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6/42)

제3장 연합

아스칼이 헤네스 자작을 습격하기 몇 분 전.

헬리아는 대런을 비롯한 엘프들과 함께 헤네스 자작의 진영 인근에 모였다. 칼 리퍼 일행을 처리했지만 그들의 본대가 다시금 하얀 바람의 부족 마을을 습격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헬리아 일행은 곧장 헤네스 자작가를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처음에는 강이 있는 곳으로 유인해 한 번에 쓸어버릴 생각이었으나, 헤네스 자작가에 붙잡힌 엘프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곤 계획을 수정했다.

“대런, 너는 다른 이들과 함께 엘프들을 구해 줘.”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대런은 그녀가 다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엘프들의 눈에는 헬리아에 대한 강한 신뢰가 엿보였다. 마을을 구해 준 것도 모자라 이렇게 나서주는 것만으로도 엘프들에게는 커다란 고마움이었다.

“그럼.”

대런 일행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이제 헬리아와 다람쥐로 변한 엘라임이었다. 헬리아는 멀리서 헤네스 자작의 진영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아니, 그보다 헤네스 자작의 위치는?”

[중앙의 가장 큰 천막에 있어.]

“바로 움직이자.”

헬리아가 헤네스 자작의 진영 안으로 은밀히 숨어들었다. 이미 엘라임의 힘으로 이들이 먹는 물을 술로 바꿔놓았다. 헬리아가 만 명을 쓸어버렸다 해도 그건 큰 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무리 그녀라도 이천 명이나 되는 헤네스 자작가의 병력을 처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해서 엘프들을 구하고 헤네스 자작을 처리한 뒤 오합지졸이 된 이들을 강 쪽으로 유인해 처리할 생각이다.

[어휴, 술 냄새. 전부 취했어.]

엘라임이 코를 막고 눈을 찌푸렸다. 강한 알코올 냄새가 진영 전체에 진하게 풍겨왔다.

“개판이로근.”

[그거 개한테 욕이야.]

취하게 만들어 군기를 흩뜨릴 생각이었으나 이 정도로 군기가 확 빠져 버릴 줄 몰랐다. 애초부터 군기가 글러먹은 게 아니라면.

“나라가 전쟁 중인데…….”

[제대로 된 군대라면 전쟁 중인데 엘프나 잡고 있지 않겠지.]

“쯧, 그건 그러네.”

헬리아는 혀를 차고는 서둘러 움직였다. 솔직히 서둘러 움직일 필요를 못 느낄 정도였다. 그만큼 제정신인 놈들이 없었다.

“그래도 소리는 지워줘.”

[맡겨둬.]

이렇게까지 해줘야 하나 싶었지만 어쨌든 헬리아는 헤네스 자작이 있는 커다란 막사로 움직였다. 천막 앞에는 두 명의 기사가 보초를 서고 있었지만 헬리아는 엘라임의 도움으로 입구가 아닌 다른 쪽으로 돌아서 소리 없이 천막을 찢고 안으로 들어갔다.

“자, 이리 오렴.”

“시, 싫어!”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란 말인가. 헬리아는 안에서 들려오는 불쾌한 소리에 대번에 눈매가 확 구겨졌다.

[엑!]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다 엘라임이 못 볼꼴을 본 것처럼 괴성을 내뱉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로군.’

[뭔 말인지 확실히 알겠어.]

비곗덩어리로 가득한 돼지 한 마리가 두툼한 뱃살로 미녀를 억누르고 있었다. 정말이지 계속 볼 광경은 아닌지라 헬리아가 움직였다.

‘얼른 처리해.’

엘라임을 시켜서 말이다.

[내가? 내가 왜? 더럽다구.]

‘나도 더러워서 싫어. 얼른 해.’

[으으.]

‘그럼 내 손으로 저 돼지를 만져야겠어?’

[실제로 만지는 것도 아니고, 에잇, 알았어.]

그래도 헬리아가 돼지를 처리하는 게 왠지 싫은 엘라임이 나섰다. 그는 투덜거리면서 헉헉거리고 있는 돼지, 아니, 헤네스 자작에게 다가갔다. 헤네스 자작은 여인의 몸을 짓누르고 히죽 웃었다. 주먹을 부르는 음흉한 웃음이었다.

“후후, 참으로 귀엽구나.”

헤네스 자작의 손이 여인을 어루만졌다. 여인은 어딘가 몸이 불편한지 힘을 쓰지 못했다. 아마 반항하지 못하게 약을 먹인 게 아닌가 싶다.

