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42)

제3장 귀환

아르센 왕국의 회의실 안.

무거운 적막감이 감돌고 있었다. 테이블의 상석에 자리한 아르센 왕국의 국왕 빈센트를 필두로, 그의 오른쪽에는 군부를 맡고 있는 플로렌스 공작이, 왼쪽에는 재무를 담당하고 있는 빈센트의 장인이자 세드릭의 외할아버지인 하이든 후작이 자리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보부를 담당하고 있는 메르센 백작과 이례적으로 마탑에서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던 베로니카 공작도 함께했다. 그 외 아르센 왕국의 수뇌부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이렇게 모든 중신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아돌프 후작의 처리에 관한 문제를 두고 회의를 한 이후 처음이었다. 그만큼 이만한 인원이 모였다는 것은 매우 중차대한 사건이 벌어졌음을 의미했다.

가장 먼저 메르센 백작이 입을 열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가 대륙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메르센 백작의 말 한마디에 중신들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지어졌다. 이미 각자의 정보원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접했지만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것을 확인받는 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페르시아 제국의 대륙 전쟁 선포! 즉, 페르시아 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아르센 왕국도 전쟁을 피해갈 수 없음을 의미했다.

메르센 백작은 어느 정도 귀족들이 진정되는 듯하자 다시 말을 꺼냈다.

“현재 페르시아 제국은 황제의 대륙 전쟁 선포 이후 각 국경 지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습니다.”

“국경은 어떻게 되었소?”

빈센트가 플로렌스 공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현재 1만의 병사를 국경에 주둔시켜 두었습니다.”

“충분하겠소?”

“결코 국경이 뚫릴 일은 없을 것입니다.”

플로렌스 공작은 자신감을 보였다. 소드 마스터인 공작은 그 스스로의 무력이 강할 뿐만 아니라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영주기도 했다. 아마 수도에서 움직이기 전까지 국경을 내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적들의 움직임은?”

다시 빈센트가 메르센 백작을 응시했다. 메르센 백작은 안경을 치켜 올리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큰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하기야 이 같은 겨울에 전쟁이라니…….”

베로니카 공작이 주름진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원래라면 이런 자리에 오지 않고 마탑에서 연구에만 몰두할 그였지만 상황이 그를 이 자리에 오게 만들었다. 정치에선 손을 놓은 그였지만 그를 따르는 수백의 마법사 무리가 존재했다. 응당 이번 전쟁에서 마법사를 이끌기 위해선 그의 존재가 필요했다.

“한데 정말 저들이 쳐들어오겠습니까?”

한 중신이 근원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몇 년간 제국은 기근과 가뭄으로 쌓아둔 물자가 없는데다가 백성들은 수탈에 몸살을 앓았습니다. 거기다가 황태자와 황제 간의 세력 싸움으로 세력이 하나로 결집되지 못한 상태 아닙니까?”

통상적으로 겨울에는 군대를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다. 겨울에는 물자를 생산해 낼 수 없는데다가 보급을 유지하기 어려운 탓이다. 거기다 제국은 원정을 떠나야 한다. 가뭄과 기근으로 몸살을 앓았던 제국이 전쟁을 제대로 준비했는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인데 제국이 진정 전쟁을 벌이겠습니까? 혹 힘을 과시하려는 속셈이 아닐까요?”

그의 말에 귀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신의 말처럼 제국의 선전포고는 매우 무모했다. 거기다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카사스 2세는 젊은 시절부터 대륙 정벌에 대한 야욕이 큰 인물이다. 팔십이 넘어 이 같은 일을 저지른 것은 분명 노망이 들어서가 아닐까.

“거기다 아직까지 움직이지 않은 걸로 봐서는…….”

그러나 메르센 백작이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

“보급 물자라면 이미 제국은 충분히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메르센 백작은 그간 제국의 정세를 유심히 살펴왔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제국으로 수입되는 철과 곡식이 그전에 비해 배는 뛰었다.

“제국은 나라의 백성이 죽든 말든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전쟁을 치를 준비를 철저히 해두었습니다.”

그 결과 최근 제국의 난민 숫자가 불어난 것이다.

메르센 백작의 말에 대전 안은 침묵이 감돌았다. 그제야 확실히 전쟁의 기운을 느낀 탓이다. 그러나 메르센 백작의 말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거기다 보급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플로렌스 공작의 물음에 메르센 백작이 눈을 좁히며 이야기를 꺼냈다.

“아시다시피 얼마 전 황제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각국의 귀족과 왕족들이 제국을 방문했습니다. 하나 지금껏 누구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합니다.”

“그런……!”

메르센 백작의 말에 귀족들이 침음성을 흘렀다. 메르센 백작이 말을 이었다.

“제국은 각국의 귀족과 왕족들을 억류하고 그들의 본국에 몸값을 요구했습니다.”

“허허!”

“이는 몸값으로 보급을 충당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그렇다 하여 몸값을 주지 않는 곳도 드물 것이다. 애초에 제국의 황제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대부분 고위 귀족과 왕족들이 참석했다. 그들은 당연히 일반적인 인질의 가치와 확연히 달랐다. 응당 각 왕국은 그들의 몸값을 지불할 터이다. 그리고 제국은 그 몸값으로 이번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메울 생각이고. 모두들 탄식을 흘렸다.

“한데 그럼 공주님은 어찌 되셨는가?”

하이든 후작이 메르센 백작을 향해 물었다. 하이든 후작의 물음에 다른 귀족들도 귀를 세워 백작의 답을 기다렸다. 헬리아 공주 또한 제국의 사신으로 가지 않았는가. 한데 그녀 또한 아직까지 왕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미 각국에 인질에 대한 몸값을 요구하는 협박문이 보내졌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우리 왕국에는 소식이 없지 않는가?”

“…….”

하이든 후작의 말에 빈센트와 메르센 백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메르센 백작은 힐끔 빈센트를 바라보았지만 빈센트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다. 메르센 백작이 쉽게 입을 열지 못하자 하이든 후작이 집요하게 물었다.

“공주는 이 나라의 후계자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가!”

“……그건…….”

“공주는 이미 제국을 탈출해 아르센 왕국으로 돌아오고 있는 중이오.”

그 순간, 빈센트의 말이 들려왔다. 하이든 후작이 메르센 백작에게서 시선을 떼고 국왕을 보았다. 하이든 후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왠지 미심쩍은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나 빈센트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후작을 응시했다. 후작은 그에 한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의심의 끈은 오히려 더 탄탄해졌다.

“그러하면 참으로 다행이지요. 하면 곧 돌아오겠군요.”

“물론이오.”

메르센 백작은 상황을 파악하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

“현재 라비안 왕국에서 동맹을 요청해 왔습니다. 곧 사신단을 파견할 것이라 합니다.”

“라비안 왕국이라…….”

“좀 껄끄럽지 않소?”

4년 전 아돌프 후작의 꾐에 빠져 그때 당시 왕세자였던 세드릭의 사고를 모두 라비안 왕국에게 떠넘긴 바가 있었다. 그 일로 아르센 왕국과 라비안 왕국은 사이가 좋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라비안 왕국에서 청해 온 동맹이 아니오?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플로렌스 공작의 말에 다들 어느 정도 수긍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우리 쪽에서 요청한 것이라면 몰라도 라비안 왕국에서 먼저 요청해 왔다면 상황이 다르다. 서로 화해 차원에서라도 동맹을 맺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르센 왕국에서도 페르시아 제국을 홀로 상대하는 것은 부담스런 면이 있었다. 아직 제국과 거리가 먼 레스톤 왕국이나 에비스 왕국, 토론 왕국 등은 상황을 주시하고 있기 때문에 라비안 왕국이라면 적절한 상대였다.

“또한 타나 성국에서 신관을 파견하겠다는 공문이 왔습니다.”

“타나 성국이?”

“예, 페르시아 제국에서 흑마법사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합니다. 이는 성국으로서 좌시할 수 없다 판단한 바, 이번 전쟁에 신관을 파견한다고 합니다.”

“오호, 타나 성국이.”

언제나 다른 나라의 일에 제삼자의 태도를 유지해 온 성국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들 역시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상태였다. 거기다 흑마법사의 준동이 확인된 이상 성국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플로렌스 공작.”

“예, 전하.”

“이번 전쟁의 총사령관으로 공작을 임명하겠소.”

“망극하옵니다.”

애초에 군부는 플로렌스 공작이 꽉 잡고 있었기에 어느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빈센트는 그간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베로니카 공작을 향해 살짝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베로니카 공작께서는 이번 흑마법사에 대항할 마법 부대를 맡아주십시오.”

“허허, 이 늙은이를 아주 부려먹는군.”

과거 국왕의 스승이었던 베로니카 공작만이 국왕 앞에서 반존대를 사용할 수 있었다. 베로니카 공작은 귀찮은 일을 맡았다는 기색을 보였지만 거절하진 않았다. 그도 이번 사태가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내 소임을 다하겠소.”

빈센트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귀족들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페르시아 제국에서 전쟁을 선포했소. 하지만 아르센 왕국은 과거에도 그랬듯,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듯 이 아르센 위에 존재할 것이오.”

“망극하옵니다!”

귀족 모두 고개를 숙이며 회의를 파했다. 그 순간 하이든 후작만이 빈센트를 바라볼 뿐이었다.

* * *

“전쟁이라니, 도대체 제국의 황제가 노망이 난 게야.”

회의가 끝난 뒤 빈센트와 베로니카 공작, 플로렌스 공작이 한자리에 앉아 차를 마셨다. 베로니카 공작은 세바스찬이 따라준 차를 마시지도 않고 소리를 높였다.

베로니카 공작은 과거 카사스 2세를 직접 본 일이 있었다. 과거에도 대륙 통일에 대한 야망이 큰 자였다. 그런데 팔십이 넘어서도 그 같은 일을 저지른 것이다.

“하하, 차라리 노망이라도 났으면 좋겠지요.”

빈센트는 옅게 입꼬리를 올리며 차를 입에 대었다. 그 말에 베로니카 공작과 플로렌스 공작의 표정이 변했다. 베로니카 공작은 짜증스럽다는 듯 조금 식은 차를 단숨에 마셔 버렸다.

“그래, 제정신이니 문제지.”

“한데 그건 언제 안 건가?”

플로렌스 공작이 차를 입에 대지 않고 빈센트에게 물었다. 빈센트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반문했다.

“뭘 말인가?”

“공주님 말일세.”

“내게도 알리지 않고.”

베로니카 공작도 합세했다.

“헬리아의 소식을 들었으면 잽싸게 내게도 알려줘야 하지 않는가? 허허, 역시 헬리아네. 제국에서 탈출하다니. 분명 제국에서도 조치를 취했을 터인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공작을 바라본 빈센트는 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세바스찬이 다시 잔에 차를 채워 주었다.

“하면 언제 돌아오는가?”

플로렌스 공작이 물었다. 그 또한 헬리아 공주의 안위가 걱정되었지만 그보다도 그녀와 함께 간 자신의 아들, 이안이 걱정이 되어 쉬이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겉으론 내색하지 않았지만 황제가 전쟁을 선포하고 얼마나 노심초사했던가.

그때 빈센트가 웃으며 말했다.

“뻥이네.”

“……예?”

“무, 뭐라?”

빈센트의 말에 플로렌스 공작과 베로니카 공작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빈센트의 여유로운 웃음이 조금 옅어졌지만 이내 세바스찬이 자신을 향해 웃음을 짓는 걸 보고 다시 힘을 얻었다.

“헬리아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말일세.”

“그, 그게 무슨 말인가!”

베로니카 공작이 놀라 소리를 높였다. 놀란 것은 플로렌스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럼 공주님은 어찌 된 건가?”

“제국 황실에 붙잡혀 있지 않은 것만은 확인했네.”

빈센트의 신색은 여전했다. 믿고 있기 때문이다. 헬리아라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그래서 빈센트는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이게 대체…….”

“…….”

플로렌스 공작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공주의 실종에 놀란 것은 물론 좀 전의 회의에서 하이든 후작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후작이 냄새를 맡았군.”

“…….”

“후작이 세드릭의 폐위에 힘을 실어주었다 하나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어. 그런데 헬리아 공주가 사라진 걸 알면 어찌 행동할지…….”

빈센트는 플로렌스 공작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그도 후작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헬리아 공주의 실종을 공론화하여 후계자가 공석이라는 것에 힘을 싣게 만드는 것. 최종적으로는 다음 후계자, 즉 세드릭을 내세우려는 의도일 것이다. 하지만 빈센트는 헬리아가 돌아온다는 말로 후작의 의도를 저지시켰다. 다만 정말로 헬리아가 돌아와야 이 일이 쉽게 지나갈 터였다.

“정말 돌아오겠나?”

“물론이네.”

빈센트는 플로렌스 공작의 질문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말했다.

“아버지가 딸을 믿는 건 당연하지 않나?”

“……후우.”

플로렌스 공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상황은 이안조차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었다. 이미 큰아이를 잃어본 공작으로서는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빈센트가 그런 그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믿게.”

“…….”

“내가 헬리아를 믿듯, 자네도 그런 나를 믿어주게. 헬리아는 반드시 돌아올 거야.”

“……자네.”

빈센트는 씨익 웃었다. 그러다 순간 눈을 살짝 찡그렸다.

“무슨 일 있는가?”

“아, 아니네. 차를 너무 많이 마셨나?”

“쯧쯧, 그러게 뭘 그리 마시누? 혹 걱정되는 게 아니냐?”

베로니카 공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빈센트의 속내를 읽어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하하, 스승님, 전 헬리아를 믿습니다.”

빈센트는 웃으며 그들 몰래 지그시 심장 부근을 눌렀다. 그 모습을 세바스찬이 눈을 좁히며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을 알아챈 빈센트는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때였다.

“전하!”

시종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노엘, 이것도 집어넣어.”

“이것도.”

“저것도.”

세드릭은 자신의 방에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상자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커다란 상자에는 순식간에 금은보화가 가득 찼다. 하지만 세드릭은 뭔가 성에 차지 않는 듯 눈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얼마나 될까?”

“왕자님…….”

“역시 안 되겠어. 재무부에서 다음 달, 아니, 올해 내 앞으로 배정된 돈을 모두 가져와.”

“왕자님.”

노엘은 그런 세드릭을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세드릭은 노엘의 눈빛에 입술을 깨물었다.

“알아.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

자신을 위해 그 위험한 제국으로 간 헬리아다. 제국의 인질이 되어 제대로 밥은 먹는 건지 아니면 혹여 핍박받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제국과 전쟁이라니. 몸값을 지불하지 않으면 죽일지도 모른다. 세드릭은 제 물건을 모조리 팔아서라도 자신이 내고 싶었다. 그건 자신의 몸값이었으니까. 세드릭이 정말 재무부에 가서 내탕금을 미리 받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하자 노엘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왕자님, 이러시지 않으셔도 공주님은 무사할 겁니다.”

세드릭의 모습이 보기 안쓰러운 노엘은 그를 말렸다. 세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하고 싶어. 내가.”

“…….”

세드릭의 단호한 눈빛에 노엘은 더는 그를 말릴 수 없었다. 그렇게 굳은 눈빛을 볼 때마다 헬리아 공주가 문뜩 떠올랐다. 그녀 또한 이렇게 세드릭을 대신해서 제국으로 갔음을 알기에 노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 돈도 보태겠습니다.”

노엘의 말에 세드릭의 눈이 커졌다. 노엘은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면 저를 구해 주신 은혜를 갚지 못했습니다. 보답하게 해주십시오.”

