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42)

외전 재회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는 조용한 카페 안. 밖이 보이는 커다란 창가 자리에 앉은 한 앳된 여인이 이어폰을 낀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톡톡톡-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초조한 듯 손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때 그녀가 귀에 낀 이어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목표물, 접근 중.

그녀는 테이블을 두드리던 것을 멈추고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머리카락을 손으로 다시 한번 매만지고, 입은 코트도 한번 더 매만졌다. 긴장한 탓인지 입술이 말라 가방에서 립밤을 꺼내 톡톡 입술에 두드렸다.

-목표물 도착.

그 소리를 끝으로 그녀는 이어폰을 빼냈다.

딸랑~

곧 카페 문에 달린 종에서 소리가 울려 퍼지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일어나 손을 들어 올렸다.

“아저씨! 여기예요!”

그녀, 민서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 * *

엘 루이스. 28살의 영국계 미국인인 그는 한 달 전 미국에서 한국으로 파견 온 회사원으로, 색이 옅은 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지녔다. 그는 눈앞의 소녀를 만나는 그날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출근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빠아앙 하는 커다란 클랙슨 소리가 들려왔고, 한 소녀가 그 앞에 멈춰 있었다. 그는 그 순간 본 소녀의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처연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엘은 왜인지 알 수 없으나 그녀를 구해야 한다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이미 품속에 그 소녀가 있었다. 갑작스런 일에 소녀는 놀라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엘은 그런 그녀를 다독였다. 몸은 차가웠고 어딘지 모르게 얼이 빠져 있었지만 소녀의 검은색 눈동자는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엘은 그 순간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이상하게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분명 처음 본 낯선 나라의 낯선 아이인데.

소녀는 자신을 보더니 곧 투명한 눈물을 흘렀다. 엘은 우는 그녀를 달래느라 한참 진을 빼야 했다.

잠시 후 울음을 그친 소녀는 보답을 하고 싶다며 옷깃을 잡아왔다. 본래라면 그냥 지나쳤을 텐데, 간절한 표정을 보자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엘은 출근을 해야 했기에 그날 그녀에게 명함을 주고 헤어졌고, 꼭 보답을 하고 싶다는 그녀의 연락으로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엘은 보답을 바라고 그녀를 구해 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몸이 움직였을 뿐. 거기다 아직 어린 학생에게 보답을 받는 것도 괜히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보답을 하고자 하는 소녀의 의지가 워낙 강해 엘은 차라리 얼굴을 보고 거절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나왔다.

엘은 눈앞에 소녀를 보며 말했다. 민서라고 했던가. 영어도 잘해서 한국말을 잘 못 하는 그임에도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었다.

“굳이 이럴 필요는 없는데.”

“아니에요. 아저씨 아니었으면 저 죽을 뻔했는걸요. 생명의 은인인데 아무 보답도 하지 않으면 그건 죽일 놈이라구요.”

“죽일 놈까지야…….”

엘은 소녀가 좀 극단적인 게 아닌가 싶었지만 생명의 은인은 맞으니 또 맞는 말 같기도 했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정말 감사해요.”

민서의 말에 엘은 왠지 머쓱해졌다. 하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크흡, 그래, 그래도 다음엔 조심해서 다녀. 그러다 사고 나면 부모님 걱정하실라.”

“아…….”

민서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엘은 왠지 다급해졌다. 아무래도 모르는 사람이 이래라저래라 하면 좀 기분 나쁘겠지?

“아, 미안. 내가 괜히…….”

“괜찮아요. 그냥…… 저, 부모님 안 계시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뭐랄까…… 기뻐서요.”

“아…….”

민서의 말에 엘은 왠지 좌불안석이 되어버렸다. 괜히 말을 잘못 꺼냈다. 엘은 현재 부모님이 모두 살아 계시고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양부모님께 입양됐다가 폭력에 못 이겨서 집을 나왔어요. 그래서 죽으면 장례식도 없이 길가에서 죽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나고. 더 고마워서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어요.”

엘은 그 말에 더는 뭐라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상하게 가슴이 쓰리고 속이 상했다. 모자란 거 하나 없어 보이는데 그런 과거가 있다는 게 안타깝고 괜히 안쓰러웠다.

“밥은 먹었어?”

“아, 아직요.”

“좋아.”

엘이 일어나며 말했다. 민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은 부담을 내려놓았다. 이런 아이에게는 오히려 자신이 거절하는 게 부담이고 상처가 될 것이다.

“보답한다고 했지?”

“네!”

“그럼 맛난 거나 사. 나 한국 잘 모르니까.”

“네!”

민서가 씩 웃었다. 그 모습에 엘은 기분이 좋아졌다. 웃는 게 참 예뻤다.

“여기예요! 얼른 오세요, 아저씨!”

민서가 뒤를 돌아 천천히 오고 있는 엘을 채근했다. 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어, 이건?”

“떡볶이에요. 혹시 드셔 보셨어요? 정말 맛있어요!”

엘은 민서가 가리킨 떡볶이를 보았다. 민서는 그의 표정에 얼굴이 흐려졌다.

“아…… 혹시 떡볶이 싫어하세요? 죄송해요, 제가…….”

“아, 아니야. 나 떡볶이 엄청 좋아하거든. 어떻게 알았나 싶을 정도였다니까. 진짜 좋아해.”

“정말로요?! 다행이에요!”

엘은 맛있는 냄새를 맡으며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저씨, 여기 떡볶이 2인분이랑 어묵 3개 주세요!”

