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0/42)

제2장 구출

으슥한 밤. 풀벌레마저 소리를 죽이고 잠에 빠져들 시각, 적막 속에서 한줄기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은 한 저택의 창문으로 파고들었다. 저택의 경비원들은 늦은 밤 고개를 꾸벅꾸벅 흔들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스윽.

“으음?”

그때 바람이 경비원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경비원은 순간 눈꺼풀을 들어 올렸지만 이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금 눈꺼풀을 닫고 꾸벅꾸벅 잠에 빠져들었다. 바람은 경비원을 지나 어느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있는 침실 쪽에서 고른 숨을 내쉬며 잠을 자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나이가 제법 있는 중년 남성과 그보다 훨씬 어린 젊은 여인이 알몸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잠을 자고 있었다.

바람, 아니,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내가 눈을 빛냈다. 달빛에 비친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선연했다. 그가 품에서 단검을 꺼내 치켜들었다. 그러나 잠에 빠진 이들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위험을 알아채지 못했다.

푸욱!

“커억!”

곧 그의 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중년 남성의 가슴을 가르고 심장을 찔렀다.

“커, 커억!”

남자는 고통에 버둥거리다 이내 축 짓밟힌 잔디처럼 숨을 거두었다.

“으음.”

그때 남자의 몸부림에 여자가 뒤척이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백…… 작님?”

함께 자던 여인은 백작의 첩이었다. 그녀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백작을 찌른 남자를 보고 놀라 눈이 커졌다. 그러다 돌연 구름에 가려진 달빛이 드러나며 백작의 심장에 꽂힌 단검이 보였다.

여인은 새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 배, 백작님!”

“복수는 피로 갚았다.”

남자, 세인은 그 말을 남기고 창문을 통해 소리 없이 빠져나갔다. 그가 나간 후에야 여자의 비명을 듣고 기사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백작님!”

그러나 이미 백작은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 * *

상처투성이의 남자가 라몬 공작의 방 앞으로 걸어왔다.

“고하게.”

“아, 예.”

시종은 몸을 움찔했다.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상대의 짙은 살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눈빛에선 채 갈무리되지 않은 살기가 넘실거렸다. 그러나 시종이 안에 고하자 그의 눈빛에서 살기는 사라졌다. 다만 차가운 눈빛은 여전했다.

남자가 안으로 들어서자 기척을 느낀 라몬 공작이 눈썹을 치켜들고 남자를 보았다.

“용케 죽지 않았군.”

“공작님 덕분입니다.”

남자, 제롬이 눈을 번뜩였다. 이안에게 당한 제롬은 이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다만 그의 몸에는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치욕이 남아 있었다.

“무슨 일이냐?”

“벌써 열 명이나 되는 고위 귀족이 살해당했습니다.”

라몬 공작의 미간이 구겨졌다.

“배후는?”

“워낙 은밀한 놈들이라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목격자들이 그자들의 말을 들었다 합니다.”

“말?”

라몬 공작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제롬이 입을 열었다.

“복수는 피로 갚았다. 놈들은 그리 말했다 합니다.”

“…….”

라몬 공작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다 이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복수는 피로.

라몬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크소드, 이놈들이…….”

다크소드의 수장은 이미 죽었다. 해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찮은 쓰레기들이 감히…….”

“소식을 들은 귀족들이 자신들의 영지로 돌아가거나 남은 이들은 황성에 호위 병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현재 황성에는 다시 돌아올 헬리아 공주를 잡기 위해 병력이 집결된 상태였다. 하지만 라몬 공작은 귀족들의 요구를 아예 모른 척할 수만은 없었다.

“병사들을 보내라.”

“예.”

“이놈들…….”

라몬 공작은 눈매를 좁혔다. 진짜 전력은 흑마법사였기에 병사들 정도야 조금 뺀 것 정도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일이 점점 커진다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었다.

라몬 공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흑마법사 몇을 붙여줄 테니 다크소드의 본거지를 찾아 소탕해라.”

“알겠습니다.”

“그보다 공주는?”

“수배를 내렸지만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공주를 찾아 붙잡아 와라. 아직 수도 밖으로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반드시 붙잡겠습니다.”

제롬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아직도 그날의 고통이 순간순간 그의 숨을 옥죄었다. 제롬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방 안에 남은 라몬 공작은 밖을 내다보았다.

“……불길해.”

라몬 공작은 마치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 심기가 좋지 못했다.

* * *

“레아!”

“오라버니!”

레이아나는 오라비인 레오의 품에 안겼다. 레오는 파리한 안색의 레이아나를 보고 그녀를 꼭 안았다.

“몸은 괜찮은 거냐?”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이에요?”

황태자가 황제에게 끌려가 감옥에 수감된 후 레이아나도 방에 감금되었다. 그나마 감옥에 끌려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러던 중 시녀 애니의 도움으로 밖에 있던 오라버니와 접촉해 이렇게 성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다들 그녀보다 다른 일에 신경을 쓰느라 빈틈이 생겼던 것이다.

“후우, 뭐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우선 앉거라.”

레오가 레이아나를 의자에 앉힌 뒤 자신도 의자에 앉았다.

“따뜻한 우유 한 잔 가져오너라.”

“예.”

함께 온 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아나는 레오를 보았다. 레오는 그런 레이아나의 모습에 숨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그보다 몸은 괜찮은 거냐?”

“네, 괜찮아요.”

“아이는?”

“어미가 고생하는 줄 아는지 얌전하네요.”

레이아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레오는 안쓰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아이를 갖기 원했던가.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아이를 가졌는데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다행이구나. 혹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다른 이들은 모르는 것이냐?”

“네, 아직 몇 명밖에 몰라요.”

“하늘이 도왔구나. 그렇지 않았다면 쉽게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레오의 말에 레이아나는 자신의 배를 소중히 끌어안았다.

“그보다 오라버니,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후우, 황제가 대륙에 전쟁을 선포했다.”

“……!”

레이아나의 눈이 커졌다.

“전쟁이라니……!”

“그간 갇혀 있느라 소식을 접하지 못한 모양이구나. 황제가 연회에서 전쟁을 발표했다. 거기다 연회에 온 타국의 귀족들을 모두 볼모로 삼았다는구나.”

레이아나는 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태자 전하, 아니, 케이는 이제 어떻게 되나요? 아버지는요?”

“후우, 도대체 황제의 의중을 모르겠구나.”

“오라버니.”

“나도 모른다.”

“……그런…….”

레이아나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레오는 서둘러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레아.”

“케이가, 아버지가…….”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이렇게 무너지면 안 된다.”

“하지만…….”

“황성은 위험하다. 서둘러 빠져나가야 해.”

“빠져나가다니요?”

“이미 나갈 길은 확보해 두었다. 서둘러 황도를 빠져나가야 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위험해져.”

“아, 안 돼요! 아직 케이가 감옥에 갇혀 있어요, 오라버니!”

“황태자의 일은 어쩔 수가 없다. 지금 귀족들이 피습당해 어수선한 시기에 서둘러 빠져나가야 한다.”

레오가 레이아나를 설득했다. 하지만 레이아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일어섰다.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레아!”

“황태자 전하를, 케이를 두고 혼자 가지 않겠어요!”

“아이를 생각해야지 않겠니!”

“아이…….”

레아는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곧 무언가 알아차린 눈빛으로 레오를 보았다.

“아이가, 아이가 있으니까 도망치라는 거군요!”

“……레아.”

“아이가 있으니 훗날을 기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오라버니?”

“…….”

그녀의 말이 맞았는지 레오는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이런 행동을 한 것은 단순히 황태자의 아이 때문만이 아니었다.

“레아, 너라도 살아야지 않겠느냐?”

“…….”

“태자 전하는 구할 수가 없다. 황제는 미쳤어! 흑마법사까지 동원했더구나. 도저히 구할 수가 없다.”

“다른 이들은요? 태자 전하를 따르는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세요.”

“이 오라버니를 야속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왜 우리라고 그 생각을 하지 않았겠느냐. 가장 먼저, 네 안위보다, 아버지의 안위보다 태자 전하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철통 보안 속에 갇힌 태자 전하를 구할 수가 없다.”

“……그런…….”

레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레오는 레아의 손을 잡았다.

“레아, 자칫 태자 전하를 구하려다 전하도 구하지 못하고 너도 위험할 수 있어.”

“오라버니…….”

레이아나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무지 방법이 없는 것일까? 이렇게 지아비를 잃고 마는 것일까? 레이아나는 제법 불룩해진 제 배를 쓰다듬었다. 온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를 슬프게 만들었다.

‘정녕 행복해지는 건 사치였단 말인가.’

“제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누구냐!”

레오는 갑작스레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검을 뽑아 들었다. 현재 레오와 레이아나가 있는 곳은 수도 외곽 부근에 위치해 있는 빈민가로, 아무도 살지 않는 집 지하실이었다. 워낙 인적이 드문데다가 빈민가라 이런 곳까지 찾아올 사람도 없을뿐더러 위에는 경비를 서는 병사들이 있을 터. 그런데도 난데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레오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서 모습을 드러내라!”

“오라버니, 이 목소리는…….”

레이아나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에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낯선 그림자를 발견했다. 문 앞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서 있었다.

금발에 금안을 지닌 헬리아였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엘라임이 자리하고 있었다.

“헬리아!”

“아는 사람이더냐?”

레이아나의 반응에 레오가 여전히 검을 내리진 않았지만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레이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헬리아는 아르센 왕국의 공주예요, 오라버니. 저와 케이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기도 해요.”

“헬리아 공주라면…….”

레오가 그제야 검을 집어넣고 헬리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한데 어찌 이곳에…….”

상대가 레이아나와 황태자의 은인이고 공주라는 것을 알았다. 하나 이곳에 나타난 것이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헬리아는 그런 레오의 모습에 웃으며 말했다.

“정중하게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했더니 내려 보내주던데요.”

“하지만 장소는…….”

“뭐, 어쩌다 보니. 하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을까요?”

“헬리아, 무슨 말이야? 정말 케이를 구할 수 있다는 거야?”

레이아나가 헬리아에게 다가와 물었다.

“마마와 백작님이 도와주신다면 가능합니다.”

“저, 정말!”

“위험한 일이라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백 퍼센트 가능하게 만들 겁니다.”

헬리아의 눈에 비친 결의에 레오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다른 왕국의 공주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국의 황태자를 이처럼 돕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라버니!”

레이아나가 레오의 말에 소리쳤지만 헬리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저 또한 반드시 구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그 웃음에 어린 씁쓸함과 안타까움에 레이아나와 레오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반드시 구할 겁니다. 제 목숨을 걸고.”

* * *

“샅샅이 찾아라!”

“옛!”

지휘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일사분란하게 빈민가에 위치한 한 가게 안으로 들이닥쳤다.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도 없습니다!”

안을 수색한 병사들의 말에 지휘관의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벌써 달아난 게 아닙니까?”

부관의 말에 지휘관은 눈을 좁혔다. 이곳은 귀족 암살 사건의 배후인 다크소드의 본거지였다. 하지만 이미 모두 내뺀 것인지 가게 안은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샅샅이 조사해라. 혹여 단서라도 있다면 바로 가져와라.”

“예.”

병사들은 지휘관의 말에 다크소드의 본거지를 이 잡듯이 뒤졌다. 하지만 역시나 그들은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찾지 못했나?”

“오셨습니까?”

지휘관이 고개를 숙였다. 제롬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다 이마를 찌푸렸다.

“이미 다 도망갔군. 모두 철수시켜라.”

“하지만…….”

“그놈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곳에 있겠나? 그럴 바에야 귀족을 감시하는 편이 낫다.”

“예, 알겠습니다.”

지휘관이 병력을 철수시키자 제롬은 주변을 훑어보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앞에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흑마법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반은 병사들을 따라 다크소드를 저지한다. 그리고 반은 나를 따라 공주를 찾는다.”

“예, 남작님.”

제롬은 남은 흑마법사 서너 명을 데리고 먼저 움직였다. 나머지 흑마법사들은 이동하는 병사들을 뒤따랐다. 그런데 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의 모습을 주시하는 이들이 있었다.

“움직입니다.”

“좋아, 시작해라.”

“예.”

한 남자의 말에 짙은 로브를 입은 자들과 허리춤에 검을 찬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롬 일행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 뭐야, 당신들?”

그들이 다크소드의 본거지에 몰려와 있는 병사들에게 다가가자 그것을 본 병사들이 의아한 듯 물었다. 하지만 소리 없이 다가온 이들은 말 대신 검을 뽑아 들었다.

“죽어라!”

“뭐, 뭐야!”

“저, 적이야!”

“처리해라!”

“예!”

갑자기 습격한 자들의 공격에 병사들은 혼비백산 놀랐다. 서둘러 검을 들고 싸웠으나 상대의 전력은 막강했다. 그들은 일반 검사가 아니었다. 마치 오랫동안 수련해 온 기사들 같았다. 그런 자들을 일반 병사들이 이길 리 만무했다.

“끄아아아!”

병사들의 신음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를 들은 지휘관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무슨!”

그러곤 펼쳐진 광경에 눈을 크게 떴다.

“도대체 누가!”

병사들이 차례대로 적들의 손에 죽어가자 흑마법사들이 움직였다.

“다크스피어!”

“다크파이어!”

흑마법사들의 공격에 급습한 적들이 움찔했다. 그제야 병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상대가 강해도 자신들에겐 흑마법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곧 그것은 로브를 입은 적들에 의해 무산되었다.

“파이어볼!”

“아이스에로우!”

“젠장, 마법사다!”

흑마법사들은 갑작스런 마법 공격에 놀랐다. 지휘관은 그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대체 이자들은 누구지? 기사와 마법사라니……. 이자들은 단순히 우리를 습격한 게 아니다! 누군가 배후가 있다!’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지휘관은 곧 그 배후가 누군지 범위를 좁힐 수 있었다.

‘황제 폐하의 세력과 견줄 정도의 힘을 지닌 곳은…… 황태자의 세력인가!’

생각을 마친 지휘관이 서둘러 부관을 불렀다.

“지금 당장 공작께 이 사실을 알려라. 저항, 아니, 반군 세력이다!”

“바, 반군 세력이란 말씀이십니까?”

“서둘러라!”

“예!”

부관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휘관은 침중한 표정으로 그 자신도 검을 들었다.

“공작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냐!”

라몬 공작은 달려온 수하의 얼굴에 어린 다급함에 눈을 좁혔다. 아무래도 불안감이 틀리지 않은 것이다.

“수도에 나간 병력이 어느 정체 모를 세력에게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라몬 공작이 눈을 좁혔다. 도대체 누가 자신들을 공격한단 말인가!

“살아남은 병사들의 말로는 기사와 마법사라 합니다.”

