 더 드릴 수 있겠어요? 그저 죄송하단 말씀 외에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왜 나한테는 그런 말을 하지 않지? 조금 전 시녀장과 시녀에게는 제대로 사람처럼 살고 싶어 왔다고, 그렇게 말했다면서.”
“…….”
로엘린의 눈이 흔들렸다. 조금 전 케르겔의 오해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그들과 나눈 대화까지도 시시콜콜 털어놓았던 모양이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청혼하셨던 이는 제가 아닌, 제 언니였죠.”
스스로 그 말을 입에 담은 순간, 가슴속이 저릿하게 아파 왔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껏 그를 속여 왔으니 이제라도 그에게 정식으로 사과해야 할 터였다.
“이미 보셨으니 아시겠지요? 제 쌍둥이 언니…… 저와 똑같이 생겼어요. 그래서 언니를 대신해, 폐하와 결혼하기 위해 온 것이었고요.”
“내가 괴물이라는 이유로, 그대의 등을 떠밀었던 것이겠군.”
케르겔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떠밀리듯 이곳에 와야 했을 그녀를 생각하면 화가 나지만, 한편으로는 그 덕분에 이 여자와 부부가 될 수 있었던 걸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이걸 기뻐해야 하는 건지,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케르겔이 피식 웃는 순간, 로엘린의 목소리가 재차 떨려 나왔다.
“그래서 저는…… 폐하께 변명조차 할 수가 없어요. 제게는 그럴 자격도 없어요. 폐하를 속인 채 결혼식을 올리고 반려 의식도 치르고…….”
로엘린의 눈에서 눈물이 투둑, 투둑, 떨어졌다. 입 밖으로 꺼내고 보니 자신이 저지른 죄가 더욱 수치스러웠다. 그녀는 제 비겁함에 대해 용서조차 구하지 못하고 흐느꼈다.
그녀의 가냘픈 어깨가 떨렸다.
그 순간, 케르겔이 그녀의 어깨를 잡더니 그대로 자신의 품에 그녀를 당겨 안았다.
그의 체취가 코끝에 닿았다. 시원하면서도 다정한, 그런 체취였다. 로엘린은 재차 눈물이 쏟아지는 걸 막으며 울음을 삼켰다.
“그래. 변명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돼.”
“…….”
“그대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으니까.”
“폐, 폐하.”
“그대는 내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어. 내 앞에서 그대는 언제나 ‘로엘린’이었지. 그 오만한 왕녀가 아니라. 그걸로 충분해. 시작이야 어땠는지 몰라도.”
“폐하. 그렇지만…….”
로엘린은 그의 품에 안겨 있다가 그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케르겔이 그녀의 뺨을 양손으로 감싼 뒤,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내 반려는 그대뿐이야.”
케르겔은 온 마음을 다하여 제 진심을 말했다.
계시와 상관없이 이 가련한 여인만이 제 반려였다.
별도로 확인을 할 필요가 없었다. 늑대족의 후예로서 반려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케르겔이라는 이름의 한 사내로서 지금 눈앞의 이 여자를 갈망할 뿐이었기에.
“……폐하.”
“그대를 사랑해, 로엘린.”
“……!”
로엘린은 케르겔에게 다시 말을 걸려다가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저를 바라보는 푸른 눈을 마주한 채 재차 고백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래, 어쩌면 처음부터였는지도 몰라. 그대를 처음 봤을 때부터 눈에 밟혔으니까. 보고 있지 않아도 자꾸만 그대가 떠오르고, 그대가 궁금했어.”
“…….”
“내가 왜 이럴까, 어이가 없기도 했어. 그 오만하던 왕녀를 직접 만났는데 밉거나 싫기는커녕 되레 웃음이 나오려 하고 농담을 건네고 싶어지는 게 기가 막히기도 했지.”
케르겔은 로엘린의 양쪽 뺨을 감싼 채 웃음기 섞인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황한 듯 흔들리던 눈동자 안에 담긴 제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유치한 만족감마저 들었다.
지금 이 순간, 이 여인이 보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게 무엇보다도 가슴을 뿌듯하게 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단 하나의 진심으로 귀결되더군.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사랑하니까 눈에 밟히고, 시도 때도 없이 그대가 떠오르고,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그대를 보면 웃음이 나오고, 짓궂은 농담 한 마디라도 더 건네고 싶어지고.”
“…….”
“그런데 내가 그대가 아닌, 다른 여자를 반려로 들일 수 있을까? 말했잖아. 나도, 사람이라고. 황제도 사람이라고. 이런저런 목적을 위해 반려를 들여야 하는 황제이기에 앞서, 나는 그저 한 여자를 마음에 담은 사내야.”
“…….”
로엘린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케르겔은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던 손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로엘린은 그 손을 꽉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도…… 저도 그래요.”
그녀의 말에 케르겔의 눈빛이 크게 일렁였다. 그녀는 눈을 휘며 조금 더 크게 그를 향해 말했다.
“저도, 사랑해요. 사랑해요, 케르겔.”
“……!”
케르겔은 믿기 힘들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벅찬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 * *
“로엘린. 로엘린. 로엘린…….”
“그만 불러요, 케르겔.”
로엘린은 자꾸만 제 이름을 반복해 부르는 케르겔의 행동에 민망해져서 고삐를 잡고 있는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로엘린의 뒤쪽에 앉아 있던 케르겔에게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정식으로 그대의 이름을 알게 됐잖아. 어쩐지 그 이름이 더 잘 어울린다, 했더니 역시 그게 진짜였어.”
케르겔은 마음에 든다는 듯 또다시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로엘린. 로엘린. 로엘린.
……제 이름을 이렇게 많이 들어 본 적이 있었던가.
로엘린은 말 위에 앉아 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제 혈육에게서도 들어 보지 못한 이름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런 제 이름을 귀하고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꾸만 부르고 또 불렀다.
그런 그의 태도에 마음이 따스해졌다. 그리고 조금 유치한 생각이기는 하지만, 우쭐해지기도 했다.