민서가 자연스럽게 주문하자, 포장마차 주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웃더니 떡볶이를 그릇에 담아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빨간 떡볶이를 보자 엘은 군침을 삼켰다. 그는 떡볶이를 한입 먹고는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매운데도 잘 드시네요? 걱정했는데.”

“나 매운 거 좋아해. 정말 맛있어.”

“다행이에요.”

엘은 정말 맛있게 음식을 먹어치웠다. 금발의 외국인이 떡볶이를 먹는 모습이 신기해 주변 사람들이 힐끗 쳐다봤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떡볶이를 먹었다. 그 모습을 민서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말 잘 먹네.’

엘라임 그도 정말 먹는 걸 좋아했다. 정령왕 주제에. 그리고 언제나 기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며 매번 타박이나 했지, 이렇게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정령왕 주제에 웬 꼬치구이냐 하며 뭐라고 했는데, 그러지 말 걸 그랬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아, 나 혼자 너무 먹었네. 너도…….”

엘은 음식을 먹다 자신 혼자만 먹고 있는 것 같자 민서에게도 음식을 권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툭-

민서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 방울이 방울져 떨어졌다.

“…….”

그 모습을 본 엘은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그날, 울고 있던 그녀를 봤을 때처럼. 그녀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두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욱신.

엘은 순간 가슴이 아팠다. 도대체 왜 저리 가슴 아프게 우는 걸까. 엘은 자신도 모르게 민서의 뺨에 손을 대 눈물을 지웠다.

“왜 울어?”

“울었어요, 나?”

“울지 마.”

“안 울어요.”

민서의 두 눈에서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나 따뜻한 목소리, 따뜻한 눈빛. 민서는 도저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아, 너무 매워서 그런가 봐요.”

“…….”

민서가 떡볶이를 찍어 입에 먹으며 말했다.

“정말 매워요.”

“…….”

“정말.”

민서는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엘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마 잊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있지.”

엘은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을 보다 시선을 돌려 민서를 보았다. 더 이상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붉어진 눈가가 눈물을 흘렸음을 말해주었다.

엘은 왠지 그런 그녀를 두고 떠날 수 없었다.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한국에 대해 아는 게 없어. 그래서 도움을 주었으면 해.”

“도움이요?”

“생명의 은인이잖아. 구해 준 보답으로.”

자신도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엘은 왠지 이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래 봐야 며칠이니까. 이대로 가기엔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서울 가이드 좀 해줘. 어때?”

“물론이에요! 저한테 맡기세요!”

민서가 정말 기쁜 듯 웃었다. 그 모습에 엘은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아, 나 그리고 아저씨 아니야. 엘이라고 불러.”

“엘.”

풋 하고 민서가 웃었다.

* * *

엘과의 다음 약속을 잡고 헤어진 민서는 환한 얼굴로 다시 포장마차로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아주 좋아 죽으시네요.”

그때 포장마차 주인이 실실 웃으며 다가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에 민서는 익숙한 듯 미간을 좁혔다.

“저 사람이 찾으시는 분이세요? 엄청 잘생기긴 했더라구요. 우리 보스가 한 얼빠 하시긴 하지만.”

“죽을래?”

민서의 말에 남자는 깨갱 했지만 곧 그 유쾌한 목소리로 그녀를 놀려댔다.

“갑자기 L프로젝트 중단하고 모이라고 할 때부터 이상하긴 했는데, 이런 일이었다니. 보스도 인간이었네요. 아앗!”

그때 또 다른 남자가 그의 머리를 때렸다.

“야, 왜 때려?”

“보스께 무슨 말버릇이야?”

남자는 곧 민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남자들은 최유진과 이민혁. 노란 머리에 포장마차 앞치마를 입은 게 최유진이고, 검은 정장을 입고 단정히 생긴 이가 이민혁이다.

모두 민서의 사람들. 우연치 않게 과거로 돌아온 민서는 돈의 필요성을 느끼고 돈을 모았다. 돈이 되는 곳은 투자를 하지 않은 데가 없었고, 거기엔 사람도 포함되었다. 민서는 장학 재단을 만들어 자신의 사람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엘라임, 엘을 찾기 위함이었다.

L프로젝트라 불린 이 프로젝트는 민서가 가장 먼저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막막했다. 태어는 난 건지 아니면 태어났으나 죽은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야말로 바다에서 작은 바늘을 찾는 일이었다.

하지만 민서는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마법이 자신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분명 그가 이곳에 있을 거다. 그 희망 하나로 민서는 지금까지 엘라임을 찾아왔다. 그리고 엘라임을 찾은 지금, 그를 찾기 위한 L프로젝트는 다른 프로젝트로 변경되었다.

이름하여 ‘엘 루이스를 사로잡아라!’.

이는 물론 장난기 많은 최유진이 붙인 거지만, 실상 내용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어떻게든 엘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이미 그에 대한 조사는 모두 마쳤다. 그가 좋아하는 것, 그의 취미, 그가 사는 곳, 회사 등. 민서는 그에 대해 모든 걸 알았다. 그리고 그의 옛 애인까지도. 그때 민서는 노트북 하나를 부쉈지만, 게이가 아닌 것만도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뭐, 지금은 애인이 없으니까. 만약에 애인이 있었다면…… 민서는 그다음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부하들은 그녀가 할 행동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다행히 그러한 사태는 없었다.

