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7/42)

제4장 진격

“이제 3주 남았나?”

헬리아는 세계수를 바라보며 엑시온이 드래곤 하트를 가지고 간 날로부터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는 것을 상기했다. 이곳 알리오 산맥에서 수도까지는 적어도 일주일.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헬리아는 움직이기 전 생각을 정리했다. 하얀 바람의 마을의 동맹을 얻어낸 케이시스는 엑시온의 부활 소식을 듣고 최대한 일정을 앞당겼다. 곧 케이시스가 수도로 진격할 것이다. 이미 대부분의 병력은 수도 인근에 모여 있는 상태였고, 케이시스는 이종족을 규합하기 위해 직접 이곳까지 온 상황이었다.

“후우…….”

헬리아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목적은 엑시온의 부활을 막고 드래곤 하트를 되찾는 것. 케이시스가 수도를 공략하면 그녀가 엑시온을 상대할 것이다.

‘과연 내가 봉인할 수 있을까?’

시시때때로 그런 생각이 그녀를 지배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드래곤 하트를 엑시온이 흡수하기 전이라면 승산이 있다. 이미 한 번 엑시온을 궁지로 몰아넣지 않았던가. 그때보다 힘이 강해진 지금이라면 엑시온을 완벽히 봉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

헬리아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빈센트를 떠올렸다. 어둠 속에 갇힌 기분을 누구보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헬리아는 질끈 주먹을 쥐었다. 반드시 드래곤 하트를 가지고 돌아가리라.

헬리아는 마음을 다잡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더욱 세밀히 짜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어머니 세르게니아가 전이해 준 기억을 되짚어갔다. 세르게니아가 전해 준 것은 그녀의 기억 전반이었다. 그녀가 가진 마법적 지식, 삶의 지혜, 인생의 경험이 흘러들었다.

헬리아는 엑시온에 대해 더 찾아보았다. 수천 년을 산 드래곤답게 워낙 방대한 양의 기억이라 한 번에 다 이해할 순 없었다. 우선 기억을 분류하고 책장에서 책을 꺼내는 것처럼 하나씩 불러냈다.

‘엑시온의 봉인 방법, 엑시온의 부활…….’

엑시온에 대해 계속 찾아 나갔다. 그러다 엑시온을, 아니, 마룡을 불러내는 마법진이 떠올랐다.

‘왜 마룡을 불러내는 마법진이 있는 거지?’

조사하다 알게 된 걸까? 어머니는 흑마법사가 엑시온을 불러냈다고 했다. 한데 이 마법진은 지금 당장 헬리아가 마나의 양만 충분하다면 시행할 수 있을 정도로 정교하고 세밀했다.

뭔가 이상하다. 뭔가…….

헬리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실소를 터뜨렸다.

“이상하긴 무슨.”

마법진을 알고 있다고 해서 관련이 있다면 헬리아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흑마법진에 대해선 배워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마법진을 구동하는 데 필요한 재료도 전부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치 세르게니아가 직접 마법진을 시전해 봤던 것처럼 자세히…….

“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쓸데없는 생각이다. 헬리아는 스스로의 생각을 부정했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엑시온을 소환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럴 이유가 없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없어. 나참, 내가 미쳤어.”

그렇지만 한번 의심이 싹 트면 물을 주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난다. 헬리아는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엘라임.”

“왜?”

엘라임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명상을 하기 위해 홀로 있겠다던 헬리아였다. 엘라임은 헬리아가 자신을 부르자 잽싸게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헬리아의 미간이 좁혀진 걸 본 엘라임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있잖아. 혹시 말이야.”

헬리아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그런데 도통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기억이 너무 자세하다고, 혹시 어머니가 이 마법진을 사용해 본 게 아닐까 하고.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뭐야, 궁금하게.”

헬리아가 입을 다물자 엘라임은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이 워낙 복잡해 보였기 때문이다. 헬리아는 다시 한번 숨을 깊게 내쉬고 들이마셨다. 그러자 세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청량한 기운이 몸 안에 스며들며 머리를 맑게 했다.

