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퀸
10
제1장 전쟁의 시작
툭, 투툭.
어느덧 세차게 내리던 비가 그쳤다. 하지만 여전히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가득 찬 채 우중충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마치 아직 물러갈 때가 아니라는 듯이.
“또 비가 오려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헬리아는 눈을 좁혔다. 비가 오는 날은 기압이 낮아서인지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헬리아는 이내 하늘에서 시선을 떼고 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본성에 들어서자 그녀의 방문을 미리 접한 시종장이 나와 맞이하였다.
“오셨습니까?”
“아버지는?”
“전하께서는 서재에 계십니다.”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시종장을 따라 빈센트의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내딛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어딘가 모르게 가벼웠다.
그때였다. 헬리아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인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이안이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본성에는 어쩐 일이야?”
“잠시 전하를 뵙고 오는 길입니다.”
이안의 말에 헬리아는 그를 보았다.
“아버지가 불렀겠지?”
“중요한 건 공주님의 뜻입니다.”
이안은 그리 말하곤 가만히 헬리아를 보았다.
“결정, 하신 겁니까?”
“글쎄.”
헬리아는 쓰게 웃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그녀의 표정은 복잡해 보이지 않았다. 무언가 결정한 듯이.
이안은 잠시 숨을 골랐다. 과연 그녀는 무슨 선택을 했을까? 묻고 싶은 말이 수십 가지였다. 자신을 선택한 것일까, 아님 그를 선택한 것일까? 하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물음을 가슴속에 집어넣었다.
“그렇습니까.”
“뭐, 그래도 답은 냈어.”
“…….”
그녀가 내린 답은 무엇일까. 이안은 조용히 그녀를 살피다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을 보고 헬리아가 그에게 물었다.
“왜?”
“아닙니다.”
자신을 좋아해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다. 하지만 그래선 의미가 없다.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이상.
이안은 입술을 끌어 올렸다. 혹여 그녀가 자신을 선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는 것엔 변함이 없다. 또한 그녀가 고민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그녀가 아예 자신에게 마음이 없지는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을 고민할 사람이 아니니까. 그녀가 고민하는 동안 이안도 자신의 마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하지 않던가.
“어떤 답이든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그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이안은 담담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포기하지 않을 거니 결론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겠지만.
걸어가는 이안의 뒷모습에 헬리아는 잠시 시선을 준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제 결정을 내릴 시간이었다.
“전하, 공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어서 들이게.”
안에서 빈센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가시지요.”
헬리아는 시종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빈센트의 서재로 들어섰다. 그러자 짙은 책 냄새와 함께 따뜻한 열기가 느껴졌다. 빈센트의 서재에는 책이 많았다. 그저 장식용이 아니라는 것은 책에 배인 손때들이 증명했다.
‘좀 더운데.’
얼마 전까지 워낙 추운 제국에서 지냈던 탓일까. 원래도 추위를 잘 안 타던 헬리아에게 빈센트의 방은 덥게 느껴졌다. 헬리아는 부드러운 카펫을 밟으며 빈센트에게 다가갔다. 그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헬리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빈센트는 펜을 내려놓고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왔느냐?”
“바쁘세요?”
“그럴 리가. 차 한잔하겠니?”
왠지 말이 길어질 거라 생각했는지 빈센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로 가 앉았다. 헬리아도 그를 따라 맞은편에 착석했다.
시종이 내온 차가 그들 앞에 놓여졌다. 뜨거운 물에 찻잎이 진하게 우러날 때까지 서로 말이 없었다. 헬리아는 가만히 빈센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의 얼굴이 조금 해쓱한 걸 발견했다.
“혹시 어디 아프세요?”
“아, 조금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구나.”
“그러게 겨울에 웬 정원인가 했다구요.”
헬리아의 눈이 좁아졌다. 굳이 추운 날 정원에 오래 머문다 싶었다. 그러니 이렇게 감기에 걸린 게 아닌가.
“후후, 그렇구나.”
빈센트는 헬리아의 타박에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마저도 기분이 좋은 듯했다. 헬리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아주 빼도 박도 못 하게 만드셨네요.”
헬리아의 약혼 소식은 어제를 기점으로 국내는 물론 타국에까지 전부 퍼지고 말았다. 여기서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국가의 위상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헬리아의 말에 빈센트는 대답 대신 차를 마셨다.
헬리아도 그가 이유를 말해줄 거라 생각지 않았다. 그랬다면 벌써 말을 해주었을 것이다. 그의 앞에 오기까지 그녀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 도대체 왜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일까. 여전히 그 답은 찾지 못했다.
“약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냐?”
“지금 와서 하고 말고의 선택이 저에게 있나요?”
“……그건.”
“아버지도 마음대로 했으니 저도 마음대로 할 거예요.”
그녀의 말에 빈센트의 미간을 좁아졌다.
“이안,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냐?”
“아직 망설이고 있는 게 무엇 때문인지, 무슨 결정을 내려야 할지 결론 내리지 못했어요.”
헬리아는 찻잔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솔직히 감사하고 있어요.”
“…….”
“만약 이번 일이 아니었다면 결정을 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예요.”
헬리아는 이안과 엘라임, 그 두 사람이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두 사람 중 하나만을 선택하라고 하니 당혹스러웠다.
“다른 사람이 있는 게냐?”
“글쎄요.”
헬리아는 미묘하게 웃음을 지었다. 빈센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없진 않다는 거구나.”
“그렇게 되는 건가요?”
“그자더냐?”
빈센트의 머릿속에 언제나 헬리아의 곁에 붙어 있는 한 남자가 떠올랐다. 아니, 남자라고 해도 될지 모르는 존재가.
“하지만 그자는…….”
“인간이 아니지요.”
“…….”
“알고 계셨네요.”
빈센트가 엘라임이 인간이 아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긴 하다. 하지만 이미 베로니카 공작은 물론 플로렌스 공작마저 그를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생각하고 있다. 그걸 빈센트가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인간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잖아요? 아직 결정을 내리진 못했지만 결코 그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고민한 적은 없었어요.”
“…….”
빈센트는 입을 열지 못했다. 헬리아는 그런 그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잖아요.”
“그건…….”
“어머니, 아셨죠?”
“…….”
빈센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역시 알고 계셨나.’
누구보다 세르게니아의 곁에 있던 사람은 빈센트였다. 왠지 그라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빈센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그녀에게 권할 수 없었다. 애초에 자신의 욕심이거늘.
“세니아는…… 후우, 그렇구나.”
빈센트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상대가 인간이 아니기에 논외로 치고 있었다. 그럴 경우 그녀의 곁에는 이안밖에 없기에 일을 추진한 것이었다. 한데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빈센트는 옅게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오히려 마음은 홀가분해졌다. 헬리아에게 억지로 자신의 뜻을 강요한 게 아닌가. 그 때문에 가슴 한쪽에 무거웠었다. 왠지 지금은 가슴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가 너무 성급했구나.”
“도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 그 때문에 제가 얼마나 고민한 줄 아세요?”
헬리아의 도끼눈에 빈센트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저 네가 행복하길 바랐다.”
그때였다.
움찔!
‘으, 으윽.’
갑자기 느껴진 고통에 빈센트가 움찔했다. 그 아픔이 너무 커 그만 헬리아가 알아차리고 말았다.
“아버지?”
“괘, 괜찮다.”
“괜찮긴요!”
헬리아는 빈센트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누가 봐도 결코 정상이 아니었다.
“으윽.”
빈센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참고 참아왔던 고통이 결국 터지고 말았다. 그것도 가장 보이기 싫었던 자신의 딸 앞에서 말이다.
“나, 나는 괜…….”
털썩.
“아, 아버지!”
빈센트가 의식을 잃었다. 헬리아는 놀라 그의 몸을 흔들었지만 미동조차 없었다.
“누, 눈 좀 떠봐요!”
그날처럼 빈센트의 몸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장난치지 마시고 일어나 보세요!”
그러나 빈센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헬리아는 다급해졌다.
“저, 전하!”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이 놀라 눈이 커졌다.
“의,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시종이 서둘러 방을 빠져나가려 하자 헬리아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시종장!”
시종장이 멈춰 서 헬리아를 보았다. 헬리아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은 걸 본 그는 혼란스런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는 걸 느꼈다.
“아무도,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데려와야 합니다.”
“……!”
흔들리던 시종장의 눈빛이 고정되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시종장은 달려가려던 것을 최대한 자제하며 의연히 방에서 빠져나갔다.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고 정신을 잃은 빈센트를 내려다보았다.
“아버지…….”
“공주님, 플로렌스 공작님과 베로니카 공작님이 오셨습니다.”
시종장의 말에 헬리아는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빈센트에게서 시선을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엔 황망한 표정의 플로렌스 공작과 베로니카 공작이 서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 이리 되신 것이오?”
“쓰러지셨습니다.”
헬리아의 말에 그녀의 은밀한 전갈을 받고 온 두 공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 뻔뻔한 얼굴로 잘 지내던 이가…….”
베로니카 공작은 자신보다 더 젊은 국왕이 이리 쓰러진 모습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거요?”
공작은 날카로운 눈으로 헬리아를 보았다. 혹여 누군가 그를 해하려 한 게 아닌가 의심한 것이다.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독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차는 저와 아버지가 함께 나눠 마셨습니다. 그 외에 외부에서 어떤 침입도 없었습니다.”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보다 더 놀란 건 바로 그녀였다. 빈센트는 갑자기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진 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찌 이런 일이……?!”
너무나 갑작스런 일에 플로렌스 공작은 누워 있는 빈센트를 멍하니 보았다.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믿기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장난이라며 벌떡 일어날 것만 같았다.
“빈…….”
누구보다 그의 곁을 오래 지켜왔던 플로렌스 공작이기에 충격은 컸다. 언제나 건강한 빈센트였다. 거기다 그의 젊은 외모도 한몫했다. 그래서인지 플로렌스 공작은 그가 이렇게 갑자기 쓰러질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설마……!’
그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리될 줄 알고 있었던 게야?’
플로렌스 공작의 머릿속에 최근의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간 빈센트의 행적들. 갑자기 헬리아의 약혼을 추진한 것. 그리고 때때로 보이던 수심이 가득한 얼굴. 그것들이 공작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것이었나, 이것이었어?’
공작은 다른 사람들의 초조함을 모른 채 평온한 얼굴로 잠든 빈센트를 이를 악물고 내려다보았다. 빈센트는 자신이 이렇게 될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답지 않게 그토록 서둘렀던 거군.’
공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도대체 왜 이런 것인지 아느냐?”
베로니카 공작은 빈센트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헬리아를 보았다. 헬리아의 얼굴에 그늘이 가득했다.
“이미 의원은 물론 신관에게도 보였지만 병명을 모른다 하였어요.”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게 말이 되는 것이냐!”
베로니카 공작이 노기를 쏟아냈다. 헬리아에게 한 것이 아님에도 헬리아는 마치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도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화가 났던가. 알아내지 못한 그자들의 목에 당장에라도 검을 겨누고 싶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포션도 사용했는데도 빈센트는 깨어나지 못했다.
“독에 중독된 흔적도, 병에 걸린 흔적도 없답니다.”
“내 이것들을……. 비켜 보아라. 내 힐 한 방이면 나을 것이다!”
베로니카 공작이 빈센트에게 다가가 힐을 퍼부었다. 헬리아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힐은 이미 그녀가 가장 먼저 사용한 수단이었다.
“이, 이보게, 빈! 어서 일어나 보게!”
베로니카 공작이 여전히 잠에 빠져 있는 빈센트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빈센트는 미동조차 없었다. 베로니카 공작이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간 웃던 국왕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좀 행복하게 사나 싶었더니만.
“공작님은, 뭔가 알고 계시죠?”
누구보다 당황해야 할 플로렌스 공작이 침착한 표정으로 빈센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이 일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이.
플로렌스 공작은 깊게 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최근 무언가 이상하다고는 느끼고 있었소.”
“……왜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헬리아의 눈이 스산하게 공작을 향했다. 공작은 그녀의 눈동자에 훅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에게 내재된 드래곤의 힘이 소드 마스터인 공작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리아.”
“……잠시 격해졌어요.”
베로니카 공작의 목소리에 헬리아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이성을 잃을 뻔했다. 공작의 잘못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공작님께도 말씀하지 않으셨겠죠?”
“때때로 이상한 행동을 취해 의아하게 여겼지만 그게 이런 일일 줄은 몰랐네.”
“…….”
공작의 얼굴은 자책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을 본 헬리아는 더는 뭐라 입을 열지 못했다.
그때 엘라임의 목소리가 들렸다.
-헬리아.
‘아버진 어때?’
의원도 신관도 소용없어지자 헬리아는 엘라임으로 하여금 빈센트의 몸을 살피게 했다. 현재 두 공작에게는 모습을 숨긴 상태였다.
-몸 안의 흐름이 이상해.
‘흐름이 이상하다고?’
-보통 인간의 흐름은 심장을 시작으로 몸 전체를 순환해. 하지만 네 아버지는 심장의 흐름이 약해.
‘심장이?’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쓰러질 때 심장을 부여잡았다. 혹시 심장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심장에 문제가 있다면 왜 포션도 신성력도 통하지 않은 거지?’
심장이 망가졌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해도 포션과 신성력이라면 어느 정도 회복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렇게 깨어나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헬리아.
엘라임의 목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헬리아는 저도 모르게 손에서 땀이 흘렀다. 그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들렸다.
-심장의 힘이 점점 약화되고 있어.
엘라임은 투명한 상태로 그런 헬리아를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자신이 확인한 결과 빈센트의 심장은 제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다.
-거기다 인간의 심장이 아니야.
‘……인간의 심장이 아니라고?’
-원래 본인의 심장이 아니라 누군가 인위적으로 심장을 네 아버지에게 넣었어.
‘누가! 누가 그런 짓을!’
헬리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자 두 공작이 헬리아를 보았다. 헬리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다 입을 열었다.
“엘라임, 모습을 보여.”
-그래도 되겠어?
“뭐 다들 네 정체는 짐작하고 있었을 거야.”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자는?”
플로렌스 공작과 베로니카 공작이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엘라임의 모습에 놀라 경계를 했다. 헬리아는 숨을 내쉬곤 말했다.
“몇 번 보았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그 정령사인가?”
플로렌스 공작이 엘라임을 보고 눈을 좁혔다. 언제나 항상 헬리아의 곁을 지킨다는 그 정령사. 헬리아는 갑자기 나타난 엘라임의 정체에 대해 두 사람에게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엘라임, 말해.”
“심장에 문제가 있어.”
“심장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두 공작이 엘라임의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엘라임은 헬리아에게 설명한 그대로 두 사람에게도 설명해 주었다.
“인공 심장이라니?”
빈센트가 이제까지 인공 심장을 달고 있었다는 사실에 두 사람은 크게 놀라워했다.
“감쪽같은 솜씨야. 헬리아도 확인해서 알겠지만 나도 직접 몸 안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수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을 거야.”
“인공 심장이라니, 대체 누가 그런 짓을……?”
그간 빈센트의 곁을 지켜온 플로렌스 공작은 물론 베로니카 공작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에 빈센트가 이제껏 심장이 아팠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만큼 감쪽같았다.
“방법은? 고칠 수 있는 방법은?”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곤 고개를 저었다.
“…….”
헬리아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없다는 거야?”
“인공 심장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 만약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이 인공 심장을 만들어 네 아버지에게 넣은 사람에게 다시 만들어달라고 하는 것뿐이야.”
“…….”
그 말에 두 공작도 마지막 희망이 부서졌다. 인공 심장이라니. 베로니카 공작은 8서클의 마도사이다. 그런 그도 인공 심장이라는 터무니없는 것은 본 적도 들어본 적도 별로 없었다. 거기다 심장에 대한 부분은 신전과 신성력의 형성으로 의학이 잘 발달하지 않은 레칸 대륙에서는 전혀 생소한 것이었다. 애초에 절제 수술이 발달하지 않은 대륙에서 인공 심장을 이식한다는 행위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왜 대체 이런 걸 숨기신 거예요?”
헬리아는 평온한 얼굴로 잠든 빈센트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그 따뜻하던 손이 어째서 이리도 차가운 것일까. 너무 세게 깨문 탓인지 입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좀 더 일찍 말해줬으면 뭐든 찾아봤을 거 아니에요?”