아무튼 이번 포장마차도 모두 그녀의 설계. 그가 좋아하는 게 떡볶이임을 알고 포장마차를 꾸며 이곳에 왔다. 남는 건 돈밖에 없으니 민서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역시 보스의 눈물 작전은 끝내준다니까. 백이면 백 다 넘어올 거예요.”

“간다.”

민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최유진은 시크한 보스의 모습에 툴툴거렸다. 그렇지만 조금 전에는 그도 민서가 우는 모습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렇게 우는 거 처음 봤는데…….’

최유진은 깨끗이 빈 떡볶이를 보았다. 누구보다 매운 걸 좋아하는 건, 바로 민서였다.

“부디 행복해지시라구요, 보스.”

최유진은 코를 손가락으로 훔치고는 얼른 포장마차를 정리했다. 보스의 행복을 위해서 바로 다음 작전으로 들어가야 했다.

* * *

[엘, 다음엔 경복궁에 갈 거예요.]

[경복궁?]

[옛날 왕이 살던 성이에요. ^^]

[오, 성 좋지!]

[언제 시간 되세요?]

“야, 애인 생겼냐?”

회사 안. 민서와 문자를 주고받던 엘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와 함께 한국으로 온 케이슨이 음흉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엘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딱 봐도 견적 나오는구먼. 누구야? 한국인?”

“그냥 아는 애야.”

“야야, 설마 미성년자 건드린 건 아니겠지? 여기서도 불법이다, 그거?”

“미성년자 아니야. 이제 졸업도 했는데.”

그 말에 케이슨의 눈꼬리가 반달처럼 곱게 휘었다. 말을 하는 엘의 표정이 부드럽게 변했기 때문이다. 케이슨은 엘과 오랜 친구 사이였다. 엘은 겉보기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해 보이지만 실상은 꽤 차가운 성격이었다. 누구에게나 다정하다. 그건 그에겐 누구나 같다는 소리다. 그것이 사랑하는 연인이라도.

그것을 못 견뎌 한 여자들은 엘과 오래가지 못했다. 케이슨은 그런 모습을 곁에서 많이 봐왔다.

“그냥 좀 안쓰러워.”

“너 그거 동정이다.”

“동정인가……?”

케이슨이 미간을 좁혔다. 어디서 또 저 다정한 마스크에 속아 넘어간 여자에게 결국 상처받을 엘이 걱정되었다. 그로서는 모르는 여자보다 엘이 더 걱정되었다.

“괜히 어설프게 대하지 마라. 너, 마음도 없는데 그러는 게 더 잔인한 거야. 너한테도 그렇고. 어차피 다시 본사로 돌아갈 텐데.”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다행이고.”

엘은 괜스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포장마차 이후로 엘은 민서와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처음엔 그저 그 아이가 슬퍼하지 않기를, 즐거워하기를, 웃길 바라서 가이드를 청했다.

그런데 도리어 웃은 건 자신이었다. 아이의 웃음이 자신을 웃게 만들었다. 이건 동정인 걸까. 비 맞은 강아지를 보는 듯한 그런 마음일까. 엘은 미간을 좁혔다. 도통 자신의 이런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저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차나 쓰고 오늘 갈까.’

엘이 그렇게 마음먹고 민서에게 문자를 보낼 찰나였다.

“모두 주목!”

부장 레이건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사무실의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오전 근무만 합니다.”

“오오오!”

“이야, 웬일이래요?”

“몰래 카메라 아니야?”

“암튼 그렇게 알고 다들 그만 돌아가 봐.”

“아싸!”

“설마 이거 나중에 딴말하시는 거 아니죠?”

케이슨의 말에 부장이 팔짱을 끼고 엘을 보더니 말했다.

“그런 일은 없다. 그리고 엘은 잠시 이리 오게.”

“아, 예.”

“와, 이게 웬일이래?”

케이슨이 놀랍다는 듯 말하며 얼른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엘은 자신을 부르는 부장에게로 다가갔다. 부장은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어이, 엘.”

“예, 부장님.”

“자네 혹시…….”

그 순간 부장이 무언가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흠칫 하며 몸을 떨었다.

“부장님?”

“아, 아닐세. 아니야. 크흡. 아, 다른 게 아니라 맡고 있는 일은 준비 잘되고 있지?”

“물론입니다.”

“그래. 그럼 들어가 봐. 얼른 들어가야 해.”

“예?”

엘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쫓기듯 서둘러 사라지는 부장의 모습에 물어보지 못했다.

“왜 저러지?”

아무튼 시간이 비게 된 엘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문자를 쳤다.

[오늘 괜찮아.]

[정말이죠! 아싸! 잘됐어요! ^^]

엘은 씨익 웃으며 핸드폰을 웃옷 주머니에 넣었다.

* * *

탁.

핸드폰을 내려놓은 민서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최유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게 좋으세요? 갑자기 LS그룹 주식을 사신다 하셔서 뭔가 했는데, 이런 극히 사소한 일일 수가…….”

“보스에게 깐족대지 마라, 유진.”

민혁이 그런 최유진의 귓불을 잡아당겼다.

“아야야, 야, 이민혁. 넌 맨날 나한테만 이래!”

“네가 항상 깐족대니까.”

“이씨!”

“그럼 나갔다 올게.”

민서가 씨익 웃으며 일어섰다. 최근 엘과 만난 이후로 그녀의 기분은 항상 최고조였다. 덕분에 유진은 보스의 보복성 감봉을 피할 수 있었다. 민서가 나풀나풀 사라지는 모습에 최유진은 혀를 찼다.

