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Hidden Chapter. 반려의 계시, 그리고 인연의 시작 (3/18)

Hidden Chapter. 반려의 계시, 그리고 인연의 시작

“……저 그림 속 여자가 라카인의 왕녀란 건가?”

케르겔은 기가 막힌다는 듯 몇 번이나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신하들이 다들 참담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무언의 긍정이나 다를 바 없는 몸짓이었다.

그는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내 나라를 비웃고 업신여겼던 여자를 반려로 맞이하라고? 그런 ‘계시’가 내려왔다는 걸 나더러 믿으란 말인가?”

케르겔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가 느끼는 분노와 참담한 심경이 그의 표정만으로도 생생히 전달되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있다가 몸을 돌려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신하들 중 누군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페토안. 그대가 당시에 사절단의 대표로서 왕녀를 가장 가까이에서 봤으니, 누구보다도 제일 잘 알겠군. 다시 제대로 살펴보도록 하라. 정말…… 저 그림 속 여자가 라카인의 왕녀가 맞는가?”

“……분명, 라카인의 왕녀입니다.”

늙은 신하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사실을 고하는 목소리였다.

케르겔은 신하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덤 안은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케르겔이 다시금 시선을 들어 석벽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가 보고 있는 석실의 벽에는 한 여인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꿀처럼 달콤해 보이는 금발.

바다를 닮아 청명한 느낌을 주는 푸른 눈.

티 하나 없이 새하얀 피부.

루에넬 열매처럼 달콤해 보이는 붉은 입술.

어느 누가 보더라도 감탄을 할 법한 미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그 여인을 보고 감탄한 이는 없었다.

“대체 무슨 의도로 저 여자를 내 반려로 맞이하라, 계시를 내린 건지 모르겠군. 아무래도 시조께서 무덤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계셔서 정신이 살짝 나가기라도 한 모양이야.”

“폐하! 어찌 카인베르트 님께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국의 건국 시조이시자 현 황실, 폐하의 선조가 되시는 분입니다.”

케르겔이 자조하듯 툭 던진 말에 그의 오래된 벗이자 신하인 하이네스 바쉘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케르겔이 하이네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친우의 은색 눈동자 역시 아픔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디쓴 충언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일 터였다.

‘그래. 내가 어린애도 아닌데 투정을 부려서 뭐 하겠나.’

케르겔은 두 눈을 감았다가 뜬 뒤, 다시 그림 속 여인을 응시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이네스.”

“예, 폐하.”

하이네스가 케르겔의 뒤에 서 있다가 그가 부르자 한 걸음 다가와 몸을 숙였다. 케르겔은 그림 속 여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명을 내렸다.

“일단 라카인 왕녀의 초상화를 구해 보도록 하게. 다들 저 여인이 라카인의 왕녀가 틀림없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해서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도 않고 섣불리 청혼서를 보낼 수는 없는 일이니 말이야.”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하이네스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케르겔의 말대로 다시 한 번 확인을 해 볼 필요가 있었다. 제국의 황후를 맞이하는 일이니 당연했다.

더구나 단 한 명의 ‘반려’이니 더욱 그랬다.

“그나저나 라카인의 왕녀가 정말로 내 ‘반려’라면 더욱 주의를 해야겠군. 내가 ‘반려’를 통해서만 후사를 볼 수 있다는 걸 라카인에서 알게 되기라도 할 경우, 그쪽에서는 결코 왕녀를 내놓으려 하지 않을 테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시’와 관련된 모든 것은 철저히 비밀로 지켜질 것입니다. 제국의 존망이 걸려 있는데 어느 누가 함부로 입을 놀리겠습니까.”

하이네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케르겔의 말에 대답했다. 케르겔은 그의 말을 듣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제국의 존망이라……. 정확히 말하자면 현 황실의 존망에 불과할 테지. 늑대족의 피가 흐르는, 이 황실 말이야.”