헬리아는 대답 없는 빈센트에게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나 그것은 후회와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어째서 못 알아차린 것일까. 그간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신을 보면서 처연하게 웃던 얼굴이 떠올라 헬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그저 네가 행복하길 바랐다.”
빈센트가 마지막으로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것 때문이었어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빈센트는 아픈 것을 숨겼다. 그리고 이리될 것을 직감하고 그녀를 이안과 약혼시킨 것이다. 이렇게 떠나게 될 줄 알고 있었으니까.
“이런다고 누가 좋아할 줄 알아요?”
제대로 아버지라고 불러준 적도, 제대로 살갑게 대했던 적도 없었다. 아버지라는 존재를 이제야 정말 가슴으로 받아들였는데. 언제나 자신을 향해 웃고, 따뜻한 말을 해주고, 안아줘서 투정을 부렸다. 부모는 그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걸 몰랐다. 무엇이든 끝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을. 이제야 정말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아버지…… 아버지…….”
헬리아는 빈센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런 그녀를 본 두 공작은 안타까움에 눈을 감았다.
“헬리아…….”
“…….”
엘라임은 그런 헬리아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누구보다 외롭게 커온 그녀에게 빈센트라는 존재가 얼마나 커졌는지를.
‘생각하자, 헬리아.’
헬리아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이런 때일수록 냉정해져야 한다. 살려야 한다. 어떻게든 아버지를 살려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아버지를 살릴 수 있는 거지?
“공작님.”
헬리아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최대한 은밀히 아버지에 대해 조사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인공 심장이 있다면 그걸 넣은 사람도 있을 거예요. 아버지의 주변 사람에 대해 조사해 주세요.”
“알겠네.”
플로렌스 공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헬리아가 베로니카 공작을 보았다. 베로니카 공작은 헬리아의 표정을 보고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무슨 방법이든 찾아보겠다.”
“……부탁드립니다.”
헬리아가 비척비척 일어났다. 머리가 냉정해지자 헬리아는 가장 중요한 사람이 떠올랐다. 빈센트의 옆에 있던 사람. 그중에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사태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헬리아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세바스찬.”
그때였다.
뚜벅뚜벅.
갑자기 들려온 귀에 익은 발걸음 소리에 두 공작의 시선도 헬리아를 따라 움직였다. 세바스찬은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세바스찬의 시선이 헬리아를 지나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빈센트에게 닿았다. 그의 두 눈이 감겼다.
“결국, 일이 이렇게 되었군요.”
“……알고 있었나요?”
“…….”
“알고 있었으면서 제게 말하지 않은 건가요?”
헬리아의 기세가 점점 거세졌다. 그것을 정면으로 받고 있는 세바스찬은 온몸이 옥죄어오는 압박감을 느꼈다.
“세바스찬.”
헬리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면 오히려 고요해진다. 헬리아의 낮은 목소리에 방 안에 있던 나머지 세 사람은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보다 못한 엘라임이 헬리아의 팔을 붙잡았다.
“헬리아.”
“…….”
헬리아는 힘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세바스찬을 보았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세바스찬은 누구보다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 누구도 헬리아보다 빈센트를 덜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안다. 아니, 오히려 그녀보다 더 빈센트를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제야 헬리아는 마음을 다스리고 세바스찬을 보았다. 세바스찬은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헬리아를 보았다. 말하지 않은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헬리아는 그 모습을 보고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말하지 말라 했겠지요?”
“……송구합니다.”
세바스찬의 노구가 숙여진다. 그에 헬리아는 시선을 피했다.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가요?”
헬리아의 물음에 세바스찬은 조용히 그녀의 뒤에 서 있는 두 공작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 시선을 본 헬리아는 세바스찬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녀는 뒤를 돌아 두 공작을 보았다.
“잠시 이야기하고 올게요.”
“이야기는 무슨! 도대체 무슨 일인지…….”
“공작님, 그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제이크!”
베로니카 공작이 자신을 붙잡은 플로렌스 공작을 보았다. 플로렌스 공작은 세바스찬을 한번 보다가 다시 헬리아를 보았다.
“그는 완고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원한다고 말할 사람이 아닙니다. 빈처럼 말이죠.”
플로렌스 공작의 말에 베로니카 공작은 결국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헬리아는 두 사람이 수긍하자 가볍게 고개를 숙이곤 세바스찬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가요, 긴 이야기가 필요할 것 같네요.”
헬리아와 세바스찬은 자리를 옮겼다.
헬리아와 세바스찬이 향한 곳은 바로 본성에서 떨어진 데이지궁이었다. 이곳이라면 결코 누구도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지 못할 것이다. 세바스찬은 데이지궁 안으로 들어오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랜만이군요.”
헬리아가 세바스찬을 바라보았다. 이곳에는 헬리아와 세바스찬 이외에 엘라임도 함께했다. 엘라임에 대해선 누구보다 세바스찬이 잘 알기에 그가 따라오는 것을 묵인했다.
“이렇게 있으니 꼭 옛날 같군요.”
1년 전까지만 해도 세 명은 이곳에서 잠을 자고 밥을 먹었다.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해 다른 곳에 있어도 항상 이곳이 떠올랐다.
“벌써 이리 장성하셔서 이 세바스찬, 참으로 기쁘답니다.”
“…….”
세바스찬의 말에 헬리아는 순간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게 느껴졌다. 너무나 당연해서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누구보다 곁에서 자신을 돌봐준 사람이 바로 세바스찬이라는 것을. 그는 자신의 집사이기 전에 글을 가르쳐 주고 살아갈 방법을 알려준 스승이며, 함께 이야기를 나눴던 친구이며, 가족이었다.
헬리아는 찬찬히 세바스찬을 살폈다. 지팡이를 쥔 손에는 굵은 주름이 나 있었고, 머리는 이전보다 더 하얗게 변해 있었다.
“세바스찬…….”
“공주님을 만나 정말 행복했답니다.”
“…….”
세바스찬은 천천히 헬리아에게 다가왔다. 자신의 어린 공주님. 세바스찬은 잠시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입을 열었다.
“이제야 제 마지막 역할을 다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역할? 헬리아는 세바스찬의 말을 기다렸다.
“다시 처음부터 소개를 드려야겠습니다.”
세바스찬은 옷매무새를 말끔히 정리하곤 한 손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레칸 대륙의 마지막 드래곤이신 세르게니아 님의 가디언 세바스찬입니다.”
“정말로 세바스찬이었군요.”
헬리아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직접 그에게 진실을 듣게 되니 기분이 묘했다. 드래곤의 가디언이라니. 드래곤도 있는데 하물며 가디언이라고 없을까 싶었지만 놀라운 것도 사실이었다.
“정말 이름이 세바스찬인 거예요?”
“후후, 주인님께선 이름을 지을 적에 일할 사람의 이름으론 이게 적격이라며 붙여주셨지요.”
세바스찬은 그리운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헬리아는 왠지 어머니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씩 잡히고 있었다. 물론 이상한 쪽으로 말이다. 개도 그보다 더 잘 쓸 것 같은 악필에, 어린애가 지어도 그것보단 잘 지을 것 같은 이름. 헬리아는 이제까지 아버지의 일로 잔뜩 긴장되었던 육체를 이완시켰다. 그러다 문득 든 궁금증에 입을 열었다.
“사람이죠?”
“사람입니다. 그저 남들보다 좀 더 튼튼했을 뿐이지요.”
순수한 인간이 드래곤의 가디언이라는 게 의외였지만 생각해 보면 꼭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결국 주인이 정하게 마련인 법이다. 그러다 갑자기 든 생각에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다른 가디언은 없나요?”
인간에게는 수명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세르게니아는 수천 년을 산 고룡. 그녀에게 가디언이 세바스찬뿐일 리는 없지 않을까.
세바스찬은 헬리아의 말에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알 수 없습니다.”
“모른다는 건가요?”
“들은 적도, 본 적도 없기에 뭐라 말씀드릴 수 없군요.”
헬리아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반대로 그가 모르는 가디언이 존재할 가능성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키안에게 다시 조사해 보라 해야겠어.’
뭔가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 이제 말해주세요. 대체 아버지가 왜 쓰러진 거며, 심장은 대체 어떻게 된 거죠?”
헬리아는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세바스찬은 그녀의 말에 차츰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좋지 못했습니다.”
“……!”
세바스찬의 말에 헬리아의 눈이 커졌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좋지 않았다니. 하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그와 함께한 플로렌스 공작은 물론 베로니카 공작도 알지 못했다.
“전하께선 심장이 쇠약해 오래 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데 오십이 넘도록 살 수 있단 말인가? 헬리아의 의문을 알아챈 세바스찬이 말했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주인님은 아르센 왕국 초대 국왕인 마르스를 사모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헬리아도 키안을 통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800년 전, 대륙은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대륙은 무질서했고, 사람들은 굶주림과 폭정에 시달려야 했지요. 그 혼란의 시기에 아르센 왕국의 초대 국왕은 나라를 일으켜 아르센 왕국을 세웠습니다. 그 당시 주인님은 마법사로 유희를 즐기던 와중에 초대 국왕을 만났고, 사랑에 빠지셨지요.”
헬리아의 눈이 커졌다. 이 이야기는 키안에게 듣지 못한 것이었다. 키안은 세르게니아에 대해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또한 헬리아도 굳이 캐묻지 않았다.
“그런데 주인님은 국왕을 사랑했지만 당시 국왕 마르스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주인님의 사랑은 보답받지 못했습니다. 공주님께선 알고 계십니까?”
세바스찬은 답을 구하고자 질문한 것이 아닌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드래곤은 한평생 단 한 명의 배우자만을 선택하여 일생을 살아갑니다.”
“……드래곤의 사랑.”
헬리아는 예전에 보았던 책 내용을 떠올렸다. 드래곤의 사랑. 그것은 매우 지고지순하며 인간의 사랑과는 달리 영원함을 지녔다. 그렇기에 더욱 고귀하고 애절하다. 보통 한 명의 배우자를 선택하기에 드래곤은 같은 드래곤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경우 대부분 드래곤이 아닌 상대 배우자가 먼저 죽음을 맞는다. 배우자가 죽으면 드래곤은 다른 배우자를 맞이할까. 그렇지 않다. 드래곤은 평생을 배우자를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평생을.
“주인님은 초대 국왕이 죽는 그날까지 평생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것조차 사랑했기에 자신의 명이 다할 때까지 이 왕국을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베라였다. 세르게니아는 그렇게 오랫동안 아르센 왕국을 음지에서 수호해 왔다.
“그렇게 800년을 그리워하셨습니다.”
“…….”
너무나 긴 시간이다. 헬리아에게 800년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시간이다. 다만 그것만은 안다. 너무나 긴 시간이라는 것을. 만일 자신이었다면 절망했을 것이다.
“주인님은 그 그리움을 아르센 왕국을 살피는 데 채우셨지요. 매번 직계 왕족이 태어나는 날이면 신관으로 변장해 살피러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때 지금의 전하를 보셨지요.”
“아버지를요?”
“그리고 주인님은 한눈에 자신이 사랑한 초대 국왕의 환생임을 알아보셨습니다.”
‘환생.’
헬리아의 머릿속에 순간 그 단어가 떠올랐다. 그녀 자신 또한 환생이라는 걸 하지 않았던가. 전생이 있고 환생이 있다는 것을 헬리아는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주인님은 지금의 전하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르게니아는 나서지 않았다. 그저 지켜보는 걸로, 생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녀는 뒤에서 그를 지켜주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전하께서 심장이 약한 것을 그때 알아차리셨습니다.”
세바스찬의 말에 헬리아의 눈동자가 점점 커져 갔다.
“설마…… 심장은 어머니가?”
“예, 전하께 심장을 이식한 분은 바로 주인님이십니다.”
헬리아는 세바스찬의 이야기에 잠시 숨을 들이마셨다. 하지만 곧 이해가 되었다. 심장을 이식할 수 있을 정도의 고도의 기술을 지닌 자가 드래곤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세바스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처음에는 그저 힘을 나눠주는 정도였습니다. 이후 커가면서 전하께서도 큰 문제 없이 성장하셨습니다. 한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심장은 고쳐지지 않았던 것이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빈센트가 서른이 될 즈음이었다. 그리고 그때 세르게니아는 그의 앞에 나타났다. 더 이상 바라만 보기엔 그녀의 생이, 그의 생이 너무도 짧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분은 하루하루를 아까워하며 사랑하셨습니다. 아직도 주인님의 행복한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하지만 서로의 시간은 잔인할 정도로 달랐습니다. 주인님은 그 당시 이미 만 년을 가까이 산 고룡이었습니다. 주인님은 자신이 이제 곧 죽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드래곤이 죽음을 인식하는 것은 노인이 자신의 죽음을 인지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사실상 예견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마지막,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전하의 심장을 치료하는 연구에 매달리셨습니다.”
“연구라면…….”
그 순간 머릿속에 한줄기 기억이 떠올랐다. 어머니의 방에 있던 일기장에 적혀 있던 글들. 설마 그 연구가 이것을 말함이었나?
“그리고 방법을 찾아내셨습니다.”
“방법이라면?”
대체 무슨 방법으로 심장을 살려놓은 것일까? 헬리아는 세바스찬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드래곤 하트를 이식하셨습니다.”
“드래곤 하트?!”
그제야 헬리아는 어째서 빈센트가 오십이 넘도록 삼십 대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모두 드래곤 하트의 영향 때문이었던 것이다. 한데 어떻게 인간의 몸에 드래곤 하트를 이식할 수 있단 말인가?
세바스찬은 헬리아의 놀람을 알아차리고 말했다.
“물론 드래곤 하트를 전부 이식하진 않으셨습니다. 전하의 몸이 버티질 못하셨죠. 그래서 그 반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결국 부작용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헬리아는 잠시 말을 잃었다.
“부작용이라니요?”
“이 점은 주인님도 알지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 드래곤 하트가 반으로 쪼개지면서 그 효과가 반이 아니라 그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물론 그렇기에 이식이 가능했지만 하트에 담긴 힘이 유실되는 속도를 계산하지 못하신 것 같습니다.”
“…….”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온전한 것과 온전하지 않은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빈센트의 심장이 버티질 못한 건 그 차이 때문일 것이다.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헬리아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아버지의 심장을 고쳤다면 그 고친 사람을 찾으면 된다고. 그런데 그 사람은 이미 죽고 없었다. 그럼 대체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다시 한번 드래곤 하트를 이식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습니다.”
“결국 드래곤 하트뿐인가요?”
아버지의 심장이 드래곤 하트라면 역시 드래곤 하트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헬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드래곤 하트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어머니의 레어에 있을 거라고밖엔. 하지만 레어도…….”
“레어의 위치는 제가 알고 있습니다.”
세바스찬의 말에 헬리아의 눈이 커졌다.
“위치를 알고 계신다고요?”
헬리아는 이내 놀람을 가라앉혔다. 그가 가디언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짐작하고 있었다. 물론 드래곤 레어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해도 드래곤 하트를 반드시 찾을 거란 보장은 없다. 하지만 망망대해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했다.
“어디에 있죠?”
“…….”
헬리아의 물음에 세바스찬은 잠시 고민하는 듯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마치 말을 해야 하나, 말을 하지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헬리아는 그 모습이 의아했다.
“혹시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요?”
레어의 위치가 바다 깊숙한 곳에 있다든가 사람이 결코 들어가는 못하는 곳에 있는 것일까?
“어디든 상관없어요. 그러니 말해주세요.”
바닷속에 있다면 들어갈 것이고,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이라도 헬리아는 뛰어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바스찬은 대답 대신 침묵을 유지했다. 헬리아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지만 채근하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에게 알릴 생각이 아니었다면 아예 말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민하고 있다는 건 레어에 대해 무언가 걸리는 게 있다는 것.
헬리아는 차분히 그가 마음을 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후우.”
이윽고 무거운 한숨을 내뱉은 세바스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에도 여전히 망설이는 기색이 강했다.
“주인님께서 제게 레어의 위치를 알려주셨지만 또한 남에게 결코 알리지 말라고도 하셨습니다.”
참으로 모순이다. 아무도 모르길 바랐으면 애초에 세바스찬에게도 알리지 않았어야 할 터. 그러나 세르게니아는 세바스찬에게 레어의 위치를 알렸다.