“기사와 마법사?”

라몬 공작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렇다면 단순한 습격자들이 아니었다.

“어디서 병력이…….”

그 순간 라몬 공작의 눈이 번뜩였다.

“황태자, 황태자 그놈이군!”

황태자가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를 따르는 무리는 아직 남아 있었다. 대부분 연회홀에서 타국의 귀족들과 함께 감금되거나 처리되었지만 그 당시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이도 많았다.

“이런 문제가 생길까 싶어 황태자를 처리하려 한 것인데…….”

라몬 공작은 자신의 실수를 되새기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다. 실수가 생겼다면 해결하면 그만이다.

“병사들과 흑마법사들을 더 내보내라. 잔존 세력을 모조리 처리해!”

“하, 하지만 공작님! 그러면 황성 안에 있는 병력이 너무 줄어들게 됩니다.”

수하의 말에 라몬 공작의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모든 일이 척척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너무 인위적이다.’

난데없이 귀족들을 죽인 다크소드, 그로 인해 황성에선 병력을 파견할 수밖에 없었고, 그 시기에 맞춰 황태자의 잔존 세력이 들고 일어났다.

‘황성의 병력이 빠져나가고 있다. 설마 황성에 있는 병력을 밖으로 유인하려는 것인가?’

라몬 공작의 눈이 번뜩였다.

“현재 감옥을 지키는 병력은 어찌 되었지?”

“이번에 병력을 추가하려면 거기서도 불가피하게 병력을 뺄 수밖에 없습니다.”

“……!”

라몬 공작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놈이 목적인가?”

다만 황태자냐, 이안이냐. 그들의 목적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라몬 공작은 왠지 이번 일을 저지른 자가 헬리아 공주가 아닐까 싶었다. 라몬 공작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 라몬이 그런 하찮은 수에 속을 줄 아느냐?”

“하면 어찌할까요?”

“황성의 병력은 그대로 유지한다. 저들의 수에 놀아날 수야 없지.”

그런데 그때였다.

“공작님!”

천장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라몬 공작은 불길한 기운을 직감했다.

“무슨 일이더냐?”

“수도 경비대에서 헬리아 공주가 말을 타고 빠져나갔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쾅!

“그게 무슨 소리야!”

“황성이 어수선한 틈을 타 탈출한 것 같습니다.”

“이안은? 그놈은?”

“감옥에 있습니다. 누군가 침입한 흔적은 없습니다.”

“이게 대체!”

라몬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생각이 틀렸단 말인가!”

분명 헬리아 공주가 이안을 구하기 위해 올 거라 생각했다. 한데 헬리아 공주가 탈출을 하다니!

“이제 어찌합니까?”

“뭘 어찌해! 당장 병력을 모두 풀어서 헬리아 공주를 잡아와라! 반드시 잡아와야 한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라몬 공작은 헬리아 공주를 잡아오지 못할 경우 엑시온과 황제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었다.

“젠장! 이놈들이! 모두 탈출하기 위한 속셈이었나!”

라몬 공작이 주먹을 세게 쥐었다. 만약 그가 헬리아 공주와 이안의 관계를 좀 더 믿었다면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라몬 공작 그조차도 이번 계획을 완전히 믿지 못했다.

* * *

“잡아라! 반드시 잡아야 한다!”

병사들이 말을 타고 도주하는 헬리아 공주 일행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병사들은 숨이 차고 힘들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헬리아 공주의 금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바로 눈앞에 공주가 있었다. 병사들은 모두 그녀를 붙잡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쫓아라!”

병사들이 말의 고삐를 더욱 세게 쥐었다.

“젠장, 아주 죽기 살기로 쫓아오는군.”

“좀 더 힘을 내!”

“나도 알아.”

숀은 자신들의 뒤를 쫓아오는 병사들을 보곤 더욱 말고삐를 당겼다.

“그나저나 잘 속을까?”

“속아야지.”

렌스가 고개를 끄덕이곤 앞서 가는 말을 보았다. 금발이 휘날리며 말을 모는 여인. 그는 헬리아로 변장한 레브였다.

* * *

“황성에서 대거 병력이 빠져나갔습니다.”

레오의 말에 기다리고 있던 헬리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엘라임이 그녀의 뒤에 섰다.

“정말 갈 거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알베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죽을 수도 있어.”

“죽지 않아.”

“그냥 도망가는 게 어때? 어쩔 수 없잖아.”

헬리아가 알베르를 보았다. 언제나 투덜거리던 그의 얼굴에 걱정의 빛을 띠었다.

“어쩔 수 없는 건 없어. 반드시 구하러 간다고 약속했어.”

“하지만…….”

“왕자님.”

에른이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알베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는 이를 눈 뜨고 볼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헬리아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밥맛 뿅

없다고 투덜거리지나 마.”

“누가 투덜거린다고.”

헬리아와 엘라임이 이안을 구하기 위해 황성에 잠입하는 동안 그 틈을 타 레이아나와 레오, 알베르 일행은 수도를 탈출할 계획을 짰다.

“헬리아…….”

“태자 마마도 반드시 구해 올게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레이아나가 눈물을 흘리며 헬리아의 손을 잡았다. 너무 염치가 없고 미안했지만 말릴 순 없었다.

“미안해요. 매번…….”

“아이가 태어나면 많이 사랑해 줄 거죠?”

“물론이에요.”

레이아나의 얼굴은 어느새 부모의 것이 되어 있었다. 그에 헬리아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잘 부탁합니다.”

“조심하십시오.”

레오가 레이아나의 어깨를 감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

“유니, 부탁해.”

“어쩔 수 없는 분이시군요.”

유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무모한 것으로 치면 정말이지 세계 제일이지 않을까 싶다.

“가자.”

헬리아가 몸을 돌렸다.

‘기다려 줘, 이안!’

* * *

뿅!

작고 귀여운 요정의 모습에서 다시 우람한 체격의 남성으로 돌아온 유니가 말했다.

“다행히 누군가 발견하진 못한 것 같습니다.”

헬리아는 유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굳이 저 남자 모습을 유지해야 하는 건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본인이 그 모습을 더 마음에 들어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유니는 주변을 두어 번 더 살핀 뒤 당부했다.

“혹시 모르니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그랬다간 엉덩이가 꿰뚫릴지 모르니까요.”

“그건 사양하고 싶네.”

헬리아는 눈을 좁혔다. 유니는 긴장하지 않는 헬리아의 모습에 안도하는 한편 걱정이 들었다.

“아무리 병력이 빠졌다 해도 남아 있는 자가 많을 겁니다.”

“그럼 같이 가게?”

헬리아의 말에 유니는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저는 싸움 체질은 아니라서 말이죠. 호호호.”

‘그 근육질로는 상상이 안 가네만.’

헬리아는 눈을 찡그렸지만 이것만으로도 도움이 컸다. 무엇보다 유니는 다른 쪽으로 활용하는 편이 좋았다.

“잡히지 않으실 거라 믿겠습니다.”

“응, 더 이상 어둠에 사로잡히지 않아.”

헬리아는 그러면서 유니와 엘라임을 보았다.

“뭐, 혼자도 아니고.”

“호호호, 그렇군요.”

다시금 밝은 모습으로 돌아온 유니는 헬리아의 머리를 두툼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럼 조심하십시오.”

“오케이.”

헬리아가 웃으며 땅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엘라임이 따라 들어갔다. 유니는 땅굴 입구에서 두 사람이 사라지는 모습을 계속 응시했다.

“서둘러 알아봐야겠군.”

헬리아가 고군분투하는데 그라고 놀 순 없었다. 엑시온은 완전하진 않아도 이미 부활했다. 그의 부활을 막을 방도를 찾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그 귀쟁이 자식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유니는 투덜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 * *

스윽스윽.

천장이 낮은 탓에 엉거주춤 기어갈 수밖에 없는 땅굴이었다. 엘라임이 앞에서, 그 뒤를 헬리아가 기어갔다.

“그 녀석은 왜 이렇게 작게 땅굴을 판 거야? 움직이기 힘들게.”

엘라임이 투덜거리자 헬리아는 바보를 보는 것처럼 엘라임의 엉덩이를 보았다.

“바보냐, 그럼 너도 변신하면 되잖아.”

“아!”

엘라임은 유레카를 외친 아르키메데스처럼 손뼉을 치더니 이내 작은 다람쥐로 변했다.

-오, 편하다!

“멍청하긴.”

헬리아는 혀를 찼다. 하지만 엘라임의 말에 충분히 공감이 갔다. 짧은 거리도 아닌 먼 거리를 이렇게 엉거주춤 기어가는 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전에는 쫓기다시피 해서 불평할 겨를이 없었는데 이번엔 그 불평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헬리아는 기어가고 다람쥐로 변한 엘라임은 작은 발을 놀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엘라임이 입을 열었다.

-헬리아.

“왜?”

힘든 데 왜 말 시키냐는 듯 헬리아의 말투가 곱지 않았지만 엘라임은 다시 말을 걸었다.

-혹시 그 검은 녀석 좋아해?

“푸웁!”

엘라임의 기습 공격에 헬리아는 삼키던 침이 목에 걸려 버렸다.

“뭐, 뭐라고?”

-이안 좋아해?

“도대체 갑자기 뭔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네가 그랬잖아. 소중한 사람이라고 그랬잖아.

“그걸 또 기억해서 삐친 거야?”

다람쥐의 모습으로 있던 엘라임이 다시 사람으로 변해 헬리아를 마주 보았다. 장소가 협소한 탓에 헬리아는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엘라임이 헬리아를 또렷이 보았다. 캄캄한 어둠 속이라 헬리아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응시해 오는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이안을 좋아하는 거야?”

다시 한번 묻는 엘라임.

“왜 그런 걸 묻는 거야?”

“알고 싶으니까.”

“…….”

“좋아해?”

“잃고 싶지 않은 사람이야.”

헬리아의 두루뭉술한 말에 엘라임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헬리아는 캄캄한 어둠 탓에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엘라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정도면 됐어.”

“엘라임.”

헬리아의 대답에 엘라임은 왠지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기쁜 건지, 슬픈 건지. 그의 물음에 헬리아가 이안을 좋아한다고 대답하지 않아서 기쁘고, 그를 잃고 싶지 않다는 말에 한편으론 섭섭했다.

엘라임은 질투심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오랫동안 인간의 모습으로 지낸 탓일까. 독점욕이 그의 뱃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버렸다.

‘헬리아는 이런 나를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까?’

엘라임은 걱정이 되었다. 거기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다. 물론 헬리아 또한 반은 그렇지만 정령은 중간계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너무나 다른 존재. 엘라임은 과연 자신이 헬리아를 좋아해도 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이미 자각한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헬리아가 좋다. 그에겐 그것만이 진실이었다.

“만약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할 거야?”

“정령이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어?”

“암튼.”

정령은 중간계에서 데미지를 받더라도 정령계로 소환될 뿐 타격이 없다. 애초에 중간계에 존재하는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헬리아는 그것을 엘라임이 모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입을 열었다.

“다시 소환해 줄게.”

“아예 사라지면?”

“…….”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의 눈이 커졌다.

“사라질 거야?”

“아, 아니, 만약 그렇다면 말이야.”

헬리아가 과하게 반응하자 엘라임은 서둘러 말을 수습했다. 그제야 헬리아는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옛다, 하고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었다.

“설령 사라진다 해도 내 모든 걸 바쳐서라도 다시 찾아낼게.”

“헬리아…….”

엘라임은 조금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감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뭐, 솔직히 이만한 무임금 노동자를 어디서 찾겠어? 돈도 안 들고, 먹을 거…… 는 좀 들기는 해도.”

“나한테 인권은 있는 거야?”

“인권은 인간한테 있는 거고.”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은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이곳이 캄캄한 어둠 속이라 다행이었다. 엎드려 절 받기 식으로 들은 말이지만 기분은 좋았다. 엘라임이 웃으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뭐 하는 거야?”

“뽀뽀.”

“애냐?”

“그럼 입에다 해도 돼?”

“죽을래?”

“그놈한텐 하게 해줬으면서.”

“그건 불가항력이었고.”

“나도 그거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불가항력이라는 거.”

“맞고 싶지?”

헬리아가 눈매를 구기자 엘라임이 피식 웃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누가 해준대?”

“그럼 내가 하고.”

“뻘 소리 그만하고 가기나 해. 지금쯤 내가 탈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거야. 그럼 인질이 된 이안이 위험해질 수 있어.”

헬리아는 눈을 좁혔다. 다크소드와 병사들로 하여금 황성의 병력을 유인하게 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이 탈출한 것처럼 꾸민다. 그것이 헬리아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시간이었다. 저들이 미끼가 된 이안의 가치가 떨어진 것을 인지하고 손을 쓰기 전에 그를 구해야 한다. 헬리아가 다시 길을 재촉하자 엘라임도 다시 앞으로 나섰다.

‘제발 살아 있어줘, 이안!’

* * *

“어이, 저거 살아 있는 거 맞아?”

“그러게, 꼭 시체 같구만.”

칠흑같이 캄캄한 어둠 속, 횃불만이 을씨년스럽게 비추는 곳. 바로 황성의 지하 감옥이었다. 그 감옥 깊숙한 곳에 한 남자가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쇠사슬에 두 팔이 묶여 있었다. 쇠창살 밖에서 남자를 감시하고 있던 두 명의 병사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저러다 죽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걱정스런 한 병사의 말에 다른 병사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미끼 역할만 하면 되니 죽든 살든 상관없다고 하더라. 그쪽에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어찌 알겠냐고.”

병사의 말에 먼저 말을 걸었던 병사가 몸을 으스스 떨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그들이 할 일은 이 피칠갑한 채 죽어가는 남자를 지키는 일이었다.

그때 그들의 눈에 로브를 입은 남자들이 다가왔다. 바로 이안을 덫으로 삼아 헬리아를 잡기 위한 흑마법사들이었다. 흑마법사들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주변을 경계했다.

“소집 명령이다!”

그 순간, 급히 감옥 안으로 들어온 흑마법사의 말에 남아 있던 흑마법사들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명령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무슨 일이지?”

“공주가 수도를 탈출했다. 바로 추격해 잡으라는 명령이다.”

“탈출?!”

흑마법사들은 그 말에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그새 감옥 안에는 흑마법사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허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글쎄, 나도 모르겠다. 그러면 이자는 어떻게 되는 거지? 공주를 잡을 미끼 아니야? 그런데 공주는 벌써 저만치 탈출해 버렸고.”

그 말에 다른 병사가 감옥 안에 있는 이안을 보며 혀를 찼다.

“어이 형씨, 들었소? 자네가 기다리는 공주가 탈출했다는군.”

“…….”

그러나 이안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저거 죽은 거 아니야?”