자신이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아서.
로엘린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펴고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고는 입을 열었다.
“도착했네요.”
“그러게. 그대의 이름을 몇 번 부르다 보니까 금방 도착했군.”
그는 고삐를 당겼다. 그러자 그들을 태우고 온 말이 멈춰 섰다. 케르겔은 가볍게 말 아래로 내려서서 그녀를 향해 팔을 뻗었다.
“저 혼자 내릴 수 있는데요.”
“이 말이 그대의 말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해. 이 녀석은 은근히 성질이 있어서 말이야.”
푸르르. 그 순간, 케르겔이 제 흉을 보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 푸르르, 소리를 냈다. 로엘린은 그런 말의 갈기를 쓰다듬은 뒤, 작게 웃으며 그에게 몸을 맡겼다.
“그것 봐. 성질이 보통 아니라니까.”
케르겔은 로엘린을 안다시피 하여 말에서 내려 주며 거듭 제 말이 옳다며 주장했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서로 마음을 고백하고 난 뒤, 그의 태도는 더욱 친근하게 바뀌었다. 본래도 다정하던 그였지만, 뭐랄까…… 그들 사이에 있던 벽마저도 사라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그나저나 이렇게 나와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괜찮아. 루시한테 말하고 나왔잖아. 게다가 내가 내 아내와 함께 외출을 하겠다는데, 그걸 누가 막겠어?”
“……그래도.”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마, 로엘린. 그대가 내 반려라는 건 절대 변하지 않을 거니까. 지금 여기도 솔직히 올 필요가 없는 건데…… 그대가 자꾸 신경을 쓰는 것 같아서 온 것뿐이고.”
케르겔은 눈앞에 펼쳐진 은빛 숲과 거대한 바다처럼 일렁이는 안개를 바라보며 말했다. 로엘린이 그를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고맙기는……. 여기에 와 봤자 어차피 확인할 수 있는 건 없어. 반려 의식도 이미 그때 치렀고.”
“그 반려 의식을 치렀을 때, 저는 제가 아닌, 쌍둥이 언니 행세를 했었으니까요.”
이제 와서 뭘 하겠다는 건 아니다. 어차피 반려 의식이라는 건 그저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저…… 당시에 그를 속이고 의식을 치렀다는 점이 마음에 걸려서, 이곳에 오자고 그를 졸랐을 뿐.
로엘린은 그날의 기억을 되새겼다. 그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느꼈던 죄책감과 긴장감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리고 반려 의식을 모두 마친 뒤, 들렸던 늑대들의 울음소리도…….
그녀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다.
늑대.
로엘린은 조심스럽게 케르겔의 옆얼굴을 쳐다보았다.
늑대. 이 남자와 늑대는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나중에 얘기해 주겠다고 한 남자에게 괜한 질문을 할 수는 없다. 로엘린은 궁금증이 치미는 걸 억지로 누른 뒤,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케르겔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나란히 걸을까? 길이 좀 좁기는 하겠지만.”
“……예.”
로엘린은 케르겔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향한 그의 손을 보니, 복잡했던 머릿속이 한결 나아지는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이 남자에 대한 자신의 감정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남자의 마음도…….
자신을 향해 사랑을 고백했던 케르겔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로엘린은 귓바퀴가 뜨거워지는 걸 느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안개가 자욱한 숲속 오솔길을 향해 발길을 떼었다.
* * *
안개는 금방이라도 그들을 삼킬 듯 일렁였다. 케르겔은 로엘린의 손을 꽉 잡은 채 걸으며 주의를 주었다.
“조심해. 길을 벗어나면 지난번처럼 환상에 갇힐 수 있으니까.”
“…….”
그 순간, 로엘린이 걸음을 멈췄다. 그는 갑자기 멈춰 선 그녀를 돌아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 제가 본 환상은 라카인의 별궁에 갇혀 있는 저였어요.”
“…….”
케르겔은 그녀가 꺼낸 말에 멈칫하더니 이내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로엘린은 그가 제 손을 더욱 힘주어 잡는 걸 느끼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불이 꺼진 지 오래된 벽난로. 아무도 없는, 차가운 침실. 그곳을 마주한 순간 꿈을 꾸었던 건가 했죠. 분명 세로이프에 있었는데, 그게 모두 꿈이었나 싶어서.”
“…….”
“그건 정말 끔찍했어요. 별궁을 벗어나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꼈던 게 꿈이었다는 걸 믿기 싫었고, 다시 이 감옥 같은 곳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절망스러웠어요.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것처럼…….”
“……로엘린.”
“다행히 그때, 당신이 제 손을 잡아 그 환상 속에서 빼내 주었어요.”
“운이 좋았지. 그대가 좀 더 깊숙이 들어갔더라면, 나도 구할 수 없었을 테니까.”
케르겔은 상상도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로엘린은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스스로 빠져나오고 싶어요.”
“……뭐?”
그가 고개를 흔들다 말고 표정을 굳혔다. 로엘린은 저를 바라보는 금안을 똑바로 마주한 채 거듭 말했다.
“그 두려움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어요. 그리고 제 발로 나오고 싶어요.”
“설마, 지금 저 안개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겠단 거야?”
케르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로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뱉더니 재차 말을 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로엘린. 저 안개 속에서 한 번 빠져나왔다고 우습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렇게 생각 안 해요. 제가 그때 운이 좋았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걸 알면서 그런 말을 해?”
“케르겔, 당신과 함께 나아가고 싶어서요.”
“……!”
로엘린의 말에 케르겔이 입을 꾹 닫았다. 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기다려 줘요. 여기서. 이 자리에서.”
“…….”
“저는 아직, 과거에 붙들려 있어요. 벗어나기 위해서 대역을 자처하고 세로이프까지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해요.”
로엘린은 그의 앞에 당당히 서고 싶었다. 저를 사랑한다고 말한 남자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위험한 충동일지 모른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용기를 냈다.