“왜 알리지 말라고 한 건가요?”
“그건 저도 알지 못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그 당시 주인님은 어딘지 모르게 평소와 달랐습니다.”
마룡 엑시온과의 결전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왜 레어의 위치를 가르쳐 주고도 말하지 말라 했을까. 그 안에 무언가 밝혀져선 안 될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는 것일까?
헬리아의 호기심이 깊어만 갔다.
“저 또한 죽을 때까지 그분의 뜻에 따라 레어에 대한 것을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주인님도 이런 부작용이 있을 줄은 모르셨을 겁니다.”
애초에 드래곤 하트를 평범한 인간에게 이식하는 것 자체가 도전이었다. 거기다 그 당시 드래곤 하트 이식에 대한 연구는 생각보다 길지 못했다. 지금 당장 빈센트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훗날의 부작용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 보지 못했다. 또한 엑시온과의 결전 때문에 그럴 겨를은 더욱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만약을 준비하셨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세바스찬의 얼굴은 무거운 짐덩이를 안은 사람처럼 힘겨워 보였다.
“후우, 애초에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좀 더 일찍 말씀드릴 걸 그랬습니다.”
세바스찬은 후회가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국 그가 늦게 레어에 대해 알려준 탓에 고생은 헬리아가 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체 레어가 어디에 있는 건가요?”
헬리아가 다시 물었다. 세바스찬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먼 북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헬리아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설마…….”
“페르시아 제국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는 레디오스 산맥입니다.”
세바스찬의 말에 헬리아의 눈매가 좁혀졌다.
“하필이면 페르시아 제국이라니…….”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레어의 위치를 알았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레어가 있는 곳이 제국이라는 것. 그리고 지금 제국과는 전쟁이 터지기 일보 직전인 상태였다.
“그래도 가시겠지요?”
세바스찬의 말에 헬리아는 주먹을 쥐었다. 레어의 위치가 제국이라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반드시 드래곤 하트를 찾으러 갈 겁니다.”
세바스찬은 그녀의 단호한 금빛 눈동자를 보며 말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디 몸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세바스찬은 그녀에게 위험을 떠넘긴 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헬리아는 그런 세바스찬을 보며 웃어주었다.
“자책하지 마세요.”
“공주님…….”
“우선 지금 닥친 문제부터 해결해야겠네요. 도와주실 수 있으시죠?”
헬리아는 세바스찬의 손을 붙잡았다. 주름진 손이 얼마나 고생을 해왔을까 짐작이 되었다. 세바스찬은 헬리아의 손을 꼭 붙잡으며 결의에 찬 눈빛을 보냈다.
“물론입니다.”
헬리아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페르시아 제국은 움직이고 있었다.
* * *
페르시아 제국의 대전 안.
제국의 황제 카사스 2세는 왕좌에 앉아 아래를 오시하고 있었다. 그는 왼팔을 의자 팔걸이에 걸치곤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카사스 2세의 낮은 음성에 벨로스 백작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황제의 기세를 한껏 받은 탓에 그의 몸은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 곧 수색대를 편성했으니 덜미가 잡힐 것입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황제의 입술이 삐뚜름해졌다. 그 순간 벨로스 백작의 등줄기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작금의 황제는 그 어느 것에도 거침이 없었다. 능력 없는 자들은 과감히 쳐 내는 등 그의 눈에 거슬리는 자들은 어김없이 숙청되었다. 벨로스 백작도 전임자가 숙청되어 빈자리에 앉은 케이스였다. 그만큼 황제의 무서움을 똑똑히 잘 알고 있었다.
“손톱 밑의 가시처럼 휘젓고 다니는 것을 신경 쓰지 말라?”
“그, 그런 말이 아니옵고…….”
벨로스 백작은 벌벌 떨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진노하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 탓이다. 황제가 전쟁을 선포하고 황태자 세력을 숙청한 뒤 그를 견제할 세력은 없는 것과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 황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다.
“일주일이다. 일주일 내에 황태자를 내 앞에 끌고 오지 않는다면 네 목이 먼저 떨어질 것이다.”
“부, 분부 받잡겠습니다!”
현재 황태자가 이끄는 반군 세력이 수도를 어지럽히는 통에 제국의 정세는 빠른 속도로 악화되어 갔다. 원래부터 겨울에 먹고살기도 힘든 처지에 군대를 일으키자 민심은 날로 흉흉해졌다. 황태자는 그런 민심을 이용해 황제를 압박했다.
“협상은 어찌 되었지?”
황제가 외교 대신을 맡고 있는 칼리스 백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칼리스 백작은 황제의 책사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이번 황제의 탄신일에 인질들을 붙잡아 협상하는 것을 기획했다. 전체적으로 라몬 공작이 조율을 하지만 세세한 부분은 칼리스 백작이 담당했다.
“현재 레스톤 왕국과 에비스 왕국, 토론 공국 등에서 몸값을 지불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레스톤 왕국과 에비스 왕국은 금화로, 토론 공국은 밀과 말로 지불한다 합니다.”
“아르센 왕국이야 그렇다 쳐도 라비안 왕국과 아슈란 왕국이 보이지 않는군.”
“그, 그것이…….”
칼리스 백작은 식은땀을 흘렸다. 솔직히 인질이 없는데 어떻게 몸값을 지불하라 말할 수 있겠는가.
황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중요한 놈들은 다 놓쳤군.”
황제의 눈빛에 칼리스 백작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여기서 괜히 말을 잘못했다가 자신이 죄를 뒤집어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르센 왕국의 헬리아 공주는 이미 확인된 사안이었지만 라비안 왕국의 왕자와 아슈란 왕국의 공주까지 사라진 것을 확인하는 게 늦어졌다.
라비안 왕국은 아르센 왕국과 마찬가지로 제국과 국경을 접하는 나라이다. 그런 나라가 빠져나갔다는 건 제국 입장에서도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분명 그들은 창과 검으로 돌아올 테니 말이다.
황제의 침묵이 길어지자 대전 안의 분위기가 냉각되었다.
“라몬 공작.”
“예, 폐하.”
“준비는 모두 마쳤는가?”
황제의 말에 라몬 공작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미 모든 전장에 흑마법사를 배치하는 것은 물론 마룡 엑시온으로부터 전력이 향상되어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황제가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일어서자 대전 안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변했다.
“전군.”
황제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드디어 시작인 것이다.
“출전하라!”
* * *
“끄, 끄억.”
한 여자가 비명도 내지 못한 채 바짝 마른 미라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파삭.
엑시온은 여인의 힘을 흡수한 뒤 미라가 된 시체를 밟아 부서뜨렸다. 엑시온의 발밑에는 그 여인 이외에도 수십 명의 여인이 먼지가 되어 바닥에 스러져 있었다.
“이게 다인가?”
“……송구합니다.”
엑시온의 싸늘한 목소리에 라몬 공작은 고개를 숙였다. 현재 흑마법사 군대의 강력한 힘은 모두 엑시온에게 나왔다. 이런 상태에서 엑시온의 비위를 거스른다면 좋을 게 하나 없었다.
엑시온은 아직 완전히 부활하지 못했다. 인간의 육신이 엑시온의 영혼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엑시온은 눈매를 좁혔다. 헬리아의 외모를 닮은 탓에 그의 외모는 매우 수려했지만 그가 마룡 엑시온임을 아는 라몬 공작은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힘이 더 필요하다.”
“곧 군대가 움직일 것입니다. 반드시 공주의 몸을 바치겠나이다.”
공작은 이번 전쟁을 통해서 헬리아 공주를 잡을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한데 라몬 공작의 대답에도 엑시온의 표정은 더 날카로워졌다.
“어느 세월에?”
“그, 그것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내가 말했던 것은?”
엑시온은 전날 부족한 힘을 보충하기 위해 대체할 힘을 찾으라 명령했다. 헬리아를 붙잡지 못한 순간부터 엑시온은 다른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오나 정녕 그것이 존재하는 것입니까?”
라몬 공작은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엑시온은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세르게니아는 내가 그것을 알지 못할 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세르게니아가 아는 것을 내가 모를 수 없지.”
뜻을 알 수 없는 말을 되뇌며 엑시온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반드시 찾아라. 이 제국에 세르게니아의 레어가 존재한다.”
드래곤 레어. 엑시온은 힘을 되찾으면서 봉인된 이후 소실되었던 기억들을 차츰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바로 세르게니아의 레어. 그 안에 있는 드래곤 하트였다. 엑시온의 입술이 치켜 올라갔다.
라몬 공작은 순간 온몸에 엄습하는 서늘한 한기에 흠칫했다.
엑시온의 금색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드래곤 하트만 있으면 공주가 없어도 완전히 부활할 수 있다. 반드시 드래곤 레어를 찾아라.”
드래곤 레어를 차지하기 위해 엑시온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페르시아 제국의 진격 소식은 대륙 각지로 전해졌다. 아르센 왕국 또한 하루에도 수십 번씩 회의를 진행하며 상황의 추이를 살폈고, 타국에서 온 사신들도 본국과 정보를 상시적으로 주고받으며 상황을 주시했다. 그러던 중 며칠 전부터 모습이 보이지 않던 국왕 빈센트에 대한 소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뭐라? 전하가 쓰러져?”
하이든 후작은 최근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국왕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가 쓰러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제대로 확인한 것이냐?”
그의 부관인 샤론 자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전하께서 방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본 일이 없다 합니다. 또한 은밀히 의원과 신관이 전하의 침소를 들렀다 간 일이 있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하이든 후작은 미간을 좁혔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탓이었다. 워낙 정정한 국왕이었고 이제까지 단 한 차례 큰 병치레도 없었다. 거기다 젊어 보이는 외모까지 하고 있으니 누가 그를 아픈 사람으로 보겠는가.
하이든 후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혹 누군가의 소행이더냐?”
만약 그렇다면 문제가 커진다. 현재 아르센 왕국에는 각국의 사신들이 와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아르센 왕국은 그들을 한데 모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 중심이 되어야 할 국왕이 쓰러졌다면 과연 누구에게 이득이겠는가. 국왕에게 변고라도 생긴다면 필시 구심점을 잃고 제국에 이 땅을 내줘야 할 판이었다.
하지만 샤론 자작은 고개를 저었다.
“외부 침입자나 내부의 소행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리 마냥 숨기기만 하겠습니까?”
“흐음.”
하이든 후작은 제 허연 수염을 쓸어내렸다.
“누가 이 사실을 알고 있지?”
“내부에서 입단속을 하고 있지만 왕성 안에는 각국의 사신들이 심어놓은 귀들이 있는지라 지금쯤이면 그들의 귀에도 들어갔을 겁니다.”
“한데 확인은? 정말 전하께 문제가 생긴 게 확실하더냐?”
그 물음에 샤론 자작은 대답을 잠시 망설였다.
“확인할 순 없었습니다. 그저 방 안으로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전하의 명이 있었다 합니다.”
“……흐음.”
“그리고 오늘 각국의 사신들이 국왕 전하를 뵙기를 요청해 왔습니다.”
현재 제국의 전쟁 발발로 불안한 상태라 다들 민감해져 있었다. 각국의 사신들이 움직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하이든 후작이 노구를 일으켜 세웠다.
“전하를 뵈어야겠다.”
“하오나…….”
“막는다 하더라도 뵈어야겠다. 내 눈으로!”
지금 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런 시기에 감기라 하더라도 꽁꽁 싸매고만 있을 게 아니었다. 그저 감기라면 이런 소문조차 돌지 않았을 터. 분명 어떠한 문제가 생긴 것은 분명했다.
그때였다.
“후작님!”
“무슨 일이냐?”
하이든 후작이 의복을 정리하며 지팡이를 들었다. 그런데 때마침 들려온 시종의 말에 손을 멈췄다.
“전하께서 귀족 회의를 소집하셨습니다.”
“……전하께서?”
시종의 말에 하이든 후작이 눈을 찌푸리곤 샤론 자작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는 눈빛이었다. 샤론 자작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그로서는 거짓말을 한 꼴이 된 게 아닌가.
“그, 그것이 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분명 그리 소문이…….”
“쯧, 각국의 사신들이 와 있는 상황이다. 계속 주변을 주시하고 소문에 휩쓸리지 말거라.”
“……예.”
하이든 후작이 지팡이를 들고 몸을 움직였다. 샤론 자작에게는 그리 호통을 쳤지만 그라고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겠는가. 전하께 무슨 문제가 있는 건 분명했다.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갑자기 귀족 회의라니……. 하이든 후작은 미간을 좁히고 방을 나섰다. 상황이 어찌 되든 이리 가만히 있는 것보다 직접 회의에 나가 상황을 파악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이든 후작 이외에 다른 귀족들도 국왕의 명을 받아 대전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대전 안.
먼저 도착한 대신들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주로 페르시아 제국의 진격 소식에 대한 것이었다. 귀족들의 얼굴에는 불안감과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후우, 결국 일이 터졌군요.”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 않습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전쟁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던 귀족들이지만 제국의 진격 소식은 큰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거기다 최근 왕성에서 떠도는 소문에 그들의 불안감은 배가 되었다.
한 귀족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데 혹 그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소문이라니요?”
운을 뗀 귀족은 잠시 말을 고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께 변고가 생각다 합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귀족들의 얼굴이 놀람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몇몇 이의 얼굴에는 묘한 빛이 스쳤다. 이미 그 소식을 접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금시초문이었던 이들은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한 귀족이 불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무슨 망발이오?!”
“망발이라니요, 저는 단지 그런 소문을 들었을 뿐입니다.”
“뜬소문에 왕성 분위기를 흐릴 셈이요?”
가뜩이나 전쟁이다 사신단이다 뭐다 해서 왕성의 분위기가 어수선한 이때 이런 말이 나온 저의가 무엇이겠는가.
그때 누군가 나서며 처음 입을 연 귀족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글쎄, 그저 마냥 뜬소문만은 아니라고 하더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요 며칠 사이에 전하께서 방 밖으로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리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그건 이상한 일이군요.”
“하면, 정말 문제가 있다는 겁니까?”
지금은 제국과의 전쟁을 앞둔 시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의 변고는 귀족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지금 뭐 하는 짓인가!”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대전 안으로 하이든 후작이 지팡이를 쥔 채 들어왔다. 쿵 하고 내려친 소리는 그가 지팡이를 바닥에 부딪쳐 난 소리였다.
“후, 후작님.”
하이든 후작의 등장에 국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입방정을 찧어대던 귀족들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어졌다.
하이든 후작은 처음 말을 꺼낸 귀족을 노려보며 말했다.
“전하께 변고가 생겨? 하면 이 회의를 대체 누가 소집해 다들 이 자리에 나온 것인가!”
“그, 그것이…….”
하이든 후작의 말에 모두 꿀 먹는 벙어리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후작의 말처럼 지금 이 회의는 국왕에 의해 이뤄졌기 때문이다. 잠시 그것을 망각했던 귀족들은 얼굴을 들지 못했다.
하이든 후작은 그런 귀족들의 행태에 혀를 차며 말했다.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지 말게.”
하이든 후작은 그리 말하고 자신의 자리에 가 착석했다. 귀족들은 그제야 안심한 표정으로 제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러나 그리 말한 하이든 후작의 속도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저 뜬소문인 겐가…….’
다른 이들은 그저 뜬소문이라 취급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쥐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분명 빈센트의 신변에 무언가 이상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하이든 후작은 무언가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그저 그가 귀족들에게 이리 단호히 빈센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한 가닥 희망 때문이었다.
그가 직접 내뱉은 말처럼 이 회의가 국왕에 의해 행해지는 것이라는 것. 하이든 후작은 초조함에 지팡이를 내려놓고 손에 흥건히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때 대전 안으로 베로니카 공작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베로니카 공작은 국왕의 가장 상석 왼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현재 플로렌스 공작이 페르시아 제국이 진격하기 며칠 전에 이미 국경으로 떠난 뒤라 이 자리에서 가장 높은 직위를 가진 것은 베로니카 공작이었다.
‘베로니카 공작…….’
후작은 제 맞은편에 앉은 베로니카 공작을 보았다.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앉아 있는 공작을 보고 있노라면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베로니카 공작은 정치에 나서지 않았지만 분명한 국왕파 인사였다. 물론 현재는 헬리아 공주에게도 힘을 실어주고 있지만 국왕에게 충성하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그런 측근이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거라면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거짓이라면?’