“나야 모르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게 뭔가. 오히려 잘되었지. 손쓸 일도 없지 않겠나.”

그렇게 병사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이안의 한쪽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정말이지…….”

병사들은 듣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하지만 헬리아의 탈출 소식에 이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굳혔다.

‘이곳에 죽으러 올 참입니까?’

그녀가 탈출했다고? 이안은 오히려 그 소식을 듣자 그녀가 이곳으로 올 것임을 확신했다. 그래서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입가에 지어지는 미소는 어쩔 수 없었다.

* * *

부스럭부스럭.

인적이 없는 수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하지만 워낙 작은 소리인데다가 눈발까지 날리고 있어 그 모습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눈이 쌓인 수풀 사이로 은빛 다람쥐가 톡 튀어나왔다. 다람쥐는 고개를 홱홱 돌려가며 주변을 훑었다. 다행히 근처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어.

다람쥐로 변한 엘라임의 말이 들려오자 헬리아는 한겨울에 땀을 흘리며 땅굴 밖으로 몸을 빼냈다.

“쿨럭! 이안을 구하기도 전에 지치겠다.”

헬리아는 동굴 속의 자욱한 흙먼지에 기침을 내뱉곤 몸에 묻은 먼지를 털어냈다. 그녀는 검은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이렇게 흰 눈이 내리는 날이면 검은색이 더 눈에 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검은 로브를 착용했다.

유니의 정보대로라면 이안과 황태자가 갇힌 곳은 성 안쪽에 위치한 본성의 지하 감옥이다. 거기까지 가는 길이 만만치 않았다. 지근거리에 인기척이 없다 뿐이지 멀지 않은 곳에 병사들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황성에 잠입할 헬리아겠는가.

“찾았어?”

-오른쪽 50미터 지점에 두 명 있어.

헬리아보다 운신이 자유로운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로브를 깊게 눌러썼다. 그러곤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몸을 숨기거나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아주 당당했다. 그래서인지 엘라임이 발견한 두 사람에게 다가갈 동안 그녀를 제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냐?”

본성 근처에서 주변을 경계하던 두 명의 흑마법사가 헬리아를 보자 경계의 눈빛을 띠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내 헬리아가 입고 있는 검은 로브에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들이 입고 있는 로브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로브 속 헬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상대의 경계가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는 걸 느끼자 입을 열었다.

“교대입니다.”

“교대? 교대 시간이 아닐 텐데?”

흑마법사들의 고개가 좌우로 꺾인다. 하지만 헬리아는 가볍게 응수했다.

“수도 밖으로 병력을 추가 파견하게 되어 이곳은 저 혼자 서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아까까진 그런 이야긴 못 들었는데…….”

“조금 전에 결정되었습니다.”

“으음…….”

흑마법사 한 명이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너무나 당당한 헬리아의 태도에 뭔가 이상하다 여기면서도 특별히 문제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잠깐.”

계속 헬리아를 이상하게 여기던 흑마법사가 문득 그녀의 가슴 부근을 보곤 눈을 좁혔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상한 일이군. 왜 배지를 하지 않았지?”

“…….”

그 말에 다른 한 명도 헬리아의 가슴 부분을 보았다. 검은색 로브는 같은 것이었지만 그녀의 가슴 부근에는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았다. 자신들의 로브에는 드래곤 모양의 배지가 있는 것과 달리. 그제야 두 사람의 머리에 경종이 울려 퍼졌다.

“누구냐!”

“이런, 숙녀의 가슴을 너무 쳐다보는 거 아니야?”

“너, 너는!”

헬리아가 스윽 고개를 들어 올리자 두 흑마법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배지라…… 그걸 잊어버렸군. 뭐, 알려줘서 고마워.”

“뭐, 뭐라?”

그 순간 헬리아가 빠르게 흑마법사에게 다가가 심장에 마법을 시전했다. 너무나 갑작스런 공격이라 흑마법사는 채 피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그리고 바로 이어 다른 흑마법사 쪽에서도 신음이 들려왔다.

“네, 네놈이……! 커억!”

나머지 흑마법사가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왜 자신이 죽었는지 모르는 듯 두 눈을 부릅뜬 상태였다. 그런 그의 로브 밖으로 은빛 다람쥐로 변한 엘라임이 튀어나왔다. 엘라임은 헬리아의 어깨에 쪼르륵 올라갔다. 헬리아는 그 모습을 보고 가볍게 혀를 찼다.

“차라리 다람쥐로 계속 있을래? 더 쓸모가 있는 것 같아.”

힘도 힘이거니와 인간의 모습일 때보다 더 강한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건 뭘까. 그러나 엘라임은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 좋으라고.

“나 좋으라고.”

-흥!

엘라임이 팩 토라졌다. 헬리아는 잠시 피식 웃고는 죽은 흑마법사의 가슴에 달린 배지를 떼어 자신의 로브에 달았다.

“이제 완벽하군.”

헬리아는 죽은 흑마법사들을 눈 속에 보이지 않게 파묻고는 몸을 돌렸다.

누구도 헬리아를 막지 않았다. 워낙 비상사태이기도 했고, 헬리아가 변장한 흑마법사 분장도 한몫했다. 원래도 흑마법사들은 로브를 깊게 눌러쓰고 다니는지라 얼굴을 숨기고 다녀도 의심받지 않았다. 덕분에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거기에 배지도 있으니 말이다.

헬리아는 본성 아래에 있는 감옥으로 내려갔다. 그사이 여러 번 다른 흑마법사들을 마주쳤지만 운이 좋아 넘어간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에는 스윽 어두운 곳에 손수 묻어주기도 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헬리아는 간수장을 따라 감옥 아래로 내려갔다. 교대를 핑계로 대자 간수장은 두말없이 헬리아를 안내했다. 간수장도 그 무시무시한 흑마법사-라고 착각했지만-를 상대로 뭐라 입을 놀리지 못했다. 이안이 갇힌 곳은 지하 3층, 최하층에 위치한 감옥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헬리아가 간수장에게 물었다.

“다른 흑마법사들은?”

“예, 대부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최하층에는 몇 명이나 있지?”

왜 그런 걸 물어보나 싶었지만 흑마법사가 무서워 간수장은 입을 열었다.

“서너 명 정도 내려와 계십니다.”

“서너 명이라…….”

‘아직 좀 많군.’

헬리아는 뒷말을 흐리며 간수장을 따라 더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여깁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겠다.”

“아, 예.”

간수장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기울였지만 이내 끄덕이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헬리아는 희미한 촛불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갔다.

-피 냄새가 지독해.

“…….”

여전히 다람쥐로 변신해 있던 엘라임이 헬리아의 어깨에 앉아 눈매를 좁혔다. 헬리아는 혹여 이안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싶어 노심초사하며 걸음을 옮겼다.

“엘라임, 너는 황태자를 찾아봐.”

-알았어.

엘라임은 잠시 헬리아를 물끄러미 본 뒤 그녀의 어깨에서 내려와 황태자를 찾기 위해 나섰다. 헬리아는 뚜벅뚜벅 걸으며 이안을 찾았다.

“끄어어어…….”

“살려줘…….”

감옥 안에는 비명과 신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진한 피 냄새가 헬리아의 미간을 좁히게 만들었다.

“이안…….”

헬리아는 순간순간 깜짝깜짝 놀라며 이안을 찾았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은 하나같이 온몸에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점점 더 불안감이 커졌다. 그들이 이안을 어떻게 대우했을지는 안 봐도 눈에 훤했다. 그렇기에 불안했다. 그녀 주변엔 다행히 흑마법사는 없었지만 몇 명의 병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감옥 끝에서 헬리아는 병사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봐, 저 녀석 숨을 안 쉬는 거 아니야?”

“거, 그냥 내버려 두라니까.”

“그래도 보고는 해야 되는 거 아니야?”

“그러다 정말 죽었으면 어떻게 하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고.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

“그래도…….”

“간은 콩알만 해가지고. 나는 오늘까지니까 말하려면 내일 말해.”

병사들은 한 죄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헬리아는 괜히 신경이 쓰여 절로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저놈 이제 어떻게 되지? 정말 죽게 되나?”

“뭘 또 그렇게 걱정이야?”

“하지만 좀 불쌍하잖아. 그 약혼자라고 하던데, 공주는 탈출해 버리고…….”

헬리아는 병사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빠르게 다가갔다.

‘설마!’

“이름이 뭐라더라, 암튼 공작의 아들이라던데. 참 기구하네.”

“신경 꺼.”

그때 병사들은 다가오는 헬리아를 보았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대다수의 흑마법사는 이미 나간 터라 병사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

헬리아는 대답 대신 그들이 지키고 있던 감옥 안을 살폈다.

꽈악.

쇠창살을 붙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죽었나?”

스산한 목소리엔 살기마저 감돌았다. 순간 두 병사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저, 저희도 모릅니다. 그, 그대로 감시만 하라고 하셔서…….”

“그래서 치료도 하지 않았나?”

“그, 그게…….”

병사들은 왠지 이상함을 느꼈다. 왜 그런 걸 물어보지?

헬리아는 돌연 두 병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헬리아가 마법을 시전했다.

“커억!”

“무, 무슨…….”

두 병사가 헬리아의 공격을 받고 그 즉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병사들이 쓰러지자 헬리아가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병사들은 아직 죽지 않았다.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들에게 헬리아는 차갑게 말했다.

“누군가 치료를 해주면 살 거다. 아님 말고.”

그들이 이안을 치료해 주지 않은 것이 당연함에도 헬리아는 괜히 짜증이 났다.

“죽이진 않았다고.”

“그, 그억!”

병사들은 원망 어린 시선을 던져 보았지만 헬리아는 무심하게 그들의 허리춤을 뒤졌다. 그러나 감옥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헬리아는 더는 열쇠를 찾지 않고 감옥 문으로 다가가 마법으로 문을 열었다.

끼이익-

마찰음이 들려오고 헬리아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캄캄한 감옥 구석에서 피칠갑한 죄수의 몸이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

코를 찌르는 듯한 피 냄새에 헬리아는 이성이 마비될 것만 같았다.

뚜벅뚜벅.

천천히 그 죄수에게 다가갔다.

“…….”

헬리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이 멍청이…….”

헬리아는 죄수의 얼굴을 알아보고 그에게 손을 뻗었다. 죄수의 얼굴에 헬리아의 흰 손이 닿자 그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

“…….”

두 사람이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윽고 이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바보같이 여긴 또 왜 오셨습니까?”

“……도망치지도 못 할 거면서 객기는 왜 부려? 지금 네 모습이 어떤지 알아? 완전히 다진 고기 같다고!”

“……여기 있으면 위험합니다.”

“지금 네 꼴이……!”

울컥해진 헬리아가 이를 악물었다. 이안의 두 팔에선 피가 줄줄 새어 나왔고, 온몸은 온통 난자되어 멀쩡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단전은 크게 다치지 않은 듯 보였다. 상처만 회복된다면 다시 검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어찌 견뎠단 말인가. 헬리아는 이를 악물고 먼저 이안의 입에 갖고 온 포션을 흘려 넣었다. 그리고 몸에도 포션을 뿌렸다.

치이익-

“크윽!”

효과가 즉각적인 만큼 고통도 상당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헬리아는 어쩔 수 없이 약효가 강한 포션을 들고 올 수밖에 없었다.

철컹.

헬리아는 이안의 두 팔을 묶은 쇠사슬을 풀어주었다. 그러자 이안의 몸이 앞으로 무너졌다.

“이안!”

“크윽.”

헬리아는 바닥에 쓰러지려는 이안의 몸을 안아 들었다. 온몸에서 피 냄새가 짙게 풍겨왔다. 포션으로 어느 정도 치유했다고는 하나 워낙 상처가 깊은 탓에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누가 구해달라고 했냔 말이야. 네가 죽으면 꿈에 나타날까 무섭다고!”

“……하하.”

“웃긴 또 왜 웃어?”

“다행입니다.”

이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정말로 당신을 구할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이 마조히스트 같으니…….”

이안은 정말로 기뻤다. 언제나 위험한 일은 스스로 해결하는 헬리아다. 거기다 강하기까지 한 그녀를 그가 구할 일은 거의 없었다. 그 때문에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거기다 역으로 그녀에게 구함을 받은 적도 있으니 기사로서나 남자로서나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엔 그녀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

그 모습을 본 헬리아는 이 바보 같은 놈을 어찌해야 하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이 바보가 싫지만은 않았다.

“나가면 하루 종일 잔소리 들을 각오 단단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얼마든지 들어드리죠. 이안은 헬리아의 말에 피식 웃었다. 헬리아는 얼른 이안을 업고는 감옥 밖으로 나섰다.

“헬리아!”

헬리아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엔 엘라임과 그의 부축을 받으며 나온 아스칼과 황태자가 서 있었다.

“공주!”

“무사하셨군요!”

아스칼은 이안과 마찬가지로 심한 부상을 당했지만 황태자는 다행히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황태자란 신분이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도대체 여긴 어찌…….”

“나머진 나가서 듣겠습니다. 태자비 마마가, 레이아나 님이 많이 걱정하셨습니다.”

“…….”

황태자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헬리아는 이안과 아스칼, 황태자에게 검은 로브를 넘겨주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그들을 흑마법사로 착각했는지 다행히 저지하는 이는 없었다.

“이대로 빠져나가기만 하면 돼.”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이대로 갈 수야 없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헬리아와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외모를 지닌 여자. 하지만 헬리아와 달리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자.

바로 엑시온이었다.

“엑시온…….”

헬리아는 자신의 얼굴을 한 엑시온을 노려보았다. 그는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눈앞에 먹이를 둔 맹수처럼 눈이 반짝였다.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이로군.”

“…….”

“라몬, 그놈은 몰라도 나는 제법 한가해서 말이지.”

엑시온이 씨익 웃었다. 애초 계획대로 엑시온은 이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그 덕분에 그의 앞에 헬리아가 서 있었다.

척척척!

그의 뒤로 수십 명의 흑마법사가 도열해 언제라도 공격 가능하게 캐스팅을 준비했다.

‘젠장, 하필이면…….’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와 부딪쳤다. 하물며 라몬 공작만 되더라도 어떻게 해볼 수 있건만, 엑시온이라니…….

“도대체 이게…….”

황태자 케이시스는 헬리아와 똑같은 얼굴을 한 엑시온을 보고 놀란 듯 눈이 커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줄 만큼 한가하지 못했다.

“…….”

헬리아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상처는 치유했지만 여전히 내상이 심각한 이안과 아스칼, 그리고 케이시스. 지금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밖에 없었다. 엘라임이 있었지만 그도 결국 헬리아의 전력 중 하나였다. 헬리아는 쓰윽 그들을 둘러보다 이안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이안의 눈이 좁아졌다.