“딸 키워 봐야 소용없다더니.”

“보스가 네 딸이냐.”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유진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민서가 웃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그들은 언제나 완벽한 민서가 꼭 인간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어린 나이가 무색하게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은 사람을 주눅 들게 하고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그녀가 예측한 미래는 귀신같이 들어맞았다. 민서를 최측근에서 수행하는 최유진과 이민혁은 민서가 맞춘 여러 사건을 직접 목격하였기에 더욱 그녀가 인간이 맞는 건가 싶을 때가 많았다. 그런 그녀가 최근 더없이 사람다웠다. 그게 두 사람은 좋았다.

“잘되겠지?”

“보스니까.”

“맞아, 보스니까. 이번 일도 잘될 거야.”

언제나 모든 일을 성공시키는 미다스의 손. 민서라면 원하는 것을 꼭 얻을 것이다. 이번엔 그녀가 평생을 원하던 것이니까.

* * *

“와! 이게 성이야?”

경복궁에 도착한 엘은 경복궁의 모습에 놀람을 표현했다. 외국의 거대한 성은 아니지만 웅장한 멋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서는 미소를 지었다. 그를 만날 때마다 과거의 엘라임이 떠올랐다. 그도 처음 보는 거에 이렇게 놀라며 기뻐했는데. 왠지 지끈거리는 가슴에 민서의 미소는 씁쓸하게 바뀌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엘이 그런 민서를 보더니 걱정스럽게 물어왔다. 이렇게 다정하게 다른 목소리로, 다른 얼굴로 그와 똑같이 물어오니 민서는 심장이 턱 멈추는 것 같았다. 다시 만나서 너무나 좋았다. 행복해서 죽을 만큼. 이 행복이 너무 무서웠다. 사라질까 봐.

“아뇨, 좀 추운 것 같아서요.”

“추워? 잠시만, 내가 따뜻한 거 사 올게. 잠시만 기다려.”

엘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 민서에게 둘러주고는 근처 따뜻한 커피를 파는 곳으로 뛰어갔다.

말릴 새도 없이 사라지자 민서는 허탈한 미소를 짓고 말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가 둘러준 옷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에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녀는 그의 옷을 더욱 끌어당겼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면 얼마나 좋을까. 행복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때였다.

“따뜻한 핫팩 있어요. 따뜻한 핫팩.”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민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핫팩을 파는 이와 눈이 마주쳤다.

“핫팩…… 너, 너는!”

민서는 미간을 좁혔다. 허름한 옷차림을 한 상대는 자신을 알아보는 것 같았다. 도대체 누구지? 그 순간 남자가 민서에게 달려들었다. 민서는 달려드는 그의 손길을 피해 뒤로 물러섰다.

“뭐 하시는 거죠?”

“너, 너 이년이!”

“말 함부로 하지 마시죠.”

민서의 표정이 낮게 가라앉았다. 그러자 그녀의 기세에 흠칫한 남자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곧 기세등등하게 그녀를 향해 손가락을 휘둘렀다.

“너, 너 그 계집년 맞지! 도망간 년!”

“아.”

그제야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정말 아예 잊고 살아서 몰랐다. 양아버지. 어릴 적 자신을 폭행했던 그다. 민서는 어릴 적에 양부모 집에서 뛰쳐나와 센터에서 살았다. 이후 돈을 벌어 센터에서 나와 집을 마련해 살고 있다. 너무나 오래된 기억이라 그녀는 그를 떠올리는 데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양아버지가 이죽거리며 민서의 위아래를 훑었다.

“돈 좀 버는 집에 간 모양이다?”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지?”

“이게 어디서 부모한테! 키워놨더니 도망을 가! 돈 한 푼 내지 않고!”

딱 보니 견적이 나왔다. 아니, 그러고 보니 과거에도 그랬다. 성공했더니 뻔뻔하게 찾아와 돈을 요구했었지. 그 뻔뻔함은 지금도 여전한가 보다. 솔직히 복수도 아까웠다. 그들에게 쏟는 신경 한줄기도 아까워 아예 그들의 존재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러니 어떻게 사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보아하니 사업 실패 후 술만 먹다가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하니 뭐라도 팔러 나온 것 같다.

“가정 폭행으로 신고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아세요.”

“뭐, 뭐! 이년이! 버르장머리 없이! 감히 어른한테!”

남자의 입에서 잔뜩 술 냄새가 났다. 이러니 핫팩이 팔리겠어? 민서는 어이가 없었다. 이런 실랑이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분일초도 아까운 마당에.

“이익!”

남자가 분에 못 이겨 달려들었다. 민서도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손을 쓸 생각으로 움직였다.

“끄악!”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엘이었다. 엘이 남자의 손목을 세게 쥐고 비틀었다. 그러자 남자가 괴성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으으으!”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이익! 뭐라는 거야! 이 양키 놈이! 난 저년 아버지야!”

“아버지?”

한국말을 잘 모르지만, 아버지라는 단어를 알아들은 엘이 미간을 좁히고 민서를 보았다.

“정말이야?”

“아니에요.”

“이게!”

남자가 달려들었으나 엘이 그의 팔을 꺾어 올렸다. 그리고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거기 경찰서죠?”

“너, 너 뭐 하는 거야!”

