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괴물의 신부가 되다
<영혼조차 갖지 못하고 태어난 껍데기 주제에 사람 행세를 하며 저렇게 돌아다니다니! 끔찍해!>
오래된 기억이었다. 로엘린은 꿈속에서도 자신이 듣고 있는 목소리가 제 기억 속에 묻혀 있던 것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깨달았다고 해서 그 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잠에서 깨지 못한 그녀의 정신은 까무룩 흐려진 채 악몽 같은 기억 속을 헤매고 있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당장 ‘저것’을 내 눈앞에서 치워 버려!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어디에든 가둬 버리란 말이야!>
어렸을 적의 일이다. 아직 어린 나이였기에 그녀에게는 돌봐줄 이가 필요했다. 하지만 별궁에 배속된 시녀들 중 어느 누구도 어린 로엘린을 챙겨 준 이는 없었다. 오히려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그녀는 방치되었다.
그래서 로엘린은 나름대로 혼자 노는 법을 터득했다. 별궁 곳곳을 돌아다니고, 제게 냉정했던 시녀들을 몰래 훔쳐보는 게 그녀가 노는 법이었다.
그러다가 그날은 우연히 별궁 밖으로 나갔다. 햇살이 너무 좋아서였는지, 혹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저 ‘나갔다’는 게 중요했을 뿐이다.
……그리고 별궁 밖으로 나가서, 제 어미와 맞닥뜨렸다.
아마도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모친의 존재를 제 눈으로 본 것은 말이다.
그녀가 모친, 카롤리나를 보고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벅찬 기쁨이었다. 또한 설렘이었고, 감격이기도 했다.
그러나 카롤리나는 로엘린을 보자마자 발작하듯 몸을 떨더니 ‘저것’을 당장 치워 버리라며 모진 소리를 했다.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니,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그때가 되어서야 받아들였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모친에게 자신은 그저 ‘저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녀의 가족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친의 배 속에서 함께 열 달을 있다가 나왔지만, 단지 에리타보다 조금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은 그녀의 껍데기가 되고 말았다.
불길한 쌍둥이였기에.
<내가 어떻게 저런 걸 낳았을까.>
소름 끼친다는 듯 몸을 떨며 중얼거리던 카롤리나의 표정이 꿈속에서도 선명히 떠올랐다. 그와 더불어 당시에 자신이 느꼈던 고통도 생생히 되살아났다.
“흐흑…….”
로엘린은 몸부림을 치다가 모로 누운 채 몸을 한껏 웅크렸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새벽 달빛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맺힌 식은땀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녀는 이불을 꽉 움켜쥔 채 거듭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크게 신음을 내지는 못했다. 그저 잇새로 새어 나오는 신음만이 지금 이 순간 로엘린이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그녀가 가쁜 숨을 들이쉬며 크게 몸을 들썩거린 것은.
“……흐윽, 흑.”
로엘린은 간신히 꿈속에서 벗어나 벌떡 일어나 앉더니 숨을 헐떡였다. 그러고는 제 목덜미와 뺨을 문지르며 호흡을 골랐다. 차가워진 손끝이 제멋대로 경련을 일으켰다.
“후우…….”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무릎을 가슴께에 모으고 몸을 움츠렸다.
추웠다.
이곳은 라카인에서 살던 별궁이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독한 한기가 그녀를 엄습했다.
라카인에서와 달리 침실 안은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벽난로 안의 장작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잘 타고 있었고, 굳게 닫힌 창문과 두꺼운 커튼은 바람이 새어 들어올 틈조차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추웠다. 그것은 몸으로 느끼는 추위가 아니었다. 태어난 이후 지금껏 끈질기게 달라붙어 그녀를 괴롭혀 온 심리적인 추위였다.
‘싫어. 이제 정말 싫어.’
그게 싫어서 라카인을 떠났다. 제 쌍둥이 언니 대신, 얼굴도 보지 못한 사내의 아내가 되겠다고 라카인을 떠나왔다.
괴물이라 불리는 사내의 아내가 되려고.
사람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기를 즐긴다던 괴물 황제의 신부가 되어서라도 라카인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흐읍…….”
로엘린이 억지로 고개를 들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제 어미는 저를 괴물 취급 했다. 끔찍한 괴물 보듯이 하며 저를 거부했다.
“그러고 보니 괴물은 그 남자가 아니라 나였잖아.”
로엘린은 가늘게 떨리는 손끝을 꽉 오므려 쥔 채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내가 괴물의 신부가 되는 게 아니라 그가 괴물의 신랑이 되는 건지도…….”
그에게는 여러모로 속이는 게 많아지는구나 싶었다. 황제가 바라던 ‘에리타’도 아니고, 게다가 그녀와 달리 사랑받으며 자란 왕녀도 아니니 말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나한테는 이게 최선이야.”
로엘린은 케르겔을 속이고 있단 죄책감이 밀려드는 걸 억지로 가슴속 한구석에 묻어 두고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그러고는 숄을 어깨에 두르고 창가로 다가갔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라 밖은 어두웠다. 그나마 달빛 덕분에 창밖의 풍경을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에 다시금 극심한 오한이 일었다. 그러나 로엘린은 덜덜 떨면서도 고집스럽게 어깨에 걸친 숄을 단단히 여미고는 밖을 내다보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악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의 그런 절박한 마음 덕분일까. 비록 춥기는 하지만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악몽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니 로엘린의 눈에 창밖의 풍경이 더욱 선명히 들어왔다.
정원 너머로 본궁의 모습이 보였다. 저절로 그 본궁의 주인인 남자가 떠올랐다.
<반려 의식은 이곳이 아닌, 건국 시조의 무덤에서 치를 예정이야, 왕녀.>
그가 지난 저녁에 저를 찾아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반려 의식이라…….
그 의식이 결혼식의 가장 마지막 단계라 했다. 건국 시조의 무덤에서 치른다고 한 걸 보면, 아마도 선조의 무덤 앞에서 정식으로 인사를 올리는 과정을 일컬어 반려 의식이라 일컫는 게 아닐까 싶었다.
“……케르겔.”
그녀는 그의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저와 부부가 될 남자의 이름이었다. 평생 반려라는 이름으로 묶여 살아갈 이의 이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남자, 단 한 번도 나를 ‘에리타’라고 부른 적이 없는 것 같아.”
자신의 기억으로는 그랬다. 그의 입에서 제 쌍둥이 언니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다. 로엘린은 문득 그 사실을 깨닫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로서는 별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름을 아예 알지 못해서 부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로엘린은 그 점에 대하여 불쾌해하기는커녕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되면, 자신이 그를 속이고 있다는 걸 매번 자각할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앞으로도 쭉, 불러 주지 않으면 좋겠는데.”
“뭘 불러 주지 않으면 좋겠다는 거지?”
그녀가 창틀에 몸을 기댄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자마자 창 아래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바람에 깜짝 놀란 로엘린이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방금 내가 들은 게 누구의 목소리지?’
아니, ‘누구’의 목소리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서늘함을 품고 있는 나직한 음성은 꽤나 독특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에,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이기에 그녀는 자신이 헛것을 들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휴우. 그래, 잘못 들은 걸 거야.”
로엘린은 간신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뒤,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창밖을 보았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금 전 ‘헛것’이 들린 창 아래쪽을 향해.
“……폐, 폐하?”
그녀의 푸른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당연히 아무도 없어야 할 자리인데, 창 아래 정원에 한 사람이 서서 로엘린의 침실 쪽을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황제가 말이다.
* * *
별궁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느닷없이 황제가 방문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밤중에 자다 말고 일어난 시녀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걸 보던 케르겔이 미간을 좁히더니 혀를 찼다.
“다들 물러가라. 왕녀와 잠시 대화만 나누고 갈 것이니.”
“예, 폐하.”
실로아가 테이블 위에 다과를 차려놓고 공손히 대답한 뒤,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로엘린은 제 시녀가 나간 출입문 쪽을 잠시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려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내를 보고는 한숨을 삼켰다.
‘도대체 한밤중에 이게 무슨 일인지…….’
“한밤중에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로엘린은 자신의 생각을 마치 읽어 내기라도 한 듯 고스란히 입 밖으로 내뱉은 케르겔의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난감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우연히 별궁의 정원에 들어온 것뿐인데. 하긴, 그대의 중얼거림에 알은체를 한 내 잘못이지.”
“…….”
그가 제 생각을 읽어 낸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저 자신과 그의 생각이 우연히 일치했을 뿐. 로엘린은 조용히 찻잔을 들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르겔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군. 보아하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가?”
“그건 폐하께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은데요.”
로엘린이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찻잔을 내려놓으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대로야. 결혼식을 앞두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긴장이라도 한 건지.”
말로는 긴장 운운했으나 그의 표정은 너무나 여유롭고 느긋해 보였다. 그렇다 해서 그게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로엘린은 케르겔의 건조한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의 시선 어디에서도 결혼에 대한 설렘이나 기대감 같은 걸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듯 여유를 부리고 느긋하게 굴 수 있는 것이리라.
아무런 설렘도, 기대감도 갖고 있지 않기에.
“왜 제게 청혼을 하신 건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그녀는 불쑥 그에게 질문했다.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 여겼기 때문에 지금껏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당장 동이 트면 결혼식을 올린다고 생각하니, 한 번쯤은 그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한밤중의 만남이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묻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깊은 밤이 가져온 충동에 기대어 로엘린이 질문을 건네자 케르겔의 금색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마치 사냥감을 앞에 둔 맹수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폐하께서는 제게 그다지 감정이 좋지 않으시죠. 재작년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도 그렇고요.”
“그 일을 본인 입으로 다시 언급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케르겔이 이채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로엘린은 덤덤하게 그의 말에 대꾸했다.