“자, 그럼!”

헤네스 자작이 몸을 바짝 여인에게 붙였다. 그리고 거사를 치르기 위해 움직이려 할 때였다.

서걱!

‘서걱?’

그 순간이었다.

푸아아악!

갑자기 피가 솟구치는 게 아닌가. 바로 자신의 아랫도리에서.

“어, 어어어?”

그 현실성 없는 광경에 자작은 제대로 비명도 못 지르고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엄습하는 고통에 비명을 지를 찰나.

“커억!”

털썩!

헤네스 자작의 몸이 침대에 처박혔다. 즉사였다.

“까, 까아악! 흡!”

“쉿, 조용히!”

여인이 놀라 비명을 지르자 헬리아가 얼른 입을 막았다. 여인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여인은 뭇 남자들의 마음을 흔들 만큼 정말 아름다웠지만 아쉽게도 헬리아는 여자였다. 뭐, 남자였다고 해도 흔들릴 리 만무했지만.

“누, 누누?”

“구하러 왔어요.”

솔직히 이곳에 여자가 있을 거라 생각은 못 했지만, 암튼 그렇게 말하자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안심한 얼굴이다. 헬리아가 여자라는 점도 긴장을 푸는 데 한몫했다.

“우선 뭐라도 입어요. 바로 여길 빠져나갈 거예요.”

“아, 네네!”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비틀거렸다. 아무래도 정말 약에 취한 듯했다.

“이것도 먹어요. 약 기운이 가실 거예요.”

“가, 감사합니다.”

여인이 헬리아가 내민 포션을 받아 마셨다. 그러자 온몸에 활력이 돋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여인의 머리에 귀가 나 있는 게 아닌가. 그 고양이 같은 귀 말이다. 거기다 꼬리도…….

[묘인족이야.]

‘묘인족?’

엘프나 드워프는 자주 보았지만 묘인족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신기해할 필요 없어. 저들 입장에서 보면 드래곤의 딸인 네가 더 신기할 거야.]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어?]

“무슨 일이야?”

[누가 이곳으로 오고 있어. 넷, 아니, 다섯이야.]

헬리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설마 알아차린 것인가? 헬리아가 몸을 움직였다. 기척을 지우고 소리와 냄새마저 지웠다. 분위기가 이상한 걸 눈치챈 여자도 덩달아 긴장했다.

“숨어 있어요.”

“네, 네.”

묘인족 여자를 숨긴 뒤 헬리아는 방 안의 초를 껐다. 그러자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조심해. 기운이 심상치 않아. 이 기운은…….]

엘라임은 감지한 기운에 눈을 찌푸렸다.

[소드 마스터야.]

“소드 마스터라고?”

[소드 마스터가 이곳으로 오고 있어.]

“소드마서터가 이곳에 왜?”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의 머리가 복작해졌다. 처음에는 적인 줄 알았는데 소드 마스터란 소리에 다시 생각했다. 헤네스 자작가에 소드 마스터는 없었다. 그렇다면 외부에서 온 인물이라는 것. 한데 이상하게 헤네스 자작의 지원군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혹시 이안일까?’

소드 마스터가 어디 흔하게 있는 존재인가? 알리오 산맥 인근에서, 그것도 소드 마스터라면 떠오르는 건 이안밖에 없었다.

[왔어!]

헬리아는 혹시 몰라 우선 대기했다. 그리고 그 순간 보초가 쓰러지면서 한 인형이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이안이 아니야!’

상대의 기운을 알아채곤 헬리아가 먼저 공격을 가했다. 그러자 채앵 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가 헬리아의 공격을 막았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대치가 이어졌다. 헬리아는 상대를 확인했다.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체격이나 분위기로 이안이 아님을 확인했다.

‘도대체 누구지?’

[어라?]

‘왜?’

[이 기운은 설마?]

‘뜸들이지 말고 말해봐.’

[그자인 것 같은데?]

‘그자라니? 누구?’

[그 왜 있잖아, 황태자 옆에 있는 놈.]

“……아스칼?”

그 순간 상대가 움찔했다. 헬리아는 그것으로 상대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서, 설마.”

역시 아스칼의 목소리였다. 헬리아는 불을 밝혔다. 그러자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아스칼이 놀라 눈이 커졌다.

“……헤, 헬리아 공주님!”

“역시 아스칼 맞네.”

