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권 - 34화 (34/42)

골드퀸

11

제1장 드래곤 레어

쏴아아아-

캄캄한 어둠 속에서 차가운 빗줄기가 내렸다. 헬리아는 온몸이 젖어드는 것을 느끼며 주변을 살폈지만 보이는 것은 온통 시커먼 어둠뿐이었다.

‘이곳은…….’

전에 보았던 그곳. 한번 꾸었던 꿈속이었다.

‘같은 꿈을 꾼 건가?’

가끔 꿈을 이어서 꾸는 경우가 없지 않은 일이라 헬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차피 꿈일 테니.

헬리아는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저 걸음이 옮겨졌다. 으레 꿈이 그렇듯 헬리아도 꿈이라 인식은 하지만 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진 못했다. 그렇게 얼마를 갔을까.

‘빛?’

멀리서 작은 빛이 그녀의 눈이 들어왔다. 아주 작은 불빛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포근하게 보였다. 헬리아는 그 불빛이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 작은 불빛은 그녀의 생각과 달리 컸다. 어느새 그 불빛은 작은 촛불 크기에서 사람만 하게 변해 있었다.

‘……사람?’

헬리아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을 뿜어내는 것이 사람임을 확인했다. 여인인 듯 길고 긴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금빛으로 반짝였다. 하지만 뒤로 돌아선 채라 그녀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헬리아는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들어 그녀에게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헬리아가 본 것은 바로 자신의 얼굴이었다.

짹짹짹!

헬리아는 귓가에서 울리는 새의 지저귐 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어느 방 안인 듯 따뜻하고 포근했다. 헬리아가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한 쌍의 눈동자가 보였다. 맑고 투명한 푸른빛의 눈동자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깼어?”

“……엘라임?”

헬리아는 잘 보이지 않는 시야에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벨리앙 백작가야.”

“벨리앙 백작가? 아…….”

헬리아는 그제야 기억이 떠올랐다. 헬리아와 벨리앙 백작의 군대가 제국군의 후방을 쳐 카이슈 백작을 사로잡았다. 뿐만 아니라 카이슈 백작이 붙잡히고 제국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결국 승리는 왕국군에게 돌아갔다.

“이겼구나.”

헬리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침대에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러자 순간 훅 하고 심장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너무 무리했어.”

엘라임이 짐짓 화가 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헬리아는 쓰게 웃으며 심장을 꾹 눌렀다. 그러자 어느 정도 통증이 가라앉았다.

“정말 그러다간 심장이 버티질 못할 거야.”

“알고 있어.”

“알고 있는 사람이!”

엘라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헬리아가 쓰러지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에 그는 더욱 화가 나고 분했다.

“그래도 점점 익숙해지는 것 같아. 사람이란 게 역시 적응의 동물 아니겠어.”

드래곤의 힘이라 명명한 이 힘은 쓰면 쓸수록 사용할 수 있는 시간과 힘의 크기가 점점 늘어났다. 어찌 보면 좋은 징조가 아닐까.

“익숙해지기 전에 부서질 수도 있어.”

“걱정 마, 나 헬리아라고.”

“그게 문제라고.”

엘라임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그녀를 말릴 수 있겠는가. 엘라임은 헬리아의 어깨에 고개를 푹 묻었다.

“다치지 마.”

“네가 있잖아.”

“당연하지.”

엘라임은 굳은 눈으로 말했다. 하지만 불안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헬리아는 고삐 없는 야생마와 같았다. 언제나 이성적인 그녀이지만, 아니, 그녀 스스로는 이성적이라 여기고 행동하지만 남이 보기엔 정말이지 무모하기 그지없었다. 9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녀를 지켜본 엘라임이지만 마음을 자각한 뒤로는 초조하고 더 가슴을 졸여야 했다. 헬리아가 그런 엘라임의 머리에 콩 하고 꿀밤을 먹였다.

“아파.”

“별 시답지 않은 걱정하지 말고. 상황은 어떻게 되었어?”

“네 손은 아프다고.”

엘라임은 투덜거리면서 말했다.

“카이슈 백작은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고, 현재 이곳에 아르센 왕국군이 주둔할 것 같아.”

“벨리앙 백작에겐 미안한 일이 되었네.”

이제 벨리앙 백작은 제국과 돌이킬 수 없이 척을 지게 되었다. 곧 벨리앙 백작의 소식이 황도에 전해질 것이다. 하지만 헬리아는 씁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애초에 헬리아가 벨리앙 백작가에 온 순간, 아니, 백작이 헬리아를 받아들인 순간 이런 상황을 예측했을 터. 그만큼 벨리앙 백작도 구석에 몰려 있었던 것이다.

“그보다 제롬은?”

헬리아는 지긋지긋한 스토커를 떠올리며 눈매를 찌푸렸다.

“보는 게 빠를 거야.”

“음?”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끄아아아!”

감옥 안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간수는 짜증이 나는지 귀를 막았지만 도통 저 소리가 멈출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찌 수감자의 입을 막아볼까 생각도 했지만 가까이 가기도 무서워 속으로 애간장만 태울 뿐이었다.

“저 새끼, 미친 거 아니야?”

“글쎄요.”

함께 감옥 안에 있는 카이슈 백작과 마이슨이 눈을 찌푸리며 소리를 치는 수감자를 보았다.

“이봐! 방 좀 바꿔달라고!”

그러나 간수는 이미 귀를 단단히 막은 상태라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야.”

카이슈 백작은 제 손목을 채우고 있는 마나 구속구를 보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그렇게 무참히 질 줄이야. 플로렌스 공작과 맞부딪친 후라지만 설마하니 새파랗게 어린 여자에게 그렇게 처참하게 질 줄은 몰랐다. 차라리 플로렌스 공작의 아들놈에게 졌다면 이렇게 분하지는 않지.

“인간 맞아?”

“일반인 기준으로 보면 백작님도 인간 같진 않으시죠.”

마이슨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들의 앞날은 죽음뿐 아니겠는가. 그나마 살려둔 이유는 아마 정보를 얻기 위함일 터. 마이슨은 이런 고민스런 상황에도 신경이 무쇠로 만들어졌는지 아무렇지 않은 듯한 카이슈 백작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라.”

“예?”

“죽일 생각이었다면 전장에서 죽였을 것이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 이유를 다 달성하면 죽이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이미 패배한 순간부터 카이슈 백작은 삶에 대한 의지를 접었다. 그저 지금은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저 시끄러운 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무슨 돼지 멱따는 소리도 아니고.”

“제법 잘 지내나 보군요.”

그때 감옥 안에서 듣기 힘든 맑고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이슈 백작과 마이슨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금발의 헬리아가 서 있었다. 카이슈 백작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헬리아 공주.”

카이슈 백작은 속이 뒤틀렸지만 이미 패자와 승자가 명확했다.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귀하신 몸께서 여긴 무슨 일이지?”

“끄아아아!”

또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젠장, 저 미친 새끼 좀 어떻게 좀 해보라고!”

“다행히 그럴 생각으로 왔습니다.”

헬리아는 카이슈 백작을 지나 비명을 지르는 이, 제롬에게 다가갔다. 카이슈 백작에 관해서는 플로렌스 공작이 알아서 할 것이다. 그를 죽이든 죽이지 않고 이용하든. 그녀에게 중요한 이는 제롬이었다.

“끄아아아!”

가까이 다가가니 귀를 찢을 듯한 비명이 더욱 커졌다.

헬리아는 간수에게 물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저런 거지?”

“이튿날부터 저럽니다.”

헬리아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제롬을 보았다. 상태가 가히 좋지 않았다. 헬리아에게 당한 상처는 물론이고 무언가 문제가 있는 듯 시커먼 마기가 들쑥날쑥 몸 안팎을 끊임없이 드나들고 있었다.

“마나가 역류한 것 같습니다.”

“역류?”

이안의 말에 헬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전에는 문제없었는데? 그동안 뭔가 이상이 생긴 건가. 엘라임, 저 녀석 좀 어떻게 해봐.”

“알았어.”

엘라임이 제롬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정순한 기운이 제롬을 향해 쏟아져 들어갔다.

“끄, 끄억!”

제롬은 마기와 정반대인 깨끗한 기운이 들어오자 몸을 뒤틀었지만 곧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잠잠해졌다. 그와 동시에 감옥 안을 가득 채운 마기도 사라졌다.

“효과가 있군.”

“온몸이 텅 비었지만 말이야.”

엘라임은 제롬의 몸 안에 있는 마기를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그 덕분에 제롬의 몸 안에는 마기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끄, 끄윽.”

제롬이 눈을 찌푸리더니 천천히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헬리아를 보고는 이를 갈았다.

“네년이!”

“그래, 좀 정신이 들어?”

“크, 크윽. 나, 날 어떻게 한 거지?”

제롬은 자신의 몸 안에 마기가 사라지자 놀란 듯 눈을 부라렸다.

“뭐 살려 준 거지. 안 그랬으면 마나가 역류한 채로 죽었을 테니까.”

“마나가 역류해?”

“몰랐던 모양이지? 마기가 역류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

제롬은 전혀 예상치 못한 듯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를 살려 준 것은 바로 헬리아 공주가 되리라.

제롬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무슨 생각이지?”

“지금부터 생각 중이야. 널 어떻게 할지. 그렇다고 풀어주기엔 스토킹당하는 것도 이제 지긋지긋하거든.”

“죽여라, 아니면 내가 반드시 네년을 죽이겠다.”

제롬의 살기에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하나 물어보지.”

“내가 말할 거라고 보나?”

제롬이 으르렁거렸다. 헬리아는 그의 태도에 우선 그를 무장해제할 필요성을 느꼈다.

“너 라몬 공작과 무슨 사이지?”

“…….”

제롬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헬리아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붉은 눈과 붉은 머리카락이라. 생각보다 드물거든. 그런 색.”

“…….”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운명적이라. 설마 라몬 공작이 네 아버지인가?”

제롬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이를 드러내며 분노를 표했다. 그것에 헬리아는 유니를 통해 제롬에 대한, 아니, 정확히는 라몬 공작의 가족에 대해 조사하여 알아낸 정보를 떠올렸다.

‘설마 나도 라몬 공작의 아들인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공식적으로 라몬 공작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아예 가정을 꾸렸다는 말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들이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드러내지 않은 아들. 콕 하고 찔러봤더니 빙고였다.

‘보아하니 아들 대접이 아니라 부하 대접이었구먼.’

“설마 아들이었을 줄은 몰랐는데, 이거 월척 아닌가?”

“무슨 소리냐?”

“아들이라면 몸값 좀 지불하겠지. 아무래도 전쟁은 돈이 들어서 말이야.”

헬리아의 말에 제롬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냉소가 어린 웃음이었다.

“그분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역시 그렇군.’

그러나 헬리아는 일부러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아버지인데?”

“…….”

“이거 참, 버려진 건가.”

“난 버려지지 않았다!”

“그게 버려진 거지. 아닌가? 구하러 오지도 않을 테고, 쓰고 버리는 도구 정도겠네.”

“이익!”

“그래서 도구님, 이제 어쩌실 생각인지?”

“난 도구가 아니다!”

“도구가 도구라고 말하는 거 봤나? 쓰는 사람이 도구라고 하니까 도구인 거지. 노예처럼 아무 이유 없이 쓰는 사람의 말을 듣는 자. 그게 도구다.”

“…….”

제롬은 이를 악물었다.

“라몬 공작에게 그렇게 충성할 필요가 있는 건가? 어차피 이대로 죽으면 개죽음이고, 다시 돌아가면 도구로 평생을 살겠지. 아버지인데, 이것 참, 불쌍해라.”

‘우와, 나쁘다.’

엘라임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아예 제롬을 라몬 공작의 도구로 콕 못을 박았다. 거기다 헬리아가 쐐기를 박았다.

“실패자에겐 마기를 역류하게 만들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어머, 몰랐나? 왜 마기가 역류한 건지?”

제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도 당한 게 있어서인지 지레짐작한 모양이다.

‘찬스로군.’

헬리아가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다른 자들도 모두 마기가 역류해 손쓸 틈도 없이 죽었더라.”

“…….”

제롬은 말이 없어졌다.

“결국…….”

낮게 내뱉은 제롬의 말을 헬리아가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하지만 듣지 못한 척 말을 이었다.

“뭐 잘 생각해 보라고.”

헬리아는 생각에 잠긴 그를 내버려 둔 채 감옥을 빠져나왔다. 감옥을 나오자 엘라임이 물었다.

“근데 정말 회유하게? 믿을 만한 자가 아니야.”

“어디든 써먹을 때가 있겠지.”

마기 역류 소리는 그냥 던져 본 말이었다. 솔직히 헬리아도 왜 제롬의 마기가 갑자기 폭주한 건지 알지 못했다. 그저 뭐라도 건져 볼까 하고 던진 말에 알아서 걸려준 것이다. 지금쯤 제롬의 머리가 복잡할 터.

“개똥도 쓸데가 있다고 하니까.”

헬리아의 짓궂은 웃음에 엘라임과 이안은 고개를 저었다.

“자, 그럼 서둘러 움직여야지.”

“어디로?”

“이제 움직여야지.”

헬리아의 눈이 진지하게 변했다. 어머니 세르게니아의 드래곤 하트, 그것을 찾으러 말이다.

* * *

콰앙!

대전 안이 거세게 울렸다. 대신들은 고개를 조아린 채 황제의 분노를 받아야만 했다. 황제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벌한 기운에 다들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카사스 2세는 그런 귀족들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말을 해보라.”

카사스 2세가 날카로운 눈으로 귀족들을 일일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귀족들은 차마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3만이다. 그런데 저들은 고작 1만에 불과했다. 그런데 대패를 해?”

콰앙!

카사스 2세가 손으로 의자걸이를 내려치자 단단한 나무에 황금으로 도금된 손잡이가 와작 부서졌다. 그럼에도 황제의 분노는 쉬이 꺼지지 않았다. 북과 동으로 승리를 쟁취하며 영토를 넓혀가는 제국이었지만 유독 남쪽으로는 기를 펴지 못했다. 어제 올라온 알라스 강 전투와 네르만 평야 전투에서의 대패 소식은 그의 분노를 샀다.

“카이슈 백작은?”

“그, 그것이 생사 불명인지라…….”

“쯧!”

카사스 2세가 혀를 찼다. 그의 대계가 고작 아르센 왕국군에게 막혀야겠는가. 생각지 못한 복병에 카사스 2세는 심기가 불편했다. 거기다 황태자의 반군 세력 또한 그의 골칫덩어리 중 하나였다. 큰 파급력은 없었으나 그의 신경을 잘근잘근 잡아먹었다.

황제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황태자든 아르센 왕국이든 그의 눈에서 치워 버려야 했다.

“라몬 공작.”

“예, 폐하.”

“흑마법사를 더 동원하여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아르센 왕국을 지워라.”

“명 받잡겠습니다.”

라몬 공작을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무언가 복잡한 듯 미묘했다.

라몬 공작은 회의가 끝나자 바로 엑시온이 있는 별관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하루에도 수십 명의 처녀가 목숨을 잃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뭐라 하는 이는 없었다.

“여쭈거라.”

“예.”

시종이 라몬 공작의 방문을 알리자 엑시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몬 공작은 그제야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짙은 피 냄새가 가득 풍겨왔다.

“무슨 일이지?”

의자에 앉아 있던 엑시온이 한 처녀의 목줄기를 잡고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녀는 두려움에 소리를 질렀지만 이내 미라가 된 채 먼지가 되어 스러졌다. 처녀의 생기는 엑시온의 영양분이 되었다. 엑시온은 미간을 찌푸렸다. 마치 상한 음식을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처녀의 상태가 좋지 못해. 제대로 보내고 있는 건가?”

“송구하오나 인근의 처녀를 거의 잡은지라.”

“그래서 못 구해 오겠다는 건가?”

“……조치하겠습니다.”

라몬 공작은 이를 악물었지만 엑시온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엑시온이 가져다준 마기가 그를 한층 강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 무슨 일이지?”

엑시온이 다시 묻자 라몬 공작이 입을 열었다.

“좀 더 힘을 빌려주시길 바랍니다.”

