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별궁의 껍데기 왕녀
“말도 안 돼! 싫어요!”
에리타는 날카롭게 언성을 높였다. 레노프가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다가 그 목소리에 불쾌감을 느끼고는 미간을 좁혔다.
“에리타, 내가 너를 예뻐한다 하여 그 선을 넘어서는 것까지 용납할 거라 착각하지 마라.”
“그, 그렇지만 오라버, 아니, 전하! 저는 정말 그 괴물과 혼인할 수 없어요. 하고 싶지 않다고요!”
에리타는 제 오라비인 레노프에게 남매간의 정을 내세워 호소하려다가 이내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그의 말대로 자신과 그 사이에는 분명 ‘선’이 존재하고 있었다. 라카인의 국왕인 레노프에게는 혈육의 정을 앞세우는 것보다는 그의 권위를 떠받들어 호소하는 편이 더 나았다.
“전하, 제발 저를 가련히 여기시고…….”
“제국의 황후가 되는 것이다. 라카인의 귀족과 결혼하는 것보다는 그쪽이 낫지 않겠느냐?”
“제국의 황후가 되면 뭘 하겠어요. 그 야만적이고 미개한 나라의 황후가 되어 무슨 영광을 누리겠냐고요. 게다가 괴물과 살을 맞대고 살라니요. 저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어요.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리면 모를까.”
“에리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찌 그런 흉한 말을 입에 담아! 네 어미와 오라비가 함께 있는 자리란 걸 잊었니?”
에리타가 흥분하여 극단적인 말을 뱉어 내자마자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그녀의 모친이자 선왕비인 카롤리나가 엄하게 쏘아붙였다.
그러자 에리타가 푸른 눈 가득 눈물을 글썽이며 받아쳤다.
“그럼 저더러 어떡하라고요! 그 괴물의 아내가 되어 평생 살라고요? 제가 왜요? 왜 그래야 하는데요!”
“에리타, 철없는 소리는 그만해라. 그렇다고 세로이프 황제의 청혼을 거부할 수 없는 일이 아니냐.”
레노프는 두통을 느끼는 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에리타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이내 뭔가를 생각해 내고는 눈을 빛냈다.
“아! 그 애를 보내면 되잖아요!”
“뭐?”
“별궁의 껍데기 말이에요. 그 계집애를 보내면 되잖아요, 저 대신.”
“별궁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에리타.”
레노프가 고개를 저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에리타는 포기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왜 말이 안 되나요? 어차피 똑같이 생겼잖아요. 그러니 그쪽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에리타, 그만…….”
“게다가 불길한 쌍둥이 따위, 이 기회에 치워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어마마마?”
에리타는 고개를 돌려 카롤리나를 쳐다보았다.
“어마마마와 돌아가신 아바마마께서 그 애의 존재를 숨기느라 지금껏 얼마나 마음 쓰셨어요. 지금껏 단 한 번도 태어난 적 없는 쌍둥이가 태어나는 바람에, 어마마마께서는 또 오죽 마음고생을 하셨고요.”
“…….”
카롤리나는 딸의 말을 들으며 표정을 굳혔다. 이례적으로 쌍둥이를 낳은 사실을 본인의 치부라 여기고 있었기에, 그녀는 그 문제에 있어서는 예민하기 그지없었다.
에리타가 그 점을 놓치지 않고 더욱 눈을 빛내며 설득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까 이 기회에 그 애를 멀리 보내 버리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거예요. 저도 그렇고, 골칫덩어리를 없애 버리는 셈이 되니 두 분께서도 좋으실 테고요.”
“……그럼 너는? 너는 어쩔 셈이니? 그 계집애를 너로 위장하여 보내고 나면, 너는 어쩌려고?”
카롤리나가 에리타의 말에 잠시 흔들리는 듯싶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레노프 또한 모친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할 경우, 너는 평생 이름을 숨기고 네 존재마저 감춘 채 살아야 한다. 세로이프를 속이고 가짜 신부를 보냈다는 사실이 들통나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감당할 수 없어.”
“평생 죽은 듯 살게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그렇게 살면 되잖아요. 괴물과 사느니, 제 이름을 버리고 살겠어요!”