이안이 아니라는 것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말이다. 헬리아는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아스칼에 다가갔다.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도대체 여기 어떻게 있는 거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 공주님이 어째서 여기에 계신 겁니까?”

“나야 뭐, 사연이 길어.”

“후우, 그래도 다행입니다. 적인 줄 알고 놀랐습니다.”

“나야말로.”

이안인 줄 알았다고. 헬리아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보다 아스칼이 여기에 있다는 건.’

“그럼 전하도?”

“네, 이 근처에 계십니다.”

“설마 하긴 했는데, 정말이었어.”

칼 리퍼의 잔당으로부터 헤네스 자작이 반란군을 추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데 아무리 봐도 이들의 행동은 그저 이종족 사냥에 불과했다. 그래서 반란군의 추적은 그저 보여주기 식인 줄 알았다.

“우선 이럴 게 아니라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스칼의 말에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안이 아니라는 게 여전히 아쉽긴 하지만 이런 곳에서 반란군을 만나다니.

‘일이 쉽게 돌아가는데.’

[무슨 생각이야?]

엘라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헬리아는 대답 대신 묘인족 여성을 불렀다.

“이제 나오세요.”

헬리아의 말에 숨어 있던 묘인족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스칼이 놀라 물었다.

“이 여성은…….”

“뭐, 돼지가 제 분수도 모르고 차지하려는 걸 구해 줬지.”

그녀의 말에 상황을 이해한 아스칼은 싸늘한 눈으로 죽은 헤네스 자작을 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잘린 거시기를.

“제가 손쓸 것도 없을 것 같군요.”

아스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하께 모시겠습니다.”

아스칼이 헬리아와 묘인족 여성을 데리고 케이시스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헬리아와 케이시스가 합류한 뒤 헤네스 자작의 진영은 그야말로 하루 만에 무참하게 당하고 말았다. 헤네스 자작은 죽고 없는데다 술에 취한 병사들이 제대로 대처할 리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적들에게 헤네스 자작의 군대는 별다른 저항도 못 해보고 투항했다. 정말이지 운이 나빴다. 헬리아만도 버거운데 소드 마스터가 포함된 군대라니. 헤네스 자작의 군대가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 * *

“라비아!”

“아, 아버지!”

묘인족 여성이 붉은 발톱 족장인 랭가의 품에 안겼다. 랭가는 조심스럽게 손으로 자신의 딸 라비아를 어루만졌다.

“괜찮으냐?”

“네.”

“정말 다행이구나, 정말…….”

라비아와 랭가의 상봉이 이어졌다. 헬리아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순간 자신의 아버지 빈센트가 떠올랐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홀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아버지.

“공주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소.”

케이시스가 다가오자 헬리아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의 뒤에 아스칼이 섰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한데 다른 이들은?”

항상 그녀의 곁에 있어야 할 이안은 물론 아무도 보이지 않자 의아하게 생각한 케이시스가 물었다. 헬리아는 케이시스의 물음에 씁쓸히 웃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어요.”

“그렇소…….”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케이시스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래도 건강해 보여 다행이오.”

“저야말로 걱정했어요. 아니, 언니가 걱정이 많았어요.”

케이시는 레이아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에 미안함과 그리움이 묻어났다.

“레이아나의 일은 정말 고맙소. 그대가 아니었다면 아들은 물론 레이아나마저 잃었을 것이오.”

벨리앙 백작가의 일을 전해 들은 케이시스는 그날 얼마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는지 모른다.

“고맙소. 계속 도움만 받는 것 같소.”

케이시스는 진심을 가득 담아 고마움을 전했다.

“이럴 게 아니라 내 거처로 초대하겠소.”

“제가 들어가도 괜찮으신가요?”

“공주가 들어가지 못할 곳은 어디에도 없소.”

그 신뢰 어린 말에 헬리아는 피식 웃으며 케이시스의 진영으로 몸을 옮겼다.

* * *

“차 한잔하시겠소?”

케이시스가 직접 찻잎을 우려 차를 내왔다. 향긋한 차향이 천막 안을 감돌았다. 헬리아와 케이시스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그리 비싼 차는 아니지만 제법 맛이 괜찮소.”

케이시스가 웃으며 차를 권하자 헬리아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떻소?”

“씁쓸한 맛이 강하긴 하지만 향이 진하고 풍부하네요. 처음 맛보는 차예요.”

맛을 본 헬리아가 눈을 반짝이자 케이시스가 미소를 지었다.

“붉은 발톱 부족에게서 얻은 차요. 향이 아주 좋지.”