후작의 머릿속에 부정적인 생각이 스칠 때였다.
“국왕 전하 드시옵니다!”
국왕의 등장에 갑자기 대전 안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하이든 후작 또한 놀란 눈을 채 감추지 못하고 빈센트를 바라보았다. 결코 오십 대라 부를 수 없는 외모의 소유자. 아르센 왕국의 국왕 빈센트였다.
‘대체 어떻게?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었단 말인가?’
하이든 후작뿐만 아니라 진실에 근접했던 다른 이들 역시 의아함 반 놀람 반으로 국왕을 바라보았다. 상석에 앉은 빈센트는 주변을 둘러보곤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어찌 다들 놀란 눈으로 보고 있으시오?”
“아, 그, 그것이 아니오라, 요즘 흉흉한 소문이 돌았나이다.”
빈센트가 흥미롭다는 듯 의자걸이에 팔을 괴었다. 그러곤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흉흉한 소문이라?”
말을 꺼낸 귀족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전하께 변고가 생겼다는, 하하, 이제 보니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습니다.”
빈센트가 턱을 쓰다듬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평소 그의 웃는 표정과는 조금 달랐지만 귀족들은 물론 하이든 후작마저도 그 작은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 소문이 있었단 말이오?”
빈센트의 눈이 번뜩였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이었다. 그는 그런 소문은 들어본 적 없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귀족들은 빈센트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뜬소문이라도 그의 변고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노심초사하였던가.
빈센트가 자세를 바로 하고 귀족들을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귀족들은 그에 표정을 고치고 빈센트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모두 들었으리라 보오.”
빈센트의 말에 귀족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제국이 칼을 빼 들었소.”
빈센트가 베로니카 공작을 보았다.
“공작, 제국에 아르센의 마법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시길 바라오.”
베로니카 공작이 후후 웃으며 말했다.
“허허, 이 늙은이를 아주 부려먹으십니다.”
“마법사들을 부탁드리오.”
“맡겨만 주시오. 오랜만에 이거 관절이나 풀어두어야겠습니다.”
빈센트는 그렇게 제국과의 전쟁에 대한 회의를 진행해 나갔다. 그의 말과 행동엔 아무런 이상함도 보이지 않았다.
하이든 후작은 그 모습을 보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 이상한 부분이 없을까, 아니면 몸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살펴보았지만 빈센트는 매우 건강했다.
“후작, 왕성의 관리를 부탁하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관리하겠나이다.”
하이든 후작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빈센트는 옅게 웃으며 다시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음 말을 이었다.
“또한 이번 전쟁에는 헬리아 공주도 참전할 것이오.”
“고, 아니, 전하!”
빈센트의 발언에 베로니카 공작이 놀란 눈으로 국왕을 보았다. 빈센트는 베로니카 공작이 뭐라 입을 열려 하자 손을 들어 올렸다.
“이미 정해진 사안이오, 공작.”
“하오나, 공주께서는 아직 어리시오!”
베로니카 공작이 빈센트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빈센트는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이미 열아홉이오, 성인식도 치렀고 충분한 나이는 되었소.”
“하지만 공주는…….”
“그 아이의 능력에 대해선 공작께서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소.”
“그러하나…….”
베로니카 공작은 아무래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듯 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모두에게 말하겠소. 헬리아 공주 또한 이번 전쟁에 참여할 것이오.”
베로니카 공작은 여전히 수긍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다른 이들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당 후계자로서 당연한 일을 하는 것. 또한 이것은 군의 사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오. 무엇보다 헬리아 공주는 엘라드 상단의 상단주, 당연히 이번 전쟁에 큰 도움이 될 거라 보오.”
“정말 그리하실 거요?”
베로니카 공작이 체념한 눈동자로 다시 한번 확인했다.
빈센트는 단호히 말했다. 평소 공주를 아끼던 그의 태도와는 너무나 달랐지만 지금이 전쟁 중이라는 것에 귀족들은 특별히 의아함을 느끼진 못했다. 하지만 하이든 후작은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 공주를 아끼는 전하가…….’
하이든 후작이 빈센트를 바라보았다. 빈센트는 그런 하이든 후작의 눈빛에 입꼬리를 올렸다.
“공주의 뜻이었소. 하여 내 어쩔 수 없구려.”
워낙 공주를 아끼는 그였지만 본인이 강경하게 나오자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베로니카 공작은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부디 다치지 않고 돌아오길 바라오.”
“공주는 누구보다 영리하고 강한 아이니 제 몫을 해낼 것이오.”
“…….”
베로니카 공작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빈센트는 이내 입가의 웃음을 지워내곤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제국의 야욕은 반드시 저지될 것이오.”
빈센트의 말에 귀족들은 고개를 숙였다.
회의가 끝나고 텅 빈 대전 안.
대전 안은 서늘한 추위가 감돌았다. 시종 한 명이 꺼져 가는 벽난로의 불을 지피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곧 나갈 것이다. 그대로 두어라.”
“예, 전하.”
시종은 상석에 앉아 있는 빈센트의 말에 허리를 숙이고 대전을 나섰다. 대전 안에는 빈센트와 그 옆에 앉은 베로니카 공작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자리, 꽤나 귀찮은 자리였네요.”
빈센트가 자조 섞인 목소리로 의자걸이에 손을 두어 번 내려쳤다. 그 모습을 베로니카 공작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앉아 보니 알겠어요. 이 자리가 얼마나 성가시고 귀찮은지. 그리고…….”
그가 쓰게 웃었다.
“누구의 자리인지…….”
“헬리아…….”
베로니카 공작의 입에서 헬리아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빈센트는 그것이 자신을 지칭하는 것임에도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바로 그가 헬리아니까.
“할아버지.”
오랜만에 부르는 할아버지 소리에 공작은 옅게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8서클 마법사인 그의 마법으로 빈센트의 모습으로 변신한 헬리아를 알아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 갈 것이냐?”
베로니카 공작은 다시 한번 물었다. 헬리아는 옅게 웃으며 베로니카 공작을 보았다.
“네.”
“하지만 제국이라니, 너무 위험하다.”
“위험한 일은 충분히 겪어봤어요. 그래도 살아 돌아왔잖아요?”
“하지만 이번엔 전쟁이다! 상황이 달라!”
“다르지 않아요.”
가야만 했다. 그래야 아버지를 구할 수 있다. 아직 빈센트는 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헬리아는 그동안 빈센트를 포션이 담긴 욕조에 담그기도 했고 힐을 시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빈센트는 깨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잠자다 어느 순간 숨을 거둘까 싶어 그녀는 전전긍긍했다. 어째서 깨어나지 못하고 계속 잠만 자는 걸까. 그러던 중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수면기. 드래곤이 수면기를 갖는 것처럼, 빈센트 또한 모자란 힘을 보충하기 위해 일종의 가수면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도 헬리아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완벽한 드래곤 하트를 지닌 드래곤이나 가능한 일. 반쪽의, 그것도 점점 힘을 잃어가는 빈센트와는 달랐다. 그저 잠만 잔다고 나을 것이 아니란 소리다. 그것이 영원한 잠이 될 수도 있다.
헬리아는 그것이 두려웠다. 이대로 아버지가 깨어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고. 현재 빈센트는 베로니카 공작이 만들어둔 유리관 안에 잠들어 있다. 그 유리관은 빈센트의 육체가 혹여 썩지 않도록 할 뿐이었다.
꽈악.
헬리아가 의자 걸이를 세게 쥐었다.
“벌써 이 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러니 얼른 주인에게 돌려줄 겁니다.”
헬리아의 단호한 눈빛에 베로니카 공작은 한숨을 쉬었다.
“하면 이제부터는 어찌할 게냐? 네가 가면 국왕의 역할을 할 사람이 없다.”
베로니카 공작은 헬리아이기에 빈센트의 대역을 묵인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안 된다. 혹여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녀만큼 빈센트를 완벽하게 흉내 낼 수 있는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귀족들은 바보가 아니다. 분명 어설픈 연기를 눈치챌 것이다.
헬리아는 베로니카 공작의 말에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모습을 본 베로니카 공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호오, 무언가 준비를 한 모양이구나.”
헬리아는 무언가 꿍꿍이속이 있을 때는 언제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곤 했다. 베로니카 공작의 말에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은 걱정하지 마세요. 저보다 아버지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고,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사람이니까.”
“그게 누구…….”
그 순간이었다.
“공주님.”
순간 헬리아의 뒤로 흰 머리에 외눈 안경, 그리고 지팡이를 쥔 세바스찬이 모습을 드러냈다.
“세바스찬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겁니다.”
“하, 이거 한 방 크게 먹었구먼. 자네…….”
베로니카 공작은 헬리아의 말에 허허 웃었다. 하기야 세바스찬이라면 완벽히 믿을 만한 자였다. 헬리아가 스윽 몸을 일으켰다.
“그럼 부탁드리고 갑니다.”
아버지를, 그리고 이 왕국을. 헬리아의 눈빛에 베로니카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다녀올게요.”
베로니카 공작은 그녀의 말에 눈을 감았다. 위험을 알기에 말리고 싶으나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반드시 무사히 돌아오거라.”
* * *
키안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작은 촛불만을 켜놓은 채 세르게니아의 일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어지럽게 쓰인 글씨들, 그리고 검은 잉크로 더럽혀져 제대로 읽을 수 없는 페이지들. 그것을 내려다보는 키안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
한 장 한 장 다시 일기장의 페이지를 넘기며 혹여 놓친 것은 없는지 살피는 키안의 귓가에 드륵 문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고 있어?”
잭은 자신이 다가올 동안 생각에 잠긴 키안을 바라보았다.
“일기장?”
잭이 외눈 안경을 슬쩍 치켜 올리며 일기장을 바라보고 있는 키안을 향해 물었다.
“무언가 다른 내용이 있는 건가?”
키안은 고개를 저으며 일기장을 덮었다.
“아닙니다. 공주님이 말했던 내용 외엔.”
며칠 전 헬리아가 베라를 방문해 일기장의 내용을 확인하고 갔다. 그녀가 세바스찬을 통해 알게 된 내용과 크게 다른 부분은 없었다.
“드래곤 하트를 이식하다니. 이거야 원.”
키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이지 그분이 아니라면 누가 이런 생각을 할까. 초대 황제를 사랑했다는 이유로 800년이 넘도록 이 아르센 왕국을 수호했고, 현 국왕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드래곤 하트를 그의 심장에 이식했다. 드래곤의 집념은 알아줘야 한달까. 키안으로서도 엄두가 나지 않는 드래곤의 사랑(?)이었다. 이만한 정성이 또 어디 있겠는가.
키안은 일기장을 쓰다듬으며 웃음을 지었다. 그런 세르게니아를 좋아했었다. 세르게니아는 언제나 국왕뿐이었지만, 그래서 키안은 자신의 마음을 말할 수 없었지만 아직도 그 마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공주님은?”
“내일 국경으로 출발한다고 하더군.”
“그 변태 요정이 보이질 않는 걸 보니, 그쪽에 함께 있는 모양이군요.”
키안은 겨울에도 헐벗고 다니며 보고 싶지 않은 근육을 뽐내던 유니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가 따라간다고 하니 어느 정도 마음은 놓였다. 하는 꼬락서니는 저래 보여도 그래도 베라에서 키안 다음으로 유능한 인재가 아니던가.
“한데 정말 드래곤 하트를 찾을 수 있는 건가?”
“글쎄요. 그건 저도 알 수가 없군요.”
키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 부분에 대해선 그도 확신할 수 없었다. 세르게니아는 오만한 드래곤답게 누군가에게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 입장에선 세르게니아가 시키는 일을 그저 해야만 했을 뿐, 거기다 대고 가타부타 묻는 경우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차라리 한 번쯤은 물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키안은 다시금 일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잭.”
잭이 그를 돌아보았다. 키안은 가만히 일기장을 보다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좀 조사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그분에 대해서입니다.”
키안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마지막 대결이 어떻게 끝난 것인지…….”
키안은 일기장을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차가운 감촉이 그의 가슴마저 서늘하게 만들었다.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 * *
“……이건.”
헬리아는 자신 앞에 놓인 서류 더미를 보며 눈을 좁혔다.
“확인해 주셔야 할 서류들입니다.”
“…….”
헬리아의 고개가 자연히 창밖을 향했다. 그러자 클리드가 이번엔 당하지 않겠다는 듯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미룬다고 일이 없어지진 않습니다.”
“……쳇.”
헬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곤 서류를 들춰 보았다. 축 처진 그 모습을 본 클리드의 안색이 흐려졌다.
“정말 가실 겁니까?”
“응.”
“하지만 전쟁은…….”
“알고 있어.”
아니, 잘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나름 죽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전쟁은 수백, 수천 명이 한순간에 죽어나가는 곳. 헬리아는 과거에도 지금도 그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클리드가 걱정하는 것은 그런 점이다.
“걱정하지 마.”
클리드의 걱정 어린 표정에 헬리아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이전처럼 잘 돌아올게.”
“그야 그렇지만.”
“믿어보라고.”
“후우, 또 서류가 쌓여가겠군요.”
클리드의 말에 헬리아의 표정이 새초롬해졌다.
“왠지 나보다 서류를 더 걱정하는 것 같은데?”
“착각입니다.”
헬리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클리드를 흘겨보았지만 클리드가 그런 것에 넘어갈 짬이던가. 클리드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무사히 돌아올 거라 믿겠습니다.”
“그럼 말이지. 서…….”
“……류는 미리 준비해 놓겠습니다. 언제 오실지 모르니 대충 세 달 치 정도 미리 결재가 필요한 걸 가져와야겠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 돼?”
“그러니 빨리 돌아오세요.”
“아~ 주 빨리 올 거니까 좀만 주라고.”
헬리아의 대답에 클리드는 피식 웃었다. 그녀를 걱정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그녀는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한다. 엘라드 상단에서도 그녀가 이번 전쟁에 참여한다는 소식에 얼마나 놀랐던가. 엘라드 상단에 있어, 클리드에게 있어 헬리아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참전 소식에 놀라 허겁지겁 달려온 이가 또 한 명 있었다.
쾅!
“헬리아!”
세드릭이었다. 세드릭은 급하게 뛰어왔는지 숨을 들이마시며 헬리아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지팡이가 필요하지만 이제는 제법 걷는 폼이 정상인과 다르지 않았다.
“와, 왕자님.”
뒤따라온 노엘이 그런 세드릭의 모습에 안절부절못했지만 세드릭은 헬리아가 전쟁에 참여한다는 소식에 힘든 몸도 잊고 물었다.
“가지 마.”
“뭘 가지 마야.”
“전쟁 말이야. 굳이 네가 필요한 게 아니잖아?”
세드릭의 말처럼 헬리아는 전쟁에 대해선 문외한이다. 하지만 헬리아는 반드시 제국으로 가야만 했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드래곤 하트가 있는 제국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세드릭에게 알릴 순 없었다. 비밀은 아는 자가 적을수록 지켜지는 법이다. 물론 그 같은 사실을 모르는 세드릭으로서는 왜 헬리아가 그 험한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헬리아!”
헬리아가 귓등으로도 듣지 않자 세드릭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헬리아는 서류를 뒤적거리며 펜을 들었다.
“명색이 후계자인데 가만히 있으면 안 되지.”
“그럼 나도…….”
“아픈 사람은 편히 쉬는 게 좋아. 그게 아픈 사람의 특권이야.”
“하지만.”
세드릭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좀 더 믿음직했다면 그녀가 그런 곳에 가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자꾸만 헬리아가 힘든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 같아 세드릭은 입술을 깨물었다.
“왕자님…….”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노엘도 세드릭처럼 얼굴 표정이 어두워졌다.
헬리아는 세드릭의 표정을 보곤 혀를 찼다. 마음이 저리 여려서야.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일이야. 누가 등 떠밀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가야 하니까.”
“…….”
가야 하는 일. 그때의 헬리아의 표정은 누구보다 단호했다. 세드릭은 그 모습에서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생겼다는 걸 알아챘다. 헬리아가 이렇게 나서는 일이란 대체 무엇일까. 순간 세드릭의 머리에 최근 들려온 소문이 떠올랐다.
“설마…….”