“힘이라, 이미 백 명의 흑마법사에게 힘을 주지 않았던가?”

엑시온은 스스로 움직이기보다 흑마법사에게 힘을 주는 방식으로 라몬 공작을 도왔다. 그 외에 그가 하는 일이라곤 이렇게 여인들의 힘을 취하는 것뿐이었다. 이전과 달리 처녀들의 힘을 취하지 않는다고 해서 육신이 무너지진 않았다. 그럼에도 엑시온은 더 많은 처녀를 갈구했다. 마치 무언가 목표가 있는 것처럼.

“송구합니다.”

라몬 공작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청할 뿐이었다. 대신 그가 혹할 만한 정보를 가져왔다.

“말씀하신 산맥에서 이상한 장소를 발견했습니다.”

엑시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역시나.”

“흑마법사를 최대한 파견하여 조사 중에 있사오니 금방 드래곤 하트를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방심해선 안 된다. 드래곤의 레어다. 쉽게 얻을 수 있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엑시온은 마치 잘 알고 있는 장소인 듯 말했다. 그러나 라몬 공작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으레 드래곤 레어에 대한 인식이 그러했기에 그도 조심을 기했다.

“큭큭큭, 세르게니아. 날 죽이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엑시온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이제 그의 완전한 부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엑시온의 금안이 번뜩였다.

라몬 공작은 그런 엑시온의 모습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가?’

알면 알수록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라몬 공작은 짐작할 수 없었다.

* * *

“끄아아아!”

“스, 습격이다!”

“으아악!”

캄캄한 어둠을 뚫고 비명이 들려왔다. 그러자 병사들은 혼비백산 놀라 허둥거렸다. 그들은 페르시아 제국군의 보급을 맡고 있는 후방 부대였다. 물자를 운반하던 중 알 수 없는 자들에 의해 급습당했다.

“물러서지 마라! 마차를 지켜라!”

보급을 책임지고 있던 기사가 병사들을 지휘했다. 그러나 그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자들인가?”

최근 며칠 사이 후방 부대가 급습당하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군에서는 서둘러 조치를 취해 후방 부대에 좀 더 많은 군대를 배치했지만 그들은 강하고 빨랐으며 여지없이 물자를 파괴했다. 이제까지 그들에게 당한 후방 부대만 다섯 손가락을 넘을 것이다.

“젠장! 정신 차려라!”

“저, 적들이 너무 강합니다!”

두려움 섞인 병사의 말에 기사는 잇소리를 냈다.

“도대체 그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현재 제국의 적은 많았다. 대륙에 전쟁을 선포했으니 적이 없는 게 더 이상하다. 그래서인지 적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파악하려 해도 그들은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

“젠장! 지원을 요청해라! 다행히 근방에 전방 부대가 있다. 서둘러 움직여라!”

“예!”

기사의 명을 받고 움직인 병사는 그러나 채 한 걸음도 떼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죽음을 맞이했다.

“이런!”

기사는 다급히 검을 치켜든 채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도 섬뜩한 느낌을 받은 뒤 말에서 떨어져 즉사했다.

“끄아아아!”

병사들의 비명이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이제 다 끝났나.”

쓰러진 적들 사이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피로 물든 대지 위에서 내뱉은 목소리치고 꽤나 맑아 왠지 모를 이질감이 들게 했다.

“주, 죽어라!”

그때, 아직 살아 있던 기사 한 명이 그녀를 발견하고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검은 여인에게 채 닿기 전에 배를 뚫고 나온 검에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도, 도대체 네놈들은 누…….”

털썩.

자신들을 습격한 이의 정체라도 알고 죽고자 하는 듯 기사는 힘겹게 마지막 말을 내뱉으며 쓰러져 갔다.

“조심하십시오.”

기사의 배에서 칼을 뽑아낸 남자가 질책 어린 목소리로 여인에게 말했다. 여인은 남자의 말에 피식 웃었다.

“네가 올 줄 알았지, 이안.”

“후우.”

남자, 아니, 이안은 위기감 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헬리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점점 방비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다음엔 쉽지 않을 겁니다.”

“다섯 번이나 당하고 강해지지 않으면 바보들이지. 뭐, 하기야 이제는 이렇게 습격하는 것도 힘들겠어.”

여인은 짙은 갈색 로브의 후드를 뒤로 젖혔다. 그러자 한 갈래로 땋은 금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헬리아였다.

벨리앙 백작가에서 나온 지 며칠. 헬리아 일행은 본격적으로 드래곤 레어가 있는 알리오 산맥이 있는 북쪽으로 향했다. 바쁜 길이지만 그저 이동만 하지 않았다. 가는 내내 물자를 운반하는 후방 부대를 골라 급습하여 제국군의 전력을 약화시켰다.

그녀의 의도대로 후방 부대에서 물자가 오지 않자 전방 부대의 보급에 차질이 생겼고, 그와 함께 물자를 지키기 위해 후방 부대에 병력을 보내다 보니 오히려 전방의 전력이 약화되는 일이 발생했다. 급습한 부대의 물자는 왕국군으로 보내니 일석이조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국군도 가만히 보급 부대가 당하는 것을 간과하지 않겠다는 듯 점차 보급 부대의 병력이 증가했다. 이번에 급습한 보급 부대의 병력은 전에 습격한 부대의 두 배가량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헬리아 일행도 사람인지라, 정확히는 함께 따라온 숀 일행이 현저히 지치는 바람에 더는 이런 강행군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헉헉.”

숀이 헉헉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옆에는 렌스와 휴도 지친 기색이 역력한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으아, 공주님, 다음에도 또 보급 부대를 치러 갑니까?”

“이번이 마지막이야.”

“저, 정말입니까!”

숀이 헬리아의 말에 기운을 차렸는지 눈을 초롱초롱하게 떴다. 어찌나 좋아하는지 두 볼이 붉게 변했다. 그 모습을 도망친 적을 섬멸하고 온 세인이 보고는 혀를 찼다.

“그래서 기사 노릇 제대로 하겠어? 약해 빠져선.”

“네가 비정상이거든!”

숀의 시선이 슬쩍 헬리아와 이안에게도 향했지만 그들에게 뭐라 할 군번이 아니었다. 그나마 만만한 건 세인이었다.

“목소리만 커서는.”

“이익!”

숀이 불퉁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말 지쳤는지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따뜻한 침대에서 눕고 싶다.”

그러다 헬리아의 말이 생각났는지 숀이 헬리아에게 물었다.

“공주님, 그러면 이제 마을에 가서 쉬는 겁니까?”

이제까지 보급 부대를 은밀히 처리하기 위해 계속 산을 거점으로 움직였다. 그 탓에 제국군의 눈을 피할 수 있었지만 피로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 바보야, 여긴 왕국이 아니야.”

“아, 그러지……. 그럼 침대는 물 건너간 건가.”

숀이 불쌍한 표정을 짓자 세인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헬리아를 보았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마을로 간다.”

“예?”

헬리아의 말에 숀 일행은 물론 세인도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안은 알고 있는 듯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뭐, 그거야 우리에겐 하이패스가 있으니까.”

“하, 하이 뭐요?”

숀이 낯선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보다 말할 게 있어.”

헬리아가 숀 일행과 세인을 보았다.

“나는 지금부터 알리오 산맥으로 갈 거야.”

“알리오 산맥이요?”

“거기는 왜 가시는데요?”

숀 일행의 질문에 헬리아가 말했다.

“드래곤 레어를 찾으러 갈 거야.”

“드, 드래곤 레어요?”

숀 일행이 깜짝 놀랐다. 놀람은 세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제야 그녀의 목적을 알게 되었다.

‘역시 목적은 북쪽이었나.’

헬리아는 그간 보급 부대를 급습해 왔지만 보급 부대가 북쪽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 때엔 건드리지 않았다. 그저 가는 길에 보급 부대가 있으니 처리한다는 느낌이었다.

“해서 너희에게 묻지.”

헬리아가 숀 일행과 세인을 보았다.

“지금부터 가려는 곳은 개인적인 일 때문이야. 아니, 그렇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지만 위험한 곳이야. 목숨을 잃을 수도 있어.”

“저, 정말 드래곤 레어가 있는 겁니까?”

숀이 놀라 물었다. 드래곤 레어라는 말은 동화책에서나 들어본 말이었다.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있어. 거기서 중요한 물건을 찾으러 가는 거야.”

“드래곤 레어라니…….”

“가지 않아도 돼. 여기서 물자를 이끌고 왕국군으로 돌아가면 되니까.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어.”

헬리아는 이들에게 선택권을 주고 싶었다. 드래곤 레어는 매우 위험한 곳이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아무도 몰랐다. 자신이 가면 이안과 엘라임은 당연히 가겠지만 이들은 달랐다. 아무리 이들이 자신의 수하라고 하나 아무런 설명도 없이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때 숀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다른 일행의 눈빛도 마찬가지였다.

“맞습니다!”

“위험한 곳일수록 뭉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고양이 손이라도 도움이면 도움이겠지만.”

세인이 살짝 초를 쳤지만 숀 일행은 물러서지 않았다.

“데려가 주십시오. 공주님이 이런 상황에서 그런 곳에 가려는 이유가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 저희도 가겠습니다.”

숀 일행의 말에 헬리아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가 세인을 보았다.

“당신은?”

“후우, 고양이 손보단 사람 손이 필요할 것 같으니 함께 가시죠. 이미 여기까지 와버렸으니까 어쩔 수 없죠.”

헬리아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정말 마을로 가는 겁니까?”

“하지만 마을은 제국군이 지키고 있을 텐데…….”

“말했잖아. 하이패스가 있다고. 아, 마침 오네.”

그때 엘라임이 제롬을 끌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주변은?”

“정리했어.”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라임은 세인과 마찬가지로 혹여 도망가는 제국군을 상대했다. 그리고 숨겨 놓았던 제롬을 데려오는 길이다.

“이런 젠장…….”

제롬은 두 팔에 마나 구속구가 채워진 채로 엘라임에게 질질 끌려오는 중이다. 원래부터 엘라임은 헬리아 말고 다른 사람에게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게다가 뭐가 예뻐서 제롬에게 잘 대해 준단 말인가. 아주 대충 제롬을 끌고 오는 것이다.

“날 대체 어쩌려는 것이냐!”

제롬이 아직도 기가 꺾이지 않은 모습으로 헬리아에게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헬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세상에 똥도 쓴다는데 어디 쓸데가 없겠어. 세상천지 다 쓸모가 있는 법이지.”

“뭐?”

헬리아 일행은 보이는 족족 제국군의 보급 부대를 치면서 목적지를 향해 북쪽으로 계속 올라갔다.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의 최북단에 위치한 알리오 산맥이 그들 앞에 서서히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로 산속으로 움직이는데다가 일행의 수가 적어 제국군의 눈을 피해 이곳까지 올 수 있었다.

간간히 산적 무리와 마주치긴 했지만 어디 일행이 그런 자들에게 당할 면면인가. 정령왕의 계약자 헬리아, 소드 마스터 이안과 세인, 그 외에 기타 등등. 기타 등등을 제외하고서라도 그 무력은 한 개 사단을 능가했다. 해서 무사히 알리오 산맥에 도달했다.

“저기가 알리오 산맥인가?”

헬리아는 말고삐를 쥐고 멀리 보이는 산을 바라보았다. 꼭대기가 하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제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명성이 자자할 만했다.

“드래곤 레어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곳인데.”

엘라임이 헬리아의 시선을 따라 알리오 산맥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그의 감각을 자극했다.

“저기에…….”

헬리아는 묘한 눈빛으로 산을 응시했다.

“뭐가 있을지 모르니 마을에 들러 정비를 하고 가는 게 좋겠습니다.”

이안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말했다. 드래곤 레어가 있는 곳이다. 그런 곳이 평범할 리 없었다.

“마을이라, 어디 가까운 마을이 있을까?”

헬리아가 세인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 중에서 제국의 지리를 잘 아는 것은 제국인인 세인이었다.

“산 입구에 작은 마을이 자리해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는 게 좋을 겁니다.”

“좋아.”

일행은 목적지를 잡고 말을 몰았다.

“읍읍읍!”

그때였다. 숀의 등 뒤에 묶인 검은 뭉치가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는(?) 것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공주님, 이자는 대체 언제까지 데리고 가실 겁니까?”

숀은 기분 나쁘다는 듯이 검은 뭉치를 슬쩍 내려다보고는 물었다.

“쓸데가 생길 때까지.”

“하아…….”

숀은 깊게 한숨을 내뱉었다. 등 뒤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이 그의 신경을 갉아먹었지만 어쩌겠는가. 하지만 지금 숀보다 더 짜증 나는 이는 정작 따로 있었다.

“읍읍읍!”

검은 뭉치, 제롬은 얼굴만 내민 채 온몸이 꽁꽁 묶여 검은 포대에 담겨져 짐짝처럼 취급되었다. 그의 두 팔에는 마나 구속구가 채워져 있었고, 입에는 천 쪼가리가 물려 있었다. 하도 시끄러워서 헬리아가 대충 틀어막아 놓은 것이다.

“제, 젠장! 날 어쩌려는 거냐!”

간신히 천 쪼가리를 뱉어낸 제롬이 사납게 외쳤다. 그러나 짐짝처럼 검은 포대 안에 들어간 그의 모습이 폼이 날 리 없었다.

“어쩌긴, 뽕을 뽑아야지.”

헬리아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되레 제롬을 타박했다. 이제까지 그녀를 짜증 나게 만든 값어치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골수까지 빼먹을 위인이 바로 헬리아였다.

“젠장! 이 마녀가!”

“어디서 익숙한 단어가…….”

엘라임이 스리슬쩍 말을 내뱉자 헬리아가 그를 째려봤다. 그러자 엘라임이 스윽 시선을 돌렸다. 때마침 우연의 일치인지 일행 모두 고개를 돌렸지만.

“날 공격했으면 그만한 각오는 했어야지, 안 그래?”

“으득!”

제롬은 이를 갈았지만 별수 없었다. 패자에겐 입이 없는 법.

그렇게 몇 시간 뒤 일행은 알리오 산맥 아래에 위치해 있는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척척척!

수십 명의 병사가 마을 입구에서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들을 검문검색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헬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시선이 세인에게 향했다.

“원래 이렇게 삼엄한 곳이야?”

“……이상합니다. 원래 이곳은 그리 경계가 삼엄한 곳이 아닙니다.”

알리오 산맥은 산세가 험하고 몬스터가 많기로 유명한 곳으로, 몬스터를 사냥하여 돈을 버는 용병이 많이 찾았다. 그 덕분인지 마을 자체가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무엇보다 산맥에는 몬스터 외엔 별달리 얻을 만한 게 없었다.

“갑옷을 보니 자경단은 아닙니다.”

세인이 병사들이 입고 있는 갑옷을 확인하고 눈을 좁혔다. 이런 작은 마을에 번드르르한 철제 갑옷을 입은 자경단이 있을 리가 없었다.

“뭔가 일이 생기지 않고서는.”

“…….”

헬리아는 눈이 깊어졌다.

‘설마…….’

마침 시기가 몹시 공교로웠다.

“잠입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직 병사들이 자신들을 본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회해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이안의 말에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면으로 가지. 때마침 쓸데가 생겨서 다행이군.”

헬리아의 눈이 제롬을 향했다. 제롬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다음!”

험상궂은 얼굴을 한 병사가 외치자 검은 로브를 입은 한 무리가 다가왔다.

‘헉!’

병사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 놀란 듯 눈이 커졌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병사는 말을 내뱉고는 허겁지겁 어디론가 사라졌다. 헬리아 일행은 현재 흑마법사로 변장한 상태였다. 특별한 분장은 없었다. 그저 예전에 헬리아가 흑마법사에게 훔친 문양의 배지와 검은 로브만 뒤집어쓰면 끝이었다.

“써먹을 데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군.”

헬리아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었지만 제롬은 으득 이를 갈았다.

‘젠장, 대체 이게 무슨…….’

현재 제롬은 엘라임의 힘에 의해 꼭두각시처럼 움직였다. 그때 어디론가 갔던 병사가 돌아왔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자. 흑마법사였다.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다른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이곳에 흑마법사가?’