“이 차, 혹시 제게 주실 수 있으신가요?”

“한두 개 달라는 건 아닐 터?”

“당연하죠.”

“역시 공주답구려. 안타깝지만 나 역시 그리 많지는 않소. 다만 공주라면 붉은 발톱 부족에게 직접 차를 얻을 수 있을 것이오.”

헬리아가 붉은 발톱 부족장의 딸을 구해 준 걸 알고 있기에 그리 말했다. 헬리아와 케이시스는 그 뒤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찻잔이 바닥을 보일 즈음, 헬리아가 표정을 바꾸고 입을 열었다.

“이제 움직이실 건가요?”

헬리아의 말에 케이시스의 표정도 무겁게 변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움직일 거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아버지에게 항거하는 이가 많아 다행이었소.”

케이시스는 씁쓸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친아버지에게 칼을 들이대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그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렇게까지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었다. 마룡을 부활시키고, 흑마법사와 함께 대륙을 통일하려 하다니.

제국 내에선 백성들이 배고픔과 가난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는 와중에 전쟁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백성이 죽는데 영토만 늘린다 하여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을 바로잡는 것 또한 아들의 몫일 터.

케이시스는 마음을 다잡았다. 황제군에 비해 약한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사람을 끌어모았다. 현 황제에게 반하는 세력을 결집시키고, 마탑의 도움을 얻어냈다. 수많은 황태자파 사람들이 황제의 탄신일에 사로잡혀 인질이 되거나 죽임을 당했지만 영지에 남아 있는 귀족들과 자식들이 가족의 복수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흑마법사에 반하는 마탑 또한 자신에게 힘을 보탰다. 물론 아직까지 제국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현재 제국은 전쟁으로 전력이 분산되어 있는 상태였다.

남쪽으로는 아르센 왕국을 주축으로 라비안 왕국과 그 외에 왕국들이 동맹을 맺어 제국군을 압박했다. 제국군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막기 위해 남쪽에 상당한 병력을 내려보내야 했고, 그 결과 수도의 병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도를 공략한다면 승산이 있었다. 거기다 이종족의 힘까지 더해진다면 수도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묘인족의 딸을 직접 구하려 이곳까지 온 건가요?”

“그렇소.”

“하지만 그것만으론 이종족들이 움직이지 않을 텐데요.”

“역시 공주요. 물론이요. 나는 그들에게 자유를 약속했소. 그들 또한 제국의 땅에서 살아가는 백성이오. 그러나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핍박받고 있지. 나는 그것을 바꿀 것이오.”

확실히 핍박받는 이종족 입장에서는 끌리는 조건일 터였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를 되찾아야 그 권리가 빛을 발하는 법이다. 그들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대로 있다가는 영영 자신들이 사라질 것이라는걸.

“하지만 아직 힘이 미약하오.”

“말씀하세요.”

헬리아가 입술을 끌어 올리며 케이시스를 보았다. 모든 걸 다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그 눈빛에 케이시스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엘프들의 힘이 필요하오.”

“저는 제삼자에 불과해요.”

“엘프들과의 자리만이라도 주선해 주면 되오. 많은 건 바라지 않소. 아니, 그들의 힘을 얻는 건 내 힘으로 하고 싶소.”

엘프들은 원래부터 폐쇄적이라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최근 인간들의 횡포로 더욱 폐쇄적이 되었다. 그런데 헬리아가 그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헬리아는 가만히 케이시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진실을 담고 있었다. 거짓말할 사람도 아니다. 그렇기에 헬리아는 케이시스가 마음에 들었다. 정말이지 황태자가 아니었다면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을 정도로.

‘황태자인 게 아쉽군.’

그러니 입맛을 다셔야 했다. 아무튼 헬리아는 케이시스의 말에 엘프들을 떠올렸다. 엘르의 부탁으로 엘프들을 도와주면서 생각했다. 지금의 순간의 습격을 막는다고 이들이 안전할까?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지 말라는 보장도 없지 않을까?

그렇기에 헤네스 자작을 처리하면서 헬리아는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황태자의 등장에 헬리아는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았고, 황태자가 그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헬리아는 이미 황태자가 묘인족을 구하러 온 모습에서 이종족의 규합과 자유를 논하리라 예상했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헬리아는 바로 말하지 않았다. 케이시스의 말대로 엘프들의 힘을 빌리고 말고는 자신의 의사가 아니라 엘프들이 결정해야 하는 문제다.

