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누가 가짜 신부인가?(1)
“……뭐? 라카인에서 사절단을 보냈다고?”
“예, 폐하.”
하이네스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케르겔이 그 모습을 쳐다보며 미간을 좁히더니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자들이 이제 와서 사절단을 보냈다니, 대체 무슨 속셈으로 그런 거지?”
“경솔하게 추측해서는 안 되겠지만, 아마도 폐하와 황후마마의 사이가 가까워졌다는 소식을 접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결혼식 때 타국의 사람들이 제법 들어왔었던 터라.”
“그래서 황후에게서 뭐라도 얻어 들을 게 있나 해서 사절단이란 명목으로 오는 거다, 그런 건가?”
“그 외에는 달리 이유가 없지 않겠는지요. 본래 라카인과 교류가 빈번했던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하이네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케르겔의 물음에 재차 대답했다. 케르겔은 그의 말을 듣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이네스 역시 묵묵히 서 있다가 조심스럽게 그의 침묵을 깼다.
“황후마마께 당부를 드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폐하.”
“……그게 무슨 뜻이지?”
케르겔이 미간을 좁히고는 시선을 들어 하이네스를 쳐다보았다. 다소 날카로워진 듯한 시선에 긴장할 법도 하지만, 하이네스는 침착하게 재차 입을 열었다.
“물론 실제로 뵌 황후마마는 현명하기 그지없으신 분이지만, 그래도 모국의 사람들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에 혹여 말실수라도 하시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그렇게 될 경우, 양국 간의 문제가 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와 라카인 사이에 문제가 될 정도로 말실수를 할 만한 게 있나?”
케르겔은 하이네스의 과한 경계가 못마땅하다는 듯 불퉁한 투로 물었다. 그러자 하이네스가 너무나도 태연하게 커다란 폭발물을 던져 놓듯 대꾸했다.
“예를 들면 아직까지도 초야를 치르지 않으셨다거나, 하는 것 말입니다. 라카인에서 알게 되면 충분히 문제로 삼을 법하지요.”
“하이네스, 자네…… 콜록!”
케르겔은 느닷없이 가해진 공격에 말문이 막혀 기침을 했다.
“지금 그게…….”
“저는 그저 만약의 경우를 상정하여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하이네스는 당황한 케르겔을 보고도 차분한 어조로 재차 대답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케르겔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케르겔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네도 버트 못지않게 엉뚱한 구석이 있어.”
“얌전히 일만 하고 있는 저는 왜 걸고 넘어가시는 겁니까?”
그 순간, 버트가 서류 더미에 코를 박고 있다가 고개를 들더니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휴우……. 됐네, 됐어. 내가 자네들과 무슨 얘기를 더 하겠나.”
케르겔은 벌겋게 변한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당장이라도 집무실을 나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이네스가 그 모습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은근슬쩍 어디를 가시려는 겁니까?”
“황후한테.”
“……예?”
이번에 말문이 막힌 건 반대로 하이네스였다. 케르겔은 조금 전 하이네스가 그랬듯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황후에게 말실수 같은 걸 하지 않도록 당부하라면서?”
“그래서 지금 황후마마께 가시겠다는 겁니까? 결재를 해 주셔야 할 서류가 이렇게 쌓여 있는데…….”
하이네스가 책상 위의 서류 더미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케르겔은 당당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잖나. 내 ‘초야’와 관련된 비밀이 타국에 흘러 들어갈지도 모르는 거고.”
“푸핫! 명색이 새신랑이시면서 초야도 치르지 않으신 게 무슨 자랑이라도 된다고…….”
버트가 가만히 듣고만 있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버트! 그런 망발은 좀 삼가십시오! 폐하께 그게 무슨 말버릇입니까!”
“아니, 제가 뭘 어쨌다고요. 웃긴 건 맞지 않습니까. 폐하와 황후마마, 두 분께서 ‘진짜 동침’은 하지 않으시고, 매일 밤마다 침대에서 소꿉장난이나 하시는 게 무슨, 국가적인 기밀 사항이라고…….”
“자네의 그 머리통이 오늘따라 꽤 무거워 보이는군, 버트.”
케르겔이 조용히 듣고 있다가 으르렁거리며 입을 열었다.
“목 위에 달고 다니기 힘들어 보이는데 그냥 이 기회에 싹둑 잘라 줄까? 응? 머리통 잘라서 옆구리에 끼고 다니지 그러나?”
“아니, 뭐……. 그냥 말도 못 하나요.”
버트가 금세 꼬리를 내린 개가 되어 작게 구시렁거렸다. 못 말린다, 정말. 못 말려. 하이네스가 그 모습을 보다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은 뒤, 다시 케르겔을 쳐다보았다.
“폐……. 폐하?”
방금 전까지 황제가 있었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버트 때문에 잠시 정신이 흐트러진 사이에 그가 집무실을 몰래 빠져나간 게 틀림없었다.
“지금 도망가신 거 맞죠? 요즘 들어 폐하께서 황후마마 핑계를 대고 도망가시는 일이 많아지셨네요.”
버트가 집무실 문 쪽을 쳐다보다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황후마마와 저렇게까지 친해지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된 걸까요? 계시를 받은 뒤에 질색하셨던 분이란 게 이제는 믿기지도 않아요. 한 침대를 사용하다 보니 정이라도 붙으신 건가. ‘진짜 동침’을 하신 게 아니라고 해도 말입…….”