“제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가 다 아는 일을 이제 와서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로엘린이 언급한 일은 재작년에 에리타가 세로이프의 사절단 앞에서 저지른 실언이었다.
물론 그녀는 당시에 제 쌍둥이 언니가 어떤 문제를 일으켰는지, 그리고 그 문제가 양국 사이에 얼마나 큰 여파를 가져왔는지 알지 못했다. 별궁 안에 갇혀 살아온 로엘린에게 그런 소식을 전할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로엘린이 그 일에 대해 알게 된 건 에리타의 대역이 되겠다고 결정한 뒤였다.
에리타가 세로이프 사절단을 대면한 자리에서 그들을 조롱하고 멸시하는 말을 내뱉는 바람에, 두 나라의 관계가 자칫 파국을 맞을 뻔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에리타에게 청혼한 것이 이상하기는 했다. 본인의 나라를 조롱한 여인을 황후로 맞이한다는 게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녀에게 반해서 청혼한 것도 아니고.
“그대의 말대로 나는 그대에게 딱히 감정이 좋지는 않아.”
케르겔은 로엘린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리를 꼬고 앉은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왕녀, 그대가 필요하거든.”
“……필요하다고요?”
“그래. 나한테는 그대가 필요해. 그러니 걱정하지 마. 왕녀, 그대가 나와 내 나라에 했던 행동은 지금 생각해도 괘씸하기는 하지만, 이제 와서 그걸 이유로 그대를 괴롭힌다거나 하는 유치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러실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로엘린은 케르겔의 말을 듣다가 대답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올리더니 물었다.
“나를 너무 믿는 것 아닌가?”
“폐하를 믿는다기보다는, 제 눈을 믿는 거라고 말씀드려야겠네요.”
“그대의 눈을 믿는다고?”
케르겔의 건조한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로엘린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비록 길지 않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폐하를 보고 판단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거 흥미로운 얘기로군. 그대가 보고 판단한 나는 어떤 사람이지?”
케르겔은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으며 질문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묘하게 반짝거렸다.
로엘린은 그의 시선에 약간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계속 말을 이었다.
“제가 본 폐하라면…… 최소한 부당한 이유를 들어 사람을 억압하거나 괴롭히는 분은 아니란 생각을 했습니다.”
“낯 뜨거워지는 찬사로군.”
그 말과는 달리 케르겔의 표정은 덤덤했다. 로엘린 역시 그의 말을 듣고도 민망해하는 기색 없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게다가 잘못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량을 베풀어 주실 만큼 너그러운 분이시기도 하고요. 지난번 도서관 앞에서 벌어졌던 일도…….”
“너그럽다니, 그거야말로 그대가 나를 모른단 증거인데.”
케르겔이 피식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세로이프의 괴물 황제. 그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하지는 않았을 터. 그게 거짓이라 생각하나?”
그가 꺼낸 말에 로엘린의 표정이 굳었다. 본인이 직접 그 소문을 입에 담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해서였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쉬쉬하는 소문이었다. 제국의 황제에 대한 불경한 소문이었기에 감히 입에 올릴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라카인의 왕궁에서야 저마다 괴물 운운하며 떠들어 댔지만 말이다.
“……예, 저는 거짓이라고 생각해요.”
로엘린은 드레스 자락을 꽉 움켜잡으며 조금 늦게 대답했다. 케르겔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게 역력히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폐하는 괴물이 아니에요.”
로엘린이 거듭 입을 열었다.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갖고 있다는 듯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떨림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을 듣던 케르겔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뜬 뒤, 다시 그녀를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금안이 직시하자 몸이 제멋대로 움찔거렸다. 그걸 본 케르겔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이래도 내가 괴물이 아니란 건가? 내가 작정하면 그대는 이렇게 내 시선조차 제대로 받아 내지 못하는데?”
그는 언제 나른한 표정으로 웃으며 그녀와 대화를 했던가 싶게 싸늘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것은 로엘린이 감당하기에 버거울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더욱 힘주어 움켜쥔 채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렇다 해서 그게 괴물이란 증거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럼 괴물의 증거가 따로 있나?”
“…….”
케르겔이 건넨 질문에 로엘린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저 무심코 던진 물음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반응이 예상과 너무 달랐다.
‘대체 뭐지?’
그가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딱히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사실, 지금 이 대화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이제 그만 가 봐야겠군. 시간이 늦었는데 너무 오래 있었어.”
케르겔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끊긴 대화에 로엘린이 당황해하다가 이내 차분한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본 케르겔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말을 이었다.
“잠이 안 오더라도 잠깐이나마 눈을 붙이는 게 좋을 거야. 반려 의식까지 치르고 나면 저녁 늦은 시간이 될 테니. 그럼 아침에 보도록 하지.”
“폐하께서도 평안한 밤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조심히 살펴 가세요.”
로엘린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케르겔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방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로엘린이 가만히 케르겔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다가 느닷없이 돌아선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크게 떴다. 케르겔은 그 푸른 눈을 응시하며 다소 어색한 투로 말을 덧붙였다.
“어쨌든 고마워.”
“……예? 뭘 말씀하시는 건지.”
“괴물이 아니라는 말. 물론 듣기 좋은 말로 그냥 한 것이겠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눈인사를 건넨 뒤, 성큼성큼 나가 버렸다.
“…….”
로엘린은 그가 나가고 난 뒤에도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눈만 느릿하게 깜빡였다.
고맙다는 말.
어떻게 보면 대수롭지 않은 말인데, 왜 그런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흔한 인사가 그녀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 * *
“얼굴이 창백하신데, 따뜻한 차라도 내올까요?”
“아니, 괜찮아요. 예식도 곧 거행될 텐데.”
로엘린은 실로아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고개를 살짝 저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실로아가 여전히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한밤중에 폐하께서 갑작스럽게 들이닥치셨으니 잠도 설치셨을 테고…….”
“실로아.”
루시가 로엘린의 옷매무새를 만지다가 경고조로 실로아의 이름을 불렀다. 실로아는 입을 삐죽이더니 다시 조용히 로엘린의 단장을 도왔다.
로엘린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색하네.”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지요? 라카인과 세로이프의 화장법이 다소 다른 터라…….”
자신의 모습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변한 게 낯설어서 로엘린이 무심코 혼잣말을 중얼거리자마자 루시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은 뒤, 대답했다.
“아니요.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에요. 그냥, 말 그대로 어색해서요.”
새하얀 피부와 화려한 눈 화장, 그리고 붉은 입술을 강조하는 라카인의 화장법과 달리 세로이프의 화장법은 강인한 전사를 연상시키며 중성적인 느낌마저도 들게 했다.
‘정말 낯설어. 이 모습이 정말 나란 말이지?’
로엘린은 거울 속 저를 마주한 채 신기한 마음에 고개를 좌우로 살짝 돌려 보았다.
언제나 움츠러들어 있던 제 모습이 아닌, 당당하고 씩씩해 보이는 모습이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함께 움직였다. 부정할 수 없는, 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화장을 조금 더 짙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왕녀님의 안색도 너무 창백하시고, 으음…… 워낙 여린 분위기를 갖고 있으시다 보니 지금도 맹수라기보다는 갓 태어난 강아지 같으신데…….”
실로아가 고민 가득한 투로 다시금 끼어들었다. 로엘린은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으쓱한 마음에 제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시녀의 말에 금세 풀이 죽었다.
“강아지?”
그것도 ‘갓 태어난’ 강아지라고?
“그게 꼭 나쁜 의미는 아닙니다, 왕녀님.”
루시가 풀죽은 로엘린을 보고는 살짝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세로이프의 화장법은 기본적으로 ‘자연스러움’을 추구합니다. 세로이프 여인들 대다수가 거칠고 사나운 면이 있어서, 그에 맞추어 화장법이 이렇게 변모한 것이지요. 하지만 왕녀님께서는 우아하고 사랑스러우시니 굳이 그 매력을 감추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강아지’처럼 보이는 건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황제 폐하의 곁에 서는 입장인데……. 더구나 제국민들이 내게 갖는 기대도 있을 테고요.”
지금 이 순간에도 창밖에서 환호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황제의 결혼식을 보기 위한 인파가 황궁 밖을 몇 겹으로 에워쌌다는 얘기를 아침 일찍 실로아를 통해 들었다. 수도 안에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황궁 주변에 모여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 했다.
“와아아! 세로이프에 무한한 영광을!”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 고귀한 축복이 함께하시길!”
수백, 수천 명이 동시에 외치는 저 간절한 바람과 들뜬 기대를 자신이 저버리게 되는 건 아닌지,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가뜩이나 모든 이들을 속이고 ‘가짜 신부’가 되어 이곳에 왔다. 그런 와중에 그들에게 실망감마저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케르겔, 그에게도 실망스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기도 했다.
그녀는 무심코 든 생각에 어쩐지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 작게 헛기침을 한 뒤, 다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실로아의 말대로 화장을 조금 더 짙게 하는 게 낫겠어요.”
“왕녀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루시는 허리를 숙이고는 정중히 대답한 뒤,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실로아가 다시금 그녀에게로 다가와 화장을 고쳐 주었다.
* * *
결혼식이 열리는 본궁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그리고 궁 안쪽에서 케르겔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입고 있는 감청색 예복은 그의 칠흑 같은 머리와 잘 어울렸다.
케르겔이 마차로 다가가자 마차의 문이 열렸다. 금빛의 드레스 아랫단에 감춰져 있던 작은 발이 먼저 그 모습을 보였다. 그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은 작은 손이 뒤이어 나타났고, 마지막으로 베일을 쓴 신부가 마차 밖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마차에서 내린 신부의 모습 때문이었다. 그녀는 세로이프 황실의 관습대로 금빛 드레스를 입고 금사로 짠 베일을 머리에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유난히 찬란하게 빛난 것이다. 마치 햇살을 온몸에 휘감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것은 그저 우연이었을 터였다. 햇빛이 절묘한 각도로 그녀에게 반사되어 빛났을 뿐이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습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케르겔이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한쪽 눈썹을 슬쩍 올렸다. 그러나 그는 곧 아무렇지 않게 로엘린의 손을 잡고 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궁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웅장한 나팔 소리가 그들을 맞이했다.