‘그래,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미 엑시온은 부활했고, 나는 그를 봉인하고 드래곤 하트만 찾으면 돼.’

지금은 생각해야 하고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헬리아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뭔가 알아낸다고 해도 전혀 쓸데없는 거니까.

‘그래, 상관없는 일이야…….’

헬리아는 그 생각을 지우고 다른 생각을 했다.

“대체 이안은 어디에 떨어진 거야?”

분명 이동 마법진에 휩쓸렸으면 다른 곳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문제는 도대체 어디에 떨어졌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이안도 이안이지만 세인도 애초에 없어졌다. 엘프들에게 주변 수색을 부탁해 두긴 했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다. 혹시 이 주변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곳에 떨어져 버린 걸까?

“하아, 이안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그 검둥이 자식은 뭐 하러 찾아? 나랑 이렇게 오순도순 있으면 됐지.”

“됐네요.”

엘라임과 있는 게 싫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상황을 객관적으로 봐줄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싶었다. 그게 바로 이안인데.

그때였다. 멀리서 이곳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대런이었다.

“헬리아 님!”

“대런?”

그녀가 생각을 정리할 동안 최대한 혼자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해두었다. 그런데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대런이 찾아온 것이다. 자연 헬리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아닙니다. 전에 말씀하신 그 이안이라는 자에 대한 겁니다.”

“찾은 거야!?”

헬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나 대런은 아쉽게도 고개를 저었다.

“그자인지는 확실하진 않습니다. 다만 이번에 마을로 돌아온 어린 엘프 중에 말씀하신 인상착의와 같은 이를 보았다는 자가 있습니다.”

이안에 대해 수소문하던 중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잡혀 있던 이들에게 물어본 것이 주효했다. 헬리아는 그 말을 듣고 곧장 대런을 따라 이안을 목격했다던 어린 엘프를 만났다.

“본 걸 말해줄 수 있니?”

“아, 그게…….”

아이는 더듬더듬 기억을 되짚으며 말했다.

“얼굴은 모르겠어요. 그냥 머리가 시커메서 특이하다고 생각했어요.”

헬리아의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검은 머리. 대륙에서 검은 머리는 매우 드물다. 일부러 염색하지 않는 이상 흔히 보이는 색이 아니었다. 거기다 딱히 사람들이 선호하는 색도 아니어서 염색한 이도 잘 없다.

“혹시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

“산 아래 냇가에서 봤어요. 한데.”

“한데?”

헬리아의 미간이 좁아지자 아이는 순간 움찔했다. 그 모습에 헬리아는 인상을 폈다. 그러자 아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들이 데려갔어요.”

“데려갔다고?! 누가?”

헬리아의 눈이 커졌다. 설마 몬스터한테 끌려갔다 거나 한 건 아니겠지? 하기야 소드 마스터인데. 그러다 이동하기 전에 이안이 큰 부상을 입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 정도 부상이라면 헬리아가 처음 이곳에 쓰러진 것처럼 의식이 없었을 수도 있다. 헬리아의 안색이 굳어졌다.

“난쟁이요.”

“난쟁이?”

헬리아가 되묻자 옆에 있던 대런이 말했다.

“드워프입니다.”

“드워프라고?”

헬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 * *

“그렇군.”

헬리아의 사정을 들은 케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바로 케이시스와 합류하여 함께 수도로 움직일 생각이었지만 이안의 소식을 들은 이상 헬리아는 그를 찾아야 했다.

“부디 이안 경을 찾길 바라겠소.”

“곧 뒤따라갈게요.”

“수도에서 뵙시다.”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시스는 아스칼과 함께 수도로 올라갈 엘프들을 데리고 마을을 떠났다. 헬리아와는 일주일 뒤에 수도에서 보기로 약속을 정했다. 헬리아가 뒤늦게 움직이지만 군과 함께 움직여야 하는 케이시스의 이동 속도를 따라잡기에는 충분했다.