“알겠어요. 자리를 주선해 볼게요. 물론 안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왠지 케이시스라면 엘프들의 찬성을 이끌어 내리라 생각했다. 케이시스는 헬리아의 말에 기쁜 표정을 지었다.

“물론이오. 그건 걱정 마시오.”

그러나 헬리아가 잠시 간과한 것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가 엘프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실감하지 못했다. 마을의 은인인 그녀가 주선한다면 엘프들은 최소한 색안경을 끼지 않고 대화 테이블에 나오리라. 케이시스는 그녀를 대하는 엘프들의 태도에서 그것을 읽었다. 그러면 되었다.

“한데 서둘러 움직여야 할 거예요.”

헬리아의 말에 케이시스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좀 전보다 더 굳어 있었다.

“엑시온이 곧 부활할 거예요.”

“이미 부활한 것 아니었소?”

불길한 느낌에 케이시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드래곤 하트를 찾기 위함이었어요. 그런데 드래곤 하트는 엑시온에게 넘어갔어요. 엑시온이 드래곤 하트를 전부 흡수한다면 완전히 부활할 거예요. 그 전에 엑시온을 처치해야 해요.”

헬리아의 말에 케이시스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한 달, 아니, 이제 3주 남았어요. 그전에 반드시 움직여야 해요.”

헬리아가 핵폭탄을 떨어뜨렸다. 케이시스의 얼굴에 긴장이 어리기 시작했다.

* * *

“대런.”

막사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엘라임과 대런이 헬리아에게 다가왔다.

“미안. 이야기가 너무 오래 걸렸네.”

헤네스 자작에게서 엘프들을 구한 뒤 대런을 비롯한 엘프들도 헬리아를 따라 케이시스 진영으로 왔다.

대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잠시 몸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붙잡힌 엘프들은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음은 물론 육체적으로도 상처를 입은 이가 많았다.

“덕분에 많이 진정된 것 같습니다.”

헬리아와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이곳에서 그들의 대우는 좋았다. 거기다 다른 이종족들도 있고 하여 크게 반발감이 들지 않았다.

“그거 다행이네. 그보다 혹시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까?”

“자리라면, 저들과 말입니까?”

대런은 헬리아의 말의 의미를 파악해 냈다.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해.”

“알겠습니다.”

“어?”

대뜸 대런이 승낙하자 헬리아의 눈이 커졌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허락하자 의아함이 들었다.

“너무 쉽게 승낙하는 거 아니야?”

“믿을 만한 사람이니 말한 것 아닙니까?”

대런이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그 말에 헬리아는 피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너무 날 믿으면 안 되는데.”

“당신을 믿지 못하면 우리들은 아무도 믿지 못할 겁니다.”

대런의 말에 헬리아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거래가 될 거라고 생각해. 나로서는 앞으로의 일을 책임져 줄 수 없으니까.”

“당신이 해준 일만으로도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거 고마워.”

엘프들의 미래까지 돌봐주기엔 헬리아에게 시간이 없었다. 그녀가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직접 엘프들을 지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제국이고 아르센에서 너무 먼데다 헬리아는 엑시온과의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방안이 있고, 믿고 맡길 사람이 있다면 되었다.

* * *

케이시스 진영의 한 막사 안.

막사 안에는 헬리아가 침대에 누워 있었고 옆에는 엘라임이 그녀의 침대 옆에 걸터앉아 있었다. 늦은 밤이라 내일 아침 일찍 움직이기로 결정되어 하룻밤을 이곳에서 머물게 되었다.

엘라임은 눈을 감고 있는 헬리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이 헬리아의 이마와 뺨을 어루만졌다.

“거기까지 해.”

“……안 잤어?”

“내가 잤으면 어쩌려고?”

헬리아가 노려보자 엘라임은 헛기침을 했다. 그러다 퍼뜩 화제를 돌렸다.

“엑시온이 만약 드래곤 하트를 흡수하면 어쩌게?”

“그럴 수 없게 해야지.”

“……무리하지 마.”

“…….”

“그런데 다른 방법은 없는 거야?”

엘라임은 불안했다. 엑시온을 처리하지 못하는 것보다 헬리아가 잘못될까 봐 그게 걱정이 들었다.

“…….”

헬리아는 엘라임의 말에 다시 눈을 감았다.

“드래곤 하트만이 엑시온을 봉인할 수 있어.”

“네 몸 못 버텨.”

