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권 - 27화 (27/42)

골드퀸

8

제1장 덫

“에취!”

숀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기침에 코를 훌쩍였다. 어찌나 추운지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괜찮아?”

“감기 걸린 거 아니야? 힘들면 먼저 들어가.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휴와 렌스가 얼굴이 붉게 상기된 숀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됐어. 그냥 콧물만 조금 나오는 거야.”

“그렇게 비실거려서 어디 움직일 수나 있겠어?”

‘이놈은 또 왜 온 거야?’

숀은 눈을 야리며 세인을 노려보았다.

“누가 비실거린다는 거야?”

“누구긴, 콧물 줄줄 흘리는 너지.”

“이게!”

“방해되니까 가.”

“이익!”

숀은 이를 갈며 저 혼자 뚜벅뚜벅 걸어가는 세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가! 아무리 다크소드가 헬리아 공주님께 충성을 맹세해도 과거에 그가 한 일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세인은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굴었다. 그게 숀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저놈을!”

“숀, 네가 참아. 어쩔 수 없잖아.”

렌스의 말에도 숀은 씩씩거렸다.

“야, 너 정말 열 있는 거 아니야?”

“열 없어!”

“얼굴이 좀 빨개진 것 같은데.”

“내가 감기 걸린 거 봤어?”

“하긴, 바보는 감기도 안 걸린다고 하지.”

“야, 렌스!”

“암튼 정말 몸 안 좋아 보여. 여긴 우리끼리 해도 괜찮으니까.”

“안 가. 나도 같이 갈 거야.”

결국 숀의 우김에 렌스와 휴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 재수 없는 놈! 누구보고 가라 마라야.’

숀은 이를 갈며 세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주변을 둘러보다 눈을 반짝였다.

“내가 이렇겐 못 살지.”

숀이 큼지막한 돌멩이를 줍더니 거기에 눈을 꾹꾹 눌러 눈뭉치를 만들었다. 물론 속에 돌멩이가 든.

“야야, 너 그러다 맞는다?”

휴가 숀을 말렸지만 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놔, 내가 저놈의 버릇을 고쳐 놓고 말겠어.”

“에휴.”

렌스는 고개를 도리질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숀은 큼지막한 눈 돌멩이(?)를 세인을 향해 힘껏 던졌다. 아무리 그가 소드 마스터라도 이 정도 거리라면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거나 먹어라!’

퍽!

“헉.”

정말 피하지 못한 건지 숀이 있는 힘껏 세게 던진 눈 돌멩이는 정확히 세인의 머리를 강타했다. 놀란 숀이 저도 모르게 서둘러 세인을 향해 달려갔다.

“야, 이 바보야!”

세인의 뒤통수에는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숀은 제가 던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화가 치밀었다.

“소드 마스터란 놈이 그것도 못 피하냐!”

세인은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너, 너 일부러 맞아준 거지? 내가 멍청이로 보여? 다 들었잖아?”

숀은 화가 났다. 누구에게 화가 난 건지 이젠 알 수 없었다. 자신들을 배신했던 그에게 화가 나는지, 그럼에도 그를 친구로 여기는 자신이 싫은 건지.

“세인!”

퍽!

“켁!”

순간 숀은 자신의 얼굴을 강타한 눈에 몸을 바둥거렸다.

“바보 같긴.”

“퉤퉤. 뭐, 뭐 하는 거야!”

“이 멍청이.”

“야!”

“너 나 때렸지? 피도 보이지?”

“그, 그거야 네가 안 피해서.”

“미안하지?”

“그, 그게…….”

숀이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본 세인은 피식 웃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무슨 웬수를 보듯 하는 놈이 제가 아프다니까 헐레벌떡 뛰어오는 꼴이 우스웠다. 그런데 그게 또 왠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친구라는 건가…….’

다크소드에 있는 동료는 동료일 뿐, 친구라고 느끼진 못했다. 하루하루 누군가를 죽여서 생을 이어온 자들이다. 그들의 마음에 정 따윈 이미 사라진 지 오래. 그랬기에 세인에게 있어 숀 일행은 어떻게 보면 처음 사귄 친구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숀은 저를 향해 바락바락 화를 내지만 솔직하고 꾸밈이 없었다.

‘내가 이 녀석을 마음에 들어 했던가.’

그래서 제 머리에 당돌하게 돌멩이를 던졌음에도 그대로 맞아주었다. 자신이 아픈 걸 보면 그도 화를 누그러뜨리지 않을까. 그리고 그랬더니 숀은 정말 자신의 안위를 걱정했다.

“정말 멍청하다니.”

“뭐, 뭐라고? 이 재수 없는 놈아!”

“쉿!”

세인은 옅게 지었던 웃음을 지우고 숀의 머리를 꾹 눌러 앉혔다. 숀이 곧장 쏘아붙이려 했지만 세인이 어느 한곳을 가리키자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저기야.”

뒤따라오던 휴와 렌스도 몸을 낮췄다.

“저기야?”

“들키지 마. 들켰다간…… 나도 모른다.”

“안 들켜. 아니, 절대 들키지 말아야지.”

이 순간만큼은 마음이 통한 그들이었다. 헬리아 공주가 그들에게 내린 명령. 세인과 숀 일행은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가게를 습격하라니, 우리가 강도도 아니고…….”

“우리 공주님 스타일이 다크하잖아.”

“하기야.”

숀은 세인의 말에 공감했다.

“같은 편이라 다행이야.”

숀과 세인이 동시에 말을 내뱉었다. 그러곤 서로를 보며 풋 하고 웃었다.

“자, 그럼 깽판 치러 가볼까?”

세인과 숀 일행이 소리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라몬 공작이 치밀한 자라는 건 인정해.”

라몬 공작 같은 자들은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 과거 아돌프 공작만 해도 증거를 잡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가. 헬리아가 다크소드를 손에 넣었다 하나 그것만으로 공작의 죄를 밝혀내기는 힘들었다. 증언은 말 그대로 증언일 뿐. 명확한 문서를 남기지 않았기에 라몬 공작을 끌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헬리아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증거? 없다면 만들면 그만이야. 안 그래?”

“만든다고?”

“마침 좋은 무대도 만들어져 있고.”

“판은 걱정하지 마세요. 호호호. 정말 공주님과 함께 있으면 즐겁다니까요. 호호호!”

이안은 이미 그녀의 생각을 눈치챘다.

‘그래서 그런 명을…….’

전날 황성에 들어오기 전 헬리아는 다크소드에 한 가지 명을 내렸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한창 그 명령을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이안은 헬리아의 말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이지 헬리아다운 방식이었다.

“상대가 똥물 튀겨주면 우리도 튀겨주면 되는 거야. 팍팍.”

헬리아는 흐드러지게 날리는 눈발을 보며 입술을 끌어 올렸다.

“자, 그럼.”

소파에 앉아 있던 헬리아가 일어서려 하자 이안과 엘라임이 동시에 그녀의 어깨를 눌렀다.

“어디 가십니까?”

“어디 가게?”

이게 단체로 약을 처먹었나? 헬리아는 저를 붙잡는 이안과 엘라임의 모습에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왜?”

“왜긴 왜야?”

“그러니까 왜?”

“어디 가게?”

“이제 움직여야지.”

엘라임은 물론 이안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하루를 못 가는군.”

“이번만은 동감이야.”

여기도 헬리아로 대동단결되는 이들이 있었으니. 그러나 헬리아는 두 사람의 표정에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무슨 범죄자냐?”

“범죄자는 아닌데 사고 유발자랄까.”

헬리아의 한쪽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사.고.유.발.자?”

헬리아의 목소리가 싸늘해지자 이제야 분위기 파악한 엘라임이 찔끔했다. 이미 이안은 시선을 돌렸다.

‘저거 언제는 동감이라며!’

그러나 이안으로서도 헬리아가 화를 내면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그래, 이제 좀 컸다 이거지.”

“그, 그게…….”

엘라임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헬리아로부터 어마어마한 시커먼 오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엘라임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헬리아가 화나면 정말이지 그 뒤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헬리아의 곁에 있은 지 10년. 당연히 위기 대처 방법 또한 이미 알고 있었다.

퍼엉!

평소 동물 모습은 싫어하는 그가 이번만큼은 자진해서 다람쥐로 변했다. 다람쥐로 변한 엘라임은 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헬리아?

고개를 살짝 모로도 꼬아주고 손도 가지런히 모았다. 그 모습에 헬리아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뭐라 하진 못했다.

‘좋았어.’

잘 드러나진 않지만 인간 불신에 인간이라곤 쓸 놈과 쓸모없는 놈으로 구분하는 그녀도 좋아하는 게 있었으니, 바로 동물과 어린아이였다. 다행히 그의 의도는 먹혀들었다. 헬리아 아래서 구른 짬밥이 십여 년이 아닌가.

“…….”

헬리아는 눈을 좁히고 엘라임의 몸을 들어 올렸다. 부들부들한 털이 손 안에 만져졌다.

“약은 놈.”

헬리아는 엘라임의 조그마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엘라임은 순간 오소소 소름이 돋았지만 산 걸로 만족했다. 헬리아가 눈을 샐쭉이 뜨고 엘라임을 제 어깨에 올려놓았다. 엘라임은 좋다구나 그녀의 어깨에 달라붙었다.

-근데 정말 어딜 가게?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물음에 헬리아는 대답 대신 레브를 불렀다.

“레브.”

“네.”

레브가 다시 다가오자 유니의 눈이 반짝였다.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유니.”

“호호호, 쓰읍, 너무 제 취향이라.”

‘네 취향이 아닌 놈도 있더냐.’

헬리아는 혀를 차곤 다시 레브를 보았다. 언제나 긴 앞머리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다니는 그는 지독히 말수가 적었다. 그러나 헬리아는 레브를 수상히 여기지 않았다. 세바스찬이 맡긴 그림자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레브.”

“……예, 공주님.”

헬리아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레브에게 다가가자 레브는 살짝 당황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니었지만 옆에서 지켜본 결과 결코 헬리아가 아무 이유 없이 웃음을 짓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웃음이 좋은 의도인 적은 없었다. 단 한 번도!

“저번엔 잘해 줘서 고마워.”

“아, 아닙니다. 그냥 누워만 있었을 뿐입니다.”

헬리아의 웃음에 당황한 레브가 저도 모르게 말이 길어졌다. 헬리아가 사신단과 따로 움직였을 때 레브가 헬리아의 대역을 했던 것이다.

‘왜, 왜 이렇게 불안하지?’

“그래서 말인데.”

그 불안함의 정체는 곧 파악되었다.

“이번에도 부탁해.”

“예?”

레브는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헬리아는 그를 보며 웃다가 유니를 보았다.

“계속 수고해 줘.”

“아, 알겠습니다.”

순간 유니의 눈이 진지해졌다.

“조심하세요. 절대로 봉인이 풀려선 안 됩니다.”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우, 허리야.”

“삭신이 다 쑤신다.”

“언제 끝나려나.”

시녀들이 푸념 섞인 한탄을 토로하며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탄신일을 맞아 연회 준비와 황성을 찾아온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갔다. 하루 밤낮을 일하고, 그것도 모자라 대대적으로 인원을 충원했지만 쉴 틈도 없었다.

“그런데 봤어? 라비안 왕국의 왕자님 말이야.”

한 시녀가 꿈에 부푼 듯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라니, 너무 멋있지 않아?”

그 시녀는 마치 눈앞에 왕자님이 있기라도 하듯 몸을 비틀어댔다. 동료 시녀들은 혀를 찼다. 매년 저렇게 어디 왕자의 첩실이라도 되어 보려고 애를 쓰는 시녀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히 꿈이 아니라 아주 드물게 정말 왕자나 귀족가의 첩실로 들어간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시녀들 대부분이 귀족가 출신이고, 미모와 학식이 뛰어난 편이어서 첩으로 맞기엔 나쁘지 않았다.

“라비안 왕자? 말도 마.”

옆에 있던 시녀가 꿈에 부푼 그 시녀에게 한마디 쏘아 붙였다.

“그 왕자님 엄청나게 까다롭더라. 어찌나 유난을 떨던지. 음식이 짜다, 싱겁다. 거기다 방은 왜 이렇게 더럽냐 하면서 생트집을 잡는다니까. 그새 시녀가 몇 명이나 바뀐 줄 알아?”

하지만 꿈에 부푼 시녀의 망상을 꺾을 순 없었다.

“뭐, 그래도 어때? 잘생기고 돈 많으면 땡이지.”

그때였다.

퍼억!

“아얏!”

몽롱한 망상에 빠져 있던 시녀가 그만 앞을 보지 못하고 모퉁이를 돌던 이와 부딪치고 말았다. 시녀는 철퍼덕 엉덩방아를 찧자 짜증이 일었지만 이곳은 황성. 혹여 상대가 높은 이가 아닐까 두려운 마음도 함께 들었다.

“괜찮아요?”

낮지만 미성의 목소리에 시녀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상대의 옷이 보였다. 시종 차림이었다.

“대체 어따 눈을 두…… 두…… 시고…….”

“괜찮아?”

그때 또다시 옆에서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걱!’

한껏 쏘아붙이려던 시녀의 두 눈이 이내 왕방울만 해졌고 입은 쩌억 벌어졌다. 뒤에 있던 시녀들도 상대방의 얼굴을 보더니 전부 입을 닫지 못했다.

“괜찮나?”

“괜찮아.”

빛에 반짝이는 금발, 여자보다 희고 고운 피부, 앵두같이 촉촉함을 머금은 입술. 그야말로 신이 빚은 예술품이었다.

“어, 어버버.”

시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금발의 남자가 다가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디 안 다쳤어요?”

“아, 아뇨! 다치긴요!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손에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시녀는 하나도 안 아팠다. 아니, 아파도 지금은 아프지 않았다.

“다행이네요.”

금발의 남자가 환히 웃자 시녀들은 세상이 환해지는 것 같았다.

“손은?”

그때 뒤에 있던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렸다. 금발의 남자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시녀들은 그 남자를 보곤 다시 입을 벌렸다. 밤하늘보다 더 짙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차가운 미남자였다. 금발의 남자가 태양의 신이라면, 이 남자는 밤의 신이라고나 할까. 극과 극의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들이었지만 너무도 잘 어울렸다.

“아, 제 손은…….”

시녀는 제 손을 보더니 수줍게 몸을 비틀었지만 검은 머리 남자의 관심사는 그녀가 아니었다.

“괜찮아.”

검은 머리 남자는 금발인 남자의 손을 쓸어주었다. 피가 철철 나고 있는 시녀와 달리 살짝 먼지가 묻었을 뿐이었지만.

‘허, 헉!’

‘완전 예술이야!’

‘도대체 어디 소속이래?’

시녀들은 두 남자의 행태를 몽롱하게 바라보았다. 제 손에 피가 철철 흘러내리면 어쩌랴. 팔에 붙어만 있음 됐지. 지금 이 모습을 언제 또 볼 텐가. 안쓰럽게 바라보는 검은 머리와 그게 당연하다는 듯한 금발. 시녀들은 빠르게 남자들의 발에서 머리끝까지 스캔을 마쳤다. 두 사람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왕자님 같았다. 시종이라는 게 아쉽지만 저 정도 미모는 시종이라도 괜찮다.

‘이런 시종이 있었나?’

순간 두 사람의 얼굴을 처음 본 시녀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주변 시녀들에 의해 그 의견은 묵살되었다.

‘충원된 거겠지. 아무렴 어때! 완전 멋지잖아!’

‘아까는 돈 많아야 된다며?’

‘야, 저 얼굴을 봐! 저 정도 얼굴이면 내가 돈 벌고 산다. 그럴 가치가 있는 외모라구!’

시녀들은 엄격한 황실 예법을 교육받은 탓에 대놓고 소리를 지르진 않았지만 속으론 오만 난리법석을 피웠다. 게다가 이번에 충원된 모양인지 몇 년을 황성에서 일해 온 시녀들도 남자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금발의 남자가 환히 웃으며 사과했다.

“미안해요. 괜찮은 거죠?”

“무, 물론이죠!”

넘어졌던 시녀가 이내 자주 쓰는 ‘비틀거리기’를 시전했다.

“아앗!”

“괜찮아요?”

금발의 남자가 시녀의 몸을 붙잡았다. 시녀는 남자의 품에 안기며 숨을 들이마셨다.

‘어후, 냄새도 좋다. 흡하흡하.’

그 모습을 시녀들이 못마땅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저 여우년, 또 여우짓 하네.’

‘이년아, 그만 좀 붙어라!’

주위에 있던 시녀들은 부러움과 시기에 얼른 그녀를 금발의 남자에게서 떼어놓았다.

“한데 어디 소속이신지…….”

시녀들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어디 소속인지만 알면 또 보러갈 생각이었다.

“아, 저기 별관으로…….”

금발의 남자는 시녀들의 시선이 조금 난처한지, 아니면 쑥스러운지 볼을 살짝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시녀들은 또 자지러졌다.

‘엄마야, 너무 멋있다!’

‘완전 예술이야!’

시녀들은 아까보다 더 눈을 똘망똘망하게 떴다.

“저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이름이요?”

남자는 시녀들의 반응이 부담스러운 건지 조금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헬리오라고 합니다.”

남자의 환한 웃음에 여자들은 다시 한번 자지러졌다.

“흐음, 제법 쓸 만한데?”

금발의 남자는 창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 보고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금발은 햇빛에 반짝거렸고, 금안은 호박보다 더 투명하게 빛났다. 그야말로 절세 미소년이었다.

-뭐가 쓸 만하다는 거야.

금발 남자의 뒤로 은빛 털이 자르르한 다람쥐 한 마리가 툭 튀어나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잘 속여 넘겼잖아.”

-더 튀는 것 같은데.

엘라임은 푹 한숨을 쉬며 남장을 한 헬리아를 보았다. 뭐라 할 말이 없어지는 외모였다. 길고 탐스런 머리카락을 자르고 남자 옷만 입었을 뿐인데 헬리아는 완벽한 미소년으로 변신해 있었다.

“튀다니? 나보다 오히려 이안이 튀지. 그러게 왜 따라서 변장을 하겠다는 건지.”

헬리아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검은 머리의 남자, 이안을 보았다. 성별이 바뀐 그녀와는 달리 시종복으로 옷만 갈아입은 이안이었지만, 워낙 훤칠한 키에 환한 마스크를 지닌 그라 시종으로 보일 리 만무했다. 옷만 아니었다면 귀족으로 보일 판이다. 사실 귀족이기도 하지만.

“누가 할 소리인지 모르겠군.”

“반말이 아주 입에 착 달라붙는구먼.”

헬리아는 살짝 미간을 좁혔다. 신분을 숨기고 변장을 했기 때문에 같은 시종끼리 존댓말이 이상해 이안에게 반말을 부탁했다. 그런데 웬걸?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반말을 틱틱 내뱉는 게 아닌가. 거기다 그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이러니까 닮긴 닮았네.”

다시 창에 얼굴을 비춰보던 헬리아는 제 얼굴에서 세드릭과 빈센트의 얼굴이 보이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겨우 머리카락 하나 자른 것뿐인데 분위기가 닮아 있었다. 이래서 피는 못 속인다는 걸까. 그간 주워 온 자식이니 뭐니 하는 말들을 들어온 헬리아에겐 생경한 느낌이었다.

-너무 잘 어울려서 문제라구.

엘라임은 나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자로 변한 헬리아는 무서우리만치 아름다웠다. 원래도 미인이었지만 남자로 변해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퇴색되지 않았다. 오히려 두려울 정도로 아찔해졌다고나 할까. 엘라임은 그녀가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을 백번 감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필시 그녀는 바람둥이가 되어 있으리라.

-으으으으.

엘라임은 좀 전만 해도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가식적인 미소를 짓던 헬리아의 모습을 떠올리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이쯤이 아닌가?”

“누굴 찾는 거지?”

“세자크. 라몬 공작의 최측근이야.”

-그놈은 찾아서 뭐 하게?

“일을 꾸미려면 입을 맞춰야 하는 법이지. 그 입을 찾으러 가는 거야.”

-……만나서 어떻게 하게?

왠지 이미 답을 들은 느낌이었지만 엘라임은 혹시나 한 마음에 물었다.

“만나서 뭘 하긴? 잘 보쌈해 와야지.”

“후우…….”

이안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한 나라의 공주가 남의 가게에서 깽판 치라 명하고, 거기다 직접 사람을 납치하겠다니. 그러나 헬리아는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다들 성인군자 나셨어? 엉?”