헬리아는 떠나가는 케이시스를 배웅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는 장로 에리디아스와 대런과 슈리, 제스가 남아 있었다.

“대런, 너는?”

“저는 헬리아 님과 함께 그분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어차피 헬리아 님도 곧 수도로 올라가실 테니 문제없습니다.”

“암요.”

대런을 비롯한 슈리와 제스가 싱긋 웃었다. 헬리아는 그제야 마주 웃었다.

“부디 무탈하시오.”

“감사해요.”

헬리아가 에리디아스를 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정말 이곳에서 많은 것을 얻었다. 여기에 자신을 떨어뜨린 엑시온이 고마울 정도로.

“우리는 언제나 그대를 우리의 친우로 받아들일 것이오.”

에리디아스의 진심에 헬리아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헬리아와 대런 일행은 곧장 그길로 이안이 데려갔다던 드워프를 찾아 나섰다.

* * *

알리오 산맥에는 남동쪽으로 더 내려가면 검은 망치라는 드워프 마을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을 피해 깊은 동굴에서 사는데다가 원체 엘프와는 상성이 맞지 않아 교류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인간이라는 공공의 적을 두고 있지만 종족 간의 간극이 컸다.

“쯧, 이거 완전히 나무를 다 베어버렸잖아?”

“그놈들이 그렇지. 소중한 나무를.”

제스와 슈리가 불만 섞인 표정으로 주변에 밑동만 남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현재 일행은 검은 망치 부족이 살고 있는 마을 근처까지 온 상태였다. 마을 인근에는 종종 베인 나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도 불을 지피는 데 사용했을 것이다. 물론 그 광경을 엘프들은 아주 고깝게 생각했다.

“그 난쟁이 똥자루들.”

“대런, 그런데 정말 드워프가 데려간 거 맞대? 으으, 드워프는 대화가 안 된다고.”

“확실해.”

대런이 확언했다. 엘프가 무언가를 잘못 보거나 잊어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드래곤만큼은 아니지만 엘프들의 기억력은 인간을 훨씬 상회했다.

“헬리아.”

엘라임이 이제까지 말없이 걷고 있는 헬리아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 질긴 놈이 그리 쉽게 죽겠어?”

엘라임의 위로에 헬리아는 그제야 굳은 표정을 폈다. 하지만 왜 걱정이 안 되겠는가. 그렇게 심한 상처를 입었었는데.

“헬리아.”

엘라임이 걸음을 멈췄다. 그와 함께 대런 일행도 무언가를 발견한 듯 주변을 경계했다.

그때였다.

“뭐야, 이거 귀쟁이 자식들이잖아!”

수풀 너머에서 가래 섞인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키에 근육질 몸매, 덥수룩한 수염을 지니고 있었다. 그 모습에 대번에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드워프?”

“으음? 뭐야, 귀쟁이만 있는 줄 알았는데…… 으응? 아, 아니!”

헬리아를 본 드워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저기…….”

“마, 마녀다! 마녀가 돌아왔다!”

드워프의 외침에 헬리아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와 함께 주변에 있던 드워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 마녀가 나타났다!”

헬리아는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마녀라고?”

누가 마녀야? 헬리아의 인상이 팍 찌그러졌다. 그러자 드워프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도대체 왜 저래?”

헬리아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마녀라는 소리를 처음 듣는 건 아니었지만 그 말을 이곳 드워프에게 들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설마…….”

옆에 있던 엘라임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자 헬리아가 물었다.

“뭔데?”

“네 악명이 여기까지…….”

콱!

“악!”

“쓸데없는 말 할래?”

헬리아는 엘라임의 발을 밟으며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마, 마녀가 돌아왔어…….”

여전히 드워프들은 헬리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쯤 되니 헬리아도 뭔가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간다는 걸 알았다.

‘도대체 뭐야?’

헬리아는 답을 찾으려 애를 써봤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어, 어서 그를 불러!”

“마, 마녀가 살아 있을 줄이야…….”

드워프 중 한 명이 피리를 불렀다. 그러자 삐익- 하는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스스스스-

“헬리아.”