이미 노엘은 자신의 존재로 헬리아에게 은혜를 갚았다. 세드릭의 마음을 덜어주기 위함이라 말한다면 거부할 것임을 알기에 노엘은 그리 말했다.

“얼른얼른 갚아둬. 안 그러면 이자가 어마어마하게 불 테니까.”

“네.”

‘안 그래도 너무 이자가 불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노엘은 자신의 목숨과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한 세드릭을 구해 준 헬리아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았다.

“자, 얼른 가자.”

그때였다.

“왕자님, 하이든 후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외할아버지가?”

세드릭은 갑자기 방문한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평소라면 며칠 전에 방문을 알려왔을 터인데, 너무 급작스러웠다.

“웬일이시지?”

“오늘 회의 때문에 올라오셨다가 방문하신 게 아닐까요?”

“그거라면 좋겠지만.”

세드릭은 눈을 좁혔다.

“드시라고 해.”

세드릭의 방 안으로 한 노인이 걸어 들어왔다. 꼿꼿이 선 허리와 단호하게 다물린 입술, 누가 봐도 한 고집하는 성격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하이든 후작이다. 일전에 세드릭을 폐위하면서 헬리아의 손을 들어준 적이 있었다.

“어서 오세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네, 이리로 앉으세요.”

목발을 쥔 세드릭이 걸음을 옮기며 소파에 몸을 뉘였다. 이제는 가까운 곳은 목발에 의지하지 않을 정도로 많이 호전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본 하이든 후작이 눈을 휘며 말했다.

“이제 곧잘 걸으시는군요.”

“뭘요, 아직 더 연습해야 돼요.”

“이 정도라면 곧 목발이 없어도 되겠습니다.”

하이든 후작의 말에 무언가 느낌이 이상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곧 목발 없이도 걸을 수 있게 되기에 크게 개의치 않기로 했다.

“한데 어쩐 일이세요?”

“오늘 회의가 있어서 들렀다 외손자 얼굴이라도 볼 겸 왔습니다. 하온데 왕자님께선 이 늙은이가 반갑지 않으신가 봅니다?”

“아, 그런 건 아니에요.”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네.”

세드릭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하지만 최대한 힘을 냈다.

“그래도 돈만 지불하면 금방 풀려나겠죠?”

“풀려날 수 있다면 말이지요.”

하이든 후작의 말에 세드릭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제야 뭔가 이상한 낌새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아십니까? 이제 이 왕궁에 있는 직계 왕족이라고는 헬리아 공주님과 왕자님뿐이라는 것을.”

“……무슨 뜻인지 말씀해 주시죠.”

세드릭의 어조가 딱딱해졌다. 하이든 후작은 그런 자신의 외손주를 바라보았다.

“따로 제국에 사람을 보내 상황을 알아보았습니다.”

“…….”

“제국에 온통 공주의 초상화가 널려 있더군요.”

“……초상화라니? 대체 왜?”

“자세한 이유는 이 늙은이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제국에서 공주의 뒤를 쫓고 있더군요.”

“헤, 헬리아는! 헬리아는 어떻게 된 겁니까!”

제국에서 그녀를 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세드릭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이든 후작은 그런 세드릭의 반응에도 묵묵히 시녀가 내온 찻잔을 입에 대었다.

“외할아버지!”

“저도 모릅니다.”

“예?”

“그 이후 소식은 알 수 없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그, 그런…….”

세드릭은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다른 생각도 들었다.

“혹 왕국으로 돌아오는 중이 아닐까요?”

“제국의 모든 국경이 봉쇄됐습니다. 무엇보다 탈출했다면 국경 수비대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을 수야 없지요.”

“마, 말도 안 돼.”

세드릭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헬리아의 실종. 세드릭은 입술을 세게 물었다. 자신 때문이다. 자신 때문에 헬리아가. 결국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의 존재는 다른 이를 불행하게 한다. 세드릭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하지만 하이든 후작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런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무슨 말입니까?”

“아르센 왕국엔 현재 국왕 전하를 제외하면 단 두 명의 왕족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두 명 중 한 명은 실종되었죠.”

“무얼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하이든 후작의 말속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세드릭의 얼굴은 싸늘하게 변했다.

“이제 후계자는 왕자님입니다.”

“후작님!”

세드릭의 입에서 외할아버지가 아닌 작위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하이든 후작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틀린 말입니까?”

“헬리아는,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건 없습니다!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그러니 생각해 두시라는 겁니다.”

“저는 결코 그리하진 않을 겁니다.”

“이제 곧 다리도 나을 테고 누구도 왕자님이 다음 후계자라는 사실에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왕세자는 세드릭이었다. 헬리아가 사라진다면 세드릭이 왕세자가 되는 것은 당연했다.

“저는 폐위되었습니다. 후작님도 동의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이제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후작님!”

“공주에 대한 마음 때문에 그러십니까? 이 늙은이는 단지 뒷일을 생각하시라는 겁니다.”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도 일어나지도 않을 겁니다.”

세드릭의 단호한 말에 하이든 후작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고집 그만 부리시지요. 현실을 직시하셔야 합니다.”

“현실을 보지 못하시는 건 후작님입니다!”

“왕자님!”

“헬리아는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저는 다른 생각 따윈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이든 후작의 표정은 너무나도 완고했다. 세드릭은 입술을 깨물었다.

“후작님은 어릴 때부터 신의가 있는 사람이 되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이제까지 가슴속에 담고 살았습니다.”

“일의 경중이 다릅니다.”

“아뇨, 저는 절 믿어준 헬리아를 결코 배신하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겁니다.”

마치 거울을 통해 자신을 보는 듯한 기분에 하이든 후작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세드릭의 외모는 빈센트를 가장 많이 닮았지만 그의 성격은 자신을 가장 많이 달았다. 그렇기에 하이든 후작은 세드릭을 아끼고 귀여워했다.

세드릭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터벅터벅 난로 쪽으로 가더니 난로 위에 걸린 검을 빼 들었다.

차앙!

“후작님이 그리 생각하신 것도 다 제 다리 때문이죠? 제 다리가 나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왕자님!”

“애초에 미련을 끊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이런 일도 없었겠죠. 후작님께 이런 소리도 듣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왕자님! 대체 무슨!”

“제 다리를 스스로 끊어버릴 겁니다.”

“세드릭!”

너무 놀라 하이든 후작이 세드릭의 이름을 불렀다. 세드릭은 처연하게 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저는 신의가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 순간이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누군가 세드릭의 손에서 검을 빼앗았다. 허름한 옷차림을 한 괴인이었다. 로브를 짙게 눌러쓴 탓에 얼굴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순간 세드릭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조금만 늦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 괴인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그러나 세드릭의 눈에선 도리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질타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그, 아니, 그녀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헬…… 리아?”

“그래, 이 멍청아!”

헬리아가 로브를 거칠게 벗으며 세드릭에게서 빼앗은 검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로브를 벗자 보이는 것은 그녀의 환한 금발과 금안이었다. 그 모습에 하이든 후작도 놀라 눈이 커졌다. 헬리아 공주였다!

“저, 정말…….”

세드릭은 기쁨에 눈물을 흘러내렸다. 헬리아는 그런 그를 짜증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바로 세드릭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더니 제 이마에 쾅 하고 박아버렸다.

“으윽!”

어찌나 세게 박았는지 세드릭은 뒤로 힘없이 벌러덩 주저앉았다.

“헤, 헬리아?”

“이제 좀 정신이 들어?”

헬리아는 붉어진 이마를 쓱쓱 손으로 쓸었다. 물론 그녀의 피부가 이렇게 붉어질 정도라면 세드릭은 아마 눈물이 찔끔 날 정도의 아픔을 느꼈으리라.

“대체…….”

세드릭은 도무지 뭐가 뭔지 몰랐다. 헬리아는 그런 세드릭의 표정에 한숨을 푹 내쉬곤 넘어진 세드릭을 일으켰다.

“계속 그렇게 앉아 있을 거야?”

“……헬리아.”

“일어서.”

“정말 헬리아구나.”

세드릭은 헬리아의 손을 잡으면서 피식 웃었다. 물론 눈물이 날 정도로 아프긴 했지만 그녀를 본 기쁨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정말 아프다.’

아마 이마가 붉게 변했으리라. 그렇지만 이 아픔이 오히려 그녀가 진정 이곳에 있음을 인지시켜 주었다. 세드릭은 옅게 웃으며 헬리아의 손을 꼭 잡았다. 따뜻했다. 작고 희지만 굳은살이 박이고 꺼끌꺼끌한 손. 결코 일반적인 왕족에게서는 볼 수 없는, 오로지 헬리아에게만 있는 그녀의 손이었다.

“정말, 정말…….”

“이 멍청이가.”

“큭, 여전하네.”

헬리아는 머리를 짚었다. 정말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세드릭은 스스로 제 다리를 절단했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정말 진심이었다. 진심으로 자신의 다리를 자를 생각을 한 것이다. 헬리아가 다시 세드릭을 흘겨보자 세드릭이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머리를 보호했다.

“또?”

“몇 번이고 맞아도 싸. 제 손으로 제 발을 자르려고?”

“…….”

세드릭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 고집불통!’

헬리아는 눈을 좁혔다. 정말이지 저 똥고집은 누굴 닮은 거야? 아마 다른 사람이 보았더라면 헬리아도 똑같다는, 아니, 더하다는 말을 했겠지만 다행히 이곳엔 그 말을 할 이가 없었다.

“돌아와서 다행이야. 정말.”

세드릭은 그저 헬리아가 돌아온 것을 기뻐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자신을 대신해 그 험한 제국으로 간 헬리아다. 그렇기에 더욱 걱정이 되었고 미안한 마음이 컸다.

“실종된 줄 알았어.”

“실종, 누가?”

세드릭의 시선이 하이든 후작을 향했다.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내 눈꼬리가 휘었다.

“아, 오랜만이네요, 후작님.”

“무사해서 다행이오, 공주.”

“제가 너무 급하게 오는 바람에 여기저기 알리지 못하고 와버렸네요. 후작님도 깜짝 놀라셨죠?”

“정말 깜짝 놀랐소.”

하이든 후작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헬리아를 보았다. 헬리아는 그런 하이든 후작을 보며 작게 눈을 좁혔다.

“한데 실종이라니, 너무하네요. 아직 며칠이 지났다고 실종이라니.”

“다들 걱정이 많았소.”

하이든 후작은 담담히 웃었다.

“그리 걱정만 한 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오?”

“외할아버지!”

세드릭이 하이든 후작의 말을 막았다. 하지만 후작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당당히 말했다.

“다음 후계자에 대해 생각해 보고 있었소.”

“꽤 빠르시네요. 이렇게 눈앞에 절 두시고도.”

“지금은 다르지 않소? 방금 전만 해도 공주는 실종 상태였으니까.”

“그래서 다음 후계를 생각하신 건가요?”

“현 후계자가 사라졌다면 다음 일도 생각하는 것이 이 나라의 충신 된 도리가 아니겠소?”

“외할아버지!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세드릭의 말에 하이든 후작은 어깨를 으쓱였다.

“만약 이 같은 일이 또 일어난다면 난 네게 또 이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외할아버지!”

세드릭이 무슨 말인가 더 하려고 할 때 헬리아가 그를 막았다.

“맞는 말이야.”

“헬리아!”

“후계자가 사라졌다면 다음 후계를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앞일은 모르는 거니까, 예상치 못한 변수도 있는 거야.”

“헬리아…….”

“난 다행이라고 생각해. 내가 없어져도 세드릭, 오빠가 있을 거 아니야?”

“…….”

오빠라는 말을 듣고 싶었지만 이런 식으로 듣고 싶진 않았다. 헬리아의 말에 세드릭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더욱 결심했다. 이렇게 자신을 생각해 주는 헬리아를 결코 배신하지 않겠다며. 오빠라면 여동생을 힘들게 해서는 안 되지 않겠나.

세드릭이 굳은 눈으로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결코 그런 일은 없어.”

“만일에 대비하는 거지. 권력도 권력을 휘두를 사람이 있어야 부리지, 사람이 없으면 권력도 없어지게 마련이야.”

“……헬리아.”

헬리아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세드릭의 이마를 제 이마에 부딪쳤다. 세드릭은 순간 놀랐지만 헬리아는 가볍게 이마를 맞댔다.

“제발 걱정시키지 좀 마.”

“누가 할 소리야.”

“내가 안 왔으면 어쩔 뻔했어? 정말이지, 이게 뭐야, 씻지도 못 하고.”

세드릭이 걱정이 되어 먼저 와 본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어찌 되었을지 헬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건 미안해…….”

그녀의 몰골을 본 세드릭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세드릭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헬리아는 짓궂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걸을 만한가 보지? 이제까지 너무 설렁설렁했나 봐?”

“아, 아니, 그건…….”

헬리아의 스파르타식 재활 치료를 겪어본 세드릭이다. 순간 이마에서 땀이 뻘뻘 흘러내렸다.

“좋아, 내일부터 뛰게 만들어주지. 생각해 보니 이제까지 내가 너무 물러 터졌던 것 같아. 이참에 다시 정신 상태를 무장하고 올게.”

“헤, 헬리아!”

“그럼 난 아버지를 봬야 해서. 낼 봐, 오빠.”

헬리아는 싱긋 웃으며 세드릭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자자, 그럼 배웅해 드리죠.”

하이든 후작은 그런 헬리아를 따라 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안 돼!”

뒤에서 세드릭의 비명이 아련히 울려 퍼졌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군.”

“후작님만 할까요?”

헬리아는 뒤를 돌아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가만히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9년 전 폐위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공주의 자리를 차지하여, 이제는 당당히 아르센 왕국의 후계자가 된 헬리아 공주. 헬리아 공주와 세드릭이 사이가 좋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좀 전에 세드릭이 얼마나 공주를 아끼는지도 보았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그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올라온 그녀다.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이제 세드릭은 왕좌는 거들떠도 안 보게 되지 않았나?”

“저는 오히려 부탁했는데, 무슨 말이시죠?”

“수십 년을 봐온 세드릭의 성격을 내가 모를까? 공주가 한 부탁 때문에 그 아이는 더욱 거절할 것이다.”

헬리아는 후작의 말에 싱긋 웃었다. 세드릭은 그런 자였다.

“착한 오빠니까요. 뭐, 착해서 좋죠. 저야.”

“…….”

“건드리지 마세요.”

“…….”

헬리아의 눈이 짙게 가라앉았다.

“괜히 쑤시고 다니다간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아무도 모른답니다. 아시잖아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설마 세드릭을?”

“후후.”

헬리아는 씨익 웃었다. 그것만으로 하이든 후작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역시 공주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하이든 후작은 지그시 눈을 좁혔다.

“저는 세드릭과 오래 친하게 지내고 싶답니다. 이제 왕족은 저와 세드릭뿐이라서 말이죠. 더는 형제를 잃기도 싫고.”

“…….”

벌써 두 명이나 유배를 보내 버린 헬리아 공주다.

하이든 후작은 순간 움찔했다. 세드릭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국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플로렌스 공작의 힘이 있다. 거기다 그녀 스스로 누구보다 높은 부를 쌓아 올렸다. 결코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

하이든 후작은 손에서 땀이 배어나오는 것을 느꼈다.

“뭐, 제가 죽은 다음에는 뭐라 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제가 죽고 난 다음 일인데 무슨 상관일까요? 하지만.”

