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42)

에필로그 인연

툭- 투둑.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져 내렸다. 예고 없이 내린 빗줄기에 사람들은 비를 피하기 위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촤악-

우산이 없어 몸을 피하는 사람들 사이로 한 소녀가 우산을 펼쳐 들었다. 그녀는 우산을 쓰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기상청조차도 예측하지 못한 비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늘 아침 우산을 챙겨 들었다. 왠지 비가 올 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하게 맞아들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소녀는 이제 막 꽃피우기 시작한 열아홉으로 옅은 감색 머리카락은 햇빛이 비출 때면 마치 황금빛처럼 반짝거렸다. 며칠 전 수능을 본 뒤라 등교를 하는 그녀의 발걸음을 매우 가벼웠다. 우산을 쓴 그녀가 옅은 고동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도 밝은데 이상하게 비가 온다. 하지만 더 이상한 건 비가 올 거라 기가 막히게 알아맞힌 그녀였지만.

“정말 비가 오네.”

특별한 감흥은 없다. 이 세계에 태어난 후 그녀는 종종 이런 경험을 하곤 하니까. 그중 하나가 비가 오는 날을 잘 맞힌다는 것이다. 이런 여우비조차도.

소녀, 아니, 이제 어린 티를 벗고 여인이 되어가는 그녀의 이름은 최민서. 이 지구에 깨어난 헬리아였다. 아니, 과거의 최민서가 헬리아가 되었다가 다시 최민서가 되었다. 참으로 오묘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헬리아, 이제는 최민서가 된 그녀는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날 이안이 숨을 거둔 직후 헬리아는 자신의 존재를 함께 지웠다. 60년, 더 이상의 미련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수십 년을 준비한 마법을 펼쳤다. 모두 그를 찾기 위해서.

마법은 성공적이었다. 차원의 문이 열리고 그가 있는 곳으로 그녀를 데려다주었다. 하지만 거기서 조금의 문제가 발생했다. 아니, 꽤 커다란 문제였다. 그녀는 차원의 틈새에서 육신을 잃고 영혼이 된 채 이 지구에 갓난아이로 다시금 태어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아기가 된 것보다 자신이 돌아온 곳이 지구라는 것에 매우 놀랐다. 이 지구는 자신이 알던 지구였다. 거기다 더 놀라운 것은 원래 자신의 몸으로 깨어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회귀인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패러럴 세계인 것일까. 부모에게 버림을 받고 양부모에게 입양된 것까지 똑같았다. 그녀는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누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우연의 일치라니.

하지만 현재가 과거와 같을 수 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그녀가 아니었다. 비록 제 의사를 밝힐 수 없는 어린아이일 적에는 세상이 움직이는 대로 그저 따랐지만 그녀가 사고하며 제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그녀는 원래의 세상을 박차고 나왔다.

어릴 적 세상은 춥고 배고픈, 두려움의 공간이었지만 이미 겪어볼 대로 겪어보고 먹을 대로 나이를 먹었던 그녀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양부모의 집에서 나와 정부의 지원을 받는 청소년 보호 센터에 몸을 의탁해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를 해왔다. 그런 한편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는 메리트 또한 아주 제대로 써먹었다.

돈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지만 돈이 아예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돈을 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게, 그러나 어느 정도 돈이 모이자 주식을 시작했다. 떼돈을 벌기에 투자만큼 좋은 건 없다. 거기다 답을 알고 떼돈이 될 것만 골라 투자한다면 실패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다. 그렇게 그녀는 고3에 남들이 벌지 못하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였다.

아마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그런 돈을 벌었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그저 공부 잘하고 제법 예쁘장하게 생긴 고아라고만 생각할 뿐. 덤으로 가정환경이 빈한 불쌍한 아이로.

“열아홉인가.”

그와 헤어진 것도 바로 이맘때였다. 차가운 겨울, 아직 봄을 보지도 못 하고 그와 헤어졌다. 그렇게 60년을 지내고 다시 열아홉이 되었다. 그간 얼마나 좌절하고 절망하며 불안에 떨었는지 모른다. 그 모든 것이 꿈은 아닐까 하고. 자신은 그저 아르센 제국의 여황 헬리아가 아니라 평범한 최민서가 아닐까 하고.

외롭고 쓸쓸했다. 양부모의 품을 박차고 나온 세상은 과거 그녀가 최민서였을 적에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였다. 낯선 사람들 낯선 환경. 그저 그녀는 묵묵히 견뎌냈지만 때때로 사무치게 그립고 또 그리웠다.

그 나날이 꿈이 아니었음을 확신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다행히 그녀가 이 세계에 깨어날 때부터 그녀의 품에는 작고 동그란 푸른 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반지 알 크기만 한 작은 그것은 목걸이로 만들어 한시도 그녀의 품에서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과거와 지금이 다른 것. 바로 이 구슬이었다. 최민서로 깨어난 지금 헬리아 때처럼 마법을 부릴 수도 특별한 힘도 없지만 이 구슬에 스며든 작은 힘으로 그녀는 비가 오는 날을 알아맞힌다거나 감기에 걸리지 않거나 하는 작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이 구슬에서는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의 기운이 스며 있었다.