괜히 못마땅해진 헬리아는 눈을 흘겼다.

“그보다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 게 맞나?”

이안이 불쑥 질문을 던지자 헬리아는 순간 움찔했다.

“무, 물론이지.”

이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에 반해 헬리아의 고개가 점점 좌로 틀어졌다.

“위치는?”

“……왜?”

“찾지 못할 게 분명하니까.”

“내가 길치인 줄 알아?”

“길을 못 찾는 게 길치다.”

“…….”

헬리아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별관 4층 왼쪽에서 다섯 번째 방이라고 알고 있어.”

이안은 그 말을 듣고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본 헬리아는 입을 비틀어 올렸다.

“내가 길치냐고. 모르는 곳의 길을 나보고 어떻게 찾으라고? 처음 간 길을 모르는 게 당연하잖아?”

-그게 길치야.

“…….”

엘라임이 툭 말을 내뱉고 이내 쪼르르 이안의 어깨에 달라붙었다. 괜히 요즘 들어 부쩍 엘라임이 이안과 친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든 헬리아였다.

* * *

톡. 톡. 톡.

라몬 공작은 의자에 삐뚜름하게 앉아 책상을 손가락으로 내려쳤다. 그에 세자크는 한발 물러서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의 침묵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황태자는?”

“황태자비와 만난 뒤 별다른 행동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아무 짓도 안 한다?”

라몬 공작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럴수록 세자크의 심장은 더욱 빠르게 뛰었다.

“아스칼, 그놈은?”

황태자의 최측근이자 그의 호위 기사인 아스칼이 움직이지 않을까 물은 말이다. 그러나 세자크는 고개를 저었다.

“최우선적으로 사람을 붙여놓았습니다만, 황태자의 호위를 맡거나 연무장에 들리는 일 외엔 어떤 이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톡톡톡-

라몬 공작의 손가락이 빨라졌다. 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슨 속셈이지? 그저 허세였나?”

그러나 그렇게 치부하기엔 왠지 황태자의 자신만만했던 눈빛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제 대업이 코앞이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일이 진행되어야 한다. 라몬 공작은 조심에 또 조심을 기했다.

“계속 황태자를 주시해라. 그리고 다른 왕족과 귀족들도 수상한 점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도록.”

“알겠습니다.”

세자크가 고개를 숙이곤 라몬 공작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후우.”

라몬 공작의 방을 나와 제 방으로 돌아온 세자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몬 공작의 앞에만 서면 그의 심장이 남아나질 않았다. 손바닥에서 축축한 땀이 느껴졌다. 세자크는 눈을 찌푸리곤 시종을 불렀다.

“목욕을 할 테니 물을 받아놓아라.”

“예, 남작님.”

시종이 목욕물을 받아놓자 세자크는 곧장 욕실로 가 옷을 벗고 뜨뜻한 탕에 몸을 뉘였다. 그러자 라몬 공작 앞에서 긴장되었던 몸이 차츰 이완되기 시작했다.

“후우…….”

낮게 신음을 내뱉은 세자크는 이번 일이 끝나면 휴가라도 받아 쉴 것을 다짐했다. 그러지 않으면 신경이 오래 버티질 못할 것 같았다. 유약한 성격의 그가 라몬 공작을 곁에서 모실 수 있었던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쓰기 편했으니까. 다른 이들은 라몬 공작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거나 라몬 공작의 손을 벗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세자크는 원래 소심한 성격 탓인지 제멋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라몬 공작의 뜻을 그대로 행했다. 그게 라몬 공작이 세자크를 곁에 두는 이유였다.

“후우, 한데 도대체 공작님은 여자들을 그리 모아서 무슨 일을 하시려는 건지…….”

“무슨 일을 하려나?”

촤악!

“누, 누구요!”

갑자기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세자크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뜨거운 물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수증기에 가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여자들을 어디로 데려갔지?”

“누, 누구냐! 나와라!”

세자크는 놀라 소리쳤지만 이상하게 밖에서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쯤 되면 분명 밖에서 경비를 서는 이가 들었어야 했다.

‘무, 무슨!’

놀란 세자크는 이내 이성을 되찾고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마법을 시전하려는 찰나, 손목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찰칵.

“마법을 쓰면 되나?”

“이, 이건…….”

그때 차츰 수증기가 옅어지더니 눈앞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다. 복면인은 낮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 내가 껴봐서 아는데 마법을 전혀 못 쓰겠더라구.”

“이, 이런!”

세자크는 놀라 제 몸이 알몸인 것도 잊고 어떻게든 팔목의 마나 구속구를 풀려 애를 썼지만 소용없었다.

“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짓을!”

“뭐긴, 보는 그대로지.”

“여, 여긴 제국이다! 감히 제국의 귀족을 납치하려 하는가?”

“제국인지 누가 모를까. 그리고 납치하다니? 그냥 살짝 같이 어디로 좀 같이 가자는 거지.”

‘그게 납치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세자크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무의식중에 뒤를 돌아보았지만 뒤엔 또 다른 복면인이 서 있었다.

“히익!”

세자크는 그제야 제 신변에 크나큰 문제가 생겼음을 인지했다.

“사, 살려 주시오.”

“누가 죽인댔나?”

“사, 살려…….”

“자자, 그럼 이제 보쌈해서 가자구.”

그 발랄한 목소리에 뒤에 있던 복면인이 발버둥 치려던 세자크의 뒷목을 재빨리 내려쳤다.

“커, 커억.”

기절한 세자크가 탕 위로 둥둥 떴다. 발랄한 목소리의 남자는 쓰러진 세자크를 콕콕 찔러보고는 반응이 없자 그제야 뒤집어쓴 복면을 벗었다. 그러자 금발의 화려한 외모를 지닌 남자가 입꼬리를 올리곤 세자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월척이로세.”

금발의 남자, 아니, 헬리아였다.

* * *

“너무 짜잖아.”

“그냥 드세요.”

에른은 한숨을 내쉬며 알베르의 입에 빵을 들이밀었다. 이 무례한 시종의 태도에 알베르는 왈칵 화를 냈지만 그뿐이었다.

“나 안 먹어!”

“이게 몇 번째예요.”

“맛이 없는 걸 어떻게 해?”

“왕자님이 세 살 먹은 애예요?”

“누가 애야!”

알베르가 아론의 말에 투덜거렸다.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러니 제발 나잇값 좀 하시고 얼른 드시기나 하세요.”

에른의 잔소리에 알베르는 투덜거리면서도 빵을 오물거렸다. 그 모습에 에른은 피식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투덜거리고 까칠한 알베르였지만 그뿐이었다. 정말 먹기 싫다면 먹지 않아도 되는데 먹는 걸 보면 말이다.

‘애초에 먹을 거면 그냥 조용히 먹으면 될 것을.’

에른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지만 어떻게 하겠나. 그게 제 주인의 성깔(?)인 것을.

“에효.”

“왜 한숨은 쉬고 난리야?”

“왕자님 얼굴이 한숨을 부르네요.”

“에른!”

“자자, 드세요. 식겠어요.”

에른은 어린 막내 동생 대하듯 알베르를 대했다. 그에 알베르는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지만 또 입을 삐죽일 뿐 음식을 먹었다. 에른은 알베르가 태어날 때부터 함께해 온 소꿉친구이자 시종인 탓에 알베르는 그에게 모질지 못했다. 뭐, 투덜거림은 심하지만.

“찾아봤어?”

빵에 버터를 바르며 입을 연 알베르를 보며 에른은 난감한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그게…….”

“아직도야?”

“아무래도 제국인지라…….”

“라비안의 쉐도우들이 그 여자 하나 못 찾는다고?”

계속 여관에서 보았던 그 리아라는 여자를 찾았지만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제국이라도 쉐도우였다. 그런데 아직도 찾지 못했단 말인가. 에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황태자가 황궁에 입궁했다 합니다.”

“…….”

알베르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어떻게?”

“워낙 감쪽같아 어떻게 들어왔는지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황성의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왔을 거라 추정됩니다.”

알베르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래 가지곤 정체를 밝혀낼 수 없었다.

“그 리아라는 여자가 제국인이 아니라고 가정했을 때, 타국의 인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날 그들이 한 말을 생각하면 황성에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문이 닫히기 전에 들어온 자들을 조사해 봐. 그 금발에 금안. 분명 특이한 외모야. 거기다 제국 안에선 마법으로 변장할 수 없을 테니 분명 찾을 수 있을 거야.”

“예.”

에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하군.”

알베르가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으며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내었다. 황궁 안에 쫙 갈린 경비병들, 그리고 낯선 타국의 환경. 귀하게만 자라온 알베르에겐 그 모든 게 스트레스였다.

“산책하고 올게.”

“나가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답답하다고.”

“왕자님.”

에른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알베르는 에른이 단순히 산책을 저어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이곳은 라비안 왕국이 아닌 제국의 심처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알베르가 자칫 실수라도 저지를까 걱정된 것이다. 그 마음을 알베르가 모를까. 그러나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걱정 마. 조용히 산책만 할 거니까.”

“제국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알베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이야긴 이미 본국에서도 줄기차게 들어왔다. 다만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온 이유는 그것이 제국이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영토를 장악하고 있는 제국의 초대를 거절한다면 자칫 빌미를 줄 수 있었다. 제국은 작은 빌미 하나로 라비안 왕국을 흔들 수 있었다. 그것이 제국이었다.

“이제 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알베르의 맘 편한 소리에 에른은 한숨을 내쉬고 일어서는 알베르를 따라나섰다. 그러나 왠지 모를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 * *

덜컹덜컹.

카트가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헬리아는 묵직한 소음에 살짝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소리가 좀 크지 않은가.

“이거 소리가 좀 많이 나는 거 아니야?”

-무거우니까 그렇지.

다람쥐의 모습으로 변해 있는 엘라임이 헬리아의 어깨에 올라 앉아 고개를 저었다. 카트는 그렇게 튼튼한 재질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애초에 사람을 운반할 용도로 쓰이는 게 아니다. 부서지지 않는 것만 해도 용하지 않은가.

“사람이 온다.”

이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쪽에서 시녀들의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헬리아는 그에 미간을 좁혔다.

“뒤는?”

-경비병이 이쪽을 보고 있어. 되돌아가면 이상하게 여길 거야.

헬리아는 미간을 찌푸리곤 카트를 내려다보았다. 위에는 주전자와 컵이 놓여 있고 아래쪽은 천으로 감싸고 있어 안의 내용물이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헬리아는 결국 경비병보단 시녀들을 통과하기로 했다. 시녀들조차 속여 넘기지 못하면 이대로 방으로 돌아가는 건 무리일 게 분명했다. 드디어 시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헬리아는 그에 허리를 펴고 당당히 카트를 밀었다.

‘이대로 그냥 좀 지나쳐라.’

헬리아는 내심 시선을 외면한 채 걸음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 마음대로 일이 되겠는가. 시녀들이 갑자기 헬리아 일행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게 아닌가?

‘드, 들킨 건가?’

도대체 왜 다가오는 거야! 그냥 지나치면 될 것을 갑자기 걸음도 느려지고 눈동자가 온통 자신들을 향해 있었다.

‘젠장, 뭐 볼 게 있다고…….’

헬리아는 속으로 욕을 내뱉다가 시녀들의 시선이 자신과 이안에게 가자 살짝 눈매를 좁혔다.

‘설마…… 얼굴?’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외에 답이 없었다.

-너무 잘생겨서 문제라고!

‘이 정도는 돼야 사람이지!’

-잘났다, 잘났어.

헬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제 얼굴이야 잘생기긴 했지만 지금은 남자 모습이 아닌가. 이렇게까지 시선을 끌 정도는 아니란 말씀-물론 헬리아 본인의 주관적인 생각일 뿐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헬리아는 이안을 슬쩍 흘겼다. 그러나 이안은 그런 헬리아의 시선을 가볍게 묵살했다. 헬리아는 눈을 팍 찡그렸지만 시녀들의 목소리에 표정을 수습했다.

“어머, 새로 오신 분이신가 봐요?”

“어디 소속이세요?”

헬리아와 이안의 멋진 외모에 시녀들의 눈동자는 이미 하트를 그리고 있었다. 그쯤 되니 헬리아는 이안과 제 얼굴이 정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좀 잘생겼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야?’

매번 잘생긴 얼굴만 봐서 감을 잃은 헬리아였다.

‘하, 잘생겨도 문제로다.’

-…….

헬리아는 제 완벽하리만치 아름다운 외모에 혀를 찼고, 엘라임은 썩은 사과 백 개는 먹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나 지금이 외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생각할 때인가. 헬리아는 시녀들의 관심을 떼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자크 님의 수발을 들고 있습니다.”

“아…….”

“세자크 님이 공작님께 심부름을 시킨 일이 있으셔서…….”

헬리아의 말에 시녀들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그에 헬리아는 라몬 공작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아, 고, 공작님의 심부름이요?”

“그런데 제가 좀 늦을 것 같아서…….”

“그, 그러면 안 되죠!”

“얘, 넌 왜 가는 사람을 막아서.”

“너도 막았잖아?”

시녀들이 투닥거리다 그만 카트를 치고 말았다.

덜컹.

그때 카트 밑으로 세자크의 손이 살짝 삐져나와 버렸다.

‘헉.’

헬리아는 그것을 보고 얼른 손을 뻗었지만 시녀들이 보고 있는 터라 자세를 바꿀 수 없었다.

“어머 죄송해요, 주전자가…….”

주전자가 넘어지자 시녀들이 카트에 시선을 두기 시작했다. 헬리아는 순간 숨을 들이켰지만 그때 이안이 다리로 세자크의 팔을 집어넣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다행히 팔이 나온 쪽은 시녀들이 시선 사각에 위치에 있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후우.’

“이러다 늦겠다.”

이안의 말에 시녀들이 다시금 자신들이 누구를 붙잡았는지 깨달았다.

“어, 어머 죄송해요. 얼른 가보세요.”

“저, 저기 제 이름은 에이미예요. 별궁 담당인데 언제 식사 한번이라도.”

“어머, 얘는. 제 이름은…….”

뭐에 눈이 뒤집힌 듯 시녀들이 달려들자 헬리아는 난감하게 웃으면서도 얼른 그녀들에게서 빠져나왔다.

“후우…….”

정말이지 세자크의 팔이 삐져나왔을 때는 심장이 철렁했다.

-차라리 변장을 하지.

“마법사도 드나드는 곳이야. 이상함을 눈치챌 거야.”

헬리아는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서 돌아가자.”

헬리아가 걸음을 재촉할 찰나였다.

“누가 온다.”

이안이 경고를 했지만 급한 마음에 그 경고를 듣지 못한 헬리아가 그만 모퉁이를 돌던 남자와 부딪치고 말았다.

“아앗!”

남자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바닥에 철퍼덕 쓰러졌다.

“도대체 어따 눈을 두는 거야!”

날카로운 음성이 헬리아에게 쏟아졌다. 넘어진 이는 귀족으로 보이는 듯 따르는 시종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귀찮은데 그냥 확.’

그렇게 마음을 먹은 헬리아가 상대를 본 순간, 상대도 헬리아를 보았다. 그리고 서로 눈이 커졌다.

“……!”

“넌……!”

넘어진 남자, 알베르는 화를 내다 말고 부딪친 사람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리, 리아?!”

알베르의 외침에 헬리아는 눈매를 구겼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찰나였다.

“헬리오라 합니다. 다치신 덴 없으십니까?”

“어, 어?”

알베르는 헬리아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애초에 그도 헬리아의 정체를 확신하고 한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알베르의 시선이 헬리아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왕자님, 리아라뇨?”

뒤에 있던 에른이 알베르를 일으켜 세워주며 헬리아를 보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전날 그가 보았던 리아라는 자는 분명 여자였지,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아니었다. 물론 알베르가 그렇게 착각할 정도로 금빛의 머리색이며 눈동자색이 같았지만 분명한 차이는 눈앞의 시종은 전날의 리아와는 달리 남자라는 것이다.

“왕자님, 이자는 남자입니다.”

“하지만…….”

알베르가 에른의 말에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의 눈에는 리아, 그 자체였다. 아니, 전날 보았던 게 진짜 모습이 아닐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럼 전 이만.”

“잠깐.”

‘아, 또 왜?’

헬리아는 짜증이 와락 솟구쳤지만 필사의 인내심으로 참아냈다. 그러곤 언제 그랬냐는 듯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신지요?”

“너 리아지?”

“그 리아라는 분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

헬리아와 알베르가 서로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알베르는 눈을 좁히다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 이제까지 내 눈은 틀린 적이 없어. 넌 리아야!”

“왕자님!”

에른은 알베르의 팔을 붙잡았다. 괜히 엄한 사람 붙잡고 늘어지는 꼴이 아닌가. 상대는 한낱 시종에 불과했지만 이곳은 제국이며, 시종은 제국인이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제국에 꼬투리를 잡힐 수 있었다. 그러나 에른의 만류에도 알베르는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있는지 헬리아에게 한 발 다가갔다.

“전 남자입니다.”

“난 리아가 남자라고 안 했는데?”

“시종분 말씀을 들어보면 저보고 남자라고 놀라지 않았습니까? 그럼 여성분을 찾으시는 게 아닙니까?”

알베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게 빠져나가겠다?’

‘이 질긴 놈.’

헬리아는 자신을 붙잡는 알베르에게 슬슬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요놈을 어떻게 하지? 그러나 알베르는 그런 헬리아의 생각도 모른 채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

“그럼 저 녀석은 뭐지?”

차츰 주변이 눈에 들어온 알베르의 눈에 헬리아의 뒤에 서 있던 이안이 들어왔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저런 검은색은 제국 내에서도 드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전날 리아와 함께 있던 이가 아닌가!

“…….”

헬리아는 눈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이안을 보았다. 그러다 이내 시선을 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모르는 사람인데요?”

“모, 모른다고?”

“아, 언제 제 뒤에 있었답니까? 제가 오늘 충원돼서 잘 모르겠는데요.”

“…….”

알베르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이게 어디서 뻔뻔하게?’

알베르는 이안의 표정이 구겨지는 걸 보았다. 그런데도 발뺌을 하겠다? 헬리아는 당당했다. 뭐 그래서 어쩔 건데? 그런 포즈를 취했다. 그에 알베르는 입술을 깨물었다.

“웃기지 마! 누가 봐도 한패잖아!”

“증거 있습니까?”

헬리아가 팔짱을 끼고 알베르를 쳐다보았다. 미스릴로 만든 철판 열 개는 깐 듯한 태도에 알베르는 미간을 좁혔다.

“증거?”

“제가 그 리아라는 사람인 증거 말입니다.”

알베르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그래?”

“생사람 잡지 마십시오.”

“그럼 할 수 없지.”

알베르가 헬리아를 보며 웃었다. 그 모습은 일전에 투덜대던 투덜이 왕자가 아니었다. 헬리아는 그의 자신만만한 표정에 눈을 좁혔다.

“그럼 물어보면 되겠네. 충원되었다고? 네가 진짜 제국의 시종인지 물어보지. 진짜 제국인에게 말이야.”

“…….”

“게다가 혹시 또 알아? 이 카트 밑에 뭐라도 있을지.”

알베르는 단순히 헬리아를 위협하기 위해 그저 모션을 취했을 뿐이다. 정말 단순한 위협이었다.

덜컥.

“어, 어어?”

하지만 알베르가 본 것은 정말 사람이었다!

“뭐, 뭐야……!”

카트 밑에 알몸으로 잔뜩 웅크려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 순간 알베르의 손이 떨리며 천을 내려놓았다.

“사, 사람이…….”

“와, 왕자님!”

그것을 놓치지 않은 에른이 얼른 몸을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는 찰나였다. 그의 목덜미로 부드러운 털이 느껴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움직인다는 것이다! 에른은 그 오싹한 기분에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움직이면 죽는다.

다람쥐로 변해 있던 엘라임이 에른이 움직이자 그의 목을 빠르게 점한 것이다. 에른은 정체도 모를 것이 자신의 목덜미에 달라붙어 말을 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젠장! 그러게 가만히 방 안에만 있으라고 했잖아요!’

에른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 어…….”

“결국 알아버렸군.”

“여, 역시…….”

알베르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등 뒤에 이안이 서 있는 걸 느끼곤 몸을 움츠렸다.

“쓸데없이 눈썰미는 좋아가지고.”

“도,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그 사람은 뭐고?”

“증거인멸.”

헬리아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에 알베르는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쯧쯧, 그러게 그냥 지나치지.’