“생각하지 마.”
“…….”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그렇게 될 거니까. 그러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마.”
세드릭이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정말이었던가. 그녀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는지, 어떤 상황인지. 하지만 입을 열지 않았다.
“괜찮은 거지?”
“괜찮아. 괜찮을 거야.”
헬리아는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헬리아의 대답에 세드릭은 입술을 질끈 깨물곤 헬리아를 보았다. 아직 열아홉밖에 안 된, 원래라면 예쁜 옷을 입고 화려한 무도회를 즐겨야 할 나이건만 그녀에게 지워진 짐이 너무도 많았다.
“힘들면 말해.”
“나중에 그 말 후회하지 마.”
헬리아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드릭에게 다가갔다.
“그땐 정말 부려 먹어줄 테니까.”
“그건 좀 무서운데.”
세드릭은 웃으며 살포시 그녀를 안았다.
“이제 막 안는다?”
“내 동생 내가 마음대로 안는다고 뭐라 할 사람 없거든?”
세드릭은 헬리아를 꼭 안아주었다.
“헬리아, 조심해서 다녀와.”
세드릭의 걱정 어린 말에 헬리아는 그의 등을 두어 번 토닥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갔다 올게.”
헬리아는 꽤 오랫동안 그렇게 세드릭의 품에 안겨 있었다.
* * *
페르시아 제국과 아르센 왕국을 가르는 거대한 물줄기, 알라스 강 사이로 아르센 왕국군의 작전 지휘부가 세워졌다. 상석에 앉은 총사령관 플로렌스 공작을 위시한 기사들이 긴 테이블 양옆으로 착석해 있었다. 테이블에는 레칸 대륙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회의실 안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플로렌스 공작이 지휘봉을 쥐었다 놓으며 말을 꺼냈다.
“적의 사령관은?”
그에 공작의 보좌관인 조엘 남작이 입을 열었다.
“카이슈 백작이라 합니다.”
플로렌스 공작의 눈이 좁아졌다. 그와 함께 수뇌부들도 동요를 보였다.
카이슈 백작. 제국의 다섯 명의 소드 마스터 중 한 명이었다. 성격이 불같고 난폭하여 폭렬의 검이라 불리는 남자였다.
“카이슈 백작이라……. 적들의 수는?”
“총 3만입니다.”
남작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소드 마스터에다가 병력은 총 3만. 현재 제국과 대치 중인 아르센 왕국군의 병력은 일만이었다.
3만 대 1만. 물리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물러설 수 없었다.
“정보원의 보고에 따르면 내일 중으로 강을 잇는 다리가 모두 완성된다고 합니다.”
“…….”
플로렌스 공작이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레토나 남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레토나 남작은 플로렌스 가문을 떠받치는 가문 중 하나였다. 사십 대의 중년인이었지만 혈기만큼은 젊은이 못지않은 사내였다.
“그까짓 다리야 다시 부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이 레토나에게 맡겨주십시오! 다리를 부수고 오겠습니다!”
남작의 호기로운 발언에 몇몇은 동의하는 눈빛을 띠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전쟁 선포 이후 플로렌스 공작은 발 빠르게 페르시아 제국과 아르센 왕국을 잇는 다리를 모두 부숴 놓았다. 그 빠른 대처 덕분에 제국은 손쓸 시간조차 없이 다리는 모두 완파되었다.
그 덕에 제국군이 강 이남으로 내려오는 것을 늦출 수 있었다. 워낙 강의 물살이 거세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데다가 협곡이 자리한지라 배를 띄우는 것도 힘들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레토나 남작의 맞은편 왼쪽에 위치한 에론 남작이 반대를 표했다. 에론 남작은 플로렌스 공작가의 기사단장이었다. 그의 발언에 기사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옮겨갔다. 에론 남작의 말에 레토나 남작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게 무슨 말이오!”
“제국군엔 흑마법사가 있습니다. 마법사의 수가 현저히 부족한 우리 군으로는 오히려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
레토나 남작의 음성이 한풀 꺾였다. 그러나 여전히 수긍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에론 남작이 쐐기를 박았다.
“현재 흑마법사의 수가 족히 오십은 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우리가 궁병을 동원한다 해도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 말에 레토나 남작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대로 저들이 다리를 만드는 동안 잠자코 기다리고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회의는 길어졌고 뾰쪽한 수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플로렌스 공작은 가만히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총사령관님!”
막사의 천이 열리고 기사가 들어왔다. 그의 등장에 막사 안에 있던 수뇌부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플로렌스 공작의 눈빛이 변했다.
“왔느냐?”
“예, 지금 공작령을 통과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드디어 왔군.”
플로렌스 공작의 입가가 씨익 올라갔다. 페르시아 제국에서 흑마법사를 내세울 것을 알고 마법 부대 파견을 지원 요청한 바 있었다. 그 마법 부대가 지금 막 그의 영지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마법사의 부족으로 제약을 받았던 전법들이 가능하게 되었다. 플로렌스 공작은 전략을 구상하다 이내 눈매를 좁히고 기사에게 물었다.
“한데 혹 마법 부대를 이끌고 온 이가?”
“예, 헬리아 공주님입니다.”
플로렌스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결국…….”
공작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히이잉!
말고삐를 잡아챈 헬리아는 강 너머 모래알처럼 가득히 들어찬 페르시아 제국군을 바라보았다.
다그닥다그닥.
그런 그녀 옆으로 이안이 다가왔다. 헬리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약간 복잡한 빛을 띠었다. 그녀가 결심을 하고 간 날 국왕이 쓰러진 바람에 약혼이고 뭐고 흐지부지된 상태였다.
그 탓에 그녀가 과연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어렴풋이 그것이 그에게 그리 좋은 내용은 아니었을 거라 예감했다. 하기야 애초에 그것을 확신했다면 이리 복잡한 눈으로 그녀를 보지도 않았겠지만.
‘그래 봐야 달라지는 건 없는가.’
애초에 결심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포기하지 않는다고. 이안의 눈빛에서 상념이 지워졌다. 그리고 헬리아에게 물었다.
“정말 제국에 가실 겁니까?”
그 말에 헬리아가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이안을 바라보았다.
“말릴 거야?”
헬리아가 입가에 미소를 띠고 그를 바라보자 이안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릴 수 있었다면 이곳에 오기 전에 그랬을 겁니다.”
말린다고 들을 헬리아던가. 거기다가 국왕이 쓰러졌다. 그 상황에서 헬리아의 행동을 막을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
“하지만 제국군을 뚫고 제국으로 가는 건 쉽지 않습니다.”
이안의 시선이 강 너머를 향했다. 모래알처럼 펼쳐진 제국군이 그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유니, 제국군의 병력은 얼마나 되지?”
그때 헬리아의 가방 주머니에 들어 있던 유니가 작은 날개를 팔랑이며 날아오르더니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총 3만이더라구.”
“이거 적응이 안 되네.”
헬리아는 눈을 찌푸리며 모기처럼 제 귓가를 날아다니는 유니를 보았다. 사람일 때는 그래도 변태긴 해도 예의는 차렸는데 이 요정은 예의라고는 뒷간에 처박은 것 같았다.
“우리 쪽은?”
“일만, 에고, 이걸로 이길 수 있으려나 몰라.”
변태인가 말종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헬리아는 과연 유니를 어느 쪽으로 해두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지 생각했다.
‘아예 안 보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지도.’
헬리아는 잠시 생각하다 이안을 보았다.
“질 거라고 생각해?”
갑자기 자신에게 툭 치고 들어온 헬리아에 말에 이안이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단호히 말했다.
“아닙니다.”
헬리아의 입술이 올라갔다.
“그럼 걱정 없네.”
“……하아. 쉽지 않을 겁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고.”
헬리아는 차분히 눈을 빛내며 주변을 살폈다. 다들 제국의 위세에 걱정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다리를 만들고 있군.”
“곧 완성될 겁니다.”
아르센 왕국의 강 자락에 닿아가는 다리를 보았다. 그 주변엔 흑마법사로 보이는 이들의 존재가 아르센 왕국군의 움직임을 저지시켰다. 실제로 왕국군에선 몇 번이고 별동대를 파견해 다리를 부수려 했지만 그때마다 흑마법사에게 밀려 성과 없이 당하고 말았다.
“강이라…….”
“뭐, 3만이든 1만이든 아무렴 어때?”
그때 엘라임이 말고삐를 당겨 헬리아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는 이번에는 정령사로서 헬리아와 함께한 탓에 말을 타게 되었다. 엘라임의 대수롭지 않은 말에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엘라임이 정령왕이라고 해도 헬리아의 힘의 그릇만큼만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거기다 그가 만약 헬리아의 힘 이상을 쓰게 된다면 그건 헬리아에게 부담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평소라면 엘라임의 헛소리에 한 대 머리를 때렸을 헬리아가 수긍했다.
“뭐 그렇다고 어려울 것도 없지 않겠어?”
헬리아의 말에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대신 엘라임은 희희낙락했다. 이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할 때는 분명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무슨 생각입니까?”
“전에도 생각한 건데 이 강은 겨울인데도 얼지 않았네.”
“그거야 워낙 수심이 깊고 물길이 거세서…….”
순간 이안의 눈이 번뜩였다. 헬리아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곤 웃었다.
* * *
“후우…….”
막사 안에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바로 플로렌스 공작의 한숨이었다. 플로렌스 공작은 생글거리며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헬리아 공주를 바라보았다.
“결국.”
“왔지요.”
헬리아가 공작의 말을 바로 이어 말했다. 플로렌스 공작은 더 나오지 않을 것 같은 한숨을 한 번 더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이안을 보았다. 왜 공주가 오는 것을 말리지 않았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무리 공주가 강경해도 해야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전장은 그녀가 있을 곳이 아니다. 하지만 이안은 입술을 틀어 올렸다.
“누가 말릴 수 있겠습니까?”
애초에 말릴 수 있었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플로렌스 공작은 아들의 말에 공감하는 한편 다시 헬리아를 보았다.
“왕성은 어찌하셨소?”
빈센트의 역할을 해야 할 그녀가 이곳에 와 있다면 누가 그 역할을 맡는단 말인가. 국왕에게 문제가 있다는 게 알려진다면 필시 큰 혼란이 생길 것이다. 그에 헬리아는 싱긋 웃어 보였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맡겼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후우…….”
플로렌스 공작은 미간을 짓눌렀다. 공주가 이곳에 왔다는 것은 전쟁에 참여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제국으로 가야 합니다.”
“후우, 전쟁이라는 것을 잊으신 겁니까? 왜 굳이 제국에…….”
말을 하던 중 그는 헬리아의 눈빛을 보게 되었다. 그녀의 단호한 눈빛에 플로렌스 공작은 그녀가 자신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공작은 다시 한번 그녀의 결심을 확인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죽지 않을 겁니다. 죽을 수도 없습니다.”
헬리아는 반드시 아버지의 병을 고쳐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결코 죽을 수 없었다. 그 말에 공작은 더는 헬리아를 설득하는 것이 무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우, 알겠소.”
플로렌스 공작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녀가 와 있는데 다시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온다는 소식에 왕국군의 사기가 오른 탓이었다.
‘어쩔 수 없군.’
이미 이렇게 된 이상 그녀가 다치지 않게 할 필요가 있었다. 빈센트도 쓰러진 마당에 그녀마저 잘못되면 문제가 커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알아챈 것일까.
헬리아가 입가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
“전 가만히 앉아 있으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에요.”
그럴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다. 플로렌스 공작의 눈매가 좁아졌다.
“공주, 이것은 전쟁이외다. 아무리 공주가 능력이 출중하다 하나…….”
“공작님이 절 너무 띄엄띄엄 보셨네요. 이래 봬도 어디서 약하다는 소린 못 들었는데.”
헬리아가 천천히 자신의 기운을 내보였다.
‘음!’
플로렌스 공작은 헬리아가 발산하는 기운에 몸을 흠칫했다. 순간 검을 뽑아 들 뻔했다.
‘대체 이 힘은…….’
전에 보았을 때도 어느 정도 뛰어난 마법사라 여겼지만 설마 이 정도 힘까지 지닌 줄은 알지 못했다. 헬리아는 공작의 표정을 보고 힘을 풀었다. 아무래도 직접 보여주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헬리아는 공작에게 드래곤의 힘을 내보인 것이다.
공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결정은 쉽지 않았다.
그때 이안이 입을 열었다.
“제가 붙잡혔을 때 절 구해 준 것이 공주님이었습니다.”
“…….”
“공주님을 믿기 힘들다면 저를 믿어주십시오, 아버지.”
그 말에 공작은 이제 모든 손을 다 들었다. 이안의 눈빛에 마음을 굳힌 것이다.
“알겠소. 하면 이제 어쩔 생각이오?”
“오다가 알라스 강을 쭉 둘러봤어요. 이 추운 날에도 용케 얼지 않았더라구요.”
“지금까지 알라스 강이 언 일은 없었네.”
“그러니 잘되었어요.”
“잘되다니?”
“물에서 저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헬리아가 싱긋 웃었다.
* * *
페르시아 제국군 진영.
대페르시아 제국의 대륙 통일을 위한 선발대를 지휘하게 된 중년인이 막사에 모여 있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오십 대의 중년인으로 다부진 체력과 부리부리한 눈매의 소유자였다. 꽉 다물린 입술은 그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가 바로 제국의 다섯 개의 검 중 하나인 폭렬의 검 카이슈 백작이었다. 백작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소드 마스터라는 힘이 그를 이번 전쟁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게 했다.
카이슈 백작은 시종이 따르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고는 테이블에 놓인 지도를 바라보았다.
“다리는 어떻게 되었지?”
그의 보좌관 마이슨 남작이 입을 열었다.
“현재 마무리 작업만 남았습니다.”
“도대체 아직까지 마무리를 안 하고 뭐 했는가! 원래라면 저번 주에 완성되었어야 하지 않나!”
그의 성질에 마이슨 남작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간 왕국군 놈들의 습격 때문에 작업이 더디게 진행되었습니다.”
“흥, 그 송사리들. 겨우 왕국군 나부랭이들이 감히 우리를 방해해? 그놈들 동태는?”
“그동안 몇 차례 흑마법사의 공격을 받고 더 이상 움직임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 겁쟁이 새끼들. 큭큭큭.”
카이슈 백작이 다시금 시종이 채운 잔을 벌컥 들이켰다. 그 모습에 자리한 기사들은 눈을 찌푸렸지만 뭐라 입을 열지 못했다. 카이슈 백작의 성질은 유명했고 무엇보다 그는 제국에 다섯 명밖에 없는 소드 마스터였다. 누가 그의 성질을 건드리겠는가. 그러나 그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추가 병력은?”
“오늘 마법 부대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대략 서른 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카이슈 백작의 눈매가 좁아졌다. 마법사 서른 명은 제국군에서도 신경이 쓰일 정도의 수였다. 현재 왕국군의 마법사가 부족해 원거리 공격에서 제국군이 우위를 점했지만, 왕국군에 마법사가 충원된다면 그 점은 서로 비등하게 된다. 거기다 자신들은 다리를 건너 남하해야 하는 입장이다. 행여 다리를 건너다 습격을 받게 되면 그건 큰 문제였다.
“그들은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때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의 왼뺨에는 길게 자상이 나 있었고,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는 한번 보면 잊히지 않을 정도였다. 바로 제롬이었다. 현재 흑마법사들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였다.
“제롬 경.”
카이슈 백작이 막사 안으로 들어온 제롬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천생 기사로 마법사 나부랭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흑마법사는 그 불쾌하고 찜찜한 기운 때문에 영 달갑지가 않았다. 하지만 제롬은 라몬 공작의 사람. 제아무리 천둥벌거숭이 같은 카이슈 백작이라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순 없었다. 그의 목소리가 제법 사나워졌다. 아마 자신이 누군가에게 밑진다는 생각이 불쾌한 것이리라.
“걱정이라…….”
“백작님, 제롬 경의 도움으로 첩자들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혹여 제롬의 심기를, 아니, 그의 뒤에 있는 라몬 공작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마이슨이 재빨리 제롬을 옹호했다. 백작의 눈이 치켜 올라갔지만 그도 머리가 있었다.
“수고가 많군.”
“별일 아닙니다.”