“……엘라임.”

또 한 번 나직히 내뱉어보는 그의 이름에 민서는 우산을 더 깊이 내렸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정말 이 지구에 있는 걸까? 태어나긴 한 걸까?

수도 없는 고민이 그녀를 괴롭혔다. 어떻게 어머니는 800년이 넘도록 한 사람만 봐올 수 있었는지 정말이지 대단하다. 그런 것에 비하면 자신은 이제 100년도 되지 않는다. 아직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민서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돈을 벌고 무언가 해볼 수 있을 때부터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될지 몰랐다. 그가 여자로 태어난 것인지 남자로 태어난 것인지.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으니까. 이름도 얼굴도 아무것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찾았다. 찾을 수 있을 거란 믿음과 희망 하나로 버텨낸 세월이다.

하지만 힘들지 않을 리 없었다.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자신을 기억할까? 아마 기억하지 못하리라. 그럼에도 그녀는 찾는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차라리 과거의 기억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수십 번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또 다짐했다. 자신이 찾지 않는다면 누가 그를 찾아주겠는가. 민서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툭- 투둑.

어느새 갑자기 내린 비가 내릴 때처럼 그렇게 툭 그쳤다. 민서는 우산을 접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비가 언제 내렸냐는 듯이 환한 하늘이 그녀를 반겼다. 민서는 왠지 기분이 좋았다.

비가 내린 후라서 그런지 공기가 깨끗했다. 추운 겨울이지만 비가 내리는 날은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덜 춥다고 하지 않던가.

그냥 기분이 좋은 날.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민서는 접은 우산을 들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그때 갑자기 그녀의 목걸이가 우웅 움직였다.

“목걸이가 갑자기 왜?”

이제까지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물의 기운을 품고 있지만 목걸이는 감기에 걸리지 않게 하거나 기상청 뺨치는 일기예보를 제공했을 뿐 여타 다른 일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목걸이가 반응했다. 그녀의 뺨이 상기되었다. 민서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목걸이가 한 방향에서 더욱 묘한 공명음을 토했다. 민서는 목걸이가 반응하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우웅웅! 우우웅!

목걸이의 반응이 더욱 거세졌다. 그만큼 민서의 심장도 두근거렸다. 심장이 부서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민서는 방향을 따라 뛰고 또 뛰었다. 혹시라도 놓칠세라.

이윽고 한 횡단보도 앞. 민서는 불안한 마음으로 초록불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 찰나의 시간은 그녀에겐 마치 수백 년의 시간처럼 느리게 갔다.

놓치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채 빨간불이 초록불이 되기도 전에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순간,

빠아아아앙!

지나가던 덤프트럭이 그녀의 몸을 덮쳐 오기 시작했다. 과거와 똑같았다. 민서는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이대로 죽는 걸까? 이제야, 이제야 찾을 수 있는데? 그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녀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너무도 찰나의 시간. 덤프트럭이 그녀의 몸을 갈랐다.

끼이이익!

“뭐 하는 거야! 미쳤어!”

“…….”

두근두근.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다. 민서는 숨을 거세게 내쉬었다. 그때 누군가 그녀를 품에 안고 말을 건넸다.

“천천히 숨을 쉬어.”

그것은 한국말이 아니었다. 영어였다. 하지만 민서는 알아들었다.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목소리. 그러나 민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더는 생각할 수 없었다. 몸이 덜덜 떨려왔다. 이대로 죽는구나 생각했다. 그를 찾지 못하고 죽는구나 싶었다.

“천천히 숨을 내쉬어.”

이 따스한 목소리는 대체 누굴까? 민서는 그의 목소리에 맞춰 자신의 심장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안은 이에게서 시원한 향이 났다. 아주 익숙한 물 냄새가.

우우우웅!

목걸이가 웅얼거렸다.

민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아.”

뚝, 뚝-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남자는 우는 그녀를 보고 얼른 달래보았지만 그녀의 눈물은 둑이 터진 것처럼 막을 수 없었다.

“이, 이봐.”

“흐, 흐흑. 하, 하하.”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민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럴수록 남자는 더욱 당황해 허둥거리다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너무 놀라서 그런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울지 마.”

남자는 민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민서는 그의 품에서 울고 또 울었다.

아아, 드디어 찾았어. 드디어.

달래는 남자의 품속에서 민서는 환히 웃었다. 수십 년이 넘은 지금, 차원을 넘고 시간을 넘어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엘라임.

드디어 너를.

당황하는 그의 모습 사이로 민서는 더욱 그를 꽉 껴안았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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