“세상 모든 게 두려웠어요. 그 두려움을 마주하고, 똑바로 말해 주고 싶어요. 이제는 두렵지 않다고. 그러니까 내 앞에서 사라지라고.”
로엘린의 말을 듣고 있던 케르겔이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무언의 허락이었다. 그녀는 다시금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오솔길 밖으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케르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대를 믿어.”
“…….”
로엘린은 오솔길 바로 끝에 멈춰 섰다. 그녀의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믿으니까 일단 보내 주는 거야. 하지만 만약 그대가 돌아올 수 없게 된다면 내가 어떻게든 그대를 데리러 갈게.”
“…….”
“그것도 안 된다면 같이 갇히면 되고. 뭐, 그것도 썩 나쁘지는 않겠네.”
농담을 덧붙인 그의 목소리는 긴장감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로엘린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다시 안개를 쳐다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안개가 그녀를 휘감았다. 그리고 케르겔의 눈앞에 있던 그녀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 *
로엘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난번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냉기 어린 침실. 굳게 닫혀 있는 창문.
그러나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침실에 있는 게 저 하나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게 다 뭐야? 크세안 대륙사? 정치과정론? 미학?”
저와 똑같이 생긴 자매가 자신을 비웃으며 책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그녀를 조롱하며 말을 이었다.
“한낱 껍데기 주제에 이런 책들을 읽어서 뭐하려고? 이런 게 너한테 무슨 도움이라도 될 것 같니? 네 주제에 뭘 하려고? 대륙의 역사를 알아봤자 별궁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네 신세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정치? 그런 걸 네가 이해나 할 수 있니? 미학은 또 뭐고.”
에리타는 피식거리며 로엘린을 비웃었다. 로엘린은 바닥에 떨어진 책들을 보았다. 그것들은 전부 기초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조차도 그녀에게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 것들이기도 했다.
로엘린은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책을 주워 들었다. 그러자 에리타가 그녀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더욱 날카롭게 빈정거렸다.
“네 주제를 알도록 해. 왕실의 핏줄이라고 다 같은 줄 아니? 너 따위, 그 목숨 붙여 놓은 것만으로도 감사해하며 살아야…….”
“언제나 그런 식이었죠, 언니는.”
“뭐?”
로엘린은 에리타의 말을 끊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러자 에리타가 눈을 찌푸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제 쌍둥이 언니의 얼굴을 마주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자존감이 낮아진 건 사실이에요. 계속해서 그런 말들만 들었으니 당연한 건지도 모르죠. 언니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으니까.”
너는 불길한 존재라고.
껍데기에 불과할 뿐이라고.
그래서 그녀는 많은 것들을 갖지 못하고 살았다. 단 한 번도 욕심을 내 본 적도 없고, 미래에 대한 꿈조차 꾼 적 없었다.
그런 건 제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라 여겼다. 그것이 서러웠지만, 체념하며 살았다.
하지만…….
“하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로엘린은 주워 들었던 책을 낡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에리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배에서 태어난 자매였으나 결코 가족이 아니었다. 로엘린은 타인이나 다를 바 없는 그녀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다.
“이제는 서럽지 않아요.”
내게도 이제는 가족이 생겼으니까. 내게도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내게도…… 사랑한다 말해 주는 남자가 있으니까.
케르겔.
로엘린은 지금 이 모든 게 환상이라는 걸 또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지난번처럼 환상을 실제 현실로 착각하지도 않았다.
그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에 그랬다.
케르겔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 현실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랬다.
“너 지금 무슨 헛소리야? 건방지게 뭐가 어쩌고 어째?”
에리타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그러나 로엘린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침실 안을 둘러보았다.
어둡고 답답했던 공간.
이제 두 번 다시 이곳을 찾을 일은 없으리라.
“야! 너 지금 내 말 무시해?”
로엘린은 에리타가 발작하듯 소리치는 것을 흘려들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침실 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아프지도 않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에리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사라지더니 침실 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은빛 나무가 가득한 숲에 자신이 서 있었다. 로엘린은 저를 놓아주는 안개를 가만히 보다가 재차 걸음을 옮겼다.
오솔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런데도 어쩐지 그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못 찾으면…… 그가 나를 데리러 올 테니까.’
근거 없는 믿음이었다. 로엘린은 대책 없이 낙관적인 제 모습이 우스워서 작게 웃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남자의 형체가 흐릿하게 보였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케르겔이었다.
“케르겔.”
로엘린은 그를 불러 보았다. 그러자 마치 그가 제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몸을 틀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흐릿하게나마 안개에 감싸여 있던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서 와.”
로엘린은 케르겔이 내민 손을 잡고 그의 품에 안겼다. 케르겔의 손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그냥 그의 가슴팍에 기댄 채 물었다.
“많이 기다렸어요?”
“별로.”
“……돌아왔어요.”
“잘 돌아왔어.”
“환상 속에서 빠져나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했죠.”
“응.”
“그런데 저는 두 번이나 빠져나왔네요. 대단하지 않아요?”
“그래, 대단해. 이 사고뭉치 아가씨야. 정말 대단해. 얌전한 줄로만 알았더니.”
케르겔이 로엘린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장난스럽게 타박했다. 그런 여유와 달리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굳이 그걸 내색하지는 않았다.
* * *
다시 찾은 동굴의 모습은 반려 의식을 치렀을 때의 제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기야 시간이 많이 흐른 게 아니니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눈으로 보이는 것은 달라진 게 없는데도 어쩐지 동굴 안을 둘러보면서 느끼는 기분은 달랐다.
그와 반려 의식을 치렀던 곳.
‘반려’라는 이름을 허락받은 곳.
그저 세로이프 황실에 내려오는 전통에 따른 형식적인 절차이겠지만, 그래도…….
‘허락해 주세요. 이 남자의 반려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그녀는 이 동굴, 무덤의 주인인 카인베르트에게 속으로 조용히 간청했다.