“버트, 그러다가 남들 앞에서 말실수를 할까 걱정입니다.”
“제가요? 실수를 한다고요? 저처럼 철저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버트가 누명이라도 썼다는 듯 눈까지 부릅뜬 채 투덜거렸다.
하이네스는 황제의 철없는 보좌관을 잠시 쳐다보다가 다시금 이마를 손으로 꾹 눌렀다. 황제뿐만 아니라 그의 보좌관 때문에라도 두통이 사라질 일은 없겠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휴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뒤, 황제에게 보고하려던 서류를 챙겼다. 아무래도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으니 나중에 다시 오는 편이 시간 낭비도 덜하고 여러모로 좋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두 분의 사이가 돈독해지는 게 나쁘지는 않지만…….”
이런 식으로 일을 내팽개치고 툭하면 황후궁으로 발걸음을 하는 황제라니.
이건 너무 지나친 변화가 아닌가.
‘버트의 말대로 정말, 정이라도 붙으신 건지.’
하이네스는 불경한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무심코 생각을 이어 나가다가 흠칫하며 고개를 재차 흔들었다.
* * *
“어차피 라카인의 사절단이 곧 제국을 방문할 거라는 소식도 전해 줘야 하니까. 겸사겸사 가는 거지.”
“예, 폐하.”
케르겔의 뒤를 따르던 시종장이 그의 말에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케르겔은 굳이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시종장이 빙긋 웃고 있으리란 걸 짐작했다.
‘괜한 말을 덧붙인 건가.’
그는 미간을 좁히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변명을 늘어놓은 것만 같아서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저런 변명을 댈 것도 아닌데.’
반려를 보러 가는 게 특별한 일은 아닌데 말이다. 그는 멋쩍은 마음에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평소보다 발걸음이 조급하기라도 했던 것인지, 어느새 황후궁 앞에 다다른 것이다.
케르겔은 그 점마저 괜히 머쓱해져서 인상을 쓰고는 마침 저를 보고 황급히 다가오는 시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황후를 보러 왔다. 그녀는 어디에 있지?”
“황후마마께서는 침실에 계십니다.”
“침실이라니?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시녀의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은 케르겔의 눈이 찌푸려졌다. 정오가 지난 시간에 아직까지 침실에 있다니. 그녀가 그런 식으로 게으름을 부릴 성격이 아니란 걸 알기에 케르겔의 기분이 급속히 가라앉았다.
더구나 지난번 황궁을 나갔다가 비를 맞은 이후 그녀가 은근히 감기 기운에 시달리고 있는 걸 봤던 터라 더욱 느낌이 좋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갑자기 열이 오르시는 바람에…….”
“그런데 내게는 왜 보고가 올라오지 않은 거지? 시녀장은 어디 있나?”
케르겔은 황후궁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시녀에게 물었다. 그러나 시녀가 막 입을 열어 대답하기 전에 계단 쪽에서 루시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폐하.”
“루시, 어떻게 된 거지? 황후는?”
그는 루시를 보자마자 급히 다가가며 질문부터 던졌다. 그러자 루시가 케르겔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뒤, 차분하게 대답했다.
“궁의가 지금 막 황후마마를 진료하기 위해 들어갔습니다. 폐하께도 사람을 보내어 보고하려던 참이고요.”
“그녀는 어떤가? 열이 올랐다고 들었는데.”
“아침 식사를 하신 뒤, 갑작스럽게 고열 증세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혹시 음식에 문제가 있는 건가 싶어 그에 대한 별도의 검사도 지시를 내렸습니다.”
“……음식에 대한 검사? 설마 독 같은 걸 말하는 건가?”
케르겔의 표정이 굳어졌다. 루시는 그런 그를 다독이듯 침착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그럴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지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검사를 진행하는 것뿐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저희에게는 독이 아닌 것도 황후마마께는 독처럼 작용할 수도 있지 않겠는지요. 아무래도 태어나서 자란 땅이 다르다 보니…….”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사람은 자신이 나고 자란 땅의 영향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시녀장의 말대로 이 땅에서 난 평범한 식재료가 황후에게는 의도치 않게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케르겔은 굳은 표정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그러자 루시가 시녀에게 뭔가를 지시하고는 냉큼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침실 앞에 다다랐을 무렵, 때마침 궁의가 진료를 끝냈는지 문을 열고 막 나오던 중이었다.
“약을 보낼 테니까 시간을 잘 맞춰서 드리도록 하시오. 그리고…… 앗! 폐하.”
그는 실로아에게 몇 가지 당부할 말을 한 뒤에 몸을 돌리다가 케르겔이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걸 보고는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실로아 역시 침실 문 앞에 서 있다가 케르겔을 보고 예를 갖추었다.
“황후를 진료하고 가는 건가?”
“예, 폐하.”
“황후는 좀 어떤가? 아니, 열이 났다고 하던데 왜 그런 거지?”
“감기입니다.”
“감기? 약을 먹었는데도 쉽게 털어 내지 못하는군.”
케르겔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인데도 불구하고 다시금 못마땅한 마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다가 문득 조금 전에 루시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단순히 감기일 뿐인가? 혹시 독 같은 것에 당한 건 아닌가?”
“여러 가지 검사를 해 보았는데,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닙니다. 다만…….”
케르겔의 금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 * *
“다들 나가 보도록.”