결혼식을 알리는 소리였다.
* * *
펑, 펑펑.
하늘 저편에서 불꽃이 솟아올랐다. 황제의 혼인을 축하하는 불꽃놀이가 시작된 것이다.
“…….”
로엘린은 하늘을 수놓는 불꽃의 다채로운 색깔에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그렇게 잠시 넋을 놓고 불꽃놀이를 구경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케르겔의 목소리가 들렸다.
“불꽃놀이는 밤새 이어질 테니 이따가 돌아와서 구경해도 될 거야. 이만 출발하도록 하지.”
“아아, 예…….”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저도 모르게 불꽃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고 생각하니 민망해진 것이다.
로엘린은 한쪽 뺨을 손으로 쓸며 마차에 올랐다. 케르겔 역시 마차에 올라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마부에게 지시를 하는 것인지 벽을 두드렸다. 그러자 말의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마차가 출발했다.
“결혼식을 치르느라 힘들었을 텐데 눈이라도 붙이고 있어. 도착하면 알려 줄 테니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로엘린은 모자를 고쳐 쓴 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괜찮아 보이지는 않는데. 아까도 결혼식 내내 바들바들 떨지 않았나?”
“긴장을 조금 했던 것뿐입니다. 지금은 괜찮아졌고요.”
그녀는 재차 얼굴을 붉히면서도 강단 있게 대답했다. 그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로엘린을 쳐다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대가 괜찮다면 괜찮은 것이겠지……. 황후.”
“……!”
로엘린이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케르겔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고는 물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대를 부르는 호칭이 바뀐 게 어색한가? 하지만 이제 그대는 내 아내가 되었으니 세로이프의 황후이지 않은가.”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도, 막상 그렇게 불리니 어색한 감을 지울 수가 없네요.”
그녀는 솔직히 제 속내를 털어놓으며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로엘린의 눈에 제 손에 끼워진 반지가 들어왔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의 손에도 저와 똑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는 게 보였다.
조금 전 결혼식에서 서로의 손에 끼워 주었던 반지였다.
로엘린은 그와의 결혼식을 되새겨 보았다.
결혼식은 생각보다 단출했다. 세로이프 제국, 더구나 제국의 주인인 황제가 아내를 맞이하는 결혼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소박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렇다 하여 초라했던 건 아니다. 오히려 결혼이란 의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진지한 예식이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결혼식은 오롯이 로엘린과 케르겔, 그들 두 사람의 의식이었으니 말이다.
세로이프 제국은 딱히 국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신을 섬기는 풍습이 있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결혼식을 주재할 신관이나 주교가 존재하지 않았다.
결혼식의 당사자인 두 사람이 반지를 교환하고 혼인 맹세를 한 뒤에 혼인 서약서에 서명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굳이 라카인의 누군가를 초대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만약 초대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혈육 중 어느 누구도 오려 하지 않았을 테지만.
“그런데 그 화장…… 그대와는 좀 어울리지 않는군.”
무심코 라카인에 대한 생각을 이어 가려던 로엘린이 케르겔의 말에 잡념을 털어 낸 뒤, 흐려졌던 낯빛을 감추고는 시선을 들었다.
케르겔이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앉아 그녀를 쳐다보다가 뭔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가 왜 그러나 싶어 로엘린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이는 순간, 케르겔의 입이 재차 열렸다.
“아까 결혼식 전에 그대가 마차에서 내렸을 때부터 이 말을 하고 싶었어.”
“무슨 말씀을…….”
로엘린은 케르겔의 말에 잠시 당황해하다가 이내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설마 베일을 쓰고 있는데도 내 얼굴을 본 거야? 아니, 그것보다도…… 지금 내 화장한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고 타박한 거야?’
그녀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본궁에 도착했을 때 마차에서 내린 저를 보고 그가 한쪽 눈썹을 올렸던 게 기억났다.
“……폐하께서 그런 사소한 것까지 굳이 신경 쓰실 줄은 몰랐네요. 게다가 제가 한 화장은 엄연히 세로이프의 화장법에 따라서 한 것이기도 하고요. 그러니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로엘린은 굳은 표정으로 그에게 항의하듯 말을 꺼냈다. 케르겔이 그 반응을 보고는 피식 웃더니 손을 내저었다.
“오해는 하지 마. 그대에게 괜히 시비를 걸려고 꺼낸 말은 아니니까. 나는 그저, 그대가 억지로 세로이프의 풍습에 따를 필요는 없단 말을 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렇게 어울리지도 않는 화장을 하면서까지 말이야.”
로엘린은 그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제 태도에 불쾌함을 느꼈을 수도 있을 텐데,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순순히 해명한 남자를 마주하려니 어색한 마음이 든 탓이었다.
그녀가 멋쩍은 마음에 계속 침묵을 고수하자 케르겔 역시 그녀에게서 어떤 대답을 듣고자 한 게 아니었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덩달아 침묵했다.
그렇게 잠시 마차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다시 제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로엘린을 바라보고 있던 케르겔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가슴속이 제멋대로 술렁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고치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희가 가고 있는 곳이 건국 시조의 무덤인 건가요?”
그는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덧붙여 말했다.
“또한 그대를 내 반려로 선택하게 만든 장본인의 무덤이기도 하지.”
“……예?”
로엘린의 표정이 순간 흐트러졌다. 침묵을 깨고 화제를 돌리려는 의도로 꺼낸 말이었을 뿐인데, 예상치 못한 대답을 들어서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
“말 그대로야. 카인베르트, 건국 시조께서 그대를 내 반려로 선택했기에 이 결혼이 성사된 것이지.”
“…….”
그녀의 푸른 눈에 혼란이 가득 묻어났다. 그러나 케르겔은 더 자세한 설명을 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로엘린의 입술이 두어 번 달싹였지만, 그녀 또한 그에게 굳이 뭔가를 더 묻지는 않았다.
말발굽 소리와 마차의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만이 그들의 침묵을 비집고 끼어들었을 뿐이다.
* * *
히이잉.
말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춰 섰다.
“도착했군.”
케르겔이 눈을 감고 있다가 뜨더니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마차 밖에서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마차 문을 열겠습니다.”
“그리해라.”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마차 문이 열렸다.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바람에 로엘린이 입고 있던 드레스 아랫단이 펄럭였다.
“내리도록 하지.”
로엘린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려 하는데, 케르겔의 손이 그녀의 눈앞에 내밀어졌다. 그녀는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케르겔의 금색 눈동자가 로엘린을 말없이 마주 보았다.
“……예.”
그녀는 시선을 다시 내리며 대답한 뒤, 그의 손에 제 손을 가볍게 올렸다. 그러고는 케르겔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마차에서 내린 직후 로엘린은 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때, 그녀의 뒤에서 케르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이 바로 세로이프의 건국 시조, 카인베르트가 묻혀 있는 곳이지.”
“……카인베르트.”
로엘린은 그의 말을 들으며 건국 시조의 이름을 가만히 되뇌어 보았다.
마차에서 그가 했던 말이 다시금 기억났다.
저를 그의 반려로 선택하게 만든 장본인의 무덤이라 했던가.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대체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건 그저 느낌일 뿐이었다.
섣불리 물어봐서는 안 된다는, 그런 느낌. 물론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허황된 느낌일 뿐이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건 지금 제 눈앞에 펼쳐진 풍경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해할 수 없는 그의 말과 제 눈앞의 신비로운 숲의 정경은 어떤 면에서 비슷한 것 같았으니까.
“……와아.”
그녀는 감탄사를 뱉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 스스로는 자신이 입을 반쯤 벌리고 눈앞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상태라는 걸 자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로엘린이 바라보고 있는 풍경은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좁은 오솔길을 제외하고 빽빽하게 들어찬 은빛 나무들이 가장 먼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나무들은 그녀가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니, 라카인의 별궁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으니 그녀가 봐 온 나무의 종류 자체가 적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꼭 눈으로 직접 본 게 아니더라도 로엘린이 식물도감 같은 걸 통해서도 접해 본 적이 없으니 굉장히 희귀한 나무인 건 분명했다.
애당초 은빛 나무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그 은빛 나무들을 감싸고 있는 안개가 거대한 바다처럼 일렁이고 있는 모습 자체도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동화 속 요정들이 산다는 신비로운 숲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로엘린이 넋을 잃고 숲의 정경에 흠뻑 빠져 바라보고 있는데, 케르겔의 목소리가 그런 그녀를 깨웠다.
“들어가지.”
“……예? 아아, 예.”
그녀는 잠에서 깬 사람처럼 눈을 깜빡이다가 허둥대며 대답했다. 케르겔이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을 따라온 호위 기사들과 마부가 공손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다녀오십시오.”
“……우리 둘만 가는 건가요?”
로엘린이 호위 기사의 목소리에 역시 뒤를 돌아보고는 케르겔에게 물었다. 그러자 케르겔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곳은 카인베르트의 후예에게만 출입이 허락되어 있거든.”
“그럼 저는…….”
“카인베르트의 후예와 함께 들어가는 경우에는 일반 사람들도 들어갈 수 있지. 오늘 이곳에 나와 함께 들어갈 사람은 황후, 그대뿐이야.”
케르겔의 설명을 들은 로엘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먼저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고 케르겔의 뒤를 따랐다.
타고 온 마차와 그들을 수행하였던 이들을 뒤로한 채 숲속 오솔길로 접어들자마자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느껴졌다.
로엘린은 저도 모르게 답답함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그 순간, 앞서 걷고 있던 케르겔이 마치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듯 몸을 돌리더니 그녀를 붙잡았다.