그때, 케르겔이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그냥,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로엘린은 제 속을 내보인 것만 같아 괜히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케르겔이 짓궂게 웃더니 허리를 구부리고는 그녀와 눈을 마주친 채 재차 입을 열었다.
“아무 생각도 안 하기는……. 뭔가 생각한 것 같은데?”
“아, 아니라니까요.”
그녀는 그의 금안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한 채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반려로 허락해 달라고.
그리고…… 당신을 내 반려로 맞이하는 걸 허락해 달라고, 그렇게 소원을 빌었다는 걸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로엘린은 목덜미가 뜨끈뜨끈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한 손으로 제 목을 쓸어내렸다. 그러다가 문득 동굴 벽에 드리워져 있는 천에 시선이 닿았다.
지난번 반려 의식 때도 봤던, 그 천이었다.
“그런데 저 천은 뭘 가리고 있는 거예요?”
민망함을 달래려고, 그래서 화제를 돌릴 목적으로 무심코 꺼낸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의외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대의 초상화.”
“……예?”
로엘린은 케르겔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을 본 케르겔이 개구쟁이처럼 씩 웃더니 그쪽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한번 보여줄까?”
그는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냉큼 동굴 벽에 드리워진 천을 걷어 냈다.
그리고 로엘린은 제 눈앞에 드러난 초상화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때? 마음에 들어?”
어느새 다시 그녀의 곁으로 돌아온 케르겔이 질문을 건넸다. 하지만 로엘린은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한 채 계속 그림만을 쳐다보았다.
“이 그림은 대체, 언제…….”
언제 이 벽에 초상화를 그렸을까. 이 정도로 큰 그림을, 더구나 동굴 벽에 그리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했을 텐데…….
아니, 그보다…….
“건국 시조의 무덤이라면서요! 그런데 이곳에 그림을 이렇게 막 그려도 되는 거예요?”
로엘린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케르겔을 돌아보고는 타박했다.
“응? 아니, 그게…….”
“다른 곳도 아니고, 건국 시조의 무덤이잖아요. 앞으로도 대대로 반려 의식도 치르고, 황실의 후손들이 보존해야 할 장소인데, 그런 곳에 이런 그림을…….”
“…….”
케르겔은 의기양양하게 천을 걷고 그림을 자랑했다가 졸지에 문화재 파괴범이 된 기분을 느꼈다. 그만큼 저를 보는 로엘린의 시선이 흉흉했다.
“오, 오해야! 오해하지 마, 로엘린!”
그는 더 이상 그녀의 오해가 깊어질까 두려워, 서둘러 손사래를 치며 해명했다.
“이건 내가 라카인에 청혼서를 보내기 전부터 이미 존재했던 그림이라고!”
“……뭐라고요? 그게 말이 돼요?”
로엘린은 케르겔의 말을 믿지 못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자 케르겔이 다시 한 번 손사래를 친 뒤,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까이 가서 한번 보도록 해. 그럼 알 거야.”
“케르겔!”
그녀는 케르겔이 이끄는 대로 그림이 그려진 벽 쪽으로 가까이 갈 수밖에 없었다.
“자세히 봐. 물감으로 그린 것 같은지. 그리고 붓질의 흔적이 보이는지도.”
“…….”
그런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본 벽화 어디에서도 사람이 그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그냥 원래부터 그 벽에 존재했었다는 듯. 암석 자체에 새겨져 있는 그림인 것처럼.
“……이게, 가능한 일이에요?”
그래서 더욱 믿기 힘들었다. 어떻게 이런 그림이 가능한 것인지. 더구나 저를 그린 그림이니 최근에 그려졌을 텐데. 이렇게 아무런 흔적도 없이.
오래된 그림이라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런 흔적들이 지워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황실 대대로 내려오는, 일종의 신비한 현상이야.”
“……?”
그녀의 의문을 풀어 주겠다는 듯 케르겔이 말을 꺼냈다. ‘늑대족’과 관련된 부분은 뺀 채 말이다. 대충 신비한 현상 정도로 넘어가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로엘린은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로엘린의 그런 표정을 보고 나직하게 웃더니 설명을 이어 나갔다.
“반려를 맞이할 때가 되면 이곳의 벽에 그 반려의 모습이 나타나지. 지금처럼 이렇게.”
“……예? 그게, 무슨…….”
“라카인에 청혼서를 보내기 전, 나는 이 그림을 통해 그대를 이미 봤어. 물론 그때는 그대의 쌍둥이 언니만이 존재하는 줄 알았기에 그쪽에 청혼을 했었지만.”
케르겔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 입으로 말하기 멋쩍은 일이었다. 아내 대신, 다른 여자에게 청혼을 하다니.
다른 누가 그런 짓을 했다면 멍청한 놈이라며 비웃었으리라.
그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다시금 입을 열려 했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로엘린의 모습 때문에 다른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로엘린? 왜 그래? 어디 불편해?”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진 게 보였다. 그는 다급히 로엘린을 살폈다. 로엘린은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괜찮아요.”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제가, 저 그림 속 인물이라고 어떻게 확신해요?”
그녀는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와 똑같이 생긴 그림 속 인물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방금 그가 꺼낸 이야기를 들으며 공포가 더해졌다.
황실 대대로 내려오는 현상.
반려를 맞이할 때가 되면 그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
그래서 그는 제 쌍둥이 언니, 에리타에게 청혼했다.
과연 그의 반려가 되었어야 할 인물은 누구일까.
자신일까. 아니면 에리타일까.
둘 중 어느 한쪽일 텐데.
만약 저 그림 속 여인이 자신이 아닌, 제 쌍둥이 언니를 나타냈던 거라면…….
“내가 그렇게 확신하니까.”
케르겔이 덤덤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순식간에 로엘린의 불안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완전히 가라앉은 것은 아니기에,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불안한 빛을 띠며 흔들렸다. 그는 그 눈을 마주한 채 다시 말을 이었다.
“이미 반려 의식을 통해 확인했어.”
“그런 것만으로 확인했다고 하면…….”