“폐하께서 즉, 세로이프이십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하이네스는 케르겔의 말에 냉큼 반박했다. 다른 신하들 역시 그에 동의한다는 듯 비슷한 말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하이네스가 재차 케르겔을 향해 말을 이었다.

“카인베르트 님께서 세우신 나라입니다. 용맹한 늑대족의 후예가 다스리는 나라가 바로 이 나라, 세로이프입니다. 저희 모두 그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폐하.”

“하지만 이렇게 ‘계시’를 통해서만 반려를 맞이하고 후사를 볼 수 있으니, 황실의 기반이 그리 탄탄하지 않은 게 문제 아닌가.”

“그건……. 카인베르트 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겠는지요.”

하이네스는 케르겔의 말에 말문이 막힌 듯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대답했다. 그러나 케르겔은 그런 친우의 말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 이미 오래전 잠들어 이곳에 묻힌 이의 뜻에 따라 반려를 맞이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그것 자체에 의심이 생기는군. 이번 계시를 보고 나니까.”

케르겔은 고대 늑대족의 후예였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바로 그 증거였다.

그리고 늑대족은 ‘계시’를 통해 선택된 반려를 맞이해야 했다. 그러지 못할 경우, 대(代)가 끊어지게 될 터였다. 그것에 단 한 번의 예외도 존재한 적은 없었다.

황실의 계보, 그 오래된 기록을 거슬러 올라가 샅샅이 뒤져 보았어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가 되고 나면 ‘계시’ 속 반려를 찾아내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세로이프 제국 내에서 찾아냈는데, 이번에는 타국의 왕녀가 반려로 선택된 상황이니 다른 때보다 골치가 아픈 건 분명했다.

더구나 그 왕녀가 세로이프를 야만적인 나라라고 조롱하고 무시하여 양국 간의 외교적인 문제를 일으켰던 장본인이니…….

케르겔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한숨을 삼킨 뒤, 무심코 생각난 것을 입에 담았다.

“참, 라카인 왕녀의 이름이 뭐지?”

“에리타 라카인입니다. 레노프 국왕의 하나뿐인 여동생이지요.”

“하나뿐인 여동생이라……. 본인들의 핏줄이 가장 고귀하다 하는 라카인 왕실에서 과연 왕녀를 순순히 넘길지도 문제로군.”

케르겔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무심코 제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심장 근처에 박혀 있는 봉인이 그의 손길을 느낀 것인지 진동했다.

늑대족의 힘을 억누르고 있는 봉인. 그 봉인 안에 내재되어 있는 힘은 언제라도 기회만 생기면 세상으로 나오려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역대 그 어느 황제들보다도 강력한 힘을 타고난 케르겔. 그렇기 때문에 봉인이 깨질 위험은 더욱 큰 상태이기도 했다.

물론 그걸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케르겔만이 본인의 상태를 가장 잘 알고 있을 뿐.

“그래도 어떻게든 데려와야겠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폐하. 왕녀는 세로이프로 오게 될 것입니다.”

“하이네스, 그대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야.”

케르겔은 피식 웃으며 봉인 위에 대고 있던 손을 내렸다.

후사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 봉인을 위해서라도 ‘반려’는 반드시 필요할 터였다.

다음 대의 황제가 다스리는 세로이프는 둘째 치고, 봉인이 깨지면 당장 자신의 대에서 세로이프, 아니, 크세안 대륙 자체가 멸망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봉인이 깨질 경우, 그걸 막을 수 있는 건 오로지 반려뿐이니까.

그는 그림 속 여인, 라카인의 왕녀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의 금안은 무심하고, 서늘했다. 그러나 그 시선 깊숙한 곳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본인의 운명에 대한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 * *

세로이프 제국의 황제, 케르겔이 ‘계시’를 받은 뒤, 2주일 만에 라카인으로 사절단이 출발했다. 라카인의 왕녀, ‘에리타’에게 보내는 황제의 친필 청혼서와 함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