헬리아는 천천히 후작을 향해 다가갔다.

“아직 제가 살아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후작님. 그리고 전 좀 오래 살 것 같거든요.”

헬리아의 웃음에 후작은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그럼 전 이만.”

헬리아는 미동조차 하지 못하는 후작을 두고 걸음을 옮겼다.

“완전 사악했던 거 알지?”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엘라임이 휘파람을 불며 멀리 후작을 바라보았다. 헬리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뭘?”

“완전 마녀의 미소구먼. 안 그래?”

엘라임이 이안에게 동의를 구하듯 묻자 이안은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은 긍정이라 엘라임은 그리 생각했다.

“어디 그 마녀한테 맞아보고 싶어?”

“그, 그 말이 그렇다는 거지.”

헬리아가 눈을 좁히자 엘라임은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적당히 협박하지? 누가 보면 진짠 줄 알겠다.”

“진짠데?”

“저, 정말?”

엘라임은 놀라 눈이 커졌다. 하지만 이안은 앞서 걸어가 버린 헬리아의 뒷모습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본 엘라임도 어느새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뭐, 그렇게 생각하지.”

엘라임은 머리 뒤로 팔짱을 끼며 척척 걸어가는 헬리아의 뒤를 따랐다. 처음엔 그랬을지도 모른다. 목적을 위해 세드릭과 가깝게 지냈음을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마음대로 되겠는가. 누구보다 곧고 바르고, 순수한 세드릭이다. 거짓된 마음으로 대한 헬리아였지만, 누구보다 진실한 세드릭의 마음을 겪고는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을 믿은 사람을 배신하는 것은 누구보다 헬리아가 싫어하는 일. 이제는 누구보다 세드릭을 생각하는 헬리아다. 그것을 알기에 엘라임과 이안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 * *

“전하…….”

“차를 좀 더 주시겠습니까?”

아르센 왕성 뒤편에 자리한 둔탁한 언덕 위. 빈센트는 작은 정자에 자리했다.

“부족합니다.”

찻잔은 이미 가득 차 있었지만 빈센트는 그리 말했다. 세바스찬은 눈을 질끈 감고 좀 더 빈센트의 잔에 찻물을 따랐다.

“전하…….”

다시 한번 더 빈센트를 불렀다. 하지만 빈센트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세바스찬.”

“…….”

“그녀도 이런 마음이었을까요?”

“…….”

세바스찬은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빈센트는 옅게 웃었다. 하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쓸쓸해지는 웃음이었다.

“그렇군요. 그녀도 이런 마음이었군요. 그때는 남은 자가 더 슬플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빈센트는 말을 잇기보다 찻잔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도 이랬겠지요.”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빈센트는 눈을 감았다. 그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조금만 더…….”

하지만 그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그가 눈을 떴을 땐 이미 그녀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 * *

몇 날 며칠 눈이 오는 페르시아 제국과 달리 아르센 왕국의 겨울은 따스했다. 슬슬 봄이 오고 있는 것일까? 이제 막 겨울의 중반을 넘어서고 있을 뿐이었지만 매서운 페르시아 제국의 겨울을 겪고 온 헬리아 일행에게 아르센 왕국의 날씨는 그야말로 봄 날씨와 같았다.

“역시 아르센은 따뜻하네.”

엘라임은 이전보다 한결 가벼워진-애초에 정령이라 크게 추위나 더위를 타진 않지만-옷차림을 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이안과 헬리아가 뒤따랐다. 그들이 가고 있는 곳은 아르센 왕국 뒤쪽에 위치한 언덕 위 정자였다. 그리고 그 정자는 헬리아의 어머니, 세르게니아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 아르센은 따뜻하지.”

빈센트를 만나러 본관에 갔다가 그가 정자에 있다는 이야길 들은 헬리아 일행은 곧장 언덕을 올랐다. 언덕 위에 선 헬리아는 제국의 칼바람과 달리 살랑거리는 바람을 느끼며 작게 미소 지었다. 단지 페르시아 제국보다 아르센이 따뜻하기 때문에 이렇게 포근하게 느껴지는 건 아닐 것이다. 이곳이 바로 고향이니까. 그녀의 집이니까. 그렇기에 따뜻한 것이다.

“돌아왔네.”

아직 해야 할 일도, 풀어야 할 일도 산적해 있지만 긴 여정에쉼표를 찍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집이 아닌가 싶다.

헬리아는 깊게 숨을 내쉬고 들이마셨다. 아르센의 공기가 폐부 안으로 스며들며 제국의 나쁜 공기를 다 가져가 버린 듯했다. 그렇게 아르센을 느끼다 보니 어느새 멀리 빈센트가 보이기 시작했다.

“…….”

“헬리아?”

“……많이 야위었네.”

헬리아의 시선이 멀리서 차를 마시고 있는 빈센트를 향했다. 아직 그들이 온 것을 모르는지 세바스찬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데 왠지 그 모습이 쓸쓸하게 보이는 것은 그녀의 착각일까.

너무 멀리서 본 탓일까? 가까이서 본다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까? 헬리아의 시선이 빈센트를 지나 세바스찬에게 향했다. 세바스찬은 자신이 온 것을 아는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

“…….”

헬리아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아직 그와는 이야기할 때가 아닌 것이다.

“안 가?”

“…….”

엘라임이 우뚝 멈춰 선 헬리아를 보았다. 헬리아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춰진 걸 확인하곤 다시 빈센트를 응시했다.

“뭐라고 하지?”

“에? 뭐라고?”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로서도 이런 상황을 겪어본 일이 없기에 그녀의 말에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헬리아는 평소의 그녀와 달리 머뭇거리며 말을 골랐다. 생각해 보면 그에겐 제대로 상의조차 하지 않고 거의 통보하듯 전하고 제국으로 간 헬리아였다. 빈센트는 분명 말리고 싶었으리라. 그래서 멋대로 가버린 헬리아를 속으로 꾸짖고 있지 않을까?

헬리아는 괜히 발이 떨어지지 않아 망부석처럼 그렇게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하지만 빈센트는 쉬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것이 왠지 거부당하는 것 같아 더 그녀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혹 그녀를 보고 싶지 않은 게 아니었을까? 빈센트가 그럴 사람이 아님을 알면서도 괜히 초조해졌다.

툭.

그때 이안이 그녀의 등을 밀었다.

“당신답지 않습니다.”

“……나다운 게 뭔데…… 윽, 이 대사는 하기 싫었다고.”

헬리아는 자신으로 하여금 구닥다리 대사를 내뱉게 한 이안을 쏘아 보았다.

이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얼른 가기나 하십시오. 이런 데서 미적거리지나 말고.”

“가고 있어.”

하지만 그녀의 발은 1센티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이안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언제나 거침없이 움직이던 그녀이지 않는가. 그런데 지금의 모습은 마치 벌 받기 전의 어린아이 같았다.

“평생 여기서 미적거릴 겁니까?”

“…….”

“그럼 다시 돌아가죠.”

이안이 몸을 돌리자 헬리아가 그를 붙잡았다. 그러곤 지기 싫다는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너나 가.”

“뭐, 그러죠.”

“어?”

“가라고 하니 가야죠, 그럼 이만.”

이안은 헬리아의 말에 일체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몸을 돌려 가버리는 게 아닌가. 거기다 옆에서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던 엘라임의 뒷덜미를 낚아채 끌고 갔다.

“켁, 난 왜?!”

“가지.”

이런 눈치 없는 머저리를 보았나 하는 이안의 표정에 엘라임은 그제야 눈치를 챘다.

“어, 어, 그럼 나도.”

그제야 버티던 엘라임도 어느새 이안을 따라 훌쩍 가버리는 게 아닌가. 헬리아는 어이가 없어 화도 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저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아니, 혼자가 아니다. 혼자가 아님은 이미 엑시온의 어둠 속에서 잘 깨우치지 않았던가. 헬리아는 멀어지는 이안과 엘라임을 뒤로하고 자신을 기다리는 빈센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발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헬리아는 천천히 빈센트가 있는 정자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모습이 점점 더 자세히 보일수록 헬리아는 마음이 쓰렸다.

‘도대체 뭘 하기에 살은 또 저렇게 빠진 거래?’

빈센트의 모습은 제국으로 가기 전과 달리 확연히 왜소해져 있었다.

‘혹시 어디 아픈 거 아니야?’

그런 걱정 때문인지 느릿느릿했던 발걸음이 어느새 뛰다시피 빨라졌다.

“늦었어.”

“…….”

“얼마나 기다린 줄 아느냐?”

빈센트는 연신 그녀를 꾸짖었다.

“거기가 어디라고. 게다가 사신단과도 따로 움직였다지?”

“들으셨어요?”

“위험하면 바로 돌아왔어야지! 내가 얼마나…….”

빈센트는 와락 헬리아를 껴안았다.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아느냐?”

빈센트는 꽉 헬리아를 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을 좀 더 느끼기 위해서 그는 그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헬리아도 빈센트의 온기에 가슴이 먹먹해져 눈을 감고 두 손으로 그의 등을 껴안았다. 빈센트가 그러하듯 그녀도 이 따스함을 다시 한번 온몸에 새기고 싶었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니까. 그때서야 해야 할 말이 떠올랐다.

“다녀왔습니다.”

“…….”

그 말이 그녀가 먼저 해야 할 말임을. 다른 말은 필요치 않았다.

빈센트는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잘 다녀왔다.”

“잘 계셨어요?”

“나야 밥 잘 먹고 잘 지냈지. 그보다 이리 야위어서야, 쯧. 내 요리사에게 일러 먹을 걸 준비해 두라 일러야겠다.”

“저보단 아버지가 더 야위었어요.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아프긴, 이 아버지만큼 튼튼한 사람 있음 나와 보라고 해. 이 얼굴이 어디 쉽게 되는 줄 아느냐?”

빈센트는 웃으며 말했다. 그에 헬리아는 왠지 가슴이 아팠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걸 거다.

“춥지는 않았고?”

빈센트가 헬리아를 꼭 품에 안았다. 그에 헬리아는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 따뜻하네요.”

“누구 품인데.”

헬리아는 좀 더 빈센트를 꽉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세바스찬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 * *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헬리아는 로즈궁을 보자 왠지 감회가 새로웠다. 정말이지 새삼 집이라는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과거엔 집이 편한 곳이라고 생각지 않았는데 이젠 집이 제일 편한 곳임을 느낀다. 헬리아가 로즈궁에 들어가자 미리 그녀의 귀환을 보고받은 이들이 모두 나와 그녀를 맞이하였다.

“오셨습니까?”

앤을 비롯해 시녀와 시종들이 헬리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나 없다고 아주 딩가딩가 논 거 아니야?”

특히 앤을 집중적으로 보며 말하자 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뭘 아니야.”

“고, 공주님!”

하지만 앤의 눈가가 붉어진 걸 본 헬리아는 그녀가 정말로 그녀의 귀환을 기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미운 정도 정이라더니.”

혼잣말로 나직이 내뱉은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정말 돌아온 느낌이다.

“다녀왔어.”

또 한 번 자신의 가족에게 건넨 인사였다.

“역시 딩가딩가한 거 맞구먼.”

“그, 그게…….”

아직 채 정리가 덜된 자신의 방을 둘러본 헬리아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방 안은 그녀가 떠나기 전 그대로였다. 문제는 그대로라는 것이다.

“청소는 언제…… 말 안 해도 알겠어.”

“며, 몇 번은 했어요! 오, 오늘 오실 줄은 모르고.”

“내가 없는 동안 살 만했지, 앤?”

헬리아가 금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하자 앤이 히익 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으, 으악, 어떻게!’

앤의 머릿속이 훤히 보이는 헬리아였다.

“딱 십 분.”

“고, 공주님.”

“딱 십 분 주지. 그동안 다 정리해 놔.”

“그, 그게 시, 십 분은…….”

“오 분.”

“아, 알겠습니다!”

앤이 경례를 붙여 올리곤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헬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오늘부터 빡세게 돌려야지.”

“히익!”

그 이야기를 들은 앤은 흠칫 놀라며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당탕탕 청소를 시작한 앤 덕분에 방 안에 머물 수 없게 된 헬리아는 복도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새삼 로즈궁을 보니 왠지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이 들었다. 아무래도 데이지궁보다 지낸 시간이 적은 탓도 있는데다가 그간 너무 바빠 제대로 로즈궁을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헬리아의 발걸음이 정처 없이, 그러나 마치 목적지가 정해진 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음, 여기였나?”

“여기가 어딘데?”

불쑥 나타난 엘라임에게도 놀라지 않고 헬리아는 제 앞의 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방.”

생각해 보면 헬리아가 되어 1년여를 이 로즈궁에서 살았는데 무의식에 어머니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했던 건지, 아니면 정말 바빠서인지, 어머니의 방을 찾지 않았다. 하지만 좀 전 아버지를 만난 탓인지, 최근 꾼 꿈 때문인지 이곳으로 발걸음이 옮겨졌다.

“들어가 볼 거야?”

엘라임은 그런 헬리아를 향해 물었다. 헬리아는 가만히 방문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대답 대신 어머니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익-

낡은 경첩이 괴음을 내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안을 본 헬리아는 짧게 말했다.

“평범하군.”

뭐랄까. 어머니의 방치곤 지극히 평범했다.

“솔직히 뭔가 특이할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혹시 숨겨진 비밀의 방이 있는 게 아니야?”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하기야 워낙 비밀의 방을 많이 접해 봤어야지. 아마 이곳에도 그런 방이 있지 않을까. 없다면 말이 안 될 것이다. 헬리아는 마치 탐험가와 같은 자세로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뭐 특별한 건 없네.”

무려 드래곤의 방이거늘 아쉽게도 어머니의 방은 여느 방과 다르지 않았다. 특별한 마법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고, 딱히 통로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예전 그대로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가구 하나, 물건 하나 바뀌지 않았다. 거기다 작은 곤돌라까지.

헬리아는 곤돌라를 흔들며 피식 웃었다.

“이게 아직까지 있네.”

이전과 변한 게 없다는 것은 누군가 계속 관리해 왔다는 말이다. 물론 지금 상태로 봐서는 아예 손대지 않고 쭉 그대로 놔두기만 한 것 같았다. 헬리아가 궁을 돌려받은 게 1년 전이다. 주인 없는 궁을 8년이나 이렇게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아마 빈센트 덕분이리라.

“헬리아!”

그때 제멋대로 방 안을 돌아다니던 엘라임이 헬리아를 불렀다.

“왜?”

“이거 언제 그린 거야? 혹시 세드릭이 그린 거야?”

“뭘 그리다니?”

“이 그림 말이야.”

“그림이라니? 대체……?!”

엘라임이 부른 곳으로 다가가자 헬리아는 벽에 걸린 하나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이건…….”

헬리아의 두 눈이 커졌다. 그것은 초상화였다. 초상화 속 한 여인은 옅은 분홍빛 드레스를 입고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왠지 마음 편안하게 하는 그런 그림이었다. 하지만 헬리아가 놀란 것은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나?”

초상화에 그려진 여인은 너무나도 헬리아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금빛 머리, 금안. 헬리아, 그 자체였다.

“언제 이런 걸 그린 거야? 나 몰래 그린 거야?”

이런 예쁜 드레스를 입고 웃고 있는 헬리아를 보지 못했다니 엘라임은 땅을 치고 후회했다. 왜 이런 걸 놓쳐서. 그러나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난 이런 건…….”

본 적도 없다고, 라고 말하려던 헬리아는 순간 묘한 느낌이 들었다.