“절대 안 됩니다.”

“나 아직 말도 안 꺼냈어.”

“절대 당신을 내버려 두고 가지 않습니다.”

눈치도 빠르긴. 헬리아는 이안의 단호한 표정에 난감하면서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기분 가지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헬리아는 표정을 다잡았다. 이안이 뭐라 입을 열려 했지만 엑시온이 먼저 치고 들어왔다.

“네 몸을 내놔라. 그럼 다른 이들은 살려 보내주지.”

“거짓말이야.”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엑시온을 보았다.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엑시온이 자신의 몸을 차지한다면 나머지 일행의 안위는 누가 보장해 준단 말인가.

“웃기는 소리. 누구 좋으라고 몸을 내놓겠어?”

“결국 죽음을 자초하는군.”

엑시온은 애초에 그녀가 그리 선택할 줄 알고 있었는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몸이 아직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굳이 힘을 뺄 필요는 없었다.

척척척!

흑마법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엑시온이 입꼬리를 올리고 명했다.

“공주는 생포하고 나머지는 모두 죽여라.”

엑시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흑마법사들은 일제히 헬리아 일행에게 마법 공격을 퍼부었다.

콰아아아아!

거대한 마기의 소용돌이가 헬리아 일행을 향해 쇄도했다. 헬리아는 실드를 펼쳐 그들의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헬리아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이 흑마법사들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엑시온을 향했다. 흑마법사들을 모두 처리한다 해도 엑시온이 남아 있다. 그가 아직 완전히 부활한 것은 아니나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야 할 판이었다.

“엘라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절대 안 돼!”

엘라임도 이미 그녀의 결심을 알아챈 듯 고개를 세게 저었다. 하지만 이미 결정한 헬리아다.

“짐이 너무 많아서 싸울 수가 없어.”

“헬리아!”

“모두 데리고 가.”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이 눈을 부릅떴다.

“널 두고 가라고?”

“걱정 마, 괜찮아.”

“그러다 엑시온에게 몸을 빼앗기면 어떻게 할 거야!”

“안 뺏겨.”

“헬리아!”

“그 말엔 저도 동의할 수 없소.”

“가지 않겠습니다.”

케이시스와 이안이 나서며 반대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방법은 없었다. 헬리아의 눈이 선명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엘.라.임.”

“……젠장.”

엘라임은 헬리아의 낮은 목소리를 듣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장난삼아 한 적은 있어도 진심으로 헬리아가 그에게 강제로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힘을 담아 명령을 내린다면 아무리 그가 정령왕이더라도 계약자인 헬리아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마, 반드시 갈 테니까. 꼭]

‘그 말 잊지 마!’

파아아앗!

엘라임의 몸에서 빛이 번지더니 어느새 한 마리의 푸른 맹수가 되었다.

크아아앙!

-헬리아!

“가.”

헬리아가 웃으며 엘라임을 보았다. 엘라임은 몸을 돌리려 했지만 헬리아의 강한 의지가 깃든 탓인지 몸을 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무, 무슨 짓이오!”

“크윽!”

엘라임이 입에는 이안을 물고 아스칼과 케이시스를 등에 태웠다. 다른 누구보다 엘라임, 그가 가장 분했다.

“헬리아!”

이안이 벗어나려 했지만 이미 엘라임은 그들을 태우고 움직였다. 헬리아와 이안의 눈이 마주쳤다.

“얼른 갈게.”

그러니 기다려 줘. 헬리아는 웃었고, 이안은 차마 웃지 못했다.

“자, 그럼 작별 인사는 다 한 건가?”

엑시온이 홀로 남은 헬리아를 보았다. 어차피 그에겐 헬리아의 몸이 중요하지 다른 것들이 어떻게 되는지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헬리아는 씨익 웃으며 주변을 살폈다.

“미안하지만 나도 작별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은데.”

헬리아는 그들을 살리기 위해 희생을 택한 것이 아니다. 더 나은 방법이 그녀가 남는 것뿐. 그녀는 결코 승산 없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 엘라임의 기척이 이젠 거의 느껴지지 않자 헬리아가 흑마법사들을 향해 파이어볼을 날렸다.

“이따위 공격으로!”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자 엑시온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먼지와 함께 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데 먼지가 사라진 후, 그 자리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쥐새끼 같은.”

엑시온은 헬리아가 도망간 것을 알고 이를 갈았다. 하지만 멀리 가진 못했을 것이다.

“공주를 찾아라.”

“예!”

흑마법사들이 뿔뿔이 흩어지자 엑시온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기감을 펼쳤다. 헬리아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그의 기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거긴가.”

엑시온이 몸을 날렸다.

타악.

헬리아는 플라이 마법으로 성벽 위로 올라섰다. 아래에선 그녀를 찾기 위해 흑마법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녀가 황성에 있다는 소식이 퍼졌는지 이젠 병사들까지 움직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였다.

헬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잘 도망갔으려나?”

엘라임의 능력이라면 어떻게든 잘 빠져나갔을 것이다.

“돌아가면 한 소리 듣겠네.”

엘라임만 해도 무시무시한 얼굴이었다. 아마 돌아간다면 정말이지 하루 종일 잔소리를 들을 각오는 해야 될 것이다.

“돌아간다면 말이지.”

“…….”

순간 자신이 말을 내뱉은 줄 알았다. 그만큼 자신의 목소리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엑시온.”

“몸을 내놔라.”

엑시온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휘이잉-

찬바람과 함께 흰 눈이 그들 사이에 휘몰아쳤다. 헬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그 혼자뿐이었다.

‘지긋지긋하네!’

어떻게든 도망갈 생각이었던 헬리아지만 엑시온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엑시온의 몸에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헬리아를 향해 닥치는 대로 마기를 뿌렸다.

치지지직-

마기가 옷에 닿자 옷이 녹아 없어졌다.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드래곤의 힘을 쓸 수밖에 없는 건가.’

강한 힘일수록 리스크가 크다. 헬리아는 자신의 심장을 꾹 눌렀다. 만약 이 힘으로도 그를 쓰러뜨리지 못한다면 다음은 없다. 거기다 지금은 자신 혼자뿐이다.

“그 몸을 내놔라!”

엑시온은 집요하게 헬리아의 몸을 노렸다. 그녀의 몸이야말로 그가 완벽하게 부활할 수 있는 매개체였다. 그걸 눈앞에서 포기할 엑시온이 아니었다.

파지지직!

헬리아의 마법과 엑시온의 마기가 부딪쳤다. 승자는 엑시온. 그의 마기가 헬리아의 어깨를 파고들었다.

“크윽!”

피하려고 했지만 결국 어깨를 내주고 말았다. 헬리아는 피가 흘러내리는 자신의 왼팔을 보았다. 엑시온은 아직 여유만만이었다.

“후우…….”

거듭된 엑시온의 공격에 헬리아는 반격을 가했지만 점점 지쳐 갔다. 헬리아가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만 포기하시지.”

“네놈이야말로 남의 몸 그만 좀 탐하라고. 도대체 이제 와 몸은 얻어서 뭘 하려고. 세계 정복이라도 하려는 거야?”

“…….”

그 말에 순간 엑시온의 움직임이 멎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헬리아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단 한순간, 그 빈틈을 노린다. 헬리아는 숨을 골랐다.

‘지금……!’

콰아앙!

헬리아가 엑시온의 발아래 성벽을 무너뜨렸다.

그 순간이었다. 엑시온의 몸이 살짝 기울어진 것이다. 헬리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아이스애로우!”

얼음으로 된 화살이 엑시온의 심장을 겨눴다. 엑시온은 순간 쇄도해 오는 공격에 서둘러 마기로 몸을 둘렀지만 화살은 그의 옆구리를 관통했다.

“크윽.”

엑시온은 제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검은 핏물에 눈을 치켜떴다.

“감히…….”

하지만 헬리아 또한 심장에 박혀야 할 공격이 옆구리에 박히자 아쉬운 눈빛을 띠었다.

“제법이로군. 하지만 이 정도로 날 죽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엑시온은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피를 흘리고 있지만 어느 순간 그 피가 멎었다.

“이만 끝을 내도록 하지.”

엑시온이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의 마기를 끌어올렸다. 시커먼 마기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엑시온의 금빛 눈동자가 검게 변했다. 그가 손을 뻗었다. 헬리아는 실드를 펼쳤지만 마기는 실드를 뚫고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크윽.”

헬리아가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지만 마기는 풀리지 않았다.

“자, 그럼.”

엑시온이 헬리아에게 손을 대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 안으로 마기를 집어넣었다.

“몸을 내놔라!”

마기가 검은빛을 발하며 헬리아를 뒤덮었다.

그 순간이었다.

파지지직!

헬리아를 뒤덮은 마기가 균열을 일으키더니 그 틈새로 환한 빛이 새어 나왔다. 빛은 점점 더 커져 갔고 검은 마기는 괴로운 듯 꿈틀거리다 이내 환한 빛에 괴성을 지르며 사라졌다.

우웅- 우웅-

헬리아의 온몸에 금빛이 넘실거렸다. 엑시온은 눈이 부시게 환한 빛을 내뿜고 있는 헬리아를 보며 이를 갈았다.

“이 힘은……!”

과거 그를 봉인했던 그 힘. 바로 세르게니아와 같은 힘이었다.

“세르게니아!”

엑시온은 이를 갈았다. 자신을 봉인한 것도 모자라 죽어서도 자신을 방해하다니! 엑시온은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그가 아니었다.

“빼앗아주마!”

“어림없는 소리!”

헬리아의 몸에서 황금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결국 헬리아는 드래곤의 힘을 꺼내고야 말았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었다. 심장에서 원래 내 피가 아닌 다른 종류의 피가 뿜어져 나와 몸 안을 휘젓는 것 같았다. 헬리아의 입에서 주룩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시간을 오래 끌면 내가 불리해.’

헬리아는 시간이 없음을 인지하고 엑시온을 공격했다. 엑시온은 헬리아가 드래곤의 힘을 쓰자 이전과 달리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빛과 어둠. 엑시온에겐 최악의 상극이었다.

“사라져라!”

엑시온을 향해 헬리아가 드래곤의 힘을 퍼부었다. 그러자 엑시온이 고통스런 비명을 흘렀다.

“크아아아아! 세르게니아 이놈!”

엑시온의 몸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그의 힘에 적합한 몸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 명의 여자의 힘을 빼앗아 형체를 유지한 것. 헬리아의 공격에 엑시온은 형체를 유지할 힘을 잃었다.

“아, 안 돼!”

“그만 사라져!”

헬리아가 마지막 쐐기를 박을 공격을 준비했다. 그녀의 두 눈이 선명한 금안으로 빛났다. 완전히 부활하지 못한 엑시온이다. 이대로 영원히 소멸시킬 수 있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헬리아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두근! 두근!

‘아, 안 돼…… 아직……!’

그러나 그녀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마치 부서질 것 같았다. 헬리아는 엄습해 오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조그만, 조금만 더 하면…….

“크윽!”

-이대로 물러설 거라 생각하지 마라!

육신을 잃고 검은 마기가 되어 떠도는 엑시온! 헬리아의 공격에 당황한 그는 헬리아의 상태를 인지하지 못했다. 만약 알았다면 다시 헬리아의 몸을 빼앗으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엑시온은 후퇴를 선택했다.

“쿠, 쿨럭!”

헬리아는 사라져 가는 엑시온을 보며 이를 갈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오히려 지금의 그녀를 공격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헬리아의 입가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시야가 흐려지며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엑시온이 아니라 다른 자들의 손에 몸을 빼앗길 것이다. 헬리아는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움직였다.

“공주다!”

“저기 있다!”

그 소란을 일으켰으니 추적자들이 헬리아의 위치를 알아차리는 것은 당연했다. 병사들이 성벽 위로 올라오자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헬리아는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그녀의 눈에 성벽 뒤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이 보였다. 헬리아는 생각하지 않고 먼저 몸을 움직였다.

* * *

성벽에서 꽤 멀리 떨어진 강가. 아스칼과 이안, 케이시스를 데려온 엘라임이 변신을 풀고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대체 이게 무슨…….”

황태자 케이시스는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안이 벙벙했다. 헬리아와 닮은 그 여자는 또 누구며, 어째서 사람이 표범으로 변하는가. 하지만 지금 누구도 그들의 질문에 답해 줄 이는 없었다.

“왜 그녀를 두고 왔지?”

이안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는 엘라임을 노려보며 말했다.

“말해라. 어째서 그녀를 두고 왔지?”

엘라임이 대답하지 않자 이안이 다가가 멱살을 쥐었다.

“대답해라!”

그러나 엘라임의 표정을 본 순간, 이안은 뭐라 입을 열지 못했다. 자괴감, 괴로움, 분함. 엘라임의 표정에는 그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누구보다 괴로운 사람은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의 의도가 아니었다. 그 순간, 그는 헬리아의 명령에 따라 그들을 안전한 곳에 데려다 줘야 했다.

헬리아는 그곳에 두고서! 엘라임은 몸이 부들거리는 화를 참아내기 위해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누구에게 화를 낸단 말인가. 정령이 제대로 된 힘을 쓰기 위해선 정령사가 그만한 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지금의 헬리아의 힘으론 물의 정령왕 엘라임의 힘을 완벽히 사용할 수 없었다.

엘라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입술에 붉은 피가 맺혔다.

“헬리아 공주는 어떻게 된 거요?”

케이시스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서로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닌 듯싶었다. 이안이 케이시스의 말에 엘라임을 보았다. 엘라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사해. 하지만…….”

그가 아직 중간계에 있다는 것은 헬리아가 정신을 잃지 않아다는 것, 그것은 곧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영혼으로 묶인 그들이기에 엘라임은 헬리아가 무사한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엘라임은 이를 악물었다.

“희미해지고 있어…….”

“젠장!”

“서둘러 찾아봐야 되는 거 아니오?”

케이시스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라고 헬리아 공주의 희생으로 살아난 것이 기쁠 리 없었다.

“어디에 있지?”

“움직일 수 없어.”

“대체 네놈은!”

이안이 엘라임을 노려봤지만 엘라임도 화가 날 지경이었다. 한 번도 헬리아는 강압적으로 그에게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헬리아는 드래곤의 피를 이은 존재. 그녀의 힘이 담긴 말은 정령왕인 엘라임을 묶어두었다. 그는 물의 정령왕이었지만 또한 헬리아의 정령이었다. 그녀가 강한 의지를 담아 명령을 내린다면 반드시 수행해야 한다.

“찾으러 간다.”

“안 돼.”

헬리아를 찾으러 간다는 이안, 그리고 헬리아의 명령에 의해 그를 말리는 엘라임. 두 사람의 대치가 길어졌다. 케이시스와 아스칼은 난감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부스럭.