엘라임이 낮은 목소리로 주의를 줬다. 뭔가 빠르게 이곳으로 오고 있었다.

“조심해, 이 기운은…….”

엘라임의 경고에 헬리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 기운은, 설마.

“소드 마스터…….”

이런 곳에 소드 마스터의 기운을 가진 자라니. 헬리아는 바로 이안이 떠올랐다. 드워프가 그를 데려갔다면 이 기운은 그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나타난 이를 보고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던 이가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아스칼을 봤을 때보다 더 놀랐다.

“어라?”

연보랏빛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헬리아를 보곤 놀란 듯 눈이 커졌다. 그건 헬리아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이곳에 있을 줄이야.

“세인?”

“공주님이 여긴 어떻게?”

그는 애초에 사라져 버렸던 바로 그 세인이었다.

“세인, 무사했구나.

“저야말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한데…….”

세인은 헬리아를 보고는 상황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계획대로 드래곤 하트를 손에 넣었다면 이곳에서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표정에 헬리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가 길어. 그보다 대체 어찌 된 거야? 어떻게 여기에?”

“깨어나 보니 이곳 검은 망치 부족이었습니다.”

“한데 제법 이들과 친해졌나 봐.”

자신을 경계의 눈빛으로 보는 것과 달리 드워프들은 세인을 신뢰하는 듯했다. 엘프와 마찬가지로 드워프 또한 수많은 이가 인간에게 붙잡혀 노예가 되었다. 엘프가 아름다운 외모로 성 노예로 많이 팔렸다면 드워프는 뛰어난 손재주로 무기를 만드는 노예로 팔려갔다.

이래저래 두 종족 모두 노예로 각광받았다. 그 탓에 인간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저런 눈빛을 보이는 것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건 공주님도 마찬가지이신 것 같습니다만.”

세인이 헬리아 뒤쪽에 자리 잡은 세 명의 엘프를 보고 말했다.

“뭐, 나도 여러 일이 있었으니까.”

“그보다 공주님께서 이곳으로 오셔서 다행입니다.”

세인의 표정이 돌연 굳어지자 헬리아의 눈매가 좁아졌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의 목숨이 위험합니다.”

“……그라니?”

그러다 퍼뜩 헬리아의 안색이 딱딱해졌다.

“……이안이?”

* * *

“…….”

“일주일 전에 숲속에 쓰러진 걸 발견했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이쪽에서 발견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엑시온에 당했어. 그보다 치료는…….”

“이 정도가 한계였습니다.”

드워프는 대체로 건강한 체질이라 병에 잘 걸리지 않아 약이 거의 없었다. 거기다가 최근 몬스터와 인간의 습격으로 많이 부족해진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이안을 완전히 치료할 수 없었다. 그나마 소드 마스터의 단련된 육체가 상처가 더욱 악화되는 것을 막았다.

헬리아는 눈을 감은 채 침대에 누워 있는 이안을 보곤 입술을 깨물었다. 그날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던 그의 등이 떠올랐다.

“……이 바보가…….”

그는 언제나 묵묵히 자신을 지켜왔다. 설사 그것이 목숨을 잃는 일일지라도. 헬리아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이안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뒤에서 엘라임이 그 모습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를 위해 목숨을 던진 이안을 왜 다쳤냐며 나무랄 수는 없었다.

“엘라임, 세인.”

“알았어.”

엘라임은 헬리아의 마음을 알아채곤 몸을 돌렸다. 그에 세인도 방을 나섰다. 방 안에는 헬리아와 이안 둘만이 남았다. 헬리아는 풀썩 침대 옆에 걸터앉아 이안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의를 풀어 헤치니 진한 약초 냄새가 맡아졌다. 상처 부위에 약을 바른 듯했다. 하지만 약의 효능이 그리 좋은 건 아닌지 상처에서 붉은 피가 비쳤다.