“한데 이거.”

헬리아는 이상함에 좀 더 그림에 다가갔다. 그러곤 그림이 많이 낡아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건 일이 년 색이 바랜 게 아니다. 마치 아주 오래된 것처럼. 적어도 한 십여 년은 흐른 듯한 느낌이었다. 그림에 보존 마법이 걸려 있지 않으니 그 느낌 그대로일 것이다.

“내가 아니야.”

“응?”

“이건 내가 아니라고, 엘라임.”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이 고개를 갸웃하곤 다시 그림을 보았다.

“똑같은데?”

“잘 봐, 색이 바랬잖아. 보존 마법도 안 걸려 있는 걸 보면 이 정도면 대충 십여 년 전이야. 그때 내가 이렇게 클 리가 없잖아.”

헬리아의 설명에 엘라임은 다시 그림을 보았다.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챘다.

“거기다 봐봐, 나보다 더 나이 들었다고.”

“아, 정말!”

그림이 바랜 건 잘 모르겠지만 다시 그림을 보니 지금의 헬리아보다 분위기가 더 있어 보였다.

“그리고 나와 닮은 사람이라면 딱 한 명 알고 있지.”

헬리아는 좀 더 초상화 앞으로 다가갔다. 정말이지 왜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놀랐는지 이제야 알았다. 이러니 놀라는 게 당연하지.

“……세르게니아.”

기억이 아닌 그림으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내 어머니야.”

헬리아는 묘한 표정으로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어머니만 닮았으니 남의 자식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솔직한 말로 헬리아의 얼굴은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어머니의 판박이였다. 그 말은 빈센트를 거의 닮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왕의 핏줄이 아니라며 핍박받았던 헬리아는 왠지 수긍이 갔다. 드래곤의 피 때문인지 몰라도 정말이지 너무 닮았다.

엘라임은 헬리아의 말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초상화와 헬리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리 모녀지간이라도 이건 너무 똑같은 거 아니야?”

“모녀지간이니까 똑같은 거겠지.”

헬리아는 여전히 초상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사람이…….’

세르게니아. 레칸 대륙에 남은 마지막 드래곤이자, 한 남자를 사랑해 평생을 아르센 왕국과 함께한 드래곤. 빈센트의 아내이자 자신의 어머니.

그녀에 대한 기억은 대체로 희미했다. 대부분 그녀와 함께했던 적이 없었고 그다지 말을 많이 나눈 적도 없었다. 이렇게 어머니의 모습을 눈앞에 두자 느낌이 이상했다. 기쁜 건지 아니면 어색한 건지.

헬리아는 초상화에서 눈을 돌려 좀 더 방 안을 살폈다. 그러다 그녀가 쓰던 책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쓰던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면 혹여 뭐라도 있지 않을까? 그러나 책꽂이에는 책 몇 권이 꽂혀 있을 뿐, 꽂혀 있는 책도 그리 특별한 건 아니었다.

헬리아는 기왕지사 이렇게 된 마당에 좀 더 찾아보기로 했다. 딱히 뭘 찾는 건 아니었지만 으레 사람이라면 그냥 뭐든 찾게 되지 않던가.

달칵.

책상 서랍을 연 헬리아는 안에서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일기로 보이는 책도 보였다.

“이건 그대로 놔둔 건가?”

유품이라면 유품일 텐데 고스란히 있는 게 왠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방 자체가 있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걸 보니 또 이상한 것만은 아닌 듯싶었다.

“헬리아, 어서 열어봐.”

엘라임은 왠지 신이 나는지 헬리아에게 상자를 열어볼 것을 재촉했다. 헬리아도 궁금증에 우선 일기장을 내려놓고 상자를 열었다. 다행히 잠겨 있지 않아 쉽게 열 수 있었다.

“보석함인가?”

투박한 상자 안에는 펜던트와 몇 개의 보석이 담겨 있었다. 헬리아는 그중 펜던트를 집어 들었다. 동그란 형태의 펜던트는 도금이 되어 있었고, 가운데에 아르센 왕국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헬리아는 펜던트를 이리저리 살피다 경첩이 있는 걸 보고 얼어보았지만 아무리 힘을 주어도 펜던트는 열리지 않았다. 다시 확인해 보니 떨어져 있어야 할 접합부가 녹은 채 붙어 있었다. 누군가 일부러 이 뚜껑을 붙여놓은 것이다.

“열어줄까?”

“아니.”

힘으로 열 수도 있지만 죽은 사람의 유품인지라 훼손하고 싶지 않았다. 정 열고 싶다면 대장간에 가서 제대로 손을 보면 그만이다. 해서 펜던트는 그대로 놔두고 일기장으로 다시 손을 돌렸다.

“뭐라고 써 있어?”

“글쎄.”

일기장을 펴본 헬리아는 눈을 좁혔다.

“정말이지 악필이군.”

이걸 개가 쓴 건지 아님 개의 발로 쓴 건지. 게다가 첫 장부터 그 뒤로 수십 페이지는 찢겨 나간 흔적이 있었고 그 뒤로는 완전히 괴발개발 날려 썼다.

“뭐라고 써 있는데?”

엘라임이 자꾸 물어보자 헬리아는 그나마 읽을 수 있는 부분을 읽어보았다.

“……생긴 것이다. ……지 못했다. ……걸 볼 수 없었다. 그의…… 연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이미 그의…… 있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좀 제대로 읽어봐.”

엘라임은 헬리아가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건 헬리아도 마찬가지였다. 헬리아는 미간을 구기고 엘라임에게 일기장을 보여주었다.

“그럼 네가 읽어보든지.”

엘라임은 헬리아가 내민 일기장을 받아보곤 볼을 긁적였다.

“이거 손으로 쓴 거 맞아?”

“내 말이.”

헬리아는 다시 엘라임에게서 일가장을 빼앗아 들곤 조금이라도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보았다.

“드디어 연구에 성공했다. ……정말 다행이다.”

“음, 뭔가 연구를 시작하고 성공한 건가? 근데 무슨 연구를 한 거래?”

“음, 그 부분은 워낙 지저분하고 잉크가 번져서.”

헬리아는 그녀가 연구한 것이 무언인지 궁금해졌다. 일반 사람이 한 것도 아니고, 드래곤이 연구한 것이다. 분명 심상치 않은 연구일 것이다.

헬리아는 좀 더 뒤쪽을 펼쳐 보았다.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싶지 않았다. 좀 더 ……싶다. 하지만 ……이제 끝을 달려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있는 거지? ……다시 연구를 시작했다.”

연구가 실패한 것 같았다. 도대체 연구란 게 뭘까? 감정이 격해진 상태인지 그 부분에 대해선 다른 곳보다 더 읽기가 힘들었다.

헬리아는 대충 눈으로 훑은 뒤 맨 마지막 장을 펼쳐 보았다. 한데 뒷장은 잉크를 쏟았는지 전부 검었다. 헬리아는 잉크가 젖지 않은 그 전 부분에 쓴 글을 읽었다.

“그를 막을 방법은 하나다.”

“그?”

그가 대체 누구지?

“혹시 엑시온 아니야?”

“엑시온?”

엑시온의 이야기가 나오자 헬리아는 이전과 달리 진중한 표정으로 일기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뒤를 더 읽어보고 싶어도 전부 검어서 볼 수가 없었다.

“엑시온이라…….”

막을 방법이라고 했다. 그 점을 엘라임도 인지했다.

“혹시 엑시온에 대해 연구한 게 아닐까? 그 연구도 봉인하기 위한 연구고.”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의 눈이 커졌다.

‘그래, 그랬어.’

오랫동안 세르게니아는 엑시온을 저지해 왔고 마지막에 그를 봉인했다. 만약 나머지 잉크로 검어진 부분을 알 수만 있다면 봉인이 깨진 뒤에 어떻게 해야 할지도 나와 있지 않을까?

“조사해 봐야겠어.”

헬리아는 일기장을 들었다. 그리고 혹시 몰라 펜던트도 집어 들었다. 혹시 아는가. 이 일기장에 드래곤 하트에 대한 게 나와 있을지.

“우선 이걸 해독하는 게 문제군.”

“그 귀쟁이 놈에게 가져다주면 되지 않을까?”

확실히 오랫동안 어머니를 본 키안이라면 이 일기장에 대해서도, 또 이 글씨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헬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때였다.

“공주님!”

멀리서 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새 방 청소를 모두 마친 모양이다. 헬리아는 일기장과 펜던트를 손에 든 채 어머니의 방을 빠져나왔다.

“공주님!”

벌컥 문을 열고 헐레벌떡 들어온 청년을 보자 헬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고, 공주님…….”

“오랜만이야, 클리드.”

“저, 정말로 공주님이신가요?”

청록색 머리에 오드 아이를 지닌 청년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소매로 눈물을 찍어내었다. 그 모습에 헬리아가 웃음을 지었다.

“다 큰 어른이 울기는.”

“미리 연락이라도 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어딘가 유약한 이미지의 청년은 바로 클리드였다. 클리드가 야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간 베라를 통해 보고를 받다가 며칠 전부터 소식이 끊어진 탓이었다. 그 일로 얼마나 마음을 졸였던가.

“아, 깜빡했어.”

“하아…… 정말 공주님이 맞으시군요.”

클리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다시금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래도 정말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클리드가 여전히 눈물을 글썽거리자 헬리아는 왠지 쑥스러워졌다. 하기야 클리드를 알고 또 함께해 온 지 벌써 9년이 다 되어간다. 어찌 보면 헬리아가 살아온 인생의 대부분을 그와 함께한 것이다. 클리드가 그간 자신을 생각하며 가슴 졸였을 것을 떠올리자 왠지 그가 안쓰러워졌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닌 거야? 왜 이렇게 다들 말라가지고.”

괜히 마음 쓰이게. 다들 내가 없는 동안 다이어트라도 한 건가? 헬리아는 괜히 볼멘소리를 했다.

“다들 잘 지내지?”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응?”

‘……뭔가 뉘앙스가 이상한데?’

클리드가 눈을 반짝이며 헬리아에게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그의 눈 밑에는 짙은 다크 서클이 깊게 내려와 있었다.

“어, 저기, 클리드……?”

“정말, 정말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너무 격하게 반기는데…….”

헬리아가 왠지 모를 불안감에 슬그머니 몸을 움직였으나 클리드가 빨랐다.

“공주님이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아, 그, 그래.”

“지금쯤이면 도착했겠군요.”

“……대체 뭘?”

콰앙!

그때 문이 열리며 ‘그것’이 들어왔다. 그와 함께 헬리아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일그러진 것은 당연했다.

“남작님, 모두 가져왔습니다.”

“여기에 두세요.”

클리드가 방 안으로 들어온 시종에게 친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시종은 한 뭉텅이의 서류를 헬리아의 책상에 올려두었다.

“크, 클리드?”

“그간 공주님이 없어서 얼마나…….”

눈물을 머금고 뒷말을 삼킨 클리드는 눈물을 닦아내며 씩씩하게 말했다.

“이제 공주님도 계시니 문제없습니다.”

“난 이제부터 문제가 생길 것 같은데…….”

헬리아가 질린 눈으로 그것, 바로 서류를 바라보았다.

‘젠장, 이런 놈이었지!’

그간 왜 잊어버리고 있었던가. 너무 오래 제국에 있었던 탓인가?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클리드에 대한 기억을 미화한 건가?

클리드는 오랜 가뭄 끝에 물을 만난 새싹처럼 파릇파릇 피어올랐다. 물론 헬리아는 점점 메말라 갔다.

“이거 다…….”

“가 아니죠.”

클리드의 말이 끝내자마자 서류는 끊임없이 헬리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차곡차곡 한 뭉텅이가 두 뭉텅이가 되고, 두 뭉텅이가 세 뭉텅이가 되고……. 그리고 어느새 헬리아는 서류 더미에 파묻힌 형국이 되어버렸다.

“자, 잠깐!”

“아직 서류가 더 남았습니다. 몇 달 동안 공주님이 계시지 않아서 보류된 사안들입니다. 이제라도 공주님이 계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정말 돌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주님!”

그간 헬리아가 없어 엘라드 상단은 물론 전반적인 사안에 대해 모두 총괄해야 했던 클리드에게 헬리아의 귀환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헬리아는 그가 자신이 살아 돌아온 게 기쁜 건지 아니면 이제 서류를 처리할 사람이 생겨서 기쁜 건지 알 수가 없어졌다.

‘후자 아니야?’

왠지 후자에 격하게 마음이 쏠린다.

“자, 그럼 부탁드립니다!”

헬리아는 잠시 뒤를 돌아 창문을 보았다. 갑자기 저 하늘이 자신을 부르는 느낌이…….

“공주님!”

그러나 그녀의 자유를 억압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클리드.

“어딜 가십니까?”

“아, 잠깐. 내가 아주 중요한 볼일이 떠올랐는데…….”

“오늘은 아무 스케줄도 없지 않습니까?”

“…….”

헬리아의 입매가 틀어졌다. 애초에 클리드는 헬리아의 보좌를 맡고 있는 몸. 당연히 헬리아의 스케줄 관리도 그가 하고 있었다.

‘이 독한 놈! 나보다 더 독해!’

헬리아가 뚱하게 쳐다봐도 클리드는 다년간에 쌓아 올린 내공으로 가뿐히 무시해 주었다.

“하긴 많긴 하지요?”

“많지! 얼마나 많다고!”

줄여줄 거야? 헬리아가 눈을 반짝이자 클리드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오늘 하실 분량만 가져온 겁니다. 다행이지 않습니까?”

저 착하죠? 그렇게 묻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클리드의 두 눈알을 손가락을 콕 찍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

이게 오늘 할 분량이라고? 괜히 돌아왔나. 새삼 회의가 드는 헬리아였다.

‘하기 싫다고! 난 이제 막 돌아왔다고!’

그러나 그것은 결코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크윽…….”

어느새 해는 제 할 일을 마치고 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하지만 헬리아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산 더미였다.

“더는 못 해…….”

이미 넉다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조차 힘든 헬리아였다. 눈밑은 퀭하니 검어졌고, 몸은 책상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힘내세요, 공주님!”

“난 오늘 왔다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은 헬리아였지만 서류를 보면 모두 최소한 오늘까지는 해야 하는 일들이었기에 더는 뭐라 말할 수 없었다.

‘이 악질…….”

하지만 속으로 하는 불만까지 뭐라 하지는 않겠지. 어느덧 산처럼 쌓여 있던 서류가 하나둘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지 헬리아가 펜을 내려놓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겠어. 좀 더 체계적으로 시스템을 바꿔야겠어.”

“다 공주님이 꼭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더는 저에게 전가하지 마세요, 라는 말을 클리드가 돌려 말했다. 그녀가 시스템을 체계화한다는 건 모두 그녀가 하기 싫은 일을 다른 이들에게 잘 분배하는 것을 말한다. 이미 당해 봤는데 또 당하겠는가.

“치.”

헬리아가 입을 삐뚜름하게 내밀었다.

그때였다.

“공주님, 기사단분들이 돌아오셨습니다.”

시종의 말에 시든 꽃처럼 축 늘어져 있던 헬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어서 들라 해.”

문이 열리고 후줄근한 옷에 먼지가 가득 묻은 일행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헬리아를 대신해 변장한 레브와 함께 움직인 숀 일행이었다.

“어서 와.”

“하아, 도착했습니다.”

“정말 죽을 뻔했다고요.”