그저 상처를 낸 손을 함께 제단 위에 올렸을 뿐이다. 그에 뒤이어 늑대들이 어디선가 한꺼번에 울부짖었다고는 하지만…… 그건 그저 우연일 뿐이었을 것이다.
애당초 황제의 반려를 맞이하는 데에 늑대가 관련될 일도 없을 테고.
로엘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케르겔이 두 손을 뻗어 그녀의 양쪽 뺨을 감싸고는 입을 열었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그대가 내 반려라는 걸 확신해.”
“…….”
로엘린은 그에게 양쪽 뺨이 감싸인 채 고개조차 움직이지 못하고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케르겔은 그녀를 응시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의심할 필요 없고, 걱정할 필요도 없어. 내 반려는 내가 선택해. 오래전 죽은 건국 시조가 선택한 대로 따른 게 아니야. 그대를 향한 내 마음이, 나로 하여금 그렇게 선택하게 한 것이지. 설마 내 마음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
케르겔은 진지하게 말하다가 이내 농담처럼 덧붙였다. 로엘린 역시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듣다가 가볍게 웃은 뒤, 대답했다.
“……그런 생각 안 해요.”
“그럼 됐어.”
케르겔은 잘했다는 듯 그녀의 이마 위에 입술을 꾹 눌렀다가 뗐다. 그러고는 로엘린의 뺨을 감쌌던 손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로엘린은 제 손을 감싸 쥔 그의 커다란 손을 슬쩍 내려다보고는 다시 시선을 들어 석벽에 그려진 그림을 보았다.
저와 똑같은 여인.
그리고 제 쌍둥이 언니와도 똑같은 여인.
하지만 분명, 그 여인이 가리키는 인물은 하나였을 것이다.
‘그래서 뭐, 어떻다는 건데. 케르겔이 나를 선택했다고 하잖아.’
그녀는 다시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두 눈을 꽉 감았다가 뜬 뒤, 그림을 보며 말했다.
“근사한 초상화를 갖게 됐네요. 태어나서 지금껏 초상화를 가져 본 적 없었는데.”
그녀는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림 속 여인이 자신이라는 걸 돌려 말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케르겔은 로엘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건국 시조께서 그림 쪽에 조예가 깊으셨던가 봐.”
그의 농담을 들은 로엘린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케르겔이 환하게 웃는 로엘린을 다시 끌어안았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다.
케르겔과 로엘린, 두 사람이 서로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한 것은, 말이다.
그들의 첫 키스였다.
* * *
“왕녀가 조금 전에도 또 한바탕 난리를 쳤습니다. 폐하를 만나게 해 달라고요. 휴우, 그 패악질이 굉장하더군요.”
“하이네스, 자네의 입에서 패악질 운운하는 말까지 나온 걸 보면 확실히 대단한 여자로군.”
케르겔은 제2 외궁 앞에 서서 피식 웃으며 하이네스에게 말했다. 하이네스가 피곤한 듯 미간을 누르더니 입을 열었다.
“골치 아픈 일은 신하에게 떠넘겨 버리고, 밀회를 즐기고 돌아온 어느 분 때문에 더욱 힘들었거든요.”
“밀회라니? 입맞춤밖에 못 했는데.”
“자랑이십니다. 아! 아니죠. 그래도 입맞춤은 하신 겁니까? 두 분께서 동침하지 않으셔서 다들 걱정이 많았는데, 희망이 보이는군요.”
“……흐음. 평소 버트가 할 법한 말을 자네가 하는 걸 들으니 기분이 묘한걸.”
케르겔은 어쩐지 겸연쩍은 기분이 들어 한 손으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그러자 하이네스가 가볍게 웃더니 조금 더 느슨해진 투로 입을 열었다.
“사죄 대신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죄라니?”
“아까 폐하께 드렸던 말씀 말입니다. 황후마마가 반려가 맞는지 다시 확인해야 한다던…….”
하이네스가 말끝을 흐렸다. 케르겔은 그를 힐끔 돌아보고는 말을 건넸다.
“자네로서는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한 것뿐이야. 그런 걸로 내게 사죄니 뭐니 할 필요 없어.”
“하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뭐든지 따지고, 꼼꼼하게 살펴 줘. 자네가 내 곁에 있어서 내가 그래도 이만큼 하고 있는 거니까.”
“폐하.”
하이네스의 보라색 눈이 흔들렸다. 케르겔은 그런 친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장난스러운 투로 말을 덧붙였다.
“물론 지금 내가 저곳에 들어가서 뭘 하더라도, 그건 살짝 눈감아 주고.”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왕녀와 대화를 하시려던 것 아닙니까? 폐하! 폐하!”
하이네스가 깜짝 놀라 그를 불렀다. 하지만 케르겔은 냉큼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치 이때를 노리고 있었다는 듯 말이다.
“……후우. 하긴, 말로만 하실 분이 아니지.”
하이네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이어 나갔다.
“……솔직히 그 왕녀한테 시원하게 되갚아 주고 싶기도 하고.”
그는 어쩐지 응원을 해 주고 싶은 마음에 미간을 손끝으로 긁적이며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 * *
“폐하!”
에리타는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자를 확인하고 황급히 애달픈 표정을 꾸며 냈다.
“이제야 다시 뵙네요, 폐하. 밤이 깊어지던 터라 오늘 중에 다시 뵙지 못하는 줄 알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요.”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가련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케르겔은 그런 에리타를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나한테 흔들리고 있는 게 분명해.’
에리타는 그가 밤늦은 시간에 찾아와 이렇듯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자신을 보는 이유가 제게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그의 가슴팍에 손을 대며 한 번 더 애달픈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우리가 왜 이렇게 엇갈려야 했을까요. 제가 조금만 더 빨리 용기를 냈더라면……. 꺄악!”
그러나 그녀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물러서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가 허리춤에 있던 검을 어느새 빼서 그녀를 향해 겨눈 탓이었다.
“폐, 폐하?”