에른의 등 뒤에서 그 장면을 본 엘라임이 혀를 찼다. 제 명을 제가 줄인 꼴이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 뭔 줄 알아?”

“오, 오지 마.”

알베르는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뒤에 있는 이안 때문에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알베르는 헬리아의 눈빛을 보고 몸을 흠칫했다. 전날도 그랬지만 그녀 앞에선 꼼짝을 할 수 없었다.

“살.인.멸.구.”

헬리아가 그에게 다가가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그에 알베르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자, 이제 어떻게 해줄까?”

“나, 나한테 손을 대면 내가 가만있을 것 같아? 다 말할 거라고!”

“말해봐.”

헬리아는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남자의 모습인 헬리아의 외모는 알베르의 기를 죽였다.

‘뭐, 뭐가 저렇게 잘생긴 거야!’

알베르는 헬리아의 외모를 보면서 그녀가 정말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알베르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

“네가 말하면 나도 말하면 돼.”

“뭐, 뭘?”

“네가 시켰다고.”

“뭐, 뭐라고?”

“네가 시켜서 한 일이라고, 그렇게 말할 거야.”

“그, 그런!”

“그러면 어떻게 될까?”

헬리아가 씨익 웃었다. 알베르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안 믿을 건 또 뭔데?”

“그건…….”

“무리예요, 왕자님.”

엘라임에게 붙잡힌 에른은 진작 포기하고 있었다. 아니, 포기가 아니다. 에른은 얼추 이들의 의도를 눈치챘다.

‘죽일 생각이었다면 바로 죽였을 거야. 이들은 우릴 죽일 마음이 없어.’

그때 보았던 리아라는 자의 성격은 막힘이 없었다. 결정을 우유부단하게 끌지 않았다. 게다가 리아가 알베르에게 말하라 했지만 실상 그건 저쪽에도 리스크가 큰 법이다. 문제는 그의 생각이 착오라면 목숨을 내놓아야 할 테지만 에른은 자신을 믿었다. 그렇다면 이제 길길이 날뛸 왕자님을 말려야 했다.

‘어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에른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이곳은 제국입니다. 꼬투리 하나 잡힌다면 불리한 건 우리 쪽이에요.”

“이, 이익!”

알베르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러나 에른의 말처럼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우, 우릴 어떻게 할 거야?”

“글쎄, 어떻게 할까?”

헬리아는 턱을 쓰다듬었다. 솔직히 그녀도 난감했다. 죽이자니 문제가 생기고, 그럼 살려는 둬야 하는데 그렇다고 그냥 풀어주자니 그것도 문제였다.

“어쩔 수 없지.”

헬리아가 알베르의 어깨에 턱! 손을 얹고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무, 무슨 웃음이……!’

알베르는 헬리아의 미소에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설마 자신이 남자에게도 반응하는 변태였던가! 그가 속으로 자책하고 있을 때 헬리아가 입을 열었다.

“선택해.”

이렇게 된 마당에 방법은 하나다.

“죽을 건지, 아니면 살 건지.”

알베르의 눈동자가 쉼 없이 흔들렸다.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진 것처럼.

* * *

똑. 똑-

캄캄한 어둠이 짙게 깔린 공간에 간간히 물 떨어지는 소리가 기괴하게 들려왔다. 그 어둠 속을 거의 다 녹아 꺼질 듯한 촛불을 든 이가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이윽고 계단 대신 커다란 철문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끼이익.

낡은 경첩 소리와 함께 단단한 철문이 열렸다. 그러자 거대한 돔 형식으로 된 방이 나타났다.

“오셨습니까?”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가 그를 맞이했다. 특이한 것은 왼쪽 가슴에 은빛으로 빛나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는 것. 결코 문장으로 쓰이지 않는 블랙 드래곤이었다.

“시행은?”

“이번 보름달이 뜨는 날입니다.”

“얼마 남지 않았군.”

남자의 입가에서 스산한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매개는?”

“그, 그것이…….”

남자의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냐!”

“소, 송구하옵니다.”

상대는 남자의 호통에 벌벌 몸을 떨었다.

“마법사든 뭐든 찾아내라!”

“아, 알겠습니다.”

그때 그들 뒤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데 소리에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공작님.”

“제롬이냐?”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롬의 이야기를 들은 남자, 라몬 공작의 눈이 시뻘겋게 불타올랐다.

“뭐라!”

* * *

페르시아 제국의 황성은 한창 황제의 탄신일 준비로 바삐 성 밖과 안을 오가는 이가 많았다. 한데 어느 날부터인가 황성 안에서 묘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도 그 소문이 누구에게서 시작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아는 사람에게, 또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에게서 들은 말을 자신이 아는 사람에게 알릴 뿐이었다. 마치 그 소문은 누가 불을 당긴 것처럼 삽시간에 황성 안에 퍼지기 시작했다.

“너 혹시 들었니?”

“뭘?”

한 시녀가 운을 떼자 주변에 있던 시녀들이 귀를 열고 입을 연 시녀를 보았다. 그 시녀는 표정을 굳힌 채 주변을 훑었다. 다행히 경비를 서는 이들은 시녀들을 그저 힐끔 주시할 뿐 제 할 일에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그 시녀가 입을 열었다.

“수도에서 큰 사건이 터졌대.”

“수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데?”

“어제 바깥에 나갔다 들어온 언니한테 들었는데 글쎄, 이상한 소문이 돈대.”

“이상한 소문?”

시녀들은 궁금한 듯 눈을 빛냈다. 가십거리는 그녀들에게 좋은 활력소였다. 자신들이 듣지 못한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웠다.

“혹시 요즘 나타난 강도 사건 말이야?”

“강도 사건?”

“뭐야, 별일 아니네.”

한 시녀의 추측에 주변 시녀들은 김이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강도 사건은 으레 일어나는 일이기에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게 단순한 강도 사건이 아니래.”

“단순한 강도 사건이 아니라고?”

“강도가 들었으면 물건이 없어지는 게 당연하잖아? 그런데 들어보니까 이상하게 습격당한 가게들에서 어느 것도 없어진 게 없다는 거야.”

“설마 유령이라도 되는 거야?”

“유령은 무슨.”

“그런데 그 말도 영 틀리진 않다고 하더라.”

“그럼 정말 유령이야?”

“습격당한 가게는 있는데 그자들의 정체도 목적도 알 수 없다는 거야.”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나가던 시녀는 이내 몸을 더욱 낮추었다. 그러자 덩달아 시녀들도 몸을 낮췄다.

“한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

“습격당한 가게에서 이상한 게 나왔대.”

“유령이 나온 거야!”

유령 타령을 한 시녀의 입을 다른 시녀들이 틀어막았다.

“뭔데, 뭔데?”

“혹시 들어봤어? 흑마법이라고.”

“흐, 흑마법!”

시녀들의 눈이 모두 휘둥그레졌다. 흑마법에 대해선 어린아이들도 잘 알고 있었다. 악의 화신이자 재앙을 몰고 오는 이들. 오래전 금기된 마법의 이름이었다.

“흐, 흑마법이라니.”

“다름 아니라 습격당한 가게에서 흑마법을 부린 증거가 나왔다는 거야.”

“그게 정말이야?”

“완전!”

“강도가 문제가 아니라 가게 주인을 잡아야 하는 거 아니야? 흑마법이라니!”

“그런데 다들 쉬쉬하고 있어.”

“아니, 도대체 왜?”

“완전 큰일 아니야?”

“그 가게 소유주가 누군지 알아?”

시녀의 질문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녀가 내뱉은 말에 모두 눈을 크게 뜨고야 말았다.

“바로 라몬 공작이래.”

* * *

“수도는 물론 황성 안에까지 흑마법에 대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제롬의 말에 라몬 공작은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난간에 서서 황성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심한 눈빛을 띠고 있던 라몬 공작이 입을 열었다.

“범인은?”

“추격하고 있으나 워낙 은밀한 놈들이라 꼬리가 밟히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몬 공작의 물음에 제롬은 잠시 입을 다물다 천천히 열었다.

“공작님께 흑마법을 뒤집어씌울 생각입니다.”

“그래, 그렇지.”

라몬 공작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황성을 훑어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시녀와 시종들은 모두 몸을 사리기 급급했다.

“증거가 없으니 증거를 만들겠다?”

제법 재미있는 수다. 찾을 수 없다면 만든다. 라몬 공작은 자신이 적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아니, 그놈은 아니다.”

라몬 공작은 황태자를 잘 알았다. 그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옆에서 봐온 그가 아닌가.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없는 증거를 만들어낼 정도로 영악한 놈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단호히 말할 수 있었다.

“그놈은 그런 생각을 할 놈이 아니다. 황태자의 짓이 아니야.”

“하면…….”

“세자크, 그래, 세자크.”

라몬 공작은 자신의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는 세자크. 세자크는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다. 그것을 제국의 귀족 중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 세자크가 갑자기 사라졌다. 지금 이 소문이 돌 시점에서.

“다른 놈이 황태자를 돕고 있다. 제법이로군. 이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겠다?”

그의 가게에서 나온 흑마법의 증거들, 그리고 사라진 최측근 세자크. 라몬 공작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영악한 놈이다.”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제롬의 말에 공작은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도리어 그를 함정에 빠뜨린 이에 대한 흥미가 도는 듯했다.

“어차피 황태자가 움직일 거라 예상했다. 예상 범위 밖의 일이 일어났지만, 결국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라몬 공작의 시선이 한곳을 향했다. 그 자리엔 황태자 케이시스가 서 있었다.

“바람이 차오.”

황태자 케이시스가 라몬 공작을 향해 다가왔다. 라몬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뜨다 이내 입술 꼬리를 올렸다.

“이 정도로 날 어찌할 수는 없지요.”

“그러다 몸 상하시오. 내 말하지 않았소. 몸조심하라고.”

라몬 공작이 황태자를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에 살기가 어른거렸다.

“소문은 들었소.”

“그저 저급한 저잣거리의 소문일 뿐이지요.”

“저급한 소문이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이지요.”

라몬 공작의 눈매가 살짝 휘었다. 반면 황태자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아무 관련이 없다는 말이오?”

“누군가 절 음해하기 위한 어설픈 술수입니다.”

다시 한번 자신의 무관함을 주장하는 라몬 공작. 황태자는 그런 라몬 공작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 말을 믿을 테지.”

“그저 허황된 소문일 뿐입니다.”

“소문일 뿐이다…….”

케이시스는 입술 끝을 끌어 올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라몬 공작의 눈빛이 한층 짙어졌다.

“그러고 보니 내 저번의 약속을 아직 지키지 못한 것 같소.”

“…….”

황태자의 말에 라몬 공작의 눈매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내 아직 그대에게 제대로 된 보답을 하지 못하지 않았소?”

황태자의 도발. 그러나 쉽게 넘어갈 라몬 공작이 아니었다. 그가 누구란 말인가. 황실 마법사 라몬 공작이다. 라몬 공작은 노련했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날 어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라몬 공작은 가소로운 듯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아무리 소문으로 그를 옭아맨다 하더라도 누가 그를 징치할 수 있단 말인가. 제국의 실세 중 실세인 라몬 공작이다. 또한 황제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몸. 아무리 황태자가 날고 뛰어봐야 그를 단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

라몬 공작이 황태자에게 한 발 다가갔다.

“멈추시오.”

그러자 황태자의 뒤를 지키고 있던 아스칼이 앞으로 나와 검집을 쥐었다.

그때, 제롬 또한 아스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을 꺼낸다면 이쪽도 가만있지 않겠다.”

본디 연회장 안에는 검을 갖고 들어오지 못하나 아스칼은 황태자의 호위 기사이기에 이례적으로 검을 들고 올 수 있었다. 반대로 제롬은 마법사. 그에게 검은 필요치 않았다.

제롬과 아스칼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한 치의 틈도 없이 팽팽하게 조여진 긴장감. 그제야 주변 인물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조금씩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라몬 공작이 주변을 둘러보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만.”

제롬은 그 말에 손을 내리고 라몬 공작의 뒤에 섰다.

“아스칼.”

아스칼 또한 황태자의 말 한 마디에 검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라몬 공작이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곧장 검을 날릴 수 있도록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주인의 이야기에 개가 끼어들면 쓰나?”

“그 이상 내 기사에게 무례를 범한다면 내 검이 아스칼의 검보다 빠를 것이오.”

황태자의 위협에 라몬 공작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후후, 공연한 짓을 했습니다.”

“…….”

“이 라몬, 그리 쉽지 않습니다. 전하께서 누구와 어울리시는지 제 알 바 아니나 이렇듯 쓸데없는 짓을 벌이니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군요.”

“…….”

라몬 공작의 말에 황태자의 눈빛이 변했다. 라몬 공작은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역시나 누가 뒤에 있군.’

라몬 공작은 확신했다. 누군가 황태자의 뒤에 있음을. 라몬 공작의 입가가 더욱 깊게 패였다.

“그런 얕은 수로 제가 당할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

“아시게 될 겁니다. 이 라몬이 어떤 자인지를.”

황태자는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이내 그와 눈을 마주쳤다.

“폐하께서 그대를 보호해 주리라 믿소?”

“…….”

“제국엔 폐하만 있는 게 아니오.”

“불경스런 말이 아닐 수 없군요.”

“폐하께선 그대를 보호해 주지 못할 것이오.”

“…….”

황태자의 말에 라몬 공작은 미간을 꿈틀거렸다.

* * *

따스하게 내리쬐던 태양이 산 너머로 사라지자 제국의 황성은 화려한 불빛을 뿜어내며 어두운 밤하늘을 밝혔다. 웅장한 연회홀엔 값비싼 샹들리에의 불빛이 반짝였고, 음악가들의 아름다운 연주가 듣는 이의 귀를 즐겁게 만들었다. 드디어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카사스 2세의 탄신 연회가 시작되었다.

홀 안에는 연회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귀족들은 물론이고 타국에서 초대된 왕족과 귀족들이 가득했다. 여러 나라의 귀족들이 한곳에 모이는 경우가 흔치 않기에 이 기회를 놓칠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서로 삼삼오오 모여 안면을 트기에 바빴다. 그들에게 있어 황제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것보다 다른 이들과 연을 이어 이익을 얻는 게 중요했다. 그러나 젊은 귀족들에겐 먼 미래의 목표보다 눈앞의 현실이 우선이었다.

“어머어머, 정말 잘생겼다.”

“여기까지 힘들게 온 보람이 있었어.”

“흰 피부에 반짝이는 금발이라니, 완전 내 이상형이야.”

“라비안의 왕자님이라지?”

“어쩜! 완벽해!”

젊은 영애들이 삼삼오오 모여 한 사람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바로 라비안 왕국의 왕자 알베르였다. 이미 시녀들에겐 비위 맞추기 어려운 왕자님으로 낙점되었지만 겉포장이 워낙 훌륭한지라 영애들의 마음에 불을 지르고도 남았다.

잘생긴데다가 왕족이다. 거기다 가장 중요한 건 그런 잘생긴 왕자님이 미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영애들이 몸이 달아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다만 영애들이 그에 대한 호감을 표하면 표할수록 청년들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겨우 차남인데 왕족이라고 다 같은 왕족인가?”

“완전 애송이구먼, 제대로 밤일이라도 하겠어?”

시기와 질투가 범벅이 된 눈빛을 짓고 있는 남자들. 그러나 대놓고 비난할 용기는 없었다. 상대는 라비안 왕국의 제2왕자. 제아무리 고위 귀족이라 하나 왕족에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여인들의 흠모와 남자들의 질투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주인공은, 정작 연회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알베르는 스스로 벽의 꽃을 자처하며 따분한 듯 와인을 홀짝이고 있었다. 애초에 그는 사람이 많고 번잡스러운 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거기다 그의 까탈스런 성격은 여전했다.

“퉤엣, 에잇, 떫잖아.”

“어린애도 아니고, 그냥 드세요.”

“누가 어린애야? 나 열아홉이라고.”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알베르는 미간을 찡그리곤 에른에게 잔을 떠넘겼다.

“에휴.”

절로 한숨이 나오는 에른이었지만 그래도 그런 제 주인을 미워할 수 없었다. 까탈스럽기 그지없고 투덜이 대마왕이지만 그래도 제 주인 아닌가. 미우나 고우나 같이 붙어 산 세월이 있는지 그런 알베르가 영 싫어지지 않았다. 물론 귀찮아지곤 있지만.

“너무 많이 드시진 마세요. 그러다 개 되면 저도 손쓸 도리 없다구요.”

“내가 언제!”

“다 지 좋은 대로 기억하지.”

에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알베르가 눈을 새초롬하게 뜨고 그런 에른을 노려보았다.

“네가 내 상전이냐?”

“그럼 자르시든가요.”

“흥, 다른 거나 가져와.”

알베르는 아예 말을 돌려 버렸다. 자신이 자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 저런 말을 하는 에른이 얄미웠다.

“네네. 누구 명이라구요.”

에른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그에게 다른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면서 한 마디 말도 잊지 않았다.

“제국이에요.”

“알고 있어.”

“아시는 분이…… 말을 말아야지.”

“그게 내 뜻대로 되는 일이야?”

“하아.”

에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알베르의 말처럼 그들이 의도해서 이런 사태가 된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

와인 잔을 빙글 돌리던 알베르가 주변에 시선을 돌렸다. 할 일 없이 벽의 꽃을 자처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그는 주변을 잘 둘러볼 수 있는 곳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의 여자들은 속으로 소리를 질렀고, 남자들은 욕을 퍼부었다. 물론 당사자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미행은?”

“그게 되겠어요? 도리어 미행당하는 처지인데.”

에른은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붉은 목걸이는 샹들리에의 불빛에 반짝거렸다. 뿐만 아니라 같은 목걸이가 알베르의 목에도 걸려 있었다.

알베르는 눈매를 좁히고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매만졌다. 붉은 보석에선 따뜻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내가 개도 아니고. 도대체 이게 뭐야.”

알베르는 이를 갈았다. 혹여라도 자신이 딴마음을 품을까 헬리아가 걸어둔 마법 목걸이였다.

헬리아가 그에게 선택권을 주었을 때 알베르는 망설임 없이 사는 것을 택했다. 죽느냐 사느냐. 선택이야 뻔하지 않겠는가. 누구 좋으라고 죽음을 선택한단 말인가. 그 결과 이렇게 여유롭게 와인을 음미하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분 나쁜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이건 굴욕이야. 라비안의 왕자인 내가!”

“뭘 이제 와서. 왕자님이 고르셨잖아요.”

“이런 개 목걸이를 할 줄은 몰랐지! 이건 왕자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야!”

“그럼 명예롭게 죽지 그러셨어요.”

“……죽긴 싫었다고.”

에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 암튼 그렇단 거야.”

알베르는 저 스스로 한 말이 부끄러운지 살짝 귓가가 빨개졌다. 그러다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근데 이거 진짜 맞아? 혹시 가짜 아닐까? 이런 목걸이가 어디 있어!”

“그럼 벗어 보시든가요.”

“…….”

이미 수차례 시도해 본 알베르였기에 입을 삐쭉 내밀었다. 결코 제 힘으로 벗을 수 없었다. 이 목걸이는 목걸이를 찬 사람이 특정한 비밀을 말하면 찬 사람을 공격하게 되어 있었다. 알베르는 마법이나 검술 따윈 전혀 모르기 때문에 한 방에 골로 갈 수 있었다.

“도대체 정체가 뭐지? 아니, 남자야, 여자야?”

알베르는 헬리아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리송했다. 분명 여자인 줄 알았는데 다음 보았을 땐 남자였기 때문이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여자면 어떻고 남자면 어때요, 달라지는 건 없는데.”

“왜 달라지는 게 없는데?”

“그럼 달라지는 게 있어요?”

에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알베르를 보자 알베르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 그렇지.”

순간 헬리아의 여자 모습을 떠올린 알베르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쯧쯧쯧.”

에른은 그런 알베르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원체 여자에 관심이 없는 터라 그와 함께 남색이니 하는 말이 많았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면 여잘 좋아하긴 하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뭐 여잔지 남잔지 모른다는 게 문제지만.’

에른은 고개를 휘이 저었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이 왕자를 따라다니는지.

‘정이 웬수다. 정이.’

그때였다. 갑자기 연회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지?”

알베르는 갑작스레 소란스러워진 홀 안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누가 온 모양인데요?”

“이곳에 모인 자들이 귀족이 아닌 자들이 없고 왕족도 있는데 저렇게 소란스러울 리가 있겠어? 황제라도 왔나 보지.”