숀 일행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몰골만으로도 능히 그들의 상황이 얼마나 고됐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공주님도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렌스가 헬리아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 제국의 황성으로 들어간다고 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한데…….”

숀이 두리번거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렌스와 휴도 마찬가지. 숀이 찾는 사람이 보이지 않자 물었다.

“대장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숀이 이안을 찾았지만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헬리아가 입꼬리를 올리다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그녀의 얼굴은 심히 그늘져-하루 동안 클리드에게 혹사당해 특별히 꾸밀 필요가 없었다-있었다. 숀은 그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서, 설마…….”

“그렇게 되었어.”

“대, 대장님!”

휴가 외쳤지만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함께 따라온 세인이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숀은 울먹이더니 막 눈물을 떨어뜨리려는 참이었다.

“장난은 그쯤에서 그만하시죠.”

“어?”

“이 목소린!”

“유, 유령이다!”

숀이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눈물을 뚝 그치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엔 언제나 그렇듯 당당한 모습의 이안이 서 있었다.

“대, 대장님!”

“우와! 살아 계셨군요!”

“대장님!”

숀 일행이 우르르 이안에게 몰려갔다. 이안은 뚜벅뚜벅 걸어와 세인을 지나쳐 헬리아에게 다가갔다.

“제가 잠깐 나가 있는 동안 실종된 겁니까?”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헬리아가 어깨를 으쓱이자 이안이 눈을 좁혔다. 숀 일행은 야속한 표정으로 헬리아를 보았다.

“공주님!”

“뭘, 난 그냥 그렇게 되었다고밖에 말 안 했어.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이익!”

숀이 너무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세인을 보았다.

“세인, 너도 그렇게 들었지?”

“뭐, 나야…….”

이미 이곳으로 오고 있는 이안의 기운을 느낀 터라 속아 넘어가진 않았지만, 세인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숀의 얼굴을 보고는 말을 얼버무렸다.

“어쨌든 잘됐잖아? 다 모였고.”

헬리아는 피식 웃다가 레브를 보았다.

“레브.”

“예, 공주님.”

“잘했어.”

“…….”

헬리아의 한 마디에 레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곧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당치 않습니다.”

“다음에도 부탁해.”

“…….”

그건 아니……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레브는 푹 고개를 숙였다.

헬리아는 그런 레브를 보며 웃다가 뒤에 팔짱을 끼고 있는 세인을 보았다. 현재 다크소드의 마스터가 된 소드 마스터 세인. 일이 끝난 후 숀 일행과 헤어진 줄 알았는데 함께 돌아온 것이다.

“다크소드의 마스터가 이런 곳에 있어도 되나?”

다크소드라는 말에 클리드가 깜짝 놀랐다.

“공주님, 다, 다크소드라니요!”

“아, 소개할게. 다크소드의 마스터 세인이야. 뭐, 전에도 봤지?”

“그땐 기사 아니었습니까? 실종되었다고.”

“위장 취업.”

“위…… 험하지 않겠습니까?”

클리드가 세인을 위험 분자로 분류한 듯 약간 거리를 두었다. 다크소드는 제국 최고의 암살 집단이었다. 그런 그가 이곳에 왔었다는 건 헬리아를 암살하기 위해 왔다는 것. 아무래도 좋게 봐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우리 편이라고요, 남작님.”

숀이 왠지 기분이 나쁜지 세인을 두둔했다. 그에 세인은 눈을 휘며 웃었다. 항상 툴툴대는 숀이지만 이래서 세인은 숀이 싫지가 않았다.

“그건…….”

“숀 말이 맞아, 클리드. 앞으로 종종 왕래가 있을 테니까 알아둬.”

“알겠습니다.”

헬리아의 말에 클리드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 정했다면 그런 것이다. 아무리 헬리아를 잡는 클리드였지만 반면에 누구보다 헬리아의 말을 믿는 것 역시 클리드였다.

“그보다 잘 돌아왔어.”

헬리아가 웃으며 말했다.

* * *

“정말 그리할 것인가?”

플로렌스 공작은 난데없는 빈센트의 발언에 놀라 눈이 커졌다. 놀란 공작과는 달리 빈센트는 차분히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네.”

빈센트의 표정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한번 결정한 것을 바꾸지 않았다. 그것을 공작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플로렌스 공작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해고 뭐고 이런 행동은 그답지 않았다.

“받아들이겠나?”

“글쎄, 나도 그 아이가 어찌 나올지는 잘 모르겠군.”

“미움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간 쌓은 신뢰를 다 무너뜨릴 셈인가?”

“…….”

빈센트는 그 말에 살짝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곧 눈을 감으며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었다.

“어차피 시기는 되었어. 아니, 오히려 너무 늦은 거지. 그저 때가 되었을 뿐이네.”

“하지만 이건 아무래도…….”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공작이 물었다.

“혹시 이번 전쟁 때문인가?”

“…….”

공작의 말에 빈센트는 다시 찻잔을 입에 대었다. 공작은 그 모습에 한숨을 쉬었다.

“그리도 불안한가?”

빈센트는 대답 대신 공작을 보았다.

“자네는 반대인가?”

빈센트가 도리어 묻자 플로렌스 공작은 입을 다물었다. 반대냐고? 아니, 그는 반대하지 않는다. 아마 그 아이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찜찜한 기색을 떨칠 수 없었다.

‘어찌 이리 갑자기…….’

그의 말은 일방적인 통보였다. 플로렌스 공작은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빈센트를 응시했다. 생각해 보니 요즘 들어 뭔가 이상했다. 단순히 제국과의 전쟁 때문이라고 하기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고서야 이런 결정을 내릴 그가 아니었다.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겐가? 갑자기 그런 결정을 내리니 말일세. 이건 자네답지 않아.”

“자네 말처럼 전쟁이지 않나? 시절이 하수상하니 대비를 하려는 것뿐일세.”

“…….”

플로렌스 공작은 빈센트의 대답이 왠지 거짓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와 함께한 세월이 수십 년이다. 그걸 모를 공작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빈센트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해 주게.”

“…….”

“제이크, 부탁일세.”

빈센트가 간곡히 부탁해 왔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플로렌스 공작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떴다.

“욕 들을 준비나 하게.”

“하하, 욕먹으면 오래 산다고 하지 않던가. 오래 살고 좋지 뭐.”

“……하아…… 나도 이젠 모르네.”

플로렌스 공작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저 빈센트만이 웃을 뿐이었다.

* * *

번화가에 위치한 ‘바람의 숨결’.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음식점이지만 사실 이곳은 바로 정보길드 베라의 본점이었다.

바에서 와인 잔을 닦는 잭의 손길이 평소와 다르게 느릿했다. 가게 안에 손님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최근 제국의 전쟁 선포로 아르센 왕국의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젊은이들은 병사로 차출되고 말을 탄 전령들이 빠르게 성안 대로를 오가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때였다.

“지배인님! 지배인님!”

멀리서 루카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헐레벌떡 숨을 내쉬며 가게 안으로 들어온 루카스는 연둣빛 머리에 십 대 소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는 하프 엘프로 나이도 제법 먹었다.

잭은 루카스의 반응에 무언가 예감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왔나?”

“네, 드디어, 어? 어떻게 아셨어요? 공…… 아니, 헬리아 님이 오셨어요!”

공주라고 부르려다 주변을 의식한 루카스가 얼른 말을 바꿨다.

“알고 있다.”

잭이 미소를 짓고 있을 때 가게 안으로 세 사람이 들어섰다.

바로 헬리아와 엘라임, 그리고 이안이었다.

“잭.”

헬리아는 잭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간의 이야기는 유니를 통해서 전해 듣고 있었다. 중간에 연락이 끊기긴 했지만 왕국 국경을 넘었다는 소식은 접했다.

“키안은 뭐 하고 있어?”

헬리아의 물음에 잭은 웃었다.

“호호호, 이게 왜, 어때서?”

“도저히 보고 있을 수 없군요.”

“이 육체미를 보고 어떻게 그런 말을!”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자가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채 팔을 불끈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비리비리한 외모에 안경을 쓴 녹색 머리의 남자는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네놈이야말로 그 비리비리한 몸을 좀 어떻게 하는 게 어때?”

“그보다 제발 요정의 모습으로 돌아가시죠.”

녹색 머리, 키안은 한숨을 푹 내쉬며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앞에는 근육질의 남자, 유니가 자신의 육체미를 키안에게 널리 설파하고 있었다. 물론 제대로 설파되진 않았지만.

“둘 사이가 좋네.”

“……이게 좋아 보이십니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키안이 고개를 들었다.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공주님!”

“유니.”

유니가 반가운 듯 헬리아를 향해 다가오자 헬리아는 휙 하고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물론 그는 애초에 헬리아를 염두에 두지 않았기에 와락 엘라임과 이안을 끌어안았다.

“여기서 보니 다시 반갑네요, 호호호!”

“으윽.”

“…….”

엘라임과 이안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졌다. 유니는 여전했다.

“앉으시지요.”

키안이 어느새 차를 내왔다. 헬리아가 테이블에 앉자 키안과 유니도 둘러앉았다.

“상황은 어때?”

“각국에서 몸값을 받고 인질을 교환하고 있습니다. 조만간 그 교환이 끝나면 곧장 움직일 겁니다.”

제국의 상황에 헬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이미 돈까지 두둑이 손에 넣은 제국이다. 그들에게 남은 건 출정뿐.

“계속 상황을 주시해 줘.”

“알겠습니다.”

“그보다 여기에 온 건.”

헬리아는 품속에서 어머니의 방에서 가져온 일기장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이걸 좀 봐줬으면 해. 아무래도 나보단 키안 네가 나을 것 같아서.”

“이건……?”

유니와 키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헬리아가 고갯짓을 하자 키안이 손을 뻗어 안을 열어 보았다. 순간 그의 눈빛이 변했다.

“설마…….”

“알아보나 보네.”

“잊을 리가 있겠습니까. 결코 손으로 썼을 거라 생각되지 않는 이 악필, 세르게니아 님의 것입니까?”

키안의 말에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키안은 어머니의 글씨체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일기장 같은데 도통 뭘 써놨는지 제대로 읽을 수가 없어. 정말 손으로 쓴 게 맞긴 한 거야?”

헬리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나름대로 다시 한번 글을 읽어보려 노력했지만 차라리 암호를 해독하는 게 나을 정도였다.

“호호호, 이거 정말 오랜만에 보는 글씨군요.”

유니는 감회가 새롭다는 듯 눈매를 휘었다. 옛날부터 세르게니아는 정말이지 엄청난 악필이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을 쓰는 성격이 아닌지라 더 그랬다. 자기만 알아보면 된다나.

일기장을 내려다본 키안이 물었다.

“무슨 내용인지는 보셨습니까?”

“대충, 읽을 수 있는 것만. 뭘 연구했던 것 같아.”

키안은 헬리아의 말에 가만히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

“거기다 마지막엔 잉크가 전부 시커멓게 번져서. 뭐라고 쓰여 있는지 알겠어?”

헬리아의 말에 키안이 책을 덮었다. 헬리아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키안을 보았다. 키안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여전하신 분이군요.”

“그럼?”

“모르겠습니다.”

“엑?”

“설마 이걸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개도 못 읽을 글씨입니다.”

단호하게 못 읽는다는 키안의 말에 헬리아는 왠지 수긍이 가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하기야 이걸 읽는 게 오히려 정상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읽지 못할 것도 없습니다.”

“그럼?”

“기존에 그분께서 작성하신 문서와 대조해서 정확한 문자를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해독(?)해 놓은 자료들이 좀 있습니다.”

키안의 말에 헬리아는 바로 알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은 무너졌지만 그래도 방법이 있다는 말에 얼굴을 폈다.

“며칠이나 걸릴 것 같아?”

“적어도 이틀은 걸릴 것 같습니다. 양도 제법 되고.”

“좋아, 그럼 해독 부탁할게. 내가 봤을 땐 아무래도 엑시온에 대한 연구를 한 게 아닌가 싶어.”

키안과 유니가 헬리아의 말에 표정을 굳혔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안에 뭔가 타개책이 있을 수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키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일기장을 품 안에 집어넣었다.

“그보다…… 만나 보셨습니까?”

“……아직.”

키안이 말하는 게 누구인지 알아챈 헬리아는 말을 흐렸다.

“가디언은 그뿐입니다.”

“한데 정말 그가 맞아?”

세바스찬이 어머니의 가디언이라니.

“특이하긴 하지만 그는 인간이야.”

상대가 이종족인지 인간인지 헬리아는 몰라도 엘라임은 판단할 수 있었다. 엘라임은 단호히 세바스찬을 인간이라 정의했다.

“인간도 가디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정하게 마련이지요.”

헬리아는 키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렇게 세바스찬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역시 직접 이야기해야 하나.”

“그보다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소식?”

“아직 듣지 못하셨군요. 곧 각국에서 사신단이 도착합니다. 이제 조만간 도착하겠군요.”

“이 시기에 사신단이면 연합인가?”

“라비안 왕국에서 동맹 제의를 해왔습니다.”

“라비안 왕국에서?”

순간 헬리아의 머리에 스치고 지나가는 이가 있었다.

“설마 그놈이 오는 건 아니겠지?”

“에취!”

다그닥다그닥.

마차에 앉아 밖을 내다보던 남자는 기침을 내뱉고는 코를 매만졌다.

“제국보단 따뜻해도 아직 겨울이라구요.”

칼바람 쌩쌩 부는 겨울에 창문을 열어놓다니. 에른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얼른 창문을 닫았다.

“누가 내 이야길 하나?”

“뭐 보나마나 험담일 게 분명하니까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씨! 내가 뭘!”

여전한 에른의 말에 금발의 잘생긴 미소년, 알베르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에른은 언제나 그렇듯 그런 그를 살살 달랬다.

“자자,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참으세요. 곧 아르센 왕국이에요.”

알베르는 에른의 말에 뚱한 표정을 풀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아르센 왕국의 수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 * *

푸르던 하늘에 어느새 검은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이윽고 검은 먹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에서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으음…….”

창가에 부딪치는 빗소리에 어렴풋하게 잠에서 깬 헬리아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좁혔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그때가 생각나 언제나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거기다 최근 엑시온의 어둠에 갇혀 하루 종일 비를 맞다 보니 이젠 징글맞을 정도였다.

꿈틀꿈틀.

헬리아는 일어나기 싫어 몸을 뒤척거렸다.

‘추워…….’

밤사이 부는 바람에 창문이 열렸는지 어디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헬리아는 이리저리 뒤척이며 온기를 찾아 움직였다.

‘따뜻해…….’

앤이 난로에 장작을 더 넣어놨나? 갑자기 느껴진 따스함에 헬리아는 그저 미소를 짓고 그것을 더 끌어안았다.

‘마치 난로 인형을 껴안은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인형 난로라도 개발할까. 꼭 사람을 안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잖아? 헬리아가 내심 제 생각을 흐뭇하게 여기며 다시 잠에 빠져들려는 찰나였다.

‘사람?!’

그 순간 헬리아의 눈이 번쩍 떠졌다. 난로 인형은 무슨!

“잘 잤어?”

“너, 너…….”

“더 자.”

엘라임이 미소를 지으며 헬리아를 꼭 껴안았다. 헬리아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꿈이 아님을 확신하자 얼른 엘라임의 품에서 빠져나와 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똑똑.

“공주님?”

헬리아의 목소리가 큰 탓인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앤이 문을 두드렸다.

‘쉿! 밖에서 들리잖아?’