케르겔의 나직한 목소리에 루시와 실로아, 그리고 다른 시녀들이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
그는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실 입구 근처에 서서 휘장이 드리워진 침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희미하게 숨소리가 들렸다. 열이 아직 다 내리지 않아 힘든 것인지 가끔 앓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케르겔은 뒤늦게 그 소리에 이끌리듯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정말 작군. 완전히 이불 속에 파묻혔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야.”
그는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여인을 내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황후.
제 반려.
<다만, 황후마마의 몸 상태가 본래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닌 듯싶어 앞으로 신경을 많이 써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케르겔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조금 전 궁의가 했던 말을 떠올린 탓이다.
<몸 상태가 좋지 않다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지?>
<속된 말로 하자면 골병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겉으로 보기에도 연약해 보이는 분이시지만, 몸속은 그보다 더…… 에휴……. 대체 귀하게 살아오신 분의 몸 상태가 왜 이런 건지.>
궁의는 말을 채 잇지도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도 스스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돼.”
케르겔은 로엘린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리타, 그대는…… 정말이지 예측할 수가 없는 여자야.”
오만하고 버릇없던 여자라 생각했던 게 터무니없는 착각으로 여겨질 정도로, 제 눈앞의 여자는 신중하고 겸손했다. 지금도 가끔 동일인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런데 그런 그녀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한다. 그저 잠깐 감기에 걸린 걸 넘어서, 오랫동안 앓았던 환자처럼, 아니, 오랫동안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처럼 골병이 들었다고 한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렇지만 궁의는 환자를 앞에 두고 농담을 할 만한 성정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의 말은 진실을 담고 있을 터.
“딱히 무슨 불치병에 걸려 손을 쓸 수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몸이 쇠약해진 것이라니. 그는 다시금 의문이 들어 미간을 좁혔다.
그 순간, 로엘린의 입에서 가늘게 무슨 말인가가 새어 나왔다.
“죄송……. 죄송해요.”
그것은 사과의 말이었다. 케르겔은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는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그녀가 악몽에 시달리는 것 같아 깨우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녀의 잠꼬대가 계속 이어졌다.
“……폐하, 진짜가 아니라…… 죄송…….”
“…….”
케르겔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그는 로엘린을 깨우려던 손을 거둔 뒤,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죄송하다니?
진짜가 아니라 죄송하다고?
그녀를 바라보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뒤, 다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눈을 떴다. 그리고 로엘린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
그러자 로엘린이 발작이라도 하듯 몸을 크게 들썩이더니 눈을 떴다.
“아아, 그대를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폐, 폐하?”
로엘린은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금안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뒤늦게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케르겔은 그런 그녀를 다시 눕힌 뒤, 입을 열었다.
“그냥 누워 있어.”
“하지만…….”
“부부 사이에도 이렇게까지 깍듯하게 예를 갖출 필요는 없어. 게다가 아픈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고.”
“…….”
로엘린은 제 어깨를 지그시 누르는 손길 때문에 일어나 앉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 보니 제 모습이 엉망일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 탓이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만 해도 괜찮았다. 황궁 밖으로 외출을 한 이후에 감기에 걸려 아직 완벽하게 나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약을 먹어서 그럭저럭 나아 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아침 식사를 한 뒤에 갑자기 오한이 드는 것 같더니 몸살 기운과 함께 열이 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제 시중을 들던 실로아를 비롯한 시녀들이 여러모로 고생을 하기도 했고…….
어쨌든 그런 이유로 지금 자신은 제대로 단장도 하지 못한 채 외려 흐트러진 모습일 터였다.
그녀는 다시 한 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케르겔이 이번에는 로엘린을 억지로 눕히지 않고 그냥 손을 떼었다. 로엘린은 다행이란 생각에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쉰 뒤,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며 케르겔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런데 제 모습이 이래서…….”
“괜찮아. 솔직히 그대와 나, 이보다 더한 모습도 보는 게 당연한 사이 아닌가?”
케르겔의 말에 로엘린의 얼굴이 금세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케르겔이 피식 웃고는 덧붙여 말했다.
“게다가 지금 모습이 훨씬 낫기도 하고.”
“예?”
그녀는 얼굴을 붉히다 말고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들은 건가 하는 그녀의 속내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그 순진한 반응에 재차 웃은 뒤, 입을 열었다.
“아파서 생기 없던 모습보다는, 지금처럼 얼굴이 빨개진 게 한결 나아 보인다는 뜻이야.”
“……짓궂으시네요. 그나저나 여기는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로엘린은 그의 말에 더욱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고는 손으로 뺨을 쓸어내리며 말을 돌렸다. 그러자 케르겔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대답했다.
“알려 줄 것이 있어서. 당부할 말도 있고.”
“……?”
로엘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케르겔은 그녀의 목덜미 아래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잠시 쳐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라카인에서 사절단이 며칠 안에 도착할 거야.”
“……예?”
“왜 그런 표정이야? 반가워서 어쩔 줄 몰라 할 줄 알았더니. 외려 무슨, 끔찍한 소식이라도 접한 사람처럼 희게 질려서.”
케르겔은 그녀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인상을 썼다. 몸이 아프면 가족이 생각나고 고향이 그리울 거라 여겼다. 그래서 그녀에게 기쁜 소식이 되겠다 싶었는데, 그녀의 이런 반응은 의외였다.
기뻐하는 기색은커녕 방금 전까지 붉게 물들어 있던 뺨에서 핏기마저 사라졌으니 말이다.
“……아, 아니, 저는…… 그냥, 너무 갑작스러워서.”
로엘린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다가 그의 시선을 피해 눈을 돌렸다.