헬리아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그러나 로브 아래로 그늘이 진 탓에 그 모습을 본 이는 없었다. 갑작스런 병사들도 그렇고 흑마법사도 그렇고. 불안감이 스멀스멀 몰려왔다.

“흑마법사라고?”

“예.”

흑마법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가왔다.

“이상하군. 그렇게 충원 좀 해달라고 했는데도 안 해주더니. 더는 충원은 없다고 했는데.”

뚜벅뚜벅 걸어오는 흑마법사가 눈을 좁히며 말했다. 그러다 헬리아 일행을 보고는, 아니, 정확히는 제롬을 보고는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제롬 경!”

“…….”

제롬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남자, 에릭을 보고는 눈을 좁혔다. 그러나 말은 할 수 없었다.

“이거 제롬 경이었습니까?”

그는 제롬과 일면식이 있는 듯했다.

“…….”

“여긴 어떻게…… 벨리앙 백작가로 가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하기야 그렇겠군요.”

에릭이라는 남자는 저 혼자 북 치고 장구까지 치는 스킬을 발휘했다. 그것이 오히려 헬리아 일행에겐 다행한 일이었다. 제롬의 몸은 조절할 수 있지만 그의 입까지 어찌 조종할 수는 없었다.

“아, 이럴 게 아니라 제롬 경도 함께 가시지요. 가뜩이나 손이 모자랐거든요.”

“…….”

“제롬 경?”

혼자 이야기하던 에릭은 아무래도 계속 제롬이 말이 없자 의아한 듯 그를 보았다.

그때 헬리아가 나섰다.

“죄송합니다만 제롬 경께서는 지금 목이 상하셔 말씀을 하실 수 없습니다.”

“너는…….”

에릭이 의아한 눈으로 헬리아를 보았다. 그러나 워낙 흑마법사의 수가 많고 다들 깊게 로브를 뒤집어쓴 터라 얼굴을 잘 몰랐다. 그저 배지를 보곤 제국의 흑마법사가 맞겠거니 생각했다. 무엇보다 제롬과 함께 있던 터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목이?”

“예, 네르만 평야의 전투로 인해서…….”

“아…….”

에릭은 입을 다물었다. 아까부터 계속 흉흉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제롬 때문이었다.

‘그 일로 부상을 크게 당하셨나 보군.’

헬리아를 째려보는 것이었지만 에릭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대화는 제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런가.”

“한데 손이 부족하다고…….”

“그렇군. 이럴 게 아니라 우선 자리를 옮기지.”

에릭이 헬리아 일행을 이끌고 입구를 통과했다. 그렇게 일행은 손쉽게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을은 어딘가 모르게 을씨년스러웠다. 마치 생기를 잃어버린 듯 침울했다. 흑마법사 에릭을 따라간 곳은 어느 가게였다. 하지만 가게 안에는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헬리아 일행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에릭이 말했다.

“다른 자들은 이미 산 위로 올라가 작업 중입니다. 한데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작업이라면…….”

헬리아가 말끝을 흐리자 에릭이 대답했다.

“아, 정확한 설명은 듣지 못했겠군요. 알리오 산맥 위에 있는 드래곤 레어입니다.”

‘드래곤 레어!’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설마 제국에서 먼저 드래곤 레어를 찾을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아니, 엑시온인가?’

엑시온과 드래곤 레어를 떠올리자 그의 목적이 보였다. 원래부터 자신의 몸을 노린 엑시온이다. 만약 자신의 몸을 얻지 못한다면? 무언가 대체할 힘이 필요할 터. 그것이 바로 드래곤 하트일 것이다.

‘낭패로군.’

헬리아는 눈매를 좁혔다. 설마하니 이렇게 흑마법사들이 먼저 드래곤 레어를 찾을 줄이야.

‘어떻게 드래곤 레어를 찾은 거지?’

그녀도 세르게니아의 가디언인 세바스찬을 통해서 겨우 이곳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한데 흑마법사, 아니, 엑시온은 어떻게 이곳에 드래곤 레어가 있는 것을 알았을까?

‘어머니의 레어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

그렇다면 또 문제가 있다. 왜 처음부터 드래곤 하트를 노리지 않았냐는 것.

‘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네.’

한 가지 확실한 건 흑마법사가 이곳에 있고 그들의 목표가 드래곤 하트라면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작업은 얼마나 진행되었습니까?”

에릭이 헬리아를 보았다. 헬리아는 제롬을 한번 보고 그를 보았다. 제롬의 물음이라는 뜻이다. 물론 제롬은 여전히 인상만 찌그러뜨리며 속으로 헬리아를 욕하고 있겠지만.

“아,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입구는 뚫었으나 워낙 함정이 많은지라. 그래서 제롬 경이 이곳에 오신 것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에릭은 흑마법사치고 꽤나 밝은 사람이었다. 하기야 밝은 사람이라고 미친놈이 아니라는 법도 없지만. 밝게 미친놈이랄까.

“그렇군요. 아직이라…….”

헬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녀가 스윽 엘라임과 이안, 세인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보다 다른 분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아무도 보이지 않는 것 같은데.”

“다른 자들은 이미 산 위로 올라갔네. 나는 이곳을 지키고 있지.”

“아, 혼자라구요?”

“그런데 이상하군.”

에릭이 헬리아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부터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금안에 금발이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설마요.”

헬리아는 웃었지만 에릭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가? 하지만 이렇게 특정적인 외형은…….”

에릭이 연신 고개를 갸웃하며 떠올려 보았지만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번뜩 무언가가 떠올랐다.

“이거야 원, 완전히 헬리아 공주와 닮았군! 누가 보면 공주인 줄 알겠……!”

순간 무언가 알아차린 에릭이 헬리아를 보았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헬리아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후드를 젖혔다.

“어라? 알아차렸네?”

“헤, 헬리아 공주.”

에릭이 마기를 끌어올렸다. 아니, 그러기도 전에 그의 목에 두 개의 칼날이 겹쳐졌다. 이안과 세인이었다.

“어, 어떻게 여기에…….”

에릭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헬리아를 보았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제롬에게 향했다.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다. 지금 제롬의 표정도 그렇고 아까부터 말을 못 하는 것도 그렇고.

“제, 제롬 경에게 무슨 짓을.”

“걱정 마, 너도 곧 알게 될 테니까.”

헬리아의 금안이 번뜩였다.

* * *

“들어가라.”

낮은 목소리와 함께 검은 로브를 입은 흑마법사들이 캄캄한 동굴 안으로 사람들을 밀어 넣었다. 강제로 동굴 안으로 떠밀어진 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나이가 많은 노인도 있었고, 코흘리개 어린아이도 있었다. 동굴 안은 어둡고 침침했다. 뿐만 아니라 음습한 기운이 사람의 공포를 자극했다. 당연히 사람들은 발걸음을 쉬이 떼지 못했다. 그러자 흑마법사가 그들의 등을 지팡이로 찌르며 앞으로 밀어 넣었다.

“어서 가지 못해!”

“히익!”

사람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었지만 힘도 없는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머뭇거리다 흑마법사에게 죽든지 아니면 동굴 안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 온 이상 그들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흑, 흑흑.”

“어, 엄마…….”

사람들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동굴 안에 퍼졌고, 곧 그들의 울음소리는 비명으로 변해 바닥에 흥건히 피를 적셨다.

“젠장, 고약하군.”

사람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뒤, 그들을 안으로 몰아넣은 흑마법사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날카로운 창에 꽂혀 죽은 이들도 있었고, 바닥에서 솟구쳐 나온 칼에 몸에 구멍이 난 채 죽은 이들도 있었다. 공통점은 누구 하나 살아남은 이가 없다는 것이다.

“도대체 함정이 얼마나 많은 거야?”

흑마법사들은 사람들이 죽은 모습을 확인하며 함정의 위치와 장치를 파악해 내고 파훼했다. 수많은 장치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을망정,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조차 일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저 생각보다 많은 함정에 성가시게 되었다는 생각뿐.

“젠장, 어느 세월에 ‘그걸’ 찾냐?”

“서둘러.”

“알고 있어.”

서두르지 않는다면 이 함정보다 무시무시한 존재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아니, 그냥 죽는 것이 행복할 정도로 영혼을 저당 잡힌 채 영원히 고통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함정을 해체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더디기만 했다. 함정을 해제한다고는 하지만 이곳에 있는 함정들은 그들의 지식수준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초반에는 멋모르고 들어가다 얼마나 낭패를 보았던가. 역시나 드래곤 레어다 싶었다. 해서 흑마법사들은 궁여지책으로 마을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와 화살받이로 사용했다. 화살받이를 사용한 보람이 있는지 흑마법사들은 전과 달리 함정을 파악하며 깊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였다.

끼이익-

갑작스런 기계음 소리와 함께 바닥과 양옆에서 화살이 뿜어져 나왔다. 흑마법사들은 재빨리 실드를 펼쳤지만 화살은 평범한 화살이 아니었다. 화살에는 강력한 마나가 씌워져 있었다.

휘이익-

“제, 젠장!”

“끄아악!”

“모두 파괴해!”

흑마법사들이 장치들을 부쉈지만 부수는 속도보다 화살에 당하는 자가 더 많았다. 흑마법사들은 위기감을 느끼곤 서둘러 몸을 빼냈다.

“이런! 물러난다!”

“도망쳐!”

미처 도망치지 못한 이들은 화살에 몸이 꿰뚫려 목숨을 잃었다.

“헉, 헉!”

힘겹게 동굴을 빠져나온 나머지 흑마법사들은 잇소리를 냈다.

“쳇, 점점 장치가 강해지고 있어.”

“지금까지 몇 명이나 죽었지?”

“벌써 열 명이야.”

화살받이로 사용한 사람들은 거기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그들에겐 그저 같은 흑마법사가 죽었는지만 중요할 뿐이었다.

“이제 겨우 2층인데, 이러다간 끝이 없겠군. 지원은 더 없나? 실력 있는 흑마법사가 필요해.”

“하지만 전쟁 중이라…….”

이곳에 모인 흑마법사의 수만 해도 오십은 넘었다. 그들은 모두 4서클 이상의 상당한 실력자였다. 현재 전쟁 중인 것을 감안하면 굉장한 전력이 이곳에 집중된 것이다. 하지만 드래곤 레어는 쉽게 그들 앞에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이제까지 레어를 탐험해 본 일이 없었다. 이 레어도 몇백 년 만에 발견된 거니 그들이 어찌 경험해 보겠는가. 그 때문에 피해가 더 컸다.

겨우 몸을 추스르고 밖으로 나온 이들은 한 무리의 흑마법사를 볼 수 있었다. 워낙 흑마법사가 많은 곳이지만 그들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마을 아래에 남아 있어야 하는 에릭이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중요한 소식을 전하거나 문제가 생겼을 시에만 올라오게 되어 있어 에릭의 등장에 다들 시선을 주었다.

“에릭? 여긴 어쩐 일이야?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그, 그게.”

에릭이 필사적으로 눈알을 굴렸지만 상대는 이상함을 알아채지 못했다.

스윽.

그때 에릭의 뒤로 제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제롬의 얼굴을 아는 이들이 그를 보곤 놀란 듯 눈을 떴다.

“제롬 경!”

흑마법사들에게 제롬은 라몬 공작 이상의 존재였다. 보통 라몬 공작이 명을 내리지만 실무는 제롬이 보았기 때문이다. 응당 제롬의 얼굴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라몬 공작과 닮은 붉은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가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도 했고.

“여긴 대체 어쩐 일이십니까? 아, 혹시.”

“그, 그래.”

에릭은 적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제 목 뒤를 찌르는 서늘한 기운 때문이었다.

“뭐야, 너 어디 아파?”

“아, 아니.”

에릭이 고개를 저었다. 흑마법사는 그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흑마법사인 놈치고 어디 제정신인 자가 있던가. 거기다 다들 제롬의 등장에 정신이 팔려 있는 상태였다.

“정말 잘되었습니다. 가득이나 뛰어난 흑마법사가 왔으면 했는데, 그게 제롬 경이라 다행입니다.”

“…….”

제롬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입을 열 수 없으니 도리가 없었다.

“진행 상황은 어떻습니까?”

그때 세인이 앞으로 나섰다. 제롬과 에릭에게 들킨 경험이 있는 헬리아는 잠시 뒤로 빠졌다. 다행히 후드를 깊게 눌러써 얼굴을 가려서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아, 아무래도 함정 때문에 여의치가 않습니다. 현재 1층은 모두 파훼했고, 2층을 조사 중입니다.”

“2층이라면, 더 아래층도 있다는 겁니까?”

“정확한 구조는 아직 확인되지 않아 말씀드릴 수 없으나 아래에도 공동이 있는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그때 세인이 헬리아의 시선을 느꼈다. 세인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그건’…….”

“아, 안타깝게도 1층엔 없었습니다. 더 아래에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다행이군요.”

“예?”

세인의 낮은 말에 흑마법사는 되물었지만 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한데 작업 속도가 느리군요. 아실 테지만 그리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세인이 나름 연기를 펼치자 흑마법사의 안색이 흐려졌다. 엑시온이 얼마나 강력한지 그에게서 힘을 받은 흑마법사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큰일입니다. 하지만 제롬 경께서 오셨으니 진척 속도가 빨라질 겁니다.”

“그럼 바로 작업에 들어가야겠군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문제 있습니까?”

세인의 말에 흑마법사는 오히려 고개를 저으며 반겼다.

“아닙니다. 그래도 바로 오셨는데…….”

그의 시선이 제롬에게 향했다. 당연히 엘라임의 조종을 받는 제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럼 잠시 기다리십시오.”

흑마법사가 갑자기 다른 흑마법사에게 손짓하자 그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행이네.]

헬리아의 로브 속 그녀의 어깨에 앉은 엘라임이 작게 속삭였다.

[아직 드래곤 하트를 찾지 못한 것 같아.]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헬리아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그녀의 굳은 표정에 엘라임이 물었다.

[왜?]

‘찾지 못해 다행이지만 반대로 이 정도 전력을 투입했는데 아직 찾지 못했다는 소리니까. 우리도 찾기 힘들다는 소리야.’

헬리아는 눈을 좁히고 레어 입구를 응시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그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드래곤 레어…….’

이 위험한 곳 어딘가에 아버지를 살릴 드래곤 하트가 있다. 헬리아는 어두운 눈으로 드래곤 레어를 응시했다. 때마침 어디론가 사라졌던 흑마법사가 돌아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뒤로 열 명의 사람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팔다리에 수갑을 차고 잔뜩 겁에 질린 얼굴로. 세인도 사람들을 확인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그자들은…….”

“함정이 워낙 많은지라 저희만으로는 다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다행히 이자들을 사용하면 대부분의 함정은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끌고 올 사람은 많으니 걱정하지 말고 쓰십시오.”

사람들을 쓰라니. 세인은 미미하게 미간을 찌푸렸지만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화살받이인가?”

“예, 도움이 될 겁니다.”

헬리아는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을 보고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떠올려 보니 마을 안에 이상하게 사람이 적었다. 이들이 그 마을 사람인 것이다.

‘미친놈들.’

헬리아는 흑마법사에 대해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음을 상기했다. 특히나 세 명의 어린아이가 그 사이에 껴 있는 모습을 보고 헬리아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이제 겨우 열 살 정도 된 어린아이도 보였다. 헬리아의 기운이 심상치 않자 이상함을 느낀 흑마법사가 그녀를 주시했지만 뒤에 있던 이안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공주님.’

‘……나도 알고 있어.’

“그럼 이자들을 데리고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아, 예.”

세인이 얼른 일행을 이끌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다들 제롬이 왜 말을 한 마디도 안 하는지 궁금했지만 평소 말을 많이 하지 않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때 에릭은 여전히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다가 말했다.

“나, 나는, 이, 이만.”

무언가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이었지만 다들 남의 사정에 신경 쓰는 자들이 아닌지라 특별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에릭 또한 정령왕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을로 돌아가면 그곳에 남은 숀 일행에 의해 다시 구금될 터. 그렇게 헬리아 일행은 화살받이로 명해진 사람들과 함께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캄캄한 동굴 안.