갑자기 들려온 수풀 소리에 일행은 모두 긴장했다. 이안은 검을 들려 했지만 허리춤에 검이 없었다. 감옥에서 빼앗긴 탓이었다. 결국 이곳에서 전력은 엘라임밖에 없었다.

부스럭.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려오고 그다음 소리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케이!”

“……레, 레아?”

황태자비 레이아나가 뛰쳐나오며 케이시스의 품에 안겼다.

“케이! 케이!”

“어떻게 레아가……?”

성에 있어야 할 레이아나가 이곳에 나타나자 케이시스는 품에 안긴 레아를 떼어내고 자초지종을 물어봤다.

레이아나는 자신의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궁에서 빠져나왔어요, 지금은 오라버지와 함께 있어요.”

“정말, 다행이야…….”

레이아나를 본 케이시스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그가 감옥에 끌려간 뒤 가장 걱정된 것은 레이아나의 안위였다. 하지만 지금 이곳이라고 안전하진 않았다.

“도대체 왜 이곳에 온 거야?”

“케이를 기다렸어요. 헬리아가 이곳에서 기다리면 당신을 만날 수 있다고 하기에…….”

“그렇다고 혼자 온 거야?”

“케이…….”

레이아나가 케이시스의 품에 안겼다. 레오가 말렸지만 레이아나는 케이시스의 안위를 꼭 제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그때 레이아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한데 케이, 헬리아는요? 같이 있지 않았나요?”

“…….”

순간 케이시스는 물론 엘라임과 이안이 입을 다물었다. 레이아나는 그들의 반응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마, 맙소사! 케이, 대체…….”

“살아 있어. 꼭 찾을 거야.”

“찾아야 돼요. 몇 번이나 우리의 목숨을 구해 줬는데…….”

레이아나는 온몸을 파르르 떨었다. 케이시스를 구해 주기 위해 황성에 갔다. 한데 정작 헬리아는 돌아오지 못했다. 케이시스가 돌아와 기뻤지만 그걸 이젠 기뻐할 수 없었다.

“케이, 어떻게 해요? 나 때문에 헬리아가…….”

“레아…….”

케이시스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레이아나를 안아주었다. 레이아나는 눈물을 흘리다 순간 강에서 떠내려 오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케이! 저기 저것!”

“뭐가……!”

“헬리아!”

강에서 떠내려 온 이는 바로 헬리아였다. 축 늘어진 그녀의 모습에 모두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엘라임이 누구보다 빠르게 강으로 뛰어들었다. 강물은 얼음장같이 차가웠지만 물의 정령왕인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

“헬리아! 헬리아!”

헬리아는 온몸이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엘라임은 다급히 헬리아를 흔들었다.

“……엘…… 라임.”

“헬리아!”

엘라임은 헬리아의 목소리에 그녀를 꽉 껴안았다. 다행이었다. 살아 있었다.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엘라임은 서둘러 헬리아를 뭍으로 끌어 올렸다.

“쿨럭!”

제법 물을 많이 먹었는지 헬리아가 기침을 내뱉으며 물을 토했다. 이가 시릴 정도로 찬 물이었다.

“마나가 고갈돼서 죽는 게 아니고 얼어 죽겠구먼.”

“그게 지금 할 소리야!”

“……추워.”

엘라임은 입술을 깨물곤 얼른 레이아나에게서 로브를 받아 그녀의 몸에 둘러주었다. 덜덜덜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애처로운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제정신이야!”

“…….”

“지금 제정신이냐고!”

“엘라임.”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죽을 뻔했어. 정말 죽을 뻔했다고!”

엘라임이 헬리아를 품에 안았다. 노심초사했다. 그녀의 몸에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몸에도 문제가 생긴다. 그걸 알기에 전전긍긍했다. 누구보다 먼저 헬리아의 문제를 알아차릴 수 있는 그였기에 누구보다 더 초조했다. 당연히 문제없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해도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제발, 제발 무모한 짓 하지 마…….”

“반드시 돌아온다고 했잖아.”

“이 바보!”

헬리아는 엘라임의 눈에 눈물에 어린 것을 보곤 피식 웃었다. 웃음이 날 상황이 아닌데도 웃음이 났다.

“지금 웃음이 나!”

결국 엘라임에게 한소리 듣고 말았다.

“누가 희생해서 구해달라 했습니까?”

“이안.”

“당신을 희생해서 살면 내가 기뻐할 거라 생각했습니까?”

“너도 그랬잖아.”

“…….”

“너가 그랬듯 나도 그랬을 뿐이야. 살리고 싶었으니까.”

이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뭐 하나. 여전히 자신은 무기력했다. 더 슬픈 것은 앞으로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절대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겠다.’

결코 헬리아를 혼자 두지 않겠다. 내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또 그런다.”

“…….”

“네가 내가 희생하는 걸 싫어하듯 나도 네가 날 위해 희생하는 거 싫어. 그러니까 그 멍청한 생각 좀 그만두라고. 에취!”

헬리아의 말에 이안은 말을 잇지 못했다. 헬리아다웠다.

“에취! 훌쩍. 겨울에는 수영할 게 못 되는군.”

헬리아는 으슬으슬 몸을 떨었다. 로브를 둘렀지만 추위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때였다.

“정말로 못 말리는 공주님이군요.”

낯익은 목소리에 헬리아의 고개를 돌아갔다.

“유니!”

다그닥다그닥.

유니의 뒤로 마차가 한 대 보였다. 헬리아는 그를 보자 씨익 웃었다.

“역시 준비성 하나는 철저하군.”

“호호호, 준비성 하나만 철저할까요? 자, 타시죠. 더 있다간 추격자가 몰려올 겁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발이 더욱 거세지기 시작했다.

* * *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라몬 공작이 섰다. 그의 앞엔 은발의 황제가 시린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공주를 놓쳤다고?”

“소, 송구하옵니다.”

라몬 공작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미끼가 통하긴 했군. 뭐, 미끼를 써먹지 못해서 문제지만.”

“…….”

황제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라몬 공작에겐 귀가 베여 나갈 것 같은 음성이었다.

“엑시온은?”

“육신을 재구성 중이십니다.”

“약조는 잘 알고 있으리라 보네, 라몬.”

“…….”

라몬 공작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황제는 그런 라몬 공작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황제에게는 엑시온이든 흑마법이든 중요치 않았다. 쓸모 있느냐, 없느냐. 중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서둘러 엑시온을 부활시켜라.”

“물론이옵니다.”

“공주는?”

“이미 추격대를 편성해 보냈습니다. 곧 소식이 있을 겁니다.”

라몬 공작은 바짝 고개를 숙였다. 완벽하다고 생각한 대업이 헬리아 공주 하나로 완전히 어그러졌다. 엑시온은 반쪽뿐인 부활을 했고, 황제와의 약속은 그의 심장을 쥐고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서둘러 공주를 붙잡고 엑시온을 부활시키는 것뿐.

‘이 굴욕도 지금뿐이다.’

라몬 공작이 속으로 칼을 갈았다.

“되었다. 나가 보라.”

황제의 축객령에 라몬 공작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황제는 와인 잔을 돌리며 음미했다.

“아르센 왕국이라고 했던가?”

황제의 눈꼬리가 휘었다.

* * *

쨍그랑-

“전하!”

갑자기 들고 있던 컵의 손잡이가 떨어져 나갔다. 그러면서 테이블 위로 부서진 컵의 파편이 흩어졌다.

“…….”

“전하, 손에 피가…….”

시종장의 말에 빈센트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컵이 깨지면서 파편이 그의 손을 베어놓은 것이다.

뚝, 뚝-

흰 테이블 위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와 동시에 빈센트의 표정도 점차 굳어졌다.

“어서 의원을 불러라!”

“예, 예!”

시종장은 서둘러 의원을 부르려 했다. 그러나 빈센트가 그를 막았다.

“살짝 긁힌 정도다. 소란 떨지 마라.”

“전하, 하오나.”

“조용히 있고 싶구나.”

시종장은 빈센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뒤에 시립해 있던 시종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서둘러 바닥에 흩어진 파편을 치우고 방을 빠져나갔다.

빈센트는 긁힌 손을 꾹 쥐었다. 그러자 더욱 피가 흘러나왔다.

“전하.”

나지막이 그를 부르는 목소리에 빈센트는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엔 언제나처럼 지팡이를 짚은 채 가만히 그를 보고 있는 세바스찬이 있었다.

빈센트는 품에서 천을 꺼내 피를 닦아내곤 물었다.

“리아는 어찌 되었습니까?”

“…….”

세바스찬은 말이 없었다. 그러자 빈센트의 얼굴이 점차 하얗게 질려갔다.

“뭐라 말을 해주십시오!”

“……카사스 2세가 대륙에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

그 말에 빈센트의 눈이 커졌다.

“그…… 게 무슨 말입니까?”

빈센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리아는 괜찮은 겁니까?”

“송구하옵니다…….”

세바스찬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제국의 황제가 대륙에 전쟁을 선포한 이후 제국의 모든 정보가 차단되었다. 아무리 세바스찬이 왕의 그림자의 수장이라고는 하나 그의 능력에도 한계가 있었다.

“…….”

빈센트의 몸이 휘청거렸다. 역시나 그렇게 보내는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전하…….”

“보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요.”

빈센트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겨우, 겨우 이제야 아버지라 불러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소리를 영영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전하, 공주님을 믿으십시오.”

빈센트가 고개를 들고 세바스찬을 보았다. 세바스찬은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8년이란 세월 동안 공주님을 봐왔습니다. 결코 이런 일로 쉽게 무너질 분이 아니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합니다.”

세바스찬의 말에 빈센트는 조용히 그를 보았다. 그러다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제가 초조했나 봅니다. 리아가 어떤 아이인데.”

누구보다도 어려운 환경을 뚫고 자라온 아이다. 이번 여정도 이미 위험할 것을 알고 갔다. 그리 쉽게 당할 헬리아가 아니다. 다만 아버지로서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아이를 잃는다는 생각에 초조해졌던 것이다. 마음을 다잡은 그의 눈이 냉철하게 빛났다. 신하들이 두려움에 떠는 그의 웃음도 입가에 감돌았다.

“그렇다면 전쟁이군요.”

빈센트는 제 손의 피를 닦은 천을 내려다보았다. 천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감사하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아니, 레이아나의 목숨까지 합하면 그 이상으로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 황태자는 진심으로 헬리아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한데 이제 어쩌실 건가요?”

헬리아가 레이아나를 보자 레이아나는 다시 케이시스를 보았다. 케이시스는 잠시 말을 고른 뒤 입을 열었다.

“아직 수도에 있는 바이스 남작과 합류할 생각이오. 이대로 제국에 두고 갈 순 없소.”

바이스 남작은 레이아나의 오라비인 레오였다. 그 외에도 아직 수도엔 황태자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케이시스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혼자만 갈 수 없었다.

“저들에게 발각되면 위험해질 수 있어요.”

“여러 번 목숨을 구해 주었는데 미안하오.”

그 말로 헬리아는 황태자가 굳게 결심했음을 인지했다. 더 말을 꺼내봐야 쓸데없는 말이 될 것이다.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의 선택이 그러하다면 존중해 줄 뿐이다. 그러나 황태자는 아직 말이 덜 끝났는지 입을 달싹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염치없는 처지이나 한 가지 부탁해도 되겠소?”

황태자는 제 옆에 있는 레이아나를 보았다. 레이아나는 뭔가 불안감을 느꼈는지 그를 불렀다.

“케이.”

“레아를 부탁드리오.”

“케이!”

헬리아는 황태자의 말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알다시피 저희도 안전한 상황이 아니에요. 오히려 태자 전하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헬리아는 엑시온에게 쫓기는 입장이다. 황태자보다 그녀가 더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황태자는 결심이 선 듯 뜻을 굽히지 않았다.

“나와 함께 있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오. 그리고 레아가 곁에 있다면 움직이기 쉽지 않소.”

헬리아는 황태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지금 죽음을 각오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수도에 있는 황태자의 세력과 합류한다는 것. 그리고 레아가 있으면 움직이기 쉽지 않다는 것. 결과는 한 가지였다.

“황제의 반대편에 설 생각인가요?”

“부탁드리오.”

황태자는 대답 대신 레아를 부탁했다. 그건 곧 헬리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후우…….”

헬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레이아나가 아니었다.

“헬리아, 미안하지만 나도 여기 남아 있겠어요. 케이를 두고 혼자 갈 수 없어요.”

“레아.”

케이시스는 레이아나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레아가 곁에 있으면 나는 황태자가 될 수 없어.”

“…….”

“미안해. 제국을 이대로 둘 수 없어, 레아.”

“…….”

그 말에 레이아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감긴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장에라도 같이 있자고 떼를 쓰고 싶었다. 함께하자고. 죽더라도 같이 죽고, 살더라도 같이 살자고.

“……레아…….”

레이아나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그녀는 슬픈 눈으로 케이시스의 굳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케이시스의 얼굴이었다. 굳세고 곧은, 신념에 찬 얼굴. 황태자의 얼굴이었다. 레이아나의 눈동자엔 더 이상 물기가 어리지 않았다.

“……반드시 살아 돌아오실 수 있으신가요?”

“레아와 아이를 두고 죽을 리 없잖아?”

“…….”

“레아.”

“그 말 꼭 지키세요.”

“고마워, 레아.”

“부디…… 보중하세요.”

레이아나라고 자신의 남편이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을 뻔히 보고도 말리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케이시스가 황태자이듯, 그녀 또한 황태자비였다. 황태자는 레이아나의 손을 놓고 헬리아를 보았다.

“부탁드리오.”

황태자가 고개를 숙였다. 헬리아는 더는 뭐라 할 수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태자비 마마는 반드시 안전히 모시겠어요.”

그것은 헬리아의 다짐이기도 했다.

황태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곤 레이아나를 보았다.

“레아.”

“케이…….”

“시간이 흐르면 아이가 태어나겠지? 그럼 남자아이라면 리오로, 여자아이라면 리아라고 이름 짓고 싶어.”

황태자는 헬리아를 슬쩍 보고는 웃었다. 헬리아는 그 이름이 자신의 이름을 빗대어 지은 것임을 알아차렸다. 레이아나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웃으며 보내주고 싶었지만 계속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리오, 리아, 예쁜 이름이에요.”

황태자는 웃으며 레이아나를 안아주곤 말에 올랐다.

“그럼 모두 다시 만나길…….”

그렇게 황태자가 떠나갔다.

흩날리는 눈이 황태자가 탄 말의 발자국을 천천히 지워 나갔다.

헬리아는 멀어져 가는 황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엘라임.”