영어는 잘 모르지만 낌새를 눈치챈 남자가 얼굴이 새파래져 얼른 엘을 밀치고 도망갔다. 그 모습에 엘은 표정을 굳히고 핸드폰을 내렸다. 실제로 경찰서에 전화한 것은 아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기에, 혹여 민서가 휘말릴까 부르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아요.”

그러나 엘은 그렇지 않았다. 민서는 어딘지 모르게 위태로워 보였다. 그게 엘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은 민서의 손을 꼭 잡았다. 차가웠다. 민서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았지만 이 차가운 손처럼 이미 모든 것이 식은 게 아닐까 싶었다.

엘은 민서의 손을 잡아당겨 그녀의 작은 몸을 제 품에 안았다. 민서의 눈이 동그래졌다.

“엘.”

“내가 추워서. 괜히 옷 줬다.”

엘이 민서를 꼭 껴안았다. 작은 몸이 제 품에 딱 알맞게 들어오자 엘은 이상하게 마음이 진정되었다.

“엘…….”

민서는 그런 엘을 물끄러미 보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양아버지의 일은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의도한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양아버지가 도움이 될 일도 있구나 싶었다. 평생에 도움이 안 될 줄 알았는데.

민서는 엘을 끌어안았다. 더 그가 좋아졌다.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그가 자신을 안쓰럽게 여기는 것은 알고 있다. 그렇게 자신이 유도했으니까. 하지만 욕심이 들었다. 자신을 바라봐 주길, 자신을 사랑해 주길. 그의 마음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런 마음이었구나, 엘라임. 그토록 오래.’

민서는 그렇게 오래도록 엘을 껴안고 있었다.

* * *

“젠장, 대체 뭐야!”

민서의 양아버지는 손목을 주무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곧 그의 얼굴에 비열함이 떠올랐다. 민서가 나간 뒤 그는 솔직히 쓸데없는 짐을 줄였다 생각했다. 돈도 안 들고 신경 쓸 일도 없고. 애초에 그녀가 나간 뒤 실종 신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잊고 살았다. 애초에 그의 기억 속에 민서는 없었다.

“고년, 제법 비싼 옷을 입고 있었지?”

사업 실패 이후로 가세는 기울어 집안에선 시끄러운 마누라가 돈타령을 해대고, 아들놈은 가출해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다.

“한몫 단단히 뜯어내야지.”

그가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그의 앞에 누군가 턱 하니 섰다.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당신 뭐야?”

이민혁이었다. 그는 민서의 연락을 받고 바로 남자를 찾아왔다. 민서는 양아버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 지금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그녀가 돈 좀 벌었다는 걸 안 이상 가만히 둘 그가 아니었다. 민서는 분명 양아버지가 돈을 뜯으러 그녀 앞에 나타날 거라 생각했다. 그 생각은 적중했다. 남자는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같이 가지.”

“뭐, 뭐야!”

남자 두어 명이 그를 붙잡았다. 그는 당황해 소리쳤지만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어디론가 끌려갔고, 이후로 그의 소식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보스, 접니다.”

-그는?

“처리했습니다. 바다에서 열심히 돈 벌다 나오겠죠.”

민혁은 미소를 지었다. 민서와 닮은 미소였다.

-그에겐 죽음조차 아깝지. 평생 열심히 일 좀 해보라그래.

전화기 너머로 민서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 * *

어느덧 앙상한 나뭇가지에 작은 새순이 돋기 시작했고, 매서웠던 바람은 미약하나마 따스한 봄기운을 품었다. 그에 따라 엘, 그의 마음에도 온기가 감돌았다. 민서와 만나 서울을 구경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엘은 민서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녔다. 서울은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볼거리가 많고 재미있었다.

민서는 나이는 어리지만 생각이 깊고 그를 잘 배려해 주었다. 그가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파악했다. 마치 오랫동안 안 사람처럼. 엘은 자신의 시선이 점점 서울의 광경이 아니라 민서에게로 향하는 것을 깨달았다. 안쓰러웠던 마음은 어느새 그녀를 생각하게 되었고, 우연히 잡았던 손은 더 잡고 싶고 놓치고 싶지 않았다.

“연인 아니라며?”

다디단 꽃향기가 줄줄 새어 나올 것 같은 엘의 모습에 케이슨이 혀를 찼다.

“연인이라…….”

“뭐야, 아직 안 사귀어? 난 또 이미 사귀는 줄 알았는데.”

케이슨의 말에 엘은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동안 가이드를 명분으로 민서와 만나왔다. 이후에는 솔직히 가이드인지 그냥 데이트인지 알 수 없었다. 이게 사귀는 걸까. 마음이 들뜨고 진정되지 않았다. 계속 다음 만남이 기대되었다.

“너 그러고 보니 곧 출장인 거 알아?”

“출장? 아, 그렇지.”

“아, 그렇지는. 연애하느라 출장 가는 거 잊지 마라.”

“안 잊어.”

“뭐야.”

“뭐?”

케이슨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연애한다는 부분에선 태클이 없네?”

“…….”

“얼른 고백하고 사귀어. 그러다 다른 놈이 채간다?”

다른 놈? 순간 엘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그 모습에 케이슨이 또 실실 웃었다.

‘얼, 이거 이놈 제대로인데?’

“나이도 어리고 한국인이면 다른 한국 사람이랑 더 맞을 거 아니야. 그러다 훅 간다.”

검은 머리, 검은 눈. 이상하게 갑자기 기분이 확 상했다. 왠지 누군가에게 뺏긴 느낌마저 들어 엘은 입매를 비틀었다.