램프의 불빛에 의지하여 헬리아 일행은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맨 앞에는 열 명의 화살받이가 될 사람들이 걸어갔고, 그 뒤를 헬리아 일행의 안내를 맡은 흑마법사 두 명이 따랐다.

헬리아 일행은 제롬을 앞에 두고, 그를 감시할 세인이 그 뒤에, 헬리아, 이안 순으로 걸어갔다. 동굴 안은 폭이 3미터는 족히 될 만큼 넓어서 걷는 데 전혀 불편함을 못 느꼈다. 다만 동굴 안쪽으로 들어서자 풍겨오는 피 냄새에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피 냄새가…….’

동굴은 비릿한 피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거기다 시체 썩는 특유의 고약한 냄새도 풍겼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그 냄새는 더욱 짙어졌다. 다람쥐로 변해 헬리아의 어깨에 올라와 있는 엘라임은 코를 찡그리며 말했다.

[도대체 얼마나 죽은 거야? 못해도 수십은 죽은 냄새야.]

‘…….’

헬리아는 자신들 앞에서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며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아마 이 피 냄새의 대부분은 저 사람들처럼 화살받이가 된 이들의 피일 것이다. 헬리아의 시선이 그중 세 명의 어린아이에게 향했다. 솜털도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두려움에 떨며 어른들에게 바짝 붙어 걸어갔다.

“흑흑, 엄마…….”

“무서워…….”

공포에 질린 것은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어른들 또한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화살받이로 내몰린 사람들에게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그 뒤를 따르던 두 흑마법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상급자를 모시고 가는데 추태를 보인다고 생각한 것이다.

“조용히 하지 못해!”

“얼른 움직여라!”

흑마법사의 채근에 사람들은 흘러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막으며 떼어지지 않은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두려움에 몸이 떨리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할 거야?]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의 눈동자가 짙게 변했다.

[지금 바로 흑마법사를 처리하는 게 어때?]

‘……아직.’

헬리아는 차갑게 흑마법사들을 노려보았지만 아직은 움직일 때가 아니었다.

‘여기서 일을 벌이면 바깥까지 들릴 수 있어. 좀 더, 좀 더 기다려.’

아직 1층밖에 되지 않았기에 만약 이곳에서 흑마법사를 죽인다면 후에 다른 자들에 의해 쉽게 발각될 염려가 있었다. 최소한 그들이 말한 2층까지는 내려가는 게 좋았다.

[그나저나 진짜 지독하네.]

엘라임은 눈을 찡그렸다. 정령인 그의 입장에서, 거기다 헬리아와 전혀 상관없는 인간이 죽는 것은 상관없다. 다만 그의 코를 찡그리게 만드는 고약한 피 냄새가 거슬릴 뿐.

‘최소 백 명은 넘었겠어.’

[그런데 위험하지 않을까? 그렇게 많이 죽었으면…….]

엘라임은 음산한 분위기에 걱정이 되었다. 드래곤 레어에 온 것까지는 좋았지만-거기다 아직 흑마법사들이 드래곤 하트를 찾지 못해 다행이지만-문제는 그들이 고전할 정도로 드래곤 레어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에휴, 그럼 그렇지.]

헬리아의 태평한 말에 엘라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더는 뭐라 하지 못했다.

[절대 다치지 마.]

‘죽지는 않을게.’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돼.]

‘나보고 영생하라는 거야 뭐야?’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그의 걱정이 느껴진 탓이다. 그때 묘한 기운이 헬리아의 등골을 파고들었다.

‘음?’

[왜?]

헬리아가 갑자기 어깨를 움찔하자 엘라임이 물었다.

‘아니, 뭔가 기운이 이상한데.’

[뭐가? 음, 뭔가 싸한 기운이 느껴지긴 하지만 드래곤 레어라 그런 거 아닐까.]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좀 더…….’

누가 지켜보는 것 같은데? 헬리아는 순간 뒤를 돌아보았지만 뒤에는 이안밖에 없었다.

‘누구지?’

마치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는 듯한 감각에 헬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조심하십시오. 이제 지하 2층으로 내려갑니다. 함정을 완전히 다 해체한 것이 아니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두 흑마법사가 당부했다. 그렇게 일행은 아래로 내려갔다.

“히익!”

2층으로 내려오자 피 냄새가 더욱 코를 찌르며 속을 울렁거리게 했다. 거기다 제때 치우지 못한 시체도 즐비했다.

“어, 엄마!”

“사, 살려 주세요!”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에 몸을 떨며 흐느꼈다. 하지만 흑마법사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팡이로 그들의 등을 찔러 앞으로 밀어냈다.

“움직여라!”

“사, 살려 주세요! 제, 제발 좀 살려 주세요!”

그때 한 어린아이가 울며 흑마법사에게 사정했다.

“이놈이!”

흑마법사의 눈이 독하게 변했다. 어차피 화살받이로 데려온 놈들. 열 명이나 아홉 명이나 그에겐 크게 중요치 않았다. 그의 발이 아이의 복부를 강타했다.

“커억!”

몸무게가 가벼운 아이는 한순간에 동굴 벽에 처박혔다. 충격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지 컥컥거리며 몸을 움찔거렸다.

“얘야!”

“대체 무슨 억하심정으로 우리에게 이런단 말이오!”

아이가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자 사람들은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죽게 될 거라는 극심한 절망에 눈에 뵈는 게 없어졌다. 그들이 난동을 부리자 흑마법사가 사납게 외쳤다.

“죽고 싶은 거냐!”

“이래 죽나 저래 죽나 마찬가지 아니오!”

“에잇! 이놈들이 감히!”

두 흑마법사가 사람들에게 마법을 발사하려는 찰나였다.

“그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두 흑마법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들 앞으로 한 인형이 걸어 나왔다. 가늘고 높은 목소리로 봐선 여인의 것이었다. 작은 체구의 여인, 헬리아가 천천히 그들 앞으로 다가갔다.

두 흑마법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제롬을 한번 바라보았다. 하지만 제롬은 현재 말을 하지 못하는 관계로 그저 사나운 눈으로 노려만 볼 뿐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제롬의 일행이라 우선 말을 높였다. 헬리아는 그런 그들에게 상관하지 않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흐, 흐흑.”

울고 있는 아이의 머리에 손을 살포시 얹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빛이 나오더니 아이의 상처가 말끔히 사라졌다.

“어? 아프지 않아?”

“뭐 하는 겁니까?”

흑마법사의 말에 헬리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 정도면 바깥에도 소리가 잘 들리지 않겠네. 보아하니 길도 하나고 굳이 길잡이가 있을 필요도 없고.”

“무슨……?”

흑마법사는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그때 헬리아가 천천히 자신의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그녀의 금발이 차분히 흘러내렸다. 헬리아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의 눈에 두 흑마법사는 꼼짝할 수 없었다. 짙은 금안이 그들을 옴짝달싹 못 하게 막고 있었다.

“뭐긴 뭐겠어. 더 이상 네놈들이 없어도 된다는 거지.”

“뭐?!”

“자, 잠깐! 그러고 보니 그 금발에 금안은!”

“이거야 원, 내가 이렇게 유명할 줄은 몰랐네. 어디 데뷔라도 해야 하나?”

“제, 제롬 경!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헤, 헬리아 공주가 이곳에 왜?!”

하지만 제롬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했다.

“후후, 네놈들이 그렇게 찾는 제롬은 지금 영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말이지.”

그때 흑마법사들은 제롬의 로브 안쪽에서 철컹거리는 마나 구속구를 볼 수 있었다.

“제, 젠장!”

흑마법사는 자신들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고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움직였다.

“어, 어윽…….”

“커, 커억! 아, 안 돼!”

하지만 비명은 그들 자신에게서 흘러나왔다. 두 흑마법사의 목에는 이미 붉은 실선이 나 있었다.

“안 되긴 뭘.”

헬리아가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두 흑마법사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안과 세인의 솜씨였다.

“언질을 주시고 움직이시죠. 갑자기 움직여서 깜짝 놀랐지 않았습니까?”

“후우…….”

세인은 투덜거렸고, 이안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어차피 흑마법사들을 처리할 생각이었지만 헬리아가 갑자기 나서는 바람에 그 또한 조금 놀란 터였다.

“뭘, 척하니 착 하고 움직였구먼.”

“하아…….”

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헬리아는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히, 이익!”

“사, 살려 주세요!”

“제, 제발……!”

사람들은 아예 무릎을 꿇으며 헬리아에게 빌었다. 헬리아가 흑마법사를 처리했다고 해도 그들에겐 헬리아 일행 또한 무시무시한 존재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헬리아에게 치료를 받은 아이가 다가왔다. 짙은 녹색 머리에 녹안을 지닌 열 살가량의 어린아이였다.

“저……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가 고개를 푹 숙였다. 헬리아는 아까는 보지 못한 아이의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엘프야.]

‘엘프라고?’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아이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아이의 더벅머리에 숨겨진 귀가 뾰족한 것을 보았다.

‘어째서 엘프가 이곳에?’

그런 의문이 들었을 때였다. 헬리아가 어린아이를 대하는 모습에 경계를 푼 사람들이 이제는 그녀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사, 살려 주십시오.”

“나으리, 제발 살려 주십시오!”

그들이 흑마법사 일행이 아님을 확신하자 사람들에겐 헬리아 일행이 유일한 생명의 동아줄이었다. 하지만 이 앞이 오히려 더 위험했기에 헬리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고 결정을 내렸다.

“당신들을 이곳에서 나가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제,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발!”

그러나 이만한 인원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흑마법사가 우글거리는 곳에서 이들을 지킬 여력이 안 되었다. 무엇보다 헬리아 일행의 최우선 목표는 드래곤 하트. 이들을 구할 수 없었다.

“흑흑흑!”

서글프게 우는 사람들을 헬리아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어, 헬리아.]

헬리아의 복잡한 심경을 알아차린 엘라임이 그녀를 다독였다. 헬리아가 그들을 바라보다 갑자기 벽을 툭툭 치기 시작했다.

“흠.”

“위험한 짓은…….”

이안이 그런 헬리아를 막으려 했지만 헬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못 부술 건 아니네.”

“예?”

그 순간 헬리아가 마법을 사용하여 벽을 녹이기 시작했다. 곧 벽의 구멍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사람 수십 명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구멍이 생겨났다.

“이건 대체…….”

세인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헬리아를 보았다.

“모두 들어가세요.”

“예?”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여기는……?”

“지금 구해드릴 순 없지만 이곳에 숨어 있으세요.”

헬리아는 구멍 안으로 식량을 꺼내 놓았다.

“한 열흘 정도 먹을 식량이에요. 적지만 아껴 먹으면 될 거예요.”

사람들은 그제야 헬리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 뒤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죽는 것보다는 작은 희망에라도 목숨을 걸어보는 게 나았다.

“가,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구멍 안으로 들어갔고, 마지막으로 녹색의 어린 엘프가 안으로 들어섰다. 헬리아는 숨구멍을 제외한 나머지를 대충 막아두었다. 그러자 그 안에 사람이 있는 줄 모를 정도로 감쪽같아졌다.

“이제 움직이자.”

헬리아의 말에 이안과 세인, 그리고 못마땅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제롬이 움직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작은 숨구멍을 통해 어린 엘프가 바라보고 있었다.

헬리아가 사라지고 난 뒤.

그녀가 만들어둔 구멍 안에서 어린 엘프가 나왔다. 그는 한참을 헬리아가 사라진 방향을 지켜보다 이내 구멍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드르륵 소리를 내며 구멍 안이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사람들의 기척이 사라졌다.

“드디어…….”

엘프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엘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동굴 안에는 그저 두 흑마법사의 시체만이 덩그러니 있을 뿐이었다.

끼이익-

드르륵.

금속음이 울려 퍼지고 동굴 양쪽 벽에서 날카로운 검이 튀어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바닥에서는 창이 솟구쳤다.

“젠장! 이 마녀!”

그 사이를 제롬이 걸어가고 있었다. 물론 걸어간다고 말하기엔 왠지 어폐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뜨거운 팬에 팔짝팔짝 튀겨지고 있는 생선 같은 움직임이랄까.

“끄아악!”

제롬의 옆구리로 검이 쇄도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공격은 유효하지 못했다. 헬리아가 마법으로 검을 쳐 냈기 때문이다.

“엄살은.”

“이게 엄살로 보이더냐! 이 사악한!”

“사악한 흑마법사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헬리아의 유들유들한 말에 제롬은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녀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바로 바닥에서 자신의 엉덩이를 향해 창이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크윽!”

제롬은 최대한 몸을 옆으로 뺐다. 창은 그의 허벅지를 살짝 긁고 다시 아래로 들어갔다. 그의 온몸은 만신창이였다.

“감히 날 화살받이로 사용하다니!”

“뭘, 이렇게 잘 보호해 주고 있구먼. 엄연히 다르지, 암.”

헬리아는 미소를 띤 채로 제롬을 향해 치료 마법을 퍼부었다. 그러자 제롬의 허벅지에 난 상처가 말끔히 사라졌다. 하지만 제롬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저 사악하고 음흉한 마녀가 자신을 화살받이로 잘 써먹기 위해 한 조치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젠장, 애초에 화살받이가 필요했다면 그놈들을 데려오지 왜 놓고 온 거냐!”

제롬으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화살받이가 필요했다면 차라리 그놈들을 써먹었으면 자신이 이렇게 고생할 이유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제롬의 말에 헬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거야 네가 있잖아. 잘 피하는구먼.”

“으득!”

“그리고 그 비리비리한 사람들이 제대로 화살받이나 되겠어? 지푸라기지.”

“지옥에나 떨어져라!”

“그러니까 흑마법사한테 들을 말은 아니래도.”

헬리아는 실실 웃으며 제롬을 약 올렸다. 그간 그에게서 받은 스트레스가 제법 쌓였던 모양이다. 하기야 정체도 척척 알아봐, 매번 집요하게 쫓아와, 헬리아가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분풀이를 오늘 화끈하게 해주는 것이고.

“이 마녀 같으니!”

“자자, 이제 몸도 나았으면 얼른 움직이라고. 다시 엘라임에게 조종당하기 싫으면.”

“크윽!”

제롬은 이를 악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솔직히 그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나 구속구를 차고 있는데다가 그것이 없더라도 두 명의 소드 마스터와 이상한 힘을 지닌 헬리아 공주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헬리아, 다 해제했어.”

그때 엘라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롬이 화살받이가 되어 앞으로 나가면 이안과 세인이 함정을 막고, 함정을 파악한 헬리아와 엘라임이 함정을 파훼했다. 그 덕분에 일행의 속도는 빨랐다. 벌써 4층까지 내려온 것이다.

“좋아. 그나저나 대체 몇 층까지 있는 거야?”

“이러다간 끝이 없습니다.”

“후우, 여기가 정말 드래곤 레어가 맞는 겁니까? 그냥 던전 아닐까요?”

이안과 세인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호기롭게 여기까지 내려온 건 좋은데 아무리 봐도 길은 하나고, 방이든 문이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몬스터가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하지만 함정이 워낙 복잡해서 차라리 몬스터가 나오는 게 더 낫다고 후에는 생각되었다.

“엘라임, 몇 층까지 있는지 파악했어?”

“계속 정령을 보내봤는데 아무래도 동굴 전체에 무슨 결계가 쳐져 있는 것 같아. 탐지가 안 돼.”

엘라임이 여러 차례 정령으로 동굴 안을 탐색해 봤지만 아무것도 건진 게 없었다. 정령을 일정 거리 이상 떨어뜨리면 정령왕이 감지를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꼼꼼하게도 만들어놨군. 아니, 그냥 꼼꼼한 게 아니라 마니악하군.”

드래곤들이 자신의 레어를 지키기 위해서 함정을 만들어 둔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짜증 나게 만들어놓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짜증의 주체는 바로 자신의 어머니인 세르게니아였다.