엘라임은 조용히 헬리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헬리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멀어져 간 황태자를 보았다.

“만약 내가.”

“안 들어.”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

“또 먼저 가라느니, 상관하지 말라고 할 거 아니야. 누가 네 말을 들을 줄 알고?”

“명령 불복이야?”

헬리아가 짓궂게 묻자 엘라임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거야. 네가 가라고 해도 남아 있을 거고, 남아 있으라고 해도 갈 거야. 다시는 혼자 두지 않을 거야.”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그러곤 그의 푸른 머리카락을 만졌다. 순간 엘라임의 얼굴이 붉어졌다.

“누가 먼저 가래? 내가 언제 그런 말 한대?

헬리아의 표정이 짓궂게 변했다.

“말했잖아? 무임금 평생 노동자를 내가 미쳤다고 가라고 해? 평생, 아주 백골이 되도록 옆에 있어. 아, 정령은 백골은 안 되나? 그럼 평생 유령처럼 따라오라고.”

“……내가 노예냐?”

“왜 내 노예는 싫어?”

“……아니, 좋아.”

헬리아는 엘라임의 대답에 씩 웃었다. 그 모습에 엘라임은 졌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럼.”

헬리아의 시선이 유니에게 향했다.

“유니.”

“말씀하시지요, 호호호.”

여전히 유니는 힘이 넘쳤다. 그게 유니다웠다. 헬리아의 금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엑시온을, 그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자신이 가진 드래곤의 힘으로 엑시온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엑시온이 완벽하지 않은 만큼 자신 또한 완벽하지 않았다. 드래곤의 힘을 쓰기엔 자신의 심장이 견디질 못했다. 무언가 방법이 필요했다. 엑시온을 쓰러뜨릴 방법이.

“강해지고 싶어.”

헬리아의 눈이 빛났다. 유니는 그 모습에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저 눈빛, 저 말. 그분과 너무나 닮은 모습에 유니는 웃음을 지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했다.

유니는 곧 입을 열었다.

“드래곤 하트, 세르게니아 님께서 남기신 드래곤 하트가 있습니다. 그것을 얻으십시오.”

“드래곤…… 하트?”

유니의 말에 헬리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드래곤의 드래곤 하트? 드래곤은 마법의 시초라 불리는 존재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드래곤 하트다. 드래곤 하트는 드래곤의 심장이라 불리지만 실상 심장의 역할을 하진 않는다. 드래곤 하트는 드래곤이 가진 마나의 정수. 과거 수많은 이가 이 드래곤 하트를 얻기 위해 드래곤 레어를 털거나 슬레이어가 되기도 했다.

“한데 드래곤은 이제 없잖아?”

수백 년 동안 세르게니아 이후로 드래곤은 모습을 감췄다. 역사학자들은 이미 드래곤의 멸종을 공식화했고, 세르게니아가 죽은 이후 드래곤은 더 이상 이 레칸 대륙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데 드래곤 하트라니?

“호호호, 드래곤은 죽어도 드래곤의 레어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듯이 드래곤이 죽어도 드래곤이 소유했던 레어는 고스란히 남는다.

헬리아는 그 말에 눈을 반짝였다.

“레어가 아직 있단 말이야?”

사람들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드래곤 레어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가장 최근에 발견한 드래곤 레어라고 해봤자 벌써 500년 전이다. 그런데 드래곤 레어가 있단 말이지? 제사보다 젯밥에 더 관심이 간다고, 드래곤 하트보다 드래곤 레어에 있을지도 모를 금은보화가 눈에 선했다. 헬리아의 눈이 반짝이자 유니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물론이지요. 거기다 아직 그분의 레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유니가 그분이라 칭하는 자는 딱 한 명이다.

세르게니아!

“그럼!”

헬리아가 기대감에 눈을 부풀렸다.

“예, 과거 그분께 드래곤 하트를 얻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드래곤 하트라…….”

“드래곤 하트의 힘을 흡수하신다면 공주님의 그 불안정한 힘도 안정되게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유니의 말에 헬리아가 눈을 빛냈다. 하지만 곧 드래곤 하트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람이 드래곤 하트를 흡수할 수는 없을 텐데?”

드래곤 하트는 드래곤의 것이다. 과거에도 인간들은 그 거대한 힘을 탐했지만 그 힘을 자신의 것으로 온전히 만든 사람은 드물었다. 100 중 99명은 죽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만큼 드래곤 하트의 힘을 사용하는 문제는 또 다른 부작용을 야기할 수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헬리아의 이야기를 들은 유니는 후후 웃으며 말했다.

“잊으셨습니까?”

유니는 그분과 똑 닮은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공주님께선 반은 드래곤의 피를 지니고 계십니다.”

“하지만 반은 인간의 피야.”

헬리아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그녀가 드래곤의 피를 지녔다지만 반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위험성을 남긴 채 드래곤 하트를 흡수하려다 도리어 더 사태가 악화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주객전도다.

유니는 걱정 말라며 웃었다.

“그분께선 오래전부터 드래곤 하트에 대한 관심이 많으셔서 여러 실험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래곤 하트를 정제해 사용하는 방법을 개발하셨습니다.”

그 말에 헬리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럼?”

기대감에 유니를 보았지만 유니는 머리를 긁적였다.

“문제는 그것에 대한 것들도 레어에 있을 거라는 겁니다.”

그 애매한 말에 헬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레어에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거야?”

“워낙 그런 것은 말씀을 하지 않는 분이시라…….”

유니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마 드래곤 하트에 대해 실험을 했다는 사실만이라도 안 것이 다행이었다.

“그럼 드래곤 레어는 어디에 있어?”

헬리아는 눈을 반짝이며 유니의 대답을 기다렸다.

유니는 아주 상큼하게 웃으며-물론 헬리아의 입장에선 전혀 상큼한 웃음은 아니었다-말했다.

“호호호, 모릅니다.”

“……뭐?”

“솔직히 베라에 있는 어느 누구도 그분의 레어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레어에 대해선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랑 장난해? 라는 말이 바로 목구멍 아래까지 솟구쳤지만 아무리 유니라도 이런 때에 장난을 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무슨 다른 생각이 있을 터.

“그럼 어떻게 레어를 찾을 건데?”

“다행히 오랫동안 그분의 레어를 찾다가 우연한 기회에 그분의 가디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가디언?”

“보통 레어를 지키는 존재이나, 때에 따라선 별도로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 가디언은 어디에 있는데?”

드래곤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이라면 충분히 세르게니아의 레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헬리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무리 세르게니아가 자신의 어머니라고 해도 혹여 가디언이 협조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곧 생각에서 지워 버렸다. 안 되면 되게 하라. 그게 헬리아의 신조 아닌가.

“다행히 아주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유니가 씨익 장난스럽게 웃자 헬리아의 눈이 좁아졌다.

“가까이에?”

“공주님도 아는 사람입니다.”

“대체 누구야?”

헬리아는 유니의 말에 감을 잡지 못했다. 그녀가 아는 사람을 쭉 떠올려 봐도 가디언이라 생각되는 이가 없었다. 아니, 생각해 보니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설마…….’

그런 그녀의 눈치를 알아챈 유니가 입을 열었다.

“현재 왕의 그림자의 수장으로 있습니다.”

“…….”

“그 이름은 세바스찬입니다.”

헬리아의 눈이 커졌다.

* * *

휘이이잉-

하늘에선 연신 하얀 눈발이 날렸다. 한 인영이 눈을 맞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도착한 곳은 성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언덕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깊은 발자국을 남기며 그가 걸어간 곳은 눈이 덮인 작은 정자였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그의 머리에 쌓였던 눈이 떨어져 내렸다.

“세니아 님…….”

흰 눈이 치워진 머리엔 여전히 흰 머리카락이 남아 있었다.

세바스찬이었다. 그는 세르게니아의 무덤을 아련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팡이를 쥔 그의 손은 이미 주름이 져 볼품이 없었다. 세월이란 무상한 것. 세바스찬의 눈이 무언가를 상기한 듯 깊어갔다.

“벌써 열아홉 해가 지났습니다. 세니아 님의 따님께선 아주 훌륭하게 자라나셨습니다.”

세바스찬이 주름진 손으로 무덤 위에 쌓인 눈을 쓸어냈다.

“부디 그분을 지켜주시길…….”

이제는 그가 오랫동안 모셔왔던 세르게니아만큼이나 더없이 소중한 사람이 된 헬리아였다.

‘할아버지.’

자신을 그리 불러주던 헬리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세바스찬이 두 눈을 감았다.

* * *

다그닥다그닥!

말이 요란스럽게 말발굽 소리를 내며 힘차게 달려 나갔다.

“젠장, 끈질기군.”

헬리아는 멀리서 느껴지는 흑마법사들의 기척에 눈을 찌푸렸다.

“우리 정말 탈출할 수 있는 거야?”

함께 마차에 탄 알베르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물었다. 옆에 앉은 에른이 그를 진정시켰다.

“걱정하지 마세요. 왕자님이 더 투덜거리지 않으면 마차는 더 빨리 갈 테니.”

“내가 언제 투덜거렸다고!”

알베르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그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입을 다물었다. 헬리아는 에른의 조련 솜씨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어찌 저게 주종 관계란 말인가. 가히 뽈뽈거리는 짐승 새끼와 조련사가 아닌가. 두 사람의 묘한 관계에 헬리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보다 지금은 흑마법사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는 게 우선이었다.

“지금 어디까지 온 거야?”

“곧 벨리앙 백작령입니다.”

헬리아 일행은 유니의 도움으로 수도를 빠져나왔지만 공주 일행이 수도를 빠져나올 것을 대비해 수도 밖에서 감시하고 있던 제롬과 흑마법사들에게 들켜 버린 것이다. 여차여차 어떻게든 따돌리려 애를 썼으나 가히 찐득이나 다름없었다. 그 덕에 아슬아슬한 추격전이 이어지며 페르시아 제국과 아르센 왕국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벨리앙 백작령까지 내달리게 된 것이다.

“이 거머리 같은 놈.”

헬리아는 쫓아오는 흑마법사를 떠올리고 이를 갈았다. 그녀의 시선이 레이아나에게 닿았다. 임신 중인데다가 원래부터 몸이 약한 그녀의 얼굴은 이미 푸르죽죽하게 변해 있었다.

‘푸르죽죽해?’

헬리아의 눈이 커졌다. 다시금 그녀를 보니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런!”

레이아나는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헬리아는 다급히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그녀의 어깨에 손을 대자 불에 닿은 듯 뜨거웠다.

“으으음.”

레이아나는 얼굴에서 굵은 식은땀을 흘리는 것은 물론이고 자세를 웅크리며 배를 끌어안고 있었다.

“유니!”

헬리아는 다급히 소리쳤다.

“백작령까지는 얼마나 걸려?”

마부석에서 마차를 몰고 있던 유니가 헬리아의 말에 대답했다.

“지금 속도로 가도 족히 한 시간은 걸립니다.”

“젠장, 좀 더 빨리!”

헬리아는 다급히 레이아나의 상태를 확인했다. 역시나 몸이 불덩이였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는 배 속에 있는 아이였다. 레이아나는 배가 아픈 듯 웅크리며 신음을 흘렸다.

“젠장!”

역시나 마차로 무리하게 이동한 결과였다. 헬리아는 자신의 실수를 자책했다. 임신한 몸이라는 것을 좀 더 생각했어야 했다.

“레아, 레아! 괜찮으세요?”

“헬…… 리아, 나는 괜찮아요…….”

“다 죽어가는 건 확실히 알겠네요.”

헬리아는 서둘러 포션을 꺼내 레이아나의 입에 부어주었다. 포션이 몸속으로 들어가자 다행히 레이아나의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았지만 심각한 건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배가…… 배가…….”

여전히 배가 아픈 레이아나는 이내 픽 하고 쓰러졌다.

“헬리아!”

엘라임이 놀라 소리를 높이자 헬리아가 얼른 레이아나를 살폈다. 다행히 하혈은 없었고 어느 정도 고통이 가시자 기절하듯 잠에 빠진 것 같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아직 위험은 가시질 않았다. 거기다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다그닥다그닥!

엘라임과 이안이 몸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따라잡혔나!”

“쫓아라! 저기 있다!”

멀리서 제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유니, 벨리앙 백작가로 가.”

“뭘 어떻게 하려는 거야?”

알베르가 놀란 눈으로 물어보자 헬리아는 이미 마차에서 내릴 준비를 마쳤다.

“곧 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헬리아!”

알베르가 그녀를 불렀지만 헬리아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헬리아가 이안과 엘라임을 보았다. 두 사람은 이미 밖으로 나갈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헬리아는 피식 웃고는 유니를 보며 말했다.

“유니, 부탁해.”

“호호호, 알겠습니다.”

헬리아는 그길로 마차의 문을 열고는 이안과 엘라임을 보았다.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얼른 안 내리고.”

“동감입니다.”

역시나 따라오는 두 사람에게 헬리아는 피식 웃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엘라임과 이안도 당연히 그 뒤를 따랐다. 그와 함께 마차는 더욱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헬리아가 시선을 돌려 자신들을 쫓아온 흑마법사 무리를 보았다.

“살아 있었나.”

이안이 제롬을 확인하고 눈을 좁혔다. 제롬은 입꼬리를 올리곤 말에서 내렸다.

“그때의 복수를 해주지.”

제롬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한 무리의 병사와 흑마법사들이 마차를 향해 흩어졌다.

“어림없지!”

헬리아의 말과 함께 엘라임이 그들을 막았다.

“겨우 이 정도로 날 붙잡을 생각인가?”

그러나 제롬은 무슨 생각이 있는지 씨익 웃고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아니, 그가 들고 있던 통에서 빛이 나더니 하늘로 솟구쳤다.

퍼엉!

붉은 연기가 하늘을 수놓자 헬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신호탄?”

“아무리 강해도 수에는 장사 없지.”

제롬이 씨익 웃었다.

“공주를 잡아라!”

제롬이 헬리아 일행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숲속에서 하나둘 검은 로브를 입은 흑마법사들이 나타났다. 이윽고 주위엔 온통 시커먼 흑마법사로 가득했다.

“쥐새끼처럼 몰려왔군.”

비아냥거려 보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애써 피해가려 했으나 애초에 헬리아 일행의 목적지는 드러난 상태였다. 국경을 넘을 걸 뻔히 알고도 못 잡는다면 그거야말로 멍청이가 아니겠는가.

‘빠져나갈 곳은…… 눈 씻고 봐도 없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온통 눈에 시커먼 것들만 들어오자 헬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제롬이 그런 헬리아의 표정을 보곤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보기 흉한 상흔이 붉어졌다.

“순순히 그 몸을 내놓는다면 어느 정도 아량은 베풀어주지.”