“아, 감사합…….”
“조심하도록 해. 길에서 벗어나면 환상에 갇혀 버릴 수도 있으니까.”
“환상에, 갇힌다고요?”
로엘린이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하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케르겔이 오솔길 너머의 숲을 가득 채운 안개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저 안개를 평범한 안개로 여긴다면 곤란해. 저마다 가장 두려워하는 과거를 환상이란 이름으로 불러일으켜서 그 속에 그를 가두어 버리거든. 그리고 그 안에 갇힌 이들 중 빠져나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
“…….”
“하긴, 그대가 겁낼 이유는 없을 수도 있겠군. 라카인의 왕궁 안에서 모든 이들의 보호 아래에 바라는 건 뭐든 가지며 살아왔을 테니 딱히 두려워할 것도 없었을 테고.”
케르겔이 가벼운 투로 말을 덧붙이며 그녀를 잡았던 손을 놓고 다시금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로엘린은 그의 뒤를 곧바로 따라가지 못했다. 그저 핏기가 사라져 창백한 얼굴로 멀어져 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는 케르겔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던 로엘린이 뒤늦게 심호흡을 한 뒤, 차갑게 식은 손끝을 꽉 말아 쥐고는 억지로 발걸음을 떼었다.
두려워하는 것이라…….
그는 그녀가 두려워하는 게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니 지금 그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로엘린이 이렇듯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터였다.
그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로엘린은 앞서 걸어가는 저 남자에게 제 두려움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라카인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꿈꾸고 있기에, 제 자존심을 찾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두려워하는 게 없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로엘린은 막연히 그 기분을 상상해 보고자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을 상상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던 까닭에 그녀는 그런 시도 자체를 포기해야 했다.
그녀에게는 지금껏 살아온 시간 전부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녀를 제외한 세상 사람들 모두가 무섭고 두려운 대상이었다.
아무것도 두려워한 적 없었을 제 쌍둥이 언니와는 다르게.
로엘린은 씁쓸한 마음을 애써 다잡고 다시 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의 모습은 당당해 보였다. 태어나서 지금껏 단 한 번도 흔들려 본 적이 없을 것만 같았다.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
하기야 이 세상에 저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싶지만.
로엘린은 지난밤에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에게 괴물이 아니라 했던 자신의 말.
뒤이어 케르겔이 제게 건넸던 물음.
<그럼 괴물의 증거가 따로 있나?>
……자신은 그 물음에 대해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그에게 대답할 말이 입속에서 맴돌았지만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터였다.
괴물은 그가 아닌, 저라고.
로엘린의 입가에 쓴웃음이 스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평생 갇혀 살다가 제 쌍둥이 언니를 대신하여 언니의 남편이 되었어야 할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제게는 감옥이나 다를 바 없는 왕궁에서 탈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런 나에게 반려 의식을 치를 자격이 있는 걸까.’
애당초 이 결혼 자체가 한 편의 사기극인데.
로엘린은 자조하며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바로 그때, 심한 현기증이 엄습했다. 그녀는 머릿속이 핑 도는 걸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희뿌옇게 변했다. 뒤이어 온몸의 감각이 닫히는 것처럼 아득해지더니 이내 오한이 일면서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라카인의 별궁.
방금 전 생각했던, 그 감옥 같은 공간으로.
로엘린은 가슴속까지 꽁꽁 얼어붙는 느낌에 숨조차 쉬지 못했다.
‘뭐지? 나는 분명히 세로이프에……. 설마 꿈이라도 꾸었던 걸까? 그렇게 생생한 꿈을 꾸었다고?’
로엘린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불이 꺼진 지 오래된 벽난로의 냉기가 생생히 전해졌다. 그리고 얇은 시트가 깔려 있는 침대 위에는 읽다가 잠시 덮어 둔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내가…… 내가 여기를 어떻게 벗어났는데.”
로엘린이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새파랗게 질린 채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그녀의 푸른 눈에 금세 눈물이 가득 고였다. 별궁을 벗어나 처음으로 느낀 해방감이 그저 한순간의 꿈이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절망감이 밀려들었다.
로엘린은 그 절망감의 무게에 짓눌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입고 있던 드레스가 더러워지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더니 그대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타박하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껏 조심하라고 했더니. 생각보다 그대는 손이 많이 가는군.”
“……?”
로엘린이 눈물을 닦지 못한 채 무방비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었다. 제 손목을 잡고 있는 건 누군가의 커다란 손이었다. 하지만 그 누군가의 얼굴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어째서인지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 탓이었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진 건 아니었다. 그것과는 달랐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 보자면 마치 새벽안개라도 낀 것처럼…….
“아!”
로엘린의 푸른 눈이 크게 뜨였다. 그와 동시에 눈앞을 뿌옇게 만들었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손목을 잡아끈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살짝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이 보였다. 그리고 저를 보고 있는 금색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정신이 들었다.
“폐, 폐하.”
“자칫 환상 속에 갇힐 뻔했어. 그나마 그대가 길에서 벗어나긴 했어도 깊숙이 들어간 게 아니라 다행이었지. 만약 그렇게 되었더라면 나로서도 달리 방도가 없었을 테니까.”
케르겔은 덤덤한 투로 말을 하고는 로엘린의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로엘린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뒤늦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신과 그가 서 있는 곳이 오솔길의 경계 부근이라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아아, 그, 환상이라는 게…….”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그녀는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뒷말을 삼키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처 사라지지 않은 감정의 잔재 때문인지 그녀의 숨결이 떨려 나왔다.
“호되게 당한 모양이군. 환상 속에 깊이 빠진 것도 아닐 텐데.”
그 모습을 보던 케르겔이 의외라는 듯 입을 열었다. 로엘린은 새하얗게 질린 뺨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지독하다 싶을 만큼 생생했거든요.”
“어쨌든 예상 밖이로군. 그대에게도 두려워하는 게 있다는 게. 아무리 모든 걸 다 갖고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이라 해도 하나쯤은 두려운 게 있는가 보지?”
케르겔이 무심한 투로 건넨 물음에 로엘린이 흠칫하더니 이내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보네요. 어쨌든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폐하.”
“그대의 운이 좋았어. 길에서 조금만 더 벗어났어도 끌어낼 방법이 없었을 텐데 말이지. 하지만 다음에도 이렇게 운이 좋으리란 법은 없으니 주의하도록 해.”
그는 그녀의 감사 인사를 대충 받아넘긴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로엘린은 케르겔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돌려 오솔길 바깥의 하얀 안개를 바라보았다. 너무나 생생한 환상이었기에 지금까지도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쉰 뒤, 손끝을 꽉 말아 쥐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앞서 걸어가는 그의 뒤를 따라 재차 발걸음을 떼었다.
* * *
“바로 이곳이 세로이프의 건국 시조, 카인베르트가 묻혀 있는 무덤의 출입구야.”
좁은 오솔길을 따라 한참 더 걸어 들어간 두 사람이 다다른 곳은 거대한 돌로 만들어진 문 앞이었다.
로엘린은 케르겔의 말을 들으며 그의 곁에 나란히 서서 거대한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조금 더 뒤로 젖혀 무덤으로 추정되는 구조물을 보았다.
그것은 한눈에 다 볼 수도 없을 정도로 그 규모가 거대했다.
이 거대한 무덤을 만드는 데에 사용된 돌들은 대체 어디서 옮겨 온 것일까,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려 작게 감탄사를 뱉고는 그런 제 모습에 당황하여 눈을 크게 떴다. 케르겔이 그 모습을 힐끗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놀라기는 아직 이를 텐데.”
“……예?”
그는 의아해하는 그녀를 보고도 더 이상의 설명을 생략한 채 성큼성큼 발을 내디뎠다. 그러고는 문 바로 앞에 서서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곳은 카인베르트의 후예에게만 출입이 허락되어 있어. 혹은 후예와 함께 들어올 경우에만 출입할 수 있고.”
“예.”
로엘린이 숲속에 들어오기 전에 들었던 얘기를 상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케르겔은 입술 끝을 올린 채 거대한 돌로 이루어진 문을 고갯짓으로 가리키고는 말을 이었다.
“아마도 황후, 그대는 내가 한 말을 그냥 형식적인 뜻으로 이해했겠지. 황족의 허락 없이는 들어올 수 없는, 그런 성역이구나 하고 말이야.”
“……그게 아닌가요?”
로엘린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가 한 말에 다른 뜻이 있었던 건가 싶어 그녀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뭐, 따지고 보면 그냥 말 그대로라 할 수 있지만……. 그대의 눈으로 직접 보는 편이 빠르겠군.”
“그게 무슨…….”
로엘린이 질문을 채 잇기도 전,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바로 눈앞의 문이 케르겔의 손이 닿자마자 우우웅, 하며 굉음과 함께 저절로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워낙 커다란 문이었던 터라 수십 명의 사람들이 달려든다 해도 여는 게 쉽지 않아 보이던 문의 움직임으로 인해 땅마저 진동했다.
로엘린은 자신이 딛고 서 있던 땅이 진동하는 것에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상 물러서지는 못했다. 언제 로엘린의 뒤로 다가온 것인지, 그가 그녀의 등 뒤에 서서 그녀를 받쳐 주었기 때문이다.
“카인베르트의 피가 흐르는 사람만이 무덤의 문을 열 수가 있지.”
“……!”
로엘린이 고개를 돌려 케르겔을 보았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던 손을 내린 뒤, 턱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문이 열린 안쪽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금색 눈동자를 닮은, 태양을 머금은 듯한 빛이었다.
그녀는 마치 그 빛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무심코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 역시 자연스럽게 그녀와 보조를 맞추어 무덤 안으로 들어갔다.
‘서늘해.’