헬리아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인식이 점점 삐뚤어지는 가운데 일행은 지쳐 갔다. 하지만 다행히도 5층으로 내려온 순간 이전과는 달리 커다란 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패턴이었다. 헬리아는 이것으로 함정이 끝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 하지만 장시간 함정에 시달리는 것은 고역이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좁고 어두웠으며, 식량이 많지 않아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끄응, 이거 안 열리는데?”

헬리아가 문을 밀어보았지만 문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안과 세인, 엘라임도 모두 문을 열어보았지만 문은 미동조차 없었다.

“마법이 걸린 거 아니야?”

“마법? 흠.”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문을 자세히 살폈다. 문에는 커다란 용이 양각되어 있었다. 꼼꼼히 문을 만져 가며 바라보던 헬리아는 문손잡이가 있는 부근에만 음각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건 뭐지?”

헬리아는 작은 구멍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그거 있잖아.”

“그거라니?”

“전에 네 어머니 방에 들어갔을 때 봤던 목걸이 모양! 그거랑 똑같은데?”

“아! 목걸이!”

“한데 문제는 그 목걸이가 없다는 거야.”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씨익 웃음을 지었다. 혹시 몰라 가지고 다녔던 것이 이렇게 유용할 줄이야.

“걱정 마, 갖고 있으니까.”

헬리아는 아공간 반지-전에 베로니카 공작이 만들어준 것이다-에서 펜던트를 꺼냈다. 그러자 순간 동굴 안이 미묘하게 떨렸지만 순식간에 진정되었기에 헬리아는 뭔가 착각했나 싶었다. 왜냐하면 그녀 혼자밖에 그 진동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헬리아는 펜던트의 모양을 보곤 확실히 이것이 문의 음각된 부분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넣을게.”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십시오.”

“응.”

이안의 말에 헬리아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펜던트를 음각된 부분에 끼어 넣었다. 그러자 달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후, 무언가 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득!

헬리아는 다시 떨어져 나온 펜던트를 품에 넣고 문을 활짝 열었다.

“여기가…… 어라?”

“뭐야?”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데요?”

엘라임과 세인도 안을 둘러보더니 한마디씩 했다. 이안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뭐지, 여긴?”

문 안으로 들어간 일행이 본 것은 커다란 방이었다. 아니, 방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그곳은 넓은 공간이었는데, 거의 연병장 크기 수준이었다.

“함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안의 말에 헬리아는 제롬에게 눈짓했다.

“젠장, 내가 왜?”

“목숨은 건져 줄 테니까 걱정 말라고.”

“으득!”

제롬은 이를 갈았지만 헬리아의 말대로 안으로 순순히 들어섰다. 물론 그는 내심 다른 속셈이 있었다.

‘이 제롬이 이렇게 당할 것 같으냐! 내가 죽더라도 반드시 네년을 죽이고 말겠다.’

그의 눈이 함정을 찾아 번뜩였다. 지금까지 제롬이 겉으로는 욕을 퍼부으면서 순순히 화살받이가 된 것은 어쩔 수 없었던 것도 있지만 내심 헬리아 일행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함이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는 일행이 수월하게 함정을 해결했었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척 봐도 뭔가 수상한 공간이었다. 제롬은 헬리아의 눈을 피해 함정을 찾았다. 제롬의 내심이 어떠하든 그가 먼저 발을 디뎠는데도 아무런 일도 없자 헬리아 일행도 안으로 들어섰다.

“여긴 뭐 하는 데지?”

정말 커다란 방이었다. 바닥을 내려다보자 무언가 그려져 있었다. 바닥의 마법진을 본 순간 헬리아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거…… 혹시 마법진? 이동 마법진이잖아?”

헬리아는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을 보곤 놀랐다. 그러면서 짜증이 팍 올라왔다.

“그럼 그렇지. 이동 마법진이 있었던 거야.”

레어의 주인이 그 많은 함정을 뚫고 집안을 들락거릴 리 없지 않은가. 헬리아가 마법진에 마나를 쏟아부었지만 이상하게 아무 반응도 없었다.

“외부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마법진이 아닐까요?”

세인의 말에 헬리아는 턱을 쓰다듬었다. 아쉽게도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소리였다.

“아무튼 여기가 이동 마법진이라면 입구라는 소리인데, 혹시 문이 없어?”

세인과 엘라임, 이안이 흩어져서 문을 찾기 시작했다. 일행은 모두 벽을 훑으며 출구를 찾았다. 그 모습을 제롬이 음흉하게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크크크.’

그의 시선이 벽에 이상하게 볼록 튀어나온 부분을 향했다. 무언가 아주 수상했다.

‘함정이든 함정이 아니든 밑져야 본전이다.’

제롬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뭐야? 뭐라도 찾았어?”

그런 제롬의 웃음을 본 걸까. 헬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에게 다가갔다. 제롬의 저 음흉한 눈빛을 보아 뭔가 이상한 걸 발견한 듯싶다.

“크크크, 글쎄? 함정일지도 모르지. 어차피 내 역할은 화살받이 아닌가? 함정이 있나 없나 알아보는.”

“그래서?”

“그래서라니? 이상한 걸 발견해서 한번 눌러보려는 거지.”

그러면서 헬리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제롬이 그 튀어나온 부분을 잽싸게 눌렀다. 그러고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크크크, 이제 네년…….”

“뭔데?”

“…….”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제롬의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질 때 헬리아는 으드득 목을 풀었다.

“네놈이 더 맞아야 정신을…….”

드드드득!

그때였다. 갑자기 바닥의 마법진에서 번쩍 빛이 나기 시작했다.

“뭐, 뭐야?!”

“크하하하!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하고 가만히 있을 줄 알았느냐! 내가 죽더라도 네년을 죽이고야 말겠다!”

“젠장! 대체 뭐냐고!”

“헬리아!”

“공주님!”

빛은 더욱 강렬해지고 있었다. 이상함을 눈치챈 엘라임과 이안, 세인이 헬리아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그들이 움직이기도 전에 빛이 폭사되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고 난 그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모든 것이 새카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 그 캄캄한 어둠 속에서 헬리아는 이제는 익숙함마저 느꼈다. 허구한 날(?) 꿈속에서 본 게 이런 시커먼 공간이니 익숙해질 만도 하다.

“또 꿈속인가?”

헬리아는 몽롱한 정신을 다잡고 이전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그 개자식 스토커 제롬이 갑자기 이상한 장치를 만지는 바람에 이동 마법진이 발동해 빛이 발했고…….

“그런데 왜 꿈속이지?”

이상하지 않은가. 분명 이동 마법진이 발동했는데 깨어보니-꿈속이니 깨어 있다는 표현은 맞지 않지만-꿈속이다.

“설마 어디 머리를 세게 부딪쳐서 꿈속으로 강제 소환된 건가?”

이런저런 가설이 떠올랐지만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았다.

“하아…….”

헬리아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안과 세인은 어떻게 됐으려나.”

분명 그들도 빛에 휩싸였으니 어디론가 이동했을 것이다. 아니면 같이 이동했는데 정말 자신만 이렇게 팔자 좋게 꿈이나 꾸고 있는 건지도. 혹시 아는가. 지금 잠자고 있는 자신 옆에 그들이 있을지.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에 헬리아는 내심 초조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들이 소드 마스터라 쉽게 죽지는 않을 거란 믿음은 있었다. 제 한 몸 건사할 정도의 실력은 되는 이들이다.

“일단 꿈에서 깨고 봐야겠군.”

하지만 이제까지 헬리아가 원해서 꾼 꿈이 아니고 깨고 싶다고 마음대로 깰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애초에 왜 이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헬리아는 생각을 정리하다 으레 보이던 빛을 찾았다. 멀리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한줄기의 빛. 오늘만큼은 반드시 그녀에게 물어보리라. 헬리아는 이 꿈의 실마리를 풀어줄 이를 찾아 빛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어디가 바닥이고 천장인지 알 수 없으나 고요한 어둠 속에서 자신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윽고 헬리아는 빛의 주인공을 볼 수 있었다.

역시나 자신과 똑 닮은 얼굴을 한 여인. 언제나 애달픈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여인이었다.

세르게니아.

자신의 어머니였다.

“드디어 이곳까지 왔구나.”

세르게니아는 헬리아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봐!”

아스라이 들리는 목소리에 이안은 눈을 찌푸렸다. 누군가 자신을 향해 부르는 목소리인 것 같은데 묘하게 익숙했다. 아니, 짜증이 팍 나는 목소리였달까.

“안 일어나!”

그때 파악 하고 무언가 자신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이안은 그 순간 소드 마스터의 재빠른 몸놀림으로 그것을 피해냈다.

촤아악-

물줄기가 그가 몸을 피한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이 검은 좀 치우지. 일부러 깨워준 사람한테 너무하는 거 아니야?”

“좀 정상적으로 깨워주지 그랬나?”

“깨워준 것만도 고마워하라고.”

이안은 엘라임의 목에 겨누었던 검을 거두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는 어디지?”

“그거야 나도 모르지. 뭐, 보아하니 무슨 서재 같기도 하고 실험실 같기도 하고. 에잇, 젠장,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엘라임은 짜증이 팍 나 있었다. 갑자기 이동한 것도 모자라 헬리아와 떨어지게 된 것이다. 세인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엘라임의 말에 그제야 이안이 서둘러 헬리아의 기척을 감지하려 했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주님은?”

“젠장, 그게 문제라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아. 연결이 끊어진 건 아닌데, 도통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어.”

엘라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초조했다.

“그 빌어먹을 흑마법사 때문에!”

“소환 해제를 하면 되지 않나?”

“……그걸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그러다 소환되지 못할 상황이라면 아예 방법이 없잖아.”

엘라임이 헬리아를 걱정함에도 정령계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가 강제로 소환 해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헬리아에게 별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문제는 지금 헬리아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물론 연결-다행히 영혼의 맺음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맹약이기에 해약된 것은 아니지만-이 안 된다는 것이다.

“직접 찾아볼 수밖에 없군.”

이안은 검을 검집에 넣고는 본격적으로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동 마법진으로 이동한 이곳은 엘라임의 말대로 서재나 실험실 같았다. 제법 크기가 커서 대략 삼사십 평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사방은 전부 책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고, 테이블에는 무슨 실험을 한 것인지 실험 기구들과 서류들이 늘어져 있었다.

“젠장, 그런데 대체 어디로 나가는 거지?”

엘라임이 주변을 살펴봤지만 도통 나가는 문을 발견하지 못했다. 도대체 이 집구석은 도통 문이라는 게 없는 것 같다. 엘라임이 그렇게 투덜거리며 문을 찾고 있을 때 이안은 책장에 꽂힌 책과 서류를 살폈다.

“드래곤 하트 이식에 대한 연구 일지?”

거기에는 드래곤 하트를 인간에게 이식했을 때의 경과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물론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악필로 쓰여 있었지만 다행히 얼추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엄청난 악필이군.”

이안은 눈을 찌푸렸지만 이내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지금은 이런 실험 자료보다 그에게 더 중요한 건 바로 헬리아의 안위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안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먼지가 하나도 없군.”

“뭐 클린 마법진이라도 있는 모양이지.”

엘라임이 뭘 그런 시답지 않은 소리를 하냐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무언가 번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혹시 여기에도 가디언이 있는 건가?”

“가디언?”

“이 정도로 꼼꼼히 드래곤 레어를 만든 자라면 레어를 관리할 가디언도 두었겠지.”

“가디언이라…….”

“하아…… 그나저나 도대체 헬리아는 어디에 있는 거야?”

엘라임은 헬리아 걱정에 얼굴에 진 그늘이 가실 줄을 몰랐다.

* * *

헬리아는 자신과 닮은 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데 자세히 보니 자신과 닮지 않은 부분도 보였다. 좀 더 나이가 들어 보였고, 왠지 모를 기운이 풍겨져 나왔다.

“당신이 내 어머니인가요?”

여인의 눈이 헬리아의 말에 살짝 이채를 띠었다. 그러다 이내 눈을 지그시 감고는 다시 떴다. 그러자 그 자리엔 언제 애달픈 눈으로 자신을 보았냐는 듯 꽤나 거만한 눈동자가 있었다. 그녀는 드래곤이라는 종족의 자신감이 엿보이는 눈으로 말했다.

“위대한 마지막 드래곤 세르게니아란다.”

“하지만 어떻게…….”

헬리아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어떻게 과거에 죽은 인물이 자신의 꿈속에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그거야 사념체니까.”

“예?”

세르게니아의 말에 헬리아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내 마음을?’

“이건 결국 네 꿈속이야. 뭐 잡다한 것까지 다 설명하려면 길어지니까 그렇다고 해두면 돼.”

‘이 무책임한.’

헬리아는 혀를 내둘렀다. 아마 이것도 분명 읽었을 것이다. 한데 세르게니아는 제 말만 쏙 하고 이건 한 귀로 흘린 듯했다.

“사념체면 환영인가요?”

“환영은 이렇게 말 안 해. 뭐 나니까 가능한 일이지만.”

헬리아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무너지는 걸 느꼈다. 거기다 역시 드래곤인지라 거만했다.

“원래 성격이 이래요?”

“네 성격이 어떤지나 생각해 봐.”

헬리아는 인상을 팍 구겼다. 어디서도 안 꿀리는 그녀가 세르게니아 앞에선 확 찌부러져 버렸다.

“뭐 속으로 하나 말로 하나 다 알아듣는 거라면 그냥 말로 할게요. 도대체 왜 이런 걸 만든 거예요?”

“음, 좋은 질문이야. 그 설명을 하기 위해 내가 이 위대한 사념체를 남겼으니까.”

“퍽이나.”

“그건 속으로 말해줘.”

세르게니아의 말에 헬리아는 뭔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정말 이 사람이 어머니가 맞는 걸까? 자신의 기억 속의 어머니와는 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설마 내숭이었던 거야?

“자, 별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시간이 별로 없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지.”

세르게니아는 그러면서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새카만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이내 공간이 바뀌었다.

“이곳은…….”

“알아보는구나.”

세르게니아가 미소를 지었다. 바뀐 장소는 세르게니아의 무덤이 있는 장소, 바로 성의 뒤편에 자리한 정자였다. 세르게니아는 정자에 올라가 테이블에 앉으며 헬리아에게 말했다.

“어서 올라와.”

“어떻게 이렇게…….”

“꿈이니까. 뭔들 못 하겠어?”

‘퍽이나.’

헬리아는 왠지 그녀에게 계속 말리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순순히 그녀의 뜻에 따라 정자에 올랐다. 안에는 현실과 동일하게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따끈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가 올라와 있었다.

“이것도 꿈이에요?”

헬리아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녀에게 다가가 맞은편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 제 앞에 있는 차를 보았다. 만져 보니 따뜻했다.

“정말 진짜 같은데요?”

“실재하지 않지만 실재한다고도 할 수 있지.”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거다.”

세르게니아는 또 헬리아의 속마음을 읽고 찻잔을 들어 차를 음미했다. 그 모습에 헬리아는 저도 차를 들어 맛을 보았다. 입안에 확 풍기는 차향을 기대했는데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맛이 없는데요?”

말 그대로 맛 자체가 없었다.

“상상력이 부족한 거야.”

헬리아는 자꾸 이러다간 끝이 없을 것 같아 본론을 꺼냈다.

“도대체 왜 내 꿈에 나타난 거예요?”

세르게니아는 찻잔을 내려놓고 헬리아를 보았다. 금색의 눈동자가 헬리아를 직시하자 그녀는 순간 숨을 멈췄다.

금색의 눈동자. 자신과 닮았지만 더욱 흉포했다. 아니, 인간의 눈이 아닌 드래곤의 눈이기에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다들 자신의 눈을 보고 겁에 질리곤 했는데, 이건 자신의 눈과는 비교도 안 된다. 뭐든지 투영할 것 같은 맑은 눈동자, 그러나 그 안에는 인간을 두렵게 하는 공포가 존재했다. 그것이 드래곤이었다.

“그놈이 깨어났지?”

“그놈이라면…… 엑시온 말인가요?”

“역시, 깨어났나.”

세르게니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결코 일어나지 않길 바라던 일이 일어났다.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그자가 깨어나면 나 또한 깨어나게 해두었어. 네 꿈속에.”

“어째서죠? 왜 이런 방법으로…….”