‘대체 뭐 하는 거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도대체 누구 때문인데! 헬리아는 제 이불을 침범한 엘라임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케, 켁! 이거 놓고.’

‘지금 놓게 생겼어?!’

“공주님?”

한 번 더 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헬리아는 엘라임을 째려보며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헬리아의 목소리에 앤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원래도 이상한 사람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럼 목욕물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앤이 종종걸음으로 점점 문 앞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헬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꼴을 보면 앤이 무슨 생각을 할지 안 봐도 뻔했다. 물론 헬리아의 철저한 입단속으로 앤의 입을 틀어막을 수는 있겠지만 세상에 완벽은 없는 법이다.

헬리아는 앤의 기척이 멀어진 걸 확인하고 엘라임을 노려보았다.

“들키면 어쩌려고!”

“그럼 어쩔 수 없지. 이참에 우리 사이를…….”

엘라임이 평소 상큼한 미소와 달리 음흉한 미소를 짓자 헬리아는 그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엑!”

“기어오르긴!”

“쳇.”

엘라임이 입을 삐쭉 내밀며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헬리아는 머리를 잡았다.

“안 나가?”

“아직 이른 시간이잖아. 좀 더 자.”

‘네가 있는 데 자겠냐?!’

헬리아는 갑자기 텐션이 올라간 엘라임 때문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엘라임은 꼭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마치 술에 취한 듯 약간 풀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걸 모를 헬리아가 아니지만 그 사건…… 고백 이후 약간 패턴이 바뀌었달까.

‘예전에는 그냥 먹을 거나 달라고 하거나 놀러 가자고 떼를 썼는데…….’

“자, 너도 누워.”

엘라임이 씩 웃으며 헬리아의 팔을 잡아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쏙 넣어버렸다.

“안 놔?”

“으음, 난 지금 졸린 것 같아.”

“정령이 뭐가 졸려!”

“하암.”

엘라임은 헬리아가 듣기엔 같잖은 핑계를 대며 눈을 감았다. 헬리아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두근두근.

그 순간 제 귀에 들려온 심장 소리에 헬리아는 팔을 풀 생각을 못했다.

두근두근.

자신의 심장 소리가 아니라 엘라임의 것이었다. 그것도 제법 평소보다 빨리 뛰는.

“심장 빨리 뛰는데?”

헬리아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엘라임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 모습에 헬리아는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웃음이 났다. 헬리아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괜히 화를 내기도 우습고 해서 가만히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 나쁘지 않기도 했고 말이다.

두근두근.

이 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정령의 심장 소리. 정확히는 정령이 인간으로 변해 내는 소리였지만 헬리아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손을 들어 그의 심장에 대었다. 그러자 더욱 심장 소리가 빨라졌다.

“유혹하는 거야?”

꽤 낮은 목소리라 헬리아는 깜짝 놀라 손을 떼었다. 괜히 민망해 퍽 하고 그의 가슴을 때렸다.

“켁! 아프잖아!”

“자꾸 기어오를래?”

“그보다 날씨도 좋은데 오늘 어디 놀러나 갈까?”

“날씨가 퍽이나 좋다.”

물의 정령왕인 그의 입장에서나 좋은 날씨지 헬리아의 입장에선 하나도 좋지 않았다.

“비 오는 날은 별로야.”

“……왜?”

“계속 갇혀 있었으니까, 이제 지긋지긋해.”

엘라임은 헬리아의 말에 더욱 꼭 그녀를 껴안아주었다. 그녀가 말한 곳이 어디인지를 그도 알고 있었다. 어둠 속. 그 어둠 속에서 헬리아는 차가운 빗줄기를 맞고 있었다.

엘라임은 그녀를 꼭 안았다. 다시는 그런 어두운 곳에 갇히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헬리아는 엘라임이 자신을 끌어안자 피식 웃음을 지었다.

“따뜻하다.”

“그치?”

엘라임은 풋풋 웃으며 좀 더 헬리아를 껴안았다. 너무 세게 껴안아 곧장 폭풍 같은 잔소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엘라임은 기분이 좋았다. 계속 이렇게 있었으면 하고, 엘라임은 바랐다.

* * *

똑똑.

“공주님, 레브입니다.”

“들어와.”

헬리아의 서재로 들어온 레브의 두 손엔 커다란 상자가 들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온 레브는 선객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언제 오셨지?’

레브는 소리 소문도 없이 와서 앉아 있는 엘라임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헬리아는 레브가 엘라임을 보고 의아해하는 것을 눈치챘다.

‘그냥 가라니까.’

헬리아는 싱글거리며 소파에 앉아 과자를 오독오독 씹어 먹는 엘라임을 아주 오독오독 씹어 먹을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헬리아 옆에서 보낸 세월이 얼마던가. 엘라임은 신경도 쓰지 않고 빙긋 웃었다.

‘내가 못 살지.’

헬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그 물건은?”

“아, 전하께서 보내신 겁니다.”

레브는 엘라임에게서 시선을 떼고 헬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책상에 상자를 내려놓았다. 헬리아는 미간을 좁히며 상자를 보았다.

“……아버지가?”

오늘이 무슨 날인가 생각을 해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헬리아는 빈센트가 보냈다는 상자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도대체 뭐지?’

궁금증에 헬리아는 곧바로 상자를 열었다.

“이건…….”

상자 안에는 옅은 분홍빛의 드레스와 한 장의 카드가 들어 있었다. 헬리아는 드레스를 보다 카드를 집어 들었다.

[예쁘게 입고 오렴.]

지극히 평범한 내용이지만 왠지 수상쩍은 느낌을 배제할 수 없었다. 물론 오늘은 저녁에 각국에서 온 사신단을 위한 만찬이 열리는 날이지만 페르시아 제국과의 긴장 상태로 지극히 간소하게 차려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런 때에 드레스라니? 아니, 물론 드레스야 입겠지만 뭔가 이상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다른 말은?”

“특별한 전언은 없었습니다.”

“그래?”

헬리아는 빈센트가 보낸 카드를 뒤집어봤다. 카드 뒷면은 그저 백지였다. 헬리아는 결국 카드를 내려놓고 드레스를 만져 보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마음에 들었지만 역시 이걸 준 빈센트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너무 과민한 건가?’

언제나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는 버릇이 있는지라 헬리아는 빈센트의 선물에도 그리 반응하고 말았다. 하지만 빈센트가 헬리아에게 수를 써서 뭐 하겠는가. 헬리아는 자신이 너무 깊게 생각했다 판단하고 의심을 털어냈다.

“뭐 옷에 문제도 없는 것 같으니.”

헬리아는 별생각 없이 빈센트의 선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이 빈센트의 의도임을 그녀는 생각지 못했다.

“아, 그리고 에반 남작께서 오셨습니다.”

“에반 남작이라면…….”

레브의 말에 빈센트의 의도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헬리아가 눈을 좁혔다. 에반 남작은 바로 클리드였다.

헬리아가 슬쩍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레브에게 물었다.

“혹시…….”

“빈손은 아니셨습니다.”

척하면 척이랬던가. 이미 클리드에 대해 파악한 레브였다. 헬리아는 레브의 말에 슬그머니 다시 바깥을 보았다.

쏴아아아-

밖에는 여전히 차가운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때, 문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헬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라임.”

“응?”

“생각해 보니까 오늘 꽤 소풍 가기 좋은 날씨인 것 같아.”

그때였다.

“공주님!”

문이 벌컥 열리며 클리드가 들어왔다. 물론 그의 손에는 잔뜩 서류가 들려 있었다.

“어딜 가십니까?”

클리드는 창가에 발을 걸치고 있는 헬리아를 딱 포착했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헬리아는 낭패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클리드가 들고 온 서류를 캐치했다.

‘생각보다 적은데…….’

라고 생각하다 그의 뒤에 딸려 온 시종이 들고 있는 서류를 보았다.

‘……가 아니군.’

헬리아는 결정을 내렸다.

“날씨가 좋아서 말이지.”

“날씨가요?”

클리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휘이이잉-

갑자기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어 문을 열었던 헬리아의 얼굴에 비가 쏟아져 내렸다.

“퍽도 좋은 날씨입니다만?”

‘나도 그렇게 생각했지, 방금까진.’

그러면서 헬리아는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엘라임도 이미 눈치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그럼.”

“자, 잠깐 공주님!”

순식간이었다. 헬리아가 창문 밖으로 쏙 빠져나가더니 엘라임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클리드는 헐레벌떡 창가로 달려갔지만 도망의 달인이 되어 있는 헬리아와 엘라임을 뒤쫓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주니이이임!”

멀리서 클리드의 절규가 들려오는 와중에 헬리아와 엘라임은 웃으며 밖을 향했다.

“돌아오면 두 배입니이다아!”

그 소린 안 듣는 게 나았다.

“에취!”

돌아가면 클리드가 한 소리 하겠군. 헬리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당장 돌아갈 마음도 없었다. 애초에 클리드 역시 교묘하게 헬리아가 굳이 결재하지 않아도 될 서류를 올리곤 했다. 클리드에게 넘기려는 헬리아나, 헬리아에게 넘기려는 클리드나 그 밥에 그 나물이긴 하지만 어쩌겠나. 계급이 깡패라고. 헬리아는 피식 웃으며 걸었다.

쏴아아아-

겨울비는 그칠 그미가 보이지 않은 채 차가운 빗줄기를 흘려보냈다. 헬리아와 엘라임은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걸음을 옮겼다. 겨울에 내리는 비라 그런지 빗줄기가 차가웠다. 하지만 두 사람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랜만인데.”

“역시 여기가 진짜 집 같다니까.”

헬리아와 엘라임이 간 곳은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본성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건물. 9년 전 비앙카의 음모로 폐위가 되어 유폐된 궁. 데이지궁이었다. 먼지투성이에다 성한 곳 하나 없던 곳이었지만 물건 하나, 가구 하나까지 정성들여 사람 사는 집으로 만들어놓았다.

데이지궁 안으로 들어간 헬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역시나 익숙한 기분이 들어 낯설지 않았다. 그녀는 로즈궁보다 이 데이지궁에서 더 오랜 세월을 지내왔다.

“아무도 없네?”

“전부 철수시켰으니까.”

안을 둘러본 엘라임은 전날 세르게니아의 방에 들어왔을 때와 다른 분위기에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여긴 깨끗하네?”

“청소시키니까.”

“어머니의 방은 방치하고?”

“그건…… 깜빡했어.”

헬리아는 데이지궁의 벽을 쓸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현재 사용하고 있진 않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마음이랄까. 데이지궁은 헬리아에게 옛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거기도 가볼까?”

“거기?”

“가장 좋아하는 곳.”

헬리아는 데이지궁 옆에 있는 이름 없는 호수를 좋아했다. 그녀가 진정으로 이곳에 첫발을 디뎠던-디디기도 전에 풍덩 하고 빠져버린-곳이었다. 그 호수는 그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헬리아가 몸을 돌리자 엘라임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멀지 않은 곳에서 호수의 물 냄새가 가득 풍겨왔다. 헬리아는 호수를 내려다보며 손을 담갔다.

“9년이나 지났네.”

헬리아는 호수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곳에 온 지 9년.

가끔 지구가 그립기도 했다. 자신이 남기고 온 것들, 자신이 아는 사람들. 하지만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 것들.

“벌써 9년인가.”

엘라임은 엘라임 나름대로 그녀가 내뱉은 9년에 대해 생각했다. 엘라임은 흘낏 호수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헬리아를 보았다. 제 허리만 했던 어린 소녀가 어느새 품에 딱 맞는 여자가 되었다. 설마 그 어린 소녀에게 이런 감정이 들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결국 이리되었을 것이다. 자신을 처음 불러냈을 때, 그녀의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에 사로잡혀 계약을 하고 말았으니까.

“엇.”

헬리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엘라임은 순간 고개를 돌렸다. 엘라임의 행동에 헬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왜?”

“아, 아니…….”

그러나 엘라임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또 뭔 생각을 한 거야?”

요즘 들어 이 정령왕, 굉장히 엉큼해졌다. 도대체 무슨 약을 잘못 처먹었나? 정령왕을 정력왕으로 개명해야 하나?

“아, 아니라니까.”

“봐, 도대체 무슨 생각한 건데?”

“으으.”

헬리아가 엘라임에게 다가와 그의 고개를 잡아 돌렸다. 엘라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배회했다.

“그, 그게…….”

“뭔데?”

“오, 옷.”

“옷?”

엘라임은 더할 나위 없이 빨개진 얼굴로 헬리아의 몸을 돌렸다.

“뭐 하는 거야?”

“다 보인다고!”

“…….”

“옷, 다 비친다고!”

“…….”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 봤어?”

“뭐, 뭘 봐! 나, 난 아무것도 못 봤어!”

“흐음, 그 아무것도가 뭔데?”

헬리아의 짓궂은 말에 엘라임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일부러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거라면 정말 나쁜 도발이다. 그렇다면 도발에 응해 줘야지. 헬리아는 엘라임이 당황한 모습에 킬킬 웃었지만 순간 그가 등 뒤에서 껴안자 당황했다.

“에, 엘라임.”

“이렇게 하면 안 보이잖아.”

“안 보이고 말고가 아니잖아!”

꽈악.

헬리아가 바둥거릴수록 엘라임은 그런 헬리아를 더욱 껴안았다. 그녀의 냄새가 물 냄새와 함께 풍겨졌다.

“안 놓을 거야?”

“응.”

말만 늘어선. 헬리아의 표정이 샐쭉해졌다. 힘으로 풀려면 못 풀 줄 알아? 그녀가 힘을 줄 때였다.

흠칫!

헬리아는 제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몸을 움찔했다. 엘라임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다.

“헬리아.”

“……왜?”

“좋아해.”

“…….”

“정말 좋아해.”

엘라임은 힘을 주어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헬리아는 뭐라 입을 열지 못했다.

“이대로 평생 있었으면 좋겠다.”

이 순간이 영원하길. 엘라임은 더는 바라지 않았다. 자신이 헬리아를 좋아하고, 헬리아도 아마 자신을 좋아할 것이다. 지금 이 상태로도, 엘라임은 만족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 * *

쏴아아아-

아침부터 내린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더니 밤까지 빗줄기가 쏟아졌다.

아르센 왕국의 연회홀.

각국에서 온 사신단을 접대하기 위한 연회가 열렸다. 페르시아 제국과의 상황을 고려해서 최대한 검소하고 간소하게 이뤄졌다.

두리번두리번.

연회에 초대된 한 타국의 청년이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가 매력적인 청년은 어딘지 모르게 앳돼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왕자님, 그만 좀 두리번거리세요, 제가 다 부끄러워지네요.”

에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촌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는 자신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내, 내가 언제!”

금발의 청년은 바로 라비안 왕국의 차남인 알베르였다. 알베르는 에른의 말에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수십 년을 옆에서 보아온 에른이 그걸 모를까.

‘에휴, 전하도 참. 하늘을 봐야 별을 따든가 하지.’

에른의 고갯짓에 알베르는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아, 아니라니까!”

그때였다. 문 쪽에서 소리가 들리더니 한 쌍의 선남선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발에 금안을 지닌 여인은 옅은 분홍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있는 남성은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남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바로 헬리아와 이안이었다. 두 사람이 등장하자 아르센의 귀족들은 물론 타국의 귀족들조차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에른은 제 옆에 있는 알베르를 본 뒤 고개를 저었다.

헬리아와 이안은 주변에 있던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알베르와 에른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왕자님, 이쪽으로 오는데요?”