“당장 이곳을 떠나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에리타는 푸른 눈을 바쁘게 움직이며 그의 속내를 파악하고자 했다. 그러나 케르겔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반복하여 말했다.
“당장 이곳을 떠나도록 해. 왕녀, 그대뿐만 아니라 사절단 전부. 날이 밝을 때까지는 두고 보려 했지만, 도무지 역겨워서 참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여, 역겹다고요? 지금 저한테 역겹다고 하신 거예요?”
에리타는 바들바들 떨다가 그의 거친 언사에 울컥 화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왕녀님, 무슨 일입니까? 아니, 폐하?”
그 순간, 밖에도 소란이 전달된 것인지 맥그리 백작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에리타는 그의 등장에 힘을 얻은 듯 조금 더 당당하게 케르겔을 향해 항의했다.
“나가라니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나요? 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한 나라의 사절단에 이렇듯 무례하게 굴 수는 없는 것 아닌가요?”
“무례는 그쪽에서 먼저 저질렀지. 내 아내를 모욕하고, 나를 능멸했으니 말이야.”
“저희가 언제요!”
에리타가 바르르 떨며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상황을 살피던 맥그리 백작이 냉큼 대화 속에 끼어들었다.
“그렇습니다! 지금이라도 진실을 밝히려던 왕녀님의 선한 뜻을 왜곡하시는 건 오히려 폐하가 아니십니까? 더구나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인의 침소에 들어 행패를 부리시다니요! 시정잡배도 그런 짓은 하지 않을 겁니다!”
맥그리 백작은 덩달아 언성을 높였다. 아무리 야만적이고 무식한 세로이프의 황제라 해도 양국 간의 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으리란 계산을 마친 뒤였다.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제국이라 할지라도 한 나라와 아예 척을 지는 건 위험한 짓일 테니 말이다.
그러나 백작의 그런 예상은 뒤이은 황제의 말에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라카인이야말로 세로이프의 적이 되고 싶지 않다면 이쯤에서 물러가는 게 좋을 거다. 라카인의 족속은 전부 다 없애 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이니까. 그대들은 내 인내심을 섣불리 시험하려 들지 않는 편이 나을 거야. 그 목숨 줄은 붙여서 돌아가야 하지 않겠나?”
케르겔은 왕녀를 겨누던 검으로 백작을 겨누었다. 맥그리 백작은 당장이라도 제 목을 관통할 것만 같은 검의 살기에 식은땀만 뻘뻘 흘렸다.
“폐하, 지금 당장 떠나라 하시는 건 지나친 명령이십니다.”
그때, 그를 구원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색이 되었던 백작은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냉큼 고개를 돌렸다. 은발의 사내, 하이네스가 차분한 표정으로 다가온 것이다.
“바, 바쉘 경…….”
“적어도 날이 밝은 뒤에 떠나라 하십시오. 더구나 이들이 지금 떠난다면 황궁의 궁인들도 덩달아 잠을 설치게 될 터, 부디 궁인들의 편안한 잠을 위해서라도 자비를 베풀어 주시지요.”
“흐음……. 그런가?”
“예, 폐하.”
“그럼 어쩔 수 없지. 내 사람들의 잠을 방해해서야 되겠나. 날이 밝으면 곧바로 떠나도록. 그 뒤에도 떠나지 않으면 강제로 추방할 테니.”
케르겔은 하이네스와 천연덕스럽게 대화를 주고받은 뒤, 자비를 베풀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잠깐만요!”
그때까지 말도 못 하고 바들바들 떨던 에리타가 그를 불러 세웠다. 케르겔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제가 그 계집애보다 못한 게 뭔데, 저를 거부하는 거죠? 얼굴도 똑같다고 하지만, 그 비쩍 말라 추레한 개 꼴을 하고 있는 계집애랑 제가 비교될 게 아니잖아요! 왕실의 핏줄이라 해도 제대로 교육 한 번 받지도 못한, 그런 천한 계집애가 대체 뭐라고…….”
“그녀는 너와 달리 향기가 나지.”
“뭐라고요?”
“썩은 쓰레기 냄새가 나는 너 같은 것과 달리 그녀에게서는 사랑스러운 꽃향기가 나. 네 말대로 너와 그녀가 비교될 게 아니지. 너 따위와 어떻게 그녀를 비교하겠나?”
케르겔은 차갑게 조소하며 다시 몸을 돌렸다. 에리타가 등 뒤에서 소리를 지르며 저주를 퍼붓는 게 들렸지만,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로엘린을 보러 가고 싶을 뿐이었다.
* * *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그러렴.”
로엘린은 읽고 있던 책을 덮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문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폐하께서 조금 늦으신다고 합니다. 처리하실 일이 있다고.”
“아…… 그런가?”
실로아가 목욕물을 준비하러 나간 뒤, 루시가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로엘린은 괜히 제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얼굴을 붉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루시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목욕물이 준비되었습니다, 황후마마.”
그때, 실로아가 다시 들어왔다. 로엘린은 조금은 당황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서둘러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곧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네.”
루시는 욕실로 향한 로엘린을 쳐다보다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역 신부’라는 엄청난 진실이 밝혀진 날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그게 행운을 불러오는 계기가 될 듯싶었다.
“황후마마께서 왠지 모르게 황제 폐하께 벽을 쌓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 벽도 사라진 느낌이고.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두 분께서 솔직히 마음을 터놓으신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나이 든 이의 눈에는 풋풋한 감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들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했던 순간에도 말이다.
루시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잠자리를 정돈하기 위해 침대로 향했다. 바로 그 순간, 문이 열렸다.
“벌써 목욕을 끝낸…… 어머나, 폐하!”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케르겔이었다. 처리할 일이 있어서 늦어진다는 전갈을 받았던 터라, 그가 벌써 올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루시는 서둘러 두 손을 모으며 뒤로 물러섰다.
“오셨습니까.”
“로엘린은?”