헬리아는 상처 부위를 잘 닦아내고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청량한 기운이 이안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러자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고 이안의 파리한 안색이 한결 나아졌다. 그러나 헬리아는 그러고도 꽤 긴 시간 동안 마법을 시전해야 했다. 어찌나 상처가 깊은지 내상까지 치료하려니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후우…….”

치료를 마친 헬리아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이안의 가슴 부위는 상처 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매끈해져 있었다.

스윽.

헬리아는 혹여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가슴 부위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이제 다 나았나?”

하지만 아직 이안은 깨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상처가 깊었다는 것이다. 헬리아는 편히 자고 있는 이안을 보다 이내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대한 걱정을 덜자 이내 화가 났다.

“이 바보, 도대체가 맨날 몸만 디밀면 다야? 그러다 죽으면? 개죽음밖에 더 돼?”

“그러는 당신은 어떻습니까?”

그때 나직이 이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언제 깨어났어?”

“남자의 가슴을 함부로 만지는 게 아닙니다.”

헬리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도대체가 이안이나 엘라임이나 아주 뻔뻔해졌어. 거기다 변태기도 상승했고 말이야.

“멋대로 죽지 마.”

“제가 할 말입니다.”

이안이 스윽 몸을 일으켰다. 상처는 이미 헬리아가 다 치료했다. 그저 기력이 다해 피곤할 뿐 몸을 움직이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그 마법.”

이안의 말에 헬리아의 어깨가 살짝 들렸다. 이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괜찮은 겁니까?”

“괜찮으니까 한 거지.”

이안이 빤히 그런 헬리아를 응시했다. 당연히 찔리는 게 많은 헬리아의 고개는 스르륵 돌아갔다.

“뭘 숨기고 있는 겁니까?”

이안의 날카로운 질문에 헬리아가 그게 무슨 말이냐며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숨기다니?”

“포커페이스에 능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를 것 같습니까?”

“…….”

헬리아는 이안의 추궁에 입을 다물었다. 하기야 누굴 속이랴. 엘라임이야 얼렁뚱땅 넘어갔지만 이안은 그럴 수 없었다.

“걱정 마.”

사실대로 말할 수 없지 않은가. 드래곤 하트가 없으면 엑시온을 봉인하기 어렵다고, 그래도 봉인한다면 내 몸이 망가질 거라고, 아니, 죽을 수도 있다고. 그런 사실을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헬리아는 결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특히 엘라임과 이안에게는. 이 사실을 알면 그들은 분명 말릴 것이다. 그리고 걱정할 것이다. 그것이 헬리아는 싫었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 숨기는 것에 대한 미안함보다 그 마음이 더 컸다.

헬리아는 쓰게 웃었다.

“죽지 않아.”

“…….”

이안이 여전히 의심스런 눈으로 그녀를 보자 헬리아는 웃으며 말했다.

“뭐야, 안 믿어? 그럼 내기할래? 누가 더 오래 살지? 으음, 요 광경을 보면 아무래도 내가 더 오래 살 것 같은데 말이지.”

헬리아가 이제는 다 나은 이안의 가슴팍을 쿡쿡 질렀다. 이안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손이 헬리아의 팔목을 잡아채며 몸을 움직였다. 어느새 헬리아가 침대 아래에, 이안이 그 위에 올라가게 되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상황인데…….’

헬리아는 이안이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했지 않습니까. 남자의 몸을 함부로 만지지 말라고.”

“에이, 그것 좀 만졌다고.”

스윽.

그러자 이안의 손이 헬리아의 목덜미를 스쳤다. 헬리아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안이 피식 웃었다.

“그것 좀 만진다고 문제 있습니까?”

헬리아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이안이었다.

“그, 그거야 나는 여자고 말이지.”

“불리할 때만 여자입니까? 평등을 추구해야지 않습니까?”

“그, 그건…….”

이안은 당황하는 헬리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와락 껴안았다.

“이, 이안!”

“잠시만…….”

두근두근.

그녀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세차게 뛰는, 살아 있는 소리. 그제야 정말로 이것이 꿈이 아님을 인지했다.