가슴속에 차가운 얼음이 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에 오한이 일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입과 코를 틀어막은 것처럼 숨도 가빠졌다. 그녀는 제 옷 앞섶을 꽉 움켜쥐었다.
라카인에서 왜 사절단이 온다는 거지?
로엘린의 머릿속을 채운 건 그 의문이 전부였다.
세로이프와 국가 간의 교류가 잦았던 것도 아니다. 더구나 이미 국혼이 치러진 이상 딱히 이곳에 사절단을 보낼 이유도 없다.
그러니 그녀의 의문은 지극히 당연했다. 어떤 의도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저와 관련이 되어 있을 터였다.
‘혼인을 한 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어?’
로엘린은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떨었다. 이제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라카인의 왕궁으로 끌려가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마저 들었다.
“황후, 갑자기 왜 그래? 밖에 누구 있나? 루시!”
그 순간, 저를 끌어안는 따스한 품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케르겔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로엘린은 자신을 안은 팔을 붙잡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저는 괜찮아요. 폐하.”
“황후.”
“정말이에요. 그냥…… 저도 모르게 놀라서, 그런 것뿐이에요.”
“정말 괜찮은 건가?”
케르겔은 로엘린의 말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놓지 못하겠다는 듯 그녀를 안은 팔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로엘린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거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숨을 내쉬더니 침실 안으로 들어온 루시를 향해 다시 나가라는 뜻의 손짓을 했다.
그리고 문이 닫힌 뒤, 케르겔이 재차 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안았던 팔을 풀었다.
“아직 몸이 안 좋아서 그런 모양이야. 더 쉬도록 해.”
“괜찮은데……. 참, 제게 당부하실 말씀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로엘린은 저를 누이려는 손길에 당황해하다가 문득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질문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뭔가 못마땅한 듯 미간을 모으더니 이내 난처한 투로 말했다.
“그게…….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는데, 하이네스가 평소 철저한 성격이라 그런지 걱정이 많아서 말이지.”
“……?”
“그대가 라카인에서 오는 사절단 앞에서 불필요한, 뭐, 그런 얘기를 하지 않을까 염려하더라고. 이를테면 우리가 아직 첫날밤을 제대로 보내지 않았다는 것 같은…….”
“아…….”
로엘린은 케르겔의 말을 집중하여 열심히 듣고 있다가 뒤늦게 그가 한 말을 이해하고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한 케르겔 역시 어쩐지 멋쩍은 마음에 얼굴이 붉어져서 슬쩍 시선을 돌리고는 말을 이었다.
“뭐, 그대가 가볍게 입을 놀리지는 않을 거라고 믿기는 하지만 말이야. 아무래도 모국의 사람들을 만나면 반가운 마음에 의도치 않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으니까.”
“…….”
로엘린은 달아올랐던 뺨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 가는 걸 느꼈다. 그가 꺼낸 ‘첫날밤’이란 말에 당황하여 잠시 잊었던 두려움과 답답함이 함께 밀려든 탓이었다.
그때, 케르겔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너무 불쾌하게 듣지 말았으면 좋겠어.”
“불쾌하지 않습니다, 폐하. 그리고 경솔하게 입을 놀리지 않을 것이니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는 언제 얼굴을 붉혔나 싶게 차분한 표정으로 잠시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로엘린은 한 번 더 말했다.
자신이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럴까.
라카인에서 사절단이 온다는 소식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속이 선득해지고 거부감이 드는데.
하지만 자신에게는 그것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없었다. 오히려 ‘에리타’로서 그들을 반갑게 맞이할 연극을 준비해야 할 터였다.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가뜩이나 열이 올라 어지러운 머릿속이 더욱 어지러워져서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대가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해 주니 고맙군. 안색이 나빠졌는데 다시 누워서 쉬도록 해. 내가 그대의 휴식을 너무 많이 방해했군.”
케르겔은 로엘린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진 걸 보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로엘린이 덩달아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는 그녀가 일어서지 못하게 어깨를 잡은 뒤, 입을 열었다.
“그냥 누워 있어. 아, 그리고 지난번에…….”
“……?”
로엘린이 다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케르겔은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지난번 황궁 밖에 나갔을 때 자신이 늑대를 부렸던 일에 대해서도 발설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었다.
따지고 보면 그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아마 하이네스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기겁하여 ‘에리타’가 라카인의 사절단과 마주하는 것 자체를 막으려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늑대족’과 관련한 비밀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건 아니지만, 어쨌든 제 능력을 직접 목격하고 의구심을 품게 되었으리란 건 분명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어쩐지 그날의 이야기를 다시 입 밖에 꺼내고 싶지 않았다. 굳이 이 여자가 자신을 다른 눈으로 보게 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만 가 보도록 하지. 그대도 어서 쉬도록 해.”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별것도 아닌 일에 감사 인사를 할 것까지는……. 참, 그런데 그대의 몸 상태 말이야.”
케르겔은 로엘린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 게 쑥스러워서 퉁명스러운 투로 대꾸하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로엘린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대체 언제부터…….”
그러나 그는 말을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로엘린은 그의 말을 듣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케르겔은 고개를 저은 뒤, 다시금 말을 꺼냈다.
“아니야. 됐어. 이따가 보도록 하지.”
몸 상태가 언제부터 그렇게 나빴던 건지, 대체 왜 그렇게 몸이 쇠약해지도록 방치해 두었던 건지, 라카인에서는 그대의 몸 상태를 다들 모르고 있었던 건지.