“황제가 올 때는 시종장이 알리잖아요.”

“그럼 누가…….”

알베르와 에른은 저도 모르게 시선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옮겨갔다. 순간 장내가 고요해졌다. 그리고 들려온 하나의 발걸음 소리.

뚜벅뚜벅.

그 소리는 점차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구인데 이…….”

사라락.

드레스 자락이 바람에 살짝 휘날렸다. 알베르의 눈동자가 커졌다.

“……!”

샹들리에의 불빛에 반짝이는 금발이 움직임에 흔들렸고, 금빛의 눈동자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금발에 금안을 지닌 미녀. 인세의 것이라 보기 힘들 정도의 외모였다. 하늘에서 실수로 지상에 떨어진 천사일까. 사람들은 그녀의 외모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알베르는 저도 모르게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인은 그런 알베르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알베르의 시선이 오랫동안 여인에게 머물렀다.

“와, 왕자님, 아, 아시는 분이십니까?”

“…….”

에른은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 본 것이다. 그런데 알베르의 표정이 이상했다.

“왕자님?”

“…….”

에른이 알베르를 불렀지만 알베르는 듣지 못한 듯 여인을 바라보았다. 여인은 알베르를 보며 입가에 옅은 웃음을 지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미소에 황홀해했지만 알베르는 순간 몸이 움찔했다. 그러곤 그것으로 확신했다.

“리…… 아?”

‘이게 아주 이제 척하면 척이네.’

헬리아는 한눈에 자신을 알아보는 알베르를 향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인 모습은 물론이고, 지금 화장빨을 비롯해 각종 빨을 받은 상태인 그녀를 알아보는 게 신기했다.

보통 닮은 사람이라도 성별이나 신분이 다르면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그런데 알베르는 전혀 다른 신분의 헬리아를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감이 좋은 녀석이야.’

그러나 이대로 계속 멍한 표정을 짓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 헬리아는 알베르를 향해 환한 웃음을 지어주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그저 황홀할 정도로 환한 웃음이었지만 아마 이 웃음을 받은 당사자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순간 알베르의 몸이 움찔거렸다. 헬리아는 그를 보며 눈매를 휘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왕자님.”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알베르는 갑자기 제 머릿속으로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러곤 이내 그의 얼굴은 사색으로 물들었다.

‘저, 정말 리아!’

알베르는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녀가 이곳에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녀의 뒤에 나타난 남자를 보고 확신이 들었다.

‘저자는!’

“어, 어떻게…….”

“몸이 안 좋으신가 보군요. 잠시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헬리아는 어리둥절한 알베르를 데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비교적 덜 닿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와, 왕자님.”

알베르의 뒤를 따르던 에른도 그제야 알아차렸는지 눈을 크게 떴다. 아마 헬리아와 함께 있는 이안을 보고 확신이 든 모양이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네가 여기에!”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헬리아는 알베르가 놀라든 말든 개의치 않았다. 그저 이 멍청한 왕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을 뿐이었다.

“눈썰미는 좋은데 영 눈치가 없어서야.”

“…….”

헬리아의 말에 알베르가 흡 숨을 들이마셨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사냥을 하기 전 맹수의 눈빛과 닮아 있었다. 두려움 때문인지 작은 목소리로 알베르가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 그 드레스는 뭐고?”

알베르는 여전히 놀람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헬리아는 알베르의 말에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이렇게 된 마당에 더는 감출 이유도 없었다.

“드레스야 사 입으면 그만이고, 들어올 만했으니 들어왔겠지.”

알베르는 여전히 믿기지 않은 듯했다. 하기야 그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여, 여자인 거야?”

알베르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헬리아의 가슴으로 옮겨갔다. 헬리아의 드레스는 추운 겨울 날씨에 맞게 목까지 올라오는 스타일이었다. 속살이 비치지 않았지만 볼륨감이 눈에 들어왔다. 알베르의 시선이 여전히 가슴에 머물러 있자 이안이 눈을 찌푸렸다. 소드 마스터인 그가 살짝 기세를 쏘아 보내니 알베르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 여자?”

“글쎄. 여자일까, 남자일까?”

헬리아가 씨익 미소를 짓자 알베르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자 헬리아는 제 뒤통수에 따가운 기운을 느꼈다.

“왜?”

“자중하시지요.”

이안의 싸늘한 눈초리에 헬리아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나 이안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촤악.

헬리아는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접어 한 손에 쥐었다.

“다시 소개하지.”

헬리아는 입술을 살짝 치켜 올리고 입을 열었다.

“아르센 왕국의 공주 헬리아다.”

“……!”

그 도도하고 패기 넘치는 소개에 알베르와 에른의 눈동자가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아, 아르센의 고, 공주라고?”

“무례는 삼가시길 바랍니다.”

이안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알베르를 압박했다. 이안의 차가운 눈초리에 알베르는 순간 정신을 되찾았다.

아르센 왕국. 최근 헬리아 공주가 아돌프 후작을 쳐 내고 왕위후계자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은 얼핏 들은 것 같았다.

“까먹으셨죠?”

“누, 누가…….”

옆에 있던 에른의 말에 알베르는 말을 더듬었다. 실상 알베르는 남의 나라의 공주 따위가 뭘 하는지 알 마음도, 알 생각도 없었기에 단지 이름 석 자만 들어봤을 뿐이다.

“공주라니…….”

순간 머릿속으로 헬리아와 만난 순간을 쭈욱 떠올렸다.

“그게 공주야?”

“죽고 싶냐?”

“히익.”

헬리아가 한 발 앞으로 다가와 알베르를 쏘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에 알베르는 온몸이 굳어지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잘 지내보자구요. 이웃 나라 이 망할 왕자님아.”

오로지 알베르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헬리아가 낮게 속삭였다.

‘무, 무슨 공주가 이래!’

알베르는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괜찮겠습니까?”

“멍청이도 아니고 어차피 목걸이도 있는데 뭘 어쩌겠어.”

그래 봐야 투덜거리기나 하겠지.

“그 목걸이로 되겠습니까?”

“개 목걸이 정도는 될 거야.”

헬리아는 피식 웃었다. 알베르에게 준 목걸이는 착용자가 직접 뺄 수 없다는 걸 제외하곤 솔직히 아무런 효과가 없다. 실제로 그런 마법 아티팩트가 얼마나 구하기 힘든데 그걸 그냥 쓰겠는가.

“무서워서 가만히 있겠지.”

헬리아의 말에 이안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헬리아는 그런 이안의 반응을 무시하곤 연회홀을 쭉 훑어보았다. 그러자 귀족들의 이야기 소리가 하나둘 들려오기 시작했다.

“흑마법이 나타났다는 게 사실입니까?”

“흑마법이라니…….”

“그런데 들으셨습니까? 그 흑마법이 나온 장소가 라몬 공작의…….”

대부분 수도에 퍼진 흑마법과 라몬 공작에 대한 이야기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제국의 귀족이 아닌 타국의 귀족들이었다. 제국의 귀족들은 라몬 공작의 위세에 쉬쉬하며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타국의 귀족은 아무래도 라몬 공작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웠기에 활발히 입을 놀렸다.

“할 땐 하는군.”

우락부락한 여장 남자 유니를 떠올렸다. 겉모습은 그래도 확실히 능력이 있었다.

“그보다 슬슬 판이 준비되었군.”

헬리아는 입술을 말아 올렸다. 다크소드와 숀 일행이 라몬 공작의 가게에 깽판을 놓으면, 유니가 그 위에 흑마법이라는 소문을 흩뿌렸다. 아무리 라몬 공작이 실세이고, 황제가 그를 아낀다 하나 그걸 덮기엔 타국의 시선이 많았다. 제국으로서는 이번 일을 쉽게 무마하긴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헬리아, 그녀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 * *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요.”

“잘 어울리긴 개뿔.”

“알고 봤더니 저 사람, 아르센 왕국의 플로렌스 공작가의 장자더군요.”

“겨우 공작가인데…….”

에른은 제 말에 따박따박 비꼬는 알베르가 한심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에 알베르는 흠칫 놀랐다.

“왜, 왜 그렇게 보는데?”

“왕자님.”

“왜, 왜?”

“혹시…… 에이, 하긴 그게 되나.”

“말을 했으면 끝까지 해야지!”

“어휴, 왕자님이 눈이 높은 건 알았지만 어휴.”

“에른!”

에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헬리아 공주와 이안. 정말이지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두 사람은 홀 중앙에 나아가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모습을 알베르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에른은 제 옆에 있는 알베르를 보았다. 헬리아 공주와는 동갑인데 어쩜 이렇게 천지 차이인지. 에른은 헬리아 공주 옆에 알베르를 놓아봤다.

‘에고, 붙여 놓으면 어디 남매인 줄 알겠네.’

에른은 고개를 저었다.

“정 그러시면 춤 신청이라도 해보시든가요.”

그래도 밑져야 본전 아닌가. 물론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지만 그래도 제 주인이 먼저 아닌가. 에른은 혹여라도 있을 아주 작은 가능성에 알베르를 부추겼다. 그러자 알베르는 얼굴을 붉혔다.

“추, 춤은 무슨. 내가 뭐 하러 저런 여자랑.”

“그럼 마시든가요.”

“자, 잠깐. 뭐 꼭 춰달라고 하면 춰줄 수도 있고.”

‘에휴, 우리 왕자님 나중에 연애를 할 수 있으려나.’

때마침 헬리아와 이안은 춤이 끝나자 알베르와 에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알베르는 헬리아가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잠시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손을 내밀었다.

“저기…….”

그러나 그의 손은 허공을 배회했다.

그때 뒤에서 한 쌍의 남녀가 나타난 것이다. 바로 황태자 케이시스와 그의 비 레이아나였다. 헬리아와 이안이 저한테 오다 말고 황태자 부부를 향해 몸을 돌려 가버리자, 알베르의 내민 손은 무색해지고 말았다

“…….”

“쯧쯧.”

그것을 보고 에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 *

헬리아는 황태자와 눈이 마주치자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황태자도 마찬가지. 그들은 서로 처음 본 사람처럼 인사를 건넸다.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하하, 반갑소.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하여 궁금해 와봤소만, 정말 아름답소.”

“저보다요?”

옆에 있던 레이아나가 장난스럽게 묻자 케이시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가장 아름다운 이는 레아요.”

“어머, 전하도 참.”

헬리아는 황태자 부부를 보면서 옅은 웃음을 지었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황태자가 얼마나 황태자비를 아끼는지 황태자에겐 후궁이 없었다. 지금껏 황태자비가 아이를 낳지 못함에도 황태자는 다른 후궁을 들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물론 저번엔 위기가 있었지만 끝내 막지 않았던가.

“레이아나예요.”

레이아나가 헬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초면에 남의 손을 잡는 건 예의에 어긋나지만 레이아나는 그런 무례를 무릅쓸 수밖에 없었다.

“정말, 정말 만나게 되어서 반가워요.”

레이아나의 눈에 헬리아를 향한 호감과 고마움이 가득했다. 자신의 목숨을 살려주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케이시스의 목숨 또한 살려줬다. 평생의 은인으로 모셔도 시원치 않을 판이다.

“정말 고마워요.”

이 자리에서 그 고마움을 다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레아.”

레이아나의 반응이 격해진 데다가 지켜보는 시선이 있는지라 케이시스가 레이아나를 불렀다. 레이아나는 그에 다시 한번 헬리아의 손을 꾹 힘주어 잡고는 손을 놓았다. 그녀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나중에 꼭 자리를 마련할게요.”

“불러주시면 영광입니다.”

헬리아가 웃자 레이아나도 따라 웃었다.

그때 케이시스가 헬리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시겠습니까?”

“비 마마가 계시는데 괜찮나요?”

케이시스가 뒤를 돌아보자 레이아나는 빙긋 웃었다.

“그토록 열렬한 춤을 본 뒤라 염려치 않아요.”

레이아나가 헬리아의 뒤에 있던 이안을 바라보았다. 헬리아는 조금 전 이안과 춘 춤을 떠올렸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이미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속닥거리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일 둘이 결혼해서 이미 애가 있다는 소문이 나돌지도 모른다.

헬리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또다시 자신이 한 일이 떠오른 탓이다. 황태자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이안 경에겐 미안하지만 잠시 공주와 춤을 춰도 되겠소?”

“…….”

이안이 뭐라 입을 열지 못하자 케이시스는 씨익 미소 지으며 다시 헬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시겠소?”

“물론이죠.”

헬리아와 케이시스는 홀 중앙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곧 리드미컬한 음악에 맞춰 아름다운 춤을 선보였다.

헬리아가 나직이 말했다.

“이미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다음은 전하께서 나서실 차례입니다.”

“물론이오.”

황태자의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판은 이미 깔렸다. 이제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일.

케이시스는 헬리아를 보았다. 금발에 금빛 눈동자를 지닌 타국의 공주. 그녀는 이제 겨우 열아홉이었다. 그녀에 대해선 이미 알아보았다. 하녀 출신의 어미를 두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았고, 누명을 써 8년간 홀로 성 안에 유폐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최대 실세인 아돌프 후작의 힘으로 다시 공주의 지위를 찾았고, 지금은 차기 여왕으로 거론될 정도다.

‘무서울 정도다.’

케이시스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러나 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가 적이 아니라 다행이오.”

케이시스는 옅게 웃었다.

* * *

잠시 멈췄던 눈이 어느새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흰 눈이 내리고 내려, 바닥에 쌓여 있던 눈 위에 다시금 새로운 눈이 쌓였다. 라몬 공작은 검게 물들었던 눈이 어느새 하얗게 뒤덮이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작님!”

그때 제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몬 공작은 눈을 좁히고 뒤를 돌았다.

“무슨 소란이냐?”

“들으셨습니까?”

라몬 공작의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제롬은 서둘러 다음 말을 이었다.

“어전에서 회의가 열렸다고 합니다.”

“…….”

라몬 공작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어전 회의를 공작인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이것은 곧 그를 빼놓고 회의를 진행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황태자가 수를 쓰는군.”

“바루스 공작이 복귀했다고 합니다.”

바루스 공작이라는 말에 라몬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바루스 공작은 황태자의 장인이자 라몬 공작의 최대의 정적이었다. 지금은 황태자를 주축으로 그를 견제하고 있지만, 그동안 황태자파의 수장은 바루스 공작이었다. 아직 젊은 황태자와 달리 바루스 공작은 노련했다. 그렇기에 그를 처리하려 했던 것이다. 물론 아쉽게 실패했지만 말이다.

“몸도 성치 않은 노인네가 힘도 좋군.”

“황태자라면 모르겠지만 바루스 공작까지 나선다면 폐하께서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제롬의 우려에 라몬 공작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에 도리어 답답한 것은 제롬이었다.

“공작님.”

“무얼 두려워하느냐.”

“…….”

“없다.”

라몬 공작은 단호한 말로 제롬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네가 두려워할 일도, 내가 두려워할 일도 없다. 그런데 뭐가 문제지?”

“…….”

제롬의 눈동자가 작게 흔들렸지만 그건 찰나였다.

“그보다 매개는 어찌 되었느냐?”

라몬 공작의 물음에 제롬이 눈에 이채를 띠며 말했다.

“준비되었습니다.”

“한 치의 실수도 없어야 한다.”

“그보다 완벽한 매개는 없을 겁니다.”

자신감 넘치는 제롬의 표정에 라몬 공작의 얼굴에 흥미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흥미를 지웠다. 어차피 곧 알게 될 일이었다.

“시행은?”

“내일 밤입니다.”

라몬 공작의 눈이 반짝였다. 드디어 길고 긴 기다림의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바로 움직인다.”

“예, 모시겠습니다.”

라몬 공작이 자리에 일어서자 제롬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작스레 문이 열리고 수십 명의 병사가 라몬 공작과 제롬을 에워쌌다.

척! 척! 척!

라몬 공작은 자신의 방을 급습한 병사들로 인해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이게 대체 무슨 짓들이냐?”

제롬이 나서며 병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병사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놈들이!”

제롬이 눈을 부라리며 손을 펼쳤다. 병사들의 만행에 마법으로 제압하려는 것이었다. 그때 라몬 공작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만.”

“공작님?”

“명이 질기군그래.”

라몬 공작이 한곳을 응시했다.

뚜벅뚜벅.

병사들 사이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은 병색으로 약간 파리했지만 그의 두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라몬 공작이 낮게 이를 갈았다.

“바루스 공작.”

“오랜만이외다, 라몬 공작.”

황태자의 장인인 바루스 공작이 라몬 공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라몬 공작이 눈을 좁혔다.

“이게 무슨 짓이지?”

“그거야 그대가 더 잘 알지 않소?”

“하, 감히 이 나를…….”

척.

바루스 공작이 라몬 공작 앞에 두루마리를 펼쳐 보였다.

“…….”

그것을 본 라몬 공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황제 폐하의 지엄한 명으로 지금 이 시각부터 금지된 흑마법을 사용한 라몬 공작을 구속한다.”

“……그럴 리가 없다.”

라몬 공작은 믿을 수 없었다. 어찌 황제 폐하가!

“이는 황명이다!”

바루스 공작의 선고에도 불구하고 라몬 공작은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이제, 이제 곧이거늘!”

“어서 죄인을 포박하라!”

병사들이 라몬 공작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 * *

“어서 오십시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시종을 따라간 곳은 황성 안이 아니었다. 겨울의 나라로 유명한 페르시아 제국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인 눈의 정원이었다. 오직 황족들만이 볼 수 있는 특별한 곳이었다. 눈의 정원에 들어서자 말 그대로 눈꽃이 나무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눈이 만들어낸 절경은 그야말로 신의 정원이라 할 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춥지 않네?”

“이곳엔 특수한 마법이 걸려 있어 춥지 않습니다. 자, 들어가시죠.”

시종이 으레 이 눈의 정원을 처음 온 사람들의 반응을 즐기며 헬리아와 엘라임을 안내했다. 이미 정원 중앙에 자리한 작은 정자에는 황태자 부부가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셨소?”

“황태자 전하와 황태자비 마마를 뵈옵니다.”

“편안한 자리이니 너무 격식 차리지 않아도 돼요.”

레이아나가 웃으며 헬리아에게 다가와 손을 꼭 붙잡아주었다. 그녀의 화사한 웃음에 헬리아도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뭐랄까, 참으로 해사한 여인이었다. 헬리아는 그런 웃음엔 또 약한 면이 있었다.

“다과회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정말 감사해요.”

레이아나가 다시금 헬리아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연회장에선 남의 시선 때문에 제대로 고마움을 전달할 수 없어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레이아나가 문득 헬리아의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푸른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고, 푸른 눈동자는 사람의 시선을 빼앗았다. 마치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묘한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어머, 이분은…….”

“제 호위입니다.”

헬리아의 말에도 레이아나는 뚫어져라 엘라임을 보았다. 엘라임은 그런 레이아나의 반응에도 무관심했다. 그의 관심은 언제나 헬리아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레이아나의 말엔 격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번에 연회에서 춤추신 이안 경은 어디에 가신 건가요?”

“춤…….”

엘라임이 눈이 가늘어졌다.

‘춤을 췄다고?’

“아주 다정해 보이시던데.”

‘다정해 보였다고?’

“아, 저 이안은 잠시…….”

헬리아는 갑자기 제 등 뒤가 이상하게 싸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안은 현재 성 밖에 주둔해 있는 병력을 보러 밖에 나갔다. 해서 헬리아의 호위는 엘라임이 하고 있는 것이다.

“춤, 췄구나.”

“그거야 연회고…….”

“그것도 다정하게…….”

“그, 그렇게 다정한 건…….”

“…….”

엘라임이 눈을 부릅뜨며 헬리아를 보았다. 그러더니 홱 고개를 돌려 버렸다.

‘이거 단단히 삐졌잖아.’

헬리아는 엘라임의 반응에 머리를 긁적였다. 저거 오래 갈 텐데. 전에도 이안이랑만 춤췄다고 꽁해 있지 않았던가. 꽁한 엘라임의 모습에 한숨을 폭 내쉬었다.

“자, 그럼 앉아요. 좋은 차가 들어와서 꼭 대접하고 싶었어요.”

레이아나는 자신이 엘라임의 마음에 불을 지폈는지도 모른 채 웃으며 그들을 안내했다. 헬리아는 그런 레이아나의 안내에 안 가겠다고 삐져서 꼼짝도 하지 않는 엘라임의 옷을 당겨 자리에 앉혔다.

레이아나가 직접 헬리아의 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한번 드셔 보세요. 정말 맛있어요.”