“다행입니다. 살아서. 정말.”

“…….”

이안의 목소리에 헬리아는 가만히 그의 품을 받아들였다. 이안은 가만히 그녀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죽은 줄 알았다. 아니, 죽지 않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걱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언제나 아슬아슬한 사람이었다. 이기적인 것 같으면서도 결코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안은 그녀에게서 더 눈을 떼지 못했다.

“다시는,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이안은 헬리아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어찌 포기할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을. 그녀가 인간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누굴 선택하더라도.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비록 당신에겐 나의 삶이 짧은 순간이겠지만. 그렇기에 나는 이 짧은 순간을 더욱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이안의 눈빛이 짙어졌다. 헬리아는 그 모습에 저도 눈을 떼지 못했다.

“이안…….”

그때였다.

“이 검둥아! 다 나았으면 나은 거지 뭔 짓이야!”

파앗!

허공에서 물이 한 바가지 쏟아졌다. 하지만 맞아야 할 이안은 재빨리 몸을 빼내고 그 물을 아래에 있던 헬리아가 고스란히 맞았다.

“쿨럭!”

“헤, 헬리아!”

헬리아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고 말았다. 엘라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하, 하하…….”

헬리아는 자신의 꼴에 허탈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게 일상 아니었던가. 오히려 개운해졌다. 물론 응징도 잊지 않았다.

“이 바보야!”

헬리아가 신고 있던 신발이 정확히 엘라임의 안면을 강타했다.

“켁!”

엘라임은 그대로 헬리아의 신발을 맞고 뒤로 넘어갔다. 헬리아는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쥐어 짜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안은 피식 웃었다.

* * *

“하하하! 이거 실례했네.”

검은 망치 족장인 쿠스가 호쾌하게 웃으며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아니에요. 갑자기 나타난 저희 잘못이죠.”

“무슨 말을. 이렇게 맛 좋은 맥주도 가져와 주었는데.”

쿠스가 말을 하며 다시 잔에 시원한 맥주를 따랐다. 이제까지 그가 마셔 본 맥주 중에서 가장 맛있었다. 쿠스가 점점 비어가는 맥주통을 힐끗 바라보자 헬리아가 씨익 웃었다.

“좀 더 있는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더 드시겠어요?”

“더 있다고? 그, 그래줄 수 있는가?”

“물론이죠. 이안을 구해 주신 분들인데 이 정도는 당연하죠.”

헬리아가 열 통이 넘는 맥주 통을 꺼내자 드워프들이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딜 가나 맥주 좋아하는 건 똑같네.’

아르센 왕국에 그녀와 함께 일하는 드워프가 몇 명 있다. 이미 그들을 통해 드워프의 성격에 대해 꿰고 있는 헬리아다. 혹시 몰라 이것저것 아공간에 넣어두었는데 정말이지 운이 좋았다. 뭐, 맥주는 이전에 넣어둔 걸 깜빡하고 있었던 거지만. 몇 통의 술이 들어가자 쿠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정말 다행이야. 제대로 치료해 주지 못해 미안하구먼.”

“구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이안이 정중히 쿠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간 정신을 잃고 있어 쿠스를 보는 건 그도 지금이 처음이었다.

“아닐세. 정 그러면 세인에게 고마워하게. 그 덕분에 자네를 데려왔으니까.”

쿠스가 세인을 보았다. 이안은 멋쩍어하는 세인에게도 정중히 고마움을 전했다.

“크크크, 그나저나 이렇게 귀쟁이 놈들이 우리 마을에 올 줄은 몰랐군.”

쿠스의 말에 제스와 슈리가 발끈했지만 대런이 그들을 말렸다. 이곳은 엄연히 드워프 마을이었다. 쿠스는 엘프들이 자신의 도발에 응하지 않자 흥이 식은 듯 맥주를 다시 들이켰다.

“한데 마녀는 대체 뭔가요?”

“푸웃!”

헬리아가 마녀를 입에 올리는 순간 쿠스는 물론 술을 마시고 있던 드워프들이 일제히 맥주를 뿜어댔다.