머릿속에 세르게니아의 말에 맴돌았다. 원래 드래곤 하트는 세르게니아가 헬리아를 위해 남겨둔 것. 이미 엑시온에게 빼앗겼지만 되찾아도 헬리아는 그것을 자신에게 쓸 마음이 없었다. 아마 이 사실을 엘라임이 알았다면 당장 화를 냈으리라. 그래서 더 말할 수 없었다.

“없어.”

“……정말? 뭔가 있는 거 아니야?”

과연 헬리아의 옆에 가장 오래 있던 엘라임이 헬리아의 머뭇거림을 읽었다. 엘라임이 헬리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 모습이 엘라임이 헬리아를 덮치기 전 같았다.

“없어. 다른 방법 따위.”

“…….”

엘라임은 물끄러미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았어.”

‘있구나, 방법이.’

“그거밖에 없는 거지?”

‘할 생각이 없구나.’

엘라임은 헬리아의 얼굴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죽지 마. 절대. 절대 죽게 하지 않을 거야.”

“…….”

엘라임의 푸른 눈동자가 짙게 빛났다. 헬리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쓰게 웃었다.

“얼굴이나 치워.”

“싫은데?”

“아주 기어오르지?”

“흐음, 기어오르는 게 뭘까?”

엘라임이 자세를 바꿔 아예 헬리아의 위에 올라탔다. 헬리아의 몸이 엘라임 아래에 갇히게 되었다.

“안 비켜?”

헬리아가 눈매를 좁히자 엘라임이 능글맞게 웃었다.

“나도 여기서 잘 거야.”

“누구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

엘라임이 눈꼬리를 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엘라임의 얼굴이 헬리아와 가까워졌다.

“자, 잠깐!”

헬리아가 그녀답지 않게 놀라 눈을 크게 뜰 때, 쪽 하고 소리가 났다. 헬리아는 제 이마에 닿는 엘라임의 입술에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내가 전에 말했잖아. 네가 해줄 때까지 기다릴 거라고.”

“……유치하긴.”

“좋아. 조만간 받을 것 같군.”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쾅 부딪쳤다.

“으악!”

“까불고 있어.”

“아파!”

“아프라고 하는 거다. 이 변태 정령왕아!”

“쳇.”

엘라임은 투덜거렸다. 헬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옅게 웃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머지않아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운디네, 여기 좀 치워줘.”

“어이, 거기 조심해!”

하얀 바람의 마을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부서진 목책을 수리하고 죽은 엘프들의 장례를 치르며 마을을 정비했다.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거의 다 왔대.”

엘프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멀리서 낯익은 무리가 마을로 다가왔다.

“왔어!”

“난 바로 장로님께 알릴게!”

엘프들이 기다리던 이는 바로 헬리아와 대런 일행이었다. 미리 소식을 전해 들은 장로 에리디아스가 그녀를 맞이했다.

“장로님.”

헬리아가 그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에리디아스가 환히 웃었다. 정말이지 화사한 미소였다. 보는 사람이 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그러다 그의 눈이 이내 휘둥그레졌다.

“저들은…….”

바로 헬리아의 뒤에 있는 엘프들 때문이었다. 에리디아스의 눈에 물기가 살짝 어렸다.

“에냐!”

“리디!”

“아버지!”

헤네스 자작에게 납치되어 붙잡혔던 엘프들이 마을로 돌아온 것이다. 에리디아스와 함께 헬리아 일행을 노심초사 기다리고 있던 엘프들이 너도나도 외쳤다. 엘프들은 서로 얼싸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어찌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에리디아스는 헬리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이지 더 이상 뭐라 고마움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만큼 헬리아가 하얀 바람의 부족에게 준 것은 너무도 컸다. 헬리아는 에리디아스의 어깨를 붙잡아 일으켰다.

“제 목숨을 살려줬는데 이 정도야 기본이죠. 잘 살려줬죠?”

에리디아스는 헬리아의 장난스런 말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자신들이 그녀를 구해 주었다 하나 이미 더 큰 것을 받았다.

“그보다.”

헬리아의 시선이 나머지 엘프들에게 향했다. 그들은 마을 엘프들이 서로 기뻐하는 모습을 마냥 부럽게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은 하얀 바람의 마을 출신이 아닌 다른 마을 출신의 엘프들이었다. 이미 돌아갈 마을이 사라져 갈 곳이 없어 헬리아가 이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갈 곳이 없다 하여 이리로 데리고 왔어요.”

“이렇게나…….”

다른 마을 엘프들은 에리디아스의 반응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에리디아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에 따라 엘프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얼마나 상심이 크시오?”