헬리아가 찻잔을 들어 음미하자 향긋한 향이 입가를 맴돌았다. 그 모습을 레이아나는 연신 기쁘다는 듯 바라보았다.

“정말 맛있어요.”

“그쵸? 제가 좀 싸서 드릴 테니 꼭 가져가세요. 이렇게 맛있는 건 나눠 먹어야죠.”

“나한테는 잘 주지 않았잖아?”

“케이한테는 이런 게 없어도 저와 함께 마시는 차가 모두 고급 아니겠어요?”

“그, 그거야 그렇지.”

레이아나의 말에 케이시스는 허허 웃음을 지었다. 오래 행복하게 사는 비결인 것이다.

그때 시종이 테이블 위에 갖가지 과자와 케이크를 올려놓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다과회가 시작된 것이다.

“많이 드세요.”

레이아나는 손수 헬리아에게 과자를 놓아주거나 차를 따라주었다. 마치 그 모습이 엄마 같았다.

“모자라면 또 드릴게요.”

“레아, 너무 그렇게 강요하면…….”

계속 레이아나가 헬리아에게 관심을 쏟자 케이시스가 주의를 주었다. 레이아나가 헬리아에게 호감이 많아도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레이아나는 그제야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미, 미안해요. 불편했죠?”

“훗, 아니에요. 편하고 좋아요.”

“케이, 좋대요.”

“마음대로 해.”

케이시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나 레이아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전날 레이아나는 케이시스로부터 헬리아 공주의 과거를 모두 들었다. 힘들게 살아온 그 모습이 눈에 선하자 레이아나는 모성애를 주체할 수 없었다. 가엾고 안쓰럽고, 요즘 들어 왜 이렇게 감정의 기복이 심한지 모르겠다.

“마마께서도 많이 드세요.”

“마마라뇨. 편안하게 불러요. 레아라고 불러도 좋아요.”

“그럼 저도 편안하게 헬리아라고 불러주세요.”

헬리아의 말에 레이아나가 눈을 크게 떴다. 감격한 표정이었다.

“정말로요? 그럼 헬리아.”

“예, 레아 님.”

“이러니까 꼭 친자매 같아요. 저는 자매가 없는데 헬리아가 내 동생 할래요?”

“과분한데요.”

“과분하긴요. 정말 내 동생 할래요?”

“좋아요. 그렇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헬리아는 짓궂게 웃었다. 레이아나가 언니였지만 아무래도 과거의 기억이 있는 헬리아에겐 마치 어린 여동생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녀를 대할 때는 뭔가 마음이 풀어졌다.

레이아나가 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옆에 있던 케이시스도 흥미롭게 두 여자를 지켜보았다.

헬리아는 씨익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에 레이아나와 케이시스가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무런 사심 없는 헬리아의 순수한 웃음은 너무나도 밝았기 때문이다.

“동생한테 존대하는 언니가 어디 있어요. 편하게 부르세요.”

“무, 물론이에요, 아, 아니, 물론이지!”

레이아나의 눈에 맑은 이슬이 고였다. 그 모습을 케이시스도 잔잔한 웃음으로 지켜보았다.

“많이 드세요.”

헬리아가 친절히 레이아나의 접시에 케이크를 놓아두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이었다. 헬리아는 이런 사람이 왠지 어려우면서도 마음이 갔다. 꾸밈없고 언제나 솔직하고, 또 다정하면서 마음이 착했다. 착한 사람한텐 약한 게 헬리아였다. 클리드도, 세드릭도 그랬다. 물론 그녀의 시커먼 마음 한쪽에는 제국의 황태자비와 친해져서 나쁠 게 하나 없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레이아나는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 입어 가져갔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우웁!”

“레아!”

레이아나의 반응이 이상했다. 케이시스는 레이아나의 반응에 놀라 얼른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레이아나는 연신 헛구역질을 해댔다.

“케, 우욱, 케이.”

“아스칼! 얼른 의원과 당장 이 음식을 가져온 시종을 불러와라!”

케이시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멀리서 곁을 지키고 있던 아스칼이 병사들에게 명령해 곧장 음식을 가져온 시종과 의원을 데려오라 명했다. 그러자 병사들이 순식간에 시종을 데려와 황태자 앞에 세웠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시종은 덜덜 떨며 불안한 시선으로 황태자를 보았다. 이번에 새로 충원된 신입이었다.

케이시스는 노기 띤 얼굴로 시종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시킨 것이냐?”

황성에서 독살 사건은 빈번하게 일어난다. 황태자인 그조차도 독살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그 화살이 레이아나에게 향한 것이다. 케이시스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제 주변을 매우 엄격하게 관리한다고 했는데도 결국 빈틈이 생겨 버린 것이다.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장 고하지 않는다면 네 목을 치겠다.”

“아, 아닙니다!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시종은 이번에 새로 충원된 자다. 당연히 케이시스는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도 말하지 못하겠다는 건가?”

채앵.

케이시스는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아 들고 시종의 목에 겨누었다. 시종은 차가운 칼날이 제 목에 닿자 사색이 되어 황태자에게 애원했다.

“저, 전 아닙니다. 제발 믿어주십시오!”

“그래도!”

케이시스가 이를 갈 때, 헬리아나는 레이아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먹었던 케이크를 포크로 찍어 입안에 넣었다.

“공주!”

케이시스가 놀라 헬리아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헬리아는 우물거리며 베어 물었던 케이크를 다 먹어치웠다. 그제야 그 모습을 본 케이시스의 표정이 바뀌었다. 케이크를 먹어도 헬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이게 대체…….”

“독이 아닙니다. 케이크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아요.”

그러자 일행의 시선이 모두 레이아나에게 향했다. 때마침 의원이 다가왔다.

“마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하아, 하. 미안해요, 케이. 그 시종은 아무런 죄가 없어요.”

레이아나의 말에 케이시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대체…… 혹시 병이 아직도 낫지 않은 거야?”

평소 몸이 약한 레이아나였다. 케이시스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레이아나를 보다 의원을 향해 물었다.

“대체 무슨 병이란 말인가?”

“그것이…….”

의원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말을 해보게!”

의원을 닦달하는 케이시스의 모습에 보다 못한 헬리아가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레이아나에게 말했다.

“빨리 말해주세요. 이러다간 오히려 전하께서 병에 걸리실 것 같네요.”

“레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케이시스는 저만 모르는 듯한 분위기에 어안이 벙벙했다.

레이아나는 조금 쑥스러운 듯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입을 열었다.

“저 임신했어요.”

“……뭐, 이, 임신?”

케이시스의 표정이 멍해졌다. 아직도 제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축하드려요.”

헬리아의 말에 그제야 케이시스는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임신한 레이아나가 입덧을 한 것이다. 그걸 모르는 케이시스는 그만 독을 먹은 걸로 착각한 것. 케이시스의 눈가에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레, 레아가 내 아이를?”

케이시스가 와락 레이아나를 껴안았다.

“레아, 레아!”

“기뻐요?”

“내 오늘처럼 기쁜 날은 없을 거야.”

“정말로요?”

“정말.”

케이시스는 레이아나를 소중하다는 듯 보듬어 안았다. 오랫동안 아이가 없어 걱정하고 힘들어했던 레이아나였다. 곁에서 케이시스는 언제나 레이아나가 안타까웠다. 자신이 못나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 아이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레이아나는 모진 수모를 겪어야 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죄송해요. 너무 오래 기다렸죠?”

“죄송하긴 난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었어.”

“케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해줄게. 그러니 평생 함께해 줘.”

“케이…….”

자칫 독살 사건으로 커질 뻔한 오해는 케이시스와 레이아나의 훈훈한 장면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그 모습을 헬리아와 엘라임이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를 가진다는 게 저렇게 기쁜 것일까. 헬리아는 문득 이미 스러져 버린 기억의 편린이 떠올랐다. 자신을 버린 부모. 얼굴도 이름도 알 수 없는 그들이 생각났다. 그들도 저들처럼 자신의 탄생을 한순간이나마 기뻐했을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자신을 버리게 된 건 아닐까. 그러나 헬리아는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그렇다 한들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헬리아는 묘한 기분이었다. 황태자 부부는 보기만 해도 서로 상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서로를 믿고 의지할 수 있었을까. 그들이 그렇게 서로를 믿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게 사랑이라는 걸까.

헬리아는 괜스레 감상적으로 변한 자신을 깨닫고 이내 고개를 털어 상념을 지워냈다.

그때 엘라임이 손을 잡아왔다. 그 따스한 느낌에 헬리아는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지난 9년 동안 그녀의 곁에 있어준 엘라임.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나 그렇듯 그녀의 곁에 있어줄 엘라임.

‘너는 변함없겠지?’

“있을 거야. 언제까지고 네 곁에.”

엘라임은 따스한 눈빛으로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연인, 아니, 가족 그 이상의 존재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외로워하지 마.”

‘내가 외로워한다고?’

헬리아는 자신의 얼굴을 만졌다. 그러나 만진다고 제 얼굴에 드러난 외로움이 느껴질 리 없었다. 엘라임은 그런 헬리아를 보며 더욱 꽈악 손을 잡아주었다.

“왜?”

“그냥.”

외로워하지 말라고. 엘라임의 살가운 반응에 헬리아는 언제 우울했냐는 듯 피식 웃었다.

“얼씨구, 아까까지 삐져서 말도 안 한 주제에.”

“그, 그거야 네가…….”

이안과 가까워지는 게 싫으니까. 엘라임에게 이안이라는 존재는 매우 껄끄러웠다. 이제까지 언제고 저와 함께 있을 것만 같던 헬리아가 언젠가부터 그와 함께하기 시작했다. 항상 자신을 바라보던 헬리아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낯설고 싫었다. 엘라임은 아직도 이 감정이 무엇인지 뭐라 정의 내릴 수 없었다. 다만 그저 싫었다. 그러다 새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역시 내가 없으면 안 돼.”

“뭔 소리야?”

그녀가 자신의 계약자이고, 자신이 그녀의 정령인 순간부터 이 관계는 태초의 맹약에 따라 보장받았다. 끊을 수도 끊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너보다 오래 살 테니까 결코 내가 먼저 널 떠날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평생 외롭게 하지 않을게.”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그의 말이 제 가슴을 두드렸다. 평생이라는 말.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엘라임…….”

“전하!”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서 호위를 하고 있던 아스칼이 정원으로 들어왔다. 아스칼의 목소리에 레이아나와 기쁨을 나누고 있던 케이시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뚝뚝하긴 하지만 아스칼이 아무 이유도 없이 분위기를 망칠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야?”

헬리아도 상념을 끊고 케이시스와 아스칼을 보았다. 이윽고 아스칼이 입을 열었다.

“사라진 여자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냈다 합니다.”

헬리아의 눈이 번뜩였다.

* * *

헬리아는 제 눈앞에 위치한 거대한 저택을 바라보았다. 저택 주변에는 병사들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헬리아 일행이 저택 문 앞으로 다가가자 문을 지키고 서 있던 병사가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옷차림이나 분위기 등이 일반인 같지 않아 병사는 존대를 했다.

“황성에서 허가를 받고 나왔습니다.”

헬리아가 병사에게 황태자에게 받은 패를 내보이자 병사는 거수경례를 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가십시오.”

문이 열리자 헬리아와 엘라임, 이안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저택 안에서 한 남자가 나와 헬리아 일행에게 다가왔다.

“혹시 헬리아 공주님 되십니까?”

헬리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삼십 대 중반의 남자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정말 미인이십니다. 아, 저는 라오스 남작이라 합니다. 황태자 전하껜 말씀 들었습니다.”

라오스 남작은 안경을 쓴 꽤 마르고 유약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이미 황태자로부터 헬리아의 방문을 전해 듣고 그녀를 안내하기 위해 나왔다.

“미리 나와 있어야 하는데, 양해 바랍니다. 문제가 생겨서…….”

“괜찮아요.”

헬리아는 가볍게 손짓했지만, 그가 말한 문제가 궁금해졌다.

“한데 무슨 문제가 생긴 겁니까?”

“그게…….”

라오스 남작이 난감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수도에서 사라진 여자들이 이곳 라몬 공작의 저택으로 왔다는 흔적은 확인했습니다.”

라몬 공작의 저택! 그렇다. 사라진 여자들이 바로 이곳 라몬 공작의 저택으로 모두 끌려온 것이다.

‘역시 라몬 공작이었나.’

헬리아는 내심 예상하고 있었으나 사라진 여자들을 정말 자기 저택으로 데려갔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했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던가. 너무 드러난 곳이라 예상을 못 했다. 하지만 반대로 대놓고 움직였기 때문에 수상한 점을 느끼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면 여자들을 찾지 못한 겁니까?”

이안의 말에 라오스 공작은 매우 난감하다는 듯 진땀을 뺐다.

“이곳에 있었다는 흔적은 여럿 발견했습니다. 한데 아무리 찾아봐도 여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을 다른 데로 옮긴 거 아니야?”

엘라임이 말하자 라오스 남작은 그의 반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헬리아 공주가 앞에 있는 상황에서 뭐라 말할 순 없었다. 라오스 남작은 떨떠름했지만 그의 질문에 입을 열었다.

“주변을 계속 확인했습니다. 이후 새로 들어온 여자는 물론 나간 여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라오스 남작의 말에 헬리아는 매끄러운 턱을 쓰다듬었다.

‘들어온 흔적은 있는데, 나간 흔적은 없다고?’

헬리아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라오스 남작, 혹시 저택 지도를 볼 수 있을까요?”

라오스 남작이 지도를 가지러 간 사이 헬리아와 엘라임, 이안은 저택을 둘러보았다. 라몬 공작의 저택은 제국의 실세답게 수도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화려한 걸 좋아하지 않은 듯 물건은 별로 없지만 몇 개 전시된 물건은 모두 값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값비싼 것들이었다.

“사람이 없네?”

엘라임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으레 돌아다니는 고용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물었다.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곤 모두 조사받으러 갔을 거야.”

그런 그들의 입에서 나올 말들은 뼈와 살이 붙여져 라몬 공작의 죄로 그럴싸하게 둔갑되어 있을 것이다.

“흐음, 흑마법사의 집치곤 평범한데?”

“그럼 대놓고 흑마법사라고 광고할 일 있겠어?”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가 핀잔을 주었다. 그에 엘라임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왜 나만 가지고 그래?”

“네가 뻔한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칫.”

헬리아는 삐쭉 입을 내민 엘라임을 내버려 두고 천천히 주변의 모습을 눈에 새겼다.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무언가 황량함이 가득했다.

“느낌이 이상한데…….”

묘하게 느껴지는 기운에 헬리아는 눈을 좁혔다.

“공주님.”

그때 설계도를 가지러 갔던 라오스 남작이 돌아왔다.

“우선 안으로 드시죠.”

남작은 헬리아 일행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깔끔한 응접실이었지만 고용인들이 나간 탓에 제법 먼지가 쌓여 있었다.

“죄송하지만 차는 미뤄둬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고용인들이 없어서…….”

“아니에요. 차 마시러 온 것도 아니고, 그보다 설계도를 봐도 될까요?”

“여기 있습니다.”

라오스 남작이 테이블에 저택의 설계도를 펼쳤다. 라몬 공작의 저택은 총 3층으로 세 개의 독립된 건물이 존재했다. 설계도를 보자 거대한 저택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라몬 공작이 거주하는 본관과 고용인들이 지내는 건물, 그리고 별관이 있었다. 설계도를 내려다보던 헬리아가 물었다.

“비밀 통로는 모두 찾아보셨나요?”

“외부로 나가는 통로는 모두 확보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용한 흔적은 물론, 그 주변에서도 여자를 본 이는 없었습니다.”

“다른 통로는요?”

대개 큰 저택에는 비밀 통로가 있게 마련이다. 밖으로 나가는 통로는 물론 내부에서 돌아다니는 통로 또한 존재했다.

“현재 찾고 있지만 아무래도 내부 통로는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라오스 남작이 난감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외부 통로는 결국 외부로 드러나지만 내부에 있는 통로는 하나하나 찾아보거나 벽을 부수지 않고는 정확히 확인이 불가능했다. 라오스 남작의 말에 헬리아는 눈을 좁혔다. 그러다 다시 설계도를 살폈다.

“이 설계도 실제와 일치하나요?”

“확인 결과 완벽히 맞지는 않습니다만 몇 군데 빼고는 확실합니다.”

“설계자는…….”

“이 저택을 만들고 얼마 후에 죽었답니다. 이 설계도는 이 저택을 설계한 자의 후손에게서 어렵게 찾은 것입니다.”

저택의 비밀 통로는 외부로 결코 알려져선 안 되기 때문에 저택을 설계한 이들을 죽여 그 비밀을 감추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흐음.”

헬리아는 곳곳에 비어 있는 공간을 보고 물었다.

“확인하지 못한 곳은 어디입니까?”

“공작의 서재 뒤쪽과 별관 1층, 그리고 본관 3층입니다.”

라오스 남작이 설계도의 세 곳을 가리켰다. 헬리아는 그것을 보곤 눈을 좁혔다. 아무래도 무언가 있다면 이곳 중에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 생각을 라오스 남작이 하지 못했을까? 역시나 라오스 남작이 입을 열었다.

“마법사를 동원해 수색해 봤지만 저택 자체에 마법을 흩뜨리는 마법진이 깔려 있어 수색이 힘듭니다.”

헬리아는 그제야 저택에서 느꼈던 미묘한 기운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마법진 해체는 어떻게 됐습니까?”

“현재 진행 중입니다만 시일이 걸릴 것 같습니다.”

계속되는 헬리아의 질문에 라오스 남작은 귀찮을 만하건만 황태자의 명 때문인지 아니면 헬리아의 미모 때문인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헬리아는 매끈한 턱을 쓰다듬었다. 이대로 마냥 마법진이 해체되길 기다리기엔 시간이 얼마 없었다. 무엇보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사라진 여자들로 무엇을 하려는 걸까? 결코 좋은 의도는 아닐 것이다.

‘예감이 틀려야 할 텐데.’

“괜찮다면 다시 확인해 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이미 황태자에게 당부를 들었던지라 라오스 남작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라오스 남작은 솔직히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찾으면 좋은 일이나 못 찾아도 애초에 기대치 않았으니 실망도 없다.

“어느 곳부터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우선.”

헬리아는 설계도를 보곤 한 지점을 가리켰다.

“본관 뒤에 있는 별관 1층이군요. 알겠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라오스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헬리아 일행은 라오스 남작을 따라 자리를 옮겼다.

“여깁니다.”

라오스 남작은 별관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귀에 거슬리는 경첩 소리가 났다.

“이 기운은…….”

기운에 민감한 엘라임이 눈을 찌푸렸다. 아까까진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별관에 들어오자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기야.”

“마기라, 흑마법사가 오래 머문 곳엔 그 기운도 스며든다고 하지.”

헬리아는 책에서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흑마법사가 뿜어내는 마기가 공기 중에 머물러 기운이 남아 있는 것이다. 마기는 공기보다 무겁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도 흩뜨려지지 않았다.

헬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잘 사용하지 않는 곳이 맞는 듯 곳곳에 거미줄과 먼지가 쌓여 있었다.

“음?”

바닥을 내려다보던 헬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라오스 남작의 말에 시선을 떼었다.

“이쪽입니다.”

라오스 남작은 헬리아 일행을 어느 한 방으로 안내했다. 방 안으로 들어온 일행은 주변을 살폈다. 응접실로 이용한 곳인지 바닥에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고, 중앙에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이곳저곳을 살피던 헬리아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훑고는 라오스 남작에게 말했다.

“이 방도 수색을 했습니까?”

“네, 아무래도 비어 있는 공간이 있는 터라 여러 번 확인했습니다.”

“혹시 청소했습니까?”

“예?”

라오스 남작은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최대한 현장 그대로 보존해 놓았습니다.”

“흐음.”

“뭔가 발견했어?”

엘라임이 헬리아의 표정을 보곤 물었다. 그러자 헬리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래도 맞게 온 것 같아.”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과 이안은 물론 라오스 남작까지 눈을 크게 떴다.

헬리아는 테이블과 의자를 가리켰다.

“여기,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곳인데 먼지가 적어요.”

“그건…….”

테이블과 의자의 먼지를 살핀 라오스 남작이 놀란 듯 침음성을 터뜨렸다.

“그렇군요. 먼지가…… 사용을 안 했다면 먼지도 그대로일 테고.”

“그리고 이거.”

헬리아가 붉은 융단을 헤집고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기다란 실 같았다.