“뭐, 뭐?”

“마녀 말이에요. 저보고 마녀라고 하던데.”

“마, 마녀…….”

“여, 역시 닮았어.”

“설마 마녀 본인 아니야?”

“끔찍한 소리 하지 마!”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말에 헬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역시 네 본질을…….”

콰악!

헛소리를 지껄이는 엘라임의 발을 다시 지그시 밟아주고는 헬리아가 물었다.

“그 마녀라는 자가 저와 닮았나요?”

헬리아는 왠지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하지만 설마 그러겠는가. 하지만 언제나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다.

“……으음, 이것 참, 맞네. 놀라울 정도로 닮았어. 본인이 나타난 줄 알았네. 금발에 금안의 여자는 이제까지 그녀 외엔 본 적이 없어.”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세상에 금안에 금발을 지닌 여자가 자신과 닮을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설마…….’

헬리아는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기 위해 다시 질문을 꺼냈다.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으음…….”

쿠스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서 다시 헬리아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설마 그 마녀 본인은 아니겠지?’

그 마녀라면 그러고도 남는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마녀가 이렇게 물어올 리가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세르게니아, 골드 드래곤이네.”

“…….”

순간 헬리아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여기서 어머니의 이름을 듣게 되다니. 잠시간 겪어본 어머니의 성격이라면 마녀 소리를 듣고도 충분했다.

“으으으!”

“그 마녀!”

드워프들이 몸을 으슬으슬 떨어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으음, 아주 지독했네. 아니, 아주 악독했지.”

‘도대체 뭘 했기에 악독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람?’

헬리아는 기가 막혔다. 그녀의 표정이 썩거나 말거나 쿠스가 말을 이었다.

“십여 년도 더 된 이야기네.”

쿠스가 맥주를 들이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알고 있는가? 이 산맥 꼭대기에 그녀의 레어가 있다네. 하지만 우린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 그런데 어느 날,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그녀가 우리 앞에 나타났네.”

쿠스는 그날을 회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그녀는 말했지. ‘여기에 쓸 만한 놈들이 있었잖아?’라고.”

그 말에 엘라임을 비롯한 이안과 세인이 모두 헬리아를 보았다.

‘뭘?’

‘아, 아니야.’

‘…….’

‘하, 하하…….’

그녀의 날 선 째림에 일행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모두 공통적으로 쿠스의 말을 듣자마자 헬리아를 떠올렸다. 헬리아 같은 인간이 또 있었다니. 아니, 모전여전이라고 해야 하나.

“처음엔 이런 미친년이 있나 싶었네. 하기야 평생 드래곤은 그때 처음 보았으니까. 이미 멸종한 걸로 알고 있었거든. 알았다면 결코 대들지…… 아니, 섣불리 나서지 않았을 걸세.”

그 뒤에 쿠스는 말을 잊지 못했다. 그건 다른 드워프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듣지 않아도 뻔했다. 아마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태도로 만들어주었겠지.

‘내가 그렇게 한다는 건 아니고.’

헬리아는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불편했다.

“뭐…… 어쨌든 그녀는 우리에게 동굴을 만들어달라고 했네.”

“동굴이요?”

“솔직히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네.”

“네? 만들었는데 모른다고요?”

“우리의 기억을 다 지워 버렸으니까. 뭐, 만들었다는 것은 기억이 나는데 도무지 우리가 뭘 만들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

좀 이상했다. 애초에 기억을 지울 거라면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지워 버리면 되는데 왜 그건 남겨두었을까.

“우리는 궁금했지. 만든 기억은 있는데 뭘 만들었는지는 모르니까. 거기다 그렇게 피 토하며…… 아니, 열심히 만들었는데 뭔지도 모른다면야 억울하지 않겠는가.”

드워프들의 눈가에 눈물이 어렸다. 얼마나 피 토하며(?) 만들었는지 눈에 훤했다.