로엘린은 무덤 안에 들어가자마자 몸을 가늘게 떨며 걸음을 멈췄다. 무덤 안쪽에서부터 퍼져 나온 한기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오래된 무덤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오싹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 순간, 어깨 위에 묵직한 뭔가가 걸쳐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 제 어깨를 감싼 것을 벗으려 했다.
“그냥 걸치고 있어.”
로엘린은 그제야 제 어깨를 감싼 것이 케르겔이 입고 있던 망토란 사실을 깨달았다.
“…….”
그러자 그녀의 몸이 다른 의미로 흠칫 떨렸다. 하지만 케르겔은 로엘린이 여전히 추위를 느낀다고 생각했는지 짧게 혀를 차더니 입을 열었다.
“의식은 금방 끝날 테니까.”
“……아아, 예.”
로엘린은 잠시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케르겔이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녀는 붉어진 얼굴을 그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미쳤나 봐.’
그녀는 달아오른 뺨을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케르겔의 망토를 걸치고 있다는 걸 자각하자마자 얼굴이 홧홧해졌다.
당황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망토에 남은 그의 체온이 전달된 탓일 수도 있었다. 아니, 그건 그저 제 착각일 터였다.
그의 체온이 지금껏 이렇듯 생생히 망토에 남아 있을 리 없으니 말이다.
“이쪽으로.”
로엘린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 케르겔이 두어 걸음 앞에 서서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어느새 긴 통로를 지나 석실 앞에 다다른 것이다. 그녀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케르겔이 로엘린의 손을 잡고 석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와아…….”
로엘린은 그의 손을 살짝 잡고 석실 안으로 들어가다 말고 감탄사를 뱉었다. 석실 안을 밝히는 불꽃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바로 이곳이 건국 시조, 카인베르트가 잠들어 있는 무덤이야.”
그녀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들으며 석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외려 석실 안으로 들어오고 나니 무덤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저 오래된 유적지 같은 곳에 온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관 같은 건 보이지 않네요.”
“영원한 안식을 위하여 그의 시신은 별도의 공간에 묻혔거든.”
“별도의 공간요?”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로엘린은 케르겔의 말에 흠칫하고는 조금 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석실 안에 다른 어떤 공간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그녀의 시선이 석벽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그리고 로엘린의 눈에 의아함이 담겼다.
로엘린이 바라보고 있는 석벽에 두꺼운 천이 드리워져 있었다.
‘왜 저쪽 벽을 천으로 가려놓은 거지?’
그녀는 의문이 들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케르겔이 그 모습을 쳐다보더니 로엘린이 바라보는 방향을 덩달아 보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가 본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저 석벽에 자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걸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다음 대의 황족에게 계시가 내려지기 전까지는 석벽의 그림은 계시를 받았던 상태 그대로 유지된다. 그렇기 때문에 석벽에 저렇듯 두꺼운 천을 드리운 것이다.
후대에 계시가 내려올 때가 되어서야 저 천을 걷게 되리라.
그는 시선을 돌려 로엘린을 힐끗 보았다. 아마도 그녀는 이 모든 것에 대해 평생 모른 채 살아가게 될 터였다. 세로이프의 제국민이었다면 모를까. 라카인의 왕녀였던 이에게 황실의 비밀을 알리고 싶은 마음은 없으니 말이다.
“그럼 의식을 시작하도록 하지.”
케르겔이 덤덤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로엘린이 석벽에 드리워진 천을 바라보다 말고 몸을 흠칫 떨었다. 낯선 의식에 대한 두려움과 긴장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긴장할 필요는 없어. 거창하게 의식이라 말하기는 했지만, 간단한 거니까.”
케르겔은 그녀를 반대편으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작은 제단이 있었다. 그리고 제단 한쪽에 은으로 만든 단검이 하나 놓여 있는 게 로엘린의 눈에 들어왔다.
단검의 손잡이에 새겨져 있는 건 짐승의 모습이었다. 개라고 하기에는 사납고 야성적인 느낌을 풍기는 것이 흡사 늑대를 닮아 있었다.
‘……늑대?’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케르겔이 제단 위로 올라서더니 단검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로엘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조금 아플 거야.”
“……아프다니요?”
“그대의 손바닥에 상처를 내야 하거든. 나도 마찬가지고. 그런 뒤에 저 위에 손을 올리면 그걸로 끝이야.”
“그런가요.”
로엘린은 덤덤한 어조로 대답했다. 케르겔이 그 반응에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무렇지 않아 하는군.”
“……?”
로엘린이 그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케르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그녀와 제단 위에 마주 보고 섰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상처를 낼 거야.”
그는 로엘린의 손바닥을 짚으며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반응은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예상 밖이었다. 대놓고 네 손바닥을 이 단검으로 그어 상처를 내겠다, 그렇게 말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도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으니 말이다.
모두가 곱게 떠받들어 자란 왕녀라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제 앞의 여인은 라카인의 왕녀가 분명했다.
‘뭐, 상관할 바는 없겠지.’
어차피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다. 케르겔은 상념을 털어 낸 뒤, 로엘린의 손바닥 위에 단검을 댔다.
날카로운 칼날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흠칫, 떨렸다.
“……!”
작고 하얀 손바닥 위에서 피가 번졌다. 그러나 로엘린은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묵묵히 통증을 참아 냈다. 케르겔이 그 모습을 힐끗 보더니 이번에는 자신의 손을 단검으로 그었다.
방금 로엘린의 손바닥을 그었을 때보다 더 거침없는 태도였다. 실제로도 그녀의 상처보다 더 깊은 상처가 난 것인지 금세 그의 손바닥에서 피가 솟아오르는 듯싶더니 그대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앗! 피가 많이…….”
로엘린은 그의 손바닥에서 흐른 피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보고 깜짝 놀라 손수건을 건네려 했다. 하지만 케르겔은 그녀의 손수건을 받는 대신 고개를 저은 뒤, 눈짓을 했다.
“아아…….”
그녀는 그제야 그가 조금 전에 했던 얘기를 기억했다.
‘맞아. 상처를 낸 뒤에 저 위에 손을 올려야 한다고 했지.’
케르겔이 눈짓으로 가리킨 건 바로 자신들이 손을 올려야 한다던 대리석이었다.
로엘린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고는 그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이쪽에 손을 올리면 돼.”
그가 대리석 앞에 서서 그녀에게 설명을 덧붙였다. 로엘린이 고개를 거듭 끄덕인 뒤, 천천히 손을 들었다.
대리석에 손을 올리자마자 가장 먼저 느낀 건 뼛속까지 얼릴 듯한 냉기였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케르겔이 로엘린의 손등에 제 손을 얹었다.
“이대로 잠시만.”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 그녀가 손을 떼려던 움직임을 멈췄다. 반면, 로엘린의 몸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손등에 맞닿아 있는 그의 손이 주는 감촉과 체온 때문이었다. 제 손을 감싸고도 남을 정도로 큼직한 손, 그리고 저보다 높은 체온은 전부 다 낯설었다.
그녀는 손바닥의 상처에서 느껴지던 통증조차 잊고 어깨를 움츠렸다.
바로 그 순간 무덤 내부가 울리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덤 바깥의 먼 곳 어딘가에서 뭔가가 떼를 지어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데에서 전해지는 진동인 듯싶었다.
로엘린이 당황하여 그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서서 대리석 위에 손을 올리고 있던 케르겔이 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녀를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도 설마, 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말끝을 흐리고 입을 다문 그의 표정은 간단히 설명하기 힘들었다.
케르겔의 얼굴에 깃든 것은 복잡한 감정들이었다. 설렘, 실망, 기대, 분노, 서로 양립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감정들이 뒤엉켜 드러나고 있었다.
“……?”
로엘린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자 케르겔이 피식 웃더니 상처를 내지 않은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에서 묻어났던 감정들이 싹 사라졌다.
그리고 무덤 밖에서 짐승들의 우는 소리가 들렸다.
우우우, 우우우우우.
“이게 무슨 소리…….”
“늑대들의 울음소리지. 의식이 완성된 것을 축하하는.”
“……예?”
그녀는 그를 돌아보았다. 방금 농담을 한 게 분명한 것 같기는 한데, 케르겔의 표정에서는 웃음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바람에 로엘린은 같이 웃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로엘린의 그런 속내를 짐작한 듯 케르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그는 금세 덤덤한 표정으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 그만 나가도록 하지.”
“정말, 의식이 끝난 건가요?”
“그렇다니까.”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만 느리게 두어 번 깜빡이다가 이내 그를 따라 다시 석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우우우.
여전히 짐승, 아니, 늑대들이 무리 지어 한꺼번에 우는 소리가 들렸다.
“늑대가 저렇게 우는군요.”
로엘린이 석실을 나와 통로를 걷다 말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에 호기심이 슬쩍 엿보였다. 그가 앞서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늑대가 우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아, 당연히 없겠군.”
“예. 왕궁에서는 접할 일이 없는 야생 짐승이니까요.”
그녀는 케르겔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조금씩 로엘린의 걷는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앞만 바라보며 걸어가는 케르겔은 그런 그녀의 변화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알아차릴 겨를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
그는 침묵을 지키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고 있었다. 아마 황궁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터였다.
늑대들이 저렇듯 모여서 울어 대는 건 늑대족의 후예가 그 반려를 맞이한 것을 축하하는 의미이니 말이다.
‘정말 이 여자가…… 내 반려라는 거로군.’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림을 통하여 계시를 받았고, 이렇듯 반려 의식을 치름으로써 다시 한 번 그 점을 확인한 셈이다.
무덤의 주인, 카인베르트가 늑대들을 통하여 ‘반려’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 것이니까.
‘……어쨌든 다행이기는 해. 만약 봉인이 깨지는 일이 벌어진다 해도 최소한 그걸 막을 수는 있게 되었으니.’