“엑시온을 어떻게 다시 봉인할 건데?”

“그거야…….”

“모르지. 딱히 알려준 일도 없고. 그래서 그걸 알려주려고.”

“하아, 그걸 왜 사념체로 남겨서 굳이 이야기해 주는 건데요? 애초에 미리미리 알려줬으면 봉인이 풀리지도 않았을 테고.”

“여러 가지 사정이 있는 거야.”

그렇게 가볍게 말했지만 세르게니아의 표정이 진지해 헬리아는 뭐라 반박할 수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걸 보면 잘했어.”

“도대체 내가 얼마나…….”

“내가 말이야. 그 와중에도 이렇게 찾아올 수 있게 알뜰히 준비해 뒀으니 역시.”

‘성격이 참…….’

“말했다시피 네 성격도 그리 좋은 성격은 아니라고 봐.”

“그럼 유전인가 보죠.”

“다행이네. 네 성격이 안 좋다는 걸 인지해서.”

헬리아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이놈의 마음을 읽는 것 때문에 도통 생각을 못 하겠네. 세르게니아는 그런 헬리아의 투덜거림을 알았지만 다행히 일일이 반응하지는 않았다.

“그럼 엑시온을 어떻게 봉인할 수 있나요?”

“네가 여기에 온 걸 보면 다행히 그놈이 네 몸을 손에 넣지 못한 거겠지.”

“뭐 손에 넣을 뻔했죠.”

“그건 다행이야. 네가 그자의 손에 들어갔으면 봉인이고 뭐고 답도 없이 이 대륙이 멸망했을 테니까.”

“…….”

“다행이고말고.”

“하지만 드래곤 하트를 찾으려 해요. 이미 흑마법사가 이곳에 와 있어요.”

“…….”

세르게니아는 헬리아의 말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게 있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벌써…….”

“예?”

“엑시온이 드래곤 하트를 손에 넣게 해선 안 돼. 절대로!”

“그럼 드래곤 하트가 여기에 있나요?”

“물론, 그래야 엑시온을…….”

헬리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드래곤 하트만 있다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어!

“뭐?”

세르게니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헬리아의 속마음을 읽은 것이다. 헬리아는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드래곤 하트만 있으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어요.”

세르게니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아버지?”

세르게니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설마 빈은 아니겠지?”

“아버지 맞아요.”

“빈이 왜?”

“아버지가 쓰러지셨어요.”

“…….”

세르게니아의 표정이 확 변했다. 이전의 여유로운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폭풍 설한처럼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빈이 왜 쓰러진 거지?”

나직한 말속에는 짙은 분노가 깔려 있었다. 헬리아는 그 모습에서 정말로 어머니가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에 드셨어요.”

“……잠?”

세르게니아는 미간을 좁혔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설명해.”

그녀에게서 광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헬리아는 자신의 몸이 그녀의 기운에 떨리는 것을 느꼈다.

‘단순한 꿈이 아니란 말인가?’

헬리아는 몰랐지만 이곳이 세르게니아의 레어이기 때문에 그녀가 헬리아의 꿈에 간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공간을 바꾸거나 차를 내올 수 있었다.

“아버지의 심장에 드래곤 하트를 이식하셨나요?”

세르게니아는 조금 놀라는 듯했지만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다. 빈센트도 자신의 심장이 드래곤 하트인 줄은 모르고 있었다. 이는 곧 다른 사람이 빈센트의 심장을 확인할 상황이 생겼다는 말이다.

“설마 심장에 문제가 생긴 거야?”

“네.”

“하지만 그럴 리가? 이식은 완벽했어.”

세르게니아는 믿기 힘들었다. 그녀의 수술은 완벽했다. 이는 그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결과를 위해서 세르게니아가 얼마나 많은 연구를 해왔던가.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심장 이식엔 문제가 없었어요. 이식의 문제가 아니에요.”

“그럼 왜?”

“드래곤 하트를 반으로 쪼개면서 인간에게 이식할 수 있었지만 그 결과 드래곤 하트에 결함이 생긴 것 같아요.”

“드래곤 하트에 결함이?”

“드래곤 하트를 반으로 쪼개면서 드래곤 하트의 힘 자체가 약화되었어요. 무엇보다 손실률이 발생했어요.”

“손실률…….”

세르게니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드래곤 하트의 이식은 완벽했다. 다만 드래곤 하트를 반으로 쪼개는 일은 전무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세르게니아는 쪼개진 드래곤 하트가 점차 어떻게 변화할지 알지 못했다. 시간이 너무 급했던 터라 바로 이식을 하였기 때문이다. 조금 더 시간이 있었다면 이런 문제를 보안했을 것이다. 세르게니아가 눈을 감았다 떴다.

“빈이 잠에 빠진 건 그 손실률을 메우기 위함이겠지. 하지만 인간은 드래곤과 달리 손실률을 메우지 못해.”

“그래서 드래곤 하트가 필요해요.”

정말이지 운이 좋았다. 헬리아는 어머니의 사념체를 만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실상 드래곤 레어를 찾아왔지만 솔직히 드래곤 하트를 어떻게 이식하는지 알지 못했다. 한데 떡하니 제 눈앞에 그걸 설명해 줄 사람이 있지 않은가.

“…….”

세르게니아는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헬리아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녀의 머리가 복잡하게 뒤엉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세르게니아가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그 자리엔 더 이상의 혼란은 보이지 않았다. 헬리아는 세르게니아의 눈에서 혼란이 수습되는 것을 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드래곤 하트는 하나밖에 없어.”

“하나도 충분해요.”

“충분하지 않아.”

“예?”

세르게니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헬리아는 그녀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왜 네게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하면서 완벽한 사념체를 남겼다고 생각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날 닮았다면 제법 머리가 돌아갈 텐데, 빈을 닮았나? 아니지, 빈도 머리가 나쁘지 않아.”

“그러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알고 있잖아?”

“…….”

“직접 말하기 싫어? 아님 부정하고 싶은 거야? 네 속마음이 다 보이니까 숨길 필요 없어.”

“…….”

헬리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큰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지. 나는 엑시온을 봉인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사념체를 남긴 거야. 빈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지만 그것과 이건…….”

“다르지 않아. 드래곤 하트는 하나밖에 없으니까. 내가 말했잖아?”

“…….”

“좀 전의 이야기를 다시 하지. 엑시온을 봉인할 방법에 대해.”

세르게니아는 입술을 끌어 올렸다. 마치 헬리아가 무슨 꿍꿍이를 벌일 때의 그 표정과 닮아 있었다.

“드래곤 하트가 필요해.”

“…….”

“엑시온을 봉인하려면 드래곤 하트의 힘이 있어야 해.”

“그게 무슨 말인가요?”

“말 그대로야. 내가 드래곤 하트를 왜 남겼다고 생각해?”

“그럼 다른 드래곤 하트를.”

“하나밖에 없다고 했어.”

“다른 레어를 찾아보면 있을 거예요.”

어머니의 레어가 남아 있다는 건 곧 다른 드래곤의 레어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아닐까. 하지만 세르게니아의 대답은 그녀의 기대를 산산조각 내버렸다.

“없어.”

“……찾아보면.”

“내가 다 찾아서 써버렸으니까.”

세르게니아의 시선이 천장을 향했다. 꼭 헬리아의 원망 섞인 눈동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좀 더 찾아보면.”

“다 뒤졌어. 뭐, 나보다 네가 더 잘 찾을 수 있다면 한번 찾아보든가.”

“…….”

헬리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드래곤도 못 찾는 드래곤 레어를 헬리아가 무슨 수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거기다 시간이 부족했다.

‘젠장!’

헬리아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꼈다. 도대체 그 많은 드래곤 하트를 뭐 하는 데 써버렸는지. 그러나 결과는 하나였다. 드래곤 하트가 하나밖에 없다는 것.

‘드래곤 하트가 하나…….’

그제야 일이 복잡하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다. 드래곤 하트가 하나. 그러나 필요한 곳은 두 곳. 아버지를 살리느냐, 엑시온을 봉인하느냐. 헬리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아버지가…….’

자신도 캄캄한 어둠 속에 있어 봐서 안다. 결코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그런 곳에 아버지가 있다 생각하니 울컥 가슴이 아팠다. 다른 방법이 진정 없단 말인가?

“없어.”

“…….”

헬리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럼 뭐 생각할 것도 없네요.”

헬리아의 표정에 세르게니아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무슨 말이야?”

“제 생각을 읽었으니 아실 거 아니에요.”

“안 돼.”

“돼요.”

“안 돼.”

“왜 안 된다는 거죠? 엑시온 부활? 생각해 보니 드래곤 하트만 없으면 엑시온은 제대로 부활도 못 한 시커먼 유령에 불과하죠.”

엑시온 부활을 막는다? 솔직히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헬리아에게 아버지의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

세르게니아는 얼이 빠져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렇게 사뿐히 엑시온의 봉인을 제쳐 버리다니.

“큭큭큭.”

세르게니아는 왠지 유쾌해졌다. 솔직히 이렇게 생각할 줄 몰랐다.

“역시 내 위대한 유전자야.”

“제가 위대한 거라고 해주세요.”

“뻔뻔하긴.”

“누굴 닮아서죠.”

헬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세르게니아는 재밌게도 그 모습이 미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가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엑시온은 결코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네가 그를 봉인하지 않으면 네가 당해.”

“이제껏 약하단 소리 못 들었어요.”

“그 힘을 믿고 있는 거야?”

“…….”

“하기야 그 힘이라면 어떻게든 될 수도 있겠네. 드래곤의 힘이니까.”

“그럼…….”

“하지만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세르게니아의 입가에 짙은 웃음이 걸렸다. 하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네 몸 못 버텨. 알고 있지?”

“…….”

“드래곤 하트는 엄밀히 말해서 그 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네게 남긴 것이야. 드래곤 하트 없이는 그 힘을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없어.”

“…….”

“그럼 어떻게 될까?”

세르게니아가 짙게 웃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헬리아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뭐, 좋아. 나 또한 엑시온과 마찬가지로 유령에 불과하니 현세의 일은 현세에 맡겨두지. 선택은 네 몫이야.”

세르게니아가 쉽게 물러나자 헬리아는 왠지 김이 빠졌다.

“엑시온을 봉인하길 바란 거 아니었어요?”

“음, 그렇지만 빈이 아프다잖아? 내 사랑 빈이 아파하는 걸 볼 수만은 없지.”

“징하네요.”

“어라? 드래곤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 가르쳐 줄 필요가 있겠군. 내 800년의 긴긴 사랑 이야기를 네게 들려주지.”

그러다 세르게니아는 자조적으로 픽 웃었다.

“뭐, 결국 이렇게 끝은 있게 마련이지만.”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좀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수십, 수천 번을 되뇌었다.

‘생각만으로 끝냈어야 했어.’

“너는 그러지 마.”

세르게니아가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헬리아는 세르게니아의 표정이 너무나 슬퍼 대답하지 못했다. 처음 꿈속에서 보여주었던 그 모습이었다. 이 모습이 진짜 모습이 아닐까.

“어떻게 계속 그렇게 좋아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이잖아요? 외모도 다르고 기억도 못 하고.”

“다른 사람이 아니야. 나에게는.”

외모가 달라도 기억이 없어도 다르지 않았다. 외모는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 기억 또한 마찬가지다. 자신이 기억하기에. 자신이 그 모든 것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기에 다를 수 없는 것이다.

“이럴 때는 드래곤에게도 망각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

헬리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으니까. 그게 어떤 느낌인지 안다.

“잊고 싶어요?”

“참 우습게도 그건 아니야. 내가 기억하지 못하면 끝이니까.”

세르게니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뜬 건 그로부터 한참 동안 시간이 지난 후였다. 이미 그녀의 눈빛에는 상념이 지워져 있었다.

“선택은 네 몫이야. 뭐, 그래 봐야 뻔한 것 같으니까.”

헬리아는 씨익 웃었다. 세르게니아도 함께 웃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가시는 거예요?”

“원래 죽은 몸이니 갈 것도 없지. 궁금하면 함께 갈래?”

“아직 살날 창창한 딸내미한테 할 말이에요?”

“크큭, 그런데 살날이 영 창창해 보이진 않는데? 그래도 너무 일찍 오진 마라.”

“벽에 똥칠할 때까지 있다 갈 거예요.”

“에비 더러워라.”

“얼른 가시기나 하세요.”

“그럼 쓰나. 봉인하는 방법이랑 예상치 않은 일이지만 이식 방법은 네 기억 속에 남겨두고 갈게.”

“사후 서비스가 확실한데요?”

“그 소리 나중에 안 나올 거다.”

세르게니아가 키득거렸다. 그러다 진지한 표정으로 헬리아에게 말했다. 이미 그녀의 몸은 반 이상이 사라진 상태였다.

“반드시 엑시온을 죽여야 해. 그러지 못하면 봉인해.”

“애초에 좀 잘 처리하고 가지 이게 뭐예요.”

“엑시온이 하는 말을 믿지 마.”

“예?”

“어차피 너라면 그리 신경 쓰지 않겠지.”

세르게니아의 모습이 이제는 목 위밖에 남지 않았다.

“엑시온은…….”

세르게니아의 입 모양이 움직였다. 그러나 이미 소리와 함께 온전히 사라진 뒤였다.

“엑시온은? 뭐였지?”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꿈이 캄캄한 어둠 속에 잠기기 시작했다.

파앗!

갑자기 환한 빛이 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그 자리에 헬리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퍼억!

“아얏!”

허공에서 나타난 헬리아는 무방비 상태로 바닥에 툭 떨어졌다.

“아이고, 머리야.”

헬리아는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기억을 전이해 준 건 고마운데 이렇게 아플 거라는 건 미리 알려줬어야 하지 않는가. 갑자기 떨어진 거 하며 깨질 듯한 머리 하며 이런 건 미리 알려주면 어디 덧난단 말인가.

“사후 서비스가 좋기는 개뿔!”

그런데 세게 떨어진 것치고는 이상하게 아프지 않았다. 그리고 이 물컹한 건 뭐지?

물컹물컹.

“어라?”

“으으윽!”

“엘라임?”

헬리아는 제 아래에 깔려 짜부라진 그를 보았다. 엘라임은 퍼진 개구리처럼 철퍼덕 바닥에 뺨을 비비고 있었다.

“거기서 뭐 해?”

“크큭, 뭐…… 긴 뭐야! 네가 갑자기 위에서 떨어져서 그런 거지!”

“쯧, 그거 하나 못 피해?”

헬리아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좀 미안하긴 한지 주섬주섬 일어나며 엘리임도 함께 일으켜 세웠다.

“아이고 허리야. 남자는 허리가 생명인데.”

“허리 쓸 일이나 있냐?”

“흐흐, 그거야 네가 도와만 주면.”

헬리아는 아예 엘라임의 허리를 주먹으로 퍼억 쳤다.

“컥!”

그러자 엘라임이 푹 고꾸라졌다.

“이제 쓸 일이 없네.”

“으으윽. 이 악독한.”

엘라임이 장렬히 전사했다.

그때 이안은 그런 엘라임을 사뿐히 지르밟고 헬리아에게 다가왔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이안은 그녀에 대한 걱정으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괜찮아. 한데 세인이랑 그 개자식 스토커 제롬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른 곳으로 이동된 게 아닐까 싶습니다.”

헬리아도 주변을 둘러보고 엘라임과 이안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헬리아는 와락 미간을 구겼다.

“고물이구먼.”

분명 세르게니아에게서 받은 기억 전이로 인해 대충 이곳이 어딘지는 알았다. 한데 원래라면 처음 있던 곳에서 모두 이곳으로 와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동 마법진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그 개자식을 요절내야 하는데.”

헬리아가 주먹을 꾹 쥐며 이를 갈았다. 제롬의 일만 생각하면 짜증이 팍 솟구쳤다. 결과적으로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화가 풀리진 않았다.

“어디 콱 함정에 걸려 버려라.”

헬리아는 제롬에게 악담을 한 바가지 퍼붓고 나서야 진정이 되었다.

“한데 이곳은.”

“서재인 것 같습니다.”

“아, 서재. 여기가 그곳인가.”