“그럴 일 없어.”

엘은 단호히 고개를 젓고는 핸드폰을 켜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그 문자의 상대는 당연히 민서였다.

* * *

“하암.”

민서가 깊게 하품을 내뱉자 엘이 그녀를 보며 웃었다.

“졸려?”

민서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연신 고개를 꾸벅거리고 눈도 풀려 있었다. 두 사람은 오늘 서울 외곽으로 드라이브를 하고 성곽길을 걸었다. 장소가 장소다 보니 그 탓 돌아오는 길인 지금, 민서는 지쳐 잠이 쏟아졌다.

엘은 노곤히 잠에 빠져드는 민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웃음소리에 민서는 흘깃 그를 바라보았다. 캄캄한 어둠 속, 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불빛에 그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왜 웃어요?”

“아니, 그냥.”

“재미있었어요?”

“응, 산책하는 거 좋은 것 같아. 아무래도 일만 하니까 이렇게 걸을 일이 없거든.”

“그럼 다음에도 가요.”

“그럴까? 아, 거긴 어때?”

“어디요?”

민서는 졸린 와중에도 계속 그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 그 모습이 또 귀여운 엘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덕수궁인가, 거기.”

“덕수궁도 괜찮죠.”

“거기도 산책로가 있더라고. 돌담길인가?”

“……덕수궁 돌담길이요?”

민서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러나 운전 중이던 엘은 때마침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민서는 왜 하필 그 많고 많은 돌담길 중에 덕수궁인가 싶었다.

“정말 가고 싶어요?”

“응. 멋있다고 하니까.”

“별거 없는데.”

“가기 싫어?”

“…….”

엘이 조금 시무룩해하자 민서는 고개를 저었다. 덕수궁 돌담길에는 괴담이 있다. 연인이 걸으면 헤어진다는. 하지만 괴담은 괴담일 뿐 아닌가.

‘그리고 연인은 아니니까…….’

민서는 조금 자조적으로 웃었다. 오랜 시간이 걸려 이제야 만났다. 막연히 기다릴 때는 언제고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혹여 만나게 되면 느긋하게 기다리자고. 기억이 없는 그에겐 자신은 낯선 이일 뿐일 테니 천천히 가자고.

그런데 마주하니 애가 닳아 없어질 것 같았다. 차라리 보지 못했다면, 찾지 못했다면 눈앞에 놓인 케이크를 먹지 못해 안달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혹여라도 밀어붙여 이 관계를 망가뜨리는 일은 없길 바랐다.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 그저 그대로, 자연스럽게.

비록 좀 더 그와 가까워지기 위해 상황을 움직였지만 그건 말 그대로 만나기 위함이지, 만난 이후로는 순수하게 그를 만났다. 온전히 그 마음을 갖길 바랐으니까.

민서는 돌담길에 대해 조금 꺼림칙했던 마음을 떨쳐 버렸다. 외국인인 엘이 그런 이야길 어찌 알겠는가. 엘에게 돌담길은 그저 길에 불과할 것이다.

“다음에 가요.”

“정말? 괜찮은 거지?”

“네. 다음에.”

다음이라는 게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하자. 민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는 차는 계속 움직였다. 지친 민서는 더 버티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 뒤 차는 곧 민서가 사는 주택 앞에 섰다. 엘은 차를 그녀의 집 앞에 대고 옆을 보았다. 아직도 민서는 잠에 빠져 있었다.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엘은 깨우지 않고 그렇게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전봇대 불빛으로 민서의 하얀 얼굴이 반짝였다. 엘은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름다웠다. 미국에도 아름다운 사람은 많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시선을 앗은 이는 없었다.

‘연인…….’

인식하자마자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엘은 저도 모르게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고요한 차 안은 온통 엘의 심장 소리로 가득 찼다. 새파란 애송이도 아닌데 주체할 수 없는 기분에 엘은 손 부채질을 했다.

“으음.”

“……!”

지레 놀란 엘은 핸들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다 다시 잠잠해지자 엘은 고개를 들고 민서를 보았다. 다행히 그녀는 곤히 자고 있었다. 다만 안전벨트가 불편한지 몸을 뒤척거렸다.

‘불편하니까, 그러니까 푸는 거야.’

엘은 조심히 민서에게 다가가 그녀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조이던 것이 풀어지니 민서의 입에서 옅은 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미치겠네.’

의식을 하니 이전에 아무렇지 않은 것들이 모두 의식이 되었다. 엘은 자신도 모르게 가만히 민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느라 머리가 넘어가서 뽀얀 이마가 드러났다. 엘의 고개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쪽!

그의 입술이 민서의 고운 이마에 닿았다 떨어졌다. 엘의 얼굴은 이미 시뻘게졌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이미 그의 마음속 브레이크는 뽑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붉은 입술에 내려앉을 찰나, 그녀의 입술이 열리며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엘라임.”

“……!”

“가지 마…….”

또르르.

그녀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엘은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듯 굳어졌다.

‘엘…… 라임?’

민서는 계속 눈물을 흘리며 엘라임이란 이름을 되뇌었다. 엘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뜨겁게 타올랐던 심장은 어느새 차갑게 식어버렸다.

“엘…… 라임.”