케르겔은 쓴웃음을 삼키며 제 왼쪽 가슴 근처에 손을 댔다. 심장이 뛰는 자리 바로 옆에 보석처럼 박혀 있는 ‘봉인’이 손끝에 만져졌다.
봉인이 깨질 경우,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반려뿐.
‘나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저 여자란 말이지.’
그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곱씹다가 뒤늦게 그녀의 기척이 멀어진 걸 깨닫고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
케르겔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표정을 굳혔다. 뒤처진 그녀의 모습을 본 탓이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로엘린은 케르겔이 앞장서서 가다 말고 멈춰 서 있는 걸 보고 발걸음을 재촉해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계속 그녀를 쳐다보더니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드레스 자락에 감춰진 발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마치 그에게 제 맨발을 들킨 것만 같아서 그녀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케르겔이 움직였다.
그는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더니 그대로 드레스의 아랫단을 슬쩍 들어 올렸다.
“폐, 폐하!”
“……쯧. 이 발 상태로 잘도 따라왔군.”
케르겔이 인상을 쓰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로엘린의 발 상태는 꽤 심각한 편이었다. 결혼식을 치르느라 새로 신은 구두에 쓸린 피부가 벌겋게 변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녀의 발에 상처가 생기고 피와 진물이 섞여 흐르는 중이었다.
물론 케르겔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이 정도의 상처쯤은 별것 아니라고 치부했을 터였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세로이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웬만한 상처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게 그들의 보편적인 모습이니 말이다.
일례로 케르겔의 측근 중 하나가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 도중에 부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배가 갈라져 내장이 거의 쏟아져 나올 지경이었으니 심한 부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상황에서 놀라서 허둥대지 않았다. 하다못해 부상을 입은 본인조차도 자신의 벌어진 배를 움켜쥔 채 낄낄대며 치료사가 오기를 기다렸으니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러니 로엘린의 발에 난 상처는 솔직히 상처라고 할 것도 아니었다. 곱게 자란 ‘라카인의 왕녀’란 기준에서 볼 때 그렇단 의미일 뿐.
“저는 괜찮습니……. 앗! 폐하!”
로엘린이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발을 살피는 케르겔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간신히 입을 연 순간, 케르겔이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폐, 폐하! 내려 주십시오!”
“됐어. 이 발로 어떻게 더 걷겠다고.”
그는 로엘린이 당황하여 버둥거리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무릎 뒤를 받쳐 안은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구두를 신고 이런 길을 걸었으니…….”
케르겔은 다시금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로엘린은 그 중얼거리는 소리에 어깨를 살짝 움츠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저를 안고 가는 남자의 가슴팍이 눈에 들어왔다. 단정하게 갖춰 입은 예복을 본 순간, 그녀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와 이렇듯 가까이 접촉을 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불길한 쌍둥이라는 이유로 꺼리고, 숨기려고만 했던 존재가 저였다.
그녀의 존재를 아는 이들은 모두 그녀를 혐오하고 피하려고만 했다.
적어도 라카인에서는 언제나 그랬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사람답게 대접을 받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로엘린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희미하게 스쳤다가 이내 사라졌다. 자신이 태어나 자랐던 라카인에서는 단 한 번도 이와 같은 호의를 받아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괜한 자괴감이 들었다.
그리고 억울한 마음이 새삼 가슴속 어딘가에서 치밀고 올라왔다. 남들에게는 별것 아닌 평범한 삶이 제게는 왜 이토록 어려웠던 걸까 생각하니 화가 나기도 했다.
태어나 자란 모국을 뒤로한 채 떠나오고서야 비로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니.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제 뺨을 쓸어내렸다.
그 순간, 나직한 목소리가 정수리 위에서 들렸다.
“여유롭군. 그렇게 다른 생각을 할 정도로 내 품이 편한가 보지?”
“……!”
로엘린은 생각에 깊이 잠겨 있다가 그제야 자신이 케르겔의 품에 안긴 채 숲을 빠져나가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이없어하는 듯한 그의 금안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그녀는 잘 익은 토마토처럼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허둥지둥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가만히 있어. 그러다가 오솔길에서 또 벗어나면 어쩌려고.”
“그, 그건…….”
그녀는 그에게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달싹이다가 그냥 침묵했다. 그러자 케르겔이 로엘린의 자그마한 머리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입꼬리를 비틀었다.
하지만 그는 곧 그런 제 모습에 당혹감을 느끼며 표정을 굳혔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여자를 보며 웃음을 짓다니 말이다.
반려 의식까지 치르고 이 여자가 자신의 진짜 ‘반려’라는 걸 확인해서일까.
그는 자신이 그녀에 대해 더 이상 반감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하긴 딱히 그녀에 대해 반감을 가질 이유가 없기는 했다.
적어도 그녀가 세로이프에 온 이후로는 그랬다.
세로이프를 모욕하고 조롱했던 여자와 동일인이 맞는 건가 싶을 정도로 지금 제 품에 안겨 있는 이는 매사에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사이에 철이 들었다고 해야 하나…….’
케르겔은 무심코 생각을 이어 가려다가 그런 제 생각에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으로 바꿔치기가 되었다고 하는 편이 신빙성이 있겠군.’
그는 고개를 저으며 거듭 피식거렸다.
그러나 케르겔은 자신이 방금 ‘진실’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런저런 상념을 접은 뒤,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어쨌든 이 여자는 자신의 ‘반려’가 맞다. 그러니 굳이 과거의 일을 끄집어내어 불쾌감을 드러낼 필요는 없을 터였다.
우우우우우.
그때, 늑대 무리의 울음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로엘린이 그 소리를 듣고 입을 열었다.
“왜 계속 우는 걸까요?”
“응?”
“늑대들요. 저들끼리 특별한 의식이라도 치르는 건지…….”
그녀가 무심코 말을 잇다가 자신의 말에 민망했는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수줍어하는 듯한 미소였다. 그는 어쩐지 그 미소 짓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기가 힘들었다.
“흠, 글쎄, 그런지도 모르지.”
케르겔은 간신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헛기침과 함께 대꾸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걸어갈게요.”
그때, 로엘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곧 성역 밖으로 나가게 될 텐데 다른 이들의 눈도 그렇고…….”
“남편이 아내를 안고 있는 게 뭐 어때서?”
“……그, 그렇지만.”
“됐어. 어차피 그 발로는 못 걸어.”
케르겔은 로엘린의 말을 끊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안은 채 계속 걸음을 옮겼다.
로엘린은 한 번 더 말을 꺼내려다가 소용없으리란 생각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멀리서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횃불들이 보였다. 어느새 깊은 어둠이 찾아든 것이다.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숲을 막 빠져나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동시에 크게 외쳤다.
로엘린은 갑작스러운 인사에 당황해하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케르겔이 그녀를 안은 채 입을 열었다.
“황후의 발 상태가 좋지 못하니 곧바로 황궁으로 돌아가도록 하겠다. 준비해라.”
“예!”
그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들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케르겔은 로엘린을 안고 마차로 향했다.
“제가 걸을 수 있는데…….”
“지금 이 상태에서 상처를 더 악화시키겠다고? 궁의가 들으면 난리를 칠 소리군.”
케르겔이 피식거리며 그녀를 마차에 태웠다. 로엘린은 그제야 붉어진 얼굴을 감추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가 그 모습을 보다가 맞은편 자리에 앉고 나서야 마차 문이 닫혔다. 그리고 마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휴우.”
드디어 오늘 일정이 모두 끝났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녀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해.’
로엘린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무거워진 눈꺼풀을 억지로 올렸다. 하루 종일 긴장했던 터라 몸이 느끼는 피로가 극심했다.
게다가 반려 의식 때문에 상처를 낸 손바닥도 욱신거리며 통증을 호소했고, 엉망이 된 발의 상처 또한 쓰라리고 불편했다. 케르겔이 직접 안아서 저를 데리고 나와 주었기에 발 상태가 그나마 나은 것인데 말이다.
‘어쨌든 다행이야.’
로엘린은 눈 주위를 손가락으로 살며시 누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결혼식과 반려 의식을 모두 무사히 끝냈으니, 일단 안심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차 밖에서 펑, 펑펑,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깜짝 놀라 마차의 작은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아아…….”
화려한 불꽃놀이가 진행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밤새 불꽃놀이가 이어질 거라고 했던 케르겔의 말이 생각났다. 그 역시 자신이 했던 말을 기억해 낸 것인지 입술 끝을 올리더니 마부석 쪽의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자 밖에서 가벼운 소란이 일더니 마차가 멈췄다. 그리고 마차 문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잠시 이곳에서 쉬었다가 가겠다.”
“……예에?”
케르겔의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한 것인지 마차 밖에서 들려오던 자의 목소리가 다소 높아졌다. 그리고 당황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기에 로엘린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케르겔을 쳐다보았다.
“잠깐이지만, 구경하고 가지.”
“……구경이라니요?”
“불꽃놀이 말이야. 아까 그대가 구경하는 걸 내가 방해했으니까.”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녀가 더욱 당황하여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차 문을 두드렸다.
“…….”
로엘린은 케르겔이 시종과 호위 기사들에게 뭐라 명령을 내리는 걸 가만히 쳐다보았다.
무심한 남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게 냉랭하기만 했던 남자였다.
지금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저에게 딱히 어떤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이 결혼은 그저 ‘해야만 하는’ 것이기에 한 것일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드레스를 살짝 움켜잡았다가 놓은 뒤, 제 뺨을 쓸어내렸다. 달아오른 뺨의 온도가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그는 냉혹하기만 한 남자는 아니었다. 지금처럼 이렇게 저를 배려해 주기도 했고…….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저를 안고 숲을 빠져나온 그를 떠올린 탓이다.
‘좋은 사람이야. 괴물이란 소문이 터무니없을 만큼.’