“예?”

“잘 오셨소. 괜찮다면 이 마을에서 지내겠소?”

“가, 감사합니다.”

“저, 정말로 그래도 되나요?”

“손이 부족하던 참인데 도움을 받고 싶소.”

“물론입니다.”

“감사합니다.”

에리디아스의 말에 그제야 엘프들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에리디아스 또한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엘프의 수가 줄어들어 걱정이었는데 오히려 잘되었다. 자연과 조화를 사랑하는 엘프들이기에 융화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분들은…….”

에리디아스가 그제야 헬리아의 곁에 선 낯선 남자들을 보았다. 엘라임이야 당연히 알고 있으니 제쳐 두고 낯선 두 남자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에 경계심이 어렸다. 에리디아스는 단번에 그들이 인간임을 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자연 헬리아를 향했다.

“이분들은…….”

헬리아가 케이시스를 바라보자 케이시스가 앞으로 나섰다.

“케이시스라 하오. 여기는 내 호위 기사 아스칼이오.”

케이시스의 소개에 에리디아스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그 이름은…….”

“과거 제국의 황태자로 불렸소만 지금은 아니오.”

“……황태자.”

에리디아스의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곁에 있던 엘프들도 마찬가지로 분노가 어린 표정을 지었다. 누구보다 제국 황실에서 이종족을 인간 이하로 취급해 왔다. 비록 황태자가 폐위되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앙금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이거 쉽지 않겠는데?]

‘글쎄.’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말을 흐렸다. 에리디아스가 황태자에게서 시선을 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웃고 있는 그녀를 보곤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했다.

“후우…….”

에리디아스는 이내 복잡한 듯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군. 안으로 드시오.”

* * *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지그시 눈을 감았던 에리디아스가 이내 눈을 뜨고 케이시스를 바라보았다.

“동족을 구해 준 점은 감사하네. 하지만 우린 인간을 믿지 않는다. 하물며 황족은 더더욱 믿지 않네.”

에리디아스가 날카롭게 대답했다. 그의 도움으로 동족이 무사히 마을로 돌아왔으나 제국의 황족은 이종족 탄압에 앞장섰다. 오랫동안 쌓인 그 은원이 쉽게 풀리겠는가. 그러나 케이시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이런 반응을 예상했고, 경험해 봤다.

“알고 있소.”

“황제는 우리를 핍박하고 억압했네. 그로 인해 죽어 간 우리 동족의 수가 셀 수도 없이 많다는 것도 아는가?”

에리디아스의 눈에는 미미한 살기와 분노가 어려 있었다. 케이시스는 그것을 회피하지 않았다.

“모두 알고 있소.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알고 있소.”

“…….”

“그렇기에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것이오.”

에리디아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바로잡는다?”

“아버지는, 황제는 잘못된 길로 가고 있소. 나는 그것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오.”

“황제가 되려는가?”

“더 이상 누군가 슬퍼하지 않을 세상을 만들고 싶소. 그것이 인간이든 이종족이든.”

“…….”

케이시스의 진정 어린 말에 에리디아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서야 두 눈을 떴다.

“잠시만 시간을 주시겠나?”

케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방을 나섰다. 자신의 진심은 전달했다. 이제 남은 것은 에리디아스의 결정뿐. 그가 나가자 에리디아스가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자신들의 힘을 빌려 달라 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녀가 모르고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에리디아스가 입을 열었다.

“어찌 생각하십니까?”

“결정을 하는 건 장로님과 엘프들의 몫이에요.”

헬리아의 말에 에리디아스는 물끄러미 헬리아를 보았다.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다. 며칠 겪어보지 않았지만 그녀와 같은 자들은 결코 허투루 움직이지 않는다. 에리디아스는 이미 그들의 방문에 그녀의 의사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에리디아스가 다시 한번 물었다. 헬리아는 잠시 말을 골랐다. 일부러 그에게 선택권을 준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물어온다면 이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차례다.

“지금의 엘프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

에리디아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지금 상태로 간다면 과연 엘프들이 어찌 될지 그도 확신할 수 없었다.

“황제는 이 제국을, 아니, 대륙을 피로 물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룡과 손을 잡았어요.”

“마룡!”

헬리아는 놀라는 에리디아스에게 자신이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헬리아의 이야기를 다 들은 에리디아스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마룡이…….”

“엑시온은 곧 부활할 거예요. 그럼 황제도 움직이겠죠. 그때는 그를 막을 수 없어요. 더없이 이종족을 착취하고 학살할 겁니다. 그전에 막아야 합니다.”