도대체 누구지? 누구길래 그렇게 아련하게 부르는 거지? 엘의 얼굴이 굳어갔다. 사실 그는 계속 신경이 쓰이던 것이 있었다.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처음 민서는 자신을 보자마자 울었었다. 포장마차에서도 자신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 외에 때때로 그녀는 자신이 아닌, 자신 안의 누군가를 보듯 애달픈 표정을 짓곤 했었다. 당시 엘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그녀가 안쓰러웠고 안타까웠을 뿐,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아니야.’

그녀가 보는 건 내가 아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엘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은 것이 느껴졌다. 자신은 누군가의 대역은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너무 이상했다. 마치 그녀는 자신을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누군가를 대하듯. 엘의 표정은 이제 더할 나위 없이 일그러졌다.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자신이 대역이라는 사실이 몹시도 분하고 화가 치밀었다.

그때 민서가 깨어났다. 잠에 취한 듯 그녀는 몽롱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다시 한번 그 낯선 이름이 흘러나왔다.

“엘…… 라임?”

“나는 엘라임이 아니야.”

“……!”

민서의 눈이 커졌다. 그제야 잠에서 완전히 깬 것이다. 민서가 뭐라 말하려 했으나 엘이 먼저였다.

“난 누구의 대역이지?”

“아니에요, 그건.”

“날 보고 있는 게 맞아?”

엘의 말에 순간적으로 민서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이 너무도 차가워 입이 얼어붙었다.

“…….”

“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마. 어차피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

“난 누구의 대신도 되기 싫고, 날 통해서 누굴 보는 건 더 싫어.”

“엘!”

“그 이름이 날 부르는 게 맞아? 그 남자의 애칭이 아니고?”

엘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왜 났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이상 더 말을 하면 그녀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았다. 그래서 입술을 깨물었다. 배신당했음에도 그녀가 상처 입지 않길 바랐다.

엘은 차에서 내렸다. 곧장 민서도 내렸다. 민서는 초조하게 엘을 보았다. 뭐라 말하고 싶었다. 아니라고 변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스로도 정말 그를 통해 ‘그’를 보는 게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그는 그일 뿐이니까.

“갈게.”

엘은 그렇게 말하고 차를 타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민서는 떠나가는 차를 막지 못했다.

* * *

탕탕!

“보스! 식사예요, 밥 좀 드세요!”

유진이 민서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문을 열려고 해도 단단히 잠겨 열리지 않았다.

“아, 보스!”

“그만해.”

민혁이 그런 그를 말렸다. 유진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진짜!”

“보스의 뜻이야.”

“그래서 그냥 놔두자고! 벌써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민혁은 고개를 저었다. 결국 유진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날 엘과 헤어진 뒤 민서는 계속 방에 있었다. 그리고 나오지 않았다. 유진과 민혁은 걱정돼 그녀를 찾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유진은 굳게 닫힌 방문을 한번 보더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한 듯 몸을 움직였다.

굳게 닫힌 방 안. 민서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생기가 없었다. 그녀는 가만히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그 뒤로 엘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하지만 민서는 먼저 연락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가 묻는 말에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를 통해 엘라임을 보는 건지, 엘을 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신에게 엘은 엘라임인데 어떻게 다르게 볼 수 있단 말인가.

민서는 자신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자조적으로 웃음을 지었다. 어린애 같은 짓을 했다. 유진과 민혁이 얼마나 걱정할지 눈에 뻔했다. 하지만 정리되기 전까지 그녀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너무 당황해서 그만 말을 잊고 말았다. 하지만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민서는 눈을 감았다 떴다. 처음 그를 만난 직후, 민서는 다시 그를 만나기 전까지 수없이 고민했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나도 될까, 과거의 기억을 안고 지금의 그를 좋아해도 될까.

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모습이 바뀌어도 그고, 기억을 못 해도 그다. 이미 알고 있지 않았는가. 자신은 그를 놓을 수 없다.

그뿐이다.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은 진짜라는 것.

‘이야기하자. 전부 이야기하자.’

민서는 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

그러나 엘은 받지 않았다.

* * *

미국 뉴욕.

사무실에 앉아 음울한 기운을 풍기는 남자가 있었다. 바로 엘 루이스. 그는 지금 얼굴을 두 손에 묻고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케이슨이 혀를 찼다.

“차였냐? 아니지, 연인도 아니었던가?”

“…….”

“멍청한 놈.”

“하아…….”

엘은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렇게 민서에게 퍼붓고 난 뒤 후회했다. 그 순간 분노했고, 화가 나 머리가 돌 것 같았다. 그런데 돌아와 마음이 진정되니 이성적인 사고가 가능해졌다. 화가 났던 이유는 무엇인가.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을 통해 다른 사람을 본다 생각했을 때 그렇게 화가 난 것이다.

나를 보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배신당한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좋아하기 때문에. 이제야 제대로 깨달았다. 자신이 그녀를 좋아함을.

떠나기 전 그녀가 지었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언제나 웃기를 바랐다. 슬퍼하지 말고 즐거워하면 좋겠다 싶었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가장 짓게 하고 싶지 않은 표정을.

‘민서…….’

그녀가 혹여 자신을 통해 다른 사람을 본다 하더라도 그녀가 좋았다.

“젠장!”

엘은 제 핸드폰을 거칠게 만졌다. 그 모습에 케이슨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게 끙끙 앓을 바엔 차라리 전화하지그래?”

“…….”

“뭐야? 너 설마 번호도 기억 못 하냐?”

“…….”

“쯧쯧, 디지털 바보가 여기 있구먼.”

“…….”