“나, 나도 알아.”

알베르가 유독 긴장하자 에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전하는 괜히 헛바람만 넣어서. 라비안 왕국의 국왕은 이번 아르센 왕국의 동맹에 두 나라의 사이를 돈독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헬리아와 알베르의 결혼을 내심 바라고 있었다. 물론 그게 성사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왕자님.”

헬리아는 알베르에게 환히 웃음을 지었다. 알베르는 그 웃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그 두근거림은 오래가지 않았다. 헬리아는 좀 더 알베르에게 다가오더니 남들은 듣지 못하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역시 너였나?”

헬리아는 알베르를 확인하고는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잖아.”

알베르는 엑시온을 떠올리곤 미간을 좁혔다. 제국만으로도 문제인데 엑시온과 흑마법사가 가세한다면 자력으로 제국을 상대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본국으로 돌아간 즉시 아버지에게 제국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행히 아버지는 그의 말을 들어주었다. 아르센 왕국에 먼저 손을 내민 것이 라비안 왕국의 입장에선 밑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만큼 제국은 위험했다.

“그런 게 있으니까.”

헬리아는 알베르의 말에 표정을 굳혔다.

마룡 엑시온. 아직 완벽히 부활하지 않았지만 결코 방심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직접 이곳에 올 줄 몰랐는데.”

“그거야…….”

알베르는 헬리아의 질문에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아버지에게 헬리아 공주와 결혼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마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알베르는 말하지 않았다.

“한데 설마 라비안의 국왕께서 어떻게 날 해보라고 한 건 아니겠지? 설마? 너랑 나를?”

“이익! 다 알고!”

알베르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모습에 헬리아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정말이지 놀리는 재미가 쏠쏠한 놈이었다. 그녀의 말처럼 헬리아는 철저히 알베르를 밥으로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창 알베르가 씩씩거리는 걸 보고 있을 때 한 중년인이 다가왔다.

“플로렌스 공작이라 하오.”

반 공대였지만 알베르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게 어울려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아르센 왕국의 유명한 소드 마스터인 플로렌스 공작이기 때문이다.

‘이자가 소드 마스터인 플로렌스 공작인가?’

그의 영지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만큼 라비안 왕국에서는 그의 존재 또한 주시하고 있는 바였다.

“라비안 왕국의 알베르라 합니다. 유명하신 공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허허, 왕자께서 영광이라 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소.”

플로렌스 공작은 알베르를 보며 웃다 헬리아를 보았다. 순간 그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그건 찰나였다.

“오셨소이까?”

플로렌스 공작은 헬리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왔느냐?”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안의 물음에 플로렌스 공작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지만 노련한 그답게 얼른 말을 이었다.

“누구 아들인지 참 잘생겼구나.”

“……정말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이안은 제 아버지의 말에 오히려 크게 놀라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 무슨 일이 있으시군요.”

아들의 미심쩍어하는 표정에 플로렌스 공작은 눈매를 좁혔다.

“농담도 못 하느냐?”

“농담하실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플로렌스 공작은 그에 심장이 따끔했지만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누굴 닮았는지 귀신같았다.

“아니, 아무 일도 없다.”

이안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 표정 변화가 없는 아버지이지만 아들인 그는 공작의 여러 표정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보여준 표정은 평소와 다른 지극히 긴장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아버지.”

공식적인 자리에선 아버지라 부르지 않는 그가 그리 말을 하자 공작은 무슨 말인가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실은…….”

그 순간이었다.

“국왕 전하 드시옵니다!”

빈센트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함께 플로렌스 공작의 입이 다시 닫혔다.

“아무것도 아니다.”

플로렌스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이제 곧 알게 될 테니.

아르센 왕국의 국왕 빈센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도저히 오십 대라고는 보기 힘든 외모의 소유자. 철혈의 미소라 불리며 아르센 왕국을 지배하고 있는 게 바로 빈센트였다. 아르센의 귀족들은 그런 빈센트를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타국의 귀족들은 소문의 국왕을 직접 보게 되어 호기심 어린 눈이었다.

뚜벅뚜벅.

빈센트가 단상에 올라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리 아르센 왕국을 찾아주어 고맙소.”

빈센트가 좌중을 훑으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 제국이 대륙에 전쟁을 선포한 것을 모두 알고 있을 것이오. 그것은 이 대륙의 나라들을 무시한 처사이며 이는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사안이오. 또한 저들은 흑마법사를 대동해 우리들의 대지를 짓밟으려 하고 있소. 지금은 우리 모두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할 때이오.”

빈센트의 차분한 어조에 귀족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연회를 즐기고 있지만 실상 그들의 마음속에는 제국의 전쟁 선포에 대한 불안감과 긴장감이 가득한 상태였다.

빈센트는 긴장으로 물든 홀 안을 둘러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하나 지금은 잠시의 고민을 잊고 즐겨주시길 바라오. 어쩌면 내일은 지금처럼 즐기지 못할 터이니.”

빈센트가 가볍게 웃음을 짓자 귀족들은 그나마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돌아가 편히 연회를 즐기며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빈센트는 단상에서 내려와 헬리아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리아.”

빈센트는 헬리아를 보더니 얼른 그녀를 품에 안았다. 물론 정자에서처럼 꽉 껴안지는 않았지만 애정이 듬뿍 담긴 포옹이었다.

“정말 예쁘구나.”

“드레스 감사합니다.”

헬리아는 빈센트의 환한 웃음을 대하자 괜한 걱정을 했나 싶었다. 하기야 아버지가 드레스 하나 선물해 준 게 무슨 큰일이라고.

헬리아가 싱긋 웃어 보이자 빈센트는 옅게 웃음을 지으며 약간 허리를 숙이고 헬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름다운 공주님,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헬리아는 피식 웃으며 빈센트의 손을 잡았다.

“물론이지요.”

“아까 하려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빈센트와 헬리아가 홀 중앙으로 나아가 춤을 추기 시작할 때 이안은 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니다.”

플로렌스 공작은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아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지 않습니까?”

플로렌스 공작은 집요한 이안의 질문에 미간을 좁혔다.

‘도대체 누굴 닮은 건지.’

형인 아인하르트는 부드러운 성격을 지녔고, 막내인 듀크는 활발하면서도 쾌활한 성격이었다. 한데 이안은 정말 누굴 닮았는지-본인만 모르고 있다-원칙주의자에 꽉 막힌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다 집요하기까지.

“크흠, 내가 무슨 말을 했던가?”

“무언가 말씀하시려고 하신 게 아닙니까?”

“글쎄.”

“공작님.”

이안이 정색하고 플로렌스 공작을 보자 공작은 속으로 뜨끔해졌다.

“제가 아버지 표정 하나 읽지 못할 거라 생각하신 겁니까?”

“크음.”

“헛기침으로 외면하셔도 소용없습니다. 공주님과 관련이 있는 일입니까?”

공주를 보고 안절부절못하던 공작이 떠올라 물었다. 공작은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지만 아들인 이안에겐 통하지 않았다.

“역시 공주님과 관련된 일이군요.”

“…….”

“공주님에게 보고하겠습니다.”

“자, 잠시.”

공작은 얼른 이안을 말렸다. 지금 와서 공주가 나선다면 정말 일이 더 골치 아파진다. 하지만 그래 봐야 어차피 오늘 알게 되겠지.

‘하아…… 빈, 도대체 왜 일을 이렇게 만들어서…….’

못내 빈센트가 원망스러워진 공작이었다. 그는 크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이지 몇 년은 훌쩍 늙은 것 같았다. 공작은 제 아들을 살펴보았다. 자신을 똑 닮은 눈동자로 직시해 오는 아들의 모습에 더는 숨길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 역시 이 일과 관련이 있으니 알 자격이 있었다.

“그래, 이제 와 너에게 숨길 수도 없겠지. 하나 내가 지금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이제 다 알게 될 거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안이 미간을 좁히며 묻자 플로렌스 공작은 턱을 쓸어내리며 한창 춤을 추고 있는 빈센트와 헬리아를 보았다. 그리고 다시 아들을 바라보았다.

“이 일은 내 뜻은 아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공작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 또한 결국은 빈센트의 뜻을 받아들였으니 말이다. 공작은 그답지 않게 자조 섞인 말을 내뱉었다. 이안은 그럴수록 더욱 의아해졌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후우, 나야 네 의견을 좀 더 존중해 주고 싶었다. 아니, 최소한 이렇게 갑작스럽게 발표하는 건 아닌데. 한데 너무 완강했다.”

“완강하다니…….”

아르센 왕국의 최고 귀족인 플로렌스 공작이 제 뜻을 펼치지 못할 정도의 상대는 몇 명 되지 않는다. 아니, 딱 한 명밖에 없을 것이다.

“도대체 전하께서 무슨 일을 벌이신 겁니까?”

“그건…….”

공작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리 함께 춤을 춘 것도 그날 이후 처음이구나.”

빈센트는 헬리아의 손을 꼭 잡으며 웃음을 지었다. 헬리아의 생일날 그녀와 춤을 춘 이래 거의 1년 만이었다.

“1년 전만 해도 어린애 같았는데.”

“그때랑 지금이랑 그리 차이는 없거든요?”

“후후후.”

빈센트는 따뜻한 눈으로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1년 전만 해도 헬리아는 철저히 타인의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그래서 빈센트는 지금 이 순간이 더 남달랐다.

“조금 더 춰볼 걸, 아까워.”

빈센트의 표정이 흐려지자 헬리아는 뭘 그런 걸 아쉬워하냐며 웃으며 말했다.

“또 추면 되죠.”

“후훗, 그러면 되겠구나.”

이윽고 노래가 끝이 났다. 빈센트에겐 5분이 마치 5초처럼 짧게 느껴졌다.

“아버지?”

“아, 벌써 끝나 버렸구나.”

빈센트의 표정이 아쉬움이 가득하자 헬리아는 이번엔 그녀가 웃으며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럼 저와 한 곡 더 추시겠습니까?”

헬리아가 춤을 권하자 빈센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야 그녀의 미소를 마음껏 볼 수 있게 되었다.

빈센트는 그것이 기쁘면서도 슬펐다.

‘좀 더 일찍…….’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후회하며 빈센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물론이지요.”

그렇게 빈센트와 헬리아는 연달아 두 곡을 추고 플로렌스 공작과 이안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이안의 시선이 빈센트를 향해 부딪쳐 들었다. 자연히 빈센트의 눈이 플로렌스 공작을 향했다. 공작은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결국 이야기를 했나 보군.’

빈센트는 헬리아의 손을 붙잡고 이안에게 다가갔다. 이안은 딱딱한 표정을 지은 채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하고 있었다.

빈센트가 희미하게 웃었다.

“자, 이제 젊은 사람끼리 즐겨야지.”

“…….”

빈센트는 웃으며 헬리아를 이안에게 넘겨주었다. 이안은 빈센트의 손에서 헬리아의 손을 넘겨받았다. 빈센트가 두 사람의 손을 꼭 포개며 말했다.

“잘 부탁하마.”

“…….”

“아버지?”

헬리아는 영문을 모른 채 이안의 손을 붙잡고 홀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헬리아와 이안이 중앙으로 나아가자 빈센트와 춤을 출 때와 달리 연회장에 모인 사람이 모두 눈을 빛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춤을 추면서도 헬리아는 빈센트에게 신경이 쏠려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빈센트의 표정이 이상했다. 이안이 플로렌스 공작의 표정을 알아챈 것처럼, 헬리아도 빈센트의 표정이 평상시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안.”

이안의 표정은 조금 굳어 있었다. 헬리아의 미간을 좁혀졌다.

“뭔가 들은 거지?”

“…….”

“대체 뭐야?”

대답 대신 이안은 헬리아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헬리아는 그런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굉장히 분해하고 있었다.

“이안?”

“결정하는 건 공주님의 몫입니다.”

이안이 나직한 말로 헬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대체 무슨 말이야?”

그러면서 이안은 더욱 세게 그녀의 허리를 옭아맸다. 이안의 검은 눈동자가 더욱 짙어졌다. 헬리아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음악은 끝이 났다.

“이안.”

음악이 끝나자 헬리아는 이안을 붙잡았다. 하지만 먼저 빈센트가 그들 앞에 다가왔다.

“아버지?”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묘한 느낌. 헬리아는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불안해하는 플로렌스 공작, 뭔가를 짐작한 이안. 그때서야 헬리아의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게 있었다.

‘설마…….’

헬리아는 빈센트를 보았다. 빈센트는 옅게 웃으며 헬리아를 보았다. 그 웃음엔 왠지 모를 씁쓸함이 담겨 있어 헬리아는 입을 열지 못했다.

“한 가지 발표할 게 있소.”

빈센트의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귀족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빈센트는 좌중을 훑어보며 눈매를 휘었다.

“여기 내 딸 헬리아와.”

빈센트가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헬리아는 설마 하는 눈으로 빈센트를 보았다. 빈센트는 곧장 이안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버지!’

헬리아가 입을 열려는 순간, 빈센트의 입이 먼저 열렸다.

“플로렌스 공작의 장남 이안 플로렌스가 오늘 약혼을 하게 되었소.”

“……!”

좌중은 모두 숨을 죽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가장 놀란 것은 바로 헬리아였다.

“모두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 주길 바라오.”

웅성웅성.

귀족들은 빈센트의 발표에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워낙 두 사람이 잘 어울리는데다가 이전부터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소문이 있었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아버지, 대체!’

헬리아는 빈센트의 발표에 놀란 듯 눈이 커졌다. 약혼이라니! 헬리아는 처음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곧 그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자신들을 향해 보내오는 박수 소리와 빈센트의 미소가 이것이 현실임을 일깨워 주었다.

‘아버지!’

헬리아는 빈센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빈센트는 그녀에게 어떠한 말도 해주지 않았다. 어째서, 왜? 빈센트에 대한 배신감과 함께 머리엔 물음표가 떠올랐다. 이런 상황을 아예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현재 아르센 왕국에서 가장 헬리아와 가깝고 그녀의 배우자로 많이 거론된 이가 바로 이안이니까.

언젠가 한번은 이안과의 관계에 대해 거론되는 일이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일이 진행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최소한 이야기는 해줬어야 하잖아?’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다. 왜 미리 그녀에게 말하지 않고 이런 일을 벌였는가.

‘내가 반대할 거라 생각한 건가?’

물론 선뜻 승낙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을 안은 채 거부감이 들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꽈악.

빈센트는 헬리아의 속내를 읽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인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미안하구나.”

‘……왜 그러신 건가요?’

헬리아는 차마 주변의 시선 때문에 그리 말을 내뱉지 못했다. 빈센트는 알아들었는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부디 행복하거라.”

“…….”

빈센트는 환히 웃었다. 한데 그 웃음 속에 슬픔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째서?

“아버…….”

“어머, 공주님, 정말 축하드려요!”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

순간 헬리아와 빈센트 주위로 그녀의 약혼을 축하하러 온 사람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 순간 스르륵 빈센트의 손이 풀렸다. 헬리아는 그의 손을 붙잡으려 했지만 빈센트는 사람들 사이로 점점 멀어져 갔다. 헬리아는 그런 빈센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때 그의 곁으로 이안이 다가왔다.

“공주님.”

“이안.”

헬리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좀 전에 이안이 한 말이 어떤 뜻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알고 있었어?”

“…….”

“아니, 방금 들은 거겠지.”