“한데 들어갈 수 없었네. 마법진이 쳐져 있었어. 우리는 어떻게 해보려 했지만 방법이 없었네. 크윽, 지금 생각해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군. 차라리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도 기억하지 않길 바랐네. 젠장, 지금 생각해 보면 고통받은 기억을 고스란히 남겨두기 위함이었던 거야. 그 마녀가!”

“매일매일 피 똥을 쌌지.”

“야, 나는 입에서 피가 나왔어!”

“나는 손뼈가 다 부서졌다고!”

곳곳에서 세르게니아를 성토하는 분위기가 흘렀다. 순간 쿠스의 눈이 번뜩였다.

“그런데 그녀와는 대체 무슨 사인가? 너무 닮아도 똑 닮았는데, 설마…….”

“전.혀.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제가 드래곤을 어떻게 알겠어요.”

헬리아는 시치미를 뚝 뗐다. 엘라임과 이안을 비롯해 세인이 묘한 눈으로 헬리아를 응시했지만, 헬리아의 단단한 철면피가 그 모든 것을 막아냈다. 헬리아는 얼른 화제를 자신에게서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보다 혹시 한번 살펴봐도 될까요?”

“동굴을?”

“드래곤이 만든 거라니 궁금해져서요.”

정확히는 세르게니아가 무엇을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마룡 엑시온이 부활한 그때 그녀는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것일까? 헬리아는 왠지 그 동굴에 대한 호기심을 지울 수 없었다. 설사 그것이 판도라의 상자가 될지라도.

“한데 들어가지 못할 텐데?”

“괜찮아요. 그냥 보고 싶은 거니까요.”

“좋네. 그거야 어렵지 않지.”

쿠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보여준다고 해서 그들이 손해 볼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혹여 이들이 비밀을 밝혀 오랫동안 쌓인 궁금증을 풀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여긴가요?”

쿠스가 안내한 곳은 검은 망치 마을에서 두어 시간 떨어진 계곡 아래에 위치해 있는 동굴 앞이었다.

“이 기운은 레어에서 느꼈던 것과 같아.”

엘라임이 주변을 살피고는 말했다. 헬리아 또한 이미 이 기운이 세르게니아의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인지했다.

탕탕!

허공에 손을 내려치자 마찰음이 들려왔다. 마법진이었다.

“마법진이 쳐져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네.”

쿠스가 고개를 저었다. 헬리아는 마법진을 살피다 엘라임을 보았다. 엘라임은 헬리아의 의도를 알아챘지만 고개를 저었다.

“힘으로라면 어떻게 해보겠지만 반드시 가능하다는 보장이 없어. 무엇보다 네 힘 전부를 끌어내야 할 정도야.”

“도대체 뭘 만든 거지?”

헬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본 세르게니아는 속을 알 수 없어도 아무 의미 없는 짓을 할 자는 아니었다.

“어떻게 할 거야?”

“글쎄.”

헬리아는 마법진 너머 동굴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서둘러 엑시온이 부활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 혹여 마법진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일이라도 생긴다면 득보다 실이 많았다.

‘하지만…….’

헬리아는 동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무언가의 이끌림처럼, 마치 누군가 자신을 이곳에 데려다 놓은 것처럼 저 동굴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파아앗!

헬리아의 목에서 빛이 퍼져 나갔다.

“이건……?”

헬리아의 펜던트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정확히는 세르게니아의 펜던트였다. 이전에 이것으로 레어의 문을 열기도 했었다. 그 뒤로 아공간에 넣지 않고 그냥 목에 걸고 있었다.

“이게 왜?”

헬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마법진이 스스스 사라졌다. 그 갑작스런 변화에 헬리아는 물론 일행 모두 어리둥절해했다.

“이번에도 열쇠 아닐까요?”

세인의 말에 헬리아는 눈썹을 치켜 올리곤 펜던트를 보았다.

“무슨 만능키도 아니고.”

“아무튼 마법진이 없어졌으니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들어갈 거지?”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펜던트를 미심쩍은 눈으로 한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들이 안에서 본 것은, 흑마법진이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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