에리타는 모친과 오라비가 지적한 문제를 고민조차 하지 않고 냉큼 대꾸했다.
그 철없고 가벼운 행동에 카롤리나가 한숨을 쉰 것과 동시에, 레노프가 미간을 손으로 누르고는 입을 열었다.
“네 헛소리를 더 이상 못 들어 주겠구나. 이만 나가 보아라, 에리타.”
“전하!”
“국혼은 무조건 진행될 것이다. 그러니 제국으로 가기 전까지 그에 따른 준비를 철저히 하도록 해라.”
“전하! 아니, 오라버니! 정말 이러실 거예요!”
에리타가 발끈하여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레노프는 냉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더니 언성을 높였다.
“그럼 어쩌자는 것이냐! 세로이프에서 먼저 청한 혼사를 거부하자고? 세로이프에서 마음만 먹으면 우리 라카인은 물론이고, 크세안 대륙 전체를 통일할 수도 있어! 그런데 그런 세로이프에 맞서기라도 하자는 것이냐!”
“그러니까 별궁의 껍데기 계집애를…….”
“또, 또 그 헛소리!”
레노프는 철없는 여동생을 향해 화를 냈다. 그러자 에리타가 입술을 꾹 깨물고 그를 노려보다가 그대로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저렇게 철이 없어서야…….”
레노프는 혀를 차며 못마땅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자 카롤리나가 난처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에리타의 말대로 하고 싶군요. 그러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텐데 말입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마마마. 에리타, 저 아이가 과연 제 이름을 버리고 죽은 듯 살 수 있겠습니까?”
레노프는 고개를 재차 흔들었다. 에리타가 꺼낸 말은 솔깃한 얘기였지만, 실현 불가능했다. 그러니 아예 그쪽으로는 관심조차 둘 필요가 없었다.
* * *
쾅!
문이 벌컥 열렸다. 로엘린은 갑작스러운 침입자를 보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
로엘린의 침실에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그녀의 쌍둥이 언니인 에리타였다. 에리타는 마치 제 방이라도 되는 듯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머, 더러워라. 방 상태가 이게 뭐야? 여기가 사람 사는 곳인지, 짐승을 사육하는 곳인지 알 수가 없네. 하긴 사육하는 곳이기는 한 건가? 불길한 껍데기 따위를, 그래도 황족의 피를 이었단 이유로 거두어 먹여 키우고 있으니.”
에리타는 빈정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듣던 로엘린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지나치다고? 내가 뭐, 없는 말이라도 지어냈니? 도무지 앉을 곳이 없잖아. 낡고, 지저분하고. 숨만 쉬어도 나쁜 병균에 전염될 것 같아.”
에리타는 손수건을 꺼내 제 코와 입을 가렸다. 일부러 로엘린에게 보이기 위하여 그러는 게 틀림없었다.
자주는 아니지만, 그녀는 가끔씩 이렇게 로엘린을 찾아와 시비를 걸고 상처 주는 말을 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다거나 화풀이할 대상이 필요할 때 말이다.
아마 오늘도 그런 날이었나 보다.
“너 이리 와서 앉아.”
에리타가 의자에 앉더니 눈짓으로 제 앞의 바닥을 가리켰다. 로엘린은 모멸감이 밀려드는 걸 억누르며 그녀가 가리킨 곳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에리타가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로엘린의 턱을 잡아 좌우로 돌렸다.
“이렇게 똑같은데…… 들통날 일이 뭐가 있다고.”
불만 가득한 투로 에리타가 의미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나 로엘린은 그녀의 말이 무슨 뜻인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조금이라도 빨리 가 버리기를 바랄 뿐이었다.
별궁.
이곳은 로엘린이 태어나서 지금껏 갇혀 살아야 했던 감옥인 동시에 그녀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공간이었다.
그 하나뿐인 공간마저 제 쌍둥이 언니에게 이렇듯 침범당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로엘린의 바람과는 달리 에리타는 자리를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문 앞에 시립해 있던 시녀를 향해 명령까지 내렸으니 말이다.