“아량은 무슨, 얼어 죽을 소리 하고 있네. 지나가던 드래곤이 웃겠다.”

헬리아는 제롬의 말에 짜증을 한껏 내비쳤다. 뭐 상황은 달라지지 않지만 최소한 구겨진 제롬의 얼굴을 보니 속은 시원했다.

“계속 그렇게 여유 부릴 수 있나 보자!”

“말 많은 놈치고 대단한 놈 못 봤지.”

제롬이 와락 이를 깨물었다. 바로 달려들 기세였으나 헬리아의 도발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어차피 독 안에 든 쥐다.”

“누가 독 안에 든 쥐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그 허세도 지금뿐이다! 공격해라!”

제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흑마법사들이 헬리아 일행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좌우 사방에서 쇄도해 오는 마기에 헬리아는 눈썹을 치켜 올리곤 손을 뻗었다.

“이런 잔챙이들로 날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콰아아앙!

숲속에서 거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헬리아 일행은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이었다.

제롬은 그것을 보자 눈을 좁혔다. 하지만 이미 그 정도는 예상했다.

“계속 공격을 퍼부어라!”

상대는 마룡 엑시온만큼의 힘을 지닌 존재. 당연히 단순한 공격으로 그들을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않았다. 제롬이 노리는 것은 단 하나.

“한계까지 밀어붙여라!”

“옛!”

흑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자 갑자기 땅바닥에서 우르르 뼈들이 일어서더니 이내 스켈레톤으로 변신했다.

“이런 뼈다귀!”

헬리아는 그 모습을 보고 눈을 찌푸렸다. 징그러운 건 고사하고 그 수가 너무 많았다.

“공격해라!”

드르르륵드르르륵. 덜컥덜컥.

스켈레톤 무리가 턱을 덜컥거리며 헬리아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엘라임!”

“알았어!”

엘라임이 다가오는 스켈레톤을 향해 물을 뿜어냈다. 스켈레톤은 허우적거리며 휩쓸려 갔지만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죽은 놈들은 계속 죽어 있으라고!”

헬리아가 마법을 시전했다.

“아이스 스톰!”

그러자 차가운 냉기가 물에 허우적거리는 스켈레톤을 얼려 버렸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전기계열 마법을 사용했겠지만 상대는 이미 죽은 뼈다귀. 전류가 통해 봤자 죽은 놈들에겐 소용없었다. 스켈레톤이 단단히 굳자 흑마법사들이 다시 마법을 시전했다.

두두두두두-

“이번엔 또 뭐야?”

헬리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 기운이 뭉치며 갑옷을 입은 다크나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이번에도 그 수가 수십 기가 되었다.

“아주 인해전술이구먼!”

헬리아가 짜증 난다는 듯 이를 갈았다. 이미 저들의 속셈을 눈치챘다. 자신들은 고작 세 명. 하지만 상대는 수백이다. 실력 차이가 크지만 그 차이를 수로 메우고 있었다. 예로부터 다구리엔 장사 없다지 않던가.

“쳐라!”

제롬이 소리치자 다크나이트들은 좀 전의 스켈레톤과 달리 민첩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들은 날카로운 검을 치켜들고 헬리아를 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앞을 이안이 막아섰다.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지만 마나 포션을 퍼부은 탓에 충분히 움직일 여력이 있었다.

“사라져라!”

오러 블레이드를 쓸 필요도 없었다. 이안의 검은 다크나이트들의 몸을 베어냈고, 헬리아와 엘라임도 마냥 놀지만은 않았다.

‘이러다간 이쪽이 지칠 거야.’

헬리아는 눈을 좁혔다. 이렇게 공격을 받아내기만 하면 결국 힘에 부치는 건 수가 적은 자신들이었다. 그 증거로 헬리아 또한 서서히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사이 다크나이트가 전멸하자 흑마법사들이 다시금 마법을 시전하려고 손을 모았다. 하지만 또 당할 헬리아가 아니다.

‘어차피 도망은 못 쳐. 그러면…….’

순간 헬리아의 눈이 번쩍였다. 그녀의 온몸에서 빛이 흘러나오자 제롬이 눈을 찌푸렸다.

“이건……!”

벨리앙 백작가에서도 당한 그 힘이었다. 제롬은 위험을 감지하고 흑마법사들을 향해 외쳤다. 어차피 저 힘은 오래 사용하지 못한다. 그러니 그 전에 처리해야 했다.

“공격해라! 힘을 쓰기 전에 처리해!”

“예!”

흑마법사들이 서둘러 헬리아를 향해 마기를 퍼부었다. 하지만 그걸 두고 볼 엘라임과 이안이 아니었다. 엘라임과 이안은 헬리아에게 향한 공격을 막았다. 그사이 헬리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제롬은 숨이 막힌 듯 몸을 움츠렸다.

“젠장…….”

“어리석은 놈.”

헬리아가 입꼬리를 비틀며 냉랭하게 웃었다. 여전히 이 힘을 쓰는 건 좋지 않았다. 힘을 쓸 때마다 그 힘에 자신이 휩쓸리는 것을 느꼈다. 벌써 몇 번이고 이 힘을 사용했지만 완벽히 통제할 수 없었다.

두근두근.

지금도 또다시 힘의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때까지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헬리아가 두 손을 좌우로 뻗었다. 그 모습을 본 제롬이 외쳤다.

“모두 방어해라!”

콰아아아아!

그러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헬리아의 공격에 수십의 흑마법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괴, 괴물!”

“괴물이야!”

“이, 인간이 아니야!”

극한 공포를 느낀 흑마법사가 하나둘 동요하기 시작했다. 제롬 또한 그 모습을 보고 이를 갈았다. 그 자신도 그때 저런 모습이었다. 그 치욕을 다시금 떠올리자 왼뺨에 난 상처가 욱신거렸다.

“저 힘은 오래 가지 않는다! 시간을 끌어라!”

제롬은 헬리아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을 끈다면 이쪽이 승산이 있다.

“내가 먼저 지칠지 너희가 먼저 사라질지 어디 시험해 보지.”

헬리아가 눈을 내리깔고 다시금 공격을 퍼부었다. 엘라임과 이안도 그에 질세라 흑마법사들과 병사들을 처리했다. 그야말로 학살이었다. 단 세 명이서 수백에 이르는 적을 처단했다. 제롬은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가 예측한 시간이 되었다.

“헬리아!”

“…….”

적들을 처리하면서 엘라임은 틈틈이 헬리아를 살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한계가 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직도 적의 숫자가 많다는 것이었다. 이대로 쓰러진다면 엘라임은 사라지고 남은 이안이 이들을 상대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할 터.

“젠장.”

헬리아는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이 터질 듯 아파왔다. 힘이 있으면 뭐 하겠는가. 제대로 쓸 수도 없는데. 유니가 말한 드래곤 하트가 더욱 절실해졌다.

드래곤 하트의 힘으로 육체를 완전한 드래곤의 것으로 바꾸는 것. 물론 정말 드래곤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드래곤의 힘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 더 단단한 육체로 만든다는 것이다.

드래곤 하트는 마나의 집약체이다. 그 안에 든 힘은 수천 개의 최상급 마나석의 힘을 능가한다. 하지만 드래곤 하트의 힘을 흡수하는 일도 만만치 않다. 일반인이 그 힘을 흡수하려 한다면 온몸이 풍선처럼 터져 버릴 것이다.

“반드시 성공할 거란 확신은 없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은 더 큽니다.”

유니 또한 헬리아가 그 힘을 제대로 흡수할 수 있을지는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둔다면 더 큰 문제가 생길 것이다.

이 힘이 도대체 무엇인지, 왜 그녀에게 이런 힘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 힘이 반드시 헬리아에게 계속 좋은 영향을 줄 거란 확신도 없다. 그래서 헬리아는 드래곤 하트가 더욱 절실해졌다.

“헬리아!”

“공주님!”

헬리아의 몸이 천천히 빛을 잃기 시작했다.

“크윽.”

반 이상의 적을 처리했지만 아직도 많은 적이 남아 있었다.

“젠장…….”

“하하하, 처리해라!”

그 모습을 본 제롬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흑마법사들에게 명령했다. 헬리아의 공격으로 대부분의 흑마법사가 죽음을 맞이했지만 아직 몇 남아 있었다. 흑마법사가 마지막 공격을 하려 할 때였다.

콰아아앙!

그때 강렬한 폭음과 함께 소리가 들려왔다.

“흑마법사들을 처리해라!”

“예!”

제법 나이가 든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헬리아는 비틀거리는 몸을 다잡고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사하십니까!”

상대를 본 헬리아의 눈이 커졌다. 그러다 곧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늦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만회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웃으며 헬리아에게 손을 내민 사람은 바로 벨리앙 백작이었다.

“큭, 퇴각하라!”

제롬은 나타난 벨리앙 백작의 군대를 보자 이를 악물고 퇴각 명령을 내렸다. 아무리 눈앞에 헬리아가 있더라도 제롬은 바보가 아니었다. 지금 병력으론 백작의 군대를 상대할 수 없음을 인지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진 않겠다는 듯 붉은 눈동자를 희번덕거리며 헬리아를 노려본 뒤 몸을 돌렸다.

“정말 쫓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멀어져 가는 흑마법사들을 보며 벨리앙 백작이 헬리아에게 물었다. 헬리아는 미간을 찡그리며 백작을 보았다.

“저에게까지 거짓말할 필요는 없어요.”

“…….”

백작은 잠시 말이 없더니 이내 어깨에 힘을 빼곤 허허 웃었다.

“역시 공주님껜 못 당하겠군요.”

백작은 헬리아의 말에 순순히 실토했다. 애초에 벨리앙 백작에겐 흑마법사들을 상대할 정도의 병력은 없었다. 상황이 적절하게 들어맞았을 뿐. 헬리아에게 당해 심히 위축되어 있는 흑마법사들이었다. 한데 거기에 벨리앙 백작이 나타나자 위기감을 느껴 제대로 주변을 살피지 못한 것이다.

“정말 운이 좋았어요. 여러모로.”

“들키기 전에 어서 제 성으로 가시지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리 괜찮지는 않은 것 같네요.”

헬리아는 엘라임의 부축을 받으며 씁쓸히 웃었다. 만약 백작이 오지 않았더라면 정말 큰 화를 입었을 것이다.

“후우, 다행입니다.”

벨리앙 백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데 여긴 어떻게…….”

“호호호!”

어째서 백작이 이곳에 와 있는지 물으려던 헬리아는 귓가에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유니!”

“이거 제대로 시간 맞춰 왔군요.”

“역시 네가…….”

헬리아가 유니에게서 시선을 떼고 백작을 바라보았다. 백작은 유니의 괴상망측한-여전히 이 추운 겨울에 털이 수북한 다리를 드러내며 육체미를 과시하고 있었다-모습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근처에서 영지 순찰을 돌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우연히 마차를 보게 되어 공주님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백작이 얼마나 당황했던가. 백작은 그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무래도 유니의 존재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아냈다. 그런 걸 보면 정말 장난치기 좋아하는 요정족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헬리아는 잠시 백작을 위해 뭐라 한마디 해줄까 하다가 유니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자 그냥 넘어갔다. 변태를 변태 말고 뭐라 부르겠는가. 변태가 그냥 변태지.

“다른 일행은?”

“무사히 백작가에 도착하셨습니다.”

유니의 말에 헬리아는 옅게 숨을 내쉬었다. 백작은 주변을 정리하고 헬리아에게 말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이 있으나 우선 성으로 가시지요.”

벨리앙 백작과 헬리아 일행은 마차를 타고 벨리앙 백작 성으로 갔다.

“드시지요. 몸을 덥혀줄 겁니다.”

헬리아는 벨리앙 백작의 말에 자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렸다. 따스한 향이 그녀를 안정시켰다. 헬리아가 차를 한 모금 마시자 벨리앙 백작이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아직 수도에서 일어난 소식을 듣지 못하셨나요?”

“영지 주변으로 병력의 움직임을 포착했으나 정확한 정보는 알지 못합니다.”

제롬으로 인해 붕괴되었던 백작가 내부를 수습하느라 아무래도 제대로 수도의 동향을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황제가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흐음…….”

백작이 무겁게 침음을 삼켰다. 그 말 한마디로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백작가는 괜찮나요?”

“마법진을 손보고 병력을 추스른 덕분에 백작령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저들도 백작가의 힘을 알기에 굳이 건드리진 않은 것 같습니다.”

벨리앙 백작이 어이없게도 제롬과 그의 이복동생의 음모에 걸려 꼭두각시 노릇을 하긴 했지만, 본래 국경을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벨리앙 백작가이다. 최근 황태자파에 가담하면서 황제의 견제로 이전보다 힘이 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병력을 지녔다. 그 때문에 제롬도 벨리앙 백작이 나타난 것을 보고 먼저 뒤를 물린 것이다.

“한데 도대체 아까 그자들은……?”

“흑마법사들 뒤에 황제가 있었습니다.”

“……!”

헬리아의 말에 벨리앙 백작의 눈이 커졌다. 백작은 이내 분노로 이를 물었다. 자신의 딸이 납치당하고 죄 없는 수많은 이가 노예가 되어 실험이란 이름의 참혹한 고문과 고통을 받아야 했다. 무너진 지하 실험실에서 그 참상을 보았을 때 백작은 치미는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의 장본인이 황제였던 것이다.

벨리앙 백작은 그날 일을 떠올리자 다시금 분노가 피어올랐다.

“어찌 제국의 황제가……!”

제국의 귀족으로서 무례한 일이었으나 백작은 그만큼 분노하고 있었다.

“또한 흑마법사들이 마룡을 부활시켰습니다. 정확한 목적은 아직 모르지만 결코 좋은 일이 아닐 겁니다.”

“결국…….”

벨리앙 백작은 눈을 감고 탄식했다. 그도 어느 정도 마음을 먹고 있었지만 그의 예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일이었다.

“황태자 전하는, 전하는 어찌 되신 겁니까?”

황태자비 레이아나가 이곳에 와 있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던가. 벨리앙 백작은 가장 먼저 그것을 묻고 싶었다.

“수도에 남아 계세요.”

“그런……!”

벨리앙 백작은 황태자의 소식이 눈을 크게 떴다. 한편으로 어찌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는지 서운했다.

헬리아는 그런 백작을 다독였다.

“그간 감옥에 갇혀 있었던 데다가 수도가 봉쇄되어 소식을 알리기 힘들었을 거예요.”

“……후우.”

벨리앙 백작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눈에 결의를 빛냈다.

“가실 건가요?”

백작의 눈빛을 본 헬리아가 물었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의 소식을 듣고 이곳에 있을 순 없습니다.”