……사랑받고 귀하게 자랐다던 왕녀라면서, 왜 그런 모습인 건지.
어째서 사절단의 방문 소식을 반가워하지 않는 것인지.
케르겔이 묻고 싶었던 건 그런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의문들을 목구멍 깊숙이 삼킨 채 침실을 나섰다.
어쩐지 섣불리 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녀에게서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어떤 대답이 돌아올 것만 같아서 질문을 하는 게 망설여졌다.
‘여러모로 겁쟁이같이 구는군.’
케르겔은 그런 제 자신의 모습이 한심해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때, 침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루시가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표정을 지운 뒤,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궁의에게 황후의 건강을 더욱 각별히 챙기라 하게, 루시.”
“예, 폐하.”
“그리고 시녀들에게도 일러서 그녀를 더욱 세심히 보살피도록 하고.”
“명심하겠습니다.”
루시가 두 손을 모은 채 허리를 숙였다. 그 뒤에 있던 실로아 역시 예를 표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는 다시금 침실 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이 뭔지 모를 의문으로 미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 *
“황제를 알현하러 가는 자리에서는 더욱 조심하셔야 합니다.”
“알고 있어요, 맥그리 백작. 도대체 몇 번을 말하는 거예요? 내가 어린애도 아닌데.”
갈색 머리의 여자가 맥그리 백작의 말에 뾰족한 투로 대꾸했다. 그녀는 라카인 사절단을 따르는 수행원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지금처럼 이렇게 백작에게 말대꾸를 하는 일은 불가능해야 했다.
하지만 수행원 복장의 여자와 사절단의 총책임자로 세로이프에 또 다시 오게 된 맥그리 백작, 두 사람 모두 지금 이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왕녀님의 정체가 발각될 경우, 외교적으로 큰 문제가 될 수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노여워 마시고 부디 이 점을 유념해 주십시오.”
맥그리 백작은 속이 부글부글 끓는 걸 간신히 억누르며 정중하게 말했다.
그의 앞에 있는 수행원 복장의 여자는 바로 왕녀, 에리타였다. 세로이프 제국의 황후가 된 가짜가 아닌, 진짜 에리타 말이다.
그는 세로이프로 오는 내내 지병처럼 달고 살았던 두통이 도지는 걸 느끼며 인상을 썼다.
솔직히 말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가짜를 내세워 제국을 속였는데, 이제 와서 천연덕스럽게 진짜가 제국의 수도에 와 있다니.
세로이프의 황제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목숨은 물론 라카인도 쑥대밭이 될 수도 있을 터였다.
‘대체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왕녀의 고집을 꺾기는커녕, 이렇게 예정에도 없던 사절단까지 세로이프로 보내신 건지…….’
백작은 국왕의 뜻을 헤아릴 수 없어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그녀가 변장을 하고 수행원으로 가장한 상태라고는 하지만, 그러다가 자칫 정체가 탄로 나게 된다면 상상도 하기 두려운 일이 벌어지리란 건 분명했다.
‘어쩌면 이렇게라도 해서 제멋대로 구는 왕녀를 달래는 시늉이라도 해야 그 이상 말썽을 부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신 건가.’
왕녀의 성격상 언제까지 국왕 소유의 별장에 은거하며 조용히 죽은 듯이 지내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왕궁에서의 화려한 삶에 익숙한 그녀에게 수도 외곽에 위치한 별장에서의 한적한 삶은 끔찍할 정도로 지겨웠을 터.
‘그렇다고 내가 그 골칫덩어리를 맡고 싶지는 않았는데.’
맥그리 백작은 다시금 혀를 차며 속으로 투덜댔다. 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백작님, 황궁에서 사람이 나왔습니다.”
수행원 중 하나가 문 너머에서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백작은 그를 향해 알았다며 대꾸한 뒤, 다시금 에리타를 쳐다보았다.
에리타의 눈이 순간적으로 탐욕스럽게 반짝였다.
“어서 가죠. ……그 남자가 정말 괴물인지 아닌지 확인할 겸.”
에리타는 입꼬리를 올리며 싱긋 웃은 뒤, 뒤집어쓴 가발을 매만졌다. 짙게 화장한 눈꺼풀 아래로 그녀의 푸른 눈이 다시 한 번 번들거렸다.
* * *
“국왕 전하께서 하나뿐인 누이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신 점을 매우 애석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결혼 축하 인사와 함께 선물을 보내신 것이고…….”
“고맙군. 황후가 기뻐하겠어.”
케르겔은 맥그리 백작이 하는 말을 듣다가 심드렁한 투로 대꾸했다. 그러자 맥그리 백작이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황후마마께서는 어디 계시는지요. 직접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야 마땅할 터인데.”
“황후의 몸이 좋지 않아서 참석하지 말라고, 내가 만류했네. 선물이야 이따가 시종들을 시켜 황후궁에 전달하면 될 테고.”
“……예. 그럼 나중에라도.”
“황후마마의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니. 그러면 이럴 때일수록 황후마마를 더욱 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백작님?”
맥그리 백작이 로엘린과의 만남을 나중으로 미루려는 순간, 그의 뒤쪽에 있던 사절단 쪽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백작의 몸이 흠칫하며 굳었다.
“……?”
그와 동시에 케르겔이 비스듬히 앉아 턱을 괸 채 백작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시선을 뒤쪽으로 움직여 방금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냈다.