“침실 안이 왜 이렇게 추워? 당장 불을 피우도록 해. 그리고 다과도 내오도록 하고.”
“예, 왕녀님.”
시녀가 에리타의 말에 냉큼 대답하더니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시녀들이 들어와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로엘린은 에리타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꼼짝도 하지 못했다.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 다리의 감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로엘린의 그런 상태를 신경 쓰지 않았다. 하다못해 로엘린에게 배속되어 있는 시녀들조차 그랬다. 그들은 제 주인이 아닌, 에리타의 명을 수행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무리 추운 겨울날에도 구경하기 힘들었던 장작 한 무더기가 벽난로 안에 들어갔고, 로엘린은 맛을 본 적도 없던 고급스러운 다과가 테이블 위에 한가득 차려졌다.
제 말은 듣는 시늉도 하지 않던 시녀들이 에리타의 명령에는 이렇듯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그 속에서 그들의 주인인 로엘린의 의사를 묻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에리타는 그걸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여겼다.
“다들 나가 봐.”
“예, 왕녀님.”
에리타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시녀들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남은 건 에리타와 로엘린, 쌍둥이 자매뿐이었다.
“……차 맛이 별로네.”
에리타가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불평 섞인 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로엘린은 시선을 내리깐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에리타의 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이렇게 대용물이 버젓이 있는데, 활용할 생각을 안 하다니.”
에리타가 또다시 이해 못 할 말을 중얼댔다. 그러더니 쿠키를 하나 집어 먹는 것인지, 얇은 뭔가가 부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얘, 고개 들어 봐.”
그리고 그녀가 로엘린에게 명령했다. 로엘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에리타를 올려다보았다.
저와 똑같은 얼굴의 여자가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리타 라카인.
그녀는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왕녀였다. 모친의 배 속에서 열 달 동안 함께 있다가 나왔는데, 에리타와 제 처지는 너무나 달랐다.
단지 에리타가 저보다 먼저 세상에 나왔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녀보다 조금 늦게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불길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 너 같은 게 나와 함께 태어난 걸까?”
에리타는 혐오스럽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지금껏 태어난 적 없던 쌍둥이가 하필이면 나랑 같이 태어나다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에리타는 일부러 들으란 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이채가 서린 눈으로 로엘린을 쳐다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어쩌겠어. 나와 피를 나눈 자매인데. 휴우…… 나는 왜 이렇게 마음이 여린지 몰라. 불길한 쌍둥이 따위, 모른 척하면 편한 것을.”
‘차라리 모른 척해 주면 고마울 텐데.’
로엘린은 그렇게 소리 내어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가끔씩 이렇게 찾아와 제 속을 긁어 놓고 가는 제 쌍둥이 언니의 고약한 행동이 지긋지긋했다.
에리타가 뜬금없이 화제를 돌린 건 바로 그때였다.
“참, 너는 모르고 있겠구나?”
“……예?”
“세로이프 황제가 청혼서를 보낸 것 말이야.”
“아아…… 그런가요? 축하드립니다.”
로엘린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다가 뒤늦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세로이프 제국의 황제가 청혼서를 보냈다면, 그 당사자는 분명 에리타일 터였다.
오늘은 그걸 자랑하려고 온 것일까.
크세안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제국의 황후가 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로엘린의 예상과 달리 에리타는 뜻밖의 반응을 내보였다.
“글쎄……. 누가 축하를 받게 되려나.”
“……?”
로엘린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에리타가 자리에서 일어서다 말고 로엘린을 내려다보더니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 몸을 돌려 나가 버렸다.
“대체 무슨 말이지?”
로엘린은 에리타가 나가고 난 뒤, 문 쪽을 돌아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대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아니,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 * *
그러나 로엘린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대답을 알게 되었다.
“……그, 그게 무슨.”
로엘린의 푸른 눈이 크게 뜨였다. 그리고 그녀와 비슷한 색의 눈동자가 냉담한 빛을 띤 채 로엘린을 응시했다.
“말 그대로다. 세로이프 제국으로 떠나거라. 에리타의 대역으로서, 세로이프 황제의 아내가 되어라.”
“……전하.”