이안은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헬리아는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는 헬리아와 함께 아르센 왕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거기다 그 외엔 거의 그녀와 함께 있었다. 이런 일을 꾸밀 시간도, 그런 성격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어떻게 할 건지 결정하는 건 공주님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그렇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오늘 이후 아르센 왕국 전역은 물로 타국에까지 그들의 약혼 소식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뭘 더 할 수 있겠는가. 이안은 그런 헬리아의 걱정을 비웃기라도 하듯 옅게 웃음을 지었다.

“내가 널 선택하지 않는다면?”

“무마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렇게 말한 이안이었지만 입맛은 썼다. 좋아하는 여자에게 거부당하는 걸 좋아할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이안은 그녀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강요해 봤자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없다. 그렇기에 이안은 그리 답할 수 있었다.

약혼은 약혼일 뿐 결혼하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무마할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약혼이 진행된 이후엔 무마가 힘들어진다. 무엇보다 이안 스스로도 그때는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헬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있는 빈센트를 응시했다.

‘아버지…….’

빈센트는 이유 없이 행동할 사람이 아님을 헬리아가 제일 잘 알고 있다.

‘이유가 있을 거야, 무슨 이유가.’

그렇게 생각하고 헬리아가 빈센트에게 다가가려 할 때였다.

“…….”

갑자기 느껴지는 서늘한 시선에 옆을 돌아본 순간, 헬리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엘…… 라임?’

“흐음, 흐음~”

엘라임은 창가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푸른 머리카락과 닮은 푸른빛이 도는 정장을 입고 있었다.

“놀라겠지?”

매번 파티엔 거의 참석하지 않았던 엘라임이었다. 애초에 참석할 의무도, 이유도 없기에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가지 않으니 언제나 헬리아는 이안과 함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옆에 있으면 헬리아가 꼭 이안과 함께 있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이제야 그걸 알다니…….”

엘라임은 땅을 치고 후회하며 다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테라스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러곤 곧장 헬리아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워낙 눈에 띄기에 그녀를 찾는 건 쉬웠다.

‘아, 저기 있다.’

엘라임은 헬리아를 놀라게 해줄 생각으로 작게 키득거리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국왕과 함께 있었다.

“헬…….”

“……오늘 약혼을 하게 되었소.”

그 순간, 빈센트의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엘라임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약…… 혼?”

아무리 정령이라지만 헬리아와 함께 지내면서 별의별 것을 다 보았다. 그가 약혼이라는 뜻을 모를 리 없었다.

“……약혼이라니?”

누구와? 앞의 말을 듣지 못한 엘라임은 누가 누구와 약혼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왜인지 그의 가슴이 불쾌하게 뛰기 시작했다. 엘라임의 눈이 빠르게 빈센트의 주위를 훑었다.

“이안?”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 언제나 헬리아의 옆에 있던 이안이 곁에 있었다. 그 약혼이라는 것이 바로 이안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면 이안이 약혼을?

엘라임의 불안감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누가 이안과 약혼하는 것인지 알아야 했다. 엘라임의 걸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

그녀였다. 엘라임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어…… 째서?’

이안의 곁에는 헬리아가 서 있었다. 엘라임은 자신이 잘못 판단한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심장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약…… 혼이라고?”

엘라임은 여전히 잘못 들은 것처럼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누가 봐도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어째서?”

엘라임은 왜 헬리아가 약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런 건 말 안 했잖아? 엘라임은 다시 헬리아를 보았다.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헬리아는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에게 직접 물어봐야 했다. 하지만 엘라임은 헬리아에게 더 다가갈 수 없었다. 엘라임의 발걸음은 점점 뒤로 밀려났다. 마치 그들과 자신 사이에 결코 다가갈 수 없는 벽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 벽이 그를 뒤로 물러나게 만들었다. 명확히 만들어지는 경계선. 그건 헬리아와 자신. 인간과 인간이 아닌 정령의 존재였다.

“나는…….”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데이지궁 앞에서 비를 맞으며 그녀를 안았을 때 엘라임은 영원히 그렇게 헬리아의 옆에 있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게 아니었어. 엘라임은 헬리아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 되는 게 결코 좋을 리 없었다. 그건 명백한 질투, 독점욕이었다. 그리고 엘라임은 이 순간, 그것을 깨달았다. 뱃속에서 시커먼 것이 그를 옥죄었다. 어째서 자신은 저 자리에 있지 못하는가. 왜 자신은 그녀의 옆에 있지 못하는가.

자신은 왜 정령인가.

* * *

타닥타닥.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엘라임! 엘라임!”

아무리 불러 봐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헬리아는 빗속을 뛰어갔다. 차가운 비가 그녀의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엘라임!”

불러도 대답 없는 엘라임을 헬리아는 계속 불렀다. 하지만 불러서 그에게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하지? 뭐라고 해야 하는 게 맞는 것일까?

“엘라임!”

자신이 이렇게 그를 찾는 건 그가 자신을 본 순간 보였던 그 표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치 배신당한 것처럼 슬프게 짓는 미소. 자신이 아버지에게 느낀 배신감처럼 그도 자신에게 그렇게 느꼈을까.

헬리아는 그를 찾아 뛰고 또 뛰었다. 어차피 이렇게 뛰어봤자 중간계로 갔다면 별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헬리아는 머리가 복잡해 그런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직 그가 중간계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엘라임! 어디 있는 거야!”

쏴아아아-

헬리아의 목소리가 겨울의 차가운 비에 파묻혔다. 그녀의 발걸음이 자연히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정처 없이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헬리아는 몸이 움직이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하아.”

헬리아는 비에 젖은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다. 이런 빗속에 장시간 서 있다 보면 아무리 헬리아라도 몸이 차가워지게 마련이지만 그녀의 몸은 아직 따뜻했다.

헬리아는 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열여덟 생일에 엘라임이 준 선물. 정령의 목걸이는 언제나 그녀의 몸을 따뜻하게 유지시켜 주었다.

“도대체 이 바보는 어디에 있는 거야?”

당장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지만 어떤 것이라도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최소한 자신도 몰랐던 일이라고. 그렇게라도 변명이라도 해야 이 답답한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엘라임…….”

그때였다.

“여긴…….”

문득 주위를 둘러보자 낯익은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빗물에 젖은 짙은 호수 냄새가 그녀의 코로 스며들었다.

“……호수.”

그녀의 발걸음이 자연히 호수가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차가운 호수 위에 엘라임이 서 있었다. 그는 호수 한가운데에 서서 내리는 비를 맞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애처로우면서도 신비로워 헬리아는 가만히 그를 바라만 보았다.

호수가 시작되는 끝부분에 헬리아가 섰다.

“엘라임.”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엘라임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치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듯, 엘라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엘라임.”

그는 여전히 답하지 않았다. 헬리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엘라임의 주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그의 모습이 흐릿한 건지 마치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엘라임!”

다시 한번 큰 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엘라임은 돌아보지 않았다. 어째서 돌아보지 않는 걸까? 헬리아는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 답답함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찰박찰박.

엘라임에게 다가가려 하자 호숫물이 발밑을 스친다. 헬리아는 이내 플라이 마법을 시전해 그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 순간 엘라임의 목소리에 그녀의 움직임이 멎었다.

“오지 마.”

엘라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헬리아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곤 그가 있는 호수 중앙까지 날아가기 시작했다.

“제발 오지 마.”

“…….”

다시 한번 들려온 목소리에 헬리아는 이번엔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엘라임의 목소리가 너무나 간절했기에 헬리아는 더 다가가지 못하고 멈춰 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왜?”

오랫동안 빗속에 있었던 탓일까, 아님 다른 이유 때문일까. 그녀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그냥 날 내버려 둬, 헬리아.”

엘라임은 여전히 헬리아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야 알아차려 버렸다. 자신의 마음속에 얼마나 새카만 욕망이 자라고 있었는지. 그녀와 마주한다면, 그녀 역시 알아차릴 것이다. 그게 싫었다.

엘라임은 헬리아에게 자신의 이 시커먼 욕망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온몸을 지배하는 뜨거운 불길이 엘라임은 낯설기만 했다. 이런 감정은 난생처음이었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엘라임은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내심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모른 척해 왔던 것일 수도 있다. 마주하기 싫어서, 자신 안에 이런 어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 하지만 곧 엘라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질투.

헬리아가 이안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순간 이안을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그 감정에 엘라임은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 그건 물의 정령왕인 그에게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또한 선을 벗어나는 일이다. 정령왕으로서의 입장이 그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언제나 냉정해야 할 그의 머릿속에 자꾸만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떠올랐다. 그래서는 안 되지 않는가. 자신은 정령왕인데.

“엘라임.”

“가.”

엘라임의 목소리가 애처롭게 울렸다. 하지만 헬리아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럼 왜 여기에 있는 거야?”

“…….”

엘라임의 어깨가 떨렸다. 정말로 그가 자신이 가길 원했다면 이런 곳에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예 그녀가 쫓아갈 수 없는 중간계로 가버리면 헬리아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엘라임은 제 눈앞에 있었다. 쫓아와 달라고. 그 마음을 모르지 않는 헬리아였다.

헬리아는 좀 더 그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아직 그와의 거리가 제법 멀었다.

“언제까지나 내 옆에 있어준다고 했잖아?”

그 순간 엘라임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괴로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헬리아는 심장이 욱신거렸다.

엘라임은 머뭇거리다 이내 입을 열었다.

“있을 거야, 안 떨어져.”

그러나 엘라임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중요한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언제까지나 그녀 옆에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했다. 하지만 시커먼 욕망을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만큼, 그녀도 자신을 생각해 주기를. 그녀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기를.

오늘 헬리아와 이안의 약혼이 아니었다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헬리아의 옆에 다른 남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이 아닌 다른 자가. 그리고 이제 정말 다른 자가 있게 되었다. 그럼 자신은 이제부터 헬리아가 다른 이의 것이 되고 다른 이와 함께 자고 하는 것을 봐야 하는 건가?

‘싫다. 절대 싫어.’

싫다. 그것이 엘라임의 본심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찌하겠는가. 헬리아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자신은 그저 정령일 뿐인데. 뭐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게 엘라임을 숨 막히게 만들었다.

“약혼식은…….”

흠칫.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의 어깨가 떨려왔다.

“나도 몰랐어.”

“…….”

엘라임의 고개가 돌아갔다. 헬리아와 엘라임의 시선이 마주쳤다.

“정말이야.”

“하지만 언젠가 할 거지?”

“…….”

헬리아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말처럼 헬리아는 언제까지 혼자 있을 수 없다. 그녀는 아르센 왕국의 공주이며 후계자이다. 그런 그녀가 혼인하지 않는다면 그건 나라의 문제였다. 하지만 왜 이리 답답한 것일까. 헬리아는 저를 보지 않는 엘라임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엘라임.”

“…….”

“엘라임.”

“가.”

“정말 안 볼 거야?”

“그래.”

엘라임의 단호한 거절에 헬리아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가슴속에 쌓였던 것이 한순간 터져 나왔다. 이 상황이 답답하고 화가 났다.

헬리아가 다시 한번 더 물었다.

“정말 보지 않을 거야?”

“…….”

“그럼 어쩔 수 없지.”

플라이 마법으로 수면에 떠 있던 헬리아가 그대로 마법을 풀어버렸다. 당연히 헬리아는 곧장 호수 아래로 빠지고 말았다.

풍덩!

“……!”

순간 엘라임은 뒤를 돌아볼 뻔했다. 하나 헬리아가 호수에 빠져 죽을 리 없다. 분명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려는 수작임을 알아차렸다.

‘그런 걸로 넘어가지 않아.’

엘라임은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엘라임이 돌아보지 않으면 곧 물속에서 나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헬리아를 정말 모르고 한 생각이었다.

쏴아아아-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엘라임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귀를 세웠다. 호수에는 빗소리만이 나직이 들려올 뿐이었다. 헬리아의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

숨을 죽이고 기다려도 헬리아가 수면 위로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 정도는 헬리아라면…….’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1초, 2초, 3초…….

그럴수록 엘라임의 심장은 초조하게 뛰었다.

“……젠장!”

엘라임이 고개를 돌렸다. 없다. 호수 위를 모두 살펴봐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바보가!”

자신을 돌아보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엘라임은 입술을 깨물고 얼른 호수 아래로 헤엄쳐 들어갔다. 정말 바보 같았다. 헬리아가 어떤 성격인 줄 알면서도 고집을 부리다니. 그녀는 한번 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었다. 그건 엘라임 자신이야말로 잘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했다.

‘헬리아!’

캄캄한 호수 아래, 헬리아가 두 눈을 감은 채 그렇게 잠겨 있었다. 엘라임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는 서둘러 헬리아에게 다가가 그녀를 호수 밖으로 끌어 올렸다.

“헬리아! 헬리아!”

그녀의 몸을 흔들었지만 미동조차 없었다. 순간 엘라임은 너무 놀라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헤, 헬리아!”

“……쿠, 쿨럭!”

“헬리아!”

“……이제야 보는 거야?”

“이, 이 바보가!”

“네가 보지 않으니까, 쿨럭!”

헬리아는 호수 물을 내뱉으며 쿨럭거렸다. 어쨌든 그녀의 의도대로 엘라임은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냥 내버려 두라니까!”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

“왜!”

“…….”

“왜 내버려 둘 수 없는데?”

“…….”

그 말에 헬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자 엘라임의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그렇잖아. 헬리아는 입술을 깨문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건데?”

“알아버렸어.”

“……뭘?”

“내 마음을, 단지 좋아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걸.”

“…….”

“언젠가 네 곁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게 될 거라고 생각은 했어. 그래도 난 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어. 그래, 그런 줄 알았어.”

“엘라임…….”

“하지만 아니야.”

헬리아는 엘라임의 눈동자를 보곤 낯선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헬리아가 몸을 움직이자 엘라임이 단단히 그녀의 몸을 붙잡았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누가 널 만지는 것도, 옆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싫어.”

“…….”

“그치만 안 되잖아?”

엘라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도 알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헛된 생각인지. 그는 인간의 탈을 쓴 그저 정령일 뿐이다. 거기다 헬리아는 한 나라의 공주다.

엘라임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헬리아는 그런 엘라임에게 손을 뻗었다. 엘라임이 몸을 돌려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헬리아는 갈 길을 잃은 손을 쓸쓸히 내리며 엘라임을 보았다. 머리가 복잡했다. 도대체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헬리아는 아직 제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녀는 엘라임도 이안도 잃고 싶지 않았다.

“결정하는 건 공주님의 몫입니다.”

귓가에 이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누군가를 선택한다는 것. 하지만 그것은 곧 다른 누군가를 잃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헬리아는 그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다.

‘내 욕심이었나.’

그건 불가능하다고, 결국엔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올 거라고 헬리아는 어느 순간 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그 순간이 오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엘라임.”

헬리아는 그저 그의 이름만 되뇌었다. 엘라임은 웃었다. 그 웃음엔 씁쓸함이 가득했다. 그녀가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이미 그는 자신의 욕망을 알아버렸다. 결코 이전과 같을 순 없었다. 결국 그녀의 선택만 남았다.

“헬리아.”

“…….”

“약혼해.”

‘약혼하지 마.’

“뭐, 검둥이 녀석이 성격은 무뚝뚝해도 나쁜 놈은 아니잖아.”

‘날 선택해.’

“행복하게 해줄 거야.”

엘라임은 환히 웃었다. 그 순간, 엘라임의 몸이 흐릿하게 변해갔다. 마치 영원히 사라질 것처럼.

헬리아는 손을 뻗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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