“머리카락?”

“정확히 말해 여자의 머리카락인 것 같네요. 거친 걸로 봐선 귀족의 것은 아니고.”

“아! 귀족가의 여자들은 모두 머리 손질을 받으니…….”

라오스 남작은 제 부인을 떠올리고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언젠가 하녀가 부인의 머리에 오일을 발라주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고용인의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모두 철저한 위생 교육을 받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흘리는 일은 없었다.

여자들이 이곳에 있었다는 확신을 가진 헬리아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중앙에 놓인 의자와 테이블, 그리고 한쪽 벽엔 창문이 있었다. 이상한 점을 발견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음?”

그때 한쪽 벽면을 크게 차지하고 있는 그림이 문득 눈에 띄었다.

“이건…….”

사람 키만 한 크기의 그림 가운데 검은 드래곤이 포효하고 있었다. 막 날갯짓을 하고 날아가는 듯한 그 드래곤의 눈동자는 샛노랬다. 한줄기 섬뜩한 느낌이 등줄을 타고 올라왔다.

“블랙 드래곤…….”

헬리아는 갑자기 마룡 엑시온이 떠올랐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헬리아는 액자를 잡아 끌어내렸다. 아니, 내리려 했지만 액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벽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듯했다.

“이안.”

헬리아의 말에 이안도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곤 스릉 검을 뽑았다. 그 모습을 본 라오스 남작이 놀라 소리쳤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안 떼어지니 부숴서라도 떼어야죠.”

“그, 그건…….”

아무리 라몬 공작이 지금 수감되어 있으나 상대는 공작이다. 저택을 수사하는 것도 어느 정도 무례를 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하다. 라오스 남작도 그런 생각의 범주 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 나라의 공작의 물건을 함부로 부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헬리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남의 나라 공작 아닌가.

“아, 안 됩니다!”

“이안, 부숴.”

그러나 헬리아는 단칼에 말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이곤 검을 크게 휘둘렀다.

콰지지직!

그러자 이안의 검이 튕겨 나왔다. 헬리아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찾았다.”

아무리 이안이 오러를 일으키지 않아도 대상은 그저 평범한 액자이다. 물론 이제는 평범하지 않지만. 그의 힘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매우 수상했다.

“이안.”

“알겠습니다.”

파아앗!

이안이 온 힘을 검에 쏟았다. 그러자 형형색색의 오러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스터의 오러를 실은 검이 액자를 향해 쇄도했다.

콰지지직! 카앙!

뭔가 날카로운 것이 부서지면서 액자가 두 동강이 났다.

“역시.”

부서진 액자 사이로 검은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끼이익.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이미 그의 방문을 알고 있던 간수장이 나와 케이시스를 맞이하였다.

“라몬 공작은?”

“가장 안쪽에 있습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케이시스는 아스칼만을 데리고 간수장의 안내에 따라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라몬 공작이 있는 곳은 감옥의 가장 안쪽에 위치한 곳으로, 모든 마나가 통제되는 감옥 안에 수감되었다.

케이시스는 그곳에서 라몬 공작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수감되기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감옥 안에 앉아 있었다.

“잘 지내는 모양이군.”

“그대 덕분이지.”

남의 시선 따윈 없는 감옥 안. 라몬 공작의 말은 거침없었다. 케이시스는 라몬 공작의 언행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대의 재판은 내일 있을 것이오.”

“재밌군.”

“그대 아래에 있는 세자크 남작이 잘 증언해 줄 것이오.”

그대의 죄를 입증하기 위해서 말이지.

“훗.”

라몬 공작은 입꼬리에 웃음을 지었다. 케이시스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뭐가 그리 우스운 거지?”

그러나 라몬 공작은 더 이상 그의 말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케이시스는 결국 그에게 어떤 말도 끌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돌렸다.

“내일 보겠소.”

“…….”

황태자가 아스칼과 함께 나가자 다시 감옥 안엔 적막이 깔렸다. 어둠 속에서 라몬 공작의 눈이 사이하게 빛났다.

“아직, 아직 끝나지 않았다.”

라몬 공작의 나직한 소리가 공허한 감옥 안을 울렸다.

* * *

뚜벅뚜벅.

어두운 통로 안을 램프의 불빛에 의지한 채 걸음을 옮겼다. 헬리아는 램프를 들고 이리저리 불을 비춰 보았다. 통로는 사람 두세 명은 나란히 걸어갈 정도로 생각보다 넓었다.

“제법 긴 것 같은데?”

엘라임은 램프의 불빛에도 통로의 끝이 보이자 않자 눈을 좁혔다.

“먼저 갔다 와볼까?”

“무슨 장치가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는 게 좋다.”

이안의 말에 엘라임은 그를 노려보았지만 이안은 무시한 채 걸어갈 뿐이었다. 엘라임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헬리아가 붙잡았다.

“그러는 게 좋겠어. 그리고 정 안 되면 나중에라도 가능하니까 지금은 그냥 가자.”

“…….”

엘라임은 입을 삐쭉 내밀었지만 결국 수긍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확실히 이곳이 맞나 보군.”

헬리아는 발아래를 불빛으로 비춰 보았다. 그러자 무수한 발자국이 보였다. 거기다 발자국의 크기를 보아 여자의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느낌 들지 않아?”

엘라임이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말했다. 방 안도 사이한 느낌이 들더니 여긴 더 심했다.

“뭔가 있다는 말인데…….”

헬리아는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꼭 보면 이런 데 장치가 있게 마련이지. 모두 조심해.”

헬리아 일행은 조심을 기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걷고 또 걸었는데도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대략 삼십 분 정도 걸었을 즈음, 일행은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몸이 힘들기보단 정신적으로 지치기 시작한 것이다. 캄캄한 곳에, 그것도 좁은 곳에 오래 있다 보면 신경이 예민해지게 마련이다.

“도대체 이거 언제 끝나는 거야?”

엘라임이 결국 먼저 투덜거리고야 말았다. 그것에 헬리아와 이안도 공감했다.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가니 어디로 향해 있는지 알 수가 없네.”

지하에 있다 보니 방향 감각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헬리아가 제대로 방향을 찾을 거란 보장은 없지만.

“좋아, 내가 먼저 갔다 올게.”

슬슬 몸이 달아오른 엘라임이 먼저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엘라임!”

“기다려 봐. 내가 먼저 가서…….”

“그러다 사고 치지 말고 얼른 와.”

“사고는 무슨, 그냥 걷는 것뿐이라고.”

그런데 그때였다.

달칵.

“음?”

엘라임은 걸음을 걷다 멈추었다.

“뭔가 밟은 것 같은데…….”

“엘라임!”

쿵! 쿠쿠쿠쿵!

갑자기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헬리아는 엘라임의 머리를 세게 쳤다.

“사고 치지 말랬지!”

“바, 발밑에 뭐가 있었던 것뿐이라고!”

“그게 사고다, 이 물대가리야!”

“이씨!”

오랜만에 물대가리 소리를 들은 엘라임은 눈을 찡그렸지만 제가 한 잘못이 있어 뭐라 말을 못 했다. 다만 이안이 자신을 참으로 멍청하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자 이를 앙다물었다. 그러나 지금은 엘라임을 타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찍, 찍찍!

너무나 익숙한 그 소리!

헬리아는 미간을 와락 좁혔다. 번뜩이는 눈동자, 긴 꼬리, 작은 몸통.

“또 쥐야!”

헬리아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쥐를 노려보았다. 예전 빈민가에서 카쟌이 만든 쥐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런데 또 쥐라니!

쥐의 등장에 이안이 검을 뽑았다. 헬리아와 엘라임도 방어 태세를 갖추었지만 워낙 좁은 통로라 공격하기 쉽지 않았다. 헬리아와 엘라임의 공격은 대단위 공격이 많은지라 이렇게 좁은 곳에서 사용하기 힘들었다. 여기서 믿을 사람은 이안뿐이었다.

“온다!”

엘라임의 말과 함께 드디어 쥐들이 헬리아 일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찍찍찍!

수십 마리의 쥐가 달려오는 모습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결코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헬리아 일행은 이안을 선두로 달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럴 때는 상대하기보단 빠르게 헤쳐 나가는 게 나았다. 물론 이렇게 달리고 달려도 길이 안 나온다면 정말 난감하겠지만.

휘이이익!

이안이 검을 휘두르며 쥐를 베어냈다. 그리고 그렇게 일행이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뒤, 멀리서 작은 불빛이 보였다.

“빛이야!”

작은 불빛은 점점 커지더니 이내 통로 전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찍찍찍!

쥐들의 마지막 공격! 이안은 어째서 마스터인 자신이 이런 쥐들을 상대해야 하나 자괴감이 살짝 들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쥐들을 처리했다.

“하아, 하아.”

빛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간 헬리아 일행은 숨을 골랐다. 뒤를 돌아보니 쥐들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제야 헬리아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통로에서 빠져나오자 제법 큰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헬리아가 나온 통로 맞은편에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나 있는 세 개의 길이 있었다.

“길이 세 개?”

헬리아는 세 개의 길을 보며 눈을 좁혔다.

“우선 어디든 들어가 보자.”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눈을 찌푸리곤 그의 정강이를 차 올렸다.

“쥐굴에 다시 넣어줄까?”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헬리아가 다시 눈치를 주자 엘라임은 깨갱 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곳으로 간 것 같습니다.”

이안이 세 개의 문 중 중앙을 가리켰다.

“다른 곳은 길에 먼지가 가득한데 이곳만 먼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안이 헬리아가 들었던 램프를 손에 쥐고 바닥을 가리켰다. 처음 들어온 통로에서 보았던 작은 발자국들이 보였다. 여자의 것이었다.

“좋아, 이쪽으로 가자.”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은 이안을 못마땅하게 바라봤지만 제가 한 실수가 있는 터라 말을 하지 못했다. 이안이 선두에 서고 그다음은 헬리아, 엘라임 순서대로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조심하십시오.”

이안은 혹여 이전과 같은 일이 벌어질까 당부했다. 물론 그 말이 누구에게 한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누가 일부러 그랬나? 누구는 실수 한 번 안 해본 줄 알겠네.”

“네놈 같은 실수는 하지 않는다.”

엘라임은 삐쭉 입을 내밀었다. 하지만 거짓말같이 얼마 뒤 또다시 이상한 기척이 감지됐다.

달칵.

앞서 가던 이안의 발밑에서 무언가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

쿵! 쿠쿠쿵!

“킥킥킥, 거봐! 뭐? 나 같은 실수는 안 한다고?”

“…….”

엘라임은 이안의 실수에 좋다구나 입꼬리를 올렸다. 이안은 미간을 좁혔지만 그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엘라임만 노려볼 뿐.

헬리아는 둘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헬리아의 한숨이 채 끝나기 전에 어디선가 또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스스스슥.

무언가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 헬리아는 그 소리에 점점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쉬쉬시식-

재빠른 몸놀림, 그리고 퍼덕이는 날갯짓 소리. 헬리아의 얼굴이 점점 사색으로 물들어갈 때 드디어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 바퀴벌레!”

그 위용도 당당한 바퀴벌레였다. 거짓말 안 하고 그것의 크기는 사람 팔뚝만 했다! 헬리아도 바퀴벌레는 싫었다. 거기다 날아다니는 바퀴벌레는 더더욱! 그리고 그 정도 바퀴벌레는 제아무리 남자라도 기겁하게 만들었다.

“저, 저건 뭐야!”

“……!”

바퀴벌레를 처음 본 엘라임은 기겁했다. 이안도 말은 안 했지만 점점 하얘지는 얼굴이 그의 심경을 대변해 주었다.

“어, 어떻게든 좀 해봐!”

헬리아가 이안을 보았다. 이안은 살짝 주춤하다 이내 검을 휘둘렀다.

카앙!

그런데 웬걸? 오러를 실지 않았지만 쇠를 두드린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에에에에-

거기다 이상한 굉음까지? 흑마법으로 만들어진 키메라 바퀴벌레였다. 거기다 놈들은 공격도 할 줄 알았다.

슈슈슈슉!

바퀴벌레 입에서 나오는 침이 옷에 튀었다. 엘라임은 펄쩍 뛰고는 제 옷을 바라보았다.

“노, 녹았잖아?”

“다, 달려!”

무슨 수가 있겠는가. 죽어라 달리는 수밖에. 헬리아 일행이 달리는 순간 바퀴벌레들은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슈슈슈슉!

공격력은 쥐보다 낮았지만 옷을 녹이는 침과 그 존재 자체만으로 혐오스러운 점이 쥐보다 더 공포스러웠다.

헬리아는 제 옷이 타들어가는 것보다 바퀴벌레가 달라붙는 게 더 싫었다. 그녀는 두터운 외투를 벗어 머리를 감쌌다. 엘라임과 이안도 외투를 방어막으로 삼아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젠장, 도대체 이게 뭐야!”

헬리아의 외침이 통로 안을 울렸다.

“헉, 헉헉.”

“최악이었어.”

“…….”

무사히 바퀴벌레 소굴을 빠져나온 일행은 모두 지친 모습이 역력했다.

“차라리 쥐가 낫겠어.”

“…….”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과 이안이 동감했다.

파삭.

“이런.”

헬리아는 제가 쓰고 있던 외투를 보았다. 아니, 이제 외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이미 천쪼가리만 남아 있던 탓이다.

헬리아는 그것을 버렸다. 그런데 그 순간 엘라임과 이안의 시선이 헬리아에게로 쏠렸다. 둘의 시선을 느낀 헬리아가 의문을 표했다.

“왜?”

“어, 어, 어, 아, 아, 니.”

“…….”

헬리아가 몸을 돌리자 엘라임과 이안의 얼굴이 일제히 붉어졌다. 헬리아는 눈을 찌푸렸다. 도대체 뭐야? 그러나 이내 그 이유를 알았다.

“…….”

헬리아는 제 몰골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바람이 솔솔 분다 싶었다. 외투를 벗어 보호를 했지만 워낙 바퀴벌레의 공격이 사방으로 쇄도했기 때문에 막지 못한 곳이 많았다. 그녀의 허벅지와 옆구리는 물론, 슬쩍 가슴까지 보이는 게 아닌가.

헬리아는 제 가슴골이 훤히 보이는 걸을 알아챘다. 왜 엘라임과 이안의 얼굴이 빨개진 것인지도.

“……계속 보고 있을 거야?”

스산한 헬리아의 목소리에 엘라임과 이안은 퍼뜩 놀라곤 얼른 제 옷들을 헬리아에게 건네주었다.

“참 일찍도 준다.”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과 이안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런데…….”

벌레 소굴을 벗어나 통로 밖으로 나온 헬리아는 주변을 살폈다. 고개를 들자 푸른 하늘이 보였고, 주변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여긴 어디지?”

그곳은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헬리아는 고개를 돌리다 이내 왜 낯이 익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저거 성벽 아니야?”

“성벽…….”

헬리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사방으로 둘러싸인 성벽. 결정적으로 헬리아는 건물 위에 제국을 상징하는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보았다.

“황성!”

통로의 끝에는 바로 황성이 있었다.

* * *

촤악.

간수장이 패를 내려놓자 나머지 두 명의 간수가 썩은 표정을 지었다.

“풀 하우스.”

“마, 말도 안 돼!”

“이, 이럴 순 없어!”

“거, 진 놈들이 말이 많다. 큭큭큭. 이게 다 얼마더냐.”

간수장은 씨익 입술을 말아 올리며 테이블에 쌓인 동전을 쓸어갔다. 두 명의 간수는 이제껏 한 번도 따지 못한 간수장이 설마 하니 판을 다 쓸어버릴 줄은 꿈에도 상상치 못했다.

“인생 한 방이라더니,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클클, 인생 뭐 있냐? 날던 놈도 떨어지고 기는 놈도 나는 세상인데.”

간수장의 시선이 힐끔 캄캄한 감옥 안을 훑었다. 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곳에 제국의 나는 새도 떨어뜨렸다는 죄인이 수감되어 있다. 간수장은 혀를 끌끌 차며 이내 시선을 떼었다. 오랫동안 이 일을 해왔기에 큰 감흥은 없었다.

“하암, 간수장님, 그런데 좀 졸린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게 밤에 뭐 하고 지금 졸리냐?”

“뭐, 뭐 하긴요.”

간수가 움찔 놀라자 간수장 마이클은 킬킬거렸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도 갑자기 졸음이 쏟아졌다.

“하아아암, 어라, 나도 좀 졸린데?”

어제 별로 한 것도 없었는데. 졸린다는 간수를 타박했던 마이클마저 하품을 길게 내뱉었다.

“크음, 자면 안 되는데…….”

“간수장님, 자꾸만 잠이…….”

무거운 눈꺼풀의 무게를 결국 이기지 못하고 간수들은 잠에 빠지고야 말았다. 바로 그때였다.

끼이익.

나직한 철창 열리는 소리와 함께 촛불이 바람에 일렁거렸다.

그 순간 철창 안에 갇혀 있던 라몬 공작의 눈이 번뜩였다.

* * *

“황성이라니…….”

높다란 성벽이 사방을 에워쌌고, 그 중앙엔 커다란 성이 우뚝 솟아 있었다. 좌로 보나 우로 보나 페르시아 제국의 황성이 분명했다.

헬리아는 뒤를 돌아 자신들이 나온 통로를 확인했다. 통로는 성벽에 붙어 있었다.

“주위에 인기척이 없습니다.”

이안이 주변을 살피고는 말했다. 헬리아는 성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보초를 서는 이도 없었다. 그야말로 남의 시선을 피해 다닐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완전 개구멍이네.”

“개구멍이라…… 뭐, 틀린 말은 아니네.”

비밀 통로를 단번에 개구멍으로 전락시킨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도 수긍했다.

“황성과 연결되어 있을 줄이야. 하기야 너무 길다 싶었어.”

아무리 비밀 통로라고 하지만 통로에서 보낸 시간이 제법 길었다. 생각해 보니 딱 저택에서 황성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었다.

“이거 문제가 커지는데.”

헬리아는 주변을 살폈다. 며칠 계속 내린 눈으로 바닥은 발자국이 완전히 지워진 상태였다. 통로 안에는 여자들의 발자국이 가득했다. 그런데 밖에선 눈 때문에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엔 원점이다. 다만 이젠 그 범위가 좁혀졌다.

헬리아는 점점 불길한 기운이 온몸을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새삼 황성을 다시 보았다. 새하얀 눈에 덮인 황성은 아름다워 보였지만 그 안에 어떤 새카만 것들을 감추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이안, 라몬 공작의 재판일이 언제였지?”

“오늘 오후입니다.”

“그 전까진 아직 시간이 있겠어.”

“라몬 공작을 만나러 가게?”

“아무래도 그래 봐야겠어.”

사라진 여자들을 찾기보다 여자들을 사라지게 만든 범인에게 물어보는 게 더 빠를 것이다.

헬리아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라몬 공작을 만나기 위해 황태자의 허가를 받으려면 시간이 부족했다.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헬리아 일행은 급히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기엔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황태자를 만나러 온 헬리아는 난데없는 말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라몬 공작이 사라지다니요?”

오늘 재판을 받을 라몬 공작이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이야기에 헬리아는 황태자를 보았다. 황태자의 얼굴엔 피곤함이 가득했다.

“후우, 나도 바로 몇 분 전에야 그 소식을 들었소.”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간수의 말로는 침입자는 없었다 하오.”

“이런…….”

헬리아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차라리 이곳이 왕국이었다면 이렇게 라몬 공작이 도망가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제국이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침입자가 없었답니까?”

라몬 공작이 수감된 감옥은 특별히 마법사를 구속하기 위한 곳이다. 라몬 공작의 두 팔과 다리에도 마나 구속구가 채워져 있다. 아무리 라몬 공작이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 하나 홀로 탈출하는 건 불가능했다.

“확신할 순 없지만 그 당시 간수장과 간수들이 급격한 졸음을 느꼈다 하오.”

“당했군요.”

헬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움을 주었는데 미안하오.”

황태자는 헬리아를 볼 면목이 없었다. 솔직한 말로 그녀가 도와줬기에 라몬 공작을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다 짜준 판을 지키지 못할 꼴이 아닌가. 황태자의 얼굴에 그늘이 지자 헬리아는 더는 뭐라 묻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너무 안일했다. 라몬 공작을 가두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라몬 공작만?’

순간 헬리아는 제 실수를 되짚어 보았다.

‘누군가 도와줬을 가능성은?’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그렇다면 누가 도와줬을까. 그만한 실력자가 있었단 말인가?