로엘린은 다시 시선을 들어 그를 조심스럽게 보았다. 라카인에서 접했던 ‘세로이프의 괴물 황제’란 소문의 주인공이 이 남자라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녀는 밀려드는 죄책감에 그를 바라보던 눈을 내리깔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를 속이고 이렇듯 그의 아내가 되었단 사실이 그녀의 가슴속을 무겁게 했다.
“내리도록 하지. 마차 밖에 앉을 만한 자리를 마련하라고 했어.”
그 순간, 케르겔이 손을 내밀며 로엘린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은 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케르겔의 지시를 받은 이들이 빠르게 움직인 덕분인지 마차 밖에는 그들 두 사람이 편히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로엘린은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준비된 자리에 앉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자 머릿속이 맑아졌다. 그러나 몸은 한기를 느낀 탓인지 바르르 떨렸다.
“이걸 덮고 있어.”
“아…… 감사합니다, 폐하.”
그때, 케르겔이 그녀에게 두툼한 모포를 건넸다. 로엘린은 보드라운 모포를 받아 무릎을 덮으며 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대의 발 상태도 좋지 않고, 밤공기도 차가우니 그냥 여기서 잠깐 구경하고 황궁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어. 그래도 서운하지는 않겠지?”
“예, 물론이에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제 옆에 앉은 케르겔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펑. 펑.
하늘 저편에서 긴 꼬리를 남기며 불꽃이 솟았다.
그리고 또 다른 불꽃이 그 옆쪽에서 솟아올랐다가 하늘 위에 화려한 흔적을 남기며 사라졌다.
“예쁘다…….”
로엘린은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삶이란 것을 색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지금껏 제 삶은 아마도 무채색이었을 것이다.
그 무채색의 삶에서 벗어나 낯선 땅에 왔다. 앞으로의 제 삶이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까지의 삶처럼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란 기대가 들었다.
그것이 비록 제 이름으로 사는 게 아닌, 쌍둥이 언니의 이름으로 사는 삶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하늘을 수놓는 불꽃들의 향연이 고스란히 로엘린의 푸른 눈에 비쳤다. 마치 그녀의 눈이 하늘이라도 되는 듯.
그리고 케르겔이 의미 모를 시선으로 그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황후궁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바빴다. 시녀장 루시를 필두로 하여 모든 이들이 분주하게 궁 안팎을 오갔다.
“황후마마께서 오십니다!”
그때, 시종이 헐레벌떡 달려와 크게 외쳤다. 그러자 루시가 서둘러 궁 앞에 나와 옷매무새를 단정히 매만졌다. 그 뒤를 따라 시녀들과 시종들 또한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그들의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가 들어오는 게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반려 의식을 마치고 돌아온 황후가 그 마차 안에 타고 있을 터였다.
“……정말 저분이 ‘반려’이시라니.”
루시의 근처에 서 있던 시녀 하나가 복잡한 감정이 섞인 투로 작게 중얼거렸다. 루시가 미간을 좁히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엄한 경고조의 시선에 움찔한 시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루시는 시녀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마차가 궁 앞에 다다른 것이다. 그녀는 정중한 태도로 마차 문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황후마마, 루시입니다. 마차 문을 열어도 되겠는지요.”
루시가 조심스럽게 허락을 구하며 입을 열었다. 뒤이어 마차 안에서 로엘린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해요, 아니, 그렇게 하게.”
결혼식을 하기 전에는 ‘손님’이란 이유로 말을 놓지 않았지만, 이제는 시녀장을 비롯하여 아랫사람들에게 말을 놓아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바꾼 탓인지 로엘린의 말투가 다소 어색했다.
“그럼 마차 문을 열겠습니다.”
하지만 루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답한 뒤, 고개를 돌려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시립해 있던 시녀들 중 실로아와 다른 시녀 하나가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마차 문이 열리고 황후궁의 새로운 주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실로아와 시녀는 로엘린을 양쪽에서 보좌하며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매만져 주었다.
“황후마마, 고귀한 선택을 받으신 점에 대하여 깊이 감축드립니다.”
“고맙네, 루시.”
로엘린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루시의 인사를 받고는 그에 화답했다. 그러자 나머지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인사를 하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그들의 인사 역시 받은 뒤, 제 앞의 궁을 바라보았다.
‘이곳이 황후궁이로구나.’
앞으로 자신이 살아가야 할 곳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졌다.
라카인의 왕궁보다 화려하지는 않으나 범접하기 힘든 기품이 서려 있는 공간이었다. 그녀가 가만히 궁을 바라보고 있자 루시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황후마마,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조금 있으면 폐하께서도 오실 테고요.”
“……아, 그렇겠군.”
로엘린이 루시의 말에 가늘게 몸을 떨고는 애써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대답했다. 시녀장의 말 속에 숨은 뜻을 곧바로 눈치챘기 때문이다.
황제가 온다는 것.
그것은 즉, 그와 ‘초야’를 보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오늘 일정을 모두 마무리 지었다고 저도 모르게 안심하고 있었는데, 루시의 말에 다시금 긴장이 되면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떨지 말자. 어차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이건 내가 선택한 길이야.’
껍데기처럼 갇혀 사는 삶이 싫어서 선택한 것인데 겁을 먹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니, 저를 아내로 맞이한 남자 때문에라도 피하고 싶지 않았다.
‘비록 그를 속이고 가짜 아내가 되었지만…… 그를 진심으로 대하고 싶어.’
그것이 그에 대한 제 예의이자 사죄일 테니 말이다. 로엘린은 마음을 다잡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도록 하지.”
“예, 황후마마.”
루시가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로엘린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 발을 내디뎠다.
* * *
“더 필요한 것은 없으신지요.”
실로아가 로엘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로엘린은 실로아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됐어. 수고했어, 실로아.”
“아닙니다, 황후마마.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저는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실로아가 로엘린의 치하하는 말에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조아리더니 침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침실의 문이 닫히고 사방이 고요해졌다. 로엘린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침실 안을 밝히고 있는 건 등불이 전부였다. 정교한 세공이 돋보이는 등잔에 새겨진 문양은 늑대를 닮아 있었다.
‘늑대?’
그녀는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려 의식을 치렀을 때, 무덤 밖에서 들려왔던 늑대들의 울음소리가 새삼 기억난 것이다.
“세로이프를 상징하는 동물이라도 되는 걸까. 그런 얘기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로엘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침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몸을 움츠리고는 문 쪽을 쳐다보았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침실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침실 안이 어두운 터라 방금 들어온 사람의 얼굴은 희미하게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사실, 지금 이 늦은 시간에 그녀의 침실을 찾을 이는 단 한 사람뿐이기도 했다.
“……폐하.”
로엘린이 옷 앞섶을 여미며 침대 아래로 내려서서 예를 갖추었다. 그녀가 입고 있던 얇은 잠옷이 작은 손 안에서 구겨졌다. 케르겔은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녀를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로엘린은 시선을 내리깔며 숨을 들이쉬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얇은 잠옷이 눈에 들어왔다.
속살이 고스란히 비치는 잠옷을 본 순간,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이 잠옷이 무엇을 위하여 준비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잠옷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제 몸에서 풍기는 향기에 더욱 얼굴을 붉혔다. 목욕 시중을 들었던 실로아가 목욕을 마친 뒤에 로엘린의 몸에 향유를 발라 준 것이다.
그 모든 게 지금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을 터.
“흐음, 아무래도 시녀들이 다소 과하게 군 것 같군. 그대가 너그럽게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나쁜 뜻으로 한 행동은 아니니 말이야. 외려 이 밤에 대한 기대가 지나쳐서 그랬다면 모를까.”
그 순간, 케르겔이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 역시 그녀가 느낀 걸 똑같이 느낀 것 같았다. 로엘린은 빨개진 얼굴을 제대로 들지도 못한 채 앞섶을 더욱 단단히 여며 쥐었다.
그러자 그가 앞섶을 여민 그녀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피식거리며 말을 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기대에 우리가 따라야 하는 건 아니겠지만.”
“……예?”
로엘린은 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케르겔이 그녀의 푸른 눈과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이고는 재차 입을 열었다.
“오늘은 그냥 자도록 하지. 아니, 오늘만이 아니라 당분간은 그렇게 했으면 좋겠는데. 그대 생각은 어때?”
“……예?”
제 귀로 분명히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어리둥절하여 대답 대신, 그에게 되묻고 말았다. 그러자 케르겔이 다시금 어깨를 으쓱이더니 가벼운 농담처럼 말을 덧붙였다.
“설마 ‘그냥’ 자자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아니면 내 말에 아쉽다거나…….”
“아니요! 저야 당연히 좋…….”
그녀는 케르겔이 농담을 건넨 것이란 걸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당황하여 목소리를 높여 대꾸하다가 이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로엘린을 보던 케르겔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는 곧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대놓고 좋다고 할 줄이야…….”
“저기, 그게 아니라…….”
“괜찮아. 뭐라고 하려는 건 아니야. 그대뿐만 아니라 나도 아직은 그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게 사실이고.”
그가 침대 쪽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그렇다 해서 이 상태로 계속 있을 수는 없겠지. 언젠가는 그대를 안을 거야. 후사를 보기 위해서라도 말이지.”
“…….”
“다만, 아직은 우리가 서로 그럴 관계가 아니니까.”
“……배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폐하.”
로엘린이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케르겔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 위에 와인과 가벼운 다과가 놓여 있는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럼 와인이나 한잔할까?”
그의 제안에 로엘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케르겔이 테이블로 향하려다가 그런 그녀를 보고 미간을 좁혔다.
“왜 그러지? 무슨 문제라도 있……. 아아.”
그는 그녀에게 질문을 하려다 말고 외마디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자신이 걸치고 있던 가운을 벗어 들고 로엘린에게 다가갔다.
“이거라도 걸쳐.”
“……감사합니다.”