갈색 머리에 짙은 화장을 한 여자가 고개를 꼿꼿이 든 채 케르겔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엄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세로이프 측의 신하들 중 하나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 여자의 태도를 지적하려는 순간, 케르겔이 손을 들어 그를 저지시켰다. 그러자 여자가 입술 끝을 슬쩍 올린 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타국에서 홀로 몸이 아프니 얼마나 서러우시겠어요. 그러니 이럴 때 모국의 사람들을 보신다면 황후마마의 회복에도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부디, 폐하께서 아량을 베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타국에서 홀로?”
케르겔이 피식거리더니 이내 냉랭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금방이라도 주위의 모든 것을 얼려 버릴 것처럼 그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여자 역시 언제 느긋하고 당돌하게 굴었던가 싶게 흠칫하며 표정을 굳혔다.
톡, 톡.
그는 손끝으로 팔걸이를 쳤다. 일정하게 이어지는 그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그 누구도 다른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나른한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대꾸하던 사내 대신, 차디찬 표정으로 위압감을 발산하고 있는 황제가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하고 있었기에.
“라카인의 사절단은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 긴 침묵 끝에 케르겔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의 금안이 짐승의 것처럼 매섭게 여자를 노려보았다. 여자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 모습을 조금 더 쳐다보던 케르겔이 시선을 거둔 뒤,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그대들의 왕녀가 이 나라 어디에 있다는 건가?”
“……!”
“세로이프의 황후만이 있을 뿐이지. 그녀를 언제까지 라카인의 왕녀라 우길 셈인가? 그녀의 나라는 더 이상 라카인이 아니야. 바로 이곳, 세로이프가 그녀의 나라야. 그녀가 다스리고 보듬고 감싸 안아 줄 이 나라가 그녀의 나라라고.”
“그, 그렇기는 하지만, 태어난 조국을 그렇게 말 몇 마디로 버릴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맥그리 백작이 그 말을 듣다가 불쑥 끼어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라는 듯 그를 다그치는 에리타의 시선에 뒤통수가 따가워서였다. 하지만 케르겔은 백작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피식 웃은 뒤, 다시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나 그에 앞서, 그녀는 내게 속해 있지.”
케르겔의 말은 단호했다. 또한 그의 말 속에서 소유욕이 묻어났다. 백작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
그리고 갈색 머리의 여자, 변장한 에리타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두 손을 꽉 오므려 쥐었다.
‘내 남자였어! 내 남자였다고! 저 짙은 소유욕도, 제국의 황후라는 이 영광된 자리도, 전부 다 내 것이었는데! 그 천한 계집애가 감히 내 것을 탐하고 빼앗아 간 거야!’
그녀의 푸른 눈에 질시와 증오가 넘실거렸다. 자신과 레노프가 로엘린에게 대역이 되어 ‘괴물의 신부’가 될 것을 명령했었단 사실조차 망각한 듯, 에리타는 되레 로엘린에게 정당한 제 자리를 빼앗긴 것처럼 피해자 행세를 했다.
‘다 찾아올 거야. 그 계집애에게 이런 게 감히 어울리기나 해?’
에리타는 알현을 마치고 물러나는 사절단 속에서 함께 돌아서다가 뒤를 돌아 황제를 쳐다보았다.
살짝 흐트러져 있는 검은 머리와 맹수를 연상시키는 금색 눈동자. 그것은 그를 더욱 야성적으로 보이게끔 했다. 자신이 세로이프를 상대하며 툭하면 조롱조로 말했던 ‘야만적’인 모습이 아닌, ‘야성적’인 모습 말이다.
라카인의 귀족 사내들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화려하게 단장하고 우아함을 뽐내던 사내들과 황제를 비교하니, 그들이 마치 제 꽁지깃을 자랑하는 공작새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래서일까. 라카인의 화려한 왕궁과 달리 흔한 장식 하나 없는 세로이프의 황궁 내부조차 마음에 들었다. 에리타는 홀 안을 둘러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두고 봐. 반드시 모든 걸 되돌려서 이곳의 주인이 되어 돌아올 테니까.’
홀 안을 둘러보던 에리타가 다시 앞을 보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는 사절단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라카인의 물건들은 하나같이 실용적이지 않네요. 이 깃털 펜만 해도 몇 번 쓰지도 못하고 부러질 것 같고, 그런데 왜 이런 펜에도 보석을 박아 넣은 건지…….”
실로아가 재잘거리다가 루시가 눈치를 주자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로엘린을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황후마마. 라카인을 폄하하려던 건 아니고요. 저기…….”
“틀린 말은 아니지. 이런 건 애당초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든 게 아니니까.”
“그런 게 아니면 무슨 목적으로 만든 건데요?”
실로아는 방금 루시에게 혼이 날 뻔했다는 걸 망각하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로엘린이 무심한 표정으로 라카인의 사절단이 가져온 선물을 보다가 실로아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과시할 목적이 크다고 할 수 있어.”
“과시할 목적이라고요?”
“응. 남들보다 더 귀하고 값진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걸 드러내고 싶은, 그런 목적 말이야. 저들은 본인의 과시욕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설령 그게 어리석은 낭비라 할지라도 서슴없이 하거든.”
평민들이 몇 년을 일용할 양식을 살 수 있는 돈을, 라카인의 귀족들은 이렇듯 깃털 펜 하나를 구입하는 데에 망설임 없이 쓰고는 했다.