지금 이것도 그들이 보여 주는 변화라 할 수 있었다. 무심코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말이다. 루시는 갑작스러운 황제의 등장에 당황했던 것조차 잊고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황후마마께서는 지금 목욕 중이십니다.”
“……아, 목욕 말인가?”
케르겔이 멈칫하더니 어색하게 물었다. 그의 목덜미에서부터 붉은 기운이 올라왔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소파에 앉았다.
“다른 날은 목욕을 일찌감치 끝내더니…….”
“그렇다기보다는 오늘 폐하께서 예상과 달리 너무 일찍 오셔서겠지요.”
루시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으며 대답했다. 그들이 함께 잠을 자기는 해도 성적인 관계를 가진 적은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루시가 잘 알고 있는 바였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사이가 밤에는 더욱 어색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그래서 로엘린은 최대한 빨리 목욕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고, 반대로 케르겔은 최대한 늦게 침소에 들어오고는 했다.
그런데 오늘 변화가 생긴 것이다.
“흠흠, 내가 너무 서둘렀군. 알았네. 나가 보도록 해.”
“예.”
루시는 황제의 얼굴뿐만 아니라 목과 귀까지 벌겋게 변한 걸 보고도 보지 못한 척 덤덤히 예를 표하고 침실 밖으로 물러났다.
“후우……. 이거 내 모습이 좀 우스운데.”
케르겔은 루시가 나간 뒤,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노련하기 그지없는 시녀장이 제 속내를 파악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는 민망한 마음에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순간, 묘한 소리가 그의 귀를 자극했다.
당황한 마음에 미처 인식하지 못한 소리였다.
찰방찰방, 물을 끼얹는 소리.
피부가 곱다며 감탄하는 시녀의 목소리.
그리고…… 쑥스러운 듯 작게 웃는 그녀의 웃음소리.
케르겔은 그 모든 소리들을 듣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젠장. 무슨 소리가 이렇게 또렷이 들리는 거야?”
그는 남들보다 뛰어난 제 청각을 탓하며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달아오른 열기를 식힐 겸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한번 달아오른 몸은 쉽게 식으려 하지 않았다. 마치 지난날을 비웃기라도 하듯 말이다. 당분간은 그냥 잠만 자자고 했던, 그 지난날의 자신을.
“휴우…….”
케르겔이 고개를 흔들며 한 손으로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리고 창문을 막 닫고 돌아서려는데 침실 문이 열렸다.
“오늘은 장미 향유를 발라 드릴까요? 황후마마께 굉장히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괜찮아. 오늘은 그냥 자고 싶…… 앗, 폐하!”
재잘거리는 실로아의 말에 대꾸하며 침실 안으로 들어서던 로엘린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케르겔 역시 창문 앞에 서 있다가 눈만 휘둥그렇게 떴다.
목욕을 막 끝내고 나온 로엘린의 모습은 평소에 보았던 단정한 드레스 차림의 그녀와 너무나 달랐다.
얇은 가운 하나만으로 감싸고 있었던 터라 그녀의 몸이 만들어 내는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또한 뜨거운 물에 씻고 난 탓인지 화장기 없이 말간 그녀의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아아…….”
케르겔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외마디 소리를 뱉었다. 그러고는 그런 제 모습이 민망해져서 헛기침을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루시에게서 그대가 씻으러 갔다는 말을 들었어.”
“……예? 아, 예. 예에.”
로엘린 역시 멍하니 눈만 깜빡이다가 뒤늦게 허둥대며 대답했다. 그들 사이에 어색함이 감돌았다. 서로를 의식하느라 다른 어떤 감정도 끼어들 새가 없었던 것이다.
그 바람에 두 사람 모두 실로아가 슬그머니 뒤로 빠져 침실 밖으로 사라진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서로를 바라보고, 얼굴을 붉히기만 했을 뿐.
툭. 툭.
그 순간, 바닥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케르겔은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다시 보았다. 로엘린의 젖은 머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머리의 물기를 닦아야 할 것 같은데.”
“아, 그, 그래야죠. 저기, 실로…… 실로아?”
로엘린은 더듬거리다가 황급히 제 시녀를 불렀다. 그러나 실로아는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가 자리를 피해 주었다는 걸 깨달은 로엘린의 얼굴이 다시금 빨갛게 물들었다. 그리고 케르겔 역시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과 로엘린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해 어떻게든 애를 써 보려는 시녀의 노력이 눈물겨웠다.
그는 피식 웃은 뒤, 조금은 어색함을 덜어 낸 얼굴로 말을 건넸다.
“내가 머리를 말려 줄까?”
“폐하께서요?”
“응.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로엘린은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그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자 케르겔이 그녀가 편히 앉을 수 있도록 소파의 위치를 조정했다. 그녀는 그를 등지고 앉아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머리를 잘 말리지 않으면 감기에 걸린다더라고.”
“……예에.”
케르겔이 멋쩍은 투로 꺼낸 말에 로엘린이 작게 대답했다. 그는 다시금 뭔가를 말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문 뒤, 그녀의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꾹꾹 눌러 물기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
로엘린은 머리가 당겨질 때마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케르겔의 손길은 서투르기 그지없었다.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생전 처음 다른 이의 머리를 말리는 것이니 어려운 듯했다.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번도 아프단 말을 하지 않았다. 되레 제 입에서 신음이라도 새어 나갈까 봐 입술을 앙다물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모든 게 꿈처럼 느껴져서 제 팔을 꼬집어 보고 싶기도 했다.
제 비밀이 들통나고 최악이 될 줄 알았던 날이 이렇듯 꿈 같은 날로 탈바꿈할 줄 어찌 알았을까.
로엘린은 빨개진 얼굴을 감추며 손으로 뺨을 슬쩍 만졌다.
“……다 됐어.”
그때, 케르겔의 손길이 멀어졌다. 로엘린은 저도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들어 고개를 뒤로 젖힐 뻔했다. 하지만 그녀는 가까스로 고개를 똑바로 세우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사해요, 폐…….”