그날 그렇게 화가 나 집에 오자마자 핸드폰을 던져 버렸다. 그 이후 얼마나 후회했던가. 운도 나쁘게 핸드폰은 한 번에 고장이 났고, 고쳤으나 데이터가 날아갔다. 설상가상으로 곧장 출장이 있었던 탓에 제대로 수리도 못 하고 미국으로 와야 했다.

다른 전화기로 전화를 하고 싶어도 번호를 모른다. 바보같이. 그 전화 번호 하나 외우질 못해서.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도통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대체 자신이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모습을 케이슨이 혀를 차고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어이, 엘!”

본사 부장 토마스가 엘을 불렀다. 엘은 죽을상을 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토마스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에게 물었다.

“어이, 엘. 너 혹시 위에 줄이라도 있는 거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 아냐. 그보다 너 다시 돌아가라.”

“예?”

“바로 복귀 명령 떨어졌어. 지금 당장.”

그 말에 엘은 어리둥절했지만 그 순간 곧장 옷을 챙기고 회사를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케이슨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행복해지라고, 엘.”

* * *

어린애처럼 화가 나 자신보다 어린 여자에게 쏘아붙였다. 만나고 싶다. 만나서 사과하고 싶다. 몇 시간에 걸친 비행에 지칠 법한데도 엘은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그녀의 집 앞으로 갔다. 그렇게 몇 분 집 밖에서 서성거리다 마음을 먹고 초인종을 눌렀다.

화를 내겠지? 아니, 무시하려나? 엘은 침이 마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돌아온 건 적막뿐이었다. 엘은 초조해졌다. 다시 한번 초인종을 눌렀다. 역시나 돌아온 것은 차디찬 고요함뿐. 거기다 집은 불마저 꺼져 있었다. 그녀가 집에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다.

엘은 그녀의 집 앞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겨울은 미국의 겨울만큼이나 추웠다. 엘은 그 추운 날 그녀의 집 앞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서 있었다. 그렇게 서 있다 밤이 되어도 그녀의 집에 불이 켜지지 않자 그녀가 집에 없는 걸 알았다.

결국 그는 발걸음을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다음 날 그는 다시 그녀의 집을 찾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여전히 반응은 없었다. 자신이 싫어진 건 아닐까 두려웠다. 사랑을 하면 약자가 되는 걸까.

설사 그녀가 다른 사람을 보더라도, 그래도 자신을 필요로 한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그녀가 필요했다. 엘은 욱신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몸은 으슬으슬거리고 감각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엘은 자신이 얼마나 서 있던 건지 알지 못했다. 해가 지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 다음 날 회사를 간다. 회사가 끝나면 곧장 이곳을 찾아왔다.

그렇게 며칠. 그러나 여전히 민서를 만나지 못했다. 처음엔 자신을 만나주지 않은 데 대한 야속함이, 이후엔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자신은 그녀의 집 외에는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언제나 그녀가 자신을 만나러 왔었다. 항상 그보다 일찍 나와 그를 기다렸다. 한번은 왜 먼저 오냐고 그랬던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민서는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그 말이 지금에 와서 가슴에 꽂혔다.

민서는 계속 기다렸다. 이까짓 거 못 기다릴까.

그때였다.

투둑- 투둑-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쏴아아 하고 굵은 빗줄기를 쏟아냈다.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엘은 차가운 빗줄기를 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혹여 자신이 돌아간 사이에 그녀가 올까 봐.

엘의 입술이 어느새 새파래졌다.

“민서…….”

제발 돌아와 줘. 보고 싶어. 엘의 고개가 바닥으로 향했다. 그렇게 그는 오랫동안 비를 맞고 있어야 했다.

그때였다.

“왜 그러고 있어요?”

“……!”

너무 오래 바깥에 서 있어 환청이 들리는 걸까? 엘이 뒤를 돌았다. 그의 눈이 커졌다.

민서. 그녀였다.

그녀가 우산을 엘에게 씌워 주었다.

“미, 민서.”

“……바보같이 왜 비를 맞고 있어요?”

“나는…… 난.”

“내가 집에 언제 돌아올 줄 알고 이렇게 있었던 거예요?”

“못 만날까 봐.”

“바보다.”

“응, 바보야.”

“그렇게 화내고 가버렸잖아요. 전화도 안 하고.”

“번호를 기억 못 했어. 전화기 부서졌는데.”

“난 기억하는데.”

“미안…….”

엘의 절로 고개가 수그러졌다. 민서는 저보다 큰 엘의 처량한 모습에 씁쓸히 웃었다.

“나도 미안해요.”

“민서…….”

“그치만 이거 하나는 말할 수 있어요. 내가 지금 좋아하는 건 당신이야.”

민서는 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를 기다렸다. 자신은 그를 기다린 것이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엘을.

“엘, 그러니까 날 좋아해 줘.”

민서의 말에 엘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따스한 그녀의 온기가 그의 차가운 몸을 녹여주었다.

“내가 해야 할 말을 먼저 하지 마.”

“엘.”

“날 좋아해 줘, 민서. 오직 너만을 바라볼게.”

민서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눈물이 흘러 그녀가 찬 목걸이에 떨어졌다.

그 순간 환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기억을 찾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내가 그를 좋아하니까. 그리고 이제 그도 나를 좋아하니까.

엘이 민서의 입에 입술을 맞췄다. 민서의 목걸이에서 난 빛은 이내 사라졌고, 거세게 내리던 비도 그쳤다.

엘이 씨익 웃으며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사랑해. 나의…….”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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