헬리아는 정리되지 않은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한데 영 떠오르는 게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한동안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한데 어디에 있었던 거야?”

엘라임이 허리를 꾹꾹 누르며 비척비척 일어났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자신의 걱정을 이런 폭력으로 대답하다니. 제가 저지른 일은 모르고 헬리아가 야속한 엘라임이었다.

“어머니를 만났어.”

“그 꿈?”

“응.”

“드래곤 하트를 찾으신 겁니까?”

이곳에 온 목적이 그것이기에 이안이 물었다. 헬리아는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한 이야기가 여전히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이제 아버지를 구할 수 있어.”

“그럼 얼른 드래곤 하트나 찾고 돌아가자. 여기는 영 꺼림칙해. 아무것도 안 통하고.”

“결계 때문에 그래.”

세르게니아는 다중으로 결계를 쳐놓았다. 그녀 외엔 결코 아무도 이곳에 들어올 수 없었다. 오직 그녀만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게 만들어진 곳이다. 그렇기에 정령의 힘 또한 통하지 않았다.

“한데 어떻게 나가지? 아무리 찾아봐도 문이 없어.”

“안내를 받아야지.”

“안내?”

엘라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헬리아는 빈 허공에 대고 입을 열었다.

“이봐, 언제까지 보고만 있을 거야? 그만 튀어나오시지? 엘르.”

“엘르? 그게 누구야?”

그때였다.

“어서 오세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엘라임과 이안이 흠칫 놀랐다. 이안은 채 검을 뽑지도 못 했다.

‘인기척을 느끼지도 못 했다.’

그들의 뒤에는 한 인형이 서 있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그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헬리아는 그 인형을 보고는 약간 놀라 눈이 커졌다.

“너는.”

“엘르라고 합니다. 이곳을 지키는 가디언입니다.”

“가디언?”

엘라임이 놀라며 상대를 보았다. 그의 허리 아래에 오는 작은 키에 녹색 머리에 녹안을 지닌 엘프였다. 무엇보다 그는 다름 아닌 헬리아가 구해 준 그 어린 소년이었다.

“네가 가디언이었어?”

“주인님이 기다리신 분이 오신 것 같아 미리 마중을 나갔습니다.”

“그게 마중인가?”

엘르라는 엘프는 옅게 웃었다. 어린 엘프의 웃음이라고 보기엔 성숙했다. 눈빛 또한 깊고 맑았다.

“주인님께서 미리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셔서요. 아시잖아요? 그분 성격.”

“……일부러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그 문을 열게 해두었군.”

“어차피 나중에 다 알게 될 일이지요.”

엘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한데 가디언이면서 흑마법사가 안에 들어오게 놔둔 거야?”

“들어오다니요? 아, 2층 말이죠? 하지만 그곳은 일부러 들어오게 만들어둔 곳이에요. 이를테면 함정이죠.”

엘르가 씨익 웃었다.

“개미지옥이군.”

“어차피 아기씨께서 가지고 계신 열쇠가 없으면 이곳까지 오지 못합니다. 뭐, 적당히 어울리면서 처리하는 거죠.”

엘르의 태연한 태도에 헬리아는 기가 질렸다.

‘정말 어디서 어머니 같은 가디언만 골라서.’

그러고 보니 엘프의 나이를 인간의 기준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게 떠올랐다.

“나이가?”

“적어도 아기씨께서 태어나기 전전전전부터 아기씨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보단 많을 거예요.”

“엄청 많이 먹었다는 건 알겠는데 그 모습은…….”

엘프가 아무리 수명이 길고 인간보다 성장이 느리다지만 그래도 엘르는 너무 어린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귀엽잖아요?”

“속이 귀여워야지. 그보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 애늙이한테 아기씨로 불리고 싶지 않아. 헬리아라고 불러.”

“알겠어요, 헬리아 님.”

굳이 님까지 붙이지 말라고 하려다 귀찮아서 그만두었다.

“그보다…….”

엘르는 헬리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쳐다봐?”

엘라임이 괜히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모습이 어린애라도 이미 알 거 다 아는 노인네 아닌가? 왠지 얼굴이 상기된 채 헬리아를 바라보는 엘르가 못마땅했다.

“정말 닮으셨네요. 주인님과.”

“하긴 나도 놀라긴 했지.”

“예, 그리고 성격도.”

“그건 아니야.”

딱 잘라 말했지만 엘르는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아니에요. 정말 닮으셨어요. 그 제멋대로인 성격이.”

“…….”

헬리아는 입술을 비틀었지만 엘르가 워낙 추억이 그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서 부정할 수 없었다. 결코 정곡을 찔려서가 아니다.

“그보다 드래곤 하트는?”

“그러지 말고 차 한잔 어떠세요? 주인님의 레어 안에는 좋은 차가 가득해요.”

엘르는 오랜만에 살아 계신 주인님을 보는 듯해 애틋한 표정을 지었다. 헬리아는 그 모습에 왠지 짠해졌다. 세르게니아로부터 받은 기억을 통해 엘르가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에 그녀의 가디언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세르게니아가 사라진 근 십여 년이 넘도록 혼자 이곳을 지켰다는 것도. 이곳을 지키는 가디언은 그 혼자뿐이었다.

헬리아의 표정을 본 엘르가 피식 웃었다.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그러고 보니 그건 또 다르네요. 주인님은 결코 그런 표정을 짓지 않았거든요.”

엘르가 환하게 웃자 헬리아도 마주 웃었다.

“뭐 차 한잔 마실 시간이야 없겠어.”

“정말요?”

엘르가 정말 기쁜 듯이 웃었다. 헬리아는 쓰게 웃었다. 엘르의 나이를 알아도 아무래도 그의 외모가 어린아이인 이상 강하게 나가지 못하는 것 같다. 어린아이한테는 약한 그녀였다.

“자, 얼른요.”

헬리아는 엘르의 안내를 받으며 움직였다. 작은 엘르가 폴짝폴짝 뛰는 모습에 헬리아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 * *

“끄, 끄억…….”

한 여인이 단말마를 채 내뱉지 못하고 미라처럼 바짝 말라 허공에 부서졌다. 엑시온은 여인의 목에서 손을 놓았다. 여인에게 취한 생기로 인해 엑시온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엑시온은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큭큭큭큭.”

캄캄한 어둠 속에서 흘러나오는 엑시온의 웃음소리에 주변에 있던 흑마법사들이 흠칫 몸을 떨었다. 엑시온이 손을 털고 자신의 손을 보았다. 더 이상 불안정하지 않았다. 그동안 수많은 여인의 생기를 취한 결과였다. 물론 완벽히 부활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생기를 취해도 그저 에너지를 가득 채운 것에 불과할 뿐, 본신의 능력을 깨우기엔 부족했다.

“세르게니아…… 큭큭큭, 네 뜻대로 되진 않을 것이다. 아무도 날 막지 못해.”

엑시온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검은 기류가 그의 몸을 휘감더니 어느새 엑시온의 몸이 사라졌다.

* * *

“음? 이 차는?”

“혹시 아세요? 카시카 잎으로 만든 차예요.”

“카시카? 이미 사라졌을 텐데.”

헬리아는 차를 맛보고는 놀랐다. 카시카는 백 년 전에 아주 인기가 많은 차였다. 그러나 자연적으로밖에 얻을 수 없는데다가 무차별적인 채집으로 인해 사라진 차였다. 그런 걸 맛보다니. 헬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흐흐흐, 그러고 보니 보물을 잊을 뻔했군.’

어떻게 보물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아마 이곳엔 희귀한 차 말고도 분명 다른 희귀하고 값비싼 물건이 잔뜩 있을 것이다.

“또 헬리아가 돈독이 올랐어.”

엘라임이 그런 헬리아를 보며 이안에게 동조를 구했다. 이안은 그저 차를 마시는 걸로 대답을 피했다. 하지만 딱히 부정하지 않을 걸 보면 긍정이 아닐까.

“맛있으세요?”

“응.”

“많이 있으니까 마음껏 드세요.”

엘르가 정말 기쁜 듯 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차를 내온 것이 얼마만인지 모른다. 그 모습을 보고 헬리아가 엘르에게 말했다.

“엘르, 혹시 함께 밖에 나갈래?”

“예?”

“이곳에 혼자 있기 외롭잖아.”

“……아.”

엘르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 돌았다. 그러다 문득 시무룩해져 고개를 숙였다.

“안 돼요.”

“응?”

“저는 밖에 나갈 수가 없어요.”

“왜? 어머니 때문이야?”

엘르는 희미하게 웃었다.

“저는 이미 죽은 몸이에요.”

“…….”

엘르의 말에 헬리아는 물론 엘라임과 이안도 움직임을 멈췄다. 헬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이렇게…….”

“이곳에서만이에요. 애초에 저는 500년 전에 이미 죽은 몸이었어요. 주인님께서 인형의 몸으로 이렇게나마 살게 해주신 것뿐이에요.”

“…….”

헬리아는 입을 열지 못했다. 뭐라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엘르는 더욱 환히 웃었다.

“말만으로도 감사해요.”

“미안.”

“아니에요. 뭐, 옛날이야기인데요.”

그러나 헬리아의 표정이 영 좋지 않자 엘르는 잠깐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실래요?”

“부탁?”

“네, 제 부족이 잘 지내나 한번 봐주세요. 하얀 바람의 부족이라고 해요.”

엘르는 자신의 부족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헤어진 동생의 안부를 부탁했다.

“그거면 돼?”

“네, 그거면 돼요.”

“알았어.”

“아, 그리고 이거.”

엘르는 품에서 나뭇가지를 건네주었다.

“이건……?”

“꽤 폐쇄적인 부족이라 아마 이게 없으면 혹시 공격할지도 몰라요.”

“알았어. 꼭 잘 지내나 확인할게.”

만약 잘 지내지 못한다면 잘 지낼 수 있도록 도와줄 참이다. 어머니의 가디언이었지만 헬리아는 어린아이가 슬피 웃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비록 그가 나이를 많이 먹었더라도. 이 정도 일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자, 그럼 안내할게요. 드래곤 하트가 있는 곳으로.”

쿠웅!

환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엘라임이 바닥에 철퍼덕 뺨을 부비고 헬리아가 그 위에 앉는 소리였다.

“켁!”

“이거 항상 이동할 때마다 이래?”

헬리아는 샐쭉한 표정을 짓고 엘라임의 등에서 내려왔다. 엘라임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부스스 일어났다. 이안과 엘르만이 사뿐히 착지해 있었다.

엘르는 헬리아의 말에 환하게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격언을 몸소 실현해 주는 엘르였다.

“고물이라서요. 저도 수리를 못 하거든요.”

“잘났어.”

“아시다시피 그동안 딱히 쓸 일도 없었고.”

엘르가 순간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헬리아가 얼른 그를 달랬다. 이거 어찌 일부러 저런다는 생각이 쪼금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어린애가 우는데.

“뭐, 어찌 작동하면 되겠지.”

“그죠?”

엘르가 씨익 웃었다. 역시 바로 저 웃음이다. 티끌 없이 환히 웃는데 뭐라 할 말도 궁해진다.

“자, 바로 저 문 안이에요. 저기에 드래곤 하트가 보관되어 있어요.

엘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헬리아 일행을 안내했다. 그들이 간 곳은 거대한 철문 앞이었다. 철문은 정말이지 드래곤의 본체로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문 전면에는 화려한 용이 각각 문 한 짝씩 양각되어 있었다.

“엄청 크다.”

엘라임이 놀란 듯 눈이 커졌다. 헬리아도 놀라긴 마찬가지. 하지만 다른 의미로 놀랐다.

“여기가 보물 창고?”

이 정도 크기라면 그 안에 든 보물의 양 또한 어마어마할 것이다. 헬리아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반짝거렸다. 드래곤 하트가 아니라 잿밥에 관심이 더 많아 보이는 눈빛이었다.

“주인님께서 모아두신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에요. 드래곤 하트도 이곳에 있죠.”

‘후후후, 다 쓸어가 주마.’

헬리아는 입맛을 다셨다. 드래곤 레어에 있을 보물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르가 그 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

“왜?”

“정말 주인님과 닮으셔서요. 주인님이 잘 지으시는 표정이거든요.”

“……안 닮았거든?”

헬리아는 괜히 찔려서 표정을 고쳤다.

“얼른 들어가자.”

“철문에 열쇠를 꽂으시면 돼요.”

“열쇠? 아, 그거?”

헬리아는 품에서 펜던트를 꺼냈다.

“저기 저 구멍 난 곳에 끼우시면 돼요.”

“여기에다 꽂으면 되는 거지?”

구멍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헬리아는 엘르가 말한 움푹 패인 곳에 펜던트를 끼워 넣었다. 그러자 달칵 소리에 이어 드르륵 무거운 게 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그리고 두꺼운 철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자신의 품에 드래곤의 보물이!

“엥?”

그런데 헬리아의 입에서는 당연히 나와야 할 기쁨과 환희의 외침이 아닌 요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헬리아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이, 이게 뭐야?!”

“주인님이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에요.”

“하나도 없잖아!”

“아, 주인님께서 아끼시던 보물은 모두 아르센 왕국으로 옮기셨거든요.”

“……없다고? 아무것도? 하나도? 전혀? 아예?”

“예. 아, 그리고 이런 말도 남기셨어요.”

“……무슨 말?”

“세상에 공짜는 없다.”

“…….”

“보물은 모두 아르센 왕국의 국왕에게 줬다고 하셨어요.”

“…….”

헬리아는 허탈해져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럼 보물은, 내 보물은…….

“이 보물을 위해 이곳까지 힘들게 왔는데!”

“아버지의 드래곤 하트를 찾아서가 아니라?”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가 눈을 샐쭉하게 떴다. 그러다 중앙에 있는 물건을 보곤 그것에 시선을 빼앗겼다.

“저게…….”

헬리아는 창고 가운데서 홀로-그것밖에 없었다-빛나는 것을 보았다. 유리로 둘러싸여 있는 그것은 드래곤 하트였다.

“드래곤 하트!”

헬리아는 서둘러 드래곤 하트가 있는 곳으로 갔다. 영롱한 빛깔을 품고 있는 드래곤 하트가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이게 드래곤 하트?”

심장과는 다르게 생겼다. 마치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것이 흡사 마정석과도 닮아 있었다.

“네, 주인님께서 헬리아 님에게 남기신 드래곤 하트입니다. 후후, 드디어 제 할 일이 다 끝났네요.”

“할 일?”

엘르의 환한 웃음에 헬리아는 영문을 몰랐다. 엘르는 이날을 위해 기다렸다. 홀로 수십 년의 세월을 참고 기다린 것이 바로 이날을 위해서였다.

“이걸 전해 드리는 게 제 마지막 할 일이었어요.”

“…….”

헬리아는 그런 엘르를 바라보다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이것으로 마지막일 것이다. 왠지 아쉬워졌다.

“고마워, 기다려 줘서.”

엘르가 싱긋 웃었다. 헬리아는 드래곤 하트를 보았다. 드래곤 하트에서는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게 드래곤 하트……. 이것만 있으면 아버지가…….”

그때였다.

파앗!

갑자기 창고 안이 검은 마기에 휩싸이더니 마기를 뚫고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헬리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낯익은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큭큭큭.”

“어떻게…….”

마기 속에서 낮게 울리는 웃음소리.

헬리아는 제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가 이곳에 있단 말인가? 이건 말이 안 된다. 결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헬리아는 잔뜩 긴장된 턱을 끌어당기며 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엑시온…….”

엑시온이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금색 눈동자. 헬리아와 똑같은 얼굴을 지닌 엑시온이 입가에 조소를 띤 채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헬리아!”

“공주님!”

엘라임과 이안이 재빠르게 헬리아의 앞에 섰다. 헬리아는 갑자기 나타난 엑시온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여기에?’

분명 이곳은 세르게니아 말고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 했다. 한데 어떻게 엑시온이 버젓이 이곳에 있단 말인가? 거기다 보물 창고 안에?!

“후후후.”

엑시온의 등장을 아예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그가 먼저 이곳을 찾았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바로 눈앞에서 마주 보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큭큭, 오랜만이군, 여긴.”