‘조력자?’

헬리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왜 그자를 잊고 있었지?

‘제롬.’

그자다!

* * *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밤. 마치 어둠에 달이 먹혀 버린 듯 제국의 황성 위에 가는 달이 떠올랐다.

헬리아는 머리를 차갑게 하고자 테라스로 나갔다. 겨울의 찬바람이 온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엘라임이 다가왔다. 헬리아는 난간에 등을 기댔다.

“변장해서 찾는 건 어때?”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세자크의 경우 그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기에 일일이 황성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다르다. 황성 전체를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라도 그런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황성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황태자의 허가를 받는다 하더라도 타국의 신분이라는 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헬리아는 뒤를 돌아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를 흔들었다.

“하늘은 똑같네.”

헬리아는 머리를 정돈하고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아르센 왕국이 생각났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클리드와 엘라드 상단 사람들, 세드릭, 그리고 아버지.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일까. 헬리아는 괜히 더 그들이 생각났다. 그러다 피식 웃음이 났다.

“왜?”

옆에 앉아 있던 엘라임이 그녀를 보았다. 헬리아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내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참…… 생각도 못 했어.”

돌아갈 곳, 기다리는 사람들. 헬리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모습을 본 엘라임도 미소를 지었다.

엘라임은 헬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자신의 손보다 작고, 자신의 손보다 거칠었다. 다른 여인의 손을 잡아본 적이 없어 잘 알 수 없지만, 그녀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그녀만큼 손이 거칠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힘들게, 또 힘들게 이 자리까지 왔다. 그 모습을 언제나 곁에서 지켜본 엘라임이었다.

“엘라임.”

“…….”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닌 한 여자의 것이었다. 자신이 붙잡고 있는 손도 더 이상 아이의 것이 아니다. 항상 곁에 있어서 그런 것일까. 엘라임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두근두근.

심장을 울리는 소리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지금, 불현듯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아차렸다.

‘나는…….’

“엘라임.”

‘헬리아를…….’

“엘라임!”

헬리아의 목소리에 엘라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도, 도대체 내가 뭔 생각을 한 거지?’

얼굴이 붉어진 엘라임은 헬리아가 갑자기 다가오자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왜, 왜?”

“저기!”

“저기?”

엘라임은 헬리아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자리엔 아무것도 없었다.

“못 봤어?”

“아, 아니.”

헬리아는 서둘러 난간에 바짝 기대어 다시 밖을 확인했다. 자신이 잘못 봤을 리가 없다. 캄캄한 어둠이라도 불이 환히 켜져 있어 밖을 분간할 수 있었다. 온통 새하얀 눈 위로 눈에 띄는 색이 보였다.

그때였다.

“역시…….”

눈 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마치 환영처럼 그는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

헬리아와 남자가 서로 눈이 마주쳤다.

“제…….”

“헬리아!”

너무 난간에 기댄 탓인지 헬리아의 몸이 허물어졌다. 엘라임이 서둘러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그러다 떨어지면 어쩌려고!”

“안 떨어져. 그보다 보여?”

“사람이 아니야.”

엘라임은 어른거리는 붉은 인형을 보고 눈을 좁혔다.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람의 기운이 아니었다. 헬리아는 엘라임의 말에 확신을 가진 듯 입꼬리를 올렸다.

“제 발로 나와주는군.”

헬리아의 눈이 그 붉은 인형을 꿰뚫듯 바라보았다.

“제롬.”

제롬의 환영이 헬리아를 보며 진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헬리아는 곧장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를 엘라임이 붙잡았다. 헬리아는 저를 붙잡은 엘라임을 보았다.

“갈 거야?”

엘라임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거기다 저번처럼 헬리아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초대를 해줬으니 마땅히 가줘야지.”

“위험해.”

“위험해도 할 수 없잖아. 어쩔 수 없이 주도권은 저들이 쥐고 있으니까.”

헬리아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녀 또한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다. 하지만 가는 것 외에 그녀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갈 거지?”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은 피식 웃으며 그녀를 꽉 품에 안았다. 갑작스런 엘라임의 행동에 헬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엘라임?”

“다치지 말라고 하면 무리겠지?”

“최대한 다치지 않을게.”

“내가…… 정령이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사라지지도 않을 테고.”

엘라임은 그녀가 다칠 때마다 그런 그녀를 두고 사라지는 자신이 답답했다. 그럴 때면 마지막에 그녀를 안는 이안이 부러웠다. 차라리 정령이 아니었다면, 최소한 그녀의 힘이 아닌 제 스스로의 힘으로 그녀를 지켜줄 위치에 있었다면 그녀를 내버려 두고 사라지는 일은 없었을 텐데.

처음에는 그저 이 어린아이가 특이하고 그 마음이 강렬해서 계약을 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조건에 맞았고, 그 또한 밖으로 나가고 싶었기에. 그런데 이제 헬리아란 존재는 그에게 단순한 계약자가 아니었다. 지켜주고 싶고, 계속 함께 있고 싶은 사람. 엘라임의 생을 통틀어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자는 헬리아가 유일했다. 그래서 더 자신의 상황이 아쉽기만 했다.

헬리아는 그런 엘라임의 마음을 알았는지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그러자 엘라임이 흠칫 몸을 떨었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헬리아가 나직이 웃었다.

“멍청아, 네가 정령이 아니면 널 못 만났을 거 아니야.”

“…….”

“네가 정령이라서, 그 정령이 너라서 다행이야.”

그를 만난 지 이제 10년이 다 되어간다. 그녀가 이곳에서 눈을 뜬 거의 그 순간부터 엘라임과 함께해 왔다. 이젠 그가 곁에 없는 것을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곁에 있어줄 거지?”

“언제나.”

엘라임은 헬리아를 꽉 껴안았다.

테라스에서 나온 헬리아는 레브를 불렀다.

“레브.”

“예, 공주님.”

“만에 하나 내가 내일까지 돌아오지 못하거나 연락이 안 되면 바로 황태자에게 가.”

“예?”

헬리아의 말에 레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제야 헬리아는 레브의 눈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레브는 놀란 듯 헬리아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으신 겁니까?”

레브는 시종임과 동시에 그녀를 지키기 위해 있다. 그런데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니. 레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공주님.”

“만약이야. 만약.”

“하지만…….”

“그리고 더 안 좋은 상황이지만, 황태자에게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황성을 빠져나가도록 해.”

그럼 최악의 상황이 될 것이다. 하지만 헬리아는 만에 하나라는 가정을 생각해 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공주님.”

“네 도움이 필요해. 레브.”

“…….”

헬리아의 말에 레브는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더니 입술을 깨물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부탁해.”

헬리아가 레브의 어깨를 한번 만지고는 뒤를 돌았다. 이제 저들의 초대에 응할 시간이었다.

“…….”

헬리아는 언제 왔는지 제 눈앞에 나타난 이안을 보았다.

“함정입니다.”

“알고 있어.”

사라진 라몬 공작,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제롬의 환영. 환영은 아직도 저 아래에서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보라는 듯. 이 타이밍이 과연 우연일까.

“우연일 리 없겠지.”

“저들의 의도를 모르는 상태에서 섣불리 움직이는 건 위험합니다.”

“의도를 모르니까 가야 하는 거야.”

헬리아의 말에 이안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단호했다. 결국 이안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말린다고 말려질 사람이 아니었다.

헬리아는 그런 이안을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어디 이런 일 한두 번 하나?”

“더 하다가는 제 명에 못 살 겁니다.”

“이제까지 위험하지 않은 일은 한 번도 없었어. 하지만 난 이렇게 지금 서 있고. 그리고 그건 내일도 마찬가지일 거야.”

이안은 헬리아의 단호한 눈빛을 보았다. 단단한 황금처럼 빛나는 눈동자. 거기엔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후우…….’

이안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때는 어쩔 수 없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헬리아는 이안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자, 움직이자고.”

* * *

“따라오라는 거겠지?”

환영을 찾아 나선 헬리아는 눈앞에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환영을 보았다. 마치 사라질 듯 일렁거리는 환영은 여전히 재수 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붙잡을까?”

엘라임의 말에 헬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친절히 따라오라는데 굳이 붙잡아서 뭐 하게. 게다가 환영이니 말도 못 할 테고.”

환영이 움직이는 곳으로 따라가자 점점 인적이 드물어졌다. 아무리 일행이 와 있는 곳이 본성에서 떨어진 외곽이라 하나 행인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건 이상했다. 주변을 살핀 엘라임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와본 것 같은.

“여기…….”

“맞아.”

헬리아는 주변 풍경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라몬 공작의 저택에서 비밀 통로로 나왔던 그 성벽 부근이었다. 하지만 주변을 살폈을 당시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역시 여기였나?”

제롬의 환영은 어느 순간 한 지점에 가만히 머물렀다. 헬리아는 곧바로 환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고, 그들이 다가오자마자 환영은 제 역할을 다했다는 듯 스르르 사라졌다. 그런데 문제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헬리아는 눈을 좁히고 혹시 자신이 놓친 게 있는지 살폈다.

“마기가 느껴져.”

“마기?”

“근처에서 강하게 느껴져. 저기.”

엘라임이 어느 한 지점을 가리키자 헬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가리킨 방향에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뭐가 있다는 거야?”

“마기가 뭉쳐 있어.”

헬리아는 엘라임이 가리킨 곳으로 걸음을 옮겨 그가 말한 지점에 손을 휘저었다.

“음?”

묘한 느낌이 손 안에 느껴졌다. 헬리아는 뭔가를 떠올린 듯 말했다.

“마법진인가?”

공간을 왜곡하는 마법진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헬리아는 이안을 보았다. 공간을 부수는 데는 소드 마스터만 한 적임자도 없을 것이다. 헬리아가 자신을 커팅기처럼 바라보자 이안은 살짝 눈매를 치켜 올렸지만, 쥐는 물론 바퀴벌레까지 상대한지라 이젠 뭐라 할 말도 없었다.

“이안, 부탁해.”

“알겠습니다.”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든 이안이 자세를 잡고 마기가 뭉쳐 있는 곳을 향해 검을 내려쳤다.

쇄애액!

소드 마스터답게 오러 블레이드를 품은 검이 단번에 공간을 가르자 이내 공간 사이에 틈이 생겨났다. 일렁거리는 공간 안으로 무언가 건물이 보였다.

“들어갈 거지?”

“물론이지.”

엘라임이 걱정 어린 표정으로 물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포기할 헬리아가 아니었다.

“간다.”

헬리아가 틀어진 공간 안으로 몸을 들이밀자 엘라임과 이안도 뛰어들었다. 공간 안으로 들어온 헬리아는 그들이 나온 공간의 틈이 다시 메꿔지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곧 미련을 버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3층 높이 정도 되는 폐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수리를 하지 않은 듯 음침하고 음산해 보였다. 비주얼만 봐도 제대로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기가 가득해.”

엘라임이 미간을 찌푸리고 팔을 휘저었다. 그러자 그들 사이에 막이 형성되더니 마기가 더는 침입하지 못했다.

그때 눈앞에 좀 전에 사라졌던 환영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끼이이익-

환영은 굳게 닫힌 건물의 정문을 손수 열어주고는 다시 사라졌다.

“들어오라는 건가?”

열린 문틈으로 검은 마기가 넘쳐흘렀다. 헬리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마찬가지입니다.”

괜한 물음이었나. 헬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문이 스르륵 닫혔다.

* * *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스산한 공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그저 캄캄한 어둠.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곳이었다. 헬리아가 라이트 마법을 시전하자 그제야 안이 보이기 시작했다.

“으으, 유령 나오는 거 아니야?”

엘라임은 몸을 으슬거리며 헬리아의 곁에 바짝 붙어 섰다.

“보기엔 영 정령과 유령의 차이를 모르겠구먼.”

둘 다 실체가 없기는 매한가지 아닌가. 그러나 엘라임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반박했다.

“길도 못 찾고 떠도는 영혼과는 천지 차이라구!”

“네네, 암튼 그런 길치들이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길치라는 말에 제법 안심이 되었는지 엘라임은 더는 유령 타령을 하지 않았다.

“폐궁인가.”

헬리아가 주변을 살폈다.

“뭐라도 있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안의 말에 헬리아는 좀 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다 문득 바닥을 내려다보았는데 바닥이 먼지 하나 없이 말끔했다.

“여기가 맞긴 하군.”

자주 사용하는 곳엔 먼지가 잘 쌓이지 않는 법이다.

“위로 가는 길이 막혔습니다.”

위를 살피던 이안의 말에 헬리아는 라이트 볼로 계단 위를 확인했다. 나무판자로 위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이란 계단은 모두 막아두었다. 그렇다면 이제 길은 오직 하나.

“아래로 내려오라는 거로군.”

“조심해.”

엘라임이 걱정 어린 투로 말했다. 불안감을 쉽게 떨쳐 낼 수 없었다. 적은 이제까지 상대해 왔던 이들과 차원이 달랐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되면 좋겠지만.”

헬리아 일행은 곧 내려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거기서는 문 안쪽에서부터 마기가 풀풀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헬리아는 닫힌 문을 천천히 열었다. 그러자 내려가는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라임이 가장 선두로, 그리고 헬리아, 이안 순으로 계단을 내려가기로 했다. 헬리아는 맨 처음 내려가는 엘라임에게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아무거나 밟지 마.”

“그때는 실수였다니까.”

엘라임은 투덜거렸지만 이번엔 발걸음 하나하나 신중하게 옮겼다. 그것은 뒤따라오는 이안도 마찬가지. 혹여라도 무슨 장치가 되어 있지 않을까 싶어 일행은 조심에 조심을 기했다.

그렇게 몇 분쯤 내려갔을까.

‘이상한데?’

계단을 내려가던 헬리아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층을 세면서 내려왔는데 내려간 층수가 무려 9층이었다. 이곳이 황성이고 지금 있는 장소가 특이한 곳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이렇게 깊다는 건 이상했다. 위로 층을 올리는 것보다 아래로 파는 게 더 힘들다. 그런데 현시대에 이것이 가능할까. 헬리아는 이제껏 이렇게 깊은 지하는 처음이었다.

“엘라임, 뭐 이상하지 않아? 너무 깊은 것 같아.”

“깊다니?”

“벌써 9층까지 내려왔어. 다시 돌아가 봐야겠어. 나갈 곳을 놓친 것 같아.”

헬리아의 말에 엘라임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9층이라니?”

“황성이라도 이렇게 깊은 건 말이 안 돼.”

“아니, 아니, 왜 9층이야? 이제 3층인데?”

“…….”

헬리아는 등줄기가 싸해졌다. 공포 영화를 본 것 같은 놀람이 아니었다.

“3층이라고?”

엘라임은 그런 걸 왜 묻느냐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헬리아는 엘라임의 말에 눈매를 좁혔다.

“나는 9층으로 느꼈어.”

“9층?”

“그래, 9층.”

헬리아는 뒤를 돌아 이안에게 물었다.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이안, 지금 우리가 얼마나 내려왔지?”

마스터인 이안이라면 상황이 어떤지 알 것이다. 그런데 이안에게서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안?”

헬리아는 서둘러 라이트 볼을 뒤로 가져갔다. 그런데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이안이 보이지 않았다.

“없어?”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안이 그들과 떨어질 일이야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발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건 말이 안 됐다. 누군가 수작을 부리지 않고서야.

“젠장, 엘라임, 이안을 찾아봐.”

“알았어.”

엘라임은 다급히 기감을 펼쳤지만 느껴지는 건 온통 마기뿐이었다.

“마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어.”

“젠장!”

헬리아는 이를 물었다. 설마 자신들을 따로 떨어뜨릴 속셈인가? 하기야 초대해 놓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을 리 없겠지.

헬리아는 엘라임의 손을 붙잡았다.

“……왜, 왜?”

엘라임은 놀란 듯 뭍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퍼득거렸다. 헬리아는 엘라임의 손을 꼭 잡았다.

“아무래도 우릴 따로 떨어뜨려 놓으려는 것 같아. 네가 내 정령이라 환각에 걸려들진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 그렇지.”

“손잡기 싫으면 옷을 잡을게.”

헬리아가 엘라임의 손을 떼고 옷을 잡으려 하자 엘라임이 헬리아의 손을 꼭 붙들었다.

“소, 손을 잡는 게 아무래도 더 확실하니까.”

엘라임은 헬리아의 작은 손을 결코 놓지 않겠다는 듯 꽉 잡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이안이 사라진 상태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그를 찾아야 하는지 엘라임이 물었다.

헬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이안이라면 무사할 거야. 아니, 꼭 그럴 거야.”

헬리아는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찾을 방도가 없는 상태에서 우왕좌왕하는 건 더 상황을 나쁘게 만들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헬리아와 엘라임을 떼어놓을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 아니면 원래 있을 자리였는지 드디어 커다란 문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레아, 몸은 좀 어때?”

케이시스가 침대에 누워 있는 레이아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레이아나는 그런 남편의 모습에 옅게 웃음을 지었다.

“괜찮아요.”

“여기 우리 아이가 있다는 거지?”

케이시스가 기쁜 얼굴로 레이아나의 배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레이아나는 도리어 그의 손을 잡아 제 배를 꾹 눌렀다.

“만질 거면 제대로 만져 봐요.”

“뭐, 뭔가 움직였어!”

“후훗.”

움직이긴 뭘 움직이겠는가. 아직 콩알만 할 텐데. 그러나 레이아나는 그저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케이시스가 웃는 게 좋았고, 제 배에 그런 케이시스의 아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졌다.

“딸일까, 아들일까?”

“아들이었으면 좋겠어요.”

레이아나는 케이시스 같은 아들을 떠올렸다. 아마 정말 소중하고 또 소중할 것이다.

“음, 나는 레아를 닮은 예쁜 딸이었으면 좋겠어. 아들은 그다음에 낳자.”

웃음을 짓던 레이아나의 얼굴에 갑자기 그늘이 지어졌다. 케이시스는 그런 레이아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케이, 그냥 불안해져요.”

“원래 임신하면 그렇대. 레아는 그저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들어. 내가 그렇게 해줄 테니까.”

케이시스가 레이아나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잘될 거야.”

“네.”

“자, 이제 푹 자도록 해. 임산부는 잘 먹고 잘 자야 된다고.”

레이아나는 아직 잠옷으로 갈아입지 않은 케이시스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자신을 재운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잘 자, 레아.”

케이시스는 레이아나의 이마에 짧은 키스를 해주곤 방을 나왔다.

“비 마마는?”

“자고 있습니다. 걱정이 많은 것 같습니다.”

바루스 공작의 안색이 흐려졌다. 어렵게 아이를 얻은 딸아이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라몬 공작의 추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법사를 동원해 수색하고 있지만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후우…….”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불안감이 스며들었다. 사라진 라몬 공작. 그것도 황성의 철통 보안을 자랑하는 가장 깊은 감옥에서 그가 사라졌다.

‘누군가…….’

그를 돕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누굴까?

“라몬 공작의 주변 조사는 어떻게 되었어?”

케이시스가 아스칼에게 묻자, 아스칼은 고개를 저었다.

“라몬 공작이 수감된 이후 모두 몸을 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탈출시킬 만한 능력이 되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케이시스의 장고가 깊어만 갔다. 결코 라몬 공작 혼자 탈출할 리가 없다. 몸 곳곳에 채워둔 마법 구속구를 풀고 도망을 친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조력자는 라몬 공작을 탈출시킬 정도의 힘을 지닌 자여야 한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라몬 공작의 뜻을 함께하면서 그를 탈출시킬 자.

“뜻을 함께하는 자?”

순간 무언가를 떠올린 황태자의 눈동자가 커졌다.

“설마…… 설마 그럴 리가……!”

“전하?”

“정말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황태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당장, 당장 만나야겠습니다!”

“도대체 누굴?”

콰앙!

그때, 황태자의 집무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야밤에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다. 수십 명의 병사가 황태자 일행을 에워쌌고 날카로운 검이 그들을 향해 겨눠졌다.

“이게 대체 무슨 무례인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바루스 공작의 호통과 함께 아스칼은 이미 검을 빼 들고 황태자를 보호했다. 그러나 바루스 공작의 말에도 병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태자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아니야, 아니야.’

뚜벅뚜벅.

나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한 사람이 그들을 헤치고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어, 어째서!”

그를 본 황태자의 눈동자가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당신이! 황태자는 절규했다.

* * *

타닥타닥.

달리고 또 달렸지만 보이는 건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이안으로서는 새카만 어둠에 직면해야만 했다.

“젠장!”