로엘린은 실로아가 들고 있는 깃털 펜을 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사실 다른 누구를 빗대어 말할 필요도 없었다. 평민들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저를 기준으로 해도 그들의 사치스러움은 충분히 알 수 있는 바이니 말이다.
라카인에서 자신이 갇혀 살았던 별궁의 1년 예산도 저 펜 하나에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한 선물들이라니.’
로엘린의 입가에 스쳤던 비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그녀는 선물 상자들을 보다가 고개를 돌린 뒤, 루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 선물들은 내게 온 것이니, 내 뜻대로 써도 되는 건가?”
“물론입니다, 황후마마.”
루시가 그녀의 물음에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자 로엘린이 다시금 루시에게 질문했다.
“그러면 저것들을 전부 처분해도 상관없을까?”
“……예?”
차분하기 그지없던 루시의 표정이 순간, 흐트러졌다. 그러나 로엘린은 표정의 변화 없이 루시를 보며 거듭 입을 열었다.
“실용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것뿐이니, 차라리 전부 처분하여 별도로 썼으면 좋겠는데.”
“예에? 그건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루시가 화들짝 놀라 평소의 침착함을 잃고 목소리를 높였다.
“황후마마의 물건을 처분하여 다른 명목으로 사용하다니요!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혹여 궁 내의 예산 책정에 있어서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아닐세, 루시. 미흡한 부분이 있을 리 없지 않나. 외려 황후궁에 예산을 넉넉하게 배정해 주었다는 걸 잘 알고 있네.”
자신이 기억하는 바로는 황후궁에 배정된 예산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으니 말이다. 설령 황후궁의 예산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자신이 굳이 뭔가를 팔아서 부족한 부분을 충당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다만…… 나는 그저 불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있느니 보다 의미 있게 쓰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그런 생각을 해 본 것뿐이야.”
“하지만 황후마마.”
“꼭 황후궁 내부에 사용하려는 것도 아니고. 아니, 오히려 궁 밖에서 사용했으면 해서.”
“궁 밖이라니요?”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들이나 병든 몸에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 그런 이들에게 쓰고 싶어.”
“…….”
“물론 폐하께서 그들을 외면하고 계시지는 않겠지. 황실에서도 그들을 위해 여러 정책을 내놓았을 거라 생각하네. 하지만 폐하의 눈과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분명 존재할 터. 나는 그런 곳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해.”
로엘린은 진심을 담아 루시에게 말했다. 루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선물을 구경하며 재잘대던 실로아 역시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하지만 이 선물들은 황후마마의 모국에서 보낸 것인데……. 그럼 선물들 중 일부는 보관하고 나머지를 처분하는 게 어떠신지요.”
루시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로엘린은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은 뒤, 대답했다.
“아니. 전부 다 처분하게.”
“예? 그러나…….”
“딱히 의미를 둘 만한 건 없네. 그대도 봐서 알겠지만 말이야. 그저 사치품들일 뿐이지.”
로엘린은 선물들이 쌓여 있는 곳을 일별하고는 곧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의 푸른 눈에는 어떠한 미련도, 욕심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황후마마.”
루시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실로아와 다른 시녀 두어 명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시녀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선물 상자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로엘린은 그 광경을 물끄러미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몸이 불편하신지요.”
루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앓아누웠다가 일어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탓이었다. 로엘린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조금 피곤해서 그러네.”
“그럼 궁의를 부를까요?”
“그럴 것까지는 없어. 그냥 쉬면 될 듯해.”
로엘린의 말에 루시가 염려 섞인 표정을 짓다가 이내 침실 밖으로 물러갔다. 그리고 문이 닫힌 뒤, 로엘린은 혼자가 되고 나서야 두 팔로 제 몸을 감싸고는 그대로 웅크렸다.
추웠다.
라카인의 사절단이 가져왔다는 선물들은 자신이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하나, 둘, 풀어 볼 때마다 그녀는 속이 울렁거리고 오한이 났다.
그들이 왜 이런 선물들까지 가지고 ‘사절단’이란 이름으로 다시금 세로이프에 온 것인지, 그 연유를 알 수 없기에 되레 공포심만이 밀려들 뿐이었다.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거야.’
껍데기에 불과한, 대역이었을 뿐인 제게 이렇듯 선물을 전해 주고자 그 험준한 사말타 산맥을 지나 세로이프까지 먼 길을 오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무슨 이유로 온 걸까.’
로엘린이 초조한 마음을 누르지 못하고 입술을 깨무는 순간, 창밖이 소란해졌다.
“어찌 이렇게 박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황후마마의 모국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황후마마의 친혈육이신 국왕 전하와 선왕비마마의 애틋한 마음을 대신 전하기 위하여 왔는데 이렇게 뵙지도 못하게 막는 건 대체 무슨 연유 때문입니까!”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인지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은 로엘린의 표정이 굳어졌다.
모르는 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맥그리 백작 특유의 억양을 기억하고 있는 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이번 사절단도 그가 이끌고 온 모양이구나.’
하기야 제 정체를 아는 이가 극소수이니, 사절단 대표를 할 만한 자 역시 선택의 여지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로엘린은 침대 옆의 설렁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침실 문이 열리고 난감한 표정의 실로아가 들어왔다.
“황후마마, 부르셨는지요.”
“궁 밖이 소란스럽구나.”
“사실은 라카인에서 온 사절단 대표가 황후마마를 뵙기를 청하였던 터라…….”