제롬의 입꼬리가 비틀어 올라갔다. 왕국군이 다리 건설을 막기 위해 보내온 자들을 제롬이 나서서 처리했다. 카이슈 백작은 미덥지 않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능력이라면 마법 부대가 충원돼도 충분히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후방을 부탁하지.”
“맡겨만 주십시오.”
제롬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뿌우우- 뿌우우-
뿔피리 소리가 알라스 강에 길게 울려 퍼졌다.
“전구우우운! 출전하라!”
카이슈 백작의 외침 소리와 함께 제국군이 움직였다.
척! 척! 척!
3만의 병력이 알라스 강 사이에 놓인 다섯 개의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말을 탄 기사들과 병사들이 앞서 움직였고, 그 뒤를 흑마법사들이 따랐다.
제롬은 날카로운 눈으로 왕국군 진영을 바라보았다.
‘음?’
그런데 그의 눈에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제국군의 출전에 당연히 맞서야 할 왕국군이 뒤로 물러나 있는 게 아닌가?
‘뭐지?’
문득 묘한 위기감이 스며들었다. 얼핏 보면 다가올 제국군을 견제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왠지 제롬의 눈에는 저들이 한발 뒤로 물러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강에서 멀어지려고 하는 것처럼.
그때였다.
“제롬 님, 뭔가가 이상합니다.”
그의 보좌를 맡고 있는 흑마법사도 뭔가 수상쩍음을 느꼈는지 말했다.
“마치 저희가 다리를 건너고 있는 걸 가만히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말대로였다. 왕국군은 제국군이 다리를 건너고 있음에도 아무런 공격을 취하지 않았다. 분명 왕국군의 맨 앞에는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마법 부대를 배치해 놓고도 제국군의 움직임을 묵인했다.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다리에 전부 올라오길 기다리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저 모습들이 이해가 되었다. 현재 알라스 강을 잇는 다리는 총 다섯 개. 그리고 제국군은 오로지 그 다리를 통과해야 아르센 왕국의 땅을 밟을 수 있다. 그들이 가장 취약해질 때는 다리 위인 것이다.
제롬은 다리 아래에서 차갑게 몰아치는 알라스 강을 내려다보았다. 이 추운 겨울날, 무거운 갑옷으로 중무장한 병사들이 강 아래로 떨어진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제롬은 입꼬리를 비틀며 차갑게 웃었다.
“흑마법사들을 준비시켜라.”
“예.”
“겨우 그런 수인가?”
이미 그것에 대해선 충분한 대비를 마친 뒤였다. 아르센 왕국군의 마법사는 서른 명 정도, 그에 반해 제국군의 흑마법사는 일흔 명을 상회한다. 수적으로도 봐도 왕국군은 자신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때였다.
다그닥다그닥.
말 두 마리가 알라스 강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로지 움직이는 것이라곤 그 두 마리뿐이었다. 제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순간 말에 탄 이들을 본 제롬의 눈이 커졌다.
“저놈들은!”
헬리아 공주와 이안이었다.
“공작님.”
에론 남작이 플로렌스 공작을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도 공작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무 위험합니다. 지금이라도…….”
“아니.”
공작은 흔들림 없는 검은 눈동자로 헬리아와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남작은 답답해졌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지? 이런 말도 안 되는 방법이라니!’
남작은 공작과 헬리아 공주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알지 못했다. 한데 그 결과가 충격적이었다. 아니, 그만이 아니었다. 공작의 뒤에서 전장을 바라보는 수뇌부들의 눈빛에도 의아함과 어리둥절함, 그리고 헬리아 공주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너무 완고한 공작의 명령에 그들은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공주님이 마법사라고는 하나…….”
거기다 이안까지 함께하니 그래도 한 몸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도저히 무모하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헬리아 공주가 나서서 상대하겠다니!
3만의 병력이다. 그런데 어떻게 공주가 홀로 그들을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공작님!”
“그만! 그다음 이야기는 우선 공주를 보고 말하라.”
플로렌스 공작의 단호한 음성에 남작은 어쩔 수 없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헬리아 공주와 이안을 보았다.
‘제발,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그의 눈에 어린 걱정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다그닥다그닥.
말을 타고 강 쪽으로 가는 헬리아는 잔뜩 긴장된 공기가 몸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이 장소에 수만의 병력이 있기 때문일까. 그들이 한 줌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공기 중의 산소가 희박해지는 것 같았다.
헬리아는 그런 긴장감을 느끼며 전장 앞에 섰다. 자신을 향한 걱정 어린 시선들이 왕국군에서 흘러나왔다. 갑자기 공주가 홀로 선두에 서 있는 모습은 모두에게 충격이었을 것이다. 병사들은 물론 수뇌부까지 그녀의 행보를 초조하게 주시했다. 그리고 적군은 그녀를 발견하자 섣불리 공격을 하지 못했다. 도대체 미친 게 아니고서야 그녀가 홀로 움직이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은 탓이다. 그저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리를 건너 다가올 뿐이었다.
툭, 툭.
그때 잿빛 하늘에서 빗줄기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헬리아는 손바닥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마침 날씨도 받쳐 주는군.”
“그런 말을 태연히 할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일 겁니다.”
이안은 대군을 앞에 두고도 유유자적하는 헬리아의 모습에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원래 이런 사람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헬리아는 전쟁이 처음이지 않던가. 전쟁의 긴장감과 두려움은 헬리아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것이 열아홉 살 여인이 가질 수 있는 강심장이란 말인가?
헬리아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적들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고 있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이안은 그 스스로도 믿기 힘들 만큼 두려움이 사라졌다. 적들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혹여 그녀가 다칠까 하는 그런 두려움 말이다.
“드디어 왔군.”
헬리아의 시선이 적들을 향했다. 정확히 그들이 모두 다리에 올라왔을 때였다.
“엘라임.”
[응.]
쏴아아아-
푸른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투명한 모습의 엘라임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엘라임의 입가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드디어 내 멋진 모습을 보여줄 때가 되었군.]
엘라임이 팔짱을 끼며 으스댔다. 보통 정령화 상태의 엘라임은 평소 인간의 모습보다 차분하지만 워낙 오랜만의 활약인지라 제법 들떠 있었다.
“자, 보여줄까?”
헬리아가 오만한 눈으로 적군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물의 정령왕을 상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파아아앗-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엘라임의 몸에서 푸른빛이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쿵!
이윽고 알라스 강물이 하늘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 * *
쿠쿠쿠쿠쿠쿵!
거대한 굉음과 함께 알라스 강 전역의 지축이 흔들리며 공기가 떨려왔다. 그리고 전장의 모든 이가 보았다.
“이, 이건 대체……!”
“맙소사 가, 강이!”
“아……!”
그것을 본 이들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윽고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전장에 고요한 적막이 찾아왔고, 적막 뒤엔 오로지 경악만이 자리했다. 그것은 거대한 벽이었다. 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벽. 수십 미터나 솟아오른 강물은 마치 거대한 성벽을 연상케 했다. 아니, 먹이를 먹기 위해 기다리는 맹수와도 같았다.
경악이며, 공포였다. 알라스 강을 건너려던 제국군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산만큼 높이 솟아오른 물줄기를 바라봐야만 했다. 공포를 느낀 제국군의 다음 행동은 발악이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근원적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했다.
“아, 안 돼!”
“주, 죽을 거야!”
“허, 허억!”
가장 먼저 병사들이 공포의 늪에 빠져 혼비백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러자 다리 위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맞춰졌던 열이 두려움에 질린 병사들로 인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아아악!”
히이이이-!
병사들의 패닉에 그들을 이끄는 기사들은 검을 뽑아 들고 이탈을 막았다.
“물러서지 마라! 자리를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병사들의 비명에 묻혀 사라졌다. 거기다 거대한 수벽의 공포를 기사들 또한 이겨내지 못했다.
“제, 젠장! 다 죽을 거라고!”
한 기사가 도망가기 위해 말을 몰았다. 그러자 열이 흐트러지고 사람이 흐트러졌다. 질서가 사라진 다리 위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모습이었다. 기사고 병사고 상관없이 모두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으, 으악! 밀지 마!”
“아아악!”
겁먹은 병사들의 몸부림과 제 목숨을 살리고자 도망치는 기사들로 인해 좁은 다리에서 떨어지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혼란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어찌 거대한 수벽 앞에 제정신을 차릴 수 있겠는가. 수벽은 단단한 암벽처럼 굳건히 서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아주 잠시뿐이라는 것을.
곧 그것이 거대한 해일이 되어 자신을 덮칠 거라고 모두들 예감했다. 과연 해일을 보고 가만히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눈먼 장님이 아니고서는 도망치는 건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그들의 머릿속엔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살 수 있다는 것. 물론 그것을 가만히 지켜볼 헬리아가 아니었다.
“아비규환이로군.”
헬리아는 무심한 눈동자로 공포에 질린 제국군을 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절망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곳은 전쟁터였다. 자신이 살기 위해 적을 죽여야 하는 곳. 잔혹한 전쟁의 이치다. 그들이 죽어야 자신들이 살 수 있음을 헬리아는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헬리아의 눈에 무심이 깃들 수 있었다. 전쟁에선 나와 적만이 있을 뿐. 헬리아의 눈동자가 서서히 금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공주님.”
“뭐 괜찮지 않아?”
헬리아가 씨익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 모습에 이안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꼭 네 마음대로 하라는 것 같아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이번 같은 일이 또 어디 있겠어? 마음껏 날뛰어도 받쳐 줄 사람이 있는데.”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아르센 왕국군이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헬리아는 오로지 홀로 싸움을 해야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그렇기에 헬리아는 힘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언제나 마음껏 날뛰었습니다만.”
“아, 그랬던가?”
이안은 뭘 또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하냐는 듯 그녀를 보았다. 헬리아는 곧 입가에 미소를 지우고 다시 제국군을 바라보았다.
“엘라임.”
파아앗-
헬리아의 목소리에 허공에서 푸른빛이 발하기 시작했다. 푸른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엘라임이 헬리아의 곁에 내려섰다.
[헬리아.]
헬리아의 금빛 눈동자가 엘라임의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어떻게 할까?]
“마음껏, 이제까지 못 한 것만큼.”
[오랫동안 그 말을 기다렸어.]
엘라임의 입술이 씨익 올라갔다. 위대한 물의 정령왕인 그가 이제까지 너무 잡일을 해왔다. 다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은 드디어 물의 정령왕으로서의 그의 정체성을 찾는 날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적들에겐 최악의 날이 될 것이다.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줘.”
[계약자의 뜻대로.]
콰아아아아아!
엘라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꼿꼿이 솟아 있던 물줄기가 마치 먹이를 먹기 위해 입을 벌린 맹수처럼 적들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무, 물이 쏟아진다!”
“도, 도망쳐!”
“아아아악!”
“비, 비켜!”
콰아아아앙!
거대한 물줄기는 강력한 해일이 되어 제국군을 향해 쇄도했다. 해일은 한순간에 다리 위에 있던 적들의 목숨을 집어삼켰다. 제국군은 채 비명을 지르지도 못 하고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죽어갔다. 무거운 갑옷은 족쇄가 되었고, 한겨울의 차가운 물은 뼛속까지 그들의 육체를 얼려 버렸다.
단 한순간. 단 한 번의 공격.
그 공격으로 다리 위에 있던, 그리고 다리 근처에 도열해 있던 제국군 1만의 병력이 순식간에 수장되었다. 어떠한 비명도, 공포도 물속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거대한 해일은 자비 없이 제국군의 목숨을 취했다. 그것은 압도적이었으며, 거대한 공포를 안겨주었다. 결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대재앙이었다.
“……!”
“고, 공작님!”
조엘 남작은 경악에 찬 눈빛으로 플로렌스 공작을 보았다.
단 한 번의 공격. 그로 인해 1만에 이르는 제국군이 차가운 물속에 수장되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이었다. 그제야 조엘 남작은 어째서 플로렌스 공작이 순순히 헬리아 공주를 전장에 홀로 내보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헬리아 공주 단 한 명으로 인해서 말이다.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왕국군의 모든 이가 헬리아 공주의 그 공격에 입을 떡 벌리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 대단한 힘입니다! 대, 대체 이런 힘을 왜 숨기고 있으셨던 겁니까?”
조엘 남작은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레토나 남작 또한 흥분으로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허허! 이거 이제까지 공주님을 헛 본 것 같습니다.”
이전까지 이 전투를 이길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확신했다. 아니, 이기지 못하려야 못할 수 없음을. 아직 제국군에는 2만의 병력이 남아 있지만 제국군이 지금 이 광경을 보고 제대로 서 있을지 의문이다. 자신들의 다리마저 떨리고 있기 때문이다.
“……헬리아 공주.”
플로렌스 공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이 정도의 힘을 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저 어느 정도 한 수가 있을 거라곤 생각했다. 그 한 수가 이 정도라고는 그조차도 알지 못했다.
‘저건…….’
그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다른 이들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지만 공작은 그 존재를 인지할 수 있었다.
‘인간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으나…… 정령, 설마 정령왕이란 말인가?!’
공작이 놀란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수상쩍다 생각은 했지만 설마 정령왕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정령왕에 대한 흔적은 수백 년 전 어느 한 용병왕이 흙의 정령왕을 불러냈다는 짧은 기록이 남겨져 있는 것 외에는 전무했다. 그러니 쉽게 정령왕이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엘라임, 엘라임, 그래, 그건 물의 정령왕의 이름이다!’
그렇게 대놓고 드러냈음에도 어느 누구도 그가 정령왕임을 알지 못했다니. 공작은 허탈함마저 느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헬리아 공주에게로 향했다.
‘그가 나타난 건 9년 전이었다. 9년 전에…….’
하나 혼란은 잠깐이었다. 공작은 이내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다들 언제까지 넋 놓고 있을 겐가!”
“아, 고, 공작님!”
공작의 호통에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기사들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플로렌스 공작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제국군을 바라보았다. 이미 헬리아의 공격에 초토화된 상태였다.
“물이 빠져 강의 수심은 깊지 않다. 설마 이대로 모든 공을 공주에게 넘겨줄 셈인가!”
“아닙니다!”
“그저 구경만 할 셈인가!”
“아닙니다!”
“그럼 공격하라!”
전군에 진격 명령이 떨어졌다.
어마어마한 공격에 기사들과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해일에 떠밀려 갔지만 흑마법사들은 달랐다. 그들은 플라이 마법을 시전한 덕분에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간혹 너무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놀라 머뭇거리던 몇몇 흑마법사가 물에 휩쓸린 것 외에 흑마법사 대부분의 전력은 크게 손실되지 않았다. 거기다 제롬의 발 빠른 지시도 한몫했다. 애초에 헬리아 공주가 등장할 때부터 그는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제롬은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물살에 떠밀려 죽어간 시체들이 둥둥 떠다녔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이다.
“젠장! 모두 정신 차려라!”
“예, 옛!”
“죽은 자는?”
“세 명입니다.”
제롬이 사나운 눈으로 헬리아를 노려보았다. 마침 헬리아의 시선도 그를 향해 있었다.
헬리아는 자신을 쳐다보는 강렬한 시선을 느끼고 제롬을 보았다.
“호오, 살아 있는 모양이네.”
“헬.리.아 공.주!”
제롬은 제 왼뺨에 길게 난 상처가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때 당한 수모가 아직도 잊히지 않았다.
“이거 오랜만이야.”
헬리아가 제롬을 향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저 거머리 새끼, 죽지도 않고 또 왔군.’
정말이지 징글징글한 놈이었다. 목숨줄이 바퀴벌레만큼이나 아주 질겼다.
“이걸로 이겼다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제롬의 뒤로 흑마법사들이 헬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헬리아는 여유로웠다. 다른 때 같았다면 버거웠을지 모르지만 오늘은 다르다.
“호오, 떼거리로 날 상대하겠다? 글쎄, 오산은 누가 했을지 두고 보면 알겠지.”
헬리아의 유들유들한 태도에 제롬의 눈빛은 활활 타올랐다.
“헬리아 공주를 공격하라!”
제롬의 명이 떨어지자 플라이 마법으로 공중에 떠 있던 흑마법사들이 일제히 헬리아를 향해 마법을 난사했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물줄기가 솟구쳤다. 제롬은 그것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수십 명이 넘는 흑마법사가 일제히 공격을 퍼부었다. 아무리 헬리아 공주라 해도 이 공격을 막지는 못 할 것이다. 그러나 그건 그의 착각이었다.