“허허…….”

에리디아스는 이 충격적인 이야기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마룡 엑시온의 부활이라니, 그리고 자신의 형이 그에게 목숨을 잃었다니.

“황태자와 전 수도로 올라갈 겁니다. 성공한다면 황태자가 황제가 될 거예요. 그럼 그의 말처럼 이종족도 억압받지 않는 세상이 올 수도 있을 거예요. 뭐, 따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핍박할 사람은 아니에요.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 쟁취해야만 얻을 수 있다고 봐요.”

누군가 얻어준 자유가 과연 진정한 자유일까. 아니, 과연 그들이 자유를 보장해 줄까. 자유는 스스로 힘을 가져야 가질 수 있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스스로 움직여야 해요.”

“스스로…….”

“분명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을 거예요. 전쟁은 그런 거니까.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다. 미래를 위해서 지금을 희생하는 것. 그건 당사자가 선택해야 하는 일이다.

헬리아는 싱긋 웃으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세상에 진리가 하나 있죠.”

그 진리를 헬리아는 삶의 지표로 삼아 왔다.

“공짜는 없다.”

그 말에 에리디아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 * *

“받아들일까?”

헬리아와 이야기를 나눈 뒤 에리디아스는 마을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반나절이 지나도록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헬리아와 엘라임은 세계수 아래에서 회의 결과를 기다렸고, 황태자 일행은 엘프들이 내준 다른 방에서 대기했다. 하얀 바람의 부족의 은인인 헬리아이기에 세계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헬리아는 세계수에 손을 대고 눈을 감았다. 따스한 기운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세계수가 헬리아의 손길을 반기며 나뭇잎을 흔들었다.

그때 엘라임이 헬리아의 손을 세계수에서 홱 떼어냈다.

“왜?”

“요 세계수가 엉큼하잖아. 네 손길에 부르르 몸을 떨다니.”

“별걸 다.”

“별거라니. 자, 차라리 날 만져.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

“이 변태 정령왕이.”

엘라임이 헬리아의 손을 잡아 제 가슴에 갖다 대자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아주 팔딱팔딱 뛰네?”

“크음.”

엘라임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헬리아는 그 모습에 또 웃음이 났다. 그러나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대었다.

“헤, 헬리아!”

“왜? 나무한테도 기대게 못 하면서.”

“뭐, 아, 아니, 마음껏 기대라구!”

엘라임은 와락 헬리아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될 거야.”

“…….”

“너무 걱정하지 마.”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엘라임이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세계수의 온기도 따뜻했지만 헬리아는 엘라임의 온기가 그보다 더 따뜻하다고 생각했다.

‘힘이 넘쳐.’

세계수 덕분인지, 아니면 어머니가 사라지고 난 뒤여서인지 엑시온에게 봉인 마법을 쓸 때와 달리 몸 안에 힘이 넘쳤다. 이대로라면 엑시온을 자신의 힘만으로도 봉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드래곤 하트를 온전히 아버지에게 줄 수 있게 된다.

‘그래, 문제없어.’

헬리아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시선이 회의를 열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거야.”

엘프의 미래를 위해서.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 * *

“제안을 받아들이겠네.”

에리디아스의 말에 케이시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게 정말이오?”

“단, 조건이 있네.”

“말씀하시오.”

“그대를 믿어보겠네. 아니, 그녀가 당신을 믿기 때문에 이 결정을 수락한 것이네. 그렇지 않았다면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네.”

“알고 있소.”

케이시스가 헬리아를 보았다. 이 만남도, 그리고 장로의 결정도 그녀의 존재로 인해 가능함을 알았다. 그렇기에 케이시스 또한 헬리아에게 이 자리를 주선해 달라 부탁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수명은 짧지. 그 약속을 문서로 남겨주시게.”

“물론이오.”

케이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 정도는 생각해 둔 상태다. 무엇보다 이종족이 직접 나서서 움직인다면 그들에게도 명분이 생긴다. 그 명분은 이종족 스스로가 자유를 얻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윽고 그 외의 것들을 상의한 후 에리디아스가 먼저 케이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내민 손에 케이시스가 살짝 놀랐다. 에리디아스는 미소를 지었다.

“인간들은 거래를 한 뒤 손을 맞잡는다고 알고 있네.”

“결코 후회하지 않게 하겠소.”

케이시스와 에리디아스가 손을 맞잡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