“한데 과연 도움이 될까요?”

“……무슨 말씀입니까?”

벨리앙 백작이 눈을 좁혔다. 헬리아는 제 손으로 비어버린 찻잔에 차를 따랐다. 그 짧은 시간에 벌써 차가 식어버렸다. 헬리아는 차를 한 모금 입에 대고 다시 물었다.

“가면 어쩌실 건가요?”

“태자 전하를 도와드려야지요.”

“어떻게요?”

“백작령의 병력이 있습니다. 그것이라면 충분히…….”

“충분할 것 같나요?”

헬리아의 말에 벨리앙 백작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시는 겁니까?”

“지금 당장 달려가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그래 봤자 개죽음이죠.”

“공주!”

벨리앙 백작은 헬리아의 말에 언성을 높였다. 아무리 그녀라도 이런 말을 할 순 없었다.

헬리아는 그러나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아닌가요?”

“…….”

“지금 밖에는 흑마법사들이 깔려 있죠. 여기가 무사한 건 마법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건 백작이 저들을 건드리지 않아서예요. 하지만 백작께서 저들을 건드린다면? 백작은 마법진으로 보호된 이곳을 나가게 되고 그럼 그들은 먼저 대든 상대를 가만히 놔두지 않겠죠. 애초에 귀찮아서 그대로 둔 것인데 백작이 나선다면 그 귀찮음을 무릅쓰고 나서겠죠. 그럼 자, 백작께선 과연 수도까지 무사히 가실 수 있을까요?”

“…….”

백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헬리아는 더욱 그를 흔들었다.

“여기서 수도까진 너무 멀어요, 백작.”

“하지만…….”

“자, 그럼 백작이 어찌어찌 수도로 간다고 치죠. 그런 다음엔? 수도는 현재 봉쇄돼 있고 그 주변에는 병력이 쫙 깔려 있죠. 여기서 수도까지 올라오는 동안 아주 지친 백작의 병력이 눈앞에 있다고 보세요. 자신들의 편도 아니고 자신들을 치러 오는 이가 지친 표정으로 다가오네요. 그럼 그들은 어찌할까요?”

“…….”

“저라면 아주 박살을 내버릴 텐데 말이죠. 뭐, 저들이 저와 같은 생각이 아니라면 가능하겠네요.”

그러나 지금 헬리아의 이야기는 세 살 먹은 애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걸 제국의 군대가 모른다면 숨 쉴 가치도 없을 것이다.

백작은 스르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턱대고 전하께 가는 건 백작이나 전하나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백작의 물음에 헬리아는 눈을 빛냈다.

“방법은 두 가지예요.”

“두 가지?”

“첫 번째 방법은 아주 간단해요.”

헬리아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절 잡아가세요. 그러면 백작님은 안위를 보장받으며 무사히 수도로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뭐, 그간 서로 사이는 안 좋았겠지만 대놓고 백작께 손을 쓰지는 못 하겠죠.”

백작의 눈매가 서서히 치켜 올라갔다. 그의 굳은 입술이 열렸다.

“이 벨리앙 백작이 그런 신의 없는 놈으로 보이시오! 은혜를 갚지 못할지언정 결코 은혜를 원수로 갚는 파렴치한으로 만들지 말아주시오!”

백작은 곧은 눈으로 헬리아를 보았다. 흡사 모욕을 당했다는 표정이다.

헬리아는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과연 사람을 보긴 제대로 봤어.’

정말이지 제국의 귀족이라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였다.

‘보쌈이라도 해서 데려갈까?’

벨리앙 백작은 순간 헬리아의 눈이 맹수의 눈처럼 빛나자 움찔했다. 하나 헬리아는 곧 눈가에 웃음을 띠었다. 그러자 딱딱해졌던 공기가 이내 한층 부드러워졌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솔직히 이미 저들은 백작님과 제가 아주 친한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절 데려가 봤자 바로 백작님도…….”

그러면서 헬리아는 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똑, 하고 목을 떼버리겠죠.”

“…….”

백작은 그 말에 순간 오싹했지만 이내 허탈해졌다. 그럼 결국 그를 시험했다는 말이 아닌가. 화가 나기보단 힘이 빠졌다.

“기분 나빴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그만큼 지금 상황이 좋지 못하니까요. 저도 제가 보따리까지 구해 준 사람이 위험해 처해지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하면 두 번째 방법은 무엇이오?”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헬리아가 백작을 빤히 보았다. 백작은 헬리아의 금빛이 일렁이는 모습에 순간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백작은 태자 전하를 도우신다고 하셨죠?”

“그렇소.”

“한데 태자 전하는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죠. 아마 지금쯤 반역도로 소문이 났을 거예요. 그럼 백작은 그런 반역도를 도와 반역도가 될 건가요? 제국의 귀족인 백작께 묻고 싶군요.”

“…….”

백작은 헬리아의 말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헬리아는 느긋하게 그의 답을 기다렸다.

“나는 반역도요.”

헬리아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백작은 헬리아에게 물었다.

“그 두 번째 방법이라는 게 무엇이오?”

“이미 나왔어요.”

헬리아의 말에 백작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헬리아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참, 전에 은혜를 갚겠다 말씀하셨죠?”

“물론이오.”

“그럼 겸사겸사 됐네요. 저와 함께 제국을 치는 데 동참해 주세요.”

그 말에 백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작의 목숨 잠시 제가 맡아도 될까요?”

“……무슨 생각이오?”

“아까도 말했죠? 뭐, 겸사겸사. 그리고 제가 보따리까지 구해 준 사람이 위험해 처해지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그 말에 백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헬리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헬리아는 씨익 웃었다.

* * *

“어떤가요?”

“후우, 다행히 큰 고비는 넘겼습니다.”

“아이는요?”

레이아나는 제 배를 소중히 끌어안으며 의원에게 물었다. 의원은 옅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이는 무사합니다.”

“아아…….”

레이아나의 눈가에 눈물이 어렸다. 하마터먼 소중한 아이를 잃을 뻔했다는 것에 가슴이 철렁했다. 아이는 아버지를 닮았는지 굳세었다.

“그럼 이제 몸은 괜찮은 건가요?”

헬리아의 물음에 의원은 고개를 저었다.

“원래부터 몸이 약하신지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충분한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 말은 곧 그녀가 움직일 수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자칫 과도하게 몸을 움직이다간 이번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이 생길 수 있었다.

“기력을 회복하는 음식을 들이라 이르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의원이 방을 나가자 헬리아가 침대에 누워 있는 레이아나를 보았다.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진 것 같아.”

“후우, 다행이네요. 하지만 더는 무리해선 안 돼요.”

이제 곧 벨리앙 백작가를 떠나 아르센 왕국으로 가야 할 헬리아였다. 원래라면 함께 아르센 왕국으로 갔을 테지만 지금 레이아나의 몸 상태론 무리였다.

“……미안해.”

“아니에요. 좀 더 살폈어야 했는데.”

헬리아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레이아나는 아이를 낳을 때까지 벨리앙 백작가에 머물기로 했다. 아르센 왕국까지 가기엔 거리가 멀고 혹시나 또 이번 같은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레이아나는 못내 미안함과 아쉬움을 담은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또 만날 거예요.”

“……저기, 헬리아.”

무슨 이야길 하려는지 레이아나는 머뭇거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탁 하나 해도 될까?”

헬리아가 레이아나를 보았다. 레이아나는 제 배를 한번 쓰다듬고는 헬리아를 보았다.

“혹시 아이의 대모가 되어줄 수 있을까?”

“대모요?”

레이아나의 말에 헬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대모라니. 거기다 상대는 제국의 황태자비, 지금 상황으론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훗날 그녀가 낳은 아이는 제국의 황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아이의 대모가 되어달라니.

헬리아가 놀라자 레이아나가 헬리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시다시피 전 아르센 왕국 사람이에요.”

“알고 있어.”

레이아나는 헬리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어떤 나라 사람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레이아나는 오로지 헬리아라는 사람을 보았다. 그녀라면 믿을 수 있었다.

“이미 케이에게도 말해놨어.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돼.”

“하지만…….”

레이아나는 헬리아가 뭘 걱정하는지 알았다.

“‘헬리아’에게 부탁하는 거야.”

“…….”

아르센 왕국의 공주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 레이아나가 말한 의미를 알아챈 헬리아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조금 부풀어 있는 레이아나의 배를 보았다.

“제가 그래도 될까요?”

“물론!”

레이아나는 헬리아의 말이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헬리아는 얼떨결에 승낙하고 말았지만 이내 레이아나와 같은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대모라…….’

비록 부모는 아니지만 한 아이를 책임지게 된 것.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 *

-……리…… 리아…….

아련히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에 헬리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희미한 시야 사이로 한 여인의 얼굴이 비쳤다.

‘누구지?’

눈을 두어 번 껌벅거렸지만 시야에 뿌연 안개가 낀 듯 선명하지 않았다. 눈을 끔뻑이다 손으로 눈을 비볐다.

‘어, 어라…….’

내 손이 왜 이렇게 작지? 마치 어린애 손처럼 오동통한 손.

‘어린애?’

하지만 눈을 비빈 탓에 제법 시야가 맑아졌는지 눈앞에 선 여인의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나?’

자신의 얼굴을 똑 닮은 여인이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내가 아니야.’

아무리 자신과 닮았어도 미묘하게 자신과 달랐다. 무엇보다 자신은 이제 열아홉인데 여인은 스물은 애초에 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누구지?’

도통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여인은 그런 헬리아의 생각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그녀의 작은 몸을 안아 들었다.

삐거덕.

그녀가 있던 자리가 움직였다. 작은 유모차였던 모양이다.

-우리…… 예쁜…… 아…….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매우 익숙했다. 이건 현실인가? 아님 꿈인가?

-비…… 빈…… 여기 좀…… 요.

-오…… 리아…… 우리 예…….

그때 여인의 뒤로 낯익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잘생긴 미남. 남자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헬리아를 보았다.

-우리 귀여운 리아…….

-정말 ……아 당신을 쏙 빼닮지 않았소?

여인은 따스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한데 그녀의 눈빛에 어린 빛이 순간 씁쓸하게 보이는 것은 왜일까?

‘왜지?’

헬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여인에게 손을 뻗었다. 자신과 닮은 이가 꼭 울 것 같은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어서일까? 눈은 울고 있는데 입은 웃음을 짓고 있다. 그 부조화가 헬리아의 마음을 쓰리게 만들었다.

-마, ……마!

여인은 헬리아의 목소리에 눈을 크게 뜨고 더없이 사랑스런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의 사…… 하는 ……리아…….

뭐라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헬리아는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딸, 헬리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헬리아는 순간 무언가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마치 단단한 벽이 세차게 몰아치는 파도에 부서지는 것처럼. 헬리아의 가슴 안쪽으로 온기가 퍼져 나갔다. 자신에게도 이처럼 따스하게 웃어주는 사람이 있었구나.

여인은 헬리아를 품에 꼭 안고는 나직이 속삭였다.

-……안하구나. ……를 용…… 해 다오.

무엇이 그리도 그녀를 힘들게 하는 것일까? 하지만 헬리아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이것은 바로 꿈이라는 것을. 이 꿈이 보여준 것은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헬리아는 가슴이 아팠다. 이 여인은 곧 사라질 테니까. 헬리아는 이 꿈이 좀 더 지속되기를 바라며 여인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따스함, 부드러움, 편안함. 이것이 ‘어머니’인가. 헬리아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아아, 사랑받았구나. 나도, 사랑받았었구나.’

오랫동안 마음 한구석에 차갑게 얼어 있던 외로움이 온기에 녹듯 사라졌다. 헬리아는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더욱 그녀의 품에 안기었다.

“……님…… 공…… 님!”

‘따뜻해.’

헬리아는 좀 더 따스함을 느끼기 위해 더욱 그녀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님!”

어라? 근데 뭔가 좀 딱딱하다? 어머니의 품은 보드랍고 포근했는데? 뭐지?

‘뭐 따뜻하기만 하면 됐지.’

꽤 단단한 뭔가를 끌어안고 있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헬리아는 따뜻한 걸로 만족했다.

“……님! ……주님!”

한데 자꾸만 침잠하려는 헬리아의 정신을 뭍 위로 끄집어내었다.

“대체 언제까지 끌어안고 계실 겁니까?”

“……!”

순간 또렷이 들린 목소리에 헬리아가 번뜩 눈을 떴다. 제 눈앞에 아주 탄탄한 근율질의 몸이 있는 게 아닌가.

“어라?”

헬리아는 혹여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건 아닌가 싶어 근육질의 몸을 두어 번 쓸었다. 그랬더니 낮은 목소리의 누군가가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정 그리 원하신다면 도착해서 언제든 몸을 내어드리지요.”

“……엑, 이안?”

“참 빨리도 알아보시는군요.”

“어, 어라?”

뒤늦게 정신이 든 헬리아는 이안의 얼굴을 보고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후다닥 이안에게서 떨어진 헬리아가 당황해 물었다.

“왜,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아직도 잠이 덜 깨셨습니까?”

이안은 헬리아의 침이 묻은 상의를 보고 눈을 좁힌 채 닦아내며 말했다.

“그, 그게…….”

헬리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어찌 된 일인지 하나씩 떠올릴 수 있었다. 벨리앙 백작가에서 하루를 보내고 주변에 깔린 흑마법사들을 피하기 위해 예전 노예 상인에게 끌려 왔던 지름길을 이용해 아르센 왕국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국경 인근에 도착한 뒤 함께 왔던 알베르와 에른은 그들의 본국인 라비안 왕국으로 돌아갔다. 아마 자신들이 왕성에 닿을 때쯤 그들도 왕성에 도착할 것이다.

“벌써 다 온 건가?”

잠을 너무 많이 잤나? 헬리아는 입가에 묻은 침을 소매로 스윽 닦았다. 아무래도 그간 지치긴 했나 보다. 강철 체력인 그녀라도 꽤 고된 여정이었다. 이안을 빼 오느라 한계에 달하는 힘을 썼고, 거기다 흑마법사들에게 며칠을 쫓겨야 했다. 그동안 쌓여 있던 긴장이 국경을 넘으면서 풀린 모양이었다.

“어디까지 온 거야?”

“밖을 보시지요.”

이안이 밖을 향해 고갯짓을 하자 헬리아는 바로 마차의 창문을 열어젖혔다.

“바람이…….”

제국의 바람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창밖에는 제국에서 신물 나게 보았던 흰 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바람도 선선했다. 아직 아르센도 겨울이지만 제국의 겨울과는 확연히 달랐다.

“드디어.”

헬리아의 눈이 아련하게 빛났다.

“드디어 돌아왔네.”

바로 아르센 왕국의 수도로 들어가는 정문 앞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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