로엘린이 머뭇거리다가 그의 가운을 받아 들고는 얼굴을 붉혔다. 속이 다 비치는 잠옷을 입은 채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는데, 그가 그런 제 속내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로엘린은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그의 가운을 걸쳤다. 그러나 그녀는 곧 얼굴을 더욱 빨갛게 물들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의 가운에서 전해진 온기와 희미한 체취 때문이었다.
“뭐 해? 이리 안 오고.”
먼저 테이블로 가서 자리를 잡은 케르겔이 로엘린을 불렀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당황해하다가 한숨을 삼키고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케르겔은 로엘린이 맞은편에 앉자 와인 병을 들더니 그녀의 잔을 절반 정도 채웠다.
“피곤할 테니 조금만 마시는 편이 낫겠지.”
“고맙습니다. 아! 폐하의 잔은 제가 따라 드릴게요.”
로엘린은 케르겔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본인의 잔에 와인을 막 따르려던 케르겔이 그녀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리고는 그녀에게 와인 병을 건넸다.
그녀는 와인 병을 받아 들고는 천천히 그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케르겔이 로엘린의 잔을 절반 채웠던 것처럼, 그녀 또한 그의 잔을 딱 절반만 채운 채.
그것을 본 케르겔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로엘린은 덤덤한 투로 입을 열었다.
“주무시기 전에 과음을 하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니까요.”
“글쎄. 한 잔이나 반 잔이나, 과음이라고 하기에는…….”
“폐하 또한 피곤하실 테고요.”
“……?”
“결혼은 저 혼자 한 것이 아니잖아요.”
로엘린이 의아해하는 그를 마주한 채 차분하게 대답했다. 케르겔은 피식 웃고는 잔을 들었다.
“하긴, 그대의 말이 맞아. 결혼은 결코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그가 새삼스럽다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로엘린은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들어 그의 시선을 피해 제 앞에 놓인 와인 잔에 손을 가져갔다.
달콤한 맛이 강해서 그런지, 술을 거의 마셔 본 적 없는 그녀의 입맛에도 꽤 괜찮은 편이었다.
“한 번에 그렇게 다 마셔 버리면 금방 취할 텐데…….”
“예?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그 순간, 케르겔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로엘린이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그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그가 묘한 표정을 짓더니 방금 그녀가 내려놓은 잔을 보았다.
로엘린은 왜 그러나 싶어 덩달아 제 잔을 내려다보았다.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비워 버린 잔에는 제 입술 자국만이 살짝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니, 뭐, 술을 잘 마시는 것 같아서.”
그녀가 잔에 남은 입술 자국을 닦아 내려는 순간, 케르겔이 고개를 흔들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그러나 로엘린은 그의 말을 덤덤히 듣고 넘길 수가 없었다.
“아, 저기, 술이 별로 독하지 않아서…….”
“별로 독하지 않다고? 이게?”
그가 눈을 크게 뜨고는 다시금 물었다.
‘……독한 술이었던 걸까?’
그녀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술을 마셔 본 일이 드문 터라 술이 독한지 약한지, 그런 판단조차 할 수 없었다. 더구나 방금 자신이 마신 건 포도 주스처럼 달콤한 맛이 강하기도 했고.
“달콤한 맛이 강하게 나서…….”
당황한 탓일까.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더니 뒤이어 온몸에 열이 확 올랐다.
로엘린은 변명처럼 말을 덧붙이다가 그대로 말끝을 흐렸다. 분명 지금 제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을 터였다. 그녀는 그런 제 모습을 보이는 게 민망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어?”
바로 그 순간, 바닥이 뱅그르르 돌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이 의지와 무관하게 옆으로 기울었다. 이대로라면 바닥으로 굴러떨어져 다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위험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처럼 정신이 멍하기까지 했다.
‘어어…….’
그래서 로엘린은 제 몸이 의자에서 벗어나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려는 것에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눈만 느릿느릿 깜빡였다.
“이러면서 술이 독하지 않다고? 그새 취했으면서?”
하지만 그녀는 곤두박질치지 않았다. 그 대신,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제 맞은편에 앉아 있었던 케르겔의 품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어, 폐하?”
로엘린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 건가 싶어 눈만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런 그녀를 보던 케르겔이 로엘린의 등을 받쳐 안은 채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우와…….”
그녀는 그에게 안긴 채 몸이 붕 뜨자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헛웃음과 함께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술에 취하니까 어린애가 되는군.”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제가 못 들어서.”
로엘린이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계속 우와, 하며 감탄을 하다 말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별말 아니야.”
“으응…….”
그녀는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는 케르겔에게 불만이라도 표시하듯 볼을 부풀렸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는 그녀를 침대에 누이고 돌아서려는 순간, 로엘린의 목소리가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기분이…… 이상해요.”
로엘린은 푹신한 침대에 누운 채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케르겔이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다가 그 시선을 느끼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기분이 어떤데?”
케르겔은 발걸음을 돌려 침대로 다가와 그 가장자리에 앉았다. 로엘린이 그를 향해 아예 모로 돌아눕더니 느릿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두근거리고 긴장도 되고…… 한편으로는 후련하기도 하고…….”
“결혼식을 마쳤으니 그런 기분이 들 법도 하겠지.”
케르겔이 피식거리며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순간, 로엘린의 입이 재차 열렸다.
“미안해요…….”
“뭐?”
그가 몸을 돌려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렇지만 그녀에게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술에 완전히 취한 그녀가 그대로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
케르겔은 말없이 로엘린을 내려다보았다. 쌕쌕 숨을 쉬며 잠들어 있는 여자를 보던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운 건가?”
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그녀가 왜 눈물을 흘린 것인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케르겔은 로엘린을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눈가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가져갔다.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이 그의 손가락 끝에 묻어났다.
그는 제 손끝을 가만히 보다가 그대로 손을 오므려 쥐었다. 그러고는 다시 테이블 쪽으로 몸을 돌렸다.
* * *
“으음…….”
로엘린은 갈증을 느끼며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가 숨을 깊이 내쉬고는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두운 침실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익숙하지 않은 광경이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
“……아!”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깨닫고 그 자리에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뒤편에서 남자의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얌전히 잘 자는 것 같더니 왜 갑자기 깬 거지? 설마 그것도 주정인가? 그대는 여러모로 예상 밖의 모습을 보여 주는군.”
“폐, 폐하?”
로엘린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창틀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있는 케르겔의 모습이 보였다. 로엘린은 황급히 침대 아래로 내려섰다.
명색이 ‘초야’인데 저 혼자 침대를 차지한 채 누워 잠이 들었다고 생각하니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아무리 그냥 잠만 자기로 했다고 하더라도 이건 그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결례를 저질렀어요.”
로엘린은 황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녀의 기억은 와인을 마시고 난 직후에 끊겨 있었다. 아마도 그 뒤에 술기운이 올라와 갑작스럽게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바로 잠든 게 아니라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뿐 주정을 부렸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녀는 조금 전 케르겔의 입에서 나왔던 ‘주정’이란 말을 떠올리고는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그는 그것‘도’ 주정이냐고 물었다. 즉, 자신이 그의 앞에서 이미 한 차례 주정을 부렸다는 의미로 봐도 무방할 터였다.
“그, 그런데 폐하께서는 왜 아직 주무시지 않은 건가요?”
그러나 로엘린은 애써 그 민망한 가정을 외면하며 화제를 돌렸다. 케르겔이 그녀를 바라보다 말고 침대를 힐끗 보고는 입을 열었다.
“누가 침대 위에서 혼자 활개를 치며 자서 말이지.”
“화, 활개라니요!”
“잠버릇이 꽤 고약하던데.”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난감한 표정으로 눈을 찡그렸다.
케르겔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식 웃더니 손을 저었다.
“걱정 마. 술에 취해서도 얌전히 미동도 안 하고 자더군. 설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줄은 몰랐는데.”
“폐하께서 제게 그런 농담을 하실 까닭이 없으니까…….”
로엘린이 그의 말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억울한 마음이 들어 살짝 불퉁한 투로 대꾸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런 제 자신의 모습에 놀라 입을 다물고 말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이렇듯 편히 말해 본 적이 없었다. 외려 다른 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싶어 늘 신경 쓰고 눈치를 살피며 살았다.
‘아무래도 술이 덜 깨었나 봐.’
달콤한 맛 때문에 독한 줄 몰랐는데 정말 독한 술이었나 보다. 로엘린은 이 모든 게 자신이 마신 와인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에 이 정도 농담쯤이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순간, 케르겔이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부부.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로엘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거짓으로 이루어진 관계라는 걸 떠나서도 그들의 관계는 애정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은, 그저 ‘정략적인’ 차원의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부부란 말을 입에 담았다.
그래도 되는 걸까.
그녀의 푸른 눈에 복잡한 감정이 일렁였다.
“쓸데없이 고민할 것 없어.”
케르겔이 그녀를 잠시 쳐다보더니 툭 던지듯 말을 꺼냈다. 로엘린은 몸을 흠칫 떨며 그를 보았다.
“적어도 한 가지는 약속하도록 하지.”
“……약속이라고요?”
“그래, 약속. 황후, 그대에게 충실한 남편이 되겠다는 약속.”
“…….”
“괴물의 아내가 되기 위해 이곳까지 와 준 그대를 홀대하지는 않을 테니.”
“그, 그건…….”
로엘린은 말을 더듬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본인을 스스로 괴물이라 칭하는 남자의 입가에 어린 조소를 본 탓이었다.
하기야 자신만큼이나 그의 속도 편하지는 않을 터였다.
“……저도 약속드릴게요. 폐하께 충실한 아내가 되기 위해 노력하겠어요.”
그래서 그 대신, 그녀는 케르겔이 한 약속과 비슷한 말을 입에 담았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슬쩍 기울이더니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달빛이 은은하게 쏟아지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