“공격은 다 한 건가?”
튀어 오른 물보라가 사그라지자 그 자리에 상처 하나 없이 서 있는 헬리아 공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롬의 눈이 커졌다. 헬리아는 가소로운 듯 웃음을 지었다.
“이런 공격으로 날 이기려고? 이런. 떼거리로 몰려와도 소용이 없네?”
헬리아가 도발해 오자 제롬은 이를 으득 갈았다. 그들의 공격은 허무할 정도로 간단히 막혀 버리고 말았다. 헬리아의 주위는 엘라임이 쳐놓은 수벽이 견고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젠장! 다시 공격해라!”
제롬의 명이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제롬은 엑시온에게서 받은 힘을 끌어올렸다. 그의 붉은 머리카락이 검게 변해갔고, 눈동자 또한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몸에서는 검은 기류가 넘실거리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른 흑마법사들도 마찬가지! 엑시온으로 인해 그들의 힘은 한층 업그레이드되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제롬은 마기를 끌어올리며 헬리아를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미 라몬 공작에게서 명을 하달받았다. 헬리아 공주를 산 채로 데려오지 못한다면 반드시 죽이라는 것.
제롬은 애초에 전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헬리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헬리아가 입술을 비틀며 손을 들어 올렸다.
“네가 다른 흑마법사를 끌고 온 것처럼 나도 꽤 많이 끌고 왔거든?”
“뭐?”
제롬이 반문할 새도 없이 헬리아가 손을 들어 올렸다. 제롬은 순간 그녀가 짓는 미소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무언가 위험하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갑자기 한 흑마법사가 공격을 당해 아래로 추락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콰지지직!
“끄아아악!”
“아아악!”
“커억!”
헬리아의 뒤쪽에서 형형색색의 마법이 난사된 것이다.
“마법 부대!”
그제야 제롬은 그녀가 이곳에 마법 부대를 이끌고 왔다는 걸 기억해 냈다. 워낙 좀 전에 보인 그녀의 행보가 독보적이었던 탓에 뒤에 있는 마법 부대를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패착이었다.
“다굴에 장사 없는 건 나뿐만이 아니라고.”
전날 벨리앙 백작가의 일이 아주 콕 가슴에 박혀서 이런 거라고는 말 못 하겠지만. 헬리아의 웃음이 짙어졌다. 그리고 그럴수록 제롬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갔다.
“이, 이게 대체……!”
카이슈 백작은 황망한 표정으로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 자신의 군대를 바라보며 신음을 터뜨렸다.
단 한 번이었다. 거대한 파도가 휩쓸고 간 그 자리엔 제국군의 시체가 자리했다. 아니, 그마저도 남아 있다면 다행일 것이다.
카이슈 백작은 제 무릎을 스치는 물을 내려다보며 소름이 돋았다. 그가 있는 지휘부와 강의 거리는 제법 멀었다. 그런데도 물은 이곳까지 덮쳐 왔다. 다행히 대처할 시간이 있었기에 마법으로 방어막을 치거나 물을 얼려 지휘부가 휩쓸리는 것을 막았다. 그나마 이곳까지 도달한 물의 양이 적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만약 지휘부가 강과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 있지 않았다면, 그리고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면 자신들도 저 해일에 휩쓸려 시체가 되었을 것이다.
“고, 공작님……!”
마이슨 남작이 떨리는 음성으로 공작을 불렀다.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여자도, 그리고 그녀의 공격도 모두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분명했다. 다리 위에 있던 병사들과 그 주변에 있던 병사들까지 합해 총 1만의 군대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는 것. 뼈를 얼릴 정도로 추운 겨울 강물이다. 물에 휩쓸린 자가 어찌어찌 살아남았다 해도 장시간 물속에 있으면 결국 동상에 걸려 심장이 멈출 것이다.
‘다시 한번 저 공격이 이곳을 휩쓴다면!’
마이슨 남작의 머리에 끔찍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의 몸이 절로 떨렸다. 그렇다면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배, 백작님, 후퇴하셔야 합니다!”
“후퇴라니!”
카이슈 백작이 노성을 터뜨렸다. 그제야 거대한 해일의 공포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후퇴는 없다!”
“백작님! 한 번의 공격으로 무려 1만의 병사를 잃었습니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습니다!”
“1만이다! 우리에겐 아직 2만의 병력이 더 있다. 저놈들보다 아직 1만의 군사가 더 많단 말이다! 그런데 후퇴라니! 있을 수 없다!”
카이슈 백작의 단호한 말에 마이슨이 고개를 내저었다.
“만약 저 여자가 다시 한번 공격을 한다면 그땐 어쩌시겠습니까? 저희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가 있다! 내가 저 여자가 술수를 부리기 전에 쓰러뜨리겠다!”
카이슈 백작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이대로 후퇴할 수는 없었다.
“아직 플로렌스 공작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백작님이 나선다면 저쪽에선 플로렌스 공작이 움직일 겁니다. 그럼 저 여자는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백작님이 공작과 싸우는 동안 저 여자가 다시 한번 술수를 부린다면 남아 있는 2만의 병력도 무사치 못할 겁니다.”
“……그건…….”
그 말에 카이슈 백작이 제 검 손잡이를 세게 쥐었다. 잔뜩 흥분해 있는 그였지만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마이슨 남작의 말을 이해한 카이슈 백작은 입술을 깨물었다. 승산이 없었다.
“젠장!”
카이슈 백작이 노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당장 그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당장 저 여자가 누군지 알아봐라!”
“예!”
“모두…… 후퇴시켜라!”
카이슈 백작은 홱 하니 몸을 돌렸다. 폭급한 성격의 그로서도 이번 일은 그의 능력 밖이었다. 어마어마한 공격 앞에서 그렇게 제국군은 후퇴를 결정했다.
* * *
뿌우우우우-!
“퇴각하라! 전군 퇴각하라!”
퇴각을 알리는 뿔 고동 소리가 알라스 강 전역에 길게 퍼져 나갔다. 그러자 페르시아 제국군은 일제히 알라스 강변에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살아서 나가는 이는 드물었다. 갑작스런 해일로 인해 반절이 속절없이 죽어나갔으며 뒤이은 왕국군의 습격에 제국군은 맥을 추지 못했다. 살아남은 이는 그나마 다리에서 멀리 떨어진 이들뿐.
거대한 해일이 지나가고 난 자리엔 수백, 수천의 시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나마도 남아 있으니 확인이 가능한 것. 아마 더 멀리까지 시체가 흘러갔을 것이다.
“끝인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헬리아는 눈빛을 가라앉혔다. 황금빛으로 빛을 내던 눈동자가 빛을 잃자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기운이 스르르 사라졌다.
완벽한 왕국군의 승리였다.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1만 대 3만.
그 열세를 단숨에 뒤엎어버렸다. 그러나 헬리아는 왜인지 승리의 기쁨보다 뒷맛의 씁쓸함만을 맛보았다.
“…….”
죽음이라는 것이 이처럼 허무한 것임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적들을 죽인 것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지금 이 강 위에 떠다니는 시체는 아르센 왕국군이었을 게 분명하니까. 제국군이 퇴각하는 모습을 지켜본 헬리아는 말고삐를 당겼다.
“이안.”
“…….”
“이제 돌아가자.”
헬리아가 놀랐을 말의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왕국군 진영으로 돌아갔다. 이안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엘라임과 눈이 마주쳤다. 엘라임은 옅게 미소를 흩뿌리곤 이내 사라졌다. 이안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곧 헬리아의 뒤를 따랐다.
“와아아아아! 공주님 만세!”
“만세! 헬리아 공주님 만세!”
“와아아아!”
헬리아와 이안이 왕국군 진영으로 돌아오자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모두 그녀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왕국군의 사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다그닥다그닥.
헬리아는 그런 기사와 병사들에게 미소를 보내며 지휘부 막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니, 그녀가 그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플로렌스 공작을 비롯해 수뇌부가 모두 모여 그녀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헬리아와 이안은 말에서 내려 그들에게 다가갔다. 헬리아가 씨익 입술을 끌어 올리며 플로렌스 공작을 보았다.
“이만하면 제법 도움이 되었지요?”
도움이 되다마다! 모두의 생각이었다. 그녀 덕분에 힘겨울 뻔한 싸움이 아주 손쉽게 되었다. 어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말할 수 있겠는가!
“공작님! 이럴 게 아니라 적들을 마저 추격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이라면 나머지 제국군의 병력도 처리할 수 있을 겁니다!”
레토나 남작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사기가 오른 상태라면 2만의 제국군도 무섭지 않았다. 기사단장 에론 남작도 이번만큼은 레토나 남작의 의견에 함께했다.
싸움이든 전쟁이든 흐름이 중요하다. 지금 이 흐름이 왕국군에게 있을 때 적들을 상대하는 게 좋았다. 거기다 무엇보다 지금은 한 번에 1만의 병력을 쓸어버린 헬리아 공주가 있지 않은가! 그녀가 다시 한번 공격을 퍼부어준다면 제국군을 전멸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성적인 조엘 남작도 은근히 긍정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나쁘지 않은 생각입니다. 제국군은 1만의 병력을 잃은 것은 물론 지금 사기도 크게 떨어진 상태입니다. 반면 저희 쪽 병력의 손실은 전무합니다.”
모두 제국군의 뒤를 쫓자는 이야기에 플로렌스 공작은 물끄러미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의 헬리아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공작과 눈을 마주쳤다. 공작은 그런 헬리아 공주와 그녀 뒤편에 자리한 이안을 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제국군을 쫓지 않는다.”
“공작님?!”
레토나 남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플로렌스 공작이 헬리아에게서 시선을 떼고 알라스 강에 시선을 두었다.
“지금은 강의 수심이 낮아졌지만 언제 강의 수심이 불어날지 모른다.”
헬리아가 강의 물을 모두 제국군 쪽으로 흘려보낸 덕분에 잠시간 알라스 강의 수심이 낮아졌지만 이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다. 현재 강을 건넌 아르센 왕국군의 수는 몇 천밖에 되지 않는다. 중간에 줄어든 강물이 다시 불어난다면 부서진 다리를 이어야 한다. 몇 천으로 2만의 병력을 상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상황에서 제국군을 쫓을 병력이 부족했다.
“제국군은 아직 우리보다 두 배나 많은 병력을 지니고 있다. 지금이야 혼란스런 상태이나 곧 정신을 차릴 것이다. 어설프게 쫓다가 도리어 제국군에게 역습을 당할 수 있다. 무엇보다 카이슈 백작이 건재하다.”
공작의 말에 그제야 다들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의 승리에 도취되어 아직 그들이 열세임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 아직 한 명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 공작님! 공주님의 힘이라면…….”
플로렌스 공작이 말을 꺼낸 레토나 남작을 보았다. 레토나 남작은 공작의 눈빛에 흠칫 놀랐다. 그러자 레토나 남작의 말이 쏙 들어갔다. 공작은 이내 시선을 돌리고 말을 꺼냈다.
“우선 강의 다리를 건설하고 그 이후에 제국군의 뒤를 쫓는다.”
“예, 알겠습니다!”
공작의 말에 수뇌부가 목소리를 높여 복명했다. 플로렌스 공작은 헬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막사를 준비해 두었소. 편히 쉬시구려.”
“그렇지 않아도 좀 쉬고 싶었는데, 뒷일을 부탁드립니다.”
헬리아가 살짝 입술 끝을 올리곤 막사로 향했다. 그 뒤를 이안이 따랐다.
“이안.”
플로렌스 공작이 이안을 불렀다. 이안은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푹 쉬게 하거라.”
“……예.”
고개를 끄덕인 이안이 헬리아의 뒤를 따랐다. 공작은 물끄러미 그 둘을 바라보다 나직이 입을 열었다.
“서 있는 것도 힘들 것인데,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는 건가.”
“예?”
그때 옆에 있던 조엘 남작이 공작의 말을 듣고 물었다.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우와! 공주님! 완전 대단했습니다!”
숀 일행이 헬리아와 이안에게 다가왔다. 그들도 이번 여정에 헬리아의 호위 기사로 뽑혀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보았다. 그녀의 위용을! 헬리아가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금 알게 된 순간이었다. 숀 일행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헬리아를 보았다. 그들 뒤로 세인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막사는?”
“아, 이곳입니다.”
이안의 말에 숀은 들뜬 마음을 최대한 가라앉히고 그녀를 막사로 안내했다.
“단 한 번에 쓸어버리시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감격했다구요! 와, 저 완전 오늘 잠 못 잘 것 같아요!”
“호들갑은.”
숀의 말에 세인이 제동을 걸었다. 이대로 두면 계속 입을 조잘거릴 것이 분명했다. 세인이 숀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볼일 다 봤으니 가자.”
“켁! 이거 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쉬시지요.”
세인이 헬리아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그러곤 버둥거리는 숀을 잡아채 끌고 가버렸다.
“으악! 야!”
“시끄러워.”
세인이 숀을 끌고 가버리자 남아 있던 휴와 렌스가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헬리아에게 고개를 숙이고 갔다. 숀 일행이 사라지자 헬리아는 그제야 막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헬리아는 차갑게 얼어붙은 몸이 스르르 녹는 것을 느꼈다. 거기다 막사 바닥에는 특별히 천을 대어 냉기가 올라오지 않았고, 그 외에 침대와 테이블도 놓여 있어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헬리아에겐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고 그 순간, 헬리아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이안이 그녀의 몸을 받아 들었다. 한 팔 안에 들어오는 그녀의 작은 몸에 이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헬리아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역시나 과도한 힘의 사용으로 몸에 무리가 간 탓이었다.
“하아…….”
이안은 눈을 감은 채 미동조차 없는 헬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장에서 엘라임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헬리아의 상태를 직감했다. 아니, 그녀가 전장에 나설 때부터 이렇게 될 줄을 미리 예감하고 있었다.
“바보 같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나 무엇이든 하려고 하는 그녀나. 이안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들고 침대로 갔다. 그리고 여전히 깨어날 줄 모르는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으음.”
작게 신음한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마에도 식은땀이 송골송골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안은 주름이 잡힌 그녀의 이마를 꾹 눌렀다. 그리고 혹여 열은 없는지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이안의 손이 제법 찼는지 헬리아의 표정이 스르르 풀어졌다.
이안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녀의 하얗고 고운 이마가 드러났다. 평소라면 이렇게 만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나타나야 할 엘라임이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안은 마음껏 헬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정말이지 못 말리는 공주님이군.”
이안은 이불을 끌어 덮어준 뒤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푹 쉬시길.”
헬리아는 평온한 표정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 * *
“크윽!”
숀이 시큰거리는 제 팔목을 부여잡고 사나운 눈길로 세인을 노려봤다. 세인은 유들유들한 미소로 검을 어깨에 걸치고 그런 숀을 내려다보았다.
“이걸로 끝?”
“누가 끝이래!”
“그럼 다시 덤벼보든가.”
“이익! 이 재수 없는 자식이!”
숀이 다시 검을 곧추 세우고 세인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러곤 빠르게 세인의 옆구리로 검을 찔러 들어갔다.
“재미있군.”
세인은 입가에 웃음을 띤 채로 숀의 검을 자신의 검으로 쳐 내고 비어버린 숀의 가슴팍을 발로 콱 차버렸다.
“커억!”
“무식하게 앞으로만 돌진하기는.”
세인은 혀를 차고 바닥에 철퍼덕 넘어진 숀을 내려다보았다.
숀은 이를 갈았다.
“이 자식아! 가르쳐 줄 거면 제대로 가르쳐 달라고!”
숀이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휴와 렌스가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너무 막강했다. 무려 소드 마스터 아닌가.
“야, 숀, 그만하지그래?”
렌스가 숀의 엉망진창이 된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숀은 헬리아의 신위를 목격하고 자신도 더 강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주인을 모시는 입장에서 최대한 걸림돌은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세인에게 검술을 가르쳐 달라 말했다. 그랬더니 이렇게 아주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너 사심 들어갔지?!”
“사심이 들어갔으면 넌 방금 죽었어.”
“…….”
“정말 죽는 게 뭔지 알아?”
세인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 그러자 숀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아차, 이놈 소드 마스터였지.’