“그런데 왜 자꾸 폐하라고 부르는 거지? 아까는 이름을 불러 줬으면서.”
“그게…… 그러게요. 조금 어색했나 봐요.”
로엘린은 제 말을 끊은 뒤, 냉큼 불만을 말하는 케르겔을 보고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를 마주해서였을까. 괜히 어색해졌다. 어쩌면 지금 제 차림새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얇은 가운 위에 조금 더 두툼한 가운을 겹쳐 입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 와중에 케르겔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가볍게 한 잔만 할까? 그대한테 해 줄 말도 있고.”
“예.”
로엘린은 제게 ‘해 줄 말’이란 소리에 머릿속의 고민을 털어 낸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케르겔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더니 자신이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감기에 걸릴 수도 있으니까.”
“감사해요, 케르겔.”
그녀는 마치 제 고민을 읽어 낸 것처럼 행동하는 그의 배려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케르겔이 제 옷 안에 감싸인 채 쏙 들어가 있는 그녀를 보다가 어쩐지 흡족한 기분이 드는 걸 느끼고는 헛기침을 했다.
“……왕녀와 사절단이 내일 오전 중에 떠날 거야.”
그는 로엘린의 맞은편에 앉아 그녀에게 와인을 한 잔 따라 준 뒤,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엘린은 와인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시다가 순간적으로 멈칫하더니 이내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거나 그리울 까닭이 없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곧 흐려지고 말았다.
“저, 그런데 왜 그렇게 갑자기 떠나는 건가요? 혹시 저 때문에 양국 간에 무슨 문제라도…….”
로엘린의 낯빛이 흐려진 건 세로이프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케르겔은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전혀 그런 거 아니야. 더구나 라카인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해도 그대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세로이프는 겨우 그런 일에 흔들리지 않아, 로엘린. 그대의 남자를 너무 무능하게 보는 것 아니야?”
“그렇지 않아요! 무능하게 보다니요?”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강하게 부정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재차 미소를 짓더니 잔을 들었다.
“그러니까 마음 푹 놓고 한 잔만 마시자고.”
로엘린은 그의 잔에 제 잔을 부딪친 뒤, 남은 와인을 마셨다. 쌉쌀한 뒷맛에 그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순간, 케르겔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으세요?”
“아, 그냥…… 우리 첫날밤이 생각나서.”
“…….”
“그날, 그대가 독한 술인 줄도 모르고 한 번에 다 마셔 버려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워낙 달콤해서, 독한 술인 줄 몰랐어요.”
로엘린은 민망한 마음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변명조로 대답했다. 케르겔이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다가 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럼 이만 자도록 하지.”
“……예. 그래야죠.”
로엘린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일 뿐인데, 어쩐지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애써 내색하지 않고 침대로 향했다.
옆에 다가와 눕는 그가 느껴졌다. 로엘린은 괜히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에 입술을 축였다.
“오늘 여러모로 고생했으니 푹 자도록 해.”
“……케르겔, 당신도요.”
그녀는 그의 인사에 화답한 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있다가는 제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는 소리마저 들킬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로엘린의 숨소리가 점차 편안해졌다.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난 뒤,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케르겔에게서 작게 한탄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잠만 자자고? ……그따위 헛소리를 하다니.”
아마도 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게 될 것만 같았다.
* * *
라카인의 사절단은 마치 쫓겨나듯이 이른 아침에 황궁을 나섰다. 그리고 사절단이 라카인으로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라카인 국왕, 레노프의 이름으로 유감의 뜻을 표하는 성명이 발표되었다.
그 바람에 쌍둥이 왕녀의 존재가 라카인 왕국뿐만 아니라 크세안 대륙 전체에 알려졌고, 라카인 왕실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우스갯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라카인 왕국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건 모두가 예상한 바였다. 세로이프 제국의 황제가 보낸 청혼에 속임수를 썼던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지금은 무조건 납작 엎드려 제국의 분노를 피해야 할 때였다.
……겉으로는, 그랬다.
쨍그랑!
“그 하찮은 계집애가 이런 골칫덩어리가 될 줄이야.”
레노프는 잔을 던져 버린 뒤,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시녀가 바닥에 떨어진 유리잔의 조각을 줍기 시작했다.
“앗! 죄, 죄송합니다, 국왕 전하!”
너무 서두른 탓이었을까. 시녀는 깨진 조각을 줍다가 손을 베여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고는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레노프가 그 모습을 짜증스럽게 보다가 호위 기사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저, 전하! 죄송합니다! 부디 용서를…….”
시녀는 호위 기사에게 끌려 나가면서 거듭 용서를 빌었다. 하지만 레노프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대로 그것을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왕실의 수치나 다름없는 걸 어떻게 내버려 둘 수 있겠나.”
“……몰래 처리하고자 하십니까, 전하?”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데프레텐 공작이 입을 열었다. 그는 사적으로 국왕의 외조부이기도 했다. 레노프는 공작을 힐끗 보고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외조부께서는 좋은 방법이라도 갖고 계십니까?”
“몇 년 전, 바네사란 이름의 연금술사가 혼종의 괴물을 만들어 냈지요.”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 겁니까? 뜬금없이 괴물 얘기는……. 뭐, 세로이프의 황제가 그 괴물이라도 된답니까?”
레노프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거리며 빈정거렸다. 그러나 백발의 공작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고대 수인족을 다시 탄생시키겠다던 연금술사의 광적인 욕심이 만들어 낸 괴물이었지요. 그러나 그런 혐오스러운 혼종의 괴물을 누구도 반기지 않았던 까닭에, 연구 결과는 묻혀 버렸고요.”
“…….”
레노프는 공작의 말을 흘려듣다가 뭔가를 예감한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공작이 그제야 입꼬리를 비틀었다.
“일단 곁에서 황제를 떼어 놓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괴물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괴물은 괴물로 꾀어내는 법이지요.”
“아하…….”
레노프의 푸른 눈이 번득였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음습한 흉계가 그 속에서 서서히 꿈틀거리며 탄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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