주먹으로 벽을 후려친 이안이 잇새로 욕을 내뱉었다. 마기로 인해 기감을 제대로 펼칠 수 없어 주변을 파악할 수 없었다. 한순간이었다. 그 한순간, 헬리아와 엘라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듯 이안은 그들을 찾을 수 없었다.

“크윽.”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지켜준다고 했다. 다시는 다치지 않게 지켜준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이안의 검은 눈동자가 점점 짙어졌다.

“떨어뜨려 놓을 셈인가?”

헬리아와 마찬가지로 이안도 저들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다행인 것은 공주와 엘라임이라면 그들의 수에도 결코 떨어지지 못할 거란 것이다.

“후우…….”

이안은 그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을 지체하다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랐다.

이안은 더는 움직이는 것을 멈추고 자리에 섰다. 이미 10층 넘게 내려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깊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저들이 만들어낸 공간에 갇혀 있다는 것.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공간 안에 자신을 가뒀다면 그 공간을 가르면 그만이다.

파아아앗!

이안의 검에서 환한 오러 블레이드가 뻗어 나왔다. 그 빛에 어둠은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 빛에 닿는 것조차 싫은 듯했다.

우웅우웅!

오러 블레이드가 이안의 힘에 요동쳤다. 그것은 점점 더 가늘어지더니 이내 검 안에 갇힌 듯 미세한 빛만을 뿜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오러 블레이드를 압축하고 또 압축했다.

‘단숨에 벤다!’

이안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온 신경을 하나로 모았다. 정신을 모으고 마기로 진탕된 공간 속에서 공간을 왜곡시킨 마기의 근원을 찾아냈다.

“여기다!”

이안의 오러 블레이드가 어느 한 점을 향해 강하게 쇄도해 나갔다.

콰아앙!

그의 오러 블레이드가 무언가와 강하게 부딪치며 커다란 충돌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캄캄한 어둠이 깨진 유리창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크윽!”

그와 함께 흘러나온 신음. 이안의 것은 아니었다.

“너로군.”

이안의 검이 한 인형을 가리켰다. 어둠에 가려졌던 달빛에 한 인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 진홍빛 눈동자.

“네가 제롬인가?”

“큭큭큭, 이거 놀랍군.”

제롬은 제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를 보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의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설마 마스터라니…….”

알 수 없는 힘을 가진 공주, 그리고 그와 함께 있던 푸른 머리의 정령사. 제롬은 그들만 떨어뜨려 놓으면 나머지는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예상치 못한 변수군.’

이안이 마스터가 되었다는 건 아르센 왕국에서도 아직 소수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그가 왕국에 돌아오는 대로 새로운 마스터의 등장을 알릴 생각이었지만, 헬리아가 제국으로 가는 바람에 시일을 놓치게 된 것이다. 물론 그것이 현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이안과 처음 대면해 본 제롬은 왼팔에 느껴지는 고통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스터라, 이거 쉽지 않겠군.’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제롬은 혀로 입술을 축이고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류가 달빛을 가리더니 이내 주변을 캄캄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곳에는 흑마법사의 마력을 증폭시켜 주는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상대가 마스터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들을 어디로 보냈지?”

이안의 말에 제롬은 킥킥거리며 웃었다.

“그걸 내가 말해줄 거라 생각하나?”

“그럼 말하게 만들어주지.”

이안은 제롬이 마법을 시전하기 전에 빠르게 검을 치켜들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제롬은 입꼬리를 올리며 제 품으로 파고드는 이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지지직!

이안이 다가가기 전 공기 중에 퍼져 있던 마기가 그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콰아앙!

“크윽!”

날카로운 마기는 무기가 되어 이안의 검과 부딪쳤다. 이안은 손에 느껴지는 감각에 미간을 좁혔다.

‘캐스팅 시간이…….’

본래 마법사는 마법을 펼칠 때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접근전일 땐 기사가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이안도 그 점을 노렸으나 그 역시 상대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큭큭, 캐스팅 시간을 노린 건가? 아쉽군. 이곳에서 그런 건 필요 없어서 말이야.”

“…….”

이안은 검을 세게 쥐었다. 그러나 곧 그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자신에게 불리한 조건이며, 쉽지 않은 상대이다. 하지만 질 것 같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니, 져선 안 된다.

“겨우 그 정도인가?”

이안의 도발에 제롬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그러나 그 도발에 쉽게 당하지 않았다.

“이번엔 내가 가지.”

이안의 검에서 환한 오러 블레이드가 뻗어 나왔다.

“……!”

그 순간, 제롬은 이안의 신형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자마자 어깨 쪽으로 느껴지는 기운에 재빨리 몸을 틀었다.

“크윽!”

그러나 이안의 검은 제롬의 오른쪽 어깨로 짓쳐 들어갔다. 그가 피하지 않았다면 이안의 검은 심장을 관통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젠장!”

이미 왼쪽 어깨를 다친 제롬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다시 오른쪽 어깨에 검상을 입자 그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이익!”

제롬은 이를 악물고 손을 뻗어 이안에게 마기를 집중해 쏘아 보냈다. 하지만 이안은 이미 눈치를 채고 몸을 돌려 제롬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같은 수에 두 번 당할 것 같으냐!”

제롬은 마기로 몸을 보호했다. 그러나 그건 이안이 바라던 바였다. 그 순간 반대쪽이 비어 있는 걸 알아채고 검을 찔러 넣었다.

“크악!”

오러 블레이드가 생살을 찢어놓자 제롬은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그는 예전 헬리아와의 결전에서 사용한 힘을 내보였다.

파아아앗!

제롬의 몸에서 검은 마기가 흘러나왔다. 그의 눈동자는 검게 물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기를 흡수한 건가?’

제롬은 주변에 있던 마기마저 자신의 힘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다시금 달빛이 공간을 비추었다.

“크흐흐흐, 죽어라!”

얼굴에 잔뜩 힘줄이 돋아난 제롬은 강력한 마기를 이안을 향해 쏘아 보냈다. 한 치의 틈도 없는 공격! 이안은 이를 악물고 오러 블레이드를 휘둘러 피할 공간을 만들었다. 그러곤 재빠른 움직임으로 제롬을 향해 파고들었다. 제롬은 그에 질세라 마기로 그의 다리를 묶었다.

“이제 도망칠 수 없다!”

“과연 그럴까?”

제롬은 이안의 여유로운 표정에 눈을 찌푸렸다. 이안이 자신의 힘을 개방했다.

“이, 이놈 힘을!”

제롬은 이안의 거대한 기운에 눈을 부릅떴다. 이제까지 제 힘을 다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이안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그 순간, 이안의 신형이 사라지더니 어느새 제롬의 배에 검을 꽂아 넣고 있었다.

“커, 커헉, 어, 어떻게?”

“마스터를 얕보지 마라.”

“커, 커헉.”

이안은 제롬의 배에서 검을 뽑았다. 그러자 분수처럼 피가 터져 나왔다. 제롬의 실력으론 이안을 막기 어려웠다. 헬리아와의 일전에서도 인질이 없었다면 헬리아가 그렇게 고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제롬이 이안의 실력을 낮게 본 것이 패배의 원인이었다.

“쿠, 쿨럭!”

이안은 다가와 제롬에게 검을 겨누었다.

“공주는 어디에 있지?”

“큭큭큭.”

“말하지 않겠다면 죽이겠다.”

“죽여라. 어차피 널 막지 못하면 난 죽을 테니.”

“…….”

푸욱!

이안은 차가운 눈으로 제롬의 허벅지에 검을 꽂고 비틀었다.

“크아아악!”

제롬의 비명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곧 그의 입술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큭큭, 네놈은 공주를 구할 수 없다.”

이안의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제롬은 이안의 표정이 급격이 변하는 걸 보고 더할 나위 없는 희열을 느꼈다.

“어째서 우리가 공주를 끌어들였는지 알고 싶나?”

이안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곧 그분이 부활한다.”

마룡 엑시온!

다크니스의 최종 목표는 역시나 마룡 엑시온의 부활이었다.

“하여 우리는 수천 명의 처녀를 제물로 삼았지.”

처음엔 제국에서 처녀를 구했다. 그러다 더는 제국에서 처녀를 구하지 못하자 다크니스는 인근 국경에서 여인들을 잡아다 올렸다.

“단순한 처녀들이 아니었지. 모두 마나 감응도가 높은 이들이었다.”

그렇게 마나가 높은 이들은 마룡 엑시온의 부활을 돕는 제물로 희생되었다. 하지만 아직 중요한 것이 남아 있었다.

“네놈들은 이것이 함정인 줄 알면서 왔겠지.”

제롬은 피식거렸다. 그러자 이안의 눈이 점점 날카로워지더니 이내 그의 몸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꾸욱.

제롬의 허벅지를 가른 검에 힘이 들어갔다. 제롬은 쿨럭 피를 한 모금 토해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쿠, 쿨럭, 큭큭, 이제 알아차렸나?”

제롬은 이안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다. 마룡 엑시온 님의 부활에 필요한 마지막 제물!”

다크니스는 마지막 제물을 찾는 데 고심했다. 뛰어난 마나 감응력과 처녀라는 점. 여마법사 또한 고려를 해보았으나 그 힘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해서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 매개를 선택하는 일에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어느 날, 제롬은 보았다.

“헬리아 공주! 그녀만큼 완벽한 제물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를 찾을 수 없었지. 이 황성에서 다시 보기 전까지.”

연회에서 그녀를 본 것은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그리고 그녀를 어떻게 끌어들일까 고심했다.

“큭큭, 너무 쉽게 걸려주더군.”

“어디냐?”

이안의 눈에 싸늘한 살기가 감돌았다. 제롬은 그 살기만으로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이미 삶에 미련이 없어서일까.

“큭큭, 지금쯤이면 의식이 시작되었겠군.”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앗!

거대한 기파가 퍼지면서 공기와 땅이 뒤흔들렸다. 제롬은 그에 입꼬리를 올렸다.

“드디어 그분이 부활하신다.”

제롬의 말에 이안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서둘러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이미 늦었다! 그녀는 이제 엑시온 님으로 다시 태어날 거다! 하하하!”

제롬의 목소리가 이안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 * *

“이건…….”

헬리아는 눈앞의 광경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맨 처음 강한 악취가 맡아졌고, 그다음 수많은 시체를 보았다. 악취는 시체가 썩으면서 나는 냄새였다. 커다란 돔형으로 된 방 안에는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어간 수십, 아니, 수백 명이 넘는 여인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헬리아는 그 참혹한 광경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찰박찰박.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체에서 흘러나온 다량의 핏물이 튀었다.

“헬리아…….”

“…….”

엘라임도 눈앞의 광경에 놀란 듯 헬리아를 보았다. 헬리아는 발아래 채 썩지 못한 한 어린아이의 시체를 보았다. 아직 아이의 티를 채 벗지도 못 한 어린 소녀였다. 온몸의 피가 다 흘러나온 듯 시체는 바짝 말라 있었다. 그러나 억울함과 두려움에 두 눈은 아직도 부릅떠져 있었다.

“…….”

헬리아는 그 아이의 눈을 손수 감겨 주었다.

“……라몬 공작.”

시체는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백여 명? 아니, 그 수가 천에 달할 정도였다. 죽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시체부터 며칠 되지 않은 시체까지.

헬리아가 입술을 비틀며 얼음처럼 차갑게 웃었다. 라몬 공작의 저택을 조사할 때도 사라진 여자들의 모습을 본 이가 없다고 했다. 그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이다. 들어가면 나오는 이가 없으니까. 모두 죽었던 것이다. 헬리아의 눈빛이 싸늘한 살기를 품었다.

그때였다. 헬리아의 맞은편 끝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라몬 공작.”

그를 씹어 먹을 듯 헬리아는 이를 물었다. 라몬 공작은 두 손을 펼치며 그녀의 방문을 환영했다.

“잘 와주었소, 헬리아 공주.”

“……당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슨 짓이라니?”

라몬 공작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다 이내 발아래 죽은 여자들을 보며 아하 했다.

“아, 이 여자들 말인가? 참으로 숭고한 희생이 아닌가.”

“……숭고한 희생?”

“위대하신 엑시온 님의 부활을 위해 한 몸 바쳤으니 그것이 숭고한 희생이 아니고 뭐겠는가.”

“……돌았군.”

“그분의 부활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라몬 공작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렸다. 헬리아는 눈을 날카롭게 뜨고 라몬 공작을 노려보았다.

“네 뜻대로 되도록 내버려 둘 것 같나?”

“큭큭큭, 그분의 부활은 막을 수 없다.”

라몬 공작은 품에서 검은 구슬을 꺼내 들었다. 그 안에서 이제까지 느껴본 적 없는 강렬한 마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엑시온!”

헬리아는 단번에 그것이 마룡 엑시온이 봉인된 구슬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 그럼 마지막 의식을 시행하노라!”

라몬 공작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많은 흑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각기 헬리아와 엘라임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이건…….”

헬리아는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흑마법사를 보고 눈을 좁혔다.

“큭큭큭, 자, 이제 마지막 제물이 되어라, 헬리아 공주!”

파아아아앗!

그 순간, 거대한 파동이 바닥에서부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법진이야!”

엘라임의 말에 헬리나는 이를 물었다.

“나를 제물로 삼겠다고? 웃기는 소리!”

헬리아의 눈이 점차 짙은 금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엘라임.”

“조심해.”

헬리아가 엘라임을 한번 바라보았다. 엘라임은 그녀의 눈빛에 고개를 끄덕였다. 헬리아의 몸에서 금빛 찬란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이건!”

라몬 공작은 헬리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금빛 기류에 눈을 찌푸렸다. 검은 구슬에서 넘실거리던 마기도 헬리아의 기운에 움찔거렸다.

“뭐 하나! 바로 시작하라!”

무언가 위험을 감지한 라몬 공작이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흑마법사들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헬리아를 향해 마법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헬리아의 힘 앞에선 태양 앞의 반딧불에 불과했다. 헬리아가 펼친 공격에 흑마법사들은 속절없이 휘청거렸다.

“크윽!”

“히, 힘이…….”

흑마법사들은 헬리아의 힘에 이를 앙다물었다. 라몬 공작도 제롬에게 들은 것 이상의 힘을 내뿜는 그녀의 모습에 놀란 듯 눈이 커졌다. 그러나 그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큭큭큭, 이 정도였을 줄이야.’

그녀가 더없이 강해질수록 부활하실 엑시온 님의 힘 또한 더욱 강해질 것이다. 라몬 공작은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내려다보며 눈매를 휘었다.

‘이제 시작이다. 큭큭큭!’

“엘라임!”

“알았어!”

엘라임이 거대한 수룡을 만들어냈다. 수룡은 흑마법사들을 단숨에 쓸어버렸다.

“크아아악!”

흑마법사들은 수룡의 공격에 힘으로 맞섰지만 현재 헬리아의 각성으로 정령왕의 힘을 쏟아내는 엘라임을 막을 수 없었다.

엘라임은 서둘러 다른 흑마법사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서둘러야 해.’

헬리아의 각성 상태는 그녀의 몸에 많은 무리를 안겨준다. 그렇기 때문에 서둘러 상대를 처리해야 했다.

‘헬리아.’

엘라임이 입술을 깨물고 헬리아를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우우우웅!

금빛으로 물든 헬리아. 헬리아는 라몬 공작을 향해 걸어갔다.

온몸에서 뜨거운 피가 역류하는 듯했지만 아직 심장의 상태는 양호했다. 저것만 부순다면.

“그렇겐 안 되지.”

라몬 공작이 비틀린 웃음을 짓고 헬리아를 향해 마법을 시전했다. 제롬의 공격보다 더 강한 공격이 헬리아를 향해 짓쳐 들었다.

헬리아는 라몬 공작의 공격을 한 손으로 막았다. 그의 공격이 아무리 제롬보다 강하다고 해도 그래 봤자 헬리아의 힘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라몬 공작은 제 공격이 먹혀들지 않자 입술을 치켜 올렸다.

“과연 대단한 힘이군. 이것도 쉽게 막을 수 있을까?”

마룡 엑시온이 봉인된 구슬에서 검은 마기가 솟구쳐 나오더니 그 마기가 다시 라몬 공작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그러자 그의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새카만 검은색으로 변했다.

“큭큭큭, 느껴진다! 거대한 힘이!”

“…….”

헬리아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라몬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래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죽어라.”

헬리아의 나직한 말과 함께 거대한 기운이 라몬 공작을 향해 쇄도했다. 라몬 공작은 헬리아의 마법 공격에 피식 입가에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그것을 막아냈다.

“엑시온 님의 힘 앞에 무릎을 꿇어라!”

헬리아는 제 공격이 통하지 않자 눈을 좁혔다. 라몬 공작은 재빨리 헬리아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수십 개의 검은 마기를 담은 볼이 헬리아를 향해 다가왔다.

‘……!’

손으로 막으려던 헬리아는 이내 위험을 감지하고 몸을 피했다. 그러자 굉음이 터져 나오며 근처에 있던 흑마법사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나갔다.

“…….”

“큭큭큭, 용케 피했군. 그럼 이건 어떨까?”

현재 헬리아와 라몬 공작의 힘은 막상막하.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승패를 가늠할 수 없었다. 해서 라몬 공작은 최후의 수를 쓰기로 했다.

“데려와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 갑자기 수십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헬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때 그녀의 눈에 보였다.

“사, 살려 주세요!”

“어, 엄마!”

“제, 제발 살려 주세요!”

여자들의 울음소리와 비명이 흘러나왔다. 헬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큭큭큭.”

라몬 공작은 그런 헬리아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헬리아 공주가 인질 때문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제롬에게 듣고 혹시나 하고 준비해 둔 것이다. 그러나 헬리아의 표정은 냉막하기만 했다.

“내게 그런 게 통할 것 같나?”

헬리아의 목소리는 이미 평소 그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각성 상태에선 인간의 감성보다 드래곤의 이성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드래곤은 냉혹하고 자비가 없었다. 지금 그녀에게 여자들은 그저 하등한 인간에 불과했다.

라몬 공작은 눈을 찌푸렸지만 이내 명령을 내렸다.

“죽여라!”

“넵!”

“아, 안 돼요! 사, 살려 주세요! 제, 제발 살려 주세요!”

한 여자가 끌려 나왔다. 그러나 그녀를 잡아챈 흑마법사는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헬리아가 보는 앞에서 그녀의 목에 검을 쑤셔 넣었다.

“커, 커헉!”

“…….”

헬리아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가소롭군.”

헬리아는 라몬 공작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 게…….”

“으아아앙!”

“에냐!”

“엄마! 엄마!”

멈칫.

한 어린 소녀였다. 어린 소녀는 눈물과 비명을 지르며 끌려 나왔다. 그런 소녀를 바라보는 한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그 소녀의 어머니인 듯 울부짖었다.

“헬리아!”

엘라임은 헬리아가 멈칫하자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그 순간 흑마법사가 검을 휘둘렀다.

“커, 커헉!”

“에, 에냐! 에냐!!”

“어, 어, 엄…….”

소녀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고, 소녀의 어미는 비명을 내질렀다.

“…….”

두근두근!

헬리아의 몸속에서 피가 역류했다. 분노가 그녀의 몸을 지배했다.

“벌써!”

엘라임은 헬리아의 반응에 입을 앙다물었다. 너무 시간을 끌었다. 서둘러 상대를 제압해야 했는데.

“쿠, 쿨럭!”

헬리아가 피를 토하자 라몬 공작은 이를 드러내며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 자, 진을 펼쳐라!”

“헬리아!”

“쿠, 쿨럭.”

라몬 공작이 명을 내리자 그제야 흑마법사들이 마법진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

거대한 공명음이 들려오면서 마법진에서 검은 마기가 헬리아의 몸을 얽매기 시작했다.

“헬리아!”

엘라임은 달려가 그녀에게 달라붙은 마기를 떼어내려 했지만 서서히 헬리아의 힘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젠장! 헬리아!”

엘라임이 아무리 힘을 써봐도 이미 발동된 마법진의 힘은 거대했다.

“오오, 위대하신 엑시온 님께 제물을 바치오니 부디 깨어나 주시길 바랍니다!”

검은 구슬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라몬 공작은 그 광경에 희열을 느꼈다.

“드, 드디어!”

깨진 구슬에서 이전보다 더욱 강력한 마기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형체를 갖추었다.

“헬리아! 정신 차려!”

엘라임은 헬리아를 흔들었지만 이미 마법진에 묶여 헬리아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점점 그녀의 빛이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헬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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