생글거리고 다니는지라 매번 그가 소드 마스터인 걸을 잊어버리는 숀이었다. 그러나 떨리는 몸과 달리 숀은 세인에게 기죽어 보이기 싫어 이를 악물고 버텼다.
세인은 그런 숀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하도 멍청해서 사심도 안 생긴다. 이 멍청아.”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기세가 사라졌다.
“하아, 하아…….”
숀이 숨을 몰아쉬었다. 세인은 그런 숀에게 다가갔다.
“그 멍청한 머리로 검은 어떻게 배웠는지 모르겠군.”
“이게! 말이면 다냐!”
“생각을 하고 좀 살아라.”
“쳇!”
세인이 자신에게 충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영 그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숀이었다. 숀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바닥에 철퍼덕 누워 버렸다.
“그러다 동상 걸린다?”
휴가 그러 숀의 모습에 혀를 찼다.
“지금 더워서 눈이라도 녹일 기세라구.”
숀의 몸에선 정말 땀과 열 때문에 김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으, 당장 따뜻한 침대에서 자고 싶다.”
“아, 그거 말인데, 공주님께서 우리한테도 막사를 따로 내주셨어.”
“우와, 진짜!”
숀이 벌떡 일어나 렌스를 보았다. 고위급 수뇌부나 한 명당 하나씩 막사가 돌아가지만 밑에 사람들은 아니다. 수십 명씩 어울려 자는 게 파다하다. 그런데 헬리아의 배려로 따로 막사를 배정받은 것이다.
“역시 우리 공주님이라니까!”
숀이 쾌재를 불렀다. 정말 꿈에 그리던 개인 막사에서 잠을 청하게 된 것이다.
“으으, 정말 침대에서 자보다니!”
전장에 와서 그런 대접을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던 숀은 아이처럼 좋아했다.
“숀, 너무 좋아하는데 초 쳐서 미안하지만 일 인 일 침대는 어림없다.”
“야, 그 정도는 나도 염치가 있다고!”
숀이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뭐, 그 정도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럴 게 아니고 감사의 인사를…….”
숀이 당장에라도 헬리아의 처소로 가려 하자 세인이 그의 뒷무릎을 툭 쳤다. 그러자 기습에 당한 숀이 철퍼덕 앞으로 고꾸라졌다.
“뭐, 뭐 하는 거야!”
“이곳저곳 민폐 끼치지 말고 있어.”
“내가 언제 민폐를 끼쳤다고.”
숀이 투덜거렸지만 렌스와 휴도 고개를 젓자 마음을 접었다. 물론 구시렁거리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그러다 휴가 주변을 둘러보고 말했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휴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헬리아 공주의 막사로 향했다. 헬리아 공주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곁에서 그것을 지켜봐왔지만 그들로서도 헬리아 공주가 이 정도로 강할 줄은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단 한 사람의 힘으로 전쟁의 판도가 바뀌다니. 모두 그때의 광경을 보고 다시금 헬리아 공주를 생각했다. 정말 어마어마한 사람 밑에 있다는 것을.
“뭐 어쩌겠어. 다시 한번 공주님이 쾅! 하고 해일을 일으켜 주기만 하면 끝 아니겠어?”
숀이 웃으며 말했다.
“그런가? 하기야 그 정도 힘이라면.”
“무리다.”
그때 세인이 검을 검집에 넣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숀과 휴가 그를 보았다.
“무리라니?”
“그런 힘을 계속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럼…….”
렌스는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지 헬리아 공주가 머물고 있는 막사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금 찬찬히 생각해 보니 좀 전에 본 헬리아 공주는 왜인지 움직임이 거의 없었다. 평소의 활달한 그녀가 아니었다. 만약 그것이 힘을 너무 많이 써 움직이지 못할 상태였다면? 그렇다면 이해가 되었다.
“그 힘은 그리 자주 쓸 수 있는 게 아니야. 아마 한동안 휴식을 취해야 할 거다.”
세인도 그때 헬리아의 힘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그것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다른 이들은 잘 인지하지 못했지만 세인은 그 존재를 인지했다. 또렷한 모습을 본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기운을 읽은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놀랐던가.
‘공주가 정령왕의 계약자라니…….’
그러니 이길 수가 없었지. 세인은 다시금 그녀와 적이 되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이 정도 힘을 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헬리아 공주 본신의 힘은 그리 크지 않다. 정령왕이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선 거대한 힘이 필요하다. 헬리아 공주의 힘은 그에 충족되지 못한다.
‘그 금빛 힘 덕분인가?’
전날 한번 보았던 그 금빛이 떠올랐다. 아마 그 힘을 사용한 게 아닐까 싶다.
“하, 하면…….”
숀이 세인을 보았다.
“이번 일은 그저 겁주기용일 뿐이야. 아마 다음은 힘들 거다. 거기다 제국으로 올라가면 강은 대부분 얼어 있어 이번 같은 일을 하기도 힘들어.”
숀과 휴, 렌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세인의 말에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음을 다시 상기할 수 있었다.
“제국군도 이대로 물러서지 않을 거다.”
세인은 카이슈 백작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성격이 급하고 공을 세우는 걸 좋아하는 그가 이번 실패로 물러설 리가 없었다. 분명 어떤 식으로든 다시 아르센 왕국을 공격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숀의 물음에 세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높으신 분들이 정하겠지.”
* * *
콰앙!
“빌어먹을!”
“백작님…….”
알라스 강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평지 위에 세워진 제국군의 지휘부 막사 안.
카이슈 백작이 세게 내려친 테이블은 두 동강이 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마이슨 남작이 전전긍긍하며 바라보았다.
“왕국군 놈들!”
카이슈 백작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 숨을 몰아쉬었다. 단 한 번이었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제국군은 손쓸 틈도 없이 꽁지를 말고 도망쳐야 했다. 전략상 그래야만 한다는 걸 이해는 했지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자존심 높은 카이슈 백작의 마음에 큰 상처를 만들었다.
“마이슨!”
“예, 백작님!”
“대체 그 여자는 누구냐?”
“정보에 의하면 그것이…….”
마이슨 남작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도 이 정보를 접하고 쉬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이슈 백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구냐?”
“아르센 왕국의 헬리아 공주라 합니다.”
“뭐?”
카이슈 백작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다시 반문했다.
“……공주?”
“예.”
“그 여자가 공주란 말이냐? 하!”
마이슨은 차마 그 공주가 이제 겨우 열아홉밖에 안 되었다는 걸 입에 올리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카이슈 백작은 어이가 없었다.
“고작 공주에게 우리 군의 1만이 당한 거란 말이냐! 그게 말이 되는 소리더냐!”
“…….”
마이슨 남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일어나 우리가 이렇게 도망가고 있는 게 아니던가. 무슨 할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잠깐, 헬리아 공주라고? 헬리아?”
카이슈 백작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황도에 어떤 여자의 수배지가 돈 적이 있었다. 그 여자가 아르센의 헬리아 공주라는 것을 떠올렸다. 카이슈 백작이 입꼬리를 비틀며 비릿하게 웃었다.
“마이슨! 제롬 경을 불러와라.”
“예.”
이윽고 카이슈 백작의 명을 받은 마이슨 남작이 제롬을 데려왔다. 제롬은 헬리아 공주의 공격으로 제법 큰 부상을 당했지만 흑마법의 힘으로 이제 거의 다 나은 상태였다. 제롬이 검은 로브를 휘날리며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헬리아 공주.”
제롬의 눈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도대체 뭔가, 그 여자.”
“사로잡을 수 있다면 사로잡아야 하며, 죽일 수밖에 없다면 반드시 죽여야 할 자입니다.”
“전에 수배지가 돈 적이 있었지. 그것과 관련된 일인가?”
제롬은 굳이 입을 열지 않았다. 굳이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카이슈 백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언가 사정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라몬 공작의 사람인 제롬을 강하게 추궁해 물어볼 수도 없었다.
‘헬리아 공주라…….’
황성에서 관심을 보인 여자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 여자만 어찌 잡거나 죽인다면 이번의 수모를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으리라. 백작의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이렇게 된 이상 공주를 죽이거나 붙잡는다. 그 공주만 잡는다면, 아니, 죽인다면 그 공으로 자신은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소드 마스터이나 폭급한 성격 탓에 매번 중앙 정계 진출에 실패한 카이슈 백작이었다. 그래서 이번 전쟁에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알겠다. 한데 하나 묻지.”
“말하십시오.”
“그 공격, 다시 가능한 건가?”
아직도 카이슈 백작은 그 공격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그 거대한 해일이 다시금 자신들을 덮친다면 이번에도 승산이 없을 것이다.
제롬은 카이슈 백작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결코 여러 번 사용할 수 없을 겁니다.”
헬리아 공주의 공격 이후 제롬은 곰곰이 그 일을 생각해 보았다. 그런 힘을 과연 여러 번 사용할 수 있을까? 제롬은 헬리아의 힘이 한정되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이번 패착은 그녀의 힘이 물에 더욱 강해진다는 걸 몰랐던 것뿐이다.
“또한 물이 많은 곳이 아니라면 크게 염려치 않으셔도 될 겁니다.”
다행히 제국의 북부는 대부분 산악 지대인데다가 큰 강은 알라스 강이 유일했다. 거기다 작은 강은 대부분 얼어 있어 그렇게 큰 해일을 만들지는 못 할 것이다.
“좋다.”
카이슈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으리라. 그런 공격이 더 이상 없을 거란 걸 안 것으로 그들의 승산은 올라간다.
“마이슨 남작, 병력을 재정비하라! 내 반드시 그년의 목을 따버리겠다!”
카이슈 백작이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마이슨 남작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배, 백작님.”
“뭐냐?”
“현재 병사들의 보급이 충분치가 않습니다. 대부분 강물에 휩쓸린 탓에…….”
카이슈 백작의 눈매가 찡그려졌다.
“그거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뭘 한 게야!”
“소, 송구하옵니다.”
“백작님.”
그때 제롬이 입술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보급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하지 말라니?”
“이곳은 제국이 아닙니까?”
제롬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보급은 물론 병력까지 충원할 수 있을 겁니다.”
“방법이 있는가?”
카이슈 백작의 물음에 제롬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마침 좋은 곳이 있습니다.”
* * *
캄캄하고 어두운 곳이었다. 헬리아는 그곳에서 홀로 서 있었다.
쏴아아아-
새카만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차가운 빗줄기에 헬리아는 몸을 웅크렸다.
‘여긴 어디지?’
바닥도 천장도 주위도 온통 새카만 곳이었다. 마치 엑시온의 어둠에 갇힐 때와 같았다.
‘꿈인가?’
헬리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공간의 구분을 느끼진 못했지만 바닥을 딛고 걸을 수 있었다. 그렇게 차가운 빗줄기 속을 얼마나 걸었을까. 헬리아의 눈에 저 멀리 작은 촛불 같은 빛이 들어왔다.
‘빛?’
그것은 아주 작아서 하마터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헬리아는 그것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불빛? 아니…….’
작았던 불빛은 가까이 다가가자 점점 커지더니 이내 자신을 향했다. 헬리아는 그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건…….
위이이잉-
“이제 슬슬 깨어날 때가 되었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시 위이잉- 소리가 들려왔다.
“몸의 마력은 전부 다 찼어.”
“그럼 왜 깨어나질 않는 거지?”
“흐음, 뭐가 잘못되었나? 아하! 역시 공주님의 잠은 왕자님의…….”
탁!
“켁!”
헬리아가 손으로 제 귓가를 날아다니는 모기 한 마리를 잡아챘다.
“……모기가 아니고 유니?”
“드디어 깨어났네.”
헬리아는 제 귓가를 날아다닌 것이 유니임을 알아차리고 그를 잡은 손을 놓았다. 그러자 유니는 다시금 날갯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한데 날갯짓 소리가 모기가 윙윙거리는 것과 비슷하게 들려왔다. 헬리아는 눈썹을 와락 구겼다.
‘차라리 변태가 낫겠어.’
“그냥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어? 그래도 되나?”
“차라리 그게 낫겠어.”
퍼엉!
“호호호! 저도 이 모습이 더 좋지요.”
유니는…… 알몸이었다. 헬리아는 두 눈이 썩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다행히 옆에 있던 이안이 서둘러 그에게 천을 건네어 녹아내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있었다. 헬리아는 열린 천 사이로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눈을 찌푸렸다.
“여긴, 아, 알라스 강인가.”
헬리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두어 번 올렸다 내렸다. 그러자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잤지?”
“이틀 내리 주무셨습니다.”
이안의 말에 헬리아는 눈을 좁혔다. 이틀이라. 참으로 많이 자기도 했다.
“상황은?”
“현재 강에 다리를 놓고 있습니다. 오늘 중으로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이틀 동안 아르센 왕국군은 알라스 강 사이에 다리를 놓고 있었다. 방해가 없는데다가 마법사도 있는 터라 다리를 놓는 것은 수월했다.
“제국군은?”
“호호호, 현재 북상 중입니다. 하지만 아마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그 문제 때문에 결국 멀리 가진 못할 겁니다.”
유니의 말에 헬리아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럼 보급을 하기 위해 움직이겠군.”
헬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삐거덕거렸지만 다행히 뻐근한 것 외엔 몸에 이상이 없었다. 심장도 다행히 큰 무리가 없었다. 드래곤의 힘을 사용했지만 알라스 강의 물을 끌어다 이용한 터라 그리 큰 부담은 없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대로입니다.”
“…….”
헬리아는 유니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다 이내 열었다.
“시간이 없네. 얼른 움직여야겠어.”
그녀의 눈빛이 짙어졌다.
* * *
“별동대?”
아르센 왕국의 막사 안.
막사 안에는 왕국군의 수뇌부가 자리해 있었다. 상석에 앉은 플로렌스 공작은 헬리아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예, 별동대요.”
“하나 굳이 별동대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조엘 남작이 물었다. 헬리아 공주의 존재로 현재 병사들의 사기를 올림은 물론 적들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헬리아 공주가 별동대를 만들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맞습니다! 본진에 있는 것이 더 도움이 됩니다. 그 마법도…….”
레토나 남작의 말에 헬리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다음은 없습니다.”
“예?”
헬리아 공주의 말에 레토나 남작은 물론 수뇌부들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헬리아는 그들에게 똑똑히 알려주었다.
“여러 조건이 필요한 일입니다. 물이 가득해야 하며 한번 사용한 뒤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국 안으로 들어가면 알라스 강보다 더 큰 강은 없습니다. 거기다 대부분 얼어 있죠.”
“그, 그런…….”
“그리고 그것을 곧 저들도 알게 될 겁니다.”
헬리아 공주의 말에 수뇌부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맞네.”
“공작님도 알고 계셨습니까?”
조엘 남작의 물음에 플로렌스 공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헬리아를 보았다. 헬리아가 힘을 쓰고 돌아온 그날, 공작은 그녀의 미약하게 떨리는 몸과 불안정한 몸 상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다 불안한 듯한 이안의 얼굴을 통해서 확신했다.
그 능력이 자주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인지했다. 그의 예상대로 헬리아 공주는 이후 이틀 동안 거의 막사에서 나오지 못했다.
“허, 그런 일이…….”
조엘 남작은 물론 다른 이들도 허탈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날의 힘만 있다면 제국군 따윈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사용할 수 없다니.
“언제부터 그렇게 나약해진 건가?”
플로렌스 공작이 그런 기사들을 보며 호통을 쳤다.
“기사라는 자들이 레이디를 앞에 두고 뒤에서 구경만 할 참인가? 다 해결해 줄 때까지?”
플로렌스 공작의 말에 다들 창피함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제야 자신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어찌할 생각이오?”
플로렌스 공작은 다시금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헬리아는 테이블에 놓인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제국군은 현재 북상 중입니다.”
카이슈 백작이 이끄는 제국군은 현재 벨리앙 백작가 근처까지 올라갔다.
“그곳에는 벨리앙 백작가가 있습니다.”
“하면 벨리앙 백작가에서 물품과 병력을 조달받을 수 있겠군.”
플로렌스 공작의 말에 헬리아는 작게 웃음 지었다. 그 모습에 플로렌슨 공작은 의문이 들어 물었다.
“무슨 생각이 있는 게요?”
“오히려 잘된 일입니다.”
“잘된 일이라니?”
“마침 은혜를 갚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