엑시온이 주변을 둘러보며 입술을 끌어 올렸다. 어딘지 모르게 아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그 눈동자에 불같은 분노가 타올랐다.

“오호, 여기들 있었군.”

“…….”

“오랜만이라고 해야 하나, 헬리아 공주?”

“평생 오랜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여전히 입만 살았군. 세르게니아와 똑같이.”

‘누가 똑같다는 거야?!’

헬리아는 짜증스런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엑시온에게마저 그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가.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이다.”

엑시온이 천천히 걸어갔다. 갑작스런 마기로 인해 드래곤 하트를 손에 넣지 못한 헬리아였다. 그 드래곤 하트가 있는 곳으로 엑시온이 걸어갔다.

헬리아가 재빨리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마기가 그것을 막았다.

“이 드래곤 하트는 내가 가져가지.”

“누가 그렇게 놔둘 줄 알고!”

엑시온이 손을 뻗자 주변에서 넘실거리던 마기가 헬리아 일행을 덮치기 시작했다.

“엘라임, 이안!”

헬리아의 눈동자가 빠르게 선명한 금빛을 띠기 시작하더니 그녀의 온몸에서 황금빛 기운이 흘러나왔다. 황금빛에 마기는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엑시온의 눈이 찌푸려졌다.

“거슬리는군.”

엑시온은 한층 더 강한 힘을 뿜어냈다. 그러자 밀리던 마기가 차츰 헬리아의 기운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읏!”

헬리아는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가슴의 통증에 입술을 깨물었다. 드래곤의 힘을 사용하는데 인간의 몸으로는 부담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할 수 없어!’

이대로 엑시온에게 잠자코 죽어줄 수는 없지 않은가?

“헬리아, 괜찮아?!”

엘라임이 그런 헬리아를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 부탁해.”

“알겠습니다.”

이안이 빠른 속도로 마기를 가르고 엑시온에게 다가가 검을 휘둘렀다. 검에 휘감긴 오러블레이드가 단숨에 엑시온의 몸을 갈랐다. 그러나 엑시온은 간발의 차로 그것을 피해내며 마기로 이안을 후려쳤다.

“크윽!”

“그 정도 공격으론 어림없다.”

엑시온이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자신의 마기를 막은 이안을 재차 공격했다. 그 틈을 엘라임의 공격이 치고 들어왔다.

“크윽!”

엘라임의 갑작스런 공격에 엑시온은 너덜너덜해진 제 왼팔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감히 정령 따위가!”

“누가 할 소리! 유령 따위는 저승에나 가시지!”

엑시온이 엘라임을 향해 마기를 쏟아부었다. 빠르게 쇄도하는 마기가 엘라임의 공격을 분쇄시켰다. 이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엑시온을 공격했다. 엑시온은 엘라임의 공격을 막느라 이안에게 치명타를 내주고 말았다.

“크윽! 이놈들이!”

그러나 엑시온은 과연 만만치 않았다. 이안에게 당한 그 순간 반격을 날렸다. 이전과는 다른 더욱 강한 힘을 이안은 막았지만 강력한 반탄력 때문에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크, 크윽!”

이안의 입가에 피가 흘러내렸다.

“엘라임!”

헬리아가 입술을 깨물고 힘을 끌어올렸다.

‘잠시 엑시온을 붙잡아줘!’

[무슨 생각이야?]

‘엑시온을 봉인할 거야.’

엘라임이 헬리아를 보았다. 진심이냐고 묻는 눈빛이었다.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봉인 방법에 대해서는 세르게니아의 기억 전이 마법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네 힘으로는.]

‘여기서 죽는 것보단 나을 거야. 최소한 엑시온을 막을 수 있겠지.’

엘라임은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 죽지 마!]

‘누가 할 소리!’

[난 안 죽는다고!]

엘라임과 헬리아가 서로를 마주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어찌 되든 밑져야 본전이다. 엘라임은 이를 악물고 엑시온의 주위에 수벽을 세워 그를 압박해 들어갔다.

“이런 하찮은 수가 내게 통할 것 같으냐!”

엘라임의 공격에 엑시온이 수벽을 부쉈지만 수벽은 빠르게 재생되며 엑시온을 가뒀다.

‘헬리아, 서둘러!’

그가 힘을 쓰면 쓸수록 부담이 되는 것은 바로 헬리아였다. 엘라임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헬리아는 봉인 마법을 치르기 위해 눈을 감으며 힘을 끌어올렸다. 자신 안에 있는 드래곤의 힘을 완전히 일깨워야 한다.

스르르륵-

온몸에 피가 역류하는 것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다. 봉인이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른다. 아마 실패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으득!”

헬리아가 사지를 찢을 듯한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입가로 한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헬리아는 멈추지 않았다. 세르게니아가 알려준 마법을 시전하자 헬리아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그 마법은!”

엑시온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바로 자신을 봉인했던 그 마법이었다. 설마 그 마법이 다시 재현될 줄이야.

“세르게니아!!”

엑시온이 눈을 부릅떴다. 헬리아를 상대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헬리아의 힘이 점차 강해졌기 때문이다. 만약 이대로 봉인당한다면 다시는 결코 부활하지 못하리라.

“이대로 봉인당할 줄 아느냐!”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게 지하에 처박아주마!”

파아아앗!

금색 빛은 쇠사슬이 되어 엑시온의 손과 발을 묶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엑시온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빛의 사슬은 점점 더 엑시온을 칭칭 휘감았다. 팔다리에서 그의 몸까지 사슬이 감겼다.

엑시온은 자신의 근원이 깨질 듯한 고통을 맞봐야 했다.

“끄아아악!”

그의 몸이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쿠, 쿨럭!”

헬리아의 입에서 거친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붉은 피가 입술을 비집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엘라임이 헬리아의 몸 상태를 확인하곤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헬리아!”

“괜찮아.”

“그게 괜찮은 거야!?”

헬리아는 쓰게 웃었다. 세르게니아는 분명 이 힘을 온전히 쓰기 위해선 드래곤 하트가 필요하다고 했다. 인간의 몸으로는 이 힘을 사용하기 어렵다고. 알고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게 현실 아니던가. 헬리아의 무릎이 굽혀졌다. 이안 또한 그녀의 상태를 알아차리곤 자신의 상처는 돌보지 않고 그녀에게 달려왔다.

“공주님!”

이안은 다가오는데 그의 목소리는 점차 멀리 달아났다. 헬리아는 자신의 의식이 흐려진다는 걸 알아차렸다.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봉인이…….’

아직 엑시온의 봉인이 완성되지 않았다. 이렇게 실패하고 마는 건가.

‘역시 성급했나…….’

하지만 드래곤 하트를 엑시온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 그의 부활이 아니라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드래곤 하트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 이대로 물러설 수, 쿠, 쿨럭!”

거친 기침과 함께 피가 후두둑 바닥을 적셨다. 이젠 눈앞이 보이지 않았다.

“젠장!”

이안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몸에선 끊임없이 금빛 기운이 흘러나왔다. 위험했다. 당장에라도 봉인을 멈춰야 한다.

“공주님!”

“…….”

“헬리아! 당장 봉인을 멈춰!”

이안이 소리쳤지만 헬리아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엑시온을 향해 있었다.

“헬리아!”

엘라임도 헬리아의 상태가 위험하자 힘을 멈추라 말했지만 헬리아는 듣지 않았다. 아니, 이미 듣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헬리아! 힘을 거둬! 이러단 네가 죽겠어!”

헬리아는 웅웅거리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았다. 숨이 막히고 무거운 납덩이가 몸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대로 죽게 되는 건가?’

어딘가 현실 세계와는 머나먼 곳에 와 있는 듯 붕 뜬 느낌이 들었다. 죽는다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하지만 그 순간 아버지가 떠올랐다. 이대로 엑시온이 부활하면, 엑시온이 드래곤 하트를 가져가 버리면 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아버지는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상태로 긴 잠에 빠져 있다. 그리고 깨어나지 못하면 영영 그런 상태가 지속될 것이다.

‘그렇게 놔두지 않아.’

이미 엑시온의 어둠에 갇혀 봤다. 그것이 얼마나 외롭고 두려운지 헬리아는 알았다. 아버지에게 그런 고통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반드시 살리라, 이곳에서 죽지 않아!’

나도 살고, 아버지도 사는 것.

헬리아는 그렇게 굳게 다짐했다. 이대로 죽을 수 없다. 그녀의 의지가 통한 것일까. 캄캄한 시야가 밝아지며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에 보인 것은 안타깝게도 헬리아의 힘이 약해지는 틈을 타 엑시온이 봉인을 깨는 장면이었다.

“끄아아아! 감히 나를!”

봉인에서 풀린 엑시온이 헬리아를 향해 마기를 퍼부었다.

쇄애애액!

날카로운 칼날처럼 쇄도해 오는 마기에 이안이 다급히 소리쳤다.

“공주님!”

이안이 가까스로 헬리아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나 이안은 그 공격을 맞고 다시 한번 벽에 처박혔다.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한 채 오로지 헬리아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던 터라 그 충격은 컸다. 벽에 부딪친 이안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안!”

“감히 나를 봉인해?!”

엑시온이 눈이 뒤집힌 채 헬리아를 향해 이를 갈았다.

“크윽, 제, 젠장, 재수가 좋으려니 했는데.”

드래곤 하트를 찾고 봉인 방법도 알고 아버지를 살릴 수 있는 방법까지 알게 되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참으로 그 짝이었다.

“운도 지지리 없지.”

“네년을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겠다!”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엑시온의 신형이 스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엑시온은 이를 악물고 버텼으나 서 있는 것조차 힘에 부친 듯했다. 봉인 마법으로 이미 온몸이 헤쳐진 듯한 공격을 받았다. 당연히 괜찮을 리 없었다.

“엘라임, 엑시온을!”

“젠장, 제발 네 몸부터 걱정하라고!”

엘라임은 한껏 헬리아에게 쏘아붙였으나 이를 악물고 약해진 엑시온을 공격했다. 그러나 그의 힘은 이전과 달리 약했다. 헬리아의 힘이 거의 다했기 때문이다. 물론 엑시온 또한 힘이 현저히 약해진 상태. 엘라임의 공격을 맞고 튕겨 나갔다.

“크윽! 이 정령이!”

이대로 있다간 당한다. 위기감에 엑시온의 이마에서 작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의 시선이 드래곤 하트를 향했다.

‘저것만 있으면…….’

완전히 부활할 수 있다. 그러면 아무리 헬리아 공주라고 하더라도 그를 막을 수 없다. 세르게니아 또한 그를 봉인하는 데 그치지 않았던가. 하물며 인간의 몸인 헬리아 공주가 자신을 막을 리 만무했다.

“드래곤 하트는 내 것이다!”

엑시온의 금빛 두 눈동자에 귀기가 어렸다. 그가 자신의 최대 힘을 끌어올렸다.

“죽어라!”

강력한 마기가 헬리아 일행을 향해 쏘아졌다. 엑시온이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부은 공격이다. 헬리아의 힘으로 결코 막을 수 없었다. 엘라임도 이안도, 그리고 헬리아도 힘이 다한 상태였다.

“젠장!”

“헬리아!”

엘라임이 헬리아의 몸을 감쌌다. 그러나 과연 그의 힘으로 헬리아를 보호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후두둑. 후둑.

박살 난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뿌옇게 일어난 먼지로 인해 상황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먼지가 가라앉자 처참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헬리아의 눈이 파르르 떨리며 열렸다.

“이게…….”

고통은 없었다. 엘라임 또한 고개를 돌렸다. 그 또한 타격을 받지 않았다. 그 이유가 곧 밝혀졌다.

뚝. 뚝-

바닥을 이루는 시뻘건 피들. 헬리아의 눈이 커졌다.

“에, 엘르!”

“쿠, 쿨럭!”

헬리아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작은 몸. 엘르가 자신들을 지켜주었다.

“엘르!”

엘르의 작은 몸이 비척거렸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안도의 미소가 어렸다.

“다, 다행이에요.”

“뭐가 다행이야!”

헬리아가 입술을 깨물고 힘든 몸을 이끌어 엘르에게 다가갔다.

“……!”

“하하, 이거 꽤 아프네요.”

“…….”

헬리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나 피가 흘러내렸다. 엘르의 두 팔이 사라지고 없었다. 엘르는 자신의 몸은 돌보지 않고 헬리아를 보호한 것이다. 엘르가 헬리아를 보았다.

“서, 설마 우시는 거예요? 쿠, 쿨럭!”

“……도대체 왜?”

“울지 마세요. 주인님도 아기씨도 우는 건 어울리지 않아요.”

엘르의 눈빛이 점차 흐려지기 시작했다.

“엘르!”

“예전에 한번 아기씨의 어린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엘르, 그만 말해!”

“정말이지 작고 귀여웠는데…….”

“엘르!”

“쿠, 쿨럭!”

엘르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 엑시온이 서 있었다. 그의 안색이 흐려졌다.

“아기씨.”

“엘르, 제발!”

“주, 주인님은 아기씨가 태어났을 때 정말 기뻐하셨어요.”

“…….”

엘르가 웃었다. 하지만 헬리아는 웃을 수 없었다. 아주 짧은 만남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정이 든 걸까. 아님 엘르가 어린아이의 모습이라 더 그런 것일까. 어린아이가 세월을 다 품은 듯한 눈빛을 하고 있어서, 어린아이 외모 주제에 한가득 고독을 안고 있어서 눈이 갔다. 마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헬리아는 항상 그런 아이들에게 약했다.

“이제 진짜 제 역할을 다 할 수 있게 되었네요…….”

“엘르!”

“걱정 마세요. 저는 이미 죽은 몸이었어요.”

“…….”

“이렇게나마 마지막까지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은혜를 갚을 수 있어서…….”

엘르가 희미하게 웃었다.

“……잘되었어요. 이렇게 그분의…….”

털썩!

엘르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졌다.

“엘르!”

헬리아가 엘르의 몸을 붙잡았다.

“엘르!”

그러나 엘르는 말이 없었다. 이윽고 그의 몸이 서서히 모래로 변해 스러졌다.

“…….”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분노한 눈으로 엑시온을 바라보았다.

“엑. 시. 온!”

“큭큭큭, 목숨이 질기구나, 세르게니아의 딸이여.”

어느새 엑시온은 드래곤 하트를 손에 쥐고 있었다. 엘르가 당한 그 틈을 노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봉인의 여파와 마지막까지 힘을 끌어 쓴 후유증으로 육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제 내 힘을 되찾을 것이다.”

“도대체 이유가 뭐지? 뭐 때문에 그렇게 부활하려는 거지?”

헬리아의 물음에 엑시온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한 그 표정에 헬리아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엑시온이 입을 열렸다.

“살기 위해서다.”

“뭐?”

“살아가기 위해서.”

“…….”

엑시온이 바닥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바닥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살고 싶은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나 또한 그렇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다.”

“…….”

헬리아는 엑시온의 대답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것에 뭐라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삶에 대한 집착. 그것은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제1명제다.

“나는 살아갈 것이다.”

파아아앗!

바닥에서 흘러나온 빛은 어느새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건!”

이동 마법진이었다.

“어떻게?!”

현재 엑시온의 힘으로는 마법진을 운용할 수 없을 터. 어떻게 이동 마법진이 발동한단 말인가? 그러나 헬리아가 채 의문을 풀기도 전에 이동 마법진은 발동되기 시작했다.

엑시온은 무너져 가는 육신과 달리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입가가 씨익 올라갔다.

“하나 알려줄까?”

“네 말은 듣지 않아.”

“듣는 게 좋을 거야. 날 소환한 자에 대한 거니까.”

“……소환한 자?”

“큭큭큭, 궁금하지 않나? 마계에 있어야 할 마룡이 어떻게 중간계에 나올 수 있었는지?”

“…….”

“날 소환한 자는 너도 아는 자다.”

“……뭐?”

“나를 소환한 자는…….”

파아아아앗!

이동 마법진에서 거대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 빛은 엑시온과 헬리아 일행을 집어삼키며 폭사했다. 엑시온의 뒷말은 빛에 삼켜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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