로엘린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갑작스러운 얘기를 들은 터라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놀란 속내를 추스른 뒤, 고개를 저었다.
“가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제가 어찌 언니의 대역이 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언니를 대신하여 세로이프 황제의 아내가 되라니요. 그럴 수는 없습…….”
“네가 지금, 내 말을 감히 거역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레노프가 그녀의 말을 끊고 차갑게 물었다. 그러자 로엘린이 입술을 파르르 떨다가 이내 꾹 깨물었다.
사적으로는 남매였지만, 단 한 번도 그에게서 동생 대접을 받은 적 없었다. 지금도 레노프는 오라비가 아닌, 라카인의 국왕으로서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갑작스럽게 자취를 감추어 버린 쌍둥이 언니를 대신하여, 세로이프 황제의 가짜 아내가 되라는 명령 말이다.
‘겨우 이 말을 하려고 부른 거였어?’
딱히 어떤 기대를 품었던 건 아닌데도 허탈감이 밀려들었다. 로엘린은 그런 제 모습이 우스워서 쓴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삼켰다.
한밤중에 갑자기 국왕, 레노프의 부름을 받았다. 그 바람에 별궁의 시녀들이 깜짝 놀라 우왕좌왕했다. 제 시중 한 번 제대로 들어 본 적 없으니, 그들이 갈팡질팡하며 어찌할 바를 몰라 한 건 당연했다.
어쨌든 간신히 옷단장을 마치고 시종장의 뒤를 따라 본궁으로 들어온 게 조금 전의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 오라비가 이런 얘기를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쌍둥이 언니의 대역이 되어 세로이프 제국의 황후가 되라니.
에리타에게 청혼한 사내를 속이고 그의 아내가 되라니.
그녀는 비참한 속내를 곱씹으면서도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어찌 국왕 전하의 명을 거역할 수 있겠는지요. 다만, 눈앞의 문제를 감추고자 눈가림 격의 대책을 내놓았다가 자칫 그것이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건 아닌가 하여…….”
“참으로 건방지구나.”
로엘린의 말을 끊으며, 레노프가 차갑게 말했다. 그녀는 당황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로엘린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에게 그런 걱정을 하라고 허락한 적 없다. 너 따위가 감히 지금 내 명령을 한낱 눈가림이라 비하하는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라…….”
로엘린은 변명을 하려고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곧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무슨 말을 더 할까.
제 얘기를 들을 생각도 없는 사람에게.
나 ‘따위’에게는 그런 걸 허락도 한 적 없다는데.
로엘린의 긴 속눈썹이 아래로 드리워졌다.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레노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 순간, 로엘린이 다시 시선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전하의 명에 따르겠습니다.”
“잘 생각했다. 그렇게 대답하니 얼마나 좋으냐. 가뜩이나 에리타 때문에 골치가 아픈 상황인데.”
레노프가 찌푸렸던 미간을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엘린은 그 말을 듣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이만 물러가도 되겠는지요.”
“그러도록 해라. 시간이 많이 늦었구나. 아, 그리고 에리타의 궁으로 거처를 옮기는 걸 비롯해서 여러 문제에 대해서는 시종장의 말에 따르도록 하고.”
“예, 전하.”
로엘린은 고개를 숙여 그에게 대답했다. 그러자 레노프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린 뒤,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그대로 멈춰 서서 다시금 뒤를 돌아보았다. 레노프가 자리에서 일어서다 말고 로엘린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내게 할 말이라도 있느냐?”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로엘린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 이름을 아시는지요?”
“네 이름? 내가 네 이름을 알아야 하느냐? 이제 넌 그저 ‘에리타’일 뿐이다.”
레노프가 이맛살을 좁히며 반분했다. 로엘린은 소리 없이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그 대답으로 충분하네요.”
“뭐? 뭐가 충분하다는…….”
그녀는 레노프의 말을 다 듣지도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로엘린의 표정에서 후련한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 됐어.”
로엘린은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을지 모르는 미련의 잔재마저 전부 털어 낸 사람처럼, 한결 홀가분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차라리 잘된 일이야. 이렇게 해서라도 이 커다란 감옥을 벗어날 수 있다면.’
그녀는 속으로 되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