“폐하께서 이미 그들의 청을 거절하신 것으로 아는데? 그래서 공식 알현 자리에도 나는 참석하지 않았던 것이고.”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실로아에게 물었다. 로엘린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케르겔은 그녀에게 라카인 사절단을 접견하는 자리에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래서 다행이란 생각에 공식 알현 자리에 나가지 않았고, 사절단이 가져온 선물 역시 시종들을 통해 대신 전달받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황후궁 앞까지 찾아와 저렇듯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루시는 어디에 있지?”
로엘린은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자 실로아가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아래층에서 사절단 대표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내가 괜히 고생을 시키는구나.”
그녀는 한숨이 나오려는 걸 삼킨 뒤, 호흡을 골랐다.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너무나 간단한 말일 텐데……. 로엘린은 거듭 숨을 고른 뒤, 굳게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만나겠다고 전하렴, 실로아.”
“예? 어, 하지만…… 저, 괜찮으시겠어요?”
실로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저를 향한 염려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시선에 로엘린은 한결 마음이 풀어져 묽게 웃고 말았다.
“당연히 괜찮지. 내가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닌걸.”
“……하긴, 그건 그렇죠. 황후마마의 모국에서 오신 분인데.”
실로아가 멋쩍게 웃으며 눈을 휘었다. 그러고는 냉큼 루시에게 말을 전하겠다며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보던 로엘린의 입가에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만나서는 안 될 사람은 아닌지 몰라도,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인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들이 작정하고 온 이상, 무작정 피할 수만은 없을 터였다.
“몸단장을 해야겠구나.”
“예, 황후마마.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로엘린이 말을 꺼내자마자 침실 밖에 시립해 있던 다른 시녀가 냉큼 들어왔다. 그녀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시녀를 잠시 쳐다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괜찮아지는 것 같던 몸 상태가 다시 나빠지려는 건지 머리도 아프고 속도 울렁거렸다.
그녀는 두 손을 꽉 오므려 쥐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 * *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그동안 평안하셨는지요.”
“오랜만이네, 맥그리 백작.”
맥그리 백작은 저를 대하는 로엘린의 말투가 지난번과 비교하여 달라졌음을 깨닫고 뺨을 실룩였다.
별 볼일 없는 왕녀에게서 이렇듯 하대를 들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뻔히 그 속내가 들여다보이는 터라 로엘린은 실소가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아야 했다. 그러고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그들 사이에 묘한 침묵과 긴장감에 흘렀다. 실로아가 그 기묘한 분위기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입을 열려고 했다.
“저, 차는…….”
“차는 됐으니 다들 나가 보도록 해.”
로엘린은 실로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대답했다. 다과를 내올 필요가 없다는 듯한 로엘린의 말은 그녀를 방문한 사절단 대표를 향한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세로이프에 온 이후, 그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 한 번 한 적 없던 그녀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실로아뿐만 아니라 루시도 당황하여 몸을 흠칫했다. 그러나 루시는 곧 표정을 가다듬은 뒤, 그녀에게 예를 갖추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시녀장님?”
루시는 눈치 없이 저를 부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실로아를 데리고 응접실을 나갔다. 로엘린은 시녀장의 노련한 태도에 고마움을 느꼈다. 의문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제 위신을 세워 주기 위하여 명령에 따른 것일 테니 말이다.
그래서 또한 미안하기도 했다. 자신은 결코 그 의문을 풀어 줄 수 없기에.
로엘린의 입가에 쓴웃음이 희미하게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언제 미소를 머금었나 싶게 무심한 표정으로 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왜 나를 보고자 했는가?”
“……하! 황후, 아니, 왕녀님. 지금 제게 하대를 하시는 겁니까?”
“나는 이제 라카인의 왕녀가 아닌, 세로이프의 황후이니 당연한 것 아닌가?”
로엘린의 덤덤한 말을 들은 백작의 얼굴이 마치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때, 백작의 뒤쪽에 서 있던 수행원이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뒤집어쓰고 있던 망토를 벗었다.
“네가 세로이프의 황후라고? 감히 너 따위, 별궁의 버려졌던 껍데기가?”
“……!”
로엘린의 무심했던 표정에 금이 갔다. 그녀는 맥그리 백작을 보던 눈을 돌려 수행원을 쳐다보았다. 백작과 함께 들어온 수행원에게는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백작의 수족 중 하나인가 보다, 하고 넘겨 버렸을 뿐.
그런데…….
“오랜만이야. 내 동생.”
수행원, 아니, 에리타는 쓰고 있던 갈색 가발을 벗고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그러고는 그녀와 똑 닮은 푸른 눈을 마주하며 인사를 건넸다.
“어, 어떻게 언니가 여기에…….”
짜악.
로엘린은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상황에 놀라서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으려는 순간, 성큼성큼 다가와 손부터 휘두른 에리타에게 뺨을 맞고 비틀거렸다.
귓속이 먹먹해지는 듯싶더니 이명이 들렸다. 그녀는 간신히 의자 등받이를 잡고 버텼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로엘린이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질 생각도 하지 못하고 에리타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에리타가 다시 한 번 그녀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짜아악.
그 바람에 간신히 버티고 서 있던 로엘린이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제야 눈높이가 맞네.”
에리타가 그 앞에 서서 로엘린을 내려다보고는 피식거렸다. 그러더니 방금 전까지 로엘린이 앉아 있었던 소파로 향했다. 그러자 백작 역시 비릿하게 냉소를 짓더니 냉